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니체의 즐거운 지식 혹은 학문

나뭇잎숨결 2020. 4. 23. 07:01

 

 

 

시인과 현자에게는 만물이 친구이고 그에게 바쳐진 것이며, 모든 체험이 유익하고, 매일매일이 신성하며, 모든 인간이 신과 같은 존재이다.

 

- 토마스 에머슨

 

 

존재의 목적을 가르치는 교사


- 내가 좋은 시선으로 인간들을 보건 나쁜 시선으로 인간들을 보건, 나는 인간 전체이건 특별히 각 개개인이건 간에 그들이 하나의 과제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인간 종의 보전에 도움이 되는 것을 행하는 것. 더군다나, 실제로는 이 종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에게 저 [보존] 본능보다 더 오래되고 더 강하고 더 무자비하고 더 이기기 어려운 것이 없기 때문에, - 이 본능이 정말로 우리 종과 우리네 무리의 본질 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는 아주 재빠르게, 습관적인 근시안을 가지고, 다섯 걸음 떨어져서 우리의 이웃을 이로운 인간과 해로운 인간,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으로 분명하게 분리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고려를 하고 전체[적인 작용]에 대해 더 긴 숙고를 하게 되면, 우리는 이러한 분명한 구분과 분리 행위를 신뢰하지 않게 될 것이고, 끝내는 그것을 단념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해로운 인간 역시도 종의 보전이라는 관점에서는 언제나 가장 이로운 인간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그의 작용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충동들을 유지시켜 주었기 때문인데, 그 충동들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오래 전에 쇠약해지거나 부패해버렸을 것이다. 증오,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것, 약탈욕과 지배욕, 그리고 지금까지 악하다고 불려왔던 모든 것, 그것은 종의 보전을 위한 놀라운 경제에 속한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낭비적이며 전체적으로 가장 어리석은 경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 하지만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 종을 보전해왔다는 것은 증명될 수 있다 .


나는 아직 모르겠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요 이웃이여, 네가 도대체 종에게 불리하게, 즉 "비이성적"이고 "나쁘게" 살아갈 있는지를. 종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수천 년 이래로 이미 사멸해버려서 이제는 신조차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너의 가장 좋은 욕구와 가장 나쁜 욕구에 몰두하고, 무엇보다도 땅으로 내려가라 geh's zu Grunde ! - 그 두 가지 일 속에서 어쨌든 너는 언제나 인류의 촉진자요 은인일 수가 있는 것이며, 그로 인해 너를 칭송하는 자 - 그리고 너를 조롱하는 자 역시도, 너에게 주어질 것이다! 하지만 너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철저하게] 너의 가장 좋은 점 안에서까지도 개별자인 너를 조롱할 수 있는 자를, 파리와 개구리 같은 너의 가장 큰 비참함을 그것이 마치 진리인 양 너에게 느낄 수 있게 할 수 있는 자를!


모든 진리에서 [나오는 웃음으로] 웃기 위해서 한껏 자기 자신을 비웃는 것, 그것을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가장 좋은 자들도 충분한 진리 감각을 갖고 있지 못했고 가장 재능 있는 자들도 너무 적은 천재성만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웃음에게도 아직 미래가 있을 것이다! 그 때에는, "종은 모든 것이요 개인은 항상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명제가 인간 자체 Menschheit 에 결합되어, 각자에게 매순간 이 마지막 해방과 무책임성에 이르는 문이 열려 있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되면 웃음은 지혜와 결합되게 될 것이고, 이제는 단지 "즐거운 앎"만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기까지 당분간은 사정이 완전히 다를 것이고, 그러기까지 당분간은 실존의 희극 그 자체는 아직 "의식되지" 않을 것이고, 그러기까지 당분간은 비극의 시대, 도덕의 시대, 종교의 시대가 계속될 것이다. 저 도덕과 종교의 창설자들, 저 도덕적 가치 평가를 둘러싼 투쟁의 창시자들, 저 양심의 가책과 종교 전쟁을 가르치는 자들이 항상 새롭게 출현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무대 위의 이 영웅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이 동일한 무대의 영웅들이 있었으며, 나머지 모든 것들,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너무나 순간적일 뿐인 것들은, 기계 장치나 무대 배경으로서 아니면 심복과 시종의 역할을 하면서 언제나 이 영웅들을 준비하기 위한 역할을 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시인은 언제나 어쨌건 간에 어떤 도덕의 시녀였다.) - 이들 비극 배우들 역시도, 그들이 신의 이익을 위해 아니면 신의 사자로서 일을 한다고 믿었을는지는 모르지만, 에게 이익이 되도록 일을 했다는 것은 자명하다.

 

또한 그들은 삶에 대한 믿음을 촉진시킨다는 점에서 종의 삶을 촉진시키고 있다. "사는 것은 가치가 있다 - 그들 각각은 이렇게 외친다 - 이 삶에는 뭔가 의미심장한 것이 있다, 삶은 그 뒤에, 그 아래에 뭔가 의미심장한 것을 갖고 있다, 주의 깊게 처신하라!" 최고의 인간과 최하의 인간에게서 한결같이 군림하는 저 충동, 즉 종의 보전이라는 충동은, 이따금 정신의 이성이나 정신의 열정으로서 분출한다. 그 때에 그것은 자기 주변에 빛나는 이유들을 수행하게 되어 , 온 힘을 다해서 그것이 밑바닥에서는 충동이고 본능이고 어리석음이며 무근거라는 것을 잊게 만들고자 한다. 삶은 사랑 받아 야만 한다 , 뭐라해도 !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기 이웃을 촉진시켜 야만 한다 , 뭐라해도 ! 또한 이 모든 <해야만 한다>와 이 모든 <뭐라해도>는 무어라 불리며, 미래에는 또 무어라 불릴 수 있겠는가! 그것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항상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무런 목적 없이 일어나던 것이 지금부터는 어떤 목적을 향해 행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인간에게 이성으로서 그리고 마지막 목적으로 이해된다는 것, - 그것을 위해서 윤리 교사가 실존의 목적을 가르치는 자로서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그는 두 번째의 다른 실존을 발명하고, 그의 새로운 기법을 써서 이 오래된 최하의 실존을 그의 오래된 최하의 낚시바늘로부터 빼낸다. 그렇다! 그는 우리가 실존을 비웃는 것을 전혀 바라지 않으며, 또한 우리 자신을 비웃는 것을, 또한 그를 비웃는 것을 전혀 바라지 않는다. 그에게 개인은 항상 개인이며, 최초이고 최후인 엄청난 그 무엇이다. 그에게는 어떤 종도 어떤 총합도 어떤 영(零)도 없다. 그의 발명과 가치 평가 역시도 얼마나 어리석고 공상적인 것일 수 있는가. 그는 얼마나 자연의 행보를 오해하고 있으며 그의 조건을 부인하고 있는가. - 또한 지금까지 모든 윤리들은 그것이 인류를 장악했을 경우에 그 하나 하나의 윤리로 인해 인류가 땅으로 내려가게 될 정도로, 얼마나 어리석고 반자연적이었는가. - 하지만! "영웅"이 무대 위로 걸어 올라올 때마다 새로운 무언가가 성취된다. 웃음의 전율스런 대립물이, "그렇다, 사는 것은 가치가 있다! 그렇다, 나는 살 가치가 있다!"라는 생각으로 많은 개별자에게 저 깊은 떨림이 성취되는 것이다. - 삶과 나와 너와 우리 모두가 서로 다시 얼마간 흥미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


시간이 지나면서 그 때까지 이들 위대한 목적의 교사들 각각을 웃음과 이성과 자연이 지배하게 되리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마침내 짧은 비극은 언제나 실존의 영원한 희극을 넘어가고 또 그리로 되돌아가며, 그리고 "무수한 홍소의 물결" - 아이스킬로스와 더불어 말한다면 - 은 끝내는 이 가장 위대한 비극 시인들 위로도 내리쳐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수정을 필요로 하는 이 모든 웃음에도 불구하고, 저 실존의 목적을 가르치는 자가 언제나 새로이 출현하는 것을 통해서 인간 본성은 변하게 될 것이다. 인간 본성은 지금 하나의 욕구를 더 갖게 되었는데, 그 욕구는 저 "목적"의 교사와 "목적"의 가르침이 항상 새롭게 출현해야 한다는 욕구이다. 인간은 점차로, 다른 모든 동물들과는 달리 하나의 실존-조건을 더 성취해야만 하는, 환상적인 동물이 되어갔다. [그 실존 조건이란,] 인간은 그가 존재하는지 알기 위해서, 그의 종은 삶에 대한 정기적인 신뢰 없이는 번성할 수 없다는 것을 믿어 야만 한다 [는 것]! 그리고 삶 속에 이성이 있다 는 믿음 없이는 [번성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언제나 반복해서 인간 종은 때때로 이렇게 선포할 것이다: "절대로 더 이상은 조롱되어서는 안 되는 그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인간의 신중한 친구는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웃음과 즐거운 지혜뿐 아니라 그 모든 숭고한 비이성을 갖고 있는 비극적인 것 역시도 종의 보존의 수단과 필연성에 속한다!" - 그러면! 그러면! 그러면! 오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이해하는가? 이 밀물과 썰물의 법칙을 이해하는가? 우리에게도 역시 우리의 때가 있다!

 

 

니체  Nietzche, Friedrich (1844.10.15 - 1900.8.25)--------------------------------------------------

 

  니체는 프로테스탄트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나움부르크에서 학교를 다녔으며 1858년부터 1864년까지는 슐포르타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니체는 어려서부터 시를 썼으며, 적곡도 하였다. 1864년부터 그는 본과 라이프치히에서 신학과 고전 철학을 연구하였다. 이 무렵 그는 쇼펜하우어의 작품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또한 그가 1868년부터 알게 된 바그너의 사상과 음악으로부터도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1869년부터 1878년까지 그는 바젤에서 고전 철학을 강의하였으며 이곳에서 부르크라르트, 바호펜, 그리고 오퍼베크 등과 교분을 쌓았다. 1870년에서 1871년까지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기간 동안 그는 간호병으로 지원 종군하였다. 1872년부터 그는 자신의 저술을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으나 처음 얼마 동안은 일반의 주목을 별로 끌지 못하였다. 그가 병을 얻어 교수직을 그만두게 된 이후로는 주로 이탈리아의 리비에라와 오버엥가딘에서 체류하였다. 1889년 정신병이 발병한 후 처음에는 나움부르크의 그의 어머니 곁에 머물다가 나중에는 바이마르에 있는 그의 누이 엘리자베트 푀르스터 니체의 병간호를 받았다.

 

  니체의 철학적 작업은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나누어고찰해 볼 수 있다. 첫 시기인 1878년경까지 그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과 바그너 음악의 영향하에 있었다. 그는 이들이야말로 과거 그리스의 전통을 계승, 보다 높은 새로운 문화를 발전시킨 모범적인 실례라고 설명한다(그는 1872년에 완성한 최초의 위대한 작품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에서 예술과 문화의 기초를 이루는 아폴론적인 원리와 디오니소스적인 원리를 구분하고 있다). 두 번째 시기는 1878엔서1882년까지로서 이 기간 동안 그는(무엇보다도 기독교와의 화해를 의미한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치팔’을 기화로 바그너와 결별하고, 이전에 주장하던 천재에 대한 숭배 그리고 새로운 이상(理想), 즉 도덕과 종교의 ‘선입견’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정신’(freier Geist), '활기에 찬 학문’(frὅhliche Wissenschaft) 등으로부터 벗어나고 또한 쇼펜하우어와도 멀어지면서 실증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의 요소를 받아들이고 있다. 동시에 다윈의 학설과 대결하는 가운데 니체의 사유 속에 생물학주의와 사회다윈주의(Sozialdarwinismus)의 요소가 생겨나게 되었다.

 

  니체의 창작 활동의 마지막 시기는 사람들이 보통 자라투스트라시기라고 부르는 1882년에서 1888년에 이르는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은 비합리주의가 니체의 사유를 지배하였으며, 신화9<자라투스트라>의 형태로 표현됨)로의 선회가 그 특징으로서 부각된다. 그의 철학의 한 가운데에 ‘권력에의 의지’(Willen zur Macht), '영원희귀‘(ewige Wiedrkehr des Gleichen), '초인’(übermensch)의 신화가 자리잡게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의 전야(前夜)에 살면서 니체는 부르주아지의 상승기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을 이반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부르주아 철학의 요구를 전형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하여 반동, 폭력, 공격, 야만과 같은 새로운 시대의 경향이 니체의 철학에서 뚜렷이 표현된다. 철학 저작을 통해서 볼 때 니체는, 타락, 몰락, ‘퇴폐’가 만연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그 자신이 살던 시대와 그 문화에 의식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부르주아 사회의 불안정성에 대한 통찰과 임박한 파국에의 예감으로 압박감을 느낀 나머지. 그리고 인민 대중의 해방 투쟁과 특히 그가 큰 충격을 받은 파리 코뮌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고양된 혁명적 노동운동에 직면하여 니체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정치, 문화, 교양 그리고 당대의 철학과 학문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하였으며 기독교를 그 자신이 살던 시대가 가지고 있던 파괴적 경향의 역사적 뿌리라고 단죄하여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부르주아지의 정신문화가 몰락하고 천박해짐 위선의 길을 걷게 된 요인을 부분적으로는 정확하게 확인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최고의 도덕적, 종교적 가치를 ‘무효화’하고(“신은 죽었다!”) ‘허무주의의 도래’를 선언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본주의를 포함하여 모든 계급 사회의 결정적인 토대인 ‘사적 소유’, ‘소유 본능’, ‘항상 보다 많이 소유하려는 욕구’, ‘무자비한 경쟁 투쟁’, ‘적나라한 계급적 억압’, ‘노예제’를 모든 고차적인 문화의 기초로서 주저 없이 인정하고 또 이를 정당화 한다. 니체는 인류의 전역사와 그 문화를 서로 화해 할 수 없는  두 대립적인 인간형, 즉 소수의 뛰어난 ‘군주적 인간’, ‘특권 계층’ 혹은 ‘명문 혈족’(가령 카이사르, 보르자, 나폴레옹)과 이와 대조되는 ‘우둔한 군중’, ‘다중(多衆)’, ‘하찮은 혈통’간의 끊일 줄 모르는 투쟁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는 군주적 인간은 힘 있고, 건강하고, 우수하며, 사려 분별이 있고, 순수한 속성을 갖는 반면 인민 대중은 병들고, 나약하고, 순수하지 않으며, 속되고, 복수심에 불타는 부류들이라고 비방한다. 니체는 이를 토대로 역사상 모든 해방 운동과 이데올로기, 즉 부르주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특히 프랑스 혁명의 평등과 진보의 이념,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를 몰락의 표현이라고 비난한다. 뿐만 아니라 니체에 따르면 연민의 도덕을 갖는 기독교와 유대 종교 그리고 소크라테스 이래의 철학사 거의 전부가 ‘우둔한 구중의 증오심’으로부터 유래하였으며, 이들 또한 몰락의 표현이라 한다. 니체는 이러한 전(全)정신사적 전통과 근본적인 결별을 고한다. 그는 ‘모든 가치를 무효화’함으로써 부르주아 상승기의 정신적 성과라고 할 수 있는, 부르주아지의 낙관주의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역사상 및 인간상 그리고 합리적인 세계 설명방식, 진보주의와 인식 낙관론, 이성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휴머니즘의 인간상에 대립되는 ‘초인’상(像)을 통하여 그는 높은 정신적 교양과 감수성 및 행동에서의 분별력과 다른 한편에 있어서 적과 투쟁하는 데 발휘하는 잔인성과 가차없는 냉혹성(‘금모수’[金毛獸;die blonde Bestie])과 같은 서로 대립적인 속성들을 결합시킨다.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금모수’,  ‘군주적 인간’을 위한 새로운 세계관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니체는 이러한 인간들이야말로 새로운 ‘초인’이며 장래의 ‘지상의 지배자’라고 본다.

 

  니체의 철학에서 자연의 사건과 사회의 사건을 설명하는 중심 범주는 ‘생’(生;Leben)이란 개념이다. 이때 생이란 비합리적이고, 충동과 본능 및 의지의 지배를 받으며, ‘디오니소스적이고’, 부단한 생성과 성장 및 소멸의 과정 속에 놓여 있으며, 모순적이고, 격렬하고, 인식할 수 없으며, 음울하고, 충동적이며, 멈출 줄 모르고, 그 자신을 열망하는 힘(Macht)으로 이해된다. 니체는 착취, 궁핍, 전쟁, 폭력, 기만, 죄악, 범죄와 같은 계급 사회의 사회적 특성을 모든 생의 불가결한 속성으로까지 격상시켜 이를 소위현실 자체의 본질에 기초한 불변성을 갖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후에 니체는 ‘생’이란 개념과 똑같은 의미로 ‘권력에의 의지’란 개념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니체에 따르면 세계를 설명하는 형이상학적인 보편원리이고, 인류 역사를 움직여 온 힘이며 또한 모든 문화, 과학, 철학, 종교, 도덕과 예술의 원천이다. ‘생’과 ‘권력에의 의지’란 개념은 전통 철학의 범부에 대비시켜 니체가 의식적으로 골라 쓴 말들이다. 1881년대에 이르러 니체는 존재, 물질, 실테, 물자체, 본질, 합법칙성, 인과성, 주관과 객관, 의식, 인식, 진리, 이성 등과 같은 철학적 범주들은 인간이 혼돈스러운 지각을 정돈하여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 만들어 낸 단순한 허구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는 주관적 관념론의 입장에서 물질세계의 현존을 부정하고, ‘참된 세계’는 우리의 표상 속에 존재하는 ‘현상’(Phἅnomene)의 세계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동시에 세계의 본질을 ‘권력에의 의지’라고 하여 객관적 관념론적으로 해석한다. 니체에 따르면 세계는 어떤 일정한 불변적 양의 힘이며, 질서, 법칙, 인과 관계도 없이 부단한 운동의 과정 속에 놓여 있는 혼돈이고, 시작과 끝도 없이 펼쳐지는 제 세력들 간의 경연(競演)인다. 니체는 현실에서의 상대적 정지 및 불변성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는 헤라클레이토스를 왜곡 인용하면서, 변화를 그 어떤 의미나 방향, 목표도 없이 그 차체의 순환 과정을 반복하는 부단한 ‘생성’(Werden)으로 설명한다. 그는 발전과 진보의 이념에 반대하여 ‘영원 회귀’의 사상을 주장한다.

 

  인식에 관한 니체의 견해에는 ‘생’, 충동과 본능, 의지와 무의식에 대립하는 지성을 비합리주의적으로 철저히 평가 절하하는 입장이 두드러진다. 모든 사유와 판단, 인식, 과학, 논리학은 생의 수단, 즉 권력을 향한 의지의 도구일 따름이다. 측 그것들은  ‘혼란스런 감각’을 단순화하고, 논리화하고, 체계화하고 도식화하는 데 기여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생성중인 것과 흐르는 것을 고정하려는 시도이며 사물들을 지배할 목적으로 이를 주관적으로  ‘정돈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인식에서의 모든 객관적 진리 내용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진리’는 충동과 욕구에 바탕을 둔 전망적인 평가로부터 유래한다. 진리는 환상, 오류, 유용한 거짓말과 속임수 등으로서 그 가치는 ‘생물학적 유용성’에, 그 기준은 ‘권리감의 상승’에 있다. 이러한 견해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군주적 인간’과 ‘우둔한 군중’은 특히 세계관 및 윤리와 관련하여 상이한 진리를 갖는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니체는 기존이 ‘선’과 ;악‘의 구분, 전통적인 도덕적 규범과 가치를 부정한다. 이타심, 인간애, 인간성, 동정, 공평무사, 선, 정의, 절제, 근면, 안정과 평화의 추구, 의무감 등으 s'군중의 본능’, 반(反)자연적인 ‘군중의 덕’, ‘생’에 대한 ‘비방’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강자(强者)’, ‘고귀한 자’, ‘군주적 인간’에 대립된다. 여기서부터 니체의 ‘비합리주의’, ‘선과 악의 피안’, ‘아무것도 참되지 않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가르침이 나타난다.

  

  그는 예언가나 입법자와 같이 거만한 태도로서 그리고 항상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 보여 주는 정열적이고 과장된 파토스를 갖고서, 논리적 증명을 경멸하여 대개는 경구적이고 운문적인 형식의 거침없고 노련한 언어 구사를 통해 오로지 자신의 진술로서만 (그러나 종종 자체 내에 모순을 빚어내는 가운데) 자신의 학설을 개진한다.

 

  니체의 영향은 세기의 전환기에 바이마르의 니체문고를 둘러싸고 형성된 추종자 집단에 의해 크게 증진되어 다양하게 전개되었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특징적인 점은 부르주아 사회의 위기 현상이 절정에 이를 때마다 그는 항상 새롭게 발견되곤 했다는 것이다. 니체는 특히 제국주의의 보수적이고 선(先) 파소적이며, 뚜렷한 비합리주의 노선의 독일 부르주아 철학의 시조이다. 이런 철학으로는 사회 다윈주의, 짐멜, 슈펭글러, 셸러, 클라게스, 위거, 치글러의 생철학, 그리고 겔렌 등의 철학적 인간학 등이 있다. 그의 반(反)민주적이고 반진보적인 사상은 극우적인 정치적 제 경향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산파 역할을 하였다. 그와 함께 니체는 파시즘의 정신적 선구자 중 하나가 되었다. 파시즘의 ‘지도자들’은 니체를 숭배하였으며, 그 이데올로기들은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데 니체의 사상을 이용하였다. 더 나아가 극히 다양한 경향의 현대 부르주아 철학, 문학, 예술의 수많은 대표자들과 사회과학자, 신학자들은 니체의 사상과 대결하여 매우 다양한 결론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실존주의의 대표적 철학자들(하이데거, 야스퍼스, 카뮈 등), 염세주의적 문화 철학의 시조들(리히터, 판비츠, 호르네퍼, 프로이트, 아들러, 융과 같은 심리학자들, 게오르게의 주위에 모인 작가들과 자연주의, 표현주의 작가들에 대해서 적용된다. 또 하인리히 만과 토마스 만, 쇼 등도 한때 그의 영향 하에 있었다. 현재 니체를 받아들이고 있는 진영을 살펴보면 극우파와 보수주의의 추종자들(몰러, 로어모저)에서부터 시작하여 좌파 자유주의(프랑크푸르트 학파)를 거쳐 현대 수정주의(실천철학)의 이데올로그등에 이르기까지 광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