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이토스에서 삶과 죽음
나는 나 자신을 탐구했다 - 단편101
양 호영
희랍사상사에서 헤라클레이토스가 기여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프쉬케(psyche)와 로고스(logos)라는 낱말에 이전까지 강조되지 않았던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는 자기 시대의 언어와 사유방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서사시의 세계로부터 일탈을 시도했던 자였고, 그의 시도는 실제로 그 이후 사상사의 형성에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 작업에서 가장 혁신적인 구호가 바로 프쉬케와 로고스였다. 특히 인간이 살아있을 때에는 단지 그를 살아있게 만드는 숨결에 불과하고 죽어서는 하데스에서 마치 그림자처럼 생기 없고 눈먼 상태로 살아가는 호메로스적인 프쉬케에 살아있는 인간의 통일적인 자아라는 의미를 강조한 이가 헤라클레이토스였다는 견해는 이미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인간의 자아에 대한 통찰이 전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가 고안해낸 것은 아니었다. 호메로스와 그 사이에는 몇 세기에 걸친 다른 선구자들의 노력이 있었고, 특히 자아의 의미에 대해서 이미 서정시인들은 깊이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전의 사람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 자아를 대표하는 것으로 프쉬케를 강조했으며, 그것을 로고스의 담지자로 묘사했고 앎을 수행하는 역할을 맡겼다는 점이다. 헤라클레이토스 이후에 인간은 더 이상 외부의 폭력적인 힘이나 내면의 불가사의한 능력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존재일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프쉬케는 앎을 통해서 그러한 힘들과 능력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제 프쉬케의 역할이 증대되고 개인의 자아에 대한 의식이 강해지면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를 표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삶이라는 것은 복잡한 표상방식을 요구하는데 이는 삶의 의미뿐만 아니라 삶과 대립적으로 표상되는 죽음의 의미도 함께 밝혀야만 하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프쉬케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도 호메로스와는 다른 개념을 도입할 필요성이 생긴다. 호메로스에서의 죽음은 프쉬케가 지상을 떠나는 것이며, 그것은 프쉬케의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비참하지만 영원히 하데스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호메로스의 인간들은 비록 하데스에서 비참한 삶을 영원히 이어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소멸하는 것만큼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인간들의 가장 본능적인 욕망에 근거하고 있으며 헤라클레이토스 역시 죽음에 대해서 해명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가 하데스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수용하고 있는가, 혹은 천상의 아이테르에 자신의 새로운 하데스를 건설했는가, 아니면 하데스의 프쉬케로 대표되는 개인의 사후생존욕구를 어떤 다른 방식으로 충족시켰는가? 나는 이 글에서 그가 삶과 죽음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죽음을 어떠한 방식으로 표상하고 있는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논의가 진행됨에 따라서 삶과 죽음이 그의 사상 전반에 가장 중심적인 주제라는 점이 드러나기를 바란다.
나아가 삶과 죽음은 그의 우주에 대한 논의와 인간에 대한 논의가 일관성을 갖고 있는지 여부에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그가 언급한 우주에 대한 논의는 흡사 익명적인 원소들의 대립과 기계적인 순환을 보여주는 반면에 인간에 대한 논의는 윤리적인 당위와 훈계의 어조가 지나치게 강하다.1) 그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 두 부분의 연관성을 밝히고 일관된 해석을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각각의 부분에 해당하는 단편들 전체를 정교하게 해석해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 완전히 다룰 수는 없다. 나는 그의 우주에 관한 논의가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적 경험을 틀로 삼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서 그것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밝히는데 도움을 주는 범위에서만 다룰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죽음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나는 우선 그가 만물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서 어떠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그의 우주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다음으로 프쉬케에 대한 호메로스의 견해와 비교하면서 헤라클레이토스의 프쉬케가 어떤 점에서 혁신적이었는지를 간단히 점검할 것이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의미를 고찰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다룰 것이다. 마지막으로 죽음의 문제에서 빠질 수 없는 사후세계의 문제와 윤리적인 행동의 가능성에 대해서 간단히 논의하겠다.
1. 만물의 생성과 소멸
만물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그의 견해는 크게 두 가지의 해석경향을 보여 왔다.2) 하나는 스토아주의자들이 헤라클레이토스의 것으로 여겼던 대화재(ekpyrosis)설에 반대해서 이러한 생성과 소멸이 동시적으로 일어난다는 견해이다. 이것은 편의상 동적 평형모델이라고 부르겠다. 그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우주의 주기적 순환설은 발견되지 않으며, 만물의 끊임없는 변화는 단지 미시적일 뿐 거시적으로는 균형을 유지하면서 고정된 세계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처음으로 주장한 젤러는 헤라클레이토스의 핵심 사상을 만물 유전설로 파악한다. 만물은 끊임없는 변화와 변형의 과정을 거치지만 모든 현상들은 하나의 실재로부터 형성된다. 이 실재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서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자신을 유지하고 머무른다. 불이 바로 이러한 실재에 해당하는데, 단편 90은 이 실재가 만물과 교환되는 과정을 설명한다.3) 다음으로 버넷은 이러한 동적 평형의 모델을 대립자들의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우리가 대립하는 것이라고 파악하는 여러 사물들은 실제로는 하나이며, 이것들의 투쟁은 조화이다. 지혜는 바로 대립하는 것들의 밑에 놓인 통일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통일성을 불에서 발견했는데, 그것이 근원질료의 지위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 중에 있는 통일과 고정성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절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불은 실체의 측면에서는 끊임없는 변형의 과정을 겪게 되지만 그 변화의 구조(structure) 내지는 틀(pattern)은 일정하게 유지된다. 반면에 라인하르트는 대화재설 자체가 헤라클레이토스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논증하는 것을 통해 역으로 그의 기본적인 우주론의 모델이 동시적인 변화의 평형이라고 파악한 듯 하다.
이러한 해석들에 반대해서 스토아의 해석경향을 따르고 있는 칸은 전통적으로 스토아주의자들의 해석이라고 여겨져 왔던 주기적 순환설을 옹호한다. 그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에서 동적 평형설로 설명될 수 있는 구절은 활과 강물의 비유뿐이고 대부분의 단편들은 계절의 변화, 낮과 밤, 바다와 땅, 원소들의 순환 등 이전의 밀레토스 학파, 특히 아낙시만드로스 우주론의 모델인 보상과 처벌의 원리를 따른다고 말한다. 또한 동적평형설을 주장할 경우에는 단편 90에서의 불은 상징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일 수밖에 없고, 그것에 대항하는 물리적인 실재는 발견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두 모델은 변화 속에 깃들어 있는 통일성을 설명하고자 하며, 특히 우주의 적도 개념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대립자들의 투쟁이나 만물 유전설만으로는 만물에 내재해 있는 균형과 불변성을 설명해내기에 부족하다. 변화와 균형의 두 개념은 우주론의 설명원리에서 필수적인 것이고, 분명 적도나 로고스의 개념은 불이 보여주는 변화의 원리와는 구분되는 균형의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만물이 어떠한 법칙도 없이 끊임없이 명멸하기만 한다면 그것을 표현할 어떠한 로고스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아낙시만드로스가 보상과 처벌이라는 정의 개념을 통해서 우주의 균형을 설명해낸 것과 같은 통일적인 우주 균형의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가 제시하는 변화의 여러 양상들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단일한 모델을 찾기가 힘들다. 그에게서 변화란 기본적으로 대립하는 것들 사이에 이루어진다. 하나의 사물이 변화한다면 그것은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서로 대립하는 두 사물이 반드시 균형을 이루고 대립해야만 하는가? 모든 물이 불로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변화원리에 어긋나지 않고 심지어는 일년 중 10달 동안 겨울이 지속되는 곳에서도 그의 원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결국 만물의 균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대립자들 사이의 변화이외에 다른 원리가 요구된다. 따라서 동적 평형모델과 주기적 순환설은 어떤 의미에서 헤라클레이토스의 적도 개념을 아낙시만드로스의 정의 개념과 동일하게 여기고 있다. 둘의 차이는 정의 개념을 동시적인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시간적인 질서로 보느냐에 있을 뿐이다.
동적 평형설에 따르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강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강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균형이 존재하고 있는 증거이다. 하지만 이 비유가 변화 속에서 드러나는 균형을 표현하고자 했는지는 의심스럽다. 뿐만 아니라 이 비유에서 드러나고 있는 대립의 양상은 다른 단편에서 볼 수 있는 대립자들의 대립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이 비유에서는 대립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드러나지 않는다. 좀더 강력한 비유는 활과 리라의 비유인데 분명 이 비유는 대립하고 있는 것들이 균형을 이루는 상태를 구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이 비유도 다른 단편들과 조화를 이루기가 어렵다. 낮과 밤이 마치 활시위와 활대처럼 균형을 이루고 있는 통일된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며, 질병과 건강도 동시에 한사람에게서 공존하지 않는다. 단편 30은 좀 더 일반적인 원리를 진술하는 듯 보인다. “이 세계는... 영원히 살아있는 불(pyr aeizōon)로서 적절한 만큼 타고 적절한 만큼 꺼진다.” 분명 이 다음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 단편 31은 “<땅이> 바다로서 쏟아져 나오고, 땅이 되기 전에 있었던 것과 동일한 비율(logos)로 재어진다”고 말하면서 바다와 땅의 교환이 동일한 양만큼 교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단편들은 어떤 의미로 해석하든 변화의 원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주의 적도(metron)를 로고스(logos)로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등가교환이라는 점만을 의미할 뿐 그 등가교환의 결과로서 생겨난 세계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원리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혹 그런 원리를 함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주 자체의 내재적 원리일 뿐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아낙시만드로스는 서로가 저지른 불의에 대한 보상과 배상을 “시간이 정해주는 순서에 따라(kata tēn tou chronou taxin)”(DK12B1) 서로에게 지불한다는 일견 불필요하게 보이는 구절을 삽입했을 것이다.
만물의 주기적 순환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상황에 놓여있다. 낮과 밤의 주기적 순환이 일정한 원리에 따른다는 언급은 단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낮과 밤이 주기적으로 순환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에 의한 사실일 뿐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원리는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헤라클레이토스가 아낙시만드로스의 정의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으며 이것을 거의 자명한 전제로 사용하고 있다는 가정을 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원리를 설명할 수가 없다. 물론 아낙시만드로스가 표명한 정의개념은 희랍인들의 사유에서 가장 자명한 원리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구태여 명시적으로 거론하지 않더라도 자명하게 전제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그가 이러한 중심원리를 직접적으로는 물론 구상적으로도 서술하지 않았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나는 남아 있는 단편들의 증거에 비추어볼 때, 헤라클레이토스가 우주의 균형원리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가 우주의 균형 원리를 명시적으로 서술하지도 않고 구상적으로 보여주지도 않는다는 것은 이 점을 반증한다. 땅으로 바뀐 바다의 양만큼 다시 바다가 땅으로 바뀌는 것이 동시적인지 아니면 순차적인지의 문제에 그가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그는 일차적인 질료가 우주를 형성해나가는 우주발생론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렇게 형성된 우주가 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그의 이론에 대화재설을 삽입한다고 하더라도 사실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변화의 어떠한 과정에서 모든 것이 불로 바뀌는 순간도 있을 수가 있고 헤라클레이토스 자신도 이러한 가능성을 부인할 필요가 없다.
그가 주목했던 문제는 사람들이 물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게 불이 될 수 있는지 하는 것이다. 도대체 왜 차가운 것이 뜨거워질 수 있는가? 왜 살아있던 것이 죽고 죽은 것으로부터 살아있는 것이 생겨나는가? 그의 관심은 우주의 균형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 자체에 있었다. 이 점이 헤라클레이토스가 그 이전 이오니아 자연학의 정점에 서있는 아낙시만드로스와 차이가 나는 점이다.4) 아낙시만드로스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대립자들의 의미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그가 묻고 있는 것은 만일 그것들이 어딘가 에서부터 나온다고 한다면 그것은 대립하는 것들 중 어느 것의 성격도 지니고 있지 않아야하는데, 과연 그 어딘가는 무엇인가이다.5) 그는 대립자들 자체는 자명하게 가정한 것으로 보이며 대립자들 자체의 본성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만물과 그것이 생겨나는 근원사이의 연관성에 대해서 비로소 처음으로 주목한 이는 아낙시메네스이다. 그는 공기에서부터 다른 사물이 생겨나는 원리를 ‘농축과 희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농축과 희박’이라는 원리를 제시하면서 사실상 대립이라는 문제를 약화시키거나 폐기시켰다. 현상적으로 보이는 대립들은 사실 동일한 근원의 농축과 희박에 불과하며 참된 대립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6) 대립 자체의 의미가 충분한 깊이와 강도를 지니고 사유의 중심에 들어온 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공적이다.
그렇다면 사물들이 대립한다는 말이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어떤 의미인가? 그의 단편들은 인간 경험의 한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경험이 파악하지 못한 만물의 참된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이 보기에 특정한 가치를 지니는 하나의 사물이 다른 동물들의 관점에서는 그와 대립하는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바닷물(61), 진흙탕(13), 볏짚(9)은 인간들에게는 불필요하거나 심지어는 해로운 것이지만 물고기와 돼지, 당나귀에게는 공기나 맑은 물, 금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다. 우리가 사물에 부여하는 가치는 본래 그 사물과 떼어낼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이 누구에 의해 어떠한 맥락에서 이해되는가에 따라서 상이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사물과 가치가 분리될 수 있다는 깨달음은 이제 가치가 부여되는 조건에 대한 성찰로 이끈다. 인간이 부여하는 가치들은 서로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고 따라서 대립적인 성격을 지닌다. 정의롭지 못한 행위나 상황이 없다면 사람들은 결코 정의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23). 또한 질병과 굶주림, 피로를 모르고 지낸다면 자신의 건강과 포만, 휴식도 달콤하고 좋은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111). 인간이 사물을 평가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이러한 대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의 가치가 이처럼 대립적인 성격을 지니며, 한 사물에 상이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까닭은 비단 인간의 습관이나 관습, 혹은 인간의 본성에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사물 자체가 그러한 대립적인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대립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의 사물은 그 자체로도 상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축융기의 길은 곧바르고 또한 굽었는데,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다(59)” 실을 곧게 만들기 위해서는 축융기가 그 실을 둥글게 감아야만 한다. 축융기는 실을 곧게 만드는 동시에 구부린다. 위로 향해 있는 길은 아래로도 향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위로도 향해 있을 수 없다(60). 이것은 단지 임의로 부여된 대립적인 성격이 아니다. 대립자 중 한쪽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쪽이 있어야만 한다.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 필연적으로 대립하는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더 잘 보여주는 예는 원위의 점이다. 원을 그릴 때는 어떠한 점에서 출발하더라도 그 점으로 되돌아와야만 원이 그려질 수 있다(48). 출발점과 끝나는 점이 다른 것은 이미 원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7) 대립하는 것들은 서로 무관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 대립은 반드시 서로를 요구하는 특정한 관계방식이며 이 때문에 뜨거운 것이 되는 것은 축축한 것이 아니라 차가운 것이다(126).
사물의 대립관계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것들 중 하나가 소멸하고 다른 하나가 생성하게 될 때이다. 이것은 마치 활줄이 끊어져서 활대가 펴지는 순간에 비로소 활은 평화의 상태가 아니라 활줄과 활대의 투쟁 상태였다는 점이 분명해지는 것과 같다. 이때 비로소 대립상태가 깨어지며 하나가 승리하고 하나가 패배하는 과정을 겪는다. 이 과정을 단편 36은 죽음과 삶이라고 말한다. “프쉬케들에게 죽음은 물이 되는 것이고, 물에게 죽음은 흙이 되는 것이다. 흙에서 물이 생겨나고, 물에서 프쉬케가 생겨난다.”8) 그는 대립하는 것들의 대립의 본질을 삶과 죽음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왜 그는 대립의 본질을 삶과 죽음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용어로 표현하고 있는가? 삶과 죽음은 다른 어떤 사물들보다도 프쉬케를 통해서 잘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이제 프쉬케의 삶과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검토해보아야 한다.
2. 호메로스에서의 프쉬케9)
헤라클레이토스의 프쉬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프쉬케에 대해서 당시의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논의에 도움을 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호메로스에게는 인간의 통일된 자아를 가리키는 표현이 보이지 않는다. 이때의 통일된 자아란 거칠게는 소크라테스 이후 철학사에 받아들여진 의식, 감정, 인식, 도덕적 결정과 같은 인간 활동의 주체로서 자아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호메로스의 인간들은 인간의 이러한 활동들이 자주 외부의 신적인 힘에서 기인한다고 여겼으며, 인간의 활동들을 통제하는 단일한 원천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한 활동들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는 thymos, kēr, ētor, phrēn, noos 등이고, 이 곳으로부터 인간의 내면에 잠재해있는 힘이 드러나거나 아니면 신이 인간에게 개입한다.10) 이와는 다르게 프쉬케는 살아있는 인간의 활동을 유발하는 신체의 장소를 의미하지 않았다. 프쉬케의 기능은 분명히 밝혀지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살아있는 인간에게 그것의 유일한 활동은 신체를 떠나는 것뿐이었다. 마치 우리말의 “목숨”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이 죽음에 직면하는 순간에만 의미를 갖는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살아있는 인간에게 프쉬케의 역할은 그 인간을 단지 살아있게 해주는 역할 뿐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프쉬케의 역할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것이 하데스에 가서 힘없고 눈먼 상태로 떠돌아다닐 때이다. 하데스에서 그것은 마치 그림자와 같은 상태로 살아간다.11) 중요한 것은 이 때에 조차 그것은 살아있다는 점이다. 프쉬케의 어원이 ‘숨’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말 그대로 프쉬케 자체는 죽을 수가 없다. 호메로스의 인간들에게 죽음이란 하데스에서 프쉬케의 삶을 통해서 지속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자신의 프쉬케가 그리도 비참한 상태로 살아가더라도 그것이 완전히 소멸하여버리는 것만은 바라지 않았다. 프쉬케는 다만 소마와 결합하여 태양아래에서 살거나 아니면 소마 없이 하데스에서 살거나 둘 중 하나의 가능성만을 지닌다.
이처럼 호메로스의 프쉬케는 한 개인에 속해있으면서 그를 살아있게 만들고 사후의 삶을 보증해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가 불멸하는 프쉬케를 통해서 사후에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해서 그가 불멸하는 신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프쉬케의 이러한 불멸성은 불사자인 신들이 누리는 영원한 생명과는 달리 인간이 지닌 가사적인 성격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호메로스의 인간들은 강렬한 현실감각을 지닌 자들이었고, 하데스는 현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의 지배자는 누스나 튀모스나 프렌이고, 또한 그것들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신들이다. 호메로스의 신들은 프쉬케를 지니지 않는다.12) 그들은 단지 살아있기만 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이나 자연물들을 지배하고 움직이도록 만들며 그것을 통해 현실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프쉬케는 현실에서의 지배자가 아니다. 하물며 현실의 그림자인 하데스에서는 단지 고통만을 느낄 수 있고 인간을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게 하는 어떠한 일도 할 수가 없다. 프쉬케는 단지 살아있을 뿐이다.
살아있는 동안에 인간은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그에게는 여러 가지 하고자 하는 일들, 해야만 할 일들, 피하고 싶은 일들이 닥쳐오며, 그에게 가장 큰 관심거리는 그러한 일들에 잘 대처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들이 닥쳐올 때 호메로스의 인간들은 욕망과 의무, 공포를 느꼈을 것이며, 이러한 감각들이 신체의 변화를 수반하여 얼굴이 달아오른다거나 호흡이 가빠진다거나 미친 듯이 날뛰는 행동으로 표출된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난 이러한 행동들은 그들에게 낯선 것으로 여겨지며, 자신이 알 수 없고 어찌할 수도 없는 무언가에 의해서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13) 이것은 심지어 인식 활동을 수행하고 있을 때조차 마찬가지이다. 무언가를 깨닫게 되는 순간에도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신비로운 누스에 의한 것이거나 아니면 어떤 신의 힘에 의해서가 가능하다. 호메로스의 인간들이 자신들 안에 있는 낯선 것들을 외부의 낯선 힘들로 투사시킬 때, 그들은 반대로 외부의 낯선 힘들이 자신들을 부추기며 복종하기를 명한다고 말한다.14) 호메로스의 인간에게 통일된 자아를 가리키는 표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들이 “나”라는 의식을 지니지 않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처럼 그들이 자신의 삶을 통일된 것으로 느낄 수가 없었고 그 삶 자체를 한마디로 표상할 수 있는 사유나 언어를 지니지 못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삶을 그 자체로 표상한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행하는 여러 활동들을 하나의 의미로 묶어서 파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살아있다’는 말이 그들의 이런 모든 활동들을 하나로 묶어서 표현해 줄 정도로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3.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앎과 프쉬케의 역할
나는 먼저 다음의 단편을 통해 헤라클레이토스에서의 프쉬케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소프로네인(sōphronein)은 가장 큰 덕(aretē)이다. 참을 말하는 것과 본성(physis)에 귀기울여가며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지혜이다.”(B112) ‘소프로네인’으로 음역한 말은 지혜(sophiē)에 대한 상고시대(Archaic age)의 개념이다. 이것은 현인들의 말이나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정신의 건강한 상태(sao-phronein)를 유지하는 것으로 해석된다.15) 그것은 충동과 격정에서 벗어나고 행복을 조절하여 정신을 건강하고 무사하게 유지하는 것이 삶에 유용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소프로네인을 가장 뛰어난 덕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호메로스 세계 이후의 희랍 전통적인 관념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소프로네인을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지혜와 관련시킨다. 단편의 두 번째 구절에서 그는 ‘소프로네인’을 ‘본성에 따라(kata physin)’ 말하고 행위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표현은 단편1에서 그가 “각각의 것을 본성에 따라 구분하고 그것이 어떠한지를 보이면서 상술하는 그러한 말과 일들”을 연상시킨다. 그에게서 지혜는 인간에게 이로움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어떤 것이 아니라 각각의 것을 본성에 따라서 말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 구절은 그에게서 이미 지혜가 삶의 유용성이란 관점을 넘어서 사물 자체에 대한 이해의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지혜를 획득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덕이다.
‘덕’이라고 번역된 aretē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구현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이 말은 호메로스에서 도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이와 관련된 말인 agathos를 보았을 때, 호메로스에서 어떤 한 인간이 agathos하다고 말한다면 그가 도덕상으로 비난할 만한 여지가 없다든가, 혹은 마음이 선량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레떼를 지녔다는 것은 자신이 속한 전사 계급의 가치관을 잘 따르면서 또한 그것을 능가함으로서 자신의 공동체로부터 공적인 영예(time)를 획득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16) 다시 말해 그것은 전사 계급의 일원으로서 훌륭한 군인의 자질인 힘과 기술을 탁월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가장 큰 덕은 ‘소프로네인’이다.17) 그는 “자신을 아는 것(ginōskein)과 사려하는 것(sōphronein)이 모든 인간들에게 부여되어 있다”(B116)18)고 말한다. 소프로네인은 전쟁에서 뛰어난 기량과 용기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자신을 아는 것’과 관련된다. 또한 소프로네인은 특정한 계급에게 속해있는 덕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는 단편 전체에 두루 걸쳐서 ‘공통의 로고스(B2)’를 강조하고 있으며, 나아가 이러한 공통성은 한 인간이나 인간 전체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만물에조차 적용되고 있다.
이제 단편인 B107을 살펴보면 앎과 프쉬케의 관계가 드러난다. “눈과 귀는 사람들에게 나쁜 증인들이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barbarous) 프쉬케를 가진 한에서.”19) 고대의 주석가들은 이 단편이 감각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전하고 있지만20), 다른 단편들에서는 그러한 의미를 지닌 구절들을 발견할 수 없다.21) 오히려 칸이 언급했듯 이 단편은 현존하는 문헌들 중에서 프쉬케에 ‘이성적 사유의 힘’을 부여한 최초의 언급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22) 그렇다면 ‘이성적 사유의 힘’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 단편 해석의 핵심이자 가장 혁신적인 점은 “barbaros”23)를 프쉬케의 성격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먼저 “증인들(martyres)”이라는 말이 환기시키고 있는 법정의 상황을 떠올려보자.24) 증인으로 불려나온 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었던 것을 배심원들 앞에서 그대로 증언한다. 보고 들은 것을 감추거나 거짓을 꾸며내는 자들은 나쁜 증인이다. 하지만 증인들이 보고 들은 것들을 그대로 말하더라도 배심원들 중에서 이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은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쁜” 것은 증인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들이 증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언어, 즉 로고스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주지하듯이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그의 사상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여기에서 로고스에 대한 별도의 논의를 전개할 수는 없지만 헤라클레이토스 이전에 ‘로고스’라는 말이 사용된 용례에 관한 누스바움의 설명을 잠시 살펴보는 것은 논의에 도움을 줄 것이다.25) ‘로고스’라는 말은 헤라클레이토스 당시까지의 초기 작가들에게 그리 자주 사용되지 않은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반적인 언어나 말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이 사용될 때는 언제나 이야기, 혹은 특정한 인물이 말한 연결된 설명을 의미했다. 게다가 이 설명은 거짓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혹은 거짓이 아니더라도 단지 이야기만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 또한 그 내용의 측면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여러 어구(epos)들의 결합물이라는 측면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처럼 로고스는 프쉬케와 마찬가지로 결여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부적절한 구조를 갖게 되면서 거짓을 낳았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이 원래는 하나의 참되고 통일된 구조를 지녀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된다.26)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로고스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것의 존재론적 지위가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그가 말하는 로고스는 하나의 참되고 통일된 구조를 갖고 있으며, 나아가 그 로고스는 참되고 통일된 세계 자체를 의미한다. “만물이 이 로고스에 의해서 생긴다”(B1)는 구절은 그가 말하는 로고스가 단지 그의 말 이상의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단편 107에서 보면 ‘로고스’는 이 단편에 직접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barbaros"라는 말은 로고스의 존재를 충분히 함축할 수 있다. 단편은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프쉬케가 있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다.27)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프쉬케가 로고스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되고 통일된 세계 자체를 의미하는 로고스를 프쉬케가 지닐 수 있다면 프쉬케가 앎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자명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프쉬케가 로고스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헤라클레이토스 이후의 심리적인 용어로 해석한다면 ‘이성적 사유의 힘’정도가 될 수 있다. 분명 이 단편은 프쉬케에 앎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했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의 언어를 통해서는 ‘이성적 사유의 힘’이라는 말을 표현할 수가 없을뿐더러 이러한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다. 또한 프쉬케의 존재방식이 우리에게 익숙한 심리적 용어들로 묘사되는 단편은 더 이상 찾기 힘들다.28) 오히려 프쉬케를 묘사하고 있는 다른 단편들은 그것의 상태를 심리적 용어가 아닌 물리적인 용어들로 묘사하고 있다. 이후에 다룰 단편 45와 115은 프쉬케를 로고스와 함께 등장시키지만 거기에서도 프쉬케는 물리적인 어떤 것으로 묘사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프쉬케의 이 물리적 상태를 불이라고 여긴다. 그것은 프쉬케가 불과 원소적인 친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29) 특히 불이 로고스와 유사한 이론적 지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몇몇 단편들을 통해서 보건대 프쉬케 자체를 불과 동일시하는 구절은 발견할 수가 없다. 단편 117은 프쉬케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사람은 취했을 때,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므로 비틀거리며 철들지 않은 아이에게 이끌려 다닌다. 젖은 영혼을 지녔으므로.”(B117) 이 단편은 특별한 설명이 없이도 경험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 가지 특기할 점은 이 단편이 묘사하는 사람의 분별없음은 그 프쉬케의 젖은 상태에 기인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프쉬케의 죽음을 묘사하는 단편 36이 그것의 죽음을 물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젖은 프쉬케’라고 해도 그것은 ‘물’이 아니라 ‘프쉬케’이다.30) 물의 성격을 지닐 수 있는 프쉬케를 불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기 힘들다. 오히려 전통적으로 이오니아 사상에서 프쉬케는 공기와 유사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프쉬케의 어원 자체가 ‘숨’이나 ‘바람’을 의미한다. 또한 아낙시메네스는 프쉬케를 공기와 동일시하면서 “공기인 우리의 영혼(psychē)이 우리들을 지탱해주는 것처럼, 바람(pneuma)과 공기(aēr)가 세계 전체를 또한 감싸고 있다”(DK13B2)고 말한다. 게다가 헤라클레이토스가 영혼을 공기라고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구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전승들은 ‘증발(anathymiasis)이론’을 그의 것으로 돌리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보았을 때 그가 프쉬케를 공기와 유사한 것으로 보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더 설득력 있다.31)
하지만 프쉬케 자체가 불이 아니라 일종의 공기라고 하더라도 그것의 인식활동은 분명 불과 관련해서 표상된다. 위에 인용한 단편 117은 프쉬케가 젖었을 때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이에 반해 프쉬케가 가장 왕성하게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을 때는 ‘빛’으로 묘사된다.32) “빛은 건조한 프쉬케(augē xērē psychē), 가장 현명하고 가장 뛰어난.”(B118)33) 따라서 프쉬케의 인식활동은 불과의 친화성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프쉬케에 앎의 힘을 부여했지만 그것에 대한 표상은 아직 물질적인 것과 혼재되어 있는 상태이다. 비록 그가 거의 의도적으로 프쉬케를 특정한 물질적인 원소와 동일시하지 않으려 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상방식은 물질적인 표상방식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물질적인 것과 분리된 정신적인 영역을 아직 따로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에게서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에게서 중요한 구분은 인간과 자연이다. 어떤 부분에서 그는 자연의 영역을 설명하는 언어로 인간의 영역을 설명한다. 그는 앎을 설명할 때 프쉬케의 물리적 상태를 통해서 설명한다. 하지만 그는 자연의 변화원리를 설명하면서 삶과 죽음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용어로 사용한다. 인간과 자연을 동일한 언어로 말한다는 점에서 그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세계를 설정하고 있다.
지금까지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프쉬케가 인식활동이라는 역할을 부여받으면서 이전과는 두드러진 중요성을 부여받았다는 점을 보아왔다. 호메로스의 프쉬케가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적극적인 역할도 하지 않는 반면에 헤라클레이토스의 프쉬케는 살아 있는 인간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인 앎을 수행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하지만 그가 비단 살아있는 프쉬케에 관해서만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미 호메로스에서부터 프쉬케는 죽음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말이었다. 단편 36은 분명히 프쉬케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말은 프쉬케와는 대립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관련성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것의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나아가 우리는 죽음 자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4. 삶과 죽음의 동일성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몇몇 단편들에서 그는 하데스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을 표현하는 듯한 구절을 사용하기도 한다. 특히 단편 9834)과 6335)은 ‘하데스’를 직접 언급하거나 그것을 암시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비록 그가 하데스에 대한 믿음이 담겨있는 전통적인 어구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당시 사람들의 믿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확정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구절들은 당시 사람들의 관념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인용된 것이거나 아니면 그가 생각했던 하데스는 천상의 어디쯤에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그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하데스에 대한 당시 대중들의 믿음이 그의 사상전반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지는 않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
당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반영되고 있는 또 다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송장들은 똥보다 더 내다버릴 만한 것이다.”(B96) 시체를 보살피는 일은 죽음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또 다른 일반적인 관념을 보여준다. “그리스인들의 무덤에 있는 부장품들로 판단해보면, 신석기 시대이래 에게 해 지역 주민들은 인간이 음식과 마실 것, 의복을 필요로 하고, 시중을 받고 여흥을 즐기기를 바라는 욕구가 죽음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들은 살아있던 사람들의 시체와 그 사람들의 프쉬케를 구분하지 못했다. 죽은 자들의 시체와 그들의 프쉬케를 구분해낸 것은 호메로스의 공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일단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특히 아티카 지방에서는 죽은 자들에 대한 장례절차가 지극히 사치스러웠기 때문에 솔론은 이를 통제하는 법령을 제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36) 이런 상황은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무의식속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누구도 소고기와 인육을 똑같은 고기로 여기지는 않는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보았을 때 헤라클레이토스의 발언은 가히 의도적인 모욕이라고 볼 수 있다.37)
그는 당시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사후에 대한 믿음이나 시신에 대한 공경과는 사뭇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사람들이 죽었을 때 기대하지도 생각지도 않은 것들이 그들을 기다린다”(B27)고 말했을 때, 분명 당시의 사람들이 죽음이후에 기대하고 있었던 생존의 희망을 비난하고자 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하데스에 대한 믿음을 갖고 시체들을 섬기는 까닭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후에도 살고자 하는 희망 때문에 극단적으로는 미이라까지 만들어 육신의 지속성을 보존하고자 하며 영혼의 지속성을 보장받기 위해서 하데스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낸다. 반면에 헤라클레이토스는 죽음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지 말라고 충고한다. 삶과 죽음은 동일한 것이다. “동일한 것...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깨어있는 것과 잠들어 있는 것, 젊은 것과 늙은 것. 왜냐하면 이것들은 변화하면(metapesonta) 저것들이고, 저것들은 다시 변화하면 이것들이기 때문에.”(B88)38) 이 단편의 해석을 어렵게 하는 것은 동일한 것으로 제시된 세 가지 대립 쌍 중에서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서는 깨어있는 것과 잠들어 있는 것만이 가역적이라는 점이다. 살아 있는 것이 죽을 수는 있지만 죽은 것이 다시 살아 날 수는 없고, 마찬가지로 늙은 것이 다시 젊어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일상적인 경험에서는 가역적일 수 없는 것들을 왜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으며 어떻게 그것들을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일상적으로는 사후의 동일성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는 사후세계에 대한 초험적인 전제가 필요하다. 죽음 이후의 동일성에 대해서 제시할 수 있는 해답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삶과 죽음 이후에 개체 차원의 어떤 물리적 심리적인 동일성이 유지된다. 둘째, 생식의 과정을 통해서 개체 차원을 넘어선 종의 동일성이 순환적으로 보존된다. 셋째, 종적인 동일성은 유지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으로는 규칙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거시적인 변화는 일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중 첫 번째 동일성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하데스개념을 이외에도 퓌타고라스적인 윤회의 사상을 거론할 수가 있다. 퓌타고라스는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윤회를 말한다. 죽음은 하나의 프쉬케가 헌 육신을 버리고 새로운 육신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죽지 않는 프쉬케와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이라는 이원론을 전제로 한다. 프쉬케의 입장에서 죽음이란 새로운 탄생과 같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죽음을 다른 것의 삶으로 본다는 점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퓌타고라스적인 영혼 윤회사상의 극단적인 일반화형태로 여겨질 수도 있다.39)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프쉬케조차도 죽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앞서 보았듯 그것의 죽음은 물이 되는 것이다. 프쉬케가 죽고 물이 생겨난다면 지금 생겨난 물과 이전의 프쉬케가 어떻게 동일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가? 만일 윤회가 성립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한 프쉬케가 계속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윤회일 수는 없다.
반면에 그는 개체적인 차원을 넘어서 종적인 동일성이 보존된다는 점은 인정한 것 같다. “태어나면(genomenoi) 그들은 살고자 하면서 또한 몫(morous)을 지니고자 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뒤에 남겨두어서 몫(morous)이 생겨나도록 한다(genesthai).”(B20)40) 이 단편은 ‘태어나면’과 ‘생겨나도록 한다’를 동일한 gignesthai동사를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는 순환적 구조를 갖는다. 한 개체로서의 인간은 그 두 사건 사이를 살아간다. 그들이 ‘산다’라는 말은 ‘몫을 갖는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몫’을 의미하는 moros는 호메로스 이래로 ‘갑작스러운 죽음’, 혹은 ‘할당받은 (삶의) 몫’이라는 뜻을 지닌다.41) 단편 25와 관련시켜볼 때, 이 moros는 개인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전체기간, 혹은 그 기간을 평가했을 때 내려지는 가치나 양을 의미하는 moira와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개체로서의 인간이 사는 것은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삶의 몫만큼을 받는 것이고, 역으로 그 몫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살고자 하는 것의 의미이다. 하지만 그 몫은 개인이 죽었을 때에만 완전한 의미에서 확인 될 수 있고 가치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그는 자손을 통해서 그 몫을 확인하고 그 가치를 이어가고자 하는데, 바로 이것이 새로운 몫을 생겨나게 한다. 이 단편은 자신의 가사성을 자식을 통해서 극복해나가고자 하는 인간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마치 무수한 물들이 흘러가며 서로의 자리를 바꾸지만 그것들이 이루고 있는 하나의 동일한 강은 계속적으로 유지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인간의 운명을 비난하고자 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삶과 죽음의 동일성에 관한 적절한 모델로서 제시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동일한 종의 순환적 보존을 언급하는 단편은 그에게서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게다가 이 단편이 말하는 자손을 통한 삶의 연속성은 언어유희에 가깝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이 삶의 몫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곧 죽음을 재촉하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단편은 종적인 동일성의 유지와는 다르게 삶과 죽음의 본질적인 관련성에 대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가 삶과 죽음의 동일성에 대해서 생각한 모델은 거시적인 변화의 규칙성인가? 이것은 마치 소들이 풀을 뜯어먹고 다시 그 소들이 죽어서 땅에 묻히면 새로운 풀이 자라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단편 31에서 이와 유사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바다는 땅으로 변화하고 동일한 양만큼의 땅은 다시 바다로 변화된다. 바다가 땅이 되었을 때 자신의 성격은 완전히 죽어버리지만 결국 다시 자신을 되돌아오면서 삶을 회복한다. 이 때 바다와 땅이 서로 배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것으로 다시 돌아오는 까닭은 그것들이 원래 동일한 어떤 것, 즉 불이 변전을 통해서 드러난 다른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즉 만물의 변화 속에서도 변화하지 않고 유지되는 어떤 실재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변화 중에 있는 것들을 하나의 것으로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만물의 차이는 한갓 가상에 불과하며 결국 그것은 하나의 것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아마도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생각을 했을 것이며, 그것은 그의 단편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에 비추어보면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결국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현재와 동일한 존재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다. 핀다로스는 유가족들을 위로할 때 행복한 사후 세계를 묘사하면서 천국에는 말들과 장기판이 있다고 말한다.42) 그들은 죽은 후에도 현실과 동일한 세상이 있으며, 그 속에서 현실과 동일한 삶을 계속 유지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단지 그들이 생각지도 기대하지도 않은 것뿐이다.
만일 그가 사후동일성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그가 답변하고자 했다면 분명 이것이 그의 답변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단편 62를 보게 되면 이와는 사뭇 다른 어조를 찾을 수 있다. 이 단편은 그의 문체가 지닌 특징인 간결성과 긴장성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단편이다. “불사자들(athanatoi)은 가사자들(thnētoi)이고, 가사자들은 불사자들이다. 저들의 죽음을 살고(zw=ntej to\n e)kei/nwn qa/naton), 저들의 삶을 죽으니까.”(B62) 이 단편의 해석을 까다롭게 하는 ‘불사자들’과 ‘가사자들’의 의미는 이후에 설명하도록 하자.43) 우선 다루어야 할 것은 ‘저들의 죽음을 살고 저들의 삶을 죽는다’라는 구절의 의미이다. 분명 이 구절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역설적으로 들리는 만큼 당시의 희랍인들에게도 역설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 까닭은 알다시피 ‘산다’라는 동사에 따라오는 목적어가 동사와 대립하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산다’와 호응하는 목적어인 ‘삶’은 ‘산다’와 동족목적어라고 불린다. 이 구절의 해석을 위한 단초로서 잠시 희랍어에서 목적어의 의미를 살펴보자. 목적어의 용법을 설명할 때 내적목적어(object effected), 혹은 동족목적어와 외적목적어(object affected)를 구분하는 방식을 사용할 수 있다.44) 편의상 목적어를 이렇게 둘로 구분하는 까닭은 외적 목적어로 분류할 수 없는 목적어의 다른 용법이 존재하고, 더욱이 그 용법들을 다른 격들이나 부사와 완전히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희랍어의 목적어는 원래 부사라고 부를 수 있는 넓은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며, 시간이 지날 수록 부사적인 의미들이 분리되어 나오면서 외적 목적어가 목적어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제 다시 위의 구절을 살펴보자. ‘삶’이란 것은 ‘살다’라는 동작이나 활동을 실체처럼 여겨서 표상한 것이다. 반면에 ‘삶을 살다’에서 ‘삶’은 ‘살다’라는 동사의 의미를 그대로 담고 있으면서도 그 동작이 미치고 있는 시간, 공간, 성질의 범위를 제한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불사자들이 산다는 것은 가사자들에게 죽음이라고 여겨지는 때에 바로 그러한 곳에서 사는 것이다. 죽음은 삶 이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며 살던 곳과 다른 어떤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이 구절을 해석하기 위한 또 다른 단초를 보자.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는 ‘삶(bios)’과 ‘죽음(thanatos)’을 하나의 상태로 보지 않고 어떤 활동의 과정이나 사건으로 보았다.45) 그들에게 죽어있는 상태는 시체들의 상태이지 프쉬케의 상태가 아니다. 반면에 살아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은 zoē, 혹은 zōē이고, bios는 ‘살게 되다’, 혹은 ‘살아남다’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러한 언어의 사용은 헤라클레이토스보다 반세기 가량 늦게 활동을 했던 헤로도토스에게서도 증명된다.46) 이는 앞서 말했듯이 호메로스에서 프쉬케가 인간의 살아있는 자아를 나타내지 않는 것은 결국 ‘살아있는 상태’를 일반적으로 표상하는 사유가 아직 완전히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삶은 단지 일련의 살아있는 활동들을 의미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용법이 여전히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도 남아 있다고 한다면 ‘저들의 죽음을 산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히 드러난다. 한 존재가 죽는 사건, 혹은 그러한 활동은 다른 존재가 ‘살게 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 사건이나 활동에서 삶과 죽음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으며 나아가 같은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들은 하나의 행위에 대한 두 가지 의미를 표현한다.
이제 ‘불사자들’과 ‘가사자들’이 서로의 죽음을 산다는 말을 해명할 수 있다. ‘불사자들’은 전통적으로 신들에게 붙여지는 이름이며, 불사자와 가사자의 구분이 전통적인 용어로는 인간과 신과 구분이다. 이러한 신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은 고대 세계에서는 가장 큰 불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신들은 더 이상 호메로스 세계의 신들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의 질서 밖에서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신들이 아니라 우주 안에서 인간들과 동일한 법칙에 따라서 움직인다.47) 다시 말해 인간과 신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에서 공존하는 존재들이다. 단편 88을 보면 삶과 죽음의 동일성에 대한 근거는 ‘이것들이 변화하면 저것들이고, 저것들이 변화하면 이것들’이라는 점이다. 이 때 ‘변화하다’라고 번역한 희랍어의 metapesonta는 주로 갑작스러운 변화를 나타내곤 한다.48) 삶과 죽음의 동일성은 갑작스러운 삶과 죽음의 교환과정에서 드러나며 그 순간 두 행위가 결국 동일한 것이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이는 삶과 죽음이 가장 극명하게 대립되는 전쟁의 순간에 얻게 되는 깨달음이다. 전쟁에서의 영웅적인 행위는 가사자로서의 인간을 불사의 신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래서 그 순간에 그는 ‘아폴론’이나 ‘아레스’가 된다.49) 그들은 가사자들이지만 그 순간에는 가사적인 삶을 죽고 불사적인 삶을 산다. 반대로 그러한 용기를 발휘하지 못하고 도망가는 자들은 불사자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이며 그것은 곧 불사자의 죽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항상 이러한 대립적인 가능성 중에서 한 가지를 구현하면서 살아간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자신의 말과 우주의 로고스를 구분했을 때, 그리고 대중들의 경험과 그 속에 놓인 참된 세계의 모습을 나누었을 때, 그에게서 현상을 넘어선 초월적인 세계의 단초가 발견된다. 하지만 그는 그 단초를 발견함과 동시에 그것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원리도 제시한다. 그의 결론은 생성과 소멸을 한갓 그릇된 의견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한 파르메니데스와는 다른 길을 간다. 그는 죽음을 단지 삶의 상태 변화라고 말하지 않는다. 죽음은 추방해야만 할 한갓 가상이 아니라 삶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현실은 삶의 한 층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삶이 동시에 공존하는 구조를 갖는다. 원에서 처음과 끝은 공통이다라는 말은 과정중의 처음과 끝이 동일하다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지만 처음과 끝이 한자리에 공존하고 있다는 의미로 읽힐 수도 있다. 죽음과 삶의 동일성, 대립자들이 공존 속에서 통일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것, 이것이 “만물의 아버지이자 왕”인 전쟁의 의미이다. 파르메니데스 이후의 철학사는 삶을 중심으로 죽음이라는 가상을 추방하고자 했고, 모순율로 대표되는 대립자 공존 배제의 원리를 따라서 진행되었다. 이것은 헤라클레이토스가 애써 하나로 결합시켰던 두 세계를 다시 분리시켜 두 세계이론으로 진행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5. 인간의 사후보상과 윤리적 당위성의 기원
이제 남아 있는 문제를 살펴보면서 글을 끝맺고자. 만일 그가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며 죽음과 대비시키는 바로 그것이 죽음과 더불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고 한다면 죽음은 이미 삶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며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개체의 사후생존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물학적 죽음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죽음이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육신은 결국 물리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그 때 모든 프쉬케들이 동일한 운명을 맞이한다면 뛰어난 자나 열등한 자나 물리적 죽음 이후에는 차이가 없을 것이 아닌가?
개인의 사후 보상에 관한 언급으로 보여지는 단편 25는 다음과 말한다. “더 큰 죽음(moroi)은 더 큰 몫(moiras)을 받는다.” 더 큰 죽음(moros)이란 앞서 말했듯이 죽음에 의해서 결정되는 한 인간의 삶의 가치를 의미한다. ‘큰’ 가치를 지닌 삶을 산 자가 받는 더 ‘큰’ 몫이 무엇인지는 나머지 단편을 통해서 추측해 볼 수 있다. 프쉬케와 로고스를 관련시키고 있는 중요한 단편 하나를 살펴보자. “그대는 가면서 모든 길을 다 밟아보아도 프쉬케의 한계(peirata)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도 깊은 로고스(bathyn logon)를 가지고 있다.”(B45) 여기에서 ‘깊은(bathyn)’이라는 표현을 쓴 점에 주목해보면 프쉬케가 어떤 외연, 특히 깊이를 지닌 것으로 경험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외연을 지닌 것으로의 프쉬케를 말하는 또 다른 단편은 그것이 “스스로를 자라게 하는 로고스”(B115)를 가진 것으로 말한다.50) 이 두 단편에 비추어 보았을 때, 프쉬케는 깊이로서 경험되는 어떤 외연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확장될 수 있는 성질을 갖는다. 심리적인 용어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알게 되며 앎이 증가할 수록 그만큼 자신의 영혼이 넓고 깊어지게 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헤라클레이토스는 앎을 물질적인 친화성으로 설명했으므로 그의 용어를 빌어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떤 로고스와 마주친다는 것은 그만큼의 로고스와 같아지는 것이다. 프쉬케가 자라나면 자라나는 만큼 그것은 만물에 깃들어 있는 그만큼의 로고스와 마주친다. 나아가 그의 프쉬케가 자라고 자라다보면 결국 “하고자 하는 만큼 다스리고 모든 것을 충족시키고 그러고도 남음이 있는”(B114) 하나의 신적인 것만큼 자라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프쉬케는 그것이 자라난 양만큼의 로고스와 같아지게 될 것이고, 그 성장에는 한계가 없다. 결국 죽음을 맞게 되었을 때 그의 프쉬케의 양이 그의 죽음의 가치를 결정한다면, 그것이 받는 몫이라는 것은 그만큼의 로고스와 같아지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가 말하듯이 “현자는 모든 땅을 다 밟을 수 있다. 온 우주가 훌륭한 프쉬케에게는 고향이니까.”(DK68B247)
앞서 말했듯 헤라클레이토스는 현실과는 다른 사후세계를 설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후세계에서의 생존을 통한 사후보상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단편 25가 사후세계에 관한 언급이라면 사후에 프쉬케가 그만큼의 로고스, 혹은 ‘불’적인 것으로 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나아가 나는 이 단편이 단지 사후의 보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보상 또한 말하고 있다고 보고 싶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지속적으로 죽음을 겪고 있으며, 그 죽음을 통한 불의 삶만이 그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다. 프쉬케가 “젖게 되는 것은 즐거움이다.”(B77) 하지만 프쉬케의 보상은 즐거움이 아니다. 뛰어난 프쉬케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은 자신과 동종의 것, 즉 불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고 그것 이상은 아니다.
프쉬케의 사후 보상에 대한 문제는 어떻게 프쉬케에게 윤리적인 명령을 할 수가 있는가라는 물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것은 프쉬케가 다른 사물들과는 다른 존재임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프쉬케가 물의 삶을 살거나 불의 삶을 살거나 물리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프쉬케가 반드시 불의 삶을 살 필요는 없다. 불은 또한 물이 되고 물도 불이 된다. 이러한 거시적인 우주의 순환 속에서 볼 때 각각의 단계는 다른 단계에 비해 더 우월함을 지니지 않는다. 반면에 우주론에 가치가 부여되었을 때, 물리적인 원소들은 더 이상 가치중립적이 아니다. 그의 우주론에 가치가 부여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프쉬케의 존재방식이 여타의 다른 것들과 차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 분명한 언급을 하지 않으며, 바로 이 점이 그의 윤리학과 우주론이 일관되지 못한 인상을 줄 수 있다. 그의 단편이 이 점을 분명히 언급하지 않는 한 나는 단지 몇 가지 추측에 그칠 수밖에 없다. 우선 프쉬케가 앎의 능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앎이 우주적 불과 동화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다른 것들과 두드러진 차이점을 지닌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다. 그가 “자신을 아는 것(ginōskein)과 사려하는 것(sōphronein)이 모든 인간들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말할 때, 그는 이것이 프쉬케의 본성이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인간이 인간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을 아는 것”과 “사려하는 것”이 그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가 계속 프쉬케로서 살아가야만 하는 당위성도 바로 이런 자연적인 본성에 기인한다. 이제 이와 별도로 프쉬케가 다른 사물들과는 다른 두 가지 차이점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당위성은 필연이나 법칙과 대립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그 존재의 본성에 합당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필연이나 법칙과 배타적이지는 않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마치 잠든 사람처럼 행하고 말해서는 안 된다”(B73)고 명할 수 있다. 그가 잠의 상태를 비난하는 이유는 그것이 죽음의 상태와 같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죽음을 비난하지 않는다. 잠과 깸의 구분은 죽음과 삶의 구분이 아닌 개별성과 보편성의 구분이다.51) “죽음은 우리가 깨어난 뒤에 보는 것들이고, 자고 있을 때 보는 것들은 잠(hypnos)52)이다.”(B21) 프쉬케가 깨어 있을 때 그것은 살아있고 죽음에 직면해 있다. 죽음은 우리가 살아있을 때에 알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자고 있을 때 보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인 잠이다. 자고 있을 때에는 어떤 것도 살아있지 않고 따라서 죽어있지도 않다. 단지 죽음과 삶의 그림자인 잠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다른 사물들과 다른 프쉬케의 존재방식은 그것이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공통의 세계에 머무를 수도 있고, 각자의 고유한 잠의 세계에 머무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프쉬케의 존재방식은 그것이 복합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다. 나는 앞서 영혼의 본성을 ‘공기’에 가까운 것이라고 설정했다. 하지만 만일 그 프쉬케가 ‘불’과 ‘물’의 성격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프쉬케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복합적인 요소들을 전체 프쉬케의 부분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만일 프쉬케가 이미 물이 되어버렸다면 그것에는 어떠한 당위도 적용될 필요가 없다. 당위성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은 단지 살아있는 프쉬케에 한해서이다. 인간이 인간인 한, 그리고 프쉬케를 지니고 있는 한, 그 자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우주적인 불과 같은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프쉬케를 명시적으로 불이나 공기와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은 이유가 될 것이다. 그는 프쉬케를 물질로서 표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어떤 하나의 물질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마치 불이 물질적인 것으로 표상되면서도 로고스나 전쟁과 같은 비물질적인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프쉬케도 물질로 표상되면서도 여타의 물질과는 다르다. 프쉬케의 이러한 존재방식은 이후에 프쉬케를 비물질적인 성격으로 규정할 수 있는 단초를 이루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후의 철학사에서 정신의 영역이라고 불리게 되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선구자이자 그 영역을 이전의 언어로 완성시킨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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