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험적 인식과 사변적 인식
― 칸트와 헤겔의 모순율 해석 ―
강 순 전(서울대)
【주제분류】인식론, 철학적 방법론
【주 요 어】선험적 인식, 사변적 인식, 모순율, 대당, 분석적, 종합적
【요 약 문】
흔히 논리학의 근본법칙으로 간주되는 모순율은 내재적 형이상학, 즉 존재론적 탐구의 근본원리로서의 기원을 갖는다. 논리학이 형식화하면서 형식논리학의 법칙들이 더 이상 대상인식의 도구로서의 기능을 자임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순율은 철학자들의 지속적인 논의대상이 되어 왔다. 그것은 모순율이 형식과학으로서의 논리학의 영역에만 제한된 타당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진리의 근원적인 기준으로 간주되고, 모든 철학적 주장은 학문적 가치를 지니기 위해 이러한 근본요구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모순율이 인식의 도구로서는 아니더라도 모든 인식적 판단이 준수해야 할 필요조건으로서 기능한다면, 인식과 관련하여 모순율의 타당성의 범위와 조건이 결정되어야 한다. 칸트에 따르면 논리학의 형식화와 더불어 모순율은 모든 판단이 충족시켜야 할 필수적인 조건으로 간주되지만, 단지 진리의 소극적인 시금석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진리의 기준은 일반 논리학의 형식적 정합성을 넘어 정합적인 언표와 언표에 상응하는 대상간의 관계를 문제삼는 선험논리학의 요구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칸트는 모순율의 형식적 정합성 역시 개념과 대상간의 분석적 관계가 성립할 때만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헤겔은 진리 인식에 있어서의 모순율의 역할과 타당성을 칸트보다 더욱 크게 제한한다. 헤겔에 따르면 사유의 형식적 원리로서의 모순율이 표시하는 분석성은 진리의 추상적인 일면만을 나타내면서 그것을 진리의 온전한 본성인양 가장한다. 일면성의 절대화는 대립자들의 통일이라는 사변적 진리에로의 진행을 불허할 뿐 아니라, 후자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의 절대적 법칙으로서의 타당성이 부정되어야 한다.
칸트와 헤겔에게 사유의 형식적 정합성은 무제약적 타당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진리가 지향하는 대상에 대한 참된 인식, 즉 진리인식 전체의 특성에 의해 제약되는 것이다.
Ⅰ. 들어가는 말
비판의 학으로서의 철학의 매력이 여타 학문처럼 놓고 들어가는 것(전제)에 기반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모든 인식활동의 제1의 전제로 간주되는 모순율에 대해 시도되는 위대한 두 창조적 두뇌들의 비판적 해석을 살펴보는 것은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어떤 것이 동시에 어떠하면서 어떠하지 않을 수 없다’는 모순율의 정식은 더 이상 이론의 여지없이 자명하며, 이 자명성은 모순율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 같이 보인다. 통상적으로 논리학의 근본 법칙으로 간주되는 모순율은, 논리학을 주관적 사유의 형식적 정합성을 문제삼는 학문으로 보면, 실로 더 이상 오류가 불가능한 정합성의 원칙을 표현한다. 그러나 모순율을 존재 일반에 관한 탐구의 제1의 공리로서 제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동기로부터 볼 때, 모순율은 언표상의 형식적 정합성을 넘어서 존재의 질서의 자명성에까지 관계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순율을 일차적으로 존재론적 원리로서 생각했고 객관 논리적 및 심리학적(주관적 사유의) 원리로서의 모순율은 그것에 수반되거나 그것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칸트에 따르면 논리학의 형식화와 더불어 모순율은 모든 판단이 충족시켜야 할 필수적인 조건으로 간주되지만, 단지 진리의 소극적인 시금석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진리의 기준은 일반 논리학의 형식적 정합성을 넘어 정합적인 언표와 언표에 상응하는 대상간의 관계를 문제삼는 선험논리학의 요구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칸트는 모순율의 형식적 정합성 역시 개념과 대상간의 분석적 관계가 성립할 때만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헤겔은 진리 인식에 있어서의 모순율의 역할과 타당성을 칸트보다 더욱 크게 제한한다. 헤겔에 따르면 사유의 형식적 원리로서의 모순율이 표시하는 분석성은 진리의 추상적인 일면만을 나타내면서 그것을 진리의 온전한 본성인양 가장한다. 일면성의 절대화는 대립자들의 통일이라는 사변적 진리에로의 진행을 불허할 뿐 아니라, 후자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의 절대적 법칙으로서의 타당성이 부정되어야 한다.
모순율에 대한 칸트와 헤겔의 비판적 해석은 자신의 철학적 관점으로부터 수행되는 새로운 해석(Umdeutung)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비판적 고찰에도 불구하고 사유의 형식적 원리로서의 모순율의 명증성과 타당성은 어떠한 손상도 입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모순율이 인식의 도구로서는 아니더라도 모든 인식적 판단이 준수해야 할 필요조건으로서 기능한다면, 인식과 관련하여 모순율의 타당성의 범위와 조건이 결정되어야 한다. 이 글은 무제약적 타당성을 지니는 듯이 보이는 모순율이 선험적 인식과 사변적 인식이라는 칸트와 헤겔의 철학적 인식의 관점으로부터 각각 어떻게 제약되는 지를 보여 줄 것이다.
Ⅱ.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 정식화
모순율을 정식화하고 주제화하고 있는 ?형이상학?4권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제 1철학에 대한 규정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제 1철학이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와 자신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본성에 의해) 그것에 속하는 속성들을 다루는 학문(a science which investigates being as being and the attributes which belong to this in virtue of its own nature)이다. 이 학문은 존재자 자체의 제 1의 원리들과 최고의 원인들을 다룬다. 그 예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와 형상, 가능태와 현실태 같은 개념들 뿐만 아니라 특히 이 장에서는 대립, 하나와 여럿(unity and plurality), 선과 후, 유와 종, 전체와 부분 등의 예들을 열거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장의 중심적인 주제는 수학에서 공리라고 불리우는 진리와 견줄 수 있는 원리, 즉 모순율이다. 모순율이 나타내는 진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 존재자로서의 모든 사물들에 타당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탐구하는 것은 보편적으로 연구하고 제1실체를 다루는(1005a 30-35) 철학자의 일이지 특수 과학의 과제가 아니다. 특수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탐구를 위해 이 원리를 이미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며 탐구하는 동안 이 자명한 원리에 대해 문제 삼지는 않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모순율을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다루는 제 1철학, 형이상학의 탐구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 즉 모순율은 일차적으로 존재론적 원리라는 점이다.
모든 개별적인 탐구의 근저에 놓여 있는 모순율은 그것에 관하여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가장 확실한 원리이다. 오류란 모르고 있는 것들에 관해서만 저질러지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확실한 원리는 가장 잘 알려져서 그에 대한 오류가 불가능한 지식이다. 그것은 또 가정이 아니다(non-hypothetical).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만 하는 원리, 모든 인식에 앞 선 원리는 가정이 아니다. 무언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알아야만 하는 것, 그것을 사람들은 특수한 연구를 할 때 이미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원리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다. 이 같이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원리의 진리성을 의심하고 그에 대해 증명을 요구하는 것은 논리학 교육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1005b 1-5). 모순율에 대해 증명을 요구하는 자들은 증명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논리교육의 결핍에서 그러한 요구를 한다는 것이다(1006a 5-10). 만일 모든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면, 따라서 모든 증명의 궁극적인 출발점인 모순율조차도 증명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한 증명이 취하는 전제를 증명하기 위해 또 다른 전제를 취해야 하고 이 새로운 전제를 증명하기 위해 또 다른 전제로 무한히 소급해가야 하며 결국 증명은 불가능하게 된다. 무한소급은 피해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자체는 증명될 수 없는 모든 다른 증명들의 출발점이 있어야 한다. 모든 증명들의 조건은 그 자체 다시 증명되어질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순율에 대한 온전한 의미에서의 증명은 불가능하지만 대인논증(ad hominem)은 가능하다고 한다. 모순율을 더 확실한 원리로부터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모순율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반대자가 모순율을 승인할 수 밖에 없게끔 함으로써 충만된 의미에서의 완성된 증명을 시도할 수는 있다(1062a 1-10). 이것은 반대자로 하여금 자신의 견해를 깨뜨릴 결과를 시인하게 함으로써 그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4권 4장 이하에서 이러한 간접증명을 여러 가지 예를 통해서 수행한다.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모든 존재자에 타당한 보편적 원리로서의 모순율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명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동일한 속성이 동시에 동일한 관점에서 동일한 것에 속하면서 속하지 않을 수는 없다”(1005b 15-25) 또는 “동일한 사물이 동시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다”(1062a 5-10)라고 정식화한다. 이렇게 정식화되는 존재론적 원리로서의 모순율은 간혹 명제적 언표와 관련하여 “모순되는 진술이 동일한 사물에 대해 동시에 참일 수는 없다”(1011b 10-15)라고 말해진다. 이 표현이 명제적 언표와 관련되었다는 점에서 논리적 정식화라고 불릴 수 있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사유의 규정 및 법칙으로서의 논리는 그때그때의 사물로부터 도출되고 또 그때그때의 사물에 되 적용된다는 점에서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추상화될 수 없기 때문에 ‘동일한 것이 동시에 있으면서 있지 않을 수 없다. 어떠하면서 어떠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존재론적 정식화가 곧 논리적 정식화로도 간주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논리적 명증은 존재로부터 독립한 사유의 주관적 명증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명증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론적 정식화와 논리적 정식화는 불가분리한 것이며, 모순율은 이러한 의미에서 존재의 법칙이자 사유의 법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객관적 진리에 기반하여 주관적 영역에서도 “동일한 사람이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사물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1005b 25-35)는 심리적 강요가 지배함을 주장한다. 이 모순율의 심리적 정식화는 존재론적․객관 논리적 법칙에 기반하고 그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순율이 존재, 논리 및 주관적 사유 어느 영역에 적용되든 간에 그 근원적 정식은 ‘동일한 것이 동시에 있으면서 있지 않다는 것, 어떠하면서 어떠하지 않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해져야 한다.
Ⅲ. 칸트의 모순율 해석
아리스토텔레스는 모순율을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다루는 형이상학의 대상으로서 논구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논리적 명증은 존재 자체의 명증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논리학은 존재론으로부터 추상되지 않았다. 이후의 논리학의 발전은 점차 존재로부터 추상되어 단순히 사유의 형식적 법칙에 관한 학으로 독립하였고, 칸트는 명시적으로 일반논리학을 객관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사고 일반의 형식만을 다루는 한갓된 “형식논리학”(B 170)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은 칸트 자신의 선험논리학을 기존의 일반논리학으로부터 차별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선험적 논리학은 기존의 일반논리학과 마찬가지로 개념, 판단 및 추리 등을 다루지만, 이것들은 대상과 무관한 순수 형식적 사유로서가 아니라 경험에 독립해 있으면서도 경험을 가능케 하는 것들로서, 순수하지만 경험적 소여가 그것들에 주어질 수 있는 한에서 타당한 것들로서, 즉 객관타당한(objektgültig) 규칙과 원리들로서 다루어진다. 대상에 대한 경험적인 인식도 경험과 무관한 순수 주관적․형식적 사유도 아니라, 사유의 형식과 규칙들이 대상에 관계하는 조건과 방식들을 논구하는 인식의 논리가 선험논리학의 내용을 형성한다. 그런데 대상에 대한 경험적 인식이 아니라 순수한 개념적 인식을 추구하는(B XXXV) 전통 형이상학 또한 객관적 순수개념을 논의의 대상으로 한다. 모두 대상에 관계하는 객관적 순수개념들을 논구하고 있는 전통 형이상학과 칸트의 선험논리학의 구별 기준은 대상을 구별하는 비판적 시각에 있다. 칸트는 감성의 대상과 오성의 대상, 현상으로서의 대상과 물 자체로서의 대상을 구별하면서, 이에 대한 의식의 결여로 말미암아 전자에만 타당한 규칙들을 후자에 적용하여 경험의 한계를 참월하는 독단적 형이상학의 사변적 이성 사용을 비판한다. 전통 형이상학의 비판 후에 칸트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 역시 형이상학이다. 칸트는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구분한 볼프(Ch. Wolff)의 전통적 구분에 따라(B XXXVI) 철저한 인식 비판의 토대 위에 엄밀한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을 구축하고자 한다. 그래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이설이 아니라 비판이며, 학문의 체계(형이상학)가 아니라 그것에의 입문으로서의 예비학일 뿐이다(B 25). 하지만 선험적 논리학을 주된 서술대상으로 하고 있는 ?순수이성비판?이 경험일반의 가능조건을 통해 경험대상의 가능조건을 규명하는 작업이라면(A 134, B 197), 그것은 존재를 가능케 하는 원리를 탐구하는 존재론에 다름 아니다. 20C 초의 존재론적 칸트 해석이 주목한 점이 바로 이것이며, 칸트 자신도 ?순수이성비판?을 “형이상학”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B XVIIIf.). 물론 여기서 형이상학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구에서도 그랬듯이 전통적 이해에서 존재론에 해당하는 내재적 의미를 함축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모순율을 이러한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의 대상으로 삼았듯이, 칸트도 같은 의미의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는 선험적 논리학의 대상으로서 모순율을 논구하고 있다. 칸트의 모순율 해석의 이해는 이와 같은 ?순수이성비판?전체논의의 특성에 대한 배경지식을 전제한다.
칸트는 모순율을 모든 분석적 판단의 최상원칙이라고 칭하면서 종합적 판단의 최상원칙과 구별한다. 주어와 술어 사이의 결합이 동일성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분석판단은 주어의 개념을 분석하는 일만으로도 술어를 그로부터 도출해 낼 수 있는 해명판단(Erläuterungsurteil)이다. 여기서는 술어의 내용이 이미 주어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술어의 개념을 위해 판단 외부의 경험에 조회할 필요가 없다. 반면 종합판단은 주어의 개념에다 그것 안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따라서 그것의 분석을 통해서 이끌어 낼 수 없는 내용을 술어를 통해 보태는 확장판단(Erweiterungsurteil)이다. 여기서 술어를 통해 부가되는 내용은 판단의 형식을 넘어 외부의 경험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B 10 이하 참조). 모순율이 모든 분석적 판단의 최상원칙이라 함은, 분석적 판단은 외부의 경험에 관계함이 없이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에 의해 성립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무모순적이기만 하면 진리가 보증되며, 따라서 모순율이 분석판단의 진리를 인식하는 유일하고도 충분한 최상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분석판단은 본래 동어반복이기 때문에 주어의 개념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일단 주어개념이 주어지면 술어 속에서 주어개념의 반복을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여기서 내용은 문제가 되지 않고 오직 형식만이 문제이다. 형식적 진리로서의 분석판단의 진리성을 인식하는 원칙인 모순율은 마찬가지로 무내용한 형식일 뿐이다. 왜냐하면 분석판단이 참이기 위해서는 무모순성이라는 형식성만을 충족시키면 되고, 따라서 분석판단의 진리의 기준을 인식하는 원칙으로서의 모순율도 형식적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분석판단과 모순율의 이러한 관계는 양자에 대한 칸트의 순환적 정의에 의해 뒷받침된다. 분석성이란 그것의 부정이 모순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한편 모순의 설명은 다시 분석성의 부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볼프(M. Wolff)는 콰인(W. V. O. Quine)의 논리에 기대어 분석성의 해명에서 빠지게 되는 순환성을 비판적으로 지시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칸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적 관점에서의 정식화가 포함하고 있는 문제를 의식적으로 주제화하고 있음을 본다. 칸트의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식화가 가지고 있는 함축을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과는 다른 방식으로 주제화하면서 모순율이 갖는 단순한 형식성을 넘어서는 그의 선험논리학의 이념을 시사한다.
모순율이 갖는 분석성을 부정할 경우에 모순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칸트를 거쳐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 확인될 수 있다. 만약 이것을 비트겐슈타인처럼 “모순이란 형식논리적 근거에서 거짓인 언표”라고 표현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식이 갖는 언어적 차원에서의 형식성에만 주목하는 결과에 이른다. 비트겐슈타인의 해석은 형식논리학이 논리학의 발전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하는 시대의 산물이다. 그와 다른 문제 의식과 철학적 구상을 갖고 있던 칸트에게서 모순율은 언어적 차원의 분석성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어개념과 그에 상응하는 사물과의 분석적 관계에 의해서만 확립될 수 있다.
칸트는 모순율에 대한 기존의 통상적 정식을 “어떤 것이 동시에 있으면서 있지 않다는 것은 불가능하다”(es ist unmöglich, daß etwas zugleich sei und nicht sei) 혹은 “B인(B로 표시되는) 사물 A가 같은 시간에 (동시에) 非B일 수는 없다”(Ein Ding=A, welches etwas=B sei, kann nicht zu gleicher Zeit non B sein)라고 표현한다. 이 전통적 정식들은 “동시에”라는 시간적 제한이 포함되어 있다. 모순율이 시간에 지배된다는 것은 한 주어에 귀속되는 술어들이 시간적으로 변화 가능하다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이렇게 표시된 정식에서 배제되어야 할 모순이 성립하는 것은 주어로서의 사물과 그에 반대되는 술어 사이에서가 아니라, 주어에 상응하는 술어와 그 술어의 반대 사이에서이다. 그래서 모순은 우리가 한 사물(주어)의 술어를 그 사물로부터 먼저 분리하고, 그 다음에 이 술어가 자신의 반대와 결합하는 데서 생긴다. 가령 “배움이 없는 사람은 유식하지 않지만 다른 때에는 유식할 수도 있다”(Ein Mensch, der ungelehrt ist, … ist nicht gelehrt, kann aber zu einer anderen Zeit gar wohl gelehrt sein). 여기서 모순은 ‘배움이 없는 사람’으로부터 먼저 분리된 ‘유식하지 않다’라는 술어와 ‘유식하다’라는 술어 사이에서, 그것도 ‘동시에’라는 시간적 제한이 부가될 때에만 생긴다. 모순의 정립을 위해 ‘동시에’라는 시간적 제한이 필요한 이유는 ‘배움이 없는 사람’이라는 주어에 그것에 본래 귀속되어야 할, 즉 주어와 항상 필연적으로 결합되어야 할 술어 ‘유식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만약 그렇다면 주어와 술어 ‘유식하지 않다’의 결합은 분석적), 그것의 타자․반대인 ‘유식하다’라는 술어 또한 귀속되기 때문이다 (즉 주어와 술어들의 결합이 종합적이다). 여기서 반대술어(첫 번째 술어의 반대)는 주어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어와 종합적으로 결합되었던 첫 번째의 술어와 모순될 뿐이다. 주어에 술어가 종합적으로 결합될 때는 상반된 술어들이 모순 없이 동일한 주어에 귀속될 수 있기 때문에 모순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상반된 술어들을 주어에 동시에 귀속시킴으로써 순차적인 결합을 배제해야 한다. 이같이 시간적 제한이 필요한 이유는 주어와 술어의 종합적 결합 때문이고, 거꾸로 종합적 결합의 경우 ‘동시에’라는 시간적 제한을 통해 모순의 조건을 표현해야 한다. 그러나 시간적 조건은 논리학에 불필요할 뿐 아니라, 논리학의 원칙인 모순율은 시간관계에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시간적 제한이 필요한 이유는 주어인 사물과 술어가 종합적으로 결합되었기 때문이므로, 시간적 조건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 정식을 얻기 위해서는 주어인 사물과 그에 상응하는 술어의 분석적 결합이 필요하다. 가령 칸트식 표현으로 “무식자는 유식하지 않다”(Kein ungelehrter Mensch ist gelehrt)라고 표현할 때, 배움이 없음(Ungelehrtheit)이라는 특성은 주어의 개념을 형성하여 주어에 상응하는 사물과 분석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 부정명제는 ‘동시에’라는 시간적 조건을 첨부함이 없이 모순율로부터 직접적으로 명백해진다. 즉 주어에 상응하는 사물과 분석적으로 결합된 ‘유식하지 않음’(Ungelehrtheit)이라는 술어에 ‘유식하다’라는 술어는 ‘동시에’라는 시간적 조건 없이도 개념적으로 모순된다. 따라서 ‘무식자는 유식하지 않다’라는 분석명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주어개념이 지니는 특성과 그에 상응하는 사물이 분석적으로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 분석명제는 주어개념의 개념적 분석을 통해 술어개념을 얻게 되는 동어반복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적 동일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술어화의 대상인 근저에 놓여 있는 사물(Sub-jectum)과 술어의 결합이 분석적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시간적 관계에 제한됨이 없이 주어개념에 대한 분석적 술어화가 가능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모든 분석적 판단의 최상원칙인 모순율은 시간적 제한을 포함하지 않고 표현되어야 한다. 그래서 칸트는 기존의 문제 있는 정식을 폐기하고 “어떤 사물에도 그와 모순된 술어가 귀속되지 않는다.”(Keinem Dinge kommt ein Prädikat zu, welches ihm widerspricht)라는 새로운 정식을 고안해낸다.
칸트 이후로 누구도 이 정식을 모순율의 새로운 정식으로 간주하고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식에서 칸트의 철학적 이념을 확인할 수 있다. 칸트는 실로 진리의 한갓 형식적 기준이라고 표현되는 모순율을 모든 분석적 판단의 최상원칙으로서 모든 종합적 판단의 최상원칙과 구별한다. 하지만 모순율의 주어에 상응하는 술어를 그에 상응하는 사물과 분석적으로 결합시키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한갓 오성과 이성의 법칙들만을 다루지만 그것들이 대상들에 선천적으로 관계하는 한에서만 그러하다”(B 81f)는 선험적 논리학의 이념을 반영하고 있다. 분석판단의 술어를 얻기 위해서는 경험을 뒤돌아봄이 없이 주어의 개념만을 분석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동일성에 의한 주어와 술어의 결합은 주어개념의 그에 상응하는 술어와의 분석적 결합이라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칸트의 모순율 파악은 형식논리적 추상 속에서 서술되는 비트겐슈타인의 파악과는 다른 것이다. 모순율 해석에서 칸트의 기여는 모든 분석적 판단의 최상원칙인 모순율에서 언어상의 형식적 관계가 성립하기 위한 존재론적 조건을 분명히 한 점에 있다.
지금까지 서술한 칸트의 모순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헤겔의 서술로의 이행을 위해서도 대당(Opposition)에 관한 칸트의 주목할 만한 두 가지 설명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 칸트의 모순율 해석에서 문제되었던 것은 주어개념과 술어 사이의 형식적 모순관계 혹은 일치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주어개념과 그에 상응하는 술어가 분석적으로 결합하여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조건이 충족된다면 분석판단은 개념과 개념간의 언어적 차원의 형식적 관계로 완결될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한 사물에 마땅히 귀속되어야 할 개념은 그 사물과 일의적․분석적 관계를 지녀야 하기 때문에, 각각의 실재들을 그것에 분석적으로 결합된 개념들에 따라서 고찰할 때 그들의 관계는 항상 자기와 일치하는(einerlei) 자기동일적 개념들 간의 병렬적 관계일 뿐 어떠한 실재적 모순(Widerstreit)도 포함하지 않는다. 칸트는 라이프니쯔가 대상을 순수오성개념의 대상(可想體)으로서만 생각했지 감성의 대상(現象體)으로서 생각하지는 못했다고 비판한다. 때문에 라이프니쯔에게서 실재와 그 개념은 분석적으로만 결합되어서 실재는 항상 자기동일적인 것으로서 긍정(Position) 될 뿐이며, 실재들의 총체로서의 세계는 이러한 긍정성으로서의 실재들의 총괄(Inbegriff aller Realität)을 의미한다. 여기서 하나의 실재로서의 사물을 부정하는 것은 개념적․논리적 부정으로서, 긍정성의 총괄로서의 완전한 세계에서 하나의 개념․규정을 떼어내는 것, 그것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쯔에게서 부정은 단지 완전한 실재에서 부분적인 결여를 초래하고, 그런 의미에서 실재의 완전성을 제한하는 악이다. 이러한 부정개념은 실재로부터 결여로의 일방적 관계를 나타내는 절대적 부정(nihil negativum)이다.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부정은 개념적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추상적 부정인데 가상계와 현상계를 구분하지 못한 라이프니쯔는 이 부정을 현상계의 실재적 대상들에게까지 적용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라이프니쯔는 현상을 지성화했으며(B 327), 거꾸로 말해서 사유가능성을 곧 존재가능성으로 간주하였다. 칸트에 따르면 현상의 대상으로서의 실재에서의 부정은 그러한 추상적 개념적 부정이 아니라 하나의 주어 속에서 두 실재, 즉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상호적 부정(nihil privativum)이다. 여기서 부정적인 것은 긍정적인 것 못지 않게 적극적인 힘을 지닌다. 따라서 현상의 실재들은 그것 자체로서 존재하는 긍정적인 것들이 아니라 하나의 긍정은 그것에 대한 반작용인 부정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그러한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가령 5만큼의 힘으로서의 실재는 +10과 -5사이의 실재적 모순(Widerstreit)의 결과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쯔-볼프 학파는 모든 실재성의 실재적 모순을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에 5를 2+3이라는 긍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의 결합으로만 생각했다. 모든 실재들은 개념적 관계로서 볼 때는 각기 긍정적인 것들로서 논리적으로 서로 모순이 없지만, 현상의 대상으로서 볼 때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두 힘의 실재적 모순(Widerstreit) 속에 있다. 칸트에 따르면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이 선험적 반성의 과제이다. 라이프니쯔는 전자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실재적 모순은 생각하지 못했고 개념적 모순(Widerspruch)만을 생각할 수 있었다.
개념적・논리적 대당(logische Opposition)과 실재적 대당(reale Opposition) 이외에 칸트는 변증법 대당(dialektische Opposition)이라는 제3의 대당관계를 그것들로부터 구별한다. 변증적 대당이란, 변증법(Dialektik)을 가상의 논리(Logik des Scheins)라고 할 때, 가상적인 대당이다. 즉 그것은 한 주어에 서로 모순된 술어가 부가되어 언어적 차원에서 형식상 모순인 것처럼 보이고, 이 대당관계가 진정으로 모순(Widerspruch)관계라면 두 판단 중 하나만이 참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이어야 하지만 사실은 둘 다 거짓이거나 참임이 밝혀지면서 반대(konträr) 및 소반대(subkonträr)대당으로 전화하는 대당관계를 말한다. 이러한 전화는 판단들의 주어에 대한 인식비판을 통해 수행된다. 가령 모든 물체는 각기 1) 좋은 냄새를 갖거나 2)나쁜 냄새를 갖거나 한다고 말했을 때, 이 두 판단은 언어 형식상으로만 볼 때 서로 모순되는 판단이다. 그러나 만일 주어의 물체가 냄새나지 않는 물체인 경우에는 위 판단들은 둘 다 거짓이다. 판단들이 거짓이 되는 이유는 술어화의 대상인 주어와 그것의 술어 사이의 결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령 세계전체가 우리의 인식에 주어질 수 있고 주어인 세계에 마땅히 귀속되어야 할 술어가 ‘유한하다’라고 한다면 ‘세계는 무한하다’라는 주장은 그것에 모순된다. 그러나 세계전체는 우리의 인식에 주어질 수 없기 때문에 유한하다는 술어가 (무한하다도 마찬가지로) 거기에 접합될 수 없다. 대상과 술어가 접합될 수 있는 것은 대상이 술어화될 수 있을 때, 술어화하는 인식주체에 인식적으로 주어질 수 있을 때이다. 그것은 오성개념이 경험적으로 사용될 때만 가능하다. 경험만이 오성개념이 적용될 수 있는 질료를 줄 수 있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사물에 대해서만 오성은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다. 한편 오성은 감성과 독립된 사고의 능력이기도 하다. 이 사고의 능력인 오성이 자신의 유의미한 사용을 넘어서 이성, 특히 사변적 이성에 의해 자극되어 대상일반에 관해서, 즉 초경험적 대상에까지도 인식적으로 사용될 때 변증적 가상이 발생한다. 세계 전체는 인식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전체에 대해 마치 경험적 대상에게서처럼 오성이 술어화할 때 변증적 대당이 생겨난다. 변증적 대당이 말해주는 것은 모순이 성립하는 것은 언어상의 형식적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언어와 대상간의 고정적 지시관계가 성립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칸트에게서 이 지시관계는 분석판단에서이든 종합판단에서이든 일의적으로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변증적 대당은 모순율 해석에서 서술된 논리적 대당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보완하고 있다.
Ⅳ. 헤겔의 모순율 해석
칸트는 무모순성으로서의 분석성이 판단일반의 보편적 조건이라고 한다. 종합판단도 비록 술어의 내용이 외부로부터 주어지지만 판단으로서 성립하기 위해서는 주어와 술어 사이의 형식적 동일성이 성립해야 한다. 이 점에서 종합판단은 이미 분석성을 포함하고 있다. 물론 종합판단이 내적 모순이 없더라도 대상규정에 합치하지 않으면 거짓일 수 있으므로 분석성은 종합판단이 참이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런데 종합판단이 이미 분석성을 포함한다면 종합판단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분석판단은 별 의미가 없게 된다. 독립적 분석판단은 주어-술어의 형식적 동일관계 이외에 내용적으로도 동일성을 지니는 동어반복이지만, 이 내용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헤겔은 분석판단의 무의미성에서 더 나아가 그것의 거짓됨을 주장한다. 물론 여기서 ‘진리를 표현하는 데’라는 조건이 부가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헤겔에 따르면 진리는 절대적이어야 한다. 절대적 형이상학 혹은 무한성의 철학이라는 헤겔 철학의 틀(Paradigma)에서 볼 때, 분석명제의 형식적 진리는 이성의 진리를 표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성에 의해 파악되는 절대적 진리는 주관과 객관, 형식과 질료 등 대립되는 것들의 통일인 사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변이란 대립자들을 하나의 통일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며, 헤겔에 따르면 그럴 때만 온전한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헤겔은 초기의 한 저작에서 “모든 이성명제들은 개념과 관련하여 모순율에 대한 위반을 포함해야 한다. 한 명제가 한갓 형식적이라고 하는 것이 이성에게 의미하는 바는, 그것이 자신에 모순적으로 맞서 있는 것을 언급함이 없이 그 자체로 정립될 때 그것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짓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모순율을 형식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것을 거짓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진리는 대립자와의 통일이며, 모순율은 대립자를 배제하는 분석성・형식성 때문에 비진리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헤겔 철학의 “형이상학적 전제”를 받아들일 때만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감성의 수용성과 오성의 자발성, 즉 인식의 질료는 감관을 통해 밖으로부터 주어져야 하고 형식은 인식 주관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칸트의 전제에 비해, 헤겔의 전제는 너무 많은 것을 놓고 들어가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헤겔 자신은 오히려 자신의 철학은 무전제의 철학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관점에서 칸트의 전제를 비판한다. 헤겔에 따르면 감성과 오성, 객관과 주관의 분리를 원리로 하는 인식은 절대자 자체를 포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항상 인식도구에 의해 변형된 절대자만을 인식할 뿐이다. 인식되는 것과 인식은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진리는 객관에 마주해 있는 주관 속에 들어오는 객관의 상이 아니라,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내용 속에 있는 것이다. 인식론적으로 주관과 객관의 분리 속에 있는 인식은 유한한 것이고, 그들의 상호작용은 통일, 즉 무한자에 도달할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무한자에 이르는 과정 중에 있는 각 단계는 모두 유한자이며 무한자의 계기이다. 유한자들은 무한자・절대자가 아니기 때문에 부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유한성의 추상적 부정은 어떠한 긍정적 내용의 진리도 산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한자의 부정은 타자로의 이행이라는 변화의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가 헤겔의 목적론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유한자의 운동과 변화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그로부터 대립자들의 통일이 진리라는 헤겔의 진리관을 자연스레 도출해 낼 수 있다. 모든 유한자는 운동과 변화에 내맡겨져 있다. 헤겔의 목적론적 체계 내에서도 유한자의 운동으로부터 독립된 무한자의 운동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고, 전자가 없이는 후자의 내용도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유한자의 분석은 곧 존재 자체의 진리가 된다. 물론 진정한 유한자는 무한자를 자신 안에 포함하게 된다는 사실이 분석을 통해 드러난다.
헤겔에 따르면 유한자(有限者)란 타자에 의해 제약된 존재를 말한다. 유한자의 규정 또한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가령 연필은 종이가 아니고 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들과 구별되어 규정된다. 따라서 모든 규정은 부정을 포함한다.(Omnis determinatio est negatio) 모든 유한자는 자기동일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를 자신 안에 포함한다. 즉 자기관계와 타자관계의 통일이다. 이러한 유한자는 무한자와의 관계에서 볼 때, 부정되어야 할 존재이다. 무한하고 절대적인 인식을 위해서 유한자는 자신을 제약하는 타자에로 이행해야 하고 이 타자 역시 제약된 유한자로서 자신의 원인으로 이행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칸트에 이르는 존재론이 제시했던 유한한 존재자들의 제약의 계열을 형성하게 된다. 이 계열의 가운데 있는 어떤 존재자도 타자에 의해 제약되는 한 유한하다. 신 혹은 제약의 필연성의 제1원인을 독단적으로 혹은 요청에 의해 설정하지 않는 한 이 제약의 계열은 무한히 진행해야 한다. 앞의 두 철학자들과는 달리 헤겔은 사변적 사유방식을 통해 무한진행으로부터 벗어난다. 유한자의 타자가 자신의 밖에 있다면, 유한자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타자로 이행하는 행위를 무한히 반복해야 한다. 그러나 타자가 유한자 자신의 자기부정을 통해 유한자로부터 산출된 유한자 자신의 타자(das Andere seiner selbst)라고 한다면, 모든 타자의 계열은 유한자 자신의 지속적인 규정(Weiterbestimmung)이 된다. 자기자신의 타자를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자기부정을 통해 자신으로부터 타자를 산출해내는 이러한 유한자는 다름 아닌 진정한 무한자이다. 이러한 유기적 존재를 헤겔은 존재의 범형(範型)으로 간주한다. 사태를 추상적으로 파악하는 오성은 일면적이다. 반면 구체적(konkret) 사유로서의 이성적 ․사변적 사유는 존재를 항상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것도 내적 관계로서, 즉 타자를 내재적 구성요소로 삼고 이 구조에 기반해 타자를 산출해내는 관계성으로서 파악한다. 추상적 사유가 일면적이라는 것은 존재가 본래 타자와의 통일 속에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것, 즉 타자관계와 자기관계의 통일임에도 불구하고, 존재자 속에서 자기관계만을 확인한다는 의미이다.
앞서 인용한 모순율 비판은 존재자에 타당한 사유법칙으로서의 모순율은 존재일반의 구조가 타자성을 포함하는 종합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관계라는 일면적 계기만을 추상하며 분석적으로 고찰한다는 것이다. ?논리의 학?(Wissenschaft der Logik)에서 헤겔은 전통 논리학의 근본법칙들을 새로이 해석하면서, 모순율에 대한 초기의 비판을 더욱 구체화하고 있다. 여기서 헤겔은 모순율을 동일률과 동일한 내용을 지니면서도 그것을 부정적인 형식으로 표현하는 정식으로 간주한다. 단적으로 동어반복적인 성격을 지니는 동일률조차도 헤겔의 새로운 해석(Umdeutung)에 따르면 타자성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A=A로 표현되는 단순한 자기관계 속에서조차도 관계하는 자기와 관계되는 자기가 서로 구별되기 때문이다. “A는 동시에 A이면서 非A일 수 없다”(A kann nicht zugleich A und Nicht-A sein)로 표현되는 모순율은 명시적으로 타자성을 포함한다. 이 정식은 통상적으로 A≠非A의 이중부정을 통하여 A=A의 동일관계를 확고히 하려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非A는 타자이지만 사라져야 할, 부정되어야 할 타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非A라는 타자성의 계기는 A를 구성하는 데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배제되어야 할 요소로 보인다. 그러나 헤겔에 따르면 이 非A로부터의 구별이 없이는 A의 규정 또한 성립할 수 없다. 헤겔은 존재자의 규정작용을 존재자가 자신을 부정하여 타자화하고 이 타자를 다시 자기 자신으로 환수하는 원환운동으로 표현하는데, 이러한 원환운동이 지속되면서 외화된 타자로부터 자신으로 복귀할 때마다 규정성이 형성되어 존재자의 규정성들의 계열이 생겨난다. 여기서 각각의 규정성의 내용을 형성하는 것은 타자와의 매개에 의한 것이다. 타자관계가 없다면 자기관계의 동일성은 아무런 내용도 지니지 않은 공허한 것으로 남는다. 따라서 非A의 존재는 추상적으로 부정되어 폐기될 타자가 아니라, 그것의 자립성은 지양되지만 A의 동일성 속에 포함되어 그 내용을 구성하는 타자성이다. 헤겔의 이러한 원환적 규정작용에 기반하여 모순율을 새로이 해석할 때 모순율은 더 이상 추상적 동일성에 고착하는 분석명제가 아니라 존재일반의 구성적 원리를 표현하는 분석적이면서도(자기관계) 종합적인(타자관계) 명제이다.
그러나 동일률과 모순율의 표현은 추상적 동일성에 고착하는 통상적 해석을 종용한다. 타자성을 명백히 표현하고 있는 발전적 형식의 모순율조차도 타자에 의한 혼탁을 배제함으로써 순수한 동일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동일률과 같은 내용을 포함할 뿐이다. 전통적인 논리법칙의 정식화가 새로이 해석된 내용을 적합하게 표현하지 못한다면 달리 표현되어야 한다. 적절한 정식은 아마도 ‘A는 A이면서 동시에 非A이다’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정식은 ‘A=A’가 타자성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대의 이유에서 非A의 가상성, 즉 비자립성과 A에의 종속성이 표현되지 못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헤겔은 도처에서 예(Beispiel)들을 서술할 때는 ‘무엇이면서 무엇이 아닌’이라는 방식으로 서술하지만, 정작 존재의 일반적 원리를 하나의 명제로 표현할 때는 위에서 추정한 정식대로가 아니라 “모든 사물들은 그 자체 모순적이다”라고 정식화한다.
사유를 통해 존재를 드러내는 논리학의 근본법칙은 대립자들의 통일에 의해 규정되고 변화하는 존재 일반의 근본구조를 적합하게 표현해야 한다. 이를 위한 가장 구체적인 서술을 배중율에 대한 헤겔의 새로운 해석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배중율은 “어떤 것은 A이거나 非A이지, 제 3의 것은 있을 수 없다”(Etwas ist entweder A oder Nicht A; es gibt kein Drittes)라고 표현된다. 헤겔에 따르면 A이면서 동시에 非A인 어떤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은 A도 非A도 아닌 어떤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을 함축하는데, 실제로는 배중율이 배제하는 그러한 제 3자가 있다. 즉 A(+A)와 非A(-A)에 무관심한 A 자체(|A|)가 있다. |A|는 (1) +A도 -A도 아니지만, (2) 또한 +A이기도 하고 -A이기도 하다. (1)의 경우는 |A|가 +A와 -A라는 규정 자체가 아니라 이 규정들은 관계로서의 하나의 통일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의 경우가 말해주는 것은, |A|가 +A이거나 -A여야 한다는 전통적 정식의 의미는 양자가 +A일 때는 -A일 수 없고 -A일 때는 +A일 수 없는 서로를 배제하는 대립관계로서 |A|의 규정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A는 -A가 아닌 한에서만 +A이고 -A는 +A가 아닌 한에서만 -A이기 때문에, 각자는 타자 없이 독자적으로 존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립을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대립관계는 서로를 배제할 뿐 아니라 제약하는 관계이다.
이 관계 자체가 갖는 통일성, 자기동일성이 다름 아닌 존재 일반인 |A|이며, +A와 -A의 대립관계가 이 존재의 규정성을 형성한다. 헤겔은 +A를 긍정적인 것, -A를 부정적인 것이라고 부르는데, 한 존재자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상호관계로부터 그러그러한 규정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관계는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으로,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으로 상호전화하면서 통일 속에서 양자의 기존의 대립이 소멸하고, 새로운 자기구별 속에서 다시금 양자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면서 존재의 새로운 규정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대립관계는 존재의 규정성을 결정할 뿐 아니라 운동과 변화를 야기하는 존재 일반의 구성적 원리를 형성한다.
우리는 여기서 칸트의 실재적 대당(reale Opposition)을 떠올리게 된다. 칸트에 따르면 실재들을 개념적으로 고찰하면 긍정적인 규정들로서의 실재들 간에는 어떤 모순도 일어나지 않지만, 현상으로서의 실재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라는 두 힘의 실재적 모순(Widerstreit) 속에 현존한다. 칸트의 실재적 대당과 헤겔의 대립관계가 갖는 이러한 상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철학자의 견해가 함축하는 차이 또한 크다. 칸트는 실재가 대립되는 요소들 간의 통일로서 존재한다고 실재적 대당관계에서 밝히고 있지만, 그에게 있어서 실재적으로 모순(Widerstreit)되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실재의 개념적 규정이 아니라 역학적 힘일 뿐이다. 분석적 및 변증적 대당관계에 대한 고찰에서 드러나듯이 대상과 대상규정 사이에는 일의적이고 고정적인 결합이 요구된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대립된 힘들의 통일, 즉 실재적 모순(Widerstreit) 속에 있는 실재도 칸트에 따르면 언어적 차원에서는 이 실재에 일의적으로 상응하는 긍정적 언표를 갖는다. 그러나 헤겔의 경우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단지 역학적인 힘이 아니라 개념적 규정이다. 대상규정 자체가 대립적 요소들의 통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언어적 차원에서 실재는 모순적인 언표 속에서 서술될 수 밖에 없다. 만일 헤겔의 관심이 추상적으로 고정된 개념들 사이의 무모순적 정합성을 고수하는 데 있고, 운동․변화 중에 있는 존재자를 그 가운데서 파악하려는 데 있지 않았다면, 헤겔 철학은 모순율에 저촉된다는 수많은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웠을 것이다. 헤겔의 제논(Zenon von Elea) 해석이 보여주듯이 운동 자체를 추상하지 않은 구체적 상태에서 파악하려면 모순적인 언표로 서술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임의적인 부정합이 아니라 사태의 부정합에 따르는 부정합이다. 만일 추상적으로 고정된 개념적 차원에서 모순된 언표가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사태에 대한 어떠한 인식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반면 헤겔의 모순은 운동․변화 중에 있는 존재자의 파악이기 때문에, 존재자의 구조적 전개에 따라 해소되고 진행한다. 모순의 해소는 한 대상에 모순되는 규정들을 부가하는 것이 (형식)논리적 이유에서 거짓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순은 자신의 객관-논리적 구조에 따라 지속하지 못하고 해소되고 진행하여야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칸트는 대상에 대한 언어적 서술이 대상으로부터 추상되어 언어적 차원에서만 독립된 완결성을 가질 수는 없으며, 오히려 그것의 유의미성은 항상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주어질 수 있다는 선험철학적 패러다임을 가지고 논리학의 근본법칙을 해석한다. 여기서 선험철학의 내용을 제약하는 것은 유한한 인간인식의 뚜렷한 한계설정이다. 헤겔은 근본적으로 칸트의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그의 관심은 유한한 인간인식에 의한 대상인식의 제한이 아니라, 그러한 제한을 벗어난 존재 자체의 서술, 즉 무한자의 패러다임으로부터의 존재파악에 있었다. 무한성의 관점에서 본 유한자는 운동과 변화에 내맡겨진 모순적인 것이고 그것의 내용적인 서술이 바로 헤겔의 사변철학이다.
Ⅴ. 맺는 말
흔히 논리학의 근본법칙으로 간주되는 모순율은 내재적 형이상학, 즉 존재론적 탐구의 근본원리로서의 기원을 갖는다. 논리학이 형식화하면서 형식논리학의 법칙들이 더 이상 대상인식의 도구로서의 기능을 자임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순율은 철학자들의 지속적인 논의대상이 되어 왔다. 그것은 모순율이 형식과학으로서의 논리학의 영역에만 제한된 타당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진리의 근원적인 기준으로 간주되고, 모든 철학적 주장은 학문적 가치를 지니기 위해 이러한 근본요구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진리인식의 보편적이고, 또 그런 의미에서 소극적인 조건인 모순율을 진리인식 전체의 맥락 안에서 조건지우며 타당성을 제약한다. 그는 분석적 대당에 관한 고찰을 통하여 모순율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주어개념과 그에 상응하는 대상 사이에 분석적 결합이 전제되어야 하며, 만일 변증적 대당관계에서처럼 주어개념에 상응하는 대상이 인식적으로 주어지지 않을 경우 언표상의 형식에서 성립하는 모순관계도 실제로는 반대대당(konträr)으로 밝혀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로써 무제약적 타당성을 지니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모순율이 타당한 인식론적 조건을 전제로 해서만 성립할 수 있음이 새로이 밝혀진다.
헤겔은 유한한 인식론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사유의 질서는 존재의 질서와 일치해야 한다는 철학적 관점에서 사유의 법칙으로서의 모순율이 표현하는 추상적 일면성을 비판하면서 정식 안에 암묵적으로 내재하는 구체성, 즉 자기관계와 타자관계의 통일을 새로이 해석해낸다. 이같이 대립자들을 그것의 통일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사변적 인식의 내용을 이룬다. 칸트의 실재적 대당관계는 헤겔의 사변성의 단초를 보여 주지만, 헤겔은 한 사물에 통일적으로 내재하는 대립적인 두 요소를 칸트처럼 역학적 힘이 아닌 객관 논리적 규정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인식적 내용의 표현 또한 대립자들을 하나의 통일 속에서 표현할 것을 요구하는 사변적 관점에서 볼 때 대상과 그에 대한 언표 사이의 관계를 분석적으로 고정하는 칸트의 인식 또한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칸트와 헤겔은 사유의 형식이 진리인식의 규준으로 작용하는 한, 인식의 방식에 따라 그 타당성의 범위와 조건 및 방식이 정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칸트는 선험적 인식의 여러 경우를 통해서 모순율이 타당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고, 헤겔은 사변적 인식의 내용으로부터 모순율의 타당성을 제약한다. 그들에게 사유의 형식적 정합성은 무제약적 타당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진리가 지향하는 대상에 대한 참된 인식, 즉 진리인식 전체의 특성에 의해 제약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