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주체성, 그리고 개별자
최 준호(고려대)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예술의 자율성은 심히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모토는 이제 역사의 이면으로 사라져야 하는 듯이 보인다. 구체적인 일상의 삶과 동떨어진 예술은 고답적인 미술관 한 귀퉁이의 담론에서나 그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의구심과 관련하여 간과할 수 없는 사태가 이른바 작품개념의 위기이다. 근대 이후 심미적 경험은 예술의 영역에만 국한된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의 중심에는 늘 예술작품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생각은 더 이상 완고하게 유지되기 어렵다. 심미적인 경험은 예술의 영역에만 국한된 경험이 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영역으로 확장되었다는 사실은 확고부동한 것처럼 보인다. 이제 심미적 경험을 얘기할 때 예술작품은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고유성이 부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배타적인 것으로서의 예술의 경험이나 혹은 다른 어떤 경험보다도 우월한 것으로서의 예술의 경험이 아니라, 일상의 다른 경험과 관계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한에서 그 경험들과 구별되는 예술의 고유한 경험에 대한 철학적 모색은 여전히 가능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가능성의 한 단초를 칸트의 심미적 경험에 관한 분석에서 발견할 수 있다.『판단력비판』에서 성찰되고 있는 심미적 경험은 일상의 구체적인 경험의 영역에서 동떨어진 이른바 내재적 초월성으로서의 주관성의 영역에 놓인 것으로만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섬세한 눈을 갖고 살펴볼 경우 그러한 생각이 일면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심미적 경험을 일상의 경험들과 관계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러한 한에서 그 경험들과 구별되는 차원에서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칸트의 심미적 경험의 고유성은 두 가지로 압축시켜 말할 수 있다. 그 경험은 감정에 기초하는 경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 일반의 경우와 달리 감정의 대상에 매이지 않는다. 그것은 이른바 무관심적 만족에 기초한 경험이다. 아울러 그 경험은 감정에 기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편타당성을 담고 있다는 특성을 지닌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점과 함께 언급되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 칸트의 심미적 경험의 초점은 이른바 추론적․분별적 사유를 통해서는 그 본래의 모습이 해명되지 않는 개별적인 것으로 향해 있다. 동시에 위와 같은 특성을 지니는 심미적 경험은 자기 모순적이라 할 만큼 그 자체 내에 부정성을 담고 있다. 그것은 심미적이지 않은 요소와 관계하는 한에서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심미적이지 않은 요소를 부정하는 한에서 그 고유성을 드러내는 역동적 부정성을 자체 내에 함축하고 있다. 칸트의 분석에서 분명하게 확인되는 이러한 역동적 부정성이야말로 일상의 구체적인 다른 경험들과 관계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한에서 그 경험들과 구별될 수 있는 심미적 경험을 정초지을 수 있게 해주는 단초이다. 그리고 심미적 경험이 이러한 부정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술의 고유성을 심미적 경험에서 구하되, 배타성이나 절대적 주권성(sovereignty)으로서의 심미적 경험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예술철학의 입장과 관련하여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아래에서 필자는 철학적 미학이 성립된 17․18세기의 심미적 경험에 관한 논의를 칸트의 논의를 중심으로 개별성(individuality)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볼 것이다. 그 다음에 개별적인 것의 고유성을 훼손하지 않고 생생하게 파악하는 데 그 핵심이 놓여져 있는 심미적 경험은 그 자체 내에 부정적 역동성을 담고 있음을 칸트의 논의에 기초해서 구명할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궁극적 목적은 심미적인 경험에 기초하여 예술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논의 차원을 제고해 보려는 데 있다.
2. 근대 예술론과 주체성의 새로운 이해
17․18세기 고전주의 예술론은 이른바 새로운 시대의 주체성을 배제하고 생각하기 어렵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로 특징짓곤 하는 근대의 주체는 예술론의 영역에서도 그 위력을 발휘했다. 데카르트는 예술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은 당시의 예술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예술 이론가들은 예술의 영역도 이성에 의해 정복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고전주의 예술론이 수학, 물리학과 마찬가지로 정확성의 이상을 목표로 삼았던 것은 이상스럽지 않다. 요컨대 고전주의 예술 이론가들은 예술에서도 수학과 자연과학이 취한 것과 똑같은 방법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프랑스 고전주의 예술론을 대표하는 브알로(Boileau)의 논의는 데카르트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그의 주저『시론 L'art poétique』(1674)은 데카르트 철학에 기초한 가장 전형적인 예술론이라고 일컬어진다. 브알로가 보기에 진정한 예술 작품은 주관적 상상의 세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예술을 지배하는 법칙은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가에 의해 창안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물의 본성 속에서 발견해내는 객관적 법칙이다.
따라서 브알로에게 예술 혹은 예술가의 가장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요소는 이성, 양식(good sense)이다. 그래서 그는 “시인이여 이성을 사랑하라”라고 말하고 있다. 브알로에게 예술의 목표는 인간(혹은 자연)의 보편적 특징이나 전형적인 특징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참된 예술과 그렇지 못한 예술을 가르는 기준이었다. 기하학자가 곡선의 보편이론을 확립하려고 하듯이, 브알로는 시 장르의 보편이론을 확립하려고 시도하였다
미술이론 분야나 음악이론 분야의 경우에도 브알로와 같은 데카르트주의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영국의 고전주의 미술론을 확립시킨 조수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의 경우를 보자. 그에게 있어서도 핵심적인 주제는 이성의 역할이다. 그는 이성이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연을 추상하여 고찰하고, 그리고자 하는 상(像) 하나 하나에서 그 종(種)의 특성을 재현할 것을 주문하였다. 요컨대 그는 이성을 통해 사물들의 보편적인 형태를 그릴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회화의 법칙이 존재하며, 따라서 즐거움을 주는 모든 대상은 어떤 원칙에 입각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물론 그는 회화의 단 하나의 법칙이 있다고 보지 않았다. 수많은 법칙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중요한 것은 그 법칙들이 비실체적인 것처럼 보이고, 또 그것을 글로 옮기는 것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예술가의 마음 속에서는 분명하게 파악되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음악이론에서 가장 두드러진 데카르트주의자는 장 필립 라모(Jean-Phillippe Rameau)이다. 그는 『자연의 원리로 환원된 화성론 Traité de l'harmonie réduite à ses principes naturels』(1722)에서 그러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거기서 “음악은 어떤 법칙들을 지녀야만 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이 법칙들은 자명한 원리에서 도출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원리는 수학의 도움 없이는 우리가 거의 알 수 없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데카르트주의로 요약될 수 있는 이러한 고전주의 예술론에서 자연, 이성, 미, 진리, 불변의 법칙은 동의어였다 고전주의 예술론에서 중요한 것은 보편적인 인간상, 보편적인 미를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주의 예술론의 한계를 뛰어 넘어 예술론을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시키게 한 근본동력은 예술 자체의 변화나 혹은 몇몇 예술이론가들의 성찰에 놓여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 근본동력은 주체성의 이해에 대한 변화에 놓여 있다고 해야 타당하다. 달리 말하자면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의 합리론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예술철학의 입장이 나올 수 있었다.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합리주의 철학은 감성적인 것, 혹은 감성적인 인식을 폄하하였다. 감성적․감각적 인식을 신뢰하지 않는 합리주의 철학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철학적 미학이 생겨났다. 철학적 미학은 합리론에 의해 폄하되었던 감성적 인식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지켜내려는 노력의 결과로 생겨났다.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서 새로운 예술이론이 가능해졌으며, 추론적 사유에 기초한 인식에서와는 달리 심미적 경험에서는 개별자를 생생하게 파악될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된 일련의 철학적 논의는 바움가르텐을 거쳐 칸트에 이르러 완결된 모습을 드러낸다.
데카르트에게 감성적 혹은 감각적 인식은 늘 오류의 원천을 의미한다. 그것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데카르트에게 감성적․감각적 인식은 학문의 기준이 되는 명석․판명한 인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다. 명석․판명함이라는 기준을 갖고서는 해명될 수 없는 사태에 철학의 초점이 모아지게 된다. 파스칼(B. Pascal)의 용어를 빌어서 표현해보자면, 기하학적인 정신(esprit géometrique)이 아니라, 섬세한 정신(esprit de finesse)이 요구되는 사태가 18세기 철학의 화두 중 하나였다. 예술의 경험에 담긴 고유한 특성은 이처럼 감성적인 것에 대한 합리주의자들의 의심에 맞서서 그것의 역할과 의미를 옹호해내는 데서 분명해졌다. 달리 말하자면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예술의 경험의 고유성은 합리론적인 전통에서 보자면 알 수 없는 것(je ne sais quid) 혹은 비합리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확실해졌다.
합리론자들에 맞서 감성적․감각적 인식의 의미가 적극적으로 성찰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인식 전체가 성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감성적․감각적 인식들 중 특별한 것, 즉 미의 경험이 성찰의 주된 대상이었다. 이때 문제의 핵심은 미를 경험하는 능력인 취미가 공통감(sensus communis)에 기초하고 있는가, 또 그것은 진리를 인식하는 것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물음을 둘러싼 논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미를 경험하는 능력이 공통감에 기초하고 있고, 미의 경험이 개념적ㆍ추론적 사유에 기초한 경험을 할 때와는 다른 독자적 의미의 진리를 가능케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전개될 경우, 감성적 인식을 폄하했던 합리론의 주장은 수정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입장에 서서, 예술과 결합된 미에다 철학적 지위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실상 사리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데카르트가 잘 파악하고 있듯이 예술의 영역은 명석․판명함과 수학적 엄격성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미는 지성의 원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감성과 감정에 기초한 것이라는 생각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해서 철학적 미학의 시조로 불리우는 바움가르텐(A. G. Baumgarten)에 의해 예술과 미와 철학이 유기적으로 결합된다.
잘 아다시피 바움가르텐은 미학(aesthetica)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에 따르면 미학은 감각적인 인식의 학문이다(scientia cognitionis sensitivae). 즉 심미적 인식은 기본적으로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인식이다. 그런데 그는 합리론자들과 달리 그러한 인식들을 논리적인 인식에 종속되는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의 자율성을 지닌다고 본다. 심미적 인식도 그것 나름대로의 완전성(Vollkommenheit)을 통해 진리를 인식하는데 기여한다는 것이 바움가르텐의 주장이다.
바움가르텐에 따르면 심미적 인식들 중에는 판명하지는 않지만 명석한 것이 있는데, 이는 사태를 보다 더 선명하게 파악하는데 기여한다. 예술,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어(詩語)를 통해 미를 경험하고 이를 통해 사태를 좀더 명석하게 인식하는 경우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이처럼 바움가르텐은 예술의 미에 인식론적인 지위를 부여했고, 이로써 미학이 독자적인 철학의 한 영역으로 성립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을 통해서 예술의 경험은 개별적인 것의 고유성을 훼손하지 않고 사태를 파악하는 특성을 지닌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예술의 경험은 종차(種差)에 의해 사태를 파악하는 추론적ㆍ개념적 인식과 달리, 개별적인 것을 그 자체로 파악하는 사유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명확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개념적 사유는 질적 고유성을 지니는 개별적인 것들을 추상화 작업을 통해 동일성 아래 묶는다. 이때 개별적인 사물들의 질적 특성들이 사상(捨象)된다. 마치 보석공이 보석을 팔기 위해서 세공을 할 때 잘려나가는 부분들처럼, 개념적 사유에서는 불가피하게 개별적인 것들의 질적 특성들이 잘려나가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반해 심미적인 경험에서는 개별성이 훼손되지 않는다. 심미적 경험은 개별적인 것들의 고유성을 생생하게 파악하는 경험이다. 바움가르텐은 이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예술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근대적 주체가 데카르트적인 주체로 국한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심미적 경험과 개별적인 것
보이믈러(A. Baeumler)와 카시러(E. Cassirer)는 17․18세기 서구사상사의 흐름 전반에 대한 견해에서뿐만 아니라, 그 흐름의 각론에 대한 견해에서도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단력비판』의 핵심과제와 관련해서 이 두 사상가의 생각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판단력비판』의 핵심문제는 당시 학문의 기준이 되었던 수학적 정신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 양자의 공통된 생각이다. 칸트의 말로 바꾸어 보면 ?순수 오성에 의해서는 규정되지 않은 특수자?(KU, Einleitung, XXXVI)의 문제야말로 『판단력비판』의 핵심과제이다. 그리고 미와 숭고가 그러한 특수자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주지하다시피 심미적 경험은 대상의 속성들(Eigenschaften)을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것에서 벗어나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심미적 경험을 통해서 대상을 파악할 때 오히려 그 대상이 더 생생하게 파악된다. 추론적 사유를 통해서 대상을 객관적으로 규정할 경우에는 불가피하게 그 대상의 고유한 질이 잘려 나간다. 이에 반해서 심미적 경험의 경우에는 추론적 사유가 그 추상적 특성 때문에 상실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상실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심미적인 것을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 올린 바움가르텐도 이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심미적 경험을 할 경우에는 개별적 대상의 생생함이 상실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논의 내에서 이 문제가 충분하게 해명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미적 경험을 할 때의 인식능력과 대상의 관계, 혹은 인식능력들의 관계를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칸트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심미적 경험을 할 때, 그 대상이 보다 생생하게 파악된다는 사실을 칸트 역시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경우에는 그가 심미적 경험을 섬세하게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기초해서 심미적 경험을 할 때에는 개별자의 고유성이 상실되지 않고 생생하게 파악될 수 있다는 사실이 좀더 근거지어진 형태로 구명될 수 있다.
추론적 사유에 의한 대상의 인식에서 인식능력들의 관계는 규정적인 관계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에 반해서 심미적 경험에서 대상을 파악하는 경우 그 관계는 자유로움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때 인식능력들은 조화로운 관계나 혹은 길항의 관계에 놓인다.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이 규정적인 원칙에따라서 그 관계가 맺어질 경우 개별적인 것의 고유한 질적 특성이 일정 부분 사상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렇지만 인식능력들이 조화로운 유희의 관계에 놓이든 혹은 상호 긴장의 관계에 놓이든 간에 심미적 경험을 할 때에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칸트에 의하면 추론적 사유를 통해서 대상을 인식하는 경우 그에 수반되는 인식 주관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그 두 가지란 ?직관의 다양?을 ?종합?하는 상상력의 활동과 그러한 종합을 하나로 통일하는 오성의 통일 활동이다. (KrV, 103 참조). 이때 중요한 것은 오성의 통일 활동이다. 상상력의 종합은 오성의 통일 활동아래 포섭되는 한에서만 의의를 지닌다. 상상력이 종합한 표상들에다 개념을 통해서 통일성이 부여됨으로써 추론적․개념적 인식이 생겨난다. 이때 그러한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오성에 귀속되어 있다. 오성이 개념들을 통해서 상상력이 종합한 표상들에다 통일성을 부여함으로써 추론적인 대상 인식이 생겨난다(KrV, 104 참조).
이처럼 추론적 사유를 통해서 대상을 인식하는 경우에 직관의 다양은 오성의 규정적 원칙아래 놓여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떠한 것도 사고되거나 인식될 수 없다?(KrV, 137). 달리 말해 이 경우 상상력과 오성의 관계는 도식적 관계이며, 따라서 이는 개별적인 것의 고유한 질을 훼손하지 않고 생생하게 파악하는 것과 거리가 있음을 함축한다. 특수자인 자연 사물은 인식에 앞서 인식 주관에 미리 마련되어 있는 보편적인 것에 포섭됨으로써 그 객관적인 특성이 규정되고(KrV, 92-94 참조), 이를 통해 개별자의 고유성이 부분적으로 상실되는 사태가 불가피하게 동반된다.
심미적 경험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심미적 경험의 경우 상상력의 활동은 규정적인 원칙에 따라서 오성의 활동에 포섭되지 않는다. 심미적 경험에서 상상력과 오성의 관계는 규정적 원칙에 따라야만 하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 관계는 대등한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미를 경험할 때 우리의 인식능력들이 어떤 규정적 원리에 제한 받지 않는 ?자유로운 유희?(ein freies Spiel, KU, §9, 28)의 상태에 놓인다는 언급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심미적 경험에서 인식능력들이 ?자유로운 유희?의 상태에만 놓이는 것은 아니다. 숭고함을 경험할 때에는 인식능력들이 자유로운 유희의 상태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길항관계에 놓인다.
그러나 개별자의 고유성을 파악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출 경우, 인식능력들이 자유로운 유희의 상태에 놓이느냐 그렇지 않으면 길항관계에 놓이느냐 하는 점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심미적 경험의 경우 인식능력들이 어떤 규정적인 원리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심미적 경험을 할 경우에는 개별자의 고유성이 훼손되어 파악되는 일이 없음을 함축한다.
이러한 심미적 경험은 그 자체 내에 독특한 역동적 부정성을 담고 있다. 즉 심미적 경험은 심미적이지 않은 요소와 매개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심미적이지 않은 요소와 구별되는 한에서만 그 고유성을 드러낸다는 사실이 심미적 경험에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심미적 경험이 배타성이나 절대적 주권성으로부터 벗어나 있으면서도 예술의 고유성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이점 역시 칸트의 논의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아래에서 이를 구명해볼 것이다. 그 이전에 칸트의 심미적 경험과 관련하여 가장 흔하게 제기될 수 있는 문제, 즉 칸트의 심미적 경험 역시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과만 관계되어 있는 경험이라는 생각이 단견이라는 사실부터 해명해보기로 하겠다. 예술의 고유성을 심미적 경험의 탄력성을 통해서 옹호하려고 할 경우, 그 경험의 논의 지평 역시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4. 심미적 경험의 반성활동
칸트 철학의 핵심은 감각 경험적인(empirisch) 개념들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건 늘 선험적으로 요구되는 개념들을 해명하는 데 있다. 칸트에서 철학적 언명은 우리가 세상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는 것에 대한 언명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우리들의 이해의 근본적인 형식에 대한 언명이다. 칸트 철학이 해명하고자 하는 개념들이란 이러한 형식에 필수적인 개념들이다. 심미적 경험에 대한 분석과 관련해서도 칸트의 이러한 입장은 견지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심미적 경험을 특징짓는 반성활동에 대한 칸트의 분석 역시 내재적 초월성으로서의 주관성과만 관계되어 있다고 얘기된다.
그러나 그 반성활동은 추론적 인식의 경우와 달리 일상의 경험대상들과 동떨어진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로서의 주관성의 영역과만 관계하는 반성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의 구체적인 경험대상들과도 관계하는 반성활동이다.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으로서의 주관성의 영역과 관계하는 반성활동을 철학적 반성활동이라 한다면, 칸트의 논의에서 철학적 반성활동과 심미적 반성활동은 한편으로 동일한 차원의 반성활동을 공유한다. 두 반성활동의 경우 모두에서 우리들은 우리 자신,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들의 근본적인 판단형식으로 귀환하고 있다는 사실을 칸트는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심미적 반성활동은 생생하게 지각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하나의 대상과 관계 맺는 반성활동임을 칸트는 함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철학적 반성활동과 심미적 반성활동은 구별된다.
이렇게 볼 때 칸트의 논의에서 심미적 경험은 추론적 인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 즉 우리들의 판단의 형식과 관계되어 있는 경험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생생하게 지각할 수 있는 삶의 어떤 구체적 대상과 느낌의 차원에서 관계하는 경험이다. 칸트에서 철학적 반성활동의 경우 이와 같은 대상연관성, 즉 어떤 구체적인 대상과의 연관성은 그것에 본질적이지 않다. 철학적 반성 활동의 핵심은 경험 일반 혹은 경험 대상 일반이 가능할 수 있는 선험적 조건들과 관련하여 우리가 추론적으로 완수하는 활동에 놓여 있다. 이에 반해, 심미적 반성활동의 핵심은 생생하게 지각 가능한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감정의 차원에서 경험하는 가운데 수반되는 반성활동이라는 데에 놓여 있다.
칸트에서 심미적 반성활동과 철학적 반성활동간의 이러한 차이는 ?모든 취미판단은 단칭판단이다?(KU, §8, 24)라는 언급에서 잘 드러난다. 칸트가 분석하고 있는 심미적 경험의 반성활동은 어떤 구체적인 하나의 대상, 예를 들면 “이 장미”, 혹은 “이 백합”이라는 대상을 통해서 우리의 인식능력들이 자유로운 유희상태(혹은 길항관계)에 놓이게 되는 반성활동이다. 달리 말하자면 심미적 반성활동에 수반되는 쾌는 생생하게 지각 가능한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서 우리의 인식능력들이 유희상태(혹은 길항관계)에 놓이게 될 때 생겨나는 쾌이다. 요컨대 칸트의 심미적 반성활동은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마주하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대상들과 동떨어진 반성활동이 아니다.
물론 칸트가 분석하고 있는 심미적 경험의 반성활동과 관계하는 대상은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감각 경험적인 개념들을 통해서 그 객관적 특성을 규정하곤 하는 구체적인 대상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칸트의 심미적 반성활동과 관계하는 대상과 감각 경험을 통해 규정되는 대상들 간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앞서의 고찰에서 이미 시사되는 것처럼, 궁극적으로 전자의 경우 그 대상은 그저 ?개념의 능력?이나 ?이념의 능력?과 관계하는 데 반해서, 후자의 경우 그 대상은 특정한 어떤 개념 아래로 도식적으로 포섭됨으로써, 그 개념을 통해 대상의 객관적 속성이 규정된다. 전자의 경우에 우리들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매개로 해서 반성적으로 우리 자신으로 향하는데 반해서, 후자의 경우에는 그것을 분명하게 분별해내려고 태도를 갖고 대상으로 향한다. 이러한 사실은 심미적 경험이 독특한 역동적 부정성을 담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심미적 경험에 기초하여 탄력적인 예술의 고유성을 주장할 수 있는 논거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이점은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분석될 것이다.
칸트가 분석하고 있는 철학적 반성활동과 심미적 반성활동의 차이는 전자를 필연성으로, 그리고 후자를 우연성으로 특징지어 설명할 수도 있다. 철학적 반성에서 우리들의 인식의 형식은 대상 일반이 가능할 수 있는 선험적 조건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경우 직관의 다양을 종합하는 능력(상상력)과 그것을 개념 아래로 가져가서 판단하는 능력(오성)의 합치는 필연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에 반해 심미적 반성활동의 경우 상상력과 오성(혹은 이성)의 관계는 우연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칸트의 심미적 반성활동은 일상의 삶에서 마주하는 어떤 대상과 관계맺음을 함축하는 반성활동이기 때문에 그 반성활동의 대상연관성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라는 말로 특징지어 진다. 내가 어떤 장미꽃을 보고 미를 경험할 경우를 생각해보자. 나는 반드시 그 장미꽃을 보고 미를 경험해야할 필연적인 이유나 근거는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그런 경험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연적으로 그런 경험을 한 것이다. 칸트의 심미적 경험은 어떤 특정한 대상을 통해 미를 경험할 경우 상상력과 비규정적인 오성은 자유로운 유희에 놓인다는 필연성의 차원뿐만 아니라, 바로 그 경험이 반드시 경험되어야 했던 것은 아니라는 우연성의 차원도 동시에 함축한다.
이처럼 칸트의 심미적 경험은 초월적인 주관성의 영역에만 위치하고 있는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의 구체적 경험의 차원과도 관련되어 있는 경험이다. 요컨대 칸트의 심미적 경험은 일상의 경험들과 동떨어진 차원에서 배타적으로 그 고유성이 논의되고 있는 경험이 아니라, 일상의 경험의 차원을 함축하지만 동시에 그것과 구별되는 차원에서 그 고유성이 분석되고 있는 경험이다.
이제까지의 논의로부터 우리는 칸트의 심미적 경험은 배타성이나 절대적 주권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심미적 경험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일단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심미적인 것이 삶의 영역 전반으로 확장되었고, 작품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롭게 제고되어야 하는 예술의 자율성 요구와 관련하여 칸트의 심미적 경험이 시사해주는 바가 적지 않음을 암묵적으로 말해준다. 이러한 암묵성은 칸트의 논의에서 심미적 경험의 독특한 내재적 부정성이 분명하게 확인된다는 사실을 구명할 때, 더 이상 암묵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요컨대 다른 일상의 경험들과 동떨어진 배타성이나 다른 경험들보다 우월한 주권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예술의 고유성이 아니라, 다른 경험들과 관계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한에서 그 경험들과 구별되는 예술의 고유성은 칸트의 분석에서 분명하게 확인되는 심미적 경험의 내재적인 역동적인 부정성에서 그 단초를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5. 심미적 경험의 역동적 부정성
주지하다시피 심미적 경험이 철학의 개념으로 주제화된 것은 17-18세기 때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심미적 경험은 이른바 기하학적 정신으로 특징지어지는 합리적 정신이 삶에 폭넓게 뿌리 내린 상황에서, 그것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사태에 주목하는 가운데 철학의 화두로 등장하였다. 심미적 경험은 합리적 정신을 생성의 조건으로 전제로 하면서, 바로 그러한 가운데 그것과 구별되는 고유성을 지니는 경험으로 철학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심미적 경험이 합리적 정신과 관계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한에서만 그 고유성을 드러내는 경험이며, 따라서 그것은 배타성이나 절대적 주권성과는 거리가 먼 경험이라는 점을 입증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심미적 경험이나 심미적 사유를 둘러싸고 전개된 예술사 혹은 예술 철학사를 대강이라도 훑어보면 그러한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심미적 경험은 근본적으로 배타성이나 절대적 주권성과 무관하다는 사실은 심미적 경험에 내재된 독특한 부정성에서 확인된다. 심미적 경험의 쾌에 대한 칸트의 분석을 고찰함으로써, 이 점을 구명해보기로 하자.
칸트에 따르면 심미적 경험의 쾌는 어떤 대상에 대한 쾌가 아니다. 그것은 그 대상과 반성적 거리를 유지하는 데서 생겨난다(KU, B. 155 참조). 어떤 객체의 속성(Eigenschaften)에 대한 직접적 경험을 심미적이라 일컫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경험이 그 객체의 속성에 대한 규정으로부터 벗어나서 주관적인 관계에 놓일 때 그 경험을 심미적이라 일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미적 경험의 쾌는 대상의 속성을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경험에 불가결한 요소(다시 말해 심미적이지 않은 요소)와 매개됨으로써만 생겨날 수 있다. 이는 심미적 경험의 쾌가 어떤 대상에 대한 개별적인 경험내용을 반성하는 데서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심미적 경험의 쾌에는 대상의 객관적 규정으로 향할 수 있는 요소가 그 경험의 불가결한 요소로 전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자면 칸트에 서 심미적 경험의 고유성은 그것이 주관적이라는 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경험은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 다시 말해 어떤 대상에 대한 표상(Vorstellung)을 그 경험의 불가결한 요소로 전제한다. 이 때 그 표상은 대상에 대한 객관적 규정으로 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 요소이다.
심미적 경험의 쾌가 대상을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서 생겨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간과해서 안될 사실은 그와 같은 일이 대상을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데로 향할 수 있는 요소에 의해 촉발되고, 뒤이어서 그러한 요소가 부정되는 데서 심미적 쾌가 생겨난다는 점이다. 심미적 쾌는 심미적이지 않은 요소, 즉 대상을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데로 향할 수 있는 요소와 관계 맺는 한에서, 동시에 그것과 부정적 관계에 놓임으로써 그것과 구별되는 한에서만 생겨날 수 있다.
이처럼 칸트에서 심미적 경험의 쾌는 심미적이지 않은 요소에 의해 발의되어, 그 요소가 부정되는 과정의 결과로서만 생겨날 수 있다. 이러한 한에서만 심미적 경험의 쾌가 도덕적, 감각적 쾌가 구별되는 자율성을 지닐 수 있다. 이는 심미적 경험이 기본적으로 배타성이나 절대적 주권성과 무관하여, 오히려 다른 경험과 관계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한에서 그 경험과 구별되는 고유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이 칸트의 논의에서 분명하게 확인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칸트가 심미적 경험을 분석하고 있는 차원이 이른바 선험성의 영역의 차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결론에 담긴 현재적 의의를 더욱 증폭시킬 수 있게 해준다.
6. 맺음말
심미적 경험은 예술의 영역에 고유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특히 최근 몇 년이래도 그러한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심미적 경험에 대한 집중된 관심과 그에 따른 연구들을 통해, 이제 심미적 경험은 예술의 영역에 제한될 수 없다는 사실이 거의 확실해졌다. 그것은 예술의 영역에서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경험될 수 있다는 주장들이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해가고 있다. 심미적인 것이 예술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위치를 지니는 심미적 경험은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철학사 혹은 예술철학사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이른바 추론적인 사유를 통해서는 파악되지 않는 개별적인 것을 파악하는 문제가 화두로 등장하면서 철학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 경험은 자기 모순적이라 할만큼 자체 내에 독특한 역동적 부정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미적 경험의 고유성은 추론적 사유의 경험과 전적으로 분리된 데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추론적 사유의 경험과 관계하는 한에서만 그 고유성을 드러낸다. 그렇지만 심미적 경험의 고유성은 추론적 사유의 경험을 단지 보완하는 데 놓여 있지는 않다. 심미적 경험은 추론적 사유의 경험과 길항 관계에 놓여 있으며, 바로 그러한 한에서만 그 고유성을 지닌다. 그 경험은 추론적 사유의 경험과 매개되어 있으되, 부정적인 방식으로 매개되어 있고 바로 그러한 한에서만 그 고유성을 드러낸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추론적 사유의 경험에 대해 절대적 주권성을 행사하는 경험도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칸트의 심미적 경험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다소 거칠게 표현하자면, 우리의 논의는 추론적 사유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 심미적 사유를 주장하거나, 혹은 추론적 사유에 대한 심미적 사유의 전면적인 우위를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하나의 허상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실을 직시할 때, 극단적인 낭만주의나 역사적 아방가르드 운동의 실패는 당연한 결과로 생각된다. 동시에 이는 심미적 경험의 고유성에 기초해서 예술의 고유성을 제고해보려는 시도의 기본적인 방향을 함축적으로 시사해준다.
심미적 사유가 개별적인 것의 그 고유성을 훼손하지 않고 생생하게 파악하게 해주는 사유라는 사실을 가장 첨예하게 피력하고 있는 철학자는 아마도 아도르노일 것이다. 아노르도에게 진리는 이른바 비동일적인 것(Das Nicht-Identische)을 구제하는 것이다. 다른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개별자들의 고유성을 철저하게 옹호하려는 데 아도르노 철학의 핵심이 놓여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심미적 사유를 통해서 보편에 의해 왜곡된 개별적인 것을 구제한다는 것은 전면적인 구제를 선언하는 순간 그러한 선언은 그 자체 아포리(Aporie)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개별적인 것의 전면적인 구제의 선언은 추론적 사유에 너무 익숙해버린 삶에 대한 가장 철저한 비판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삶의 구체적 영역에 놓인 개별적인 것들의 전면적인 포기를 담보로 한 비판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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