시(詩)와 詩魂

꽃 멀미 /이문재

나뭇잎숨결 2021. 6. 18. 13:33

꽃 멀미

- 이문재

봄꽃들은
우선 저질러놓고 보자는 심산 같다
만발한 저 어린것들을
앞세워 놓고 있는 것이다

딸아이 돼지저금통을 깨
외출하는 봄날 아침
안개가 걷혔는가 싶었는데

저런 저기 흰 벚꽃
박물관 입구 큰 벚나무
작심한 듯 꽃을 피워놓고 있었다

희다 못해 눈부시다 못해
화공약품을 뿌린 듯한 오래된 벚나무
흰빛은 모든 빛을 거부해서 흰빛
가까이 가면 내가 표백될 것 같았다

동창 녀석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왼쪽 구두코에는 발자국이 찍혀 있고
윗저고리에는 아직도 삼겹살 냄새

나트륨등 켜져 있는
농업박물관 입구
아무 말 없이 흰 꽃잎 두어 장
새벽 한 시 근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말만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야 임마 내가 이렇게 떳떳한 것은
내가 이 가난을 선택했기 때문이야
아 그 말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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