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根源’ 개념에 대한 고찰
배 상 식(경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
요 약 문
이 글은 하이데거의 사유 속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개념인 ‘근원(Ursprung)’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다. 사실 서양 철학사에서 ‘근원’의 문제는 모든 존재자의 존재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물음의 방식으로 철학적 전통 안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것이다. 서양에서 최초로 철학함을 시작한 사람들도 만물의 근원, 곧 ‘아르케(arche)’를 찾고자 하였듯이, 우리 인간은 누구나 마치 타고난 운명과도 같이, 거부할 수도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근원’에 대한 호기심과 정열을 간직하고 있다.
하이데거 또한 그의 사유의 중심에는 바로 이러한 ‘근원’ 혹은 ‘시원’에 대한 물음이 자리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의 많은 저서 속에는 ‘근원’이나 ‘근원적’이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때 그가 사용하고 있는 ‘근원’이라는 말은 과연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명이 우리 논의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하이데거의 사유에서 ‘근원’의 본질적 의미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이어서 우리는 ‘근거율’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을 통해 ‘근거(Grund)’가 근원으로서의 존재와 결코 다르지 않음을, 즉 근거가 바로 ‘존재’이자 ‘근원’임을 證示해 보이고 있으며, 끝으로 그의 후기사유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 중의 하나인 ‘언어’를 통해, 이 언어가 바로 고대 희랍의 로고스(logos)와 같이, 근원적․시원적 의미를 담고 있는 ‘존재의 언어’이자 또한 하나의 ‘근원’임을 밝히고 있다.
※ 주요어 : 근원, 사유, 근거, 언어, 존재.
1. 들어가는 말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천성적으로 앎을 추구한다. 경이감이나 호기심에 따른 물음과 이에 대해 해답을 구하고자 하는 일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다. 서양의 철학사도 이러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서양에서 철학함을 시작한 최초의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주변세계에서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변화에 대해 최초로 이 변화의 근거․이유․설명원리를 찾으려고 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아르케(arche)라고 불렸는데, 이는 사물의 근원․시원․원리를 의미한다. 이처럼 인간의 삶 속에는 ‘근원(Ursprung)’이나 ‘시원(Anfang)’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과 정열이 내재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신화에서도 나타난다. 이를테면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에 관한 이야기는 이러한 ‘근원’에 대한 인간의 정열을 잘 보여주는 신화이다. 아버지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신비로운 근원(태양)에 대한 정열을 억제할 수 없어서 이카로스는 밀랍을 이용해서 만든 그의 날개 짓을 멈추지 않아, 결국 그가 태양 가까이 이르게 되자 그 뜨거운 열이 밀랍의 날개를 녹여버려 그만 지중해 바다로 떨어져 목숨을 잃게 되는 이 슬픈 이야기는 마치 불나방이 불 속으로 날아들 듯이, 근원으로 비상하려는 인간의 억제할 수 없는 정열을 잘 보여준다. 칸트 역시 ?순수이성비판?의 초판 머리말에서 우리 인간의 이성은 그 인식활동의 영역에 있어서 특수한 운명에 처해 있다고 하였다. 즉 이성은 본래 자신이 거부할 수 없는, 또 그렇다고 해서 대답할 수도 없는 <근원적인 물음>으로 인해 고뇌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에게는 타고난 운명과 같이 거부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근원’에 대한 <이카로스적 정열>이 내재해 있다.
하이데거(M. Heidegger)의 사유 속에도 근본적으로 이러한 ‘근원’에 대한 정열이 함축되어 있다. 그의 전체 사유는 이른바 근원인 ‘존재’의 의미를 해명하려는 데 초점이 모아져 있다. 그리하여 그는 언제나 근원 가까이에 거주하는 우리 인간은 운명적으로 이러한 자리를 떠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그것이 유래하는 ‘근원으로 다가갈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이데거 사유의 길은 존재의 이웃에로 향해가는 하나의 길로 비유되곤 한다. 말하자면 그의 사유 道程은 새로운 어떤 것을 도출해내는 것도, 그리고 결코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로의 이행도 아니며,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것에로 되돌아감을, 즉 본질유래의 사유되지 않았던 것(근원)에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이제 우리는 하이데거의 사유 속에서 이러한 ‘근원’ 개념이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고 또 이해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의 논의는, 우선적으로 하이데거에 있어서 ‘근원’ 혹은 ‘근원적’이라고 할 때, 과연 우리는 그의 이 근원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 다루어 볼 것이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사유의 ‘근원’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하는데, 이것은 인간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가 근원적․본질적으로 공속적인 사태연관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면서, ‘근원’의 본질적 의미를 드러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근거율’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을 통해 ‘근거(Grund)’가 근원으로서의 존재와 다르지 않음을, 즉 근거가 바로 ‘존재’이자 ‘근원’임을 證示해 보고자 하며, 끝으로 그의 후기사유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 중의 하나인 ‘언어’를 통해, 이 언어가 바로 근원적․시원적 의미를 담고 있는 ‘존재의 언어’이자 또한 하나의 ‘근원’임을 해명해 보고자 한다.
2. ‘근원’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그의 저서에서 ‘근원(Ursprung)’이나 ‘근원적(ursprünglich)’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이를테면 “근원적 시간”, “근원적 윤리학”, “근원적으로 사유함(BH, 334)” 등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시간이 다른 시간성들이 발현하는 ‘근원’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근원적 시간>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전래 형이상학적 윤리학과는 다른 종류의 새로운 윤리학,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윤리문제가 아니라 현존재로서의 인간과 존재와의 연관성에서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근원적 윤리학>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또한 통상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사유하고 이해하는 존재사유의 관점을 <근원적으로 사유함>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예에서 드러나는 ‘근원(Ursprung)’이란 단적으로 말해 무엇을 根據에서 發源시키는 것, 즉 존재(진리)를 일컫는 말이다. 이처럼 ‘Ursprung’이라는 말은 ‘Ursache(源事態)’, ‘Urwort(源語)’ 등에서와 같이 ‘Ur(근원적인, 태초의)’라는 의미와 본질유래(Wesensherkunft)로부터 세우는 ‘Sprung(뛰어오름, 도약)’이라는 의미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단어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는 왜 이러한 ‘근원’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일까? 이제 하이데거의 저서 속에서 몇 가지 예를 통해서 그의 ‘근원’ 개념에 대한 예비적 이해와 검토를 시도해 보기로 하자.
먼저, 하이데거는 니힐리즘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형이상학적 윤리학’과 다른 종류의 새로운 윤리학을 주장하는데, 이는 그의 존재사유와 관련하여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근원적 윤리학>이라고 지칭된다. 여기서 그가 주장하는 ‘근원적 윤리학’은,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바와 같이 단순히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윤리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로서의 인간과 존재 사이의 근원적인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다. 즉 이 윤리학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나, 혹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만 하는 당위적인 행위나 규범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근원’이자 ‘근거’인 존재를 확연히 드러내어 그 의미를 되새기고 그 속에서 어떻게 인간이 거주하는가의 문제에 관해 다루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는 윤리적 행위와 삶이라는 사태를 ‘에토스(ethos)’라는 그리스어를 실마리로 하여 사유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먼저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119)」, 즉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신의 가까이에 거주한다(ethos)”라는 말의 해석에서 ‘에토스’라는 말의 근원적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다. 여기서 에토스의 그리스적 의미는 ‘거주지(Wohnstätte)’이다. 흔히 우리 인간 행위의 사회적․도덕적․관습적 규범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윤리(Ethik)’는 그리스어 ‘에토스’에서 유래한 말로 ‘인간이 거주해야 하는 근원적인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다(BH, 354참조). 말하자면 “에토스라는 단어가 갖는 근본 의미에 비추어볼 때 에틱(Ethik)이란 명칭은 인간의 거주를 사유하는 것에 해당한다. 탈존하는 자로서의 인간이 거주해야 할 시원적인 장소는 존재 진리[의 場]이다. 따라서 존재의 진리를 생각하는 저 사유는 그 자체로 이미 근원적인 윤리학이다(BH, 356).” 이러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하이데거에 있어서 근원적 윤리학은 근본적으로 그의 존재론과 연관된다. 따라서 그러한 윤리학은 그것을 조건지우고 가능하게 하는 ‘존재 자체’에 대한 사유에서 비롯된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근원적 의미의 ‘법’ 혹은 ‘노모스(nomos)’라고 부른다. 여기서 “노모스는 단지 ‘법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일층 더 근원적으로 존재의 섭리 속에 감추어진 指定(Zuweisung)을 뜻한다(BH, 358).” 이와 같이 근원적 윤리학은 단적으로 ‘존재에 거주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존재란 특정한 실체나 지리적 의미의 장소가 아니며, 사유 속에서 드러나는 어떤 것을 말한다. 그리고 ‘존재에 거주한다’는 것은 존재에의 염려 속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 보다 구체적으로 존재의 운명이라고 불리우는 존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에 있어서 근원적 윤리학은 ‘존재에 대한 상기’ 혹은 ‘존재에 대한 사유’라고 할 수 있으며, 결국 그의 윤리학이 ‘근원적’이라 함은, 존재와의 연관성, 혹은 존재론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하이데거는 그의 ?예술작품의 근원?이라는 논문에서, ‘근원(Ursprung)’이라 함은 ‘본질유래(Wesensherkunft)’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술작품의 ‘근원’에 대해 묻는다는 것은, 곧 예술작품의 본질유래에 대해 묻는 것이다(HW, 1).” 우리는 일반적으로 작품은 예술가의 작업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술작품의 근원이 예술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서만 예술가가 되기 때문에, 예술가가 작품의 ‘근원’이라면 작품은 또한 예술가의 ‘근원’이 된다. 그리고 예술가와 예술작품보다 더 우선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예술’이다.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서만이, 예술가와 예술작품이 자신들의 앞에 예술이란 명칭을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예술작품의 근원에 대한 물음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된다(HW, 2)”고 간주한다. 그런데 이러한 물음은 반드시 순환논리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작품으로부터 인식되어야 하는데, 작품이 무엇인가는 오직 예술의 본질로부터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예술이 무엇인가를 미리 인식하고 있지 못한다면, 그것이 예술작품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HW, 2참조).
이와 같이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현실적인 작품들로부터 귀납적으로 이끌어질 수도 없고, 근본원리로부터 연역하여 인식될 수도 없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 순환논리가 그리는 고리들을 따라가고자 한다. 작품으로부터 예술로, 예술로부터 작품으로 순환하면서 접근해 가는 가운데, 이 동심원을 완성시킬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결국 그는 ‘예술작품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 바꾸고,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의 숙명적인 순환논리’를 제시한 다음, 작품 가운데 현실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예술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하여 실제로 반 고흐(Van Gogh)의 ‘시골아낙네의 구두’라든가, ‘희랍신전’이라는 잘 알려진 예술작품들을 근거로 하여 작품이란 무엇이며, 어떠한 것인가를 묻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는 예술의 본질을 “언어의 본질에서 生起하는 詩作(HW, 58)”으로 규정한다. 물론 이처럼 예술의 본질을 詩作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詩作이 곧 源詩作(Urdichtung)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근원적인 본질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언어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HW, 61참조). 즉 이러한 예술의 본질로서 간주되는 詩作은 ‘존재의 언어’라는 근원적 生起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예술이란 작품 속에 존재의 진리가 깃들도록 하는, 이른바 진리의 한 생성(Werden)이요 발생(Geschehen)이다(HW, 59참조). 하이데거는 마치 원천인 샘물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물이 샘솟아나는 것처럼, 예술을 통해 존재의 진리가 끊임없이 생성하고 또 발생한다고 보아, 예술을 하나의 ‘근원’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주자의 철학시 ?觀書有感? 제1수를 연상하게 한다. 즉,
한 이랑도 안 되는 좁은 뜰에 거울같은 연못이 하나 열려 있으니,
그 맑은 물엔 하늘 빛깔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떠도네.
내 저(연못)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맑기가 이와 같을 수 있는가 하였더니
근원(源頭, Quelle)에 생생한 물이 있어서 계속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라네.
이러한 詩에서도 우리는 ‘源泉(Quelle)’ 곧 ‘근원’에 대한 의미가 잘 묘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한자어 ‘根源’이라는 말이 ‘源’의 본질적 의미를 통해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根源’이라는 말은 ‘根’을 통해서도 그 본래적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그것은 根, 곧 ‘뿌리(Radikal)’를 나타내는 독일어 형용사인 ‘radikal’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형용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근원적’, ‘근본적’, ‘철저한’, ‘기본적’, ‘기초적’ 등으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는 모두 그 라틴어 어원인 ‘radix’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모두가 <뿌리>라는 고유의미를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후설(E. Husserl)은 철학을 그 본질에 따라 참된 단초, 근원, 그리고 모든 것의 뿌리에 관한 학문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러한 학문을 “근원적인 것(뿌리같은 것)에 관한 학문(Wissenschaft vom Radikalen)”으로 지칭한 바 있다. 여하튼 하이데거에 있어서의 ‘근원’ 개념에는 이러한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이러한 ‘근원’의 의미를 좀 더 본질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3. 사유의 근원
우리는 흔히 인간의 ‘사유’를 거론할 때, 의지적이고 계산적이며, 표상적인 사유를 떠올린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있어서 ‘사유’는 이러한 전래 형이상학적 사유와는 엄격히 구분되는 이른바 시원적(anfänglich)이고 근원적인(ursprünglich) 물음의 양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최우선적으로 그러한 사유의 본질유래, 곧 사유의 근원(시원)을 주목하면서, 우리에게 사유하게끔 하는 ‘그것(근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한다. 과연 우리에게 사유하게끔 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가? 미리 앞서 말해두자면, 하이데거는 우리의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요소로서의 ‘존재’를 ‘근원’으로 제시한다(BH, 315참조). 그러나 전래의 형이상학에서 ‘사유’는 행위와 제작, 혹은 기술적인 어떤 것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플라톤의 경우에 있어서도 사유는 행위와 제작을 위한 숙고의 방법이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사유’는 결코 이러한 행위와 제작을 위한 어떤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사유’는 어떠한 것이어야만 하는가?
하이데거는 1951/52년 겨울학기와 1952년 여름학기에 행한 강의록 ?사유란 무엇인가?를 통해, 자신이 주장하는 사유의 본질,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그것’에 대해 해명하고자 하였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x란 무엇인가”라는 형식으로 ‘x의 본질’에 대해 물음을 제기한다. 그러나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도 마찬가지지만, 이러한 물음들은 대개 “x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답변하기가 그리 용이하지 않다. 더구나 사유가 무엇인지 묻는 이 물음은,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우리에게 명령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물음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말하자면 이러한 물음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사유의 근원에로 가도록 지시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사유란 무엇인가(Was heißt Denken?)’혹은 ‘사유란 무엇으로 불리는가?’에서 ‘하이센(heißen)’의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 하이센은 원래 ‘부른다(rufen)’라는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의 ‘부르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음성을 내지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부르기’는 “이미 부름이 발생하는 바로 그곳에서 유래(WD, 152)”하는 것으로서, “무엇으로 오도록 요구함(Verlangen)(WD, 152)”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요구함’이란 또한 무슨 뜻인가? 즉 왜 ‘요구’하는 일이 일어나는가? 그러한 것은 아마도 무엇을 ‘지시(Verweisen)’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래서 이 ‘하이센’이라는 동사에는 “무엇을 향해서 부르고, 또 무엇을 불러내고, 또 무엇을 이쪽으로 오도록 요구하면서 어떤 作爲나 無爲로 가도록 지도하거나 더욱 더 본질적인 것으로 가도록 지도하는 그러한 지시(WD, 152)”라는 의미가 포함된다. 그런데 ‘지시’란 우리가 알듯이 무엇을 누구에게 하도록 명령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하이센’에는 이러한 ‘지시’와 ‘명령’의 의미가 모두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명령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명령하는가?(Was heißt uns denken?)’라는 물음으로 이해해도 무방한 것이 된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사유’는 언제나 여하한 대상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단적으로 말해 ‘존재의 사유(Denken des Seins)’를 의미한다(BH, 316참조). 존재가 우리로 하여금 사유를 가능하게 하고, 사유라는 것은 사유의 근본요소인 존재로부터 이루어진다. 우리 인간은 이러한 사유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한, 언제나 사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 하나가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증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사유를 요구하는 우리들 시대에 가장 깊이 사유를 요구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아직도 사유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WD, 3).” 이와 같이 우리는 사유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유하지 않고 있으며, 또한 ‘가장 깊이 사유를 요구하는’ 존재에 대한 사유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물론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지금까지 앞서 지나간 모든 사유의 형식에 대한 철학사적 또한 철학 체계적, 나아가 백과사전적인 조망을 하거나, 시대의 흐름에서 또는 규정된 사유체계의 관점에서 사유로서 특징지어진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물음으로써 사유가 뜻하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사유한다는 것이 뜻하는 그것, 사유가 사유하도록 요구하는 그것, 사유를 사유해야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즉 하이데거는 존재물음을 사유물음으로서 묻고 있다. 결국 존재사유, 시원적인 사유, 근원적인 사유는 “존재의 은총에 대한 반향(Widerhall)”인 것이다.
사실 우리가 ‘사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어떠한 규정이나 정의를 제시한다고 할지라도 사유에 대한 그 본질적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유는 하나의 객관적․표상적 대상으로 취급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유란 무엇인지를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사유할 때에 비로소 사유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기(WD, 1)”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사유란 단적으로 말해 ‘존재의 사유’라고 강조하면서 사유와 존재의 공속성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사유란 ‘존재’를 사유하는 것이며, 사유해야할 것인 이른바 존재의 진리를 사유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존재의 사유’라는 것은 이중의 사태를 지시하는 말이다(BH, 316참조). 즉 단순히 사유가 존재에 속하면서 존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 말하자면 사유가 존재를 사유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사유가 존재로부터 야기되어 존재에 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가 사유하기도 하고 인간이 존재를 사유하기도 하는 이 ‘존재의 사유’는 바로 ‘존재가 곧 사유인 것이다. 다시 말해 사유는 언제나 존재를 향한 사유이면서 동시에 존재로부터의 사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의 사유는 근원인 존재를 향한 사유이자, 근원인 존재로부터 유래하는 사유라는 이중적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하이데거적 의미의 ‘사유’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존재와 인간이 항상 공속 관계에 있다는, 그것도 근원적으로 ‘서로서로 속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의 어떠한 길도 인간 본질로부터 출발하여 존재에로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반대로 존재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에게 되돌아가지도 못하는 것이다. 모든 사유의 길은 언제나 이미 존재와 인간 본질의 사이의 관계 전체 안에서 진행될 뿐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사유가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WD, 74참조). 이처럼 하이데거는 ‘인간존재’와 ‘존재자의 존재’가 본질적 사태 연관(Sache-Verhalt)에서 볼 때, 양자가 ‘同根源的(gleichur- sprünglich)’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즉,
우리는 ‘인간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 사이의 관계를 묻는다. 그러나 내가 ‘인간 존재’라고 사유하면서 말하자마자, 나는 이미 그 안에 존재에 대한 관계를 말해버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존재자의 존재를 사유하면서 말하자마자, 그 안에는 이미 인간 존재에 대한 관계가 명명되어 있게 된다. 인간 존재와 존재간의 관계의 두 지절(肢節)들 각각에는 이미 이러한 관계 자체가 함축되어 있다(WD, 74).
이상에서와 같이 하이데거는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드러나지 않으나 유일하고 본질적인 사태 연관으로 시선을 바꾸도록 하였다. 즉 “가장 가까운 것, 존재자보다 더 가깝고 동시에 익숙한 사유에서 볼 때 가장 먼 것보다 더 먼 가까움(Nähe) 자체가 있다. 그것은 바로 ‘존재의 진리’이다(BH, 332).” 따라서 우리는 “사유가 어디에서 발원하는지 그 (본질)유래를 훤히 꿰뚫어볼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철학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서 ‘존재의 사유’ 속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사유의 ‘근원’이나 ‘근거’, 혹은 ‘본질유래’란 이처럼 언제나 본질적으로 ‘존재’와 사태연관을 맺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그의 ‘근거(Grund)’ 개념이라는 실례를 통해 존재와 근거가 근원적으로 동일함을, 다시 말해 존재와 근거가 모두 동일한 ‘근원’임을 밝혀 보고자 한다.
4. 근거로서의 근원
하이데거는 전래 형이상학으로부터 ‘근거(Grund)’ 개념을 복원시키기 위해, 그의 ‘존재’ 개념 못지 않게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29년의 「근거의 본질에 관하여」라는 논문, 1929/30년의 강의 「형이상학의 근거개념」, 1937/38년 겨울학기의 강의 「철학의 근거문제」, 1941년 여름학기의 강의 「근거개념」, 1955/56년 겨울학기 강의 「근거율」과 1956년 강의 「근거율」 등이 모두 ‘근거’ 개념을 존재사유적으로 복원시키고자 하는 그의 집요한 노력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근거’ 개념은 단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존재의 진리’에로 찾아 들어가는 데 사용되는 개념이자, 존재를 ‘근거’로서, 그리고 ‘근원’으로서 파악하고자 하는 그의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그러면 먼저 이러한 ‘근거’ 개념에 대한 하이데거의 말을 직접 소개해 보기로 하자.
‘근거개념(Grundbegriffe)’이란 단적으로 말하면, 여기 우리에게는 ‘존재자 전체의 근거를 파악함’을 의미한다. … 여기 우리에게 근거의 ‘파악’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근거의 ‘본질’에서 근거 자신으로부터 파악되어 들어가 있어서 우리의 앎에서 이 근거로부터 답변을 요구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파악함은 ‘근거의 본질 안으로 파악되어 들어가 있음’으로 우리에게 알려진다.… 존재를 파악함은 근거를 파악함을 의미한다. 파악함이란 여기에서 존재로부터 존재 안에 파악되어 들어가짐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이데거에 있어서 근거개념은 존재자 전체의 근거인 이른바 ‘존재’와 관련된다. 즉 만일 우리가 형이상학의 근거를 묻는 경우에, 이 근거는 논리적인 근거나 표상 연관으로서의 근거 혹은 자연 현상적 근거를 의미하지 않고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기에 근거를 파악한다는 것은 논리적인 근거를 개념적 인 사유에 의해서 추적하거나 현상적인 근거를 실증적으로 확인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현존재 자체가 존재 자체로부터 존재 자체 내에 끌려 들어가서, 존재의 물음 또는 요구에 이미 대답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가 ‘형이상학의 근거개념’이라고 할 경우에는 범주적인 의미의 근본개념, 즉 개념 중에서 포괄성을 띠는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진리에 입각하여, ‘근거 즉 존재’에 의해서 파악되어 들어가 있는 방식으로, 이 근거․존재의 물음에 응답하면서, 존재․근거이해에 도달하게 되는,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상황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근거지우며, 그리고 모든 것에서 근거를 제시하는 것 자체가 근거(Gb, 2)”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근거’의 의미를 좀 더 명확히 밝히기 위해, ‘근거율’ 혹은 ‘충족이유율’에 관한 하이데거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자.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사고의 3대 법칙으로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이 확정되었고, 여기에다 라이프니츠가 제4의 법칙으로 첨가한 것이, 이른바 ‘근거율(충족 이유율)’이다. 그것은 간단하게 표현하여 “근거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Nihil ist ohne Grund)”로 공식화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서양 철학의 태동기인 기원전 6세기부터 17세기 라이프니츠(G. W. Leibniz, 1646-1716)가 이것을 명제의 형식으로 표현하기까지는 대략 2천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명제가 의미하는 바를 아무런 의심 없이 즉각적으로 이해하고 동의를 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그들은 이 명제가 참인 것으로 증명되었기에 동의를 표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이 명제는 옳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에서 동의를 표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 근거율이라는 명제의 타당성에 대한 근거를 다시 묻는다면,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능성이 아마도 존재할 것 같다. 첫째는 이 명제만은 근거를 가지지 않을 가능성인데, 만일 그렇게 되면 이 명제만은 이 명제의 원리에 적용되지 않는 유일한 명제가 되고 만다. 결국 이 명제 자체만은 그것의 타당성 영역에서부터 배제되는 경우가 생기게 되어, 근거가 없는 것으로 남게 되는 셈이다. 둘째의 가능성은 이 명제가 반드시 하나의 근거를 가지는 경우이다. 그런데 이 명제의 근거는 다른 수많은 근거들 중 하나의 근거여서는 안 된다. 즉 다른 근거들 중의 두드러진 근거, 곧 ‘근거의 근거’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근거’의 <근거>는, 다시 ‘근거의 근거’의 <근거>에로 무한 소급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아무 것도 근거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명제는 통상적인 생각처럼 그렇게 자명한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근거명제(곧 근거율)의 불명확성을 다음과 같은 안겔루스 쉴레지우스(Angelus Silesius, 1624-1677)의 시 구절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밝히고자 한다. 즉,
장미는 왜(warum) 라는 이유(근거)없이 존재한다; 장미는 피어나기 때문에(weil) 핀다. 장미는 자기 자신을 위해 배려하지 않고, 자신이 보여지는가 어떤가를 묻지 않는다(SG, 69, 77).
장미는 이처럼 아무런 이유‧근거없이 피어난다. 그런데 어찌 장미뿐이겠는가? 잘 알려진 식물에서부터 이름모를 화초에 이르기까지 여하한 모든 식물들은 스스로 피었다가 사라진다. 이러한 식물들은 자기 존재의 근거나 이유, 혹은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에 대해 어떠한 물음도 제기하지 않는데 반해, 우리 인간은 어떠한가?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런 물음 없이 살아가는 인간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 존재의 ‘근거’나 ‘이유’에 항상 물음을 제기한다. 그런데 흔히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인 이러한 ‘왜’, ‘이유’, ‘근거’, ‘까닭’ 등은 사용상의 뉘앙스에는 다소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그 의미에는 차이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하이데거는 ‘warum’과 ‘weil’을 그 의미에 있어서 엄밀히 구분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warum(왜)은 ‘근거를 묻는 물음’에 자주 쓰이는 말이고, weil(까닭에, 때문에)은 대답하면서 ‘근거를 제시할 때’ 사용되는 낱말이다. 양자가 모두 ‘근거’와 관련된 낱말이지만, 하이데거는 ‘왜(warum)’와 관련되는 근거와 ‘까닭(weil)’과 관련되는 근거를 엄격히 구분한다. 여기서 ‘왜’는 탐구하고 자기를 돌아보면서 근거제시를 요구할 때, 이를테면 장미가 표상의 대상이 되어 자기의 존재근거의 제시를 요구받을 때 쓰이는 의문사이다. 그러나 장미는 스스로 자기를 탐구하지도 않고, 또 탐구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는다. 따라서 장미는 ‘왜’라는 근거 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까닭’없이 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처럼 강력한 근거명제는 장미만을 예외로 취급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러한 근거의 원리가 타당한 것은, 장미가 우리의 표상의 대상이 되어 어떤 근거(이유)와 원인들로 드러날 때이며, 또 어떤 조건하에 장미가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장미존재에 대한 정보제시를 요구받을 때이다. 다시 말하면, 강력한 근거명제는 표상의 대상으로서의 장미에 ‘대해서(von)’ 그 이유를 물을 때 유효한 것이지, 그 자체로 있는 장미 자신을 ‘위해서(für)’ 유효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장미는 ‘왜(근거, 이유)’ 없이도 존재하며”, 또한 “장미는 피어나기 때문에(까닭에) 피는” 것이다. 이처럼 장미의 開花는 단순히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開顯’이며, 장미는 까닭 없이는 필 수 없어도, 왜 없이는 존재할 수 있다. 이리하여 이제 우리는 장미가 근거 없이도 존재함을 이해할 수 있으며, 쉴레지우스의 시 구절을 통해서 근거명제의 형식마저도 근거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위해서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음이 드러나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라이프니츠의 근거율이 과연 ‘근거’ 내지는 ‘근거의 본질’에 대해 어떤 진술을 하고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분명 근거율은 근거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거율은 근거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근거의 본질에 대한 직접적인 진술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하이데거에 의하면, 근거율에 대한 라틴어 표현 “nihil est sine ratione”는 읽는 방법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두 가지 형식으로 읽혀질 수 있다. “nihil est sine ratione” 즉 “Nichts ist ohne Grund”가 그 하나인데, 긍정적 형식으로 표현하면 “Alles hat einen Grund(모든 것은 근거를 가지고 있다)”이고, 다른 하나는 “Nihil est sine ratione” 즉 “Nichts ist ohne Grund” 이다. 이것을 긍정적 형식으로 표현하면 “Jedes Seiende ― als Seiendes ― hat einen Grund (제 각기의 존재자는 ― 존재자로서 ― 근거를 가지고 있다)”로 해석된다(SG, 77참조).
하이데거는 이러한 사고의 최고 원칙 “Nichts ist ohne Grund”를 “Nichts ist ohne Grund”로 해석함으로써 존재의 제일원칙으로 변화시킨다. 즉 ‘Nichts’와 ‘ohne’에 주목하지 않고, ‘ist’와 ‘Grund’에 주목함으로써 ‘Nichts ~ ohne’를 이중 부정으로 상쇄시키고, ‘ist ~ Grund’를 건져내어 ‘존재’와 ‘근거’를 동일시하는 방법으로, 사고의 원칙을 존재의 지배아래 종속시켜 버린다. 즉 근거율이 더 이상 존재의 진리에 적용될 수 없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우선 우리가 “Jedes Seiende ― als Seiendes ― hat einen Grund”를 그 문장 형식에서 보면, 주어는 ‘제 각기의 존재자’이고 거기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술어가 부가되어 있다. 여기서 존재자가 가지고 있는 근거는 마치 어떤 하나의 존재자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도 “근거명제는, 습관적 방식으로 이해하면, 근거에 대한 언표가 아니라 그때그때 존재자인 한에서의 존재자에 대한 언표(SG, 82)”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근거명제는 정작 언급해야 할 근거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고, ‘존재자’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그때그때 존재하는 것(곧 존재자)은 근거 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 이면에 자신의 존재근거인 ‘존재’를 시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해석에는 전래 형이상학 전체를 근거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서, 그 자리에 ‘존재 사유’를 대치시키고자 하는 하이데거의 혁명적인 사유가 깃들어 있다. 그리하여 그의 사유는 결국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에 이른다.
‘아무것도 근거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근거율의 강조에서 우리는 ‘존재’와 ‘근거’가 …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투시할 수 있다. … 근거와 같은 것이 존재에 속한다. 존재는 근거방식으로 근거 성격적으로 존재한다. … 존재는 그 자체 내에서 근거지우는 것으로 존속한다. … 근거율은 존재로부터 비롯되는 말이다. … 존재 역사의 시초에 존재와 근거의 동일성이 알려진다(SG, 89-90, 165, 필자의 강조).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논의는 ‘형이상학의 근거는 존재이다’에 그치지 않고 ‘근거 자체가 곧 존재이다’는 주장에까지 극단화되었다. 형이상학의 근거는 원래 ‘존재’이지만, 존재를 근거로서 사유하지 않고 존재자로서 표상함으로써, ‘존재와 근거’ 또는 ‘존재자의 근거’가 망각되는 그 곳에, 바로 형이상학의 비본질화 또는 근거 상실이 시작된 것이다. 근거를 상실한, 따라서 존재 자체에서부터 일탈한, 전래 형이상학적 사유는 사유 밖에서 그 진리성의 근거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요구에서 案出된 것이 이른바 ‘근거율(Der Satz vom Grund)’이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러한 것을 원상회복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모든 존재자는 존재를 근거로 하는 한에서만 비로소 존재자’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존재’와 ‘근거’는 본질적인, 그리고 동근원적인 동일자인 셈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후기사유에서 우리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근원적인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언어’이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이 “언어는 인간이 자의로 처리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최고 가능성을 좌우하는 生起이다(HD, 38).” 다음에서 우리는 ‘언어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이러한 언어가 시원적․근원적․본래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이른바 ‘존재의 언어’임을 밝혀보고자 하며, 아울러 이러한 언어가 하나의 근원임을, 그리고 그것이 존재와 사유, 그리고 근거와 동근원적임을 해명해보고자 한다.
5. 근원으로서의 언어
우리는 흔히 언어를 일상생활 속에서 필요에 따라 자유로이 만들기도 하고, 또 만들어진 언어가 역사 속에서 소멸되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이 언어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의사소통수단으로 사용되는 도구적 의미나 인간의 활동과 관련된 인간학적․문학적 의미의 언어가 결코 아니다. 그가 말하는 언어의 의미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여기서의 언어는 인간이 자유로이 혹은 임의로 필요에 따라 만들거나 소멸시킬 수 있는 도구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가능성을 보증하는 하나의 근원적인 생기(Ereignis)로서 해석된다. 하이데거는 마치 꽃이 스스로 피는 것과 같은, 이른바 언어의 生起的 기능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기하는 언어의 본질을 우리는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 하이데거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다음과 같은 게오르게(Stefan George, 1868-1933)의 「말」이라는 詩의 마지막 연에서 찾고자 한다.
그래서 나는 슬프게도 체념을 배웠다네 :
말이 결여된 곳에는 어떠한 사물도 없을 것이라는 체념을(US, 162).
하이데거는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말이 없는 곳에는 어떤 사물도 존재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사물들은 말(언어) 안에서 사물들이 되고 비로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해석은, 우리에게 말은 사물을 그 사물로 부르고 또 명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말하자면 부르고 명명하는 것은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이름이란 단순히 어떤 것에 붙여진 지시 기호가 아니라, 가령 “왕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라고 하듯이(US, 154참조), 이것은 일종의 명령인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의 부름이 곧 사물(존재자)로 하여금 그 사물로 있게 하며, 사물은 언어로 인하여 비로소 그 사물로서 존재하게 되는 셈이다. 즉 “언어는 최초로 존재자들을 명명함으로써 비로소 존재자들을 말과 현존 속으로 가져다주는 것이다(HW, 61).” 그렇다면 이러한 언어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존재자(사물)를 존재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이러한 언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이데거도 언급하듯이, 이러한 언어의 본질을 고찰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주목해야할 것은, 우리가 언어와 그 본질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모종의 先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언어에 대해, 곧 언어의 본질에 대해 물음을 던질 때, 그때 언어 자체가 이미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어야 한다. 즉 우리가 언어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면, 본질의 의미가 이미 우리에게 말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US, 164).”
그리고 하이데거는 세 가지 강연(Vorträge)을 싣고 있는 그의 논문 「언어의 본질」에서 “언어의 본질은 곧 본질의 언어이다(Das Wesen der Sprache : Die Sprache des Wesens)”라는 주도명제 하에, 이러한 언어를 사유적으로 경험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먼저 게오르게의 「말」이라는 시에서 ‘말과 사물의 관계’에 대한 시적인 체험을 숙고하는 데서부터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사실 이러한 우회적인 설명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유는 詩作과 직접적인 ‘이웃함(Nachbarschaft)’으로 관계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말함의 탁월한 두 가지 방식인 詩作과 사유함은 각각 저마다 고유하게 탐구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이웃관계에서 탐구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US, 175참조). 그렇지만 이러한 사유와 詩作은 가까움(Nähe) 속에서 서로 관계함으로써, 이웃함이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가까움은 거리상으로 ‘약간 떨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상호 간에 거리상으로 별로 떨어지지 아니한 곳에 자신을 이주시킨다고 해서 그 자신과 이웃이 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거리상으로 상호 간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자신이 체류한다고 해서 이웃이 될 수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웃함’이란 시간과 거리의 의미, 즉 시․공간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만일 이처럼 ‘이웃함’이 시․공간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과연 어떠한 종류의 관계(Verhältnis)를 의미하는 것인가?
하이데거에 있어서 ‘이웃함’을 특징짓는 것은 “서로 마주 봄(Gegen-ein- ander-über)(US, 176, 199)”이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다. 이 ‘서로 마주 봄’은 결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며, 사방세계(Geviert) 전체와 마찬가지로 세계사물의 관계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가까움은 그것들이 이웃해 있는 ‘서로 마주 봄’에서 詩作과 사유뿐만 아니라 사방세계까지도 발생시킨다. 하이데거는 가까움이 이렇게 길을 트고 있는 것(Be-wëgend)을 ‘인접성(Nahnis)’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인접성으로서 가까움(die Nähe als die Nahnis)의 본질은 “거리(Abstand)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방세계의 영역이 서로 마주 볼 수 있도록 길을 트는 데에 있다(US, 200)”고 강조한다. 그리고 하이데거에 있어서 언어의 본질이란 우선적으로 ‘말함’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US, 241참조). 이때의 말함은 보여줌(Zeigen), 나타나게 함(Erscheinen lassen), 세계를 제시해 주는 것으로서 밝히면서 감추는 관계에서 자유롭게 함(lichtend-verbergend-freigebend)을 의미하는 것이다(US, 188, 202, 241참조). 이러한 언어의 본질로서의 말함은 결국 ‘가까움의 본질’로 되돌아간다. 그 이유는 ‘가까움의 본질’이 사방세계의 것들(곧 하늘과 땅, 가사자인 인간들과 신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詩作과 사유’ 사이의 이웃함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가까움’과 ‘나타나게 함으로써의 말함’은 언어의 현존자(das Wesende)이다. 그러므로 ‘가까움’과 ‘나타나게 함으로써의 말함’은 언어의 본질을 이루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양자는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언어란 사방세계의 말함(die Sage)이며, 이것은 인간과 언어 사이에 존립하는 그 관계 - 우리가 말하는 과정 속에서 언어와 맺게 되는 그런 관계 - 의 단순한 하나의 관계 축이 아니다. 언어는 세계를 움직이는 말함이며, 모든 관계 중의 관계(das Verhältnis aller Verhältnisse)이다. 언어는 세계방역에 대하여 ‘서로 마주 봄(das Gegen-einander-über)’과 조화를 이루어내면서 풍성하게 한다. 언어는, 언어 스스로가 (곧 말함이) 자신에게 머물고자함으로써, 세계방역을 간직하며 보호하는 것이다(US, 203).
이와 같이 언어는 사방세계를 벗어나서는 결코 그 어떤 식으로도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언어는 오직 사방세계 내에서 이 사방의 관계로서 존재한다. 즉 언어는 형이상학적으로 표상되듯 그 어떤 초월적인 힘이 아니라, 이미 하이데거가 ‘인접성’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사방 안에 편재하는 가까움(Nähe)이다. 이것을 좀 달리 표현해 보면, 언어란 ‘근원적인 모음(ursprüngliche Versammlung)’인 것이다. 그리고 사방세계의 서로 마주 봄이 길을 트고 있는 이른바 ‘인접성으로서의 가까움’은 언제나 언어적인 말함(Sage)으로서 완성된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언어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이제 하나의 전향(Wendung)이 일어난다.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전향’이란 이른바 그의 주도적 명제인 “언어의 본질은 곧 본질의 언어”라는 말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즉 이 명제의 첫 번째 문구에서 표현된 ‘본질’이란 말은 ‘그 무엇임(to ti estin)’을 뜻한다. 이 문구에서는 ‘언어’가 주어이며, 이 주어의 ‘본질(essentia)’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와 같이 이해된 본질은, 사태가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할 경우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저 개념이나 혹은 저 표상 속에 한정되어 있는 것(US, 189-190)”을 말한다. 다시 말해 본질에 대한 이러한 이해로 말미암아, 우리는 여전히 형이상학적인 표상영역 속에 갇혀 있게 된다. 그러나 이 명제의 두 번째 문구에서는 단순히 낱말의 뒤바꿈(Umschlag)만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단순히 본질이 주어로 뒤바뀌고, 또 언어가 이 주어에 의해 서술되어 사유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뒤바꿈은, 형이상학적인 표상으로부터 더 이상 형이상학적이지 않은 그런 사유로 나아가는 전향이다. 말하자면 첫 번째 문구에서 콜론(Doppelpunkt) 앞에서의 ‘본질’이, 그 무엇임(Was-sein, 무엇으로-있음)을 가리키는 낱말, 곧 인간 언어의 본질적인 것이었다면, 두 번째 문구에서의 본질은 ‘존속함(Währen, 참되게 머물러 있음)’과 ‘머무름(Weilen)’으로 사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콜론 뒤의 전향은 체류함(Weilen- den), 현존함(Anwesend), 또는 지속함(Während) 등의 소리내지 않는 ‘靜寂의 울림(das Geläut der Stille)’과 관계 있는 것이다. 정적은 언어가 말하는(부르는) 본래적인 소리(울림)이며, 언어는 정적의 소리로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도 강조하듯이 바로 이러한 정적의 소리(울림), 곧 존재의 소리에 의해 세계는 세계화되고, 사물은 사물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우선 말하기 전에, 아니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저 정적의 울림, 곧 존재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하이데거는 이렇게 표현한다.
말하기(Sprechen)는 무엇보다도 먼저 듣기(Hören)이다. [존재]언어에의 이러한 듣기는 여타의 모든 [청각적으로] 진행되는 듣기보다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앞선다. 우리는 언어를 단순히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적의 울림으로서의] 언어로부터 말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그때그때마다 언어를 들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들었는가? 우리는 언어의 말하기를 듣는다(US, 243; [ ]는 필자의 첨가임).
이처럼 우리 인간은 존재의 언어가 말하는 것을 들음으로써, 그리고 그러한 방식으로 들려진 말에 따라 언제나 말하는 것이다(US, 243참조). 이제 우리는 비로소 시에서 말해진 것 속에는 ‘언어의 말하기’가 생기한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언어의 말하기’가 ‘인간적 말하기’에 선행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이러한 시원적이고 근원적인 언어는 곧 ‘존재 자체’이다. 존재는 언어로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우리의 말하기는 이에 대한 하나의 응대이다. 우리의 말하기는 의견을 내놓고 기호로 표시하는 주관의 활동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말하기의 최종적인 근거, 곧 시원적이고 근원적인 언어에 대한 응답이다. 사유가 본질적으로 하나의 응대로서 존재에 상관하듯이, 인간의 언어도 존재의 더 근원적이고 소리 없는 언어에 상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언어가 어디까지나 ‘존재’에 상관하여 있는 한, 언어의 본질은 근원이자 근거인 ‘존재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며, 또한 “언어의 신비는 … 무엇보다도 언어가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언어가 말한다’는 통찰이 일깨워진 다음에야 가장 사유할 가치가 있고 가장 질문할 가치가 있는 현상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이데거에 있어서 ‘언어의 본질(Das Wesen der Sprache)’은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말하기의 최종적 근거이며, 가장 시원적이고 근원적인 이른바 ‘존재의 언어(Die Sprache des Wesens)’를 지시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언어의 본질을 ‘(존재)언어 자체’에로 오게끔 사유함으로써 서양의 전통적 언어이해에서 망각되었던 근원을 비로소 본래적인 ‘근원’으로 이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6. 맺는 말
철학의 역사에서 ‘근원’의 문제는 모든 존재자의 존재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물음의 방식으로 철학적 전통 안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하이데거는 존재망각, 곧 고향상실의 시대에 감추어진 시원적이며 총체적인 진리, 바로 <잊혀진 근원>을 다시금 철학적 담론 안으로 이끌어오려고 시도한다. 이는 바로 이 위기의 시대에 자라나는 구원의 힘을 노래하는 일이자, 존재의 의미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고향을 다시 찾아 되돌아오는 ‘귀향(Heimkunft)’이며, ‘근원으로 되돌아감(Rückkehr in den Ursprung)’이다. 물론 이러한 근원은 과학적․표상적․계산적 사유가 아니라 ‘존재 사유’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근원으로 되돌아감’ 혹은 ‘근원으로 다가감(der Nähe zum Ursprung)’에 익숙해지는 것을 ‘귀향(Heimkunft)’으로 비유하는 하이데거는, 우리가 ‘근원으로의 다가감’을 그 무엇보다도 먼저 알거나, 아니면 알도록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장한다(ED, 24참조). 하지만 이러한 ‘근원으로의 다가감’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님을 그는 또한 이렇게 강조하기도 한다. 즉 “[근원] 가까이에 이르는 길은 우리들 인간에게는 언제나 가장 머나먼 길이고, 따라서 가장 힘든 길이다. … 숙고적인 사유(das besinnliche Denken)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일면적으로 표상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며, 또 우리가 일방적으로 표상을 향해 나아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얼핏 보기에는 그 자체 전혀 [우리와] 관계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그런 것 속으로 들어가 [그것과] 관계 맺으라고 숙고적인 사유는 우리에게 요구한다(Ge, 23-24).”
하이데거는 지금까지 근원적이고 시원적인 것으로서, “아직 사유되지 않은 것을 사유하는 일은, 그리스적으로 사유된 것을 더욱 근원적으로 추적하여, 그 본질유래에 비추어서 그것을 투시함을 의미한다(US, 134-135)”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를 ‘사유자(Denker)’로 간주하면서, 이러한 사유자를 “존재의 이웃으로 여행하는 나그네(BH, 344)”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의 기나긴 [존재에로의] 도정에 있어서 고향이 내게 베풀어주었던 모든 것에 나는 늘 감사하고 있다(Ge, 11)”고 하는 그의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자신의 존재사유를 하나의 ‘사유도정(Denkweg)’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에 있어서 이러한 ‘존재에로의 귀향(歸鄕)’은 결코 신비적인 향수가 아니며, 또한 그의 전체 사유 도정은 우리에게 그 자신의 길을 안내하고 지시하는 이정표(Wegmarken)가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하이데거의 사유 道程은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을 도출해내는 것이 아니며, 결코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로의 이행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존재해 왔던 것에로 되돌아감을, 즉 유래의 사유되지 않았던 것에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푀겔러가 “서양의 사유가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아직 사유되지 않은 그것의 근원에로 되돌아가는 길뿐이다”고 주장한 것이나, 하이데거가 “유래한다는 것은 언제나 유래한 그 근원으로 다가감을 말한다(US, 96)”고 한 것은 모두가 이러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고향의 大地’를 찬미하는 횔덜린의 찬가(讚歌) 「遍歷(Ⅳ, 167)」속의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해서 강조한 것도 동일한 의미에서이다. “근원 가까이에 거주하는 이는 그 자리를 떠나기가 어려우리라(HD, 145; HW, 66).”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하이데거의 ‘존재사유’는 근원적인 사유, 곧 ‘근원사유’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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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Concept of Origin in Heidegger
― Bae, Sang-Sik ―
This study aims to clarify Heidegger's concept of origin(Ursprung). The question of 'origin' has been raised incessantly within the philosophical tradition in such a way as where the ground of being is. In fact as the beginners of Western philosophy had sought the arche, that is, the ground of every things in the world, we human beings have been destined to internalize the question of what our ground into ourselves.
Heidegger also took this issue of 'origin', that is the question of being, as the primary question in his thinking. Especially he used 'origin' or 'original' many times in his extensive works. Then we can raise questions, first what the word 'origin' means and second for what purpose it is used. This is the focus of our discussion. For this, first of all, we have to scrutinize the 'origin' of thinking by way of raising the question of 'what is the thinking?'. Then, through the concept of ground(Grund), we will clarify the fact that the being is the ground and origin. Finally, it will be revealed that for Heidegger the language is always nothing but the language of being and the being is alway the origin.
※ Key Words : Origin, Thinking, Ground, Language, 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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