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帛書)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2021년 5월 30일 주일

나뭇잎숨결 2021. 5. 30. 10:42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대축일]


1. 염수정 추기경(서울대교구장) 2. 윤주현 신부(가르멜수도회) 3. 호명환신부(작은형제회)

 

 

 

1. 염수정 추기경(서울대교구장)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께서 같은 본성의 한 하느님이시라는 신비를 기리는 날입니다. 우리 신앙의 근본 교리인 삼위일체의 신비는 단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체험적으로 나타나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지난 몇 달 동안 코로나19로 박해 시대에도 경험하지 않았던 ‘공동체와 함께하는 미사 중지’라는 신앙생활의 공백기를 체험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 완화에 따라 지난 4월 23일부터 조심스럽게 미사를 재개해서 지금까지 각 본당에서 철저한 방역지침에 따라 미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를 침착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잘 대응해주신 신부님들과 신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코로나19 이후(post corona)에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사회의 많은 부분은 코로나19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고 크게 변화될 것이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19 이후 우리 교회의 사목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돌봄’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활절 전날 우리 교구의 ‘가톨릭사랑평화의집’을 찾아 도시락 배달을 하며 쪽방에 살고 있는 여러분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그날 같은 쪽방에 살고 있는 분들의 삶에도 너무 큰 격차가 있는 것에 놀랐습니다. 여기서도 이렇게 차이가 많이 나는데 우리 사회에서 빈부의 격차가 어느 정도인가를 상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많은 전문가는 코로나19 이후 사회의 빈부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라 예상합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우리 교회의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가난으로 고통을 받는 이웃들을 우선적으로 기억하고 필요한 도움을 베풀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형제자매이고 그들을 돕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고에 따라 불우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선은 교회가 지닌 본질적인 사명 중의 하나입니다. 현대 사회는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가 인간의 정신과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습니다.

 

끝없는 소유욕과 지나친 소비가 전 세계에 걸쳐 많은 사람을 절대적 가난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빈부의 차이를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진정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먼저 물질 중심의 삶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루카 16,13 참조)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는 길입니다. 염수정 추기경(서울대교구장

 

 

 

2.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에 대하여, 세 위격으로 구별되지만 동시에 그 본질은 하나의 신성, 하느님 구원 역사 담긴 성경에 성부·성자·성령 각기 나타나, 4대 보편 공의회 통해 신경 정립하며 삼위일체 교리 구체화, 신앙생활은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 완성하는 과정

 

발행일2021-05-30 [제3247호, 7면]

 

- 윤주현 신부 

 

 

교회는 하느님이 한 분이시면서 세 분이심을 믿어 고백한다. 삼위일체는 가장 중요한 교리면서 가장 어려운 교리기도 하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신비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면 좋을까.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아 윤주현 신부(가르멜수도회)가 문답 형식으로 해설한다.



질문: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을 ‘삼위일체 하느님’이라 하는데, 이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습니까?

대답: 삼위일체 하느님은, 쉽게 말해,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이 한 분이면서 동시에 세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유일한 하느님을 믿는 유일신교입니다. 그러나 같은 유일신교인 유다교나 이슬람교와 달리, 우리는 그 하느님이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위격으로는 세 분이시지만 이 세 분은 서로 충만한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가운데 같은 신성(神性) 안에서 한 분으로서 깊이 일치해 계십니다.


질문: 어떻게 하느님은 한 분이면서 동시에 세 분이신가요?

대답: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 특히 그 역사가 담겨 있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그 하느님은 세 분으로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세상을 창조하고 이스라엘 민족과 계약을 맺으며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성부 하느님이 계십니다. 반면,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성부께서 세상에 보내신 성자 하느님도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성자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시면서, 교회를 성화하고 인도하도록 성령 하느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질문: 이 신비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워서, 역사적으로 적잖은 이단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대답: 예, 이 문제는 교회가 대략 2세기부터 7세기까지 숙고한 가장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이 시기에 많은 이단이 생겨나 교회에 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당시 유다교에서 개종한 신자들은 자신들이 믿는 하느님이 한 분이신데, 그분이 동시에 세 분이라고 하니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아리우스 이단은, 예수님이 인간에 불과한데 그분의 훌륭한 성품과 공덕을 보시고 성부께서 입양하셨다고 설명했습니다. 반면, 성령피조설주의자들 같은 경우는 성령이 일개 피조물에 불과하다며 폄하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성부를 최고의 신으로 보고 성자, 성령을 그보다 낮은 단계에 있는 하급 신들로 보는 종속론이나, 세 분의 하느님이 계시다고 하는 삼신론(三神論)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질문: 교회는 그런 이단들에 맞서, 한 분이며 동시에 세 분이신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가르쳤는지요?

대답: 결국, 교회는 4대 보편 공의회(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에페소, 칼케돈)를 개최해서 다양한 이단에 맞서 싸우는 가운데, 이에 대한 정통 신앙 고백문, 즉 신경(信經)을 작성해서 이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설명하기에 이릅니다. 우선, 교회의 교부들은 니케아 공의회(325년)를 통해 성자의 신성(神性)을 장엄하게 선포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성자께서는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시며 창조되지 않고 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자께서는 성부와 ‘동일 본질’(homousios)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를 통해서는 다음과 같이 성령의 신성을 장엄하게 선포했습니다: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나이다.”


질문: 하느님이 세 분이신데 어떻게 동시에 한 분으로 드러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오.

대답: 예, 사실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공의회를 주도한 정통 교부들은 그리스 철학에서 사용하던 몇 가지 개념을 빌려서 세 분 사이의 관계와 이 세 분이 어떻게 일치하는지 설명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세 분은 동일한 본체(substantia)이시며, 세 위격(persona)으로 드러나십니다. 다시 말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하나의 신성(神性)을 누리시며, 이 점에서 볼 때 세 분은 한 분이십니다. 반면, 세 분은 각각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위격으로 드러나십니다.


질문: 그렇다면, 위격이 무엇인지 이해하면 삼위일체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겠네요?

대답: 예, 맞습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이 위격의 의미를 깊이 숙고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이 말은 그리스 철학에서 사용된 ‘히포스타시스’(hypostasis)라는 용어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 말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페르소나’(persona)라는 말로 정착하게 됩니다. 이는 쉽게 말해, 본질을 간직하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한 신성(神性)을 간직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거룩한 영’으로 드러나신다는 겁니다. 교부시대의 삼위일체론을 종합, 정리한 분으로 평가받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페르소나’를 ‘관계’(relatio)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즉, 아버지는 그 자체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며,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상대적 개념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사랑의 관계로부터 사랑의 영께서 발출하셨다고 합니다.


질문: 성부, 성자, 성령은 어떤 분인지 설명해 주십시오.

대답: 예, 성부께서는 ‘아버지’이십니다. 성자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자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분은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성부를 “시작이 없으신 시작”으로 표현합니다. 그분은 온 우주 만물의 시작이시며 삼위일체 가운데 다른 두 위격의 시작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시작이 없는 영원한 분이십니다. 반면, 성자는 성부 하느님의 유일한 아드님이자 그분을 완벽하게 닮은 ‘모상’(Imago)이십니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낳음을 받으셨고, 이 세상에 파견되시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인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반면,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 간의 사랑으로부터 발출하신 사랑의 영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성화를 이루시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는 안내자가 되십니다.


질문: 마지막으로, 신앙생활의 중요한 원리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주(內住)를 꼽는데,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대답: 예,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부, 성자, 성령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완성해 나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세 위격께서 우리 영혼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가 내 마음에 늘 살아있듯이, 그렇게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게 되면, 그분은 우리 영혼 안에 사시게 됩니다. 성부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자녀로써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시며, 성자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성부께서 어떤 분인지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를 더 깊이 사랑하고 그분들의 뜻에 따라 살아가도록 사랑을 부어주시며 우리를 내적으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세 분과 더불어 사랑의 삶을 완성해 가는 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아, 우리 영혼 안에 살아계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더욱 깊이 사랑하는 가운데, 세례를 통해 맺은 그분들과의 사랑의 관계를 쇄신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윤주현 신부 (가르멜 수도회)

 

 

3.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삼위일체 신비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

 

-호명환신부(작은형제회)


노르위치의 율리안나 성인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의 체험을 삼위일체 위격 간의 영원한 사랑의 흐름(혹은 주고받음)에 참여하는 환희요 기쁨이라고 말한다. 율리안나 성인은 이와 같은 체험을 통해 인격이 삼위일체의 관계성 안에서처럼 하느님과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존재와의 관계성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관상을 통해 자신의 인격이 하느님의 삼위일체에 합치되는 체험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치가 자신의 노력이 아닌 삼위로 일체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전적인 은총에 의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은총의 일치는 결국 그로 하여금 다른 모든 존재와의 일치로 이끌어 주었던 것이다.

이는 프란치스코가 나환우를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깨달은 것과 맥이 일치한다. 프란치스코 역시도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한 것임을 자신의 유언에서 확신 있게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프란치스코가 이런 만남과 깨달음이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이 그에게 그리 엄청난 체험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이런 깨달음을 통해 약한 자로서, 가난하고 작은 자로서 다른 이들에게 의탁하는 법을 배운 후에야 비로소 다른 모든 이에게 형제가 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어떤 프란치스칸 영성가가 말하기를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위해서나 세상을 향해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존재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세상의 필요에 응하여 회개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세상 안에서 자기 삶과 현존의 의미를 깨달아 세상 가운데서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의 흐름처럼 다른 이들과 같은 인격체로서 서로 간의 나눔의 춤을 춘 사람이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육화라는 엄청난 사건을 통해 세상에 오신 이유와 같은 것이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결핍된 세상에 필요한 것을 나누어주기 위해 오신 갑부 아버지의 아들로 보고자 했지만,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파견되어 육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풍요가 이미 세상 창조와 더불어 모든 피조물에, 특히 그 모든 피조물의 관계성 안에 들어 있음을 분명하게 밝혀주시기 위해 온 밝은 빛이었던 것이다. 사실 세상은 이미 하느님 사랑과 그 배려로 풍요로운데도 이 세상과 그 안의 사람들은 그 풍요로움을 깨닫지 못했다. 이는 요한복음 서문에서 잘 증언해준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3-5)

요한 복음 서문에 나오는 이 말씀은 세상 창조와 완성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데 참으로 중요한 진실이다. 성 보나벤투라가 말하듯이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이 세상에는 이미 삼위일체의 발자취가 각인되어 있을 만큼 풍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살아내는 데 필연적인 진리이고, 또한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께서 주도하시는 역사 안에서 완성(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데 꼭 필요한 화두가 아닐까 한다.

이 풍요를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가진 삼위일체 하느님 자녀로서의 관계성 안에서의 품위를 개인주의와 소비주의 물질주의 등으로 스스로 손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말하는 ‘나-너(당신)’ 관계성의 단절이 빚어낸 결과가 오늘의 현실이 아닐까 한다.

바오로 사도는 이미 오래전에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8,19-23).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은 자본주의와 소비주의, 군사주의 등이 관계성의 단절을 심각하게 손상하고 있는 현시대의 상황을 내다보고 한 예언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요즘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상황을 겪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이 참으로 새롭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시듯 ‘생태적 회개’, 곧 우리 서로는 물론이고, 우리 주변의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성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이 ‘생태적 회개’, 혹은 ‘회복’이라는 말을 사도 바오로의 말씀으로 대신하자면,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