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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선험적 방법론

나뭇잎숨결 2020. 9. 11. 13:42

칸트의 선험적 방법론




손 승 길(동아대)




Ⅰ. 서 론

이제까지 우리는 [원리론]에서 순수한 이성인식의 건축에 대한 재료들을 통산하여 왔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런 건축에 대한 설계가 세워져야 한다. 즉 순수이성의 완전한 체계를 위한 형식적 조건들을 규정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선험적 방법론]의 과제다.
본래 칸트는 논리학 교과서의 전형에 따라 그의 이성비판을 '기초이론'과 '방법이론'의 두 부분으로 구분하였다. 전자(원리론)에서는 내용적 구조가 다루어진다. 즉 칸트에 있어서 순수이성의 모든 인식의 총괄을 하나의 건축물에 비교한다면, 선험적 원리론에 있어서 이 건축물의 재료들을 통산하여 이것으로써 어느 정도의 건축물을 지을 수 있는가를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이성의 욕망이 경험의 지반을 넘어서서 이념의 세계에 비약을 시도하였지만 끝에 가서는 선험적 이념에 멀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무모한 설계를 파기하도록 설득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반하여 후자인 [선험적 방법론]에서는 하나의 견고한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서 순수이성에 대하여 하나의 완전한 체계의 제약을 한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서 여기서는 순수이성의 체계원리와 관련이 되어 있는 순수 이성의 '훈련, 규준, 건축술, 그리고 역사'등을 고찰하고자 한다.
칸트에 있어서의 훈련이란, 이성의 비판을 말하는 것인데, 이성의 경험적 사용과 수학적 사용에 있어서는 훈련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러나 이성의 개념(이념)들이 모든 직관을 넘어서서 사용되는 경우에는 훈련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또 규준에 있어서, 이것은 인식능력 일반을 바르게 사용하기 위한 선천적인 원칙들의 총괄인데, 이성의 사변적인 사용의 규준이란 존재하지 않고, 이성의 실천적 사용을 위해서만 규준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순수이성의 건축술이란 학적 체계를 세우는 방법을 의미한 것이다. 여기서 체계란 하나의 이념의 아래에 다양한 인식의 통일을 말함인데, 그것에 의하여 다양한 범위와 그것의 부분 상호의 위치가 선천적으로 한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적 이성개념은 목적성의 형식을 가진다. 따라서 건축술에서는 궁극 목적의 형태로 체계 전체를 설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순수이성의 역사에서는 실제로 형성되었던 철학적 이론의 서술이라는 철학사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법칙에서 발전된 철학적 사고의 전형을 제시한 점이다.

Ⅱ. 순수이성의 사용에 관한 훈련

칸트에 있어서 훈련(Disziplin)이라 함은 다름 아닌 이성의 비판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의 경험적 사용에 있어서는 이성의 비판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훈련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의 원칙은 경험이라는 표준에 의해서 항상 검토되어지기 때문이다. 경험적 사용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고 선천적 인식이라 하는 수학에 있어서도 이성의 비판은 마찬가지로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순수한 직관이 이성의 잘못된 사용을 막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의 이념들이 모든 직관을 넘어서서 사용되는 경우에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 까닭은 한갓 개념에 의해서 이성을 선험적으로 사용할 경우에는 가능한 경험이라는 좁은 한계를 넘어서 자기를 확장하고 싶어하는 성벽을 억제하여, 자기 자신을 방자함과 오류에 빠지게 하지 않기 위한 훈련이 이성에게는 은근히 요청되어지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러한 훈련을 네 가지의 종류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1) 독단적 사용에 있어서의 훈련
2) 논쟁적 사용에서의 훈련
3) 가설에 관한 훈련
4) 증명에 관한 훈련
이상과 같은 네 가지 훈련을 순서대로 자세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1) 독단적 사용에 있어서의 훈련
순수이성을 독단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간단히 규정한다면, 수학적인 사고방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철학에 부연하므로서 발생하는 철학의 잘못을 방지하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수학은 경험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선험적 측면에 의해서 이성적 인식의 확장에 대한 빛나는 실제적인 예(例)를 던져주고 있다. 철학도 수학처럼 행복 할 수 있기를 인간은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독단적 방법은, 절대 확실성에 도달하는 수학적 방법이 철학에서도 그와 똑같이 타당하다고 한다. 그러나 수학적 방법과 철학적 방법이 그처럼 과연 똑같은 것일까 하는 것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수학적 인식과 철학적 인식의 본질적 차이에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철학적 인식은 개념에 의한 이성의 인식(Vernunfterkenntnis aus Begrif-fen)이며, 수학적 인식은 개념의 구성(Konstruktion der Begriffe)에 의한 이성의 인식이다. 여기서 구성한다는 말은 개념에 대응하는 직관을 선천적(a priori)으로 그려낸다는 뜻이다. 그런데 수학에서는 양(量)만이 구성된다. 즉 양만이 경험에서 독립하여 선천적으로 직관 중에 나타난다. 이것은 수학적 인식의 형식이 원인이 되어서 수학적 인식은 오직 양에만 관련을 맺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수학적 개념은 형태를 산출하기 위한 구성 규칙으로 파악 될 수 있고, 따라서 직관 가운데 표시될 수 있다는 점이 철학과 본질적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비록 기하학뿐만 아니라, 대수학에도 타당하다.
수학은 기하학에서처럼 외연량을 구성할 뿐만이 아니라, 대수학에서처럼 순수한 양도 구성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수학은 이러한 양의 개념에 쫓아서 생각되는 대상의 성질을 모두 도외시한다. 그러한 후에 대수학은 순수한 양 일반의 각종 구성-가령 덧셈, 뺄셈 등-을 표시하는 어떤 기호를 선택한다. 이렇게 하여 양의 일반적 개념이 양의 각종 관계에 쫓아서 기호화된 후에 양을 산출하고, 변화시키는 일체의 조작을 어떤 보편적인 규칙에 의해 직관 중에 표시한다. 한 양이 다른 양에 의해서 제(除)해져야 할 경우에는 이러한 양편의 [양]을 표시하는 문자들을 나눗셈의 기호 형식으로써 결합한다 등등. 이에 대수학은 기하학이 대상 자신을 명시적으로 즉, 기하학적으로 구성하는 것처럼, 기호를 구성함에 의해서 성공한다. 이처럼 대수학에서도 연산(演算)이 형상적인 기호들과 이것의 조작을 통해 상징화되기 때문에 타당한 것이다. 또한 수학에서는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직관적 요소들이 예컨대, 하나의 도형 전체를 위해 묶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구성이다. 삼각형이라는 기하학 개념은 이와 같은 하나의 도형에 대한 묘사인 것이다.
그러나 한갓 개념에 의하는 철학의 논증적 인식은 수학에서와 같은 성공에 도달할 수가 없다. 철학적 개념은 수 일반, 양 일반과 같이 직관적인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물론 철학적 개념 역시 선천적 종합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천적으로는 주어져 있지 않는 [가능한 직관들의 종합]이고, 그러므로 "사람들은 철학적 개념을 통해서 종합적이고 선천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개념에 의해서 추리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고, 개념의 구성을 통해서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따라서 철학은 수학적 개념을 그저 분석함으로써 아무런 새로운 것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나 수학은 개념의 대상을 직관적으로 구성함에 의해서 새로운 것을 알게된다. 그런데 여기서는 철학이 개념의 분석을 통해서 가져오는 분석적 명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종합명제가 중요하다. 선천적 종합명제를 위해서는 순수직관에 의한 구성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고는, 선천적으로 뿐만 아니라, 후천적으로도 생기는 사물일반의 가능한 직관의 공허한 형식을 취급한다. 가능한 현상의 경험적 내용 내지는 현상의 형식의 경험적 내용을 선천적으로 언표하는 철학적 개념이 곧 <사물 일반>(Ding berhaupt)이라는 개념이다. 사물일반에 관한 종합적 명제를 [선험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선험적 종합적 명제는 "선천적 직관에 표상될 수 없는 것(지각)의 어떤 종합적 통일을 경험적으로 구하기 위한 규칙만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명제는 종합적 원칙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경험을 매개로 해서 표시할 수 있다.
결국 수학적 개념과 철학적 개념의 본질적 차이는, 전자는 그 자신 순수한 직관을 내포하기 때문에 그 대상의 구성과 이 대상과의 종합적 명제를 가능하게 한다. 후자는 직관 할 수 있는 것과의 종합방식만을 내포한다. 여기서 직관적인 것은 수학적 개념에서와 같이 개념 속에 있지 않고, 경험 중에서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다. [분석론]의 성과에 의하면, 개념과 직관이 합해져서 종합적 인식을 갖게 된다. 따라서 직관이 없는 철학적 개념들은 이것들만으로는 종합적 인식을 줄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순수한 철학적 개념은 이성의 학으로서 수학과 많은 유사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학과 마찬가지의 일을 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려는 위험을 안고 있다. 합리론적 사상가들이 이러한 위험에 빠졌던 것이다. 그러나 수학적 방법의 모방이 철학에서는 허용되어 질 수는 없다. 즉, 구성할 줄 모르는 순수 철학이 단순히 정의나 매개적인 개념을 가지고 자연에서 서투른 짓을 하는 것은 거부되어 있음이다. 여기에서 개념의 분석만을 일삼는 철학은 수학의 기본원리인 정의(正義)·공리(公理)·증명(證明)을 이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첫째, 정의(Definition)란 무엇인가? 그것은 "본래 한 사물의 상세한 개념을 그것의 한계안에서 근원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경험적 개념은 그저 해석은 할 수 있지만, 정의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험적 개념에 있어서는 대상의 징표(徵表)가 어떤 때에는 많은 것을, 또 어떤 때에는 적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A라는 사람은 보석의 개념에서 빛, 강인성, 무게 이외에 그것이 변하지 않는다는 성질을 파악할지 모르나, B라는 사람은 이러한 보석의 성질들을 약간 또는 전혀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가 가능하지 않는 것은 비록 그러한 것만은 아니고, 실체, 원인, 권리, 공정(公正)같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개념들도 정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나에게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것의 개념의 분석이 얼마만큼 [상세하는가]하는 것은 항상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상세함은 절대 필연적으로 확실하지 않다. 그럼으로 경험적으로 주어진 개념도 선천적으로 주어진 개념도 다같이 정의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임의로 생각된 개념뿐이다. 그러한 개념에 대해서는 정의를 할 수 있느냐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고의로 만들어 낸 것이요, 오성의 본성에 의해서도 경험에 의해서도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진정한 대상을 정의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철학의 내부에서는 경험적 개념이건 선천적 개념이건 정의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까닭은 그런 개념들의 본질적 징표를 참으로 모두 인식했다고 우리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에 쓰이는 개념으로서는 선천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 임의의 종합을 포함하는 개념만이 남아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정의할 수 있는 개념은 수학뿐이다. 수학만이 개념의 대상을 선천적으로 직관적으로 우리가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학만이 정의에서 출발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개념이 정의에 의해서 비로소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철학에 있어서 정의는 부단히 맺어가야하는 성과(成果)이다. 즉, 철학에 있어서 정의는 부단히 희망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의에 관한 수학적 방법을 철학이 모방할 수가 없다.
둘째, 공리(Axiom)란 "직접적으로 확실한 한(限)의 선천적 종합원칙"이다. 여기서 수학은 공리(公理)를 제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학은 대상의 직관에 있어서 개념의 구성에 의한 대상의 술어(述語)를 선천적으로 직접 종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직관이 철학적 종합원칙에는 없다. 철학적 인식은 보편자를 언제나 추상적으로 고발하는 반면 수학적 인식은 보편 자를 구체적으로, 즉 개별적인 직관 중에서 찾는다. 이렇게 볼 때, 추론적 원칙은 직관적 원칙과는 구별되어야한다. 그러므로서 직관적인 원칙이 아닌 철학적인 명제는 결국 수학과 같이 정확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러한 명제로서 합리성도 없다.
셋째, 증명(Demonstration)이란 "절대 필연의 증명이 직관적인 한에서 그것은 명시적 증명이다." 직관이 없는 선천적 개념으로부터는 직관적 확실성이 발현할 수 없다. 지각적 경험에 근거해서 하는 증명도 절대 필연적인 확실성은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증명은 다만 사실로 있는 것과 있었던 것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만, 그러나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그것 이외의 것일 수 없다는 필연성을 가르쳐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에 수학만이 명시적 증명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념에 대응하는 직관에서 인식을 도출하므로서 절대 필연적인 확실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수학이외에 있어서는 절대 필연적 명제로서 증명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철학적 증명을 명시적 증명이라기 보다는 강술적(講述的) 또는 추리적 증명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칸트는 절대필연적 명제를 두 개로 나누어 정설(Dogma)과 정리(Mathema)라 한다. 정설(定說)은 개념에서 직접적으로 (직관없이)종합명제는 이룬 것으로서 철학적 명제이다. 반면에 정리(定理)는 개념의 구성, 즉 직관에 있어서의 종합을 이루는 것으로서 수학적 명제이다. 이렇게 볼 때, 수학은 선천적 종합판단에 의하여 확실한 것이지만, 철학은 그러한 것이 되지 못함으로써 순수이성은 그 자신을 사용함에 있어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과(因果)에 관한 명제를 그것이 비로소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한에서, 정설이 아니라 원칙이다. 그러므로 모든 독단적 방법은 철학에서는 적당하다고 볼 수 없다.

2) 논쟁적 사용에서의 훈련
순수이성의 논쟁적 사용에 있어서는 이성의 명제들을 독단적으로 부정하는데 이성은 항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립(定立)과 반정립(反定立)이 서로 논쟁할 경우에는 인간적 표준에 따른 변명이 성립하고, 진리의 표준에 따르는 변명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순수이성의 명제들에 있어 각자의 독단론적 주장이 진실로는 증명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논쟁적 이성은 그런 주장이 반박될 수도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이성의 논쟁적 사용은 오해에 기인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즉 보통 있는 편견에 따라서 현상을 사물자체로 이해하고 현상들을 종합해 가는 절대적 완전성을 정립과 반정립의 각자 방식에서 요구했지만, 그러한 절대적 완전성은 어느 편에서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것은 현상에서는 절대로 요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양명제 "그 자신 주어진 제현상의 계열은 절대적 시원을 갖는다"와 "이 계열은 단적으로 그 자신에 있어서 아무런 시원도 가지지 않는다"는 수학적인 이율배반명제에 있어서는 이성의 참된 자기모순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개의 명제는 똑같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여러 현상들은 그 자체 현상들로서 사물 자체적으로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 모순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들을 사물자제로 전제하는 것은 당연히 모순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최고존재인 신(神)과 비물질적 존재인 영혼에 관한 논쟁에는 없었다. 그것은 증명도 반증명도 불가능했고,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는 이율배반이 성립하지 않았다. 앎(知)의 주장을 버려야 하는 이 영역에서 신앙의 권리가 들어서고 있다. 신앙과 도덕에 대한 잘못된 관심에 있어서는 철학적 사고의 자유가 제한 받을 수 없다. 본래적으로 신과 불멸의 영혼에 관한 순수이성의 논쟁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논쟁에 있어서는 그 이념의 대상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지 안하는지를 도출할 수 없는 이념들을 문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자신은 자신의 역사를 통해서 자기비판을 하는 만큼 성장한다. "순수이성 비판은 순수이성의 모든 분쟁을 위한 참법정으로 볼 수 있다. 순수이성 비판은 객관에 직접 관계하는 분쟁에는 휘말려 들지 않는다. 그것의 본분은, 이성 일반의 권리를 이성자신이 처음에 세운 원칙에 따라 규정하고 판정하는 일이다." 이 비판이 없이는 이성은 싸움의 상대인 자연의 상태에 머무르고 만다. 이성이 독단적 태도를 취하는 한에서 논쟁은 계속된다. 법이 지배하지 않고 폭력이 지배하는 상태로 보아진 자연상태는 Hobbes이래로 존속하여 왔다. 그러나 이성의 비판이 비로소 자연상태가 아닌 평화를 창립할 수가 있다. 이러한 비판적 이성은 그 자신 보편적인 인간이성의 어떠한 재판관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편적 인간이성은 사상의 자유표현을 억압하지 않기 때문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순수이성의 회의론적인 사용도 있을 수 없다. 이성이 그 자신의 기본구조를 역시 역사를 움직이는 자연으로 하여금 지시하도록 하지 않고 스스로 제시한다는데 의혹을 품게 되면, 이성은 이제까지의 자신의 역사에 나타난 사실을 회의적으로 보게 된다. 그럼으로써 "이성의 회의론적 사용은 모든 분쟁에 당면해서 한갓 중립성의 원칙에만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모순을 일으킨 순수이성에 대해, 회의론적으로 그치는 것은 칸트에 있어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칸트의 평가에 따르면, "회의론은 인간의 이성에게는 일종의 휴식처이다. 여기에서 이성은 지금까지의 자기의 독단적 편력을 성찰하고, 앞으로의 행로를 좀더 확실하게 선택할 수 있기 위해서 현재 지역의 약도를 만든다. 그러나 그 곳이 영주할만한 거처는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확실성에서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의론자로 남아 있었던 Hume은 자기의 의심을 이성의 결함 많은 독단적 시론(試論)에만 제한하였다. 그는 "인과 원칙성의 타당성을 습관이나 또는 보편적 유용성으로서의 필연성이라고 하였고, 순수한 경험적인 것을 초월한 이성의 모든 월권(越權)이 무의미하다"고 추론 하였다. 여기에서 [선험적 논리학] 인과 명제의 타당성을 선천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즉, 그 명제의 타당성을 한 생기(生起)의 개념내용과 그 원인과를 분석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능한 경험과의 종합적 연관 중에서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Hume은 종합개념들의 모든 종류를 체계적으로 개관하지 못했다. 그것은 단적으로 개별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에만 의존하였고, 체계적이고 원리적인 고려에 의존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회의론은 유년기의 독단론을 검열한 공적은 있으나, 장년기의 성숙한 판단력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성숙한 용기 있는 판단력'이 내디딜 수 있는, 즉 이성의 비판의 발걸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그 경계를 대충한 인식할 수 있는, 무한히 넓게 펼쳐져 있는 평면같은 것이라기 보다는, 전체를 볼 수 있는, 그 표면이 가능한 대상들이 있는 영역으로 간주될 수 있는 하나의 구(球)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결국 회의론으로부터 구별된 칸트의 회의적 방법(skeptisches Verfahren)만이 "합법적인 소유를 이성에게 보증하기 위한 예습이 되는 것이다."

3)가설(假說)에 관한 훈련
가설(Hypothese)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 그것의 가능성이 있는 것, 다시 말하면 직관에 있어서 대응할 수 있는 사견(私見)이라 한다. 그러므로 가설이란 가능적 경험의 대상에 관한 명제가 아닐 수 없으며, 따라서 이성의 선험적 사용에서 오는 가설은 그러한 의미에서 가설이 될 수 없다. 즉 선험적 이념은 그것의 가능성을 증명할 수 없는, 따라서 현실적 현상의 가설에 의한 설명에 대하여서도 그것의 기초가 될 수 없는 한갓된 가공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의 이념을 자연 사물의 설명에 사용하는 선험적 가설은 설명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알려진 경험적 원리에 의해서는 충분히 이해될 수 없는 것을, 전혀 이해되지 않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 우리가 설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를 들어 선험적 자유를 통찰할 수 있는 관점과 이 관점에서의 언어나 사고가 현상이 등장하는 전망에서의 언어나 사고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가설이란 우리가 논쟁적인 사용에서 형이상학적인 명제를 변호하려고 생각할 때에만 허용되는 것이다. 이 변호에서 표적이 되는 것은 "우리가 주장한 명제를 분쇄하는 상대방의 사이비 견해를 좌절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이 상대방, 즉 적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 안에서 발견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변적 이성은 그것의 선험적 사용에서 그 자체가 변증법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가설은 이성의 사변적 사용에 있어서 개인적인 사견 자체로서 타당성읕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직 초험적(超驗的) 반대론의 월권에 상관해서만 타당성을 갖는 것이다. 즉 가설은 가능적 경험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것이지만, 사변적인 사용에서는 이것을 반대정립(反對定立)의 환기를 통하여 이성의 자기비판을 초래하는 데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4) 증명에 관한 훈련
우리가 개념의 분석이상으로 대상에 관한 선천적 종합명제를 제시하자면, 길잡이가 필요하다. 그러한 길잡이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수학에서는 선천적 직관이되, 이성이 문제가 되는 한에서 선험적 인식에 있어서는 가능적 경험이다. 따라서 범주라고 하는 결합하는 개념 없이는, 경험 자신이 불가능하고 경험의 대상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야한다. 그러나 이런 증명 방식은 이념의 경우에 있어서는 불가능하다. 가령 영혼이 분할 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단순한 사고적 실체라고 지시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이렇게 볼 때, 순수이성의 증명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언제나 오직 [유일 가능한 증명 근거]를 통해서만 수행될 수 있음이 드러난다. 여기서도 철학의 경우는 하나의 주장에 대해서 여러 가지 증명이 가능한 수학의 경우와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사유적 실체의 단순성을 통각의 단일성에서 증명하려는 증명은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각에 관계를 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하나의 지식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예를 들면, 내가 나의 신체의 힘을 운동에 있어서 표상 한다면 신체는 그 한에 있어서 나에게는 절대적인 통일이며, 신체라는 나의 표상은 단순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점의 운동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견해다. 이 경우에 신체의 용적은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그것을 하나의 점(點)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서 나의 신체의 운동하는 힘이 나에게 주어졌을 때, 신체의 표상이 공간의 모든 양에서 추상되므로서 그것을 단순하다고는 추론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추상에 있어서의 단순한 것과 객체에 있어서의 단순한 것은 그 본질이 틀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自我)라는 개념은 복잡한 것이다. 즉, 매우 많은 것을 자기 아래에 포괄하고 또 표시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하나의 오류추리를 발견한다. 이 오류추리를 미리 추측해 알기 위해서는 경험이 줄 수 있는 것보다도 이상의 것을 증명할 종합명제를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 표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표준이라는 것은 증명이 직접 요구되는 술어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천적 소여개념을 이념으로 확장하고 그 이념을 실현하는 가능성의 원리를 매개로 하여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념은 이념이라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칸트는 선험적 증명(transzendentale Beweis)이라고 하고, 이것에 두 개의 규칙을 부여한다.
첫째, 선험적 증명을 행하게 하는 원칙들을 명백히 하는 일 없이, 아무런 선험적 증명도 기도해서는 안된다. 현상계에만 타당하는 [순수오성의 원칙들의 체계]로써 이념들의 대상들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증명할 수가 없다. 이전 대상들은 모든 경험의 피안에 있기 때문이다. 순수이성에서 생긴 원칙들은 대상들을 인식하고자 구성적으로 사용될 수 없고, 오직 통제적으로만 사용될 수 있다. 즉, 경험적 인식의 체계적 건설에의 인도로서만 사용될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로, "선험적 증명의 특색은 어떠한 선험적 명제에 대해서도 단 하나만의 증명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선험적 명제는 그 어느 것이나 하나의 개념에서만 출발하고, 이 개념에 따라서 대상을 가능하게 하는 종합적 조건을 설정한다. 그러므로 증명근거는 하나가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개념 이외에는 대상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칸트는 선험적 분석론에서 "모든 생기(生起)하는 것은 원인을 갖는다."는 예를 들어 이것은 역학적 원칙에 따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며, 이러한 것이 유일한 가능적인 증명이라고 한다.
또한 신(神)의 존재의 선험적 증명도 마찬가지로 보고, 이 증명은 "가장 실재적 존재와 필연적 존재라는 두 개념의 동가성(同 性)에만 기본하고 있고, 그것 이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구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등가성의 문제와 오성의 선험적 증명과의 관계의 분석이 더 필요하겠지만, 칸트에 있어서는 우선 증명이 하나에 한한다는 것만을 지적하고 있다고 보아진다.
셋째의 규칙은, "선험적 증명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간접적(apagogisch)증명이어서는 안되고, 정당함을 직접 표시하는 명시적(ostensiv)인 증명이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오직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증명만이 모든 종류의 인식에서 진리를 확신하게 할뿐만 아니라, 진리 확신의 근원을 통찰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접적 증명은 우리의 표상의 주관적인 것이 즉, 대상에 있어서 어느 것의 인식과 바꿀 수 없는 학문에만 허용된다고 한다. 즉 간접적 증명 방법은 주관적 표상을 대상으로 보지 않는 곳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뒤바꿈(subreption)은 수학에서는 불가능하고, 자연과학에서는 일체가 경험적 직관에 의거하기 때문에 주도한 사려에 의해서 방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념을 다루는 영역에 있어서는 그러한 [뒤바꿈]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간접적 증명이 실제로는 합당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명백하다. 가령 신의 존재에 관한 사변적 증명에 반대하고자, 신의 무조건적 필연적 존재성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고 할 경우에, 이런 간접적 증명은 우리의 주관적인 불가능성을 신의 존재의 객관적인 불가능성이라고 잘못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순수이성의 선험적 시도에 있어서는 모두 다 변증적 가상이라는 특이한 매개자 가운데서 행하여진다. 이것은 순수이성을 선천적으로 사용한다면 필연적으로 이념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시·공(時·空)이 무한하다, 무한하지 않다]라는 이율배반에 있어서 정립이건, 반정립이건 모두 선험적 가상에 속해서 대상에 관해서 불가능한 이념을 근저에 두고 있는 것이다. 즉 물자체로서 전체성 중에 주어져 있을 [감성계라는 개념]을 근저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존재하지 않음은 아무런 성질도 가지지 않는다."는 규칙이 타당하다. 이것은 이념적 대상에 관한 긍정적 주장이든 부정적 주장이든 어느 것이나 부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간접적 증명방식은, 독단적 사변가의 철저성을 찬미하는 사람들이 당하기 쉬운 환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성의 요구가 자체적으로 무엇을 논거로 할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정당한 증명을 함으로써 즉, 직접적 증명에 의해서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순수이성의 훈련이란, 선험적 변증론의 정신을 좀더 상세히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즉, 이성의 선험적 사용에 대한 제한을 준 것, 즉 사변적 사용을 금지하였으며, 그것을 다시 찾는다면 실천적 세계 중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Ⅲ. 순수이성의 규준

사람들은 그의 이성을 정당하게 사용하기 위하여, 즉 이성이 사변적 사용을 통하여 선험적 이념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순수이성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이성자신을 실망하게 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상의 세계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탐구할 수 있기보다는 다만 소극적으로 그것의 사용한계를 제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이성의 사변적 사용에 있어서 금지를 당하였다고는 하지마는 다시 이성은 그것의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즉, 사변적 사용에서는 완전히 거부되었던 것들-자유, 영혼불사, 신등의 개념-이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는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사변적 사용에 있어서는 규준이 될 수 없었던 것이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는 규준이 된다는 것이다. 규준(Kanon)이란 "인식능력 일반을 바르게 사용하기 위한 선천적인 원칙들의 총괄이다." 그러므로 인식능력을 바르게 사용할 수 없는 곳에서는 규준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선험적 분석론은 순수 오성의 규준이었다. 왜냐하면 순수오성의 규준은 그것이 선천적 종합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오성에서 발현하는 범주와 선천적 종합판단은 경험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기에 유용하다는 것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험적 변증론은 순수이성의 종합적 인식이 이성의 사변적 사용에 있어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시하여 주었다. 그러므로 이성의 사변적인 사용의 규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규준은 이성의 실천적 사용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규준은 이성의 사변적 사용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 관한 것이므로 우리는 이러한 실천적 사용을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첫째, 이성의 순수한 사용의 최후목적에 관한 것이다.
이성의 사변이 선험적 사용에서 도달하는 궁극적 의도는, "의지의 자유(die Fr-eiheit des Willens), 영혼의 불멸(die Unsterblichkeit der Seele), 하나님의 존재(das Dasein Gottes)"라는 세 대상에 상관한다. 그러나 이성의 사변적 관심은 이 세 대상 가운데 어느 것에 관해서도 지극히 미약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구체적으로 자연탐구에 있어서 유용성을 증명할 수 있도록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험을 위해서는 세 대상의 문제해결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오직 실천적인 것을 위해서만 그와 같은 해결이 중요한 것이다. 의지가 자유로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의욕의 가상적 원인에만 관계하는 것이나 또는 우리의 의욕을 발표하는 현상 즉, 행위에 관해서는 모든 다른 자연현상과 같이 자연의 불변적 법칙에 의해서 설명되어야만 한다. 또 영혼의 불멸성도 역시 자연적인 인식으로 긍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비물질적 자연이라는 말은 그저 부정적이요, 우리의 인식을 조금도 확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의 존재에 대한 것도 그것의 현존재가 증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것을, 우리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것에서 도출하기 위해서, 자연원인을 간과하지도 않고, 경험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을 포기하지도 않고, 이성을 사변적으로 사용할 때 필수적 규칙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지금까지 논하였던 세 명제는 사변적 이성에 대해서 초험적인 것으로 인식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성이 이 세 명제를 지극히 요청하고 있다면 그것들의 중요성은 오직 실천적인 것에 관계하는 것이다.
"자유에 의해 가능한 것은 모두 실천적이다.(Praktisch ist alles, was durch Fr-eiheit m glich ist)" 우리의 실천적인 목표는 당위를 인식하는 일이다. 당위란 오직 자유가 있는 곳에서만 있는 것이다. 자유의 개념은 실천적 의미에서만 바르게 사용되는 것이다. 자유는 행동에 있어서 감성적 충동에서 독립하여 이성에서만 표상되는 동인(Bewegursache)이 우리를 규정할 수 있는 점에서 존립한다. 이러한 결의는 동물적 결의가 아니라, 자유결의이다. 이런 의미의 실천적 자유는 경험을 통해서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실천적 자유는, 우리 인간은 본능이나 욕구를 떨쳐버릴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래에서 예상되는 충족을 위해 목전의 충동적인 충족을 포기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밝혀지는 것이다. 이 점에서 선험적 자유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선험적 자유는 모든 욕구와 <감성계>를 규정하는 모든 원인으로부터의 이성의 독립자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론적인 이념이다.
그런데 이성은 자유 행동에 대한 실용적 법칙만을 줄 수 있다. 실용법칙은 감관이 우리에게 권고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요, 따라서 순수한 법칙 즉, 도덕법을 완전히 선천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실용법칙과는 다르게 순수한 실천법칙은 그것의 목적이 이성을 통해서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고 경험적 제약이 없으며, 단적으로 명령한다.
이런 실천법칙은 순수이성의 산물이다. 도덕법이 바로 이런 법칙이요, 그러므로 도덕법만이 순수이성의 실천적 사용에 속하며 규준이 됨을 용인한다.
둘째, 순수이성의 최후목적의 규정근거인 최고선의 이상에 관한 문제이다.
Kant에 있어서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의 순수이성의 규준에서 다루어야 하는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 내세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그는 우선"이성의 세 가지 관심"을 들었다.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3. 나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첫 번째 물음은 [순수이성 비판]의 '기초이론'에서 언급된 것으로서 사변적인 것이다. 둘째 물음은 실천적이다. 이것은 선험적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다. 셋째 물음은 실천적이며 동시에 이론적이다. 모든 기대나 희망이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모든 지식과 자연법칙이 사물의 이론적 인식에 관계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실천적인 것은 어떤 것이 생기하지 않으면 아니되기 때문에 가능적인 궁극목적이 존재한다는 추론인 것이며, 이론적인 것은 어떤 것이 생기하기 때문에 최상위의 원인으로서 작용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추론이 된다.
[최고선의 이상]이란 도덕적으로 최완전한 의지가 최고의 정복(淨福)과 결합하여, 파생적 최고선(h chstes abgeleitete Gut)의 원인이 되는, 최고 이성 즉 신의 이념을 의미한다. 파생적 최고선을 인간이 그의 도덕성에 비례하여 누려야 할 행복의 상태를 지시한다.
칸트에 의하면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애착(Neigung)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행복의 동인에서 생기는 실천법칙을 실용적이라 하고, 행복에 값어치가 있게 하는 것 이외에 아무런 것도 동기로 삼지 않을 때의 실천적 법칙을 도덕적이라고 말해진다. 전자의 처신의 규칙은 우리에게 행복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가르쳐준다. 그러나 후자는 애착과 이것을 만족시키는 자연적 수단을 경외시하고 이성적 존재 일반의 자유가 그것 아래에서만 행복의 부여와 원리적으로 합치하는 필연적 제약만을 고찰한다. 그러므로 도덕법은 적어도 순수이성의 한갓된 이념을 기초로 하여 선천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천적으로 타당하는 도덕법은 지상명령(至上命令)을 내린다. 그것은 우리의 행복을 전제해서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의 행복에 의한 보상을 생각해서 도덕적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도덕적 심정일 수 없다. 도덕성은 우리의 최상선(最上善)이다. 그러나 최상선이 완전선은 아니며, 따라서 최고선은 아니다. 최고선은 도덕성에 행복이 부여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지 사실에서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고, 이성의 판단에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을 구성하는 것이 실천이성의 자율에서 오는 것이며, 그것에 근본의 자유가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이성은 자유일반에 관하여서는 원인성을 가졌으나, 자연에 관하여서는 그것을 가지지 못하였다. 즉 도덕적 원리는 자유스런 행위를 야기할 수 있으나 자연법칙을 야기하지는 못한다. 바로 이러 함으로 순수이성의 원리가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 특히 도덕적 사용에 있어서 객관적 실재성을 가지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연세계와 구별되는 '도덕적 세계(moralische Welt)'가 분명히 드러난다. 이것은 세계가 모든 도덕법에 합치해 있다고 가정하는 한에서 가상적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세계는 한갓 이념이요, 그러면서도 실천적 이념이며, 이 이념은 실제로 감성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하기에 도덕적 세계라는 이념은 객관적 실재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도덕적 세계로 법칙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의 법칙으로 그의 행위가 자연적 원인의 결과가 아닌 그런 존재자만이 그것을 인지한다. 예지적인 세계와 그것의 구조에 관해서 사변적, 이론적 이성은 아무런 적극적인 발언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에 관해 [실천적 의도]에서 실질적인 발언을 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도덕법칙에 복종하는 이성적 존재자라는 신비적 단체(Corpus mysticum)로서 파악된다. 이러한 도덕법칙이 인간의, 즉 그의 본성상 감성적 규정근거에 대해서도 저항력이 없는 존재자의 언어로 표현된다면, 그것은 당위 즉, 명법의 형식을 취한다. 우리가 현존재라는 그 연유로 인해서 우리는 행위 하도록, 즉 강성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이 되도록 의무 지워져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떠한 현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이성이 원인이 되는 것을 그 본질로 하는 자유로부터의 원인성(Kausalit t aus Freiheit)이다.
이 영역에서는 어떠한 앎(知)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사변적, 이론적 이성이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도덕적 신학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가정 완전하고, 가장 이성적인 근본적 존재, 즉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신념은, 덕에는 그 보수가 반드시 따를 것이라는 우리의 도덕적 요구에 기본하고 있다. 이 도덕적 신학은 순 사변적 신학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현존을 확신한다.
이렇게 볼 때, "도덕적 이념이 신적 존재의 개념을 성립시켰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변적 이성이 신적 존재의 개념의 정당성을 확신하도록 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적 존재의 개념이 도덕적인 이성원리와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실천이성이 먼저 하나님 개념을 세우고, 이것으로부터 도덕법을 이끌어 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즉, 먼저우리의 도덕의식에서 출발하고 도덕법에 적합한 뒤에 하나님 개념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誡命)이기 때문에, 우리가 도덕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의 내심(內心)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 책임을 느끼기 때문에 도덕적인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신학은 초월자를 이론적, 사변적으로 인식하는데 유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실천적, 내재적으로만 사용되는 것이다. 사변신학에서는 결코 객관적 근거로부터 이런 근원적 존재를 우리에게 시사하지 않는다. 더욱더 그 존재를 확산시킬 수도 없었다. 선험적 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존재를 상정할만한 아무런 근거도 우리에게 주지 못했다.
이렇게 볼 때, 도덕적 신학만이, 우리의 도덕적 사명을 세계에 실현할 것을 지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 신학이 불가피하게 유일의 가장 완전하고도 이성적인 근원존재라는 개념에 도달한다."
셋째, 억견(臆見)·앎(知)·신앙(信仰)의 문제이다.
칸트는 여기서 몇 가지 견해를 언급한다. 즉 "의견(Furwahrhalten), 정견(定見, Uberzeugung), 아견(我見, berredung)"이다. 의견(意見)이란, 그것이 객관적인 이유를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판단자의 주관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며, 그것이 이성을 가진 한의 만인에게 객관적으로 타당할 것이라고 인정된 경우에 이것을 정견 또는 확신이라고 하며, 또한 의견이 단지 주관의 특수한 성질에 의거한다면 그것을 아견 또는 자신(自信)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개인적 타당성만을 가지므로 한갓된 가상(假象)인 것이다. 이 아견은 전혀 주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의해서는 객관적인 것으로 생각됨으로써 타인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진리라는 것은 객관과의 합치에서 성립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일반적으로 제3의 인물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제3자와 일치하는 자들은 그들끼리도 일치한다."(Was miteinem Dritten bereinstimmt, stimmt auch unter sich berein)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견이 정견인가 아견인가 하는 것은 그것을 외면적으로 표현한다면 타인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정해질 수 있고, 인정될 수 있을 때에 <주관들이 서로 다를지언정, 모든 판단들이 합치하는 근거가 공통의 근거, 즉 객관에 있고, 그러므로 모든 판단이 이 객관에 일치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판단의 진리가 증명된다는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한 정견과 아견은 개인적 의식 안에 있어서는 구별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의견은 정견과 아견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의식의 현상에만 착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근거들이 타인에게 정견을 갖게 하는 작용을 하지 않을 때에, 아견만이 문제되어 있다는 추측에 도달하게 된다. 즉 아견이 어떠한 주관적인 원인에 근거하는가를 자신이 발견할 때에, 나는 아견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의견은 다시 정견과 관계해서 세 단계를 가진다. 즉, 억견(Meinen), 신앙(Glauben), 앎(Wissen)이 그것이다. 억견이란 주관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불충분한 의견이다. 의견이 주관적으로는 충분하지만 객관적으로 불충분하면 이것을 신앙이라고 하며, 다시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충분한 것을 앎(知)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관적 충족성을 정견이라 하며, 객관적 충족성을 확실성이라 한다.
그러므로 순수이성의 선험적 사용에 있어서의 억견은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선척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인식은 보편타당 해야하고, 확실성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이러한 성질이 없으며 앎(知)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수학에 있어서는 억견을 세울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학은 선천적으로 확실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원칙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도덕에 있어서 무엇인가 허용되어 있다는 억견을 기본으로 하여 행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무엇이 확실히 허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험적 변증론에서 우리는 이론적 의미의 앎에 도달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불충분한 의견은 실천적 견지에서 신앙이라고 불리운다. 그런데 이러한 실천적 의도는 숙련(熟練)의 의도이거나 아니면 도덕의 의도이거나 그 어느 것이다. 전자에 있어서 위급한 환자에게 의사가 아닌 사람이 어떤 조치를 하거나, [내기]를 하는 경우처럼, 임의의 우연적인 목적에 대한 것이요, 이처럼 우연적이기는 하지만 어떤 행위를 위한 수단을 실제로 사용하는 근거를 주는 실용적 신앙(pragmatischen Glauben)이 여기에서 생긴다. 그러나 후자는, 단적으로 필연적인 목적에 대한 것으로서 여기에서는 도덕적 신앙(moralischen Glauben)이 생긴다.
그런데 실용적 신앙은 얼마가지 않으면 스스로가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내기]에 있어서, 누구라도 가끔 자기의 주장을, 그러면서도 자신만만하고 굽히기 어려운 대담성에서 선언하지만, [내기]는 이런 사람을 낭패보게 한다. [내기]를 하면 할수록 몰랐던 사실이 비로소 알려진다. 즉, 자기가 오류였을지 모르는 일이 충분히 가능함이 결국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처음 의기양양(意氣揚揚)했던 판단이 위축되고, 그는 극도로 비겁하게 되며, 그러므로서 이러한 신앙이 그렇게 충분한 것이 아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이론적 판단 중에서도, 실천적 판단과 유사한 것이 있고, 이런 실천적 판단이 가지는 의견에 대해서 신앙이란 말이 적합하므로, 이러한 신앙을 교의적(敎義的) 신앙(doktrinalen Glauben)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굳센 의견이 있다. 가령 하나님이 자연 중의 모든 만물을 현명한 목적에 쫓아서 배치했다고 하는 전제가 자연을 탐구하는데에 유효한 것이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억견을 가지게 된다. 또 그러한 신앙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보면 이러한 신앙은 엄밀한 의미에서 실천적이 아니고, 그러므로 하나의 고의적 신앙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신앙을 산출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항상 자연에서 출발함으로써 자연신학(Physikotheologie)에 속하며, 도덕적 신앙이나 도덕 의식에 기인한 도덕적 신학은 못된다.
이상과 같은 것에 대하여 도덕적 신앙은 전혀 다르다. 도덕법에 따르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것은 절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신이나 내세는 이러한 신앙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도덕법에의 복종이라는 목적이 확고해서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목적을 타당하게 하는 조건 즉, 하나님과 내세라는 조건에 신앙이 없다면 도덕적인 원칙들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 등을 도덕적으로 확실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 등을 도덕적으로 확신(確信)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말은 하나님과 내세에 대한 신앙은 거의 도덕심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도덕심을 잃어버릴 위험이 없는 것과 같이 신앙이 없어질 것을 걱정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확신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성신앙이 도덕심의 전제 위에 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도덕법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의 경우에 이성의 제출하는 문제가 한갓된 사변에 대하는 과제가 되지만 회의적인 것이 대두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나 내세의 존재가 도덕법의 기초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그들이 하나님과 내세를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상에서 고찰된 것으로 볼 때, 순수이성의 규준을 몇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결국 이성의 선험적 사용의 제약을 고찰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실천이성비판]에서의 과도(過度)를 위한 준비라고 볼 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자유 그리고 내세가 실천적인 측면에서 인정되고 있음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Ⅳ. 순수이성의 건축술

칸트에 있어서의 건축술(Architektonik)이란 학적 체계를 세우는 방법을 의미한다. 여기서 체계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이념 아래에서의 다양한 인식들의 통일"인 것이며, 그것에 의하여 다양의 범위와 그것의 부분 상호의 위치가 선천적으로 한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념 즉, 학적 체계의 이성의 개념은 목적성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목적과 합치하는 전체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그것의 부분이 통일되는 원리하고도 볼 수 있다. 즉 전체가 하나의 목적원리 아래 집적(Coacervatio)이 아니라 조직(Articulatio)인 것이다.
이러한 체계적 이념을 실현하자면, 목적의 원리로서 이념은 도식(Schema)을 필요로 한다. 학적체계에의 도식은 [이념에 따라서]전체를 부분들에도 분류해야 하고, 따라서 선천적인 윤곽을 포함해야 한다. 이와 같은 도식은 처음에는 거의 이념에 합치하지 않지마는, 학문의 발달과정에서 점진적으로 그 이념에 합치하게 된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인식능력의 일반적 뿌리는 두 개의 줄기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즉 "이성적 줄기와 경험적 줄기"가 그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성이란 상위(上位)에 속하는 전반의 인식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식의 내용을 도외시해서 인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에, "모든 인식은 역사적(historidch)이거나 혹은 이성적"이다. 역사적 인식은 주어진 것으로부터 인식하는 것이다. 외부에서 주어진 재료를 소유하는 사람은 오직 역사적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체계적이더라도 그것이 외부에서 주어진 것인 한, 그것은 역사적 지식임에 불과하다.
이에 대하여 이성적 인식은 이성의 일반적 원천에서 즉, 원리에 기본할 때에만 주관적으로도 이성적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최고의 개념과 원칙에 의거해서 하는 인식이다. 최고의 개념과 원칙을 자신의 이성에서 캐어내는 사람은, 그때 그때의 문제에 대해서 자주적 판단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사람만이 비판적 능력이 있는 자요, 역사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버리기도 한다.
모든 이성의 인식은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개념에서의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개념의 구성에서의 인식이다. 전자를 철학적 인식이라 하고 후자를 수학적 인식이라고 한다.
철학적 인식의 체계가 본래는 철학이요, 이런 철학을 객관적으로 본다면 하나의 이념이다. 형식적으로 볼 때, 철학도 체계적인 특징을 가져야만 한다. 즉 그 진술 하나 하나는 전체 내에서 의미를 가지고 그 지위를 정당화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철학을 실제로는 하나의 있음직한 학문의 이념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체계를 세우려는 모든 기도는, 이 이념을 최대로 완전하게 실현할 것을 노리는 바이다. 그것을 실현될 때까지는 "사람들은 철학을 배울 수는 없다. 왜냐하면 철학이 어디에 있는지, 누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지, 그것이 어디에서 인식되는지가 아직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들은 단지 철학함, 즉 철학적 사색(Philosophieren)을 배울 수 있을 뿐, 철학을 배울 수는 없다는 칸트의 말은 철학체계의 이상적 원형을 대표할만한 모상이 아직 나타나지 않는 철학의 잠정적인 역사적 상대와 관련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눈앞에 주어진 어떤 한 철학체계를 배운다고 나설 수는 없는 것이다. 각자는 자신 안에 있는 철학적 이성을 계발하고, 자기 이성의 '생산적 힘'을 발동시켜 이상을 최대로 실현시킬 수 있는 길로 나아가야만 한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철학의 개념은 순학술적 개념(Schulbegriff)일 뿐이다. 오직 학문으로서만 구해지는, 즉 지식의 체계적 통일 이외엔 아무것도 아닌 따라서 인식의 논리적 완전성만을 목적으로 삼는 인식의 한 세계이다. 그러나 완성된 국면에서는 철학의 세계개념(Weltbegriff)이 있어왔다. 세계개념으로서의 철학은 모든 인식의, 인간이성의 본질적 목적(도덕적 목적)에 대한 관계를 다루는 것이요,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다. 그리고 이 개념은 [이성의 기술자]가 아니라, [인간 이성의 입법가]로서의 철학자를 전제한다.
인간이성의 입법으로서의 철학은 자연과 자유와의 두 가지 대상을 가진다. 자연에 자연법칙이 타당하고, 자유에는 도덕법칙이 타당하다. 자연철학은 존재하는 것에 관계하고, 도덕철학은 존재해야 할 것에 관계한다.
순수이성의 철학은 이성능력을 모든 선천적 순수인식에 관하여 연구하는 예비적인 학이거나 혹은 순수이성의 체계의 학이거나 이다. 전자를 비판이라고 말한다면, 후자는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 형이상학은 순수이성의 사변적 사용의 형이상학과 실천적 사용의 형이상학으로 구별된다. 즉 자연의 형이상학과 도덕의 형이상학이다. 전자는 모든 만물의 논리적 인식이며, 한갓된 개념에 유래하는 순수이성의 원리를 포함하는 것이며, 후자는 행위를 선천적으로 규정하는 원리를 포함한다.
그런데 도덕성이란 선천적으로 원리에서 도출시킬 수 있는 행위의 유일한 합법칙성이다. 그러므로 도덕의 형이상학은 본래는 순수 도덕학이요, 그것의 근거에는 경험적인 조건, 즉 인간학이 없는 것이다. 물론 사변적 이성의 형이상학은 협의의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순수 도덕학은 순수이성에 기본한 인간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인간의 특수 부문에 속하는 한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에다가 도덕의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형이상학의 이념은 사변적 인간이성이 오랜 역사를 가졌듯이 오랜 이전부터 있었다. 과학적 방법으로 사변하건, 통속적 방법으로 사변하던 간에 이성은 오랫동안 사변하여 온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과를 엄밀히 구별하지 않았다. 이러한 구분을 체계적으로 한 최초의 사람이 칸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협의의 형이상학은 선험적 철학과 순수이성의 자연학에서 성립한다. 선험적 철학은 오성과 이성 자신을 고찰한다. 그것은 주어진 객체에 대하여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일반에 관계하는 개념과 원칙을 고찰한다. 순수이성의 자연학은 자연을 고찰한다. 즉 주어진 대상의 총괄을 고찰한다. 그런데 이런 이성적 고찰에서의 "이성사용은 자연적이거나 혹은 초자연적이다." 이 말은 엄밀하게 말하면 내재적이거나 혹은 초험적이다. (entweder immanent oder transzendent). 전자는 이성의 인식이 경험에 있어 사용되는 한에서 자연을 다루는 것이며, 후자는 일체의 경험을 초월한다. 또 전자는 선험적 세계 인식이라면, 후자는 전자연과 초자연적 존재와의 관련에 관한 자연학 즉, 하나님의 선험적 인식인 것이다.
이와 반대로 내재적인 자연학은 자연을 감관의 모든 대상의 총괄로서 고찰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대로의 자연을 고찰한다. 내재적 자연학의 대상은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의 외감의 대상 즉, 물체적 자연이요, 다른 하나는 내감의 대상 즉, 마음이다." 여기서 물체적 자연의 형이상학은 물리학이라고 말하여 지는데 이것은 그것의 선천적 인식의 원리들만을 포함한 것이기 때문에 이성적 물리학(rationale phsik)이다. 그리고 마음 즉, 사고하는 자연의 형이상학은 심리학이라고 말하고, 이것은 생각하는 자연의 이성적 인식(rationale Erkenntnis), 즉 이성적 심리학만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형이상학의 전 체계는 네 가지 주요부문"으로 성립하고 있다.
(1) 존재론(Der Ontologie)
(2) 이성적 자연학(Der rationalen Physiologie)
(3) 이성적 우주론(Der rationalen Kosmologie)
(4) 이성적 신학(Der rationalen Theologie)
이와 같이 순수이성의 철학본래의 이념은 이러한 분류를 지시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분류는 이성의 본질적 목적에 따라서 건축술 적이며 한갓된 기공적(技工的)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요행에 의해서 설정된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분류는 불변적이요, 입법적인 것이다.
지금까지 칸트의 순수이성의 건축술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그것은 순수이성의 체계를 세운 것이다. 즉 이성의 인식을 역사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으로 나누고, 이성적인 것을 다시 수학적인 것과 철학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철학적인 것을 또다시 순수한 철학과 경험적인 철학으로 나눈 후 이상에서 논하였던 바와 같이 형이상학의 체계를 세운 점은 칸트에 있어서 커다란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순수이성의 역사]에 관한 매우 짧으면서도 의의 있는 마지막 절에서 칸트가 관심을 갖는 일은 실제로 형성되었던 철학적 이론의 서술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철학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성의 법칙에서 발전된 철학적 사고의 전형을 제시하는 것이다. 칸트는 형이상학의 역사적 방향과 변천을 "세 가지 의도"에서 찾는다.
첫째, "철학의 대상을 중점에 놓고 볼 때, 자연주의적 사고(감각주의 철학)와 관념론적 사고(지성주의 철학)가 가능하다. 전자는 에피쿠로스를, 후자는 플라톤을 그 노선의 대표자로 칸트는 보고 있다. 또한 전자는 감관(感官)만이 진리와 실재를 인식하는 것으로, 이것은 진정한 대상은 감성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며, 후자는 오성(悟性)만이 진리와 실재를 인식하는 것으로서 이는 진정한 대상은 가상적(可想的)이라는 것이다.
둘째, 순수이성 인식의 원천에 관한 문제를 중점에 놓고 보면, 경험론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에서 인식이 성립한다고 하였고, 지성론자(Noologist)는 이성에서 인식이 성립한다고 보고 있다.
셋째, 철학의 방법과 관련해서 볼 때, 자연주의 노선과 과학주의 노선을 구분한다. 순수이성의 자연주의자들은 과학없이 건전한 이성의 길을 걸으면서 철학에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고집하는 자들이다. 과학주의적 방법을 주장한 자들을 볼프처럼 독단적이거나 휴움처럼 회의론적 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나 체계의 이념을 심중에 가진다는 점에서는 공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비판적 방법(Kritische Methode)뿐이다. 그것은 칸트가 순수이성의 수많은 시도들을 거친 그의 역사적 발전 가운데서 얻은 철학적 반성의 관점에서 포착할 수 있었던 방법이다.
넷째, 비판적 방법의 본질이 실천이성 우위의 사상을 주장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 이론 이성의 비판에서도 이미 나타나 있고, 선험적 방법론의 가장 중요한 의도도 그러한 주장에 귀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관심은 결국 실천적이요, 사변이성의 관심조차도 제약된 것임에 불과하며,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만 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방법은 이론철학의 경계선을 넘어서서 실천이성의 사고에로 발돋움 해야하고, 이러한 실천이성의 사고가 형이상학적 이념에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된다.

Ⅴ. 결 론

지금까지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에 있어서 [선험적 방법론]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그런데 이 결론은 칸트의 사상에 대한 비판의 영역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러므로 비판을 칸트 사상의 장점과 동시에 공적을 지적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을 것이다.
첫째 장점으로 보는 점은 형이상학에 있어서 비판의 정신을 확립하였다는 점이다. 우리들은 자기의 인식능력을 무조건으로 믿는데서 과거의 형이상학이 독단적인 허구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고, 여기서 고민하고 있었다. 이러한 독단과 언어의 혼란을 막을 수 있었음은 우리들의 인식능력이 자기에게 부과한 중대한 사명이라 보아야 한다. 이러한 점들을 소상히 다루었다는 의미에서 칸트의 공이 있다고 할 것이다.
둘째, 이성을 선험적으로 사용할 경우에, 자기를 방자와 오류에 빠지게 하지 않기 위한 훈련의 필요성을 내세웠던 점과 또 이 때문에 순수이성의 전 철학도 오로지 이 소극적 효용을 문제로 삼았고, 개개의 미망은 검열을 통해서, 오류의 원인은 비판을 통해서 제거될 수가 있다고 보았다.
셋째, 도덕적 이념이 신적 존재의 개념을 성립시켰다고 보는 점이다. 이것은 사변적 이성의 신적 존재의 개념의 정당성을 확신하도록 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적 존재의 개념이 도덕적인 이성원리와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이성의 실천적(도덕적)사용만이 공적을 갖게 된다. 즉, 사변이 공상만 하고 주장할 수는 없는 인식을 우리의 최고 관심과 결합시켜, 이런 인식을 확실히 논증된 교의로 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성의 본질적 목적에 있어서 단적인 필연적인 전제이도록 하는 공적이다.
마지막으로 칸트는 "형이상학은 인간이성의 일체 개발을 완성하는 것이다." 라고 보는 점이다. 비록 형이상학이 학으로서, 일정한 목적에 대해서 가지는 영향을 도외시하더라도, 형이상학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의 여러 요소와 최상위의 준칙에 의해서 이성을 고찰하는 것이기에 말이다. 이성의 여러 요소와 준칙이란, 약간의 [학]을 가능하게 하는 데에 대해서, 또 모든 학의 사용에 대해서 그 근저에 두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형이상학이 한 갓 사변으로서 인식을 확장시키기보다는 오류를 방지하는 데에 쓰인다는 것은, 그것의 큰 가치와 품위와 명망을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칸트에 있어서의 [선험적 방법론]이라고 하는 것은 순수이성의 완전한 체계를 위한 형식적 조건들을 규정함을 알 수 있었고, 이런 점들이 우리들의 인식을 철저히 할 수 있겠끔, 즉 사전에 어떠한 오류에도 빠지지 않도록 방지할 수 있게 되었음은 칸트의 큰 공적이라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참 고 문 헌
1. Kant. I.,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Hamburg : Felix Meiner, (1961)
2. _______ ,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Hamburg : Felix Meiiner, (1967)
3. _______ , Kritik der reinen Vernunft, Hamburg : Felix Meiiner, (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