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자크 라캉: 무의식의 이중구조와 주체화

나뭇잎숨결 2020. 4. 8. 10:01

자크 라캉: 무의식의 이중구조와 주체화


                                                             - 이   진   경




1.머릿말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으로 시작했던 라캉의 ‘새로운’ 정신분석학의 결론은 프로이트에게 언어학을 선물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언어학적으로 재구성된 무의식 개념을 프로이트에게 ‘돌려주는’ 것이 바로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의 실제 내용이었다. 그 결과 프로이트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며 “언어야말로 무의식의 조건”임을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을 것 같다.


프로이트에게 언어적이고 상징적인 것에 대한 이론적 요소가 있음은 분명하다. 꿈이나 착오, 신경증에 대한 그의 분석은 대부분 언어적인 응축과 치환의 분석이며, 정신분석은 그것을 통해 증상을 야기하는 어떤 미지수(χ)에 접근하려 한다. 이런 점에서 상징적인 것을 개념화할 수 있는 이론적 요소를, 프로이트 이후의 작업에서 발견하여 그같은 분석을 발전시키는 것은 라캉 말대로 프로이트의 정신에 잇닿아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대상을 새로이 파악할 수 있는 어떤 개념적 요소를 추가한다는 것은 개념들의 구성과 지위, 효과에 변화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대상의 정의 자체를 변형시키며, 그것을 통해 대상의 인식에서 커다란 변환을 야기한다. 이 점에서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라캉의 중심테제는 분명 정신분석에 대해 특정한 변화와 효과를 야기했으리라고 짐작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변화는 무엇인가? 같은 말이지만, 언어학을 정신분석에 도입하고 무의식 개념 자체를 상징적인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발생하는 효과는 무엇인가? 언어학이란 새 엔진을 돌려서 정신분석이 새로이 개척한 땅은 어떠한 토양을 갖고 있는가?


라캉의 이론에서 가장 빈번히 사용되며 가장 중심적인 지위를 갖는 개념들로 ‘무의식’, ‘타자’, ‘주체’ 등을 들 수 있다. ‘언어’/‘언어적 구조’나 ‘상징적인 것’ 등은 이 개념들의 구조를 정의하고 분석하는 또 하나의 축이다. 요컨대 라캉의 이론은 정신분석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무의식’과 그것을 구조화하고 있는 ‘언어’라는 두개의 축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두 축이 만나는 지점을 미리 얘기하자면 대문자로 시작하는 ‘타자’l'Autre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 그리고 타자로 요약되는 언어학적 무의식 개념을 통해 결국은 ‘인간’이란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개개의 생물학적 개체가 어떻게 인간세계에서 용납되는 ‘주체’로 되는지를 연구한다.


따라서 ‘타자’와 ‘주체’는 라캉의 새로운 사고가 집중되는 촛점이며, 라캉의 새로운 이론이 갖는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제 이하에서 우리는 ‘타자’와 ‘주체’에 대한 라캉의 이론을 통해 라캉의 이론이 야기한 변화와 그 의미를 추적할 것이다. 이를 위해 라캉이 ?에크리?Ecrit의 「주체의 전복과 욕망의 변증법」에서2) 제시한 일련의 도식이 매우 유용하다고 보아, 그것을 ‘나름대로’ 해석함으로써 라캉의 이론을 요약할 것이다.


2.정신분석의 대상


정신분석의 대상은 알다시피 ‘무의식’이다. 그런데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무의식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즉 대상으로서 무의식이 정의될 수 있는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정의되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은 정신분석이 출발하기 위한 전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신분석적 연구가 없다면 무의식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정의하는 것이 대체 어떻게 가능할까? 여기에는 역설이 포함되어 있다. 연구는 대상을 전제하지만, 대상은 연구를 전제한다는 역설이3). 연구와 대상이 갖는 이러한 역설과 순환성이야말로 새로운 대상을 발견하고 새로운 연구가 시작되는데 근본적인 장애인 셈이다.


사실 프로이트의 경우도 처음부터 무의식을 대상으로 연구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최면이나 신경학, 히스테리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기존의 심리학적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징후들을 찾아냈고4), 그 징후를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장치를 사고하려 했다. 무의식은 이러한 우회로를 통해서 ‘발견’된 것이고 정의된 것이다. 따라서 무의식에 대한 정의는 물론 그것을 파악하는 위상학적topological 틀 자체가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한다. 흔히 말하듯이, 의식/무의식에서5) 거시기/자아/초자아로6)로 프로이트의 위상학이 변화되어 온 것7)도 이런 곤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발견을 통해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의 대상을 어떻게 정의하려고 했는가? 그는 인간의 정신이 단지 의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한다. 의식되지 않는 어떤 영역, 그렇지만 의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의식과 별세계를 이룬다고는 할 수 없는 그런 영역을 그는 무의식이라고 부른다. 한편 무의식에는, 의식되지 않으면서 의식과 사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주로 성적인 욕구와 에너지에 기인하는 어떤 힘이 있으며, 동시에 그러나 그 힘이 의식 표면에 떠오르는 것을 저지하고 억압하는 힘이 있다. ‘거시기’(에스Es/id)라고 불리는 전자는 ‘쾌락원칙’에 따라 움직이고, ‘초자아’supre-ego라고 불리는 후자는 인간의 내면에서 사회적 질서를 대변하여 거시기의 욕구가 드러나는 것을 억압한다. 무의식 내부에 있는 이러한 갈등과 대립으로 인해 무의식은 다양한 양상으로 작용하게 된다. ‘자아’ego는 무의식 내의 이러한 갈등과 대립을 ‘현실원칙’에 따라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 라캉은 무의식을 어떤 심리적인 것이나 의식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8) “‘거기’에 존재하는 의미화signfying 메카니즘”(ES:165)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의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며, 의식 및 사고, 행동이 그 위에서 조직되는 기초다. 다시 말하면 의식이나 사고, 행동이 그 위에서 가능하게 되는 조건이다. 그러나 라캉은 ‘에스’를 이드id로 번역하는데 반대한다. 에스Es는 주체subject의 약자를 뜻하는 S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드’라고 불리는 생물학적이고 성적인 충동을 무의식의 영역에서 추방하는 것을 뜻한다. ‘거시기’의 짝인 ‘초자아’의 의미도 거시기의 상실함에 따라 변화한다. 이전과 달리 그것은 더이상 ‘거시기’라는 어떤 충동적인 본능을 억제하는 것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여기서 자아의 운명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자아는 대립과 갈등을 조정하고 조절하는 매개가 아니라, 개인들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오인하는 이미지다.

이런 점에서 라캉은 거시기/초자아/자아라는 후기 프로이트의 위상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의식/무의식이란 위상학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당장에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즉 무의식을 구성하는 요소, 그리고 그것들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설명되던 무의식의 작용방식이 거시기에 대한 거부를 통해 제거되는 셈인데, 그렇다면 무의식은 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 또 어떻게 작동하는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라캉의 대답은 우선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며, 상징적인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주장은 프로이트에게 돌아가는 라캉만의 고유한 길인 셈이며, 이런 점에서 라캉에게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테제라고 하겠다.

다음으로 무의식의 형성과 작동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중심으로 욕망에 대해 새로이 정의함으로써 설명된다. 레비스트로스에게 ‘근친상간 금지’가 인간적인 질서를 이루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이었으며, 따라서 모든 인간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규칙이었다.9) 이는 라캉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언어의 사용과 함께 오이디푸스 기(期)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통과해야만 하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오이디푸스적인 금지와 억압을 통해 욕망은 결핍으로서 새로이 정의되고, 이것이 무의식의 형성과 작동에서 결정적인 또 하나의 지점을 이루게 된다.

요컨대 라캉에게 무의식이란 어떠한 개인이 ‘인간의 자식’으로서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통과점에서 형성되며, 그로 하여금 인간의 질서 아래 하나의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조건인 셈이다. 그는 생물학적 존재로서 태어난 하나의 유기체가 하나의 인간으로, 다시 말해 ‘인간주체’로 되어가는 과정을 주목하는 것이다. 결국 라캉에 따르면 정신분석이 무의식을 대상으로 한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의 생물체가 인간이란 이름에 걸맞는 주체로 변화됨으로써 만들어지는 결과물인 것이다. 이에 대해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정신분석의 대상이란 무엇인가?...인간의 분만으로부터 생겨난 조그만 생물체가 인간으로 변화한 결과들 중의 하나, 무의식이란 간단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신분석의 대상이다.10)

하지만 그것은 어떤 개인이나 ‘주체’가 언어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는 ‘인간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인가에 대한 연구라기보다는 차라리 이 조건들이 어떻게 개인들의 내면에 자리잡게 되는지, 그리하여 그들이 어떻게 그 ‘조건’들 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하게 되는지에 대한 연구라고 하는 게 좀더 정확할 것이다. 즉 라캉은 주체와 무의식, 주체와 무의식적 질서의 관계를 설정한다기보다는 무의식과 타자, 상징적 질서 안에서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라캉의 이론을 ‘주체’에 대한 이론, 하나의 개체가 ‘주체화’하는 과정에 대한 이론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11).

잠정적으로 비교한다면 라캉에게 무의식이란 인간적 주체를 만들어내는 상징적 질서의 메카니즘이며, 주체로서 사고하고 표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반이요 조건(이런 의미에서 ‘의식’이 아니라 의식의 전제조건이고 ‘무의식’이다)이다. 한편 이와 달리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이란 단지 질서의 메카니즘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무질서한 충동과 그것을 통제하려는 질서의 갈등과 대립이 이루어지는 장이며, 이런 이유에서 의식의 표면 아래로 억압되어 진행되는 과정이다(이런 의미에서 ‘무의식’이 ‘의식’이 아닌 것으로 정의되는 이유도 다르다). 또한 라캉에게 무의식은 생물학적인 요소를 배제한 채 상징적인 것으로서 정의되지만, 프로이트가 보기에는 차라리 생물학적이고 성적인 에너지가 좀더 근원적이고 일차적인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결국 라캉은 언어학이란 우체국을 경유하여 정신분석을 프로이트에게 되돌려 준 셈이다. 그런데 그걸 받아본 프로이트가 그것이 본래 자기가 보낸 우편물이었다고 생각할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그게 라캉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겠지만. 그리고 우리에게도 결코 중심적인 문제는 아니지만.--왜냐하면 ‘되돌려준다’는 것은 언제나 그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3.언어와 무의식


(1)기표의 물질성


라캉의 이론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알다시피 무의식이 언어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정신분석의 경험이 무의식 속에서 발견해낸 것은 언어의 구조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진실의 모든 효과는 정신과 아무 상관없이 문자에 의해서 생겨난다. 이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정신의 허세가 사라지게 되었다.” 에컨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이르면 모든 쪽에서 문자에 관한 언급이 나오며, 담론이나 텍스트 구조 속에서 또는 관용어법 속에서 문자가 차지하는 위치가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소쉬르가 분명히 한 것처럼, 언어의 구조는 그것을 사용하는 어떤 개인과도 무관하게 사회적 규약으로서, 객관적 구조로서 존재한다.12) 다시 말해 언어적인 기호가 특정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기호들 간의 관계에 의해서, 기호들을 조직해내는 고유한 규칙에 의해서며, 이러한 규칙을 우리는 흔히 언어구조라고 부른다. 여기서 언어가 발화주체에게 봉사하는 다양한 심리적, 육체적 기능과 혼동되어선 안된다. 왜냐하면 “언어와 그 구조는 각각의 주체가 그 정신적 발전에서 언어를 습득하는 순간보다 앞서 존재하기 때문이다.”(ES:148)

언어를 사용하려는 어떠한 개인도 그 기호들이 조직되는 그 규칙 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 규칙이 정하는 바에 따라 사용해야 한다. 기호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을 사용하려는 사람의 의도가 아니라 언어적인 규칙들에 의해 정의된다. 따라서 발화하는 주체는 언어의 노예로 나타나고, 나아가 “주체는 그 자신의 고유한 이름(기표)을 통해서만 자신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ES:148) 기표를 조직해내는 언어구조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 달리 말한다면 인간이 언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 한 언어적인 구조에, 즉 기표를 조직해내는 규칙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 기표들은 주체를 복속시키는 물질적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표들의 구조가 주체에 대해서 갖는 이러한 물질적 힘을 그는 ‘기표의 물질성’이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라캉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나를 통해 행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유의할 것은 여기서 ‘물질성’이란 말이 실증주의적인 실체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인 어떤 관념들과 달리 다양한 개인들에 대해 기표의 구조가 갖는 강제성과 구속성을 뜻한다는 점이다.13)

라캉 말대로 무의식이 언어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한다면, 이제 무의식에 대한 연구 역시 무의식의 기호들이 조직되는 규칙에 대한 언어학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라캉이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학이론을 정신분석에 끌어들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담론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언어적 규칙과 무의식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언어적 규칙의 차이는 ‘재현가능성’Darstellbarkeit에 대한 고려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한다(ES:160-1).

따라서 기호가 부재하는 어떤 대상을 대신하여 표상하는 것처럼 무의식에서 증상이나 꿈은 직접적으로는 현전하지 않는 어떤 것의 현전이며, 언어와 담론에서 은유와 환유가 표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기호들이 조직되는 방식인 것처럼, 무의식에서 은유와 환유 역시 증상이나 꿈이 조직되는 기본적인 방식이다. 또한 기호의 의미는 기표들 간 차이에 의해서 구별되고, 그 기표들의 결합을 통해 정해지듯이, 증상이나 꿈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정해진다.

결국 라캉은 “언어야말로 무의식의 조건”이라고 한다.14) “언어가 없다면 무의식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를 통해서 무의식이 만들어지고 작동하게 됨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이는 라캉의 무의식 개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통로며, 타자와 주체의 개념에 이르는 중심적인 테제기도 하다.


(2)기표의 고정점


라캉은 기표(S)와 기의(s)가 서로 다른 차원의 세계를 이룬다고 본다. S/s에서 바bar는 이 양자를 가르는 구분선이며 기표가 기의에 이르는 것에 저항하는 저항선이라고 한다.15) 이 말은 그의 기호학을 이해하는데 보기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여기서 기의란 기호(기표)를 사용하려는 사람이 본래 말하고 싶었던 ‘의도’요 ‘본래 생각’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기표는 기표을 조직하는 고유한 규칙과 구조가 있으며, 그 규칙과 법칙을 벗어나 ‘의도’를 전달할 수는 없다. ‘본래 의도’라는 것을 그대로 담아 전달해주는 기표는 없으며, 기표를 사용하는 순간 본래의 의도는 기호가 갖는 고유한 가치로 인해 억압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의란 일종의 ‘신화적 실체’다. 지젝S. Zizek 표현을 빌면, 전-상징적인 의도pre-symbolic intention요 실체entity다.16) 그러나 이 신화적 실체(전-상징적 의도)는 그 자체만으론 단지 말하려는 사람 안에 머물러 있을 뿐이며, 누구든 그것을 전달하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기표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특정한 기표를 사용하는 순간 그 의도(기의, 신화적 실체)는 기표의 가치와 다른 것임이 드러난다. 즉 전-상징적인 의도와 그것을 상징화하려는 기표 간에, 다시 말해 신화적 실체로서의 ‘나’와 기호를 통해 드러난 나 간에 ‘분열’Spaltung이 발생한다.17) 이 분열은 곧 그 기표를 사용함으로써 본래 의도가 ‘소외’되고 ‘억압’되는 것을 뜻한다. 기표를 사용한다는 데서 야기되는 이 불가피한 억압을 라캉은 ‘1차억압’이라고 한다.

기표가 기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두고 라캉은 “기표가 기의 위에서 미끄러진다”고 말한다. 어떠한 기표들의 연쇄를 선택한다 함은 그것을 통해 끝없는 미끄러짐glissement을 잠정적으로 중단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기표의 미끄러짐을 잠정적을 중단시키면서 기표를 잠정적으로 고정시키는 지점을 라캉은 ‘고정점’point de capiton이라고 한다18).  이러한 과정을 라캉은 다음과 같은 그래프로 요약한다.

 S                   S'

        S/    △

        (그림 1)19)


(그림1)에서 △는 기호를 통해 상징화되기 이전의 의도, 즉 신화적 상태를 표시한다. S->S'의 벡터는 기표들의 집합이다. 주체는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서 이 기표들의 집합 속에서 고기를 잡듯이 기표를 낚는다. 이런 뜻에서 라캉은 의미화 연쇄의 벡터(△->S/)를 마치 낚싯바늘처럼 구부려 놓았다. 두 벡터 S->S'와 △->S/가 만나는 교점이 바로 기표들의 미끄러짐이 (잠정적으로) 중단되고 기표가 고정되는 ‘고정점’이다. “이 고정점의 통시적diachronic 기능은 문장에서 발견되는데, 비록 문장의 의미작용은 마지막 항에 의해서만 완성된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항은 다른 항들의 구성을 예정anticipate한다. 반대로 의미는 소급적인retroactive 효과를 통해 봉인된다.”(ES:303)20)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벌 蜂에 일어날 起 

봉기라, 참 좋은 말이다.(김남주, 「한자풀이」)


여기서 이 문장의 의미는 ‘좋은 말이다’라는 말에 의해, 그리하여 단적으로 말하자면 문장에 마침표를 찍음으로서 봉인된다. 그 이전이라면 ‘벌 봉에 일어날 기’라는 말의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일례로 “참 좋은 말이다” 대신 “당치도 않은 소리다”라는 말을 결합시켜 보자. ‘봉기’라는 동일한 기표는 앞서의 것과 전혀 다른 의미로 고정된다. 문장의 의미나, 그것을 통해 말하려는 것도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이처럼 문장의 의미는 고정점의 통시적 기능에 의해 소급적인 방향으로 고정된다. 그러나 기표들이 순차적으로 결합되면서 순차적으로 출현할 때, 각각의 기표는 다른 항들의 ‘구성’을 어느 정도 예정anticipation한다. 그것은 통사론적 규칙에 의해 제한되며, 의미론적 공간 안에서 결합된다. 그러나 그 공간 안에서 문장이 특정한 의미론적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은 고정점의 소급적 효과를 통해서다. 그러나 ‘좋은 말이다’란 기표만으론 발화자의 ‘의도’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다른 기표를 추가하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다. 기표가 주체의 의도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며, 반쪼가리로만 표현할 뿐이라는 의미에서 라캉은 S에 빗금을 친 것이다(S/).

요컨대 S->S'의 방향이 통사론적 법칙에 따라 기표들이 다른 기표를 이어나가는 (문장/텍스트) ‘구성’construction의 방향을 표시한다면, 그와 반대로 향해있는 △->S/의 방향은 의미작용의 이러한 소급적 효과를 표시한다. 즉 오른쪽의 교점을 통해 문장의 의미는 봉인된다(따라서 왼쪽의 교점이 정해진다). 그리고 그러한 기표들의 연쇄를 통해 도달한 지점 S/는 △와 일치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분열된 주체요 분열된 주체의 기표다. △는 미지의 것(χ)으로 남는다. S/와 △만큼의 거리는 기표를 사용하는 한 피할 수 없는 ‘분열’의 거리며, ‘소외’의 폭이고,  분열된 기표(S/)에 결핍되어 있는 것을 표시한다.


(3)타자의 메시지


앞의 그림에 이어서 곧바로 다음과 같은 그래프를 그릴 수 있다.

      s(A)         A

S                          Voix

                         (목소리)

          S/'    S/

         (그림 2)


우선 (그림 2)에서 오른쪽 교점은 사실 발화하는 주체가 기표들의 구조 속으로 들어가는 지점을 뜻한다. 즉 여기서 ‘주체’가 기표를 사용하기 위해선 기표의 구조에 따라야 하며, 문장이나 언표의 의미가 봉인되는 지점은 바로 이 언어구조에 의해 정해진다. 예를 들어 앞서의 시를 “좋은 참 봉기라 말이다” 식으로 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주체가 그 규칙에 따라야만 하는 이 법칙은 분명 주체의 외부에 있으며 주체의 기표를 규제하는 타자l'Autre(A)다. 그리고 의미의 봉인이 이 타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한, 의미는 사실 ‘타자로서 의미’다. 이를 라캉은 s(A)로 표시한다. 그런데 이 의미는 타자가 방출하는 의미요, 타자에 의해 코드화된 언표며, 결국 타자가 주체에게 방사하는 ‘타자의 메시지’다.(ES:305) 다시 말하면 기표의 사용을 특정한 형태로 제한하는 ‘타자’를 통해 의미내용은 제한되고 정해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무슨 敵이든 적을 갖고 있다”고 김수영이 말할 때(「적 (1)」), 적이란 게 마치 우리가 갖고 있는,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안 갖고 있을 수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적을 갖고 말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란 메시지가 이미 통사론적 규칙 안에 내포되어 있다. “비가 온다”라는 문장 뒤에는 ‘비’라는 것이 어떤 동작(‘온다’)의 주체라고 보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 사실은 주어도, 그 주어의 동작도 아닌, 비내리는 현상이 그 자체로 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문장에는 직접 나타나지 않는 이러한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모든 동작에는 주체가 있다는 판단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동작에 대해 주체가 언제나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단도. 봉기란 말에 대해 우리는 “참 좋은 말이다” 혹은 “당치도 않은 소리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참 길다란 말이다”, “뾰족한 말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근본적으로 우리는 왜 봉기에 대해 그런 말을 추가하기만 하고 있는 것일까? “고양이는 봉기를 먹었다”라든지 “시계가 봉기를 찔렀다”라고 하는 말은 왜 할 수 없는 것일까?

적은 누군가가 갖고 있는 것이고, ‘갖고 있다’는 것은 갖고 있는 주체를 전제한다. 마치 데카르트에게 나는 생각한다는 것이 생각하는 나(주체)를 전제하듯이. 바로 이것이 ‘타자’에 의해 규정되는, 언표의 한계다. 아니 사실은 언표된 것의 이면에서 은폐된 채--마치 무의식이 그렇듯이--우리에게 전달되는 타자의 메시지다.

이처럼 발화자의 의도는 타자를 통과함으로써 비로소 목소리voix로 되어 나오게 된다. 그것은 아마 내 입을 빈 ‘타자’의 목소리일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말한다.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나를 통해 행해지는 것이다.”

위 그래프에서 s(A)->A는 그러한 의미가 타자에 회귀하며, 그럼으로써 사실은 타자에 종속됨을 보여준다. 나아가 라캉은 s(A)->A로 가고 A->s(A)로 되돌아가는 이러한 순환을 통해 기표에 주체가 종속되는 것을 보여준다.(ES:304)

앞서 김남주는 “봉기라, 참 좋은 말이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 “벌 봉에 일어설 기”라는 ‘한자풀이’를 한다. 이로써 그는 말의 의미가 타자에 의거/종속되고 있는 것임을 상기시켜 준다. 이 시는 사실 이러한 눈에 안보이던 ‘의미의 회귀’를 표면에 드러냄으로써, 효과적으로 독자를 장악한다! 그는 봉기라는 말의 뜻이 마치 언어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처럼 말함으로써, 그는 “참 좋은 말이다”라는 생각이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언어 자체의 힘에 의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 문장은 주관적인 ‘시인의 말’이 아니라, 객관적인 ‘타자의 말’인 것처럼, 그것을 화자가 대신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로써 시인이란 주체는 단지 기표의 질서에, 즉 언어라는 ‘타자’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로서 나타난다.

여기서 ‘타자’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타자는 주체 외부에 있는 언어적 구조며, 그것을 통해 구성되는 상징적 질서고, 나아가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주체가 그 속에 포섭되는 질서요 세계다. 또한 그것은 주체의 타자로서, 언어에 의해 형성되는 무의식이기도 하다.21)

한편 앞서 의미작용이 소급적 효과로서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소급적으로 만들어지는 이 의미작용의 결과물은 마치 문장이 ‘구성’되는 과정의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간주된다. 예컨대 “참 좋은 말이다”라는 (분열된) 기표가 ‘벌 봉에 일어날 기’로 문장을 시작하자마자 이미 있었던 것으로 간주되는 것처럼. 이런 점에서 의미화 벡터의 종점에 있던 S/는 출발점으로 이전된다. “적을 갖고 있다”나 “생각한다”라는 말의 전제가 되는, 출발점을 이루는 자명한 주체가 마치 애시당초 있었던 것처럼 간주되듯이.

의미화 벡터의 종점은 또 다른 분열된 주체, 분열된 주체의 기표(S/')인데, 그것은 타자(A)에서 방사된 메시지(s(A))에 의해 정해지는 것임을 이 그림은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결과가 분열된 주체요 분열된 주체의 기표임을 뜻한다.


(4)동일시와 주체


의미작용을 통해 타자의 메시지가 반복Wiederholung됨으로써22) 반복적인 의미와 반복적인 주체의 기표를 만들어낸다. 이 반복적인 주체의 의미와 기표는 개인의 반복적인 사고와 행동의 준거가 된다. 이러한 준거에 주체가 자신을 일치시키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라캉은 동일화 혹은 동일시identification라고 하며, 이를 대문자 I로 표시한다. 그런데 이는 사실 타자의 메시지에 대한 동일시를 야기하는 것이므로, 타자에 대한 동일시인 셈이다. 그는 이를 I(A)로 표시한다. 이제 의미화 벡터는 분열된 주체, 그러나 자명한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주체에서 시작해서 이같은 동일시/동일성으로 귀착된다. 그것은 이제 동일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주체화’의 과정을 보여준다23).


  

       s(A)          A

S                          Voix

        m            i(a)

           I(A)   S/

         (그림 3)24)

이전에 S/가 그랬듯이, I(A)는 소급적 효과에 의해 다시 벡터의 출발선 상으로 이전된다. 즉 주체는 처음부터 어떤 자명한 동일성indentit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미화 벡터의 출발선 상에 있는 i(a)는 그런 동일시의 대상으로서, 주체가 갖게 되는 이미지image다. 그것은 ‘나’라는 이미지를 이루지만, 사실상 타자로서 이미지요 타자가 제공하는 이미지란 점에서 i(a)라고 표시한 것이다.

라캉은 동일시를 “주체가 어떤 이미지를 가정함으로써 주체 안에 발생하는 변화”(ES:2)라고 본다. 즉 그것은 주체가 자신이 가정하는 이미지의 지배와 효과 아래 포섭되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시는 두가지 차원에서 진행된다.

첫째, 관념적인 자신(Ideal-Ich, je-idéal)의 이미지와 자신이 동일하다고 간주하는 ‘상상적 동일시’다. 이는 이전에 라캉이 거울에 비친 모습이 (주격의) 나je/I라는 상상과 착각을 통해 에고를 정의하던 분석25)에서 이어지는 것이다. 그 일인칭은 출발점에 있는 발화자로서의 ‘나’요 아직 타자를 통과하기 이전부터 있다고 가정되는 ‘나’며, 동일시 벡터/의미화 벡터의 출발선 상에 있는 ‘나’의 동일성에 관한 이미지다. 상상적 동일시란 이 동일성의 이미지에 자신을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고, 위 그림에서는 i(a)->m의 직접적 동일시다. 이를 ‘일차적 동일시’라고도 한다. 이렇게 형성된 에고는 사회적 규정성 이전이라면 허구적인 방향을 가질 수 있다. 이래서 이는 이차적 동일시를 야기하는 원천이다(ES:2).

둘째, 타자라는 상징적인 것을 통해 형성되는 ‘자아의 이상’idéal-du-moi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를 ‘상징적 동일시’라고 한다. 여기서 자아는 목적격의 ‘나’다. 즉 타자가 보는 ‘나’요, 타자가 요구하는 ‘나’의 이미지다. 따라서 그것은 타자를 거쳐서, 타자의 메시지를 통해 형성되며, 동일시 벡터/의미화 벡터의 종지선 상에서 형성되는 나의 이미지다. 상징적 동일시란 이처럼 타자를 통해, 상징적인 것을 통해 형성된 ‘나’의 이미지와 자신이 동일하다고 가정하는 것이고, 결국은 타자의 메시지를 그 이미지를 통해 받아들이고 그 이미지의 지배 하에 포섭되는 것이다. 이를 ‘이차적 동일시’라고도 한다. 이렇게 형성된 에고는 사회적 규정성 이후의 것이며, 주체 안에서 그러한 질서를 대변한다. 의미화 벡터/동일시 벡터 S/->I(A) 전체는 이런 점에서 상징적 동일시의 벡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상상적 동일시의 벡터(이는 동시에 이미지의 지배 경로인데) i(a)->m는 두개의 회로가 이중으로 접합된 것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그것은 한편에서는 작은 순환 S/->I(A)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A->s(A)다. 여기서 A->i(a)->m->s(A)는 타자가 보내는 메시지에 대한 동일시를 뜻하며, 그 메시지의 회로 속에 에고가 자리잡는 것을 뜻한다. S/->i(a)->m->I(A)는 동일시가 자명한(그러나 사실은 허구적인) 주체에서 시작한 것이며, 따라서 동일성은 내 자신의 것이라는 ‘인정’reconaissance/‘오인’méconaissance의 경로다. 이런 점에서 에고는 오인의 산물이다.

여기서 상상적 동일시는 두가지 차원에서 정의됨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선 발생적으로 그것은 개체가 타자에 포섭되기 이전에, 상징계 속에 진입하기 이전에 행해진다. 오이디푸스 기 이전의, 라캉이 ‘거울단계’라고 부르는 시기에 유아가 획득하는 동일성이 그것이다. 그것은 위 그림에서 S/->i(a)->m->I(A)와 ‘대략적으로’(왜냐하면 I(A)를 그대로 적어두었기 때문에) 상응한다. 여기서 i(a)는, 즉 자신의 이미지는 ‘거울놀이’를 통해 획득된다는 것이, 따라서 에고는 이러한 거울놀이의 결과로서 만들어진다는 것이 ‘거울단계’에 관한 그의 이론의 요체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적 동일시는 유아에게 파편화된 신체의 이미지를 극복하고 신체적 통일성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그것이 상상적으로 구성된 ‘나’의 기능이다.(ES:3-5)

라캉은 거울단계가 끝나는 순간에 ‘나’je/I를 사회적 상황과 연결짓는 변증법이 시작된다고 한다(ES:5). 하지만 이후 상상적 동일시는 사라지지 않으며, 타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 ‘변증법’ 내부에서 행해진다. 즉 상징적 동일시의 과정 내부에서 상상적 동일시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상상적 동일시가 정의되는 또 다른 한 차원이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상상적 동일시의 이중적 벡터는 상징적 동일시의 커다란 벡터 내부에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때 상상적 동일시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아가 정의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서 인정/오인하게 하여 개인을 ‘주체화’하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위 그림은 이중의 ‘동일시를 통해서’ 어떻게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떻게 개인이 ‘주체화’되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를 통해 정의되는 무의식의 이론은 결국 그것을 통해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고, 언어적 무의식을 통해 주체의 형성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4.욕망과 무의식


(1)욕망과 결핍


라캉은 ‘본능’이나 충동이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보아, 욕망과 무의식을 생물학적 힘으로 환원하는 하는데 대해 반대한다. 즉 이 충동의 영역에도 언어와 상징이 개입한다는 것이 라캉의 생각이고, 이렇게 충동의 영역에 언어가 개입함으로써 야기하는 효과가 바로 라캉의 주관심사다.

이런 점에서 라캉은 생물학주의적 요소를 제거하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출발점은 생물학적 소여the given로서 ‘욕구’bésoin/need다.26) 욕구란 특정한 대상을 지향하며 그것을 통해 만족을 얻으려 한다. 욕구는 그 자체로 추구되거나 충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그것의 충족을 위해 특정한 것을 ‘요구’demande/demand하게 된다. 요구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정식화되고 제시된다.27) 배가 고프지 않아도, 잠잘 때면 엄마젖이 우유병을, 혹은 ‘젖꼭지’를 찾는 아기의 요구가 그렇다. 아기의 성적인 욕구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특정한 형태의 요구로 제시된다.

그것은 여전히 대상의 충족을 목표하고 있지만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요구는 본질적으로 (타자의) 사랑에 대한 요구기 때문이다.28) 만약 젖이나 ‘젖꼭지’를 주지 않는다면, 아이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할 것이다. 장난감을 사달라는 요구가 거절되었을 때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요구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며, 언어를 통해 욕구의 대상을 고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표를 통해 작용하는 상징적 질서 안에서 이루어진다. 즉 상징적 질서가 요구의 한계인 셈이다. 따라서 욕구가 기표를 통해 요구로 되는 순간, 다시 말해 욕구가 요구에 흡수되는 순간 소외가 발생한다. 마치 의도가 기표에 흡수되는 순간 소외가 발생하는 것처럼. 아이의 욕구는 그가 요구한 우유병이나 ‘젖꼭지’라는 대상에 흡수되고, 그 이상이 아닌 것으로 되고 만다. ‘사실은 그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아이의 성적인 욕구는 말로 되어 나올 수 없다. 그것은 소외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도/기표와 욕구/요구의 동형성의 일단을 찾아볼 수 있다. 이를 다음과 같은 그래프로 요약할 수 있겠다.



S                    S'




       S/     △

       (그림 4)


△는 생물학적 소여로서 욕구다. 이것은 기표의 벡터를 통과하면서 요구로 제시된다. 두 벡터가 만나는 교점은 기표를 통해 욕구를 고정하는 고정점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 요구 역시 통시적으로 소급적 효과를 통해 작용하기 때문에, 오른쪽의 교점이 (앞쪽인) 왼쪽의 교점을 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도달한 지점은 사실 욕구가 요구에 흡수됨으로써 소외된 욕구의 주체고, 분열된 주체며, 분열된 주체의 기표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것은 S->S'가 사실은 ‘향유’jouissance와 관련된다는 점이다. 대상을 통해서 욕구는 합일과 충만이 주는 기쁨과 만족을 ‘향유’하려고 한다. 이러한 향유의 원형적 모델은 아마도 ‘분리’된 상태를 넘어서, 어머니와 하나된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아기의 소망에 이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향유는 그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에게는 금지되어 있다(ES:319, E:820). 즉 말로 되어나온 요구를 통해서는 향유에 도달하지 못한다. 반대로 말 혹은 요구를 통과하면서 향유는 금지된 것으로 되고, 그것을 계속 추구하려는 한 ‘거세’castration에 직면하게 된다.

이로 인해 주체는 향유에 접근하지 못한다. “법은 ‘Jouis!’(향유하라!)고 하지만, 그에 대해 주체는 단지 ‘J'ouïs!’(들었다/알았다!)라고만 대답할 수 있을 뿐이다. 거기서 향유는 이해된 것/들린 것 이상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애를 만들어내는 것이 단지 법 그자체는 아니며, 오히려 법은 자연적인 장애에서 빗금친/분열된barred 주체를 만들어낸다.”(ES:319, E:820) 따라서 향유가 있어야 할 곳은 텅 빈 자리로, 결핍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라캉은 이러한 향유의 부재야말로 우주를 공허한 것으로 만든다고 한다(ES:317, E:819). 빗금친 주체, 분열된 주체는 이 공허한 자리에서 발생한다.

욕구는, 마치 의도라는 신화적 실체가 그랬듯이 상징과 향유의 벡터를 통과해서는 분열된 주체(의 기표)에 도달한다. 따라서 위의 그래프는 (그림 5)처럼 고쳐 그릴 수 있다.

욕망désir/desire이 정의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욕망은 욕구와 요구의 차로 정의된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욕망이란 △와 S/ 간의 차(△ - S/)인 셈이다. 욕망은 이런 점에서 충족되지 못함이며 결핍manque이다. 우유병이나 ‘젖꼭지’만으론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결핍이 바로 욕망이다. 그것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이지만, 동시에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망이기에, 그 결핍을 메우리라 생각되는 대상이 무한히 치환되는 ‘욕망의 환유연쇄’가 나타난다.




Jouissance                  Castration

(향유)                       (거세)



               S/     △

               (그림 5)



(2)결핍의 기표들


위의 그림에서도 앞서처럼 종착점의 S/는 마치 처음부터 있던 자명한 주체인 양 벡터의 출발점으로 이전하고, 벡터 자체는 이제 이 주체가 갖는 욕망(d)의 벡터로 된다. 그런데 그 자체가 결핍인 이 욕망의 벡터는 다양한 결핍의 기표를 만들어낸다. 이제 위의 그래프를 욕망의 벡터로 바꾸어 그릴 수 있다.



            S(A/)       S/D

Jouissance                     Castration

(향유)                         (거세)


                         d


               S/a   S/

               (그림 6)


S/D에서 D는 요구를 표시한다. 는 상상적 동일시를 뜻하는데, 동시에 그것에 내재된 ‘구멍’ 혹은 결핍을 표시한다. 예컨대 어머니에게 옷을 사달라는 아이의 요구는, 그 요구대상이 바로 자신의 결핍을 충족시켜주리라고 상상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욕망은 이러한 상상적 동일시 속에서 요구에 일시적으로 고정된다. 이렇듯 S/D는 주체가 말로 제시되는 요구 속으로 동일시되고 흡수되는 것을 표시한다. 주체가 요구 속으로 소멸되는 것이다.

요구는 결국 욕망의 대상을 고정하는 기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욕망이 충족을 추구하지만 결코 근원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 결핍이라면, 이 기표는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따라서 분열된 기표며, 동시에 분열된 주체의 기표다(S/). 따라서 요구 대상에 대한 상상적 동일시는 결핍과 부재로서 구멍을 내포하는 동일시다.29)

S(A/)는 반쪽짜리 의미를 갖는 기표, 그래서 사실은 의미를 갖지 않는 기표며, 의미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표시하는 기표고,30) 타자 속에 존재하는 결핍의 기표다(ES:316, E:818). 동시에 그것은 향유에 이르지 못하는, 그것의 결핍으로 인해 야기되는 고통의 자리다. ‘대상 (a)’objet petit (a)는 바로 이 결핍을 메워야 할,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으로 획득될 수 없는 대상이요, 그런 점에서 부재하는 대상이다. 비유하자면, 이런 점에서 근원적인 부재로서 ‘대상 (a)’는 일차기표의 ‘기의’인 셈이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결핍된 대상이라고 해서 그것이 단순히 무는 아니다. 그것은, 부재와 결핍이 있음으로써 그것을 채울 무언가를 끊임없이 욕망하게 하는 요소다. 라캉이 보기에, 그것은 마치 수학에서 허수인 이 존재하지 않는 수임에도 불구하고 복소수 전체를 사고하게 하는 ‘근본적인’ 수와 같은 지위를 갖는 것이다.31)

이 근원적 결핍의 대상은 거세를 통해 제거된 것이다. 그것은 남근phallus과 관련된 것이지만, 상징화되지 못한, 근원적 결핍의 대상이다. 이를 라캉은 (-ψ) (petit phi)라고 표시한다. 반면 이것이 상징적인 것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남근이며, 이를 Φ(grand phi)라고 표시한다.32) (-ψ)가 Φ라는 기표로 변환됨에 따라, 근본적으로 결핍된 대상에 대한 상상적 이미지는 상징화된다. 요컨대 남근은 거세에 의해 만들어지는 타자 안의 결핍의 기표며, 그 결핍을 메우리라고 생각되는 중심 ‘대상’이다. 남근이 욕망의 ‘중심적 기표’로 된다.33) 결국 거세가 욕망을 지배하는 것이다(ES:323).

그리하여 결핍의 기표이자 동시에 욕망하게 하는 기표인 S(A/)는 ‘환상의 구조’를 형성한다. 기표로 인해 분열된 주체와 ‘욕망하게 하는’ 대상 (a)의 상상적 동일시, 그러나 근원적인 결핍으로 인해 결코 메워질 수 없는 구멍을 사이에 둔 동일시가 환상의 구조를 보여준다고 한다.34) 이 구멍을, 그 결핍을 메우는 것이 바로 남근이라는 기표라고 하는데, 사실상 남근은 부재의 기표기 때문에 욕망은 그것을 대신할 대상들을 추구한다. 욕망의 대상이 무한히 치환되는 욕망의 환유연쇄가 나타난다.

이렇게 욕망의 대상으로서 고정된 대상들을 라캉은 또 다시 ‘대상 (a)’objet petit (a)라고 한다. S/a에서 a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S/a는 그렇게 잠정적으로 고정된 대상을 남근과 상상적으로 동일시하는 ‘환상’을 표시한다고 한다. 이를 라캉은 ‘환상의 공식’이라고 한다. 이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 주체는 대상 속으로 소멸된다.

이상의 얘기를 라캉의 말로 요약하면, “거세가 가정됨으로써 결핍이 생겨나고, 이 결핍을 통해 욕망이 생겨난다. 욕망이란 욕망에 대한 욕망이다.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그리고 욕망은 법에 종속된다.”35)


(3)“원하는 게 뭐지?”


“욕망은 요구가 욕구로부터 분리되는 그 한계지점에서 형태를 취하기 시작한다.”(ES:311) 사랑에 대한 요구 속에서 주체는 타자에 종속된 채 머물러 있으며, 이런 한에서 욕구와 요구가 분리되는 지점에서 주체는 분열된다. 그 지점에서 나타나는 욕망은 명확한 직선의 형태가 아니라 구부러진 곡선의 형태를 취하게 되고, (타자가 변덕을 부리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조차도) 주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어지럼증vertige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주체는 ‘자신’에게 질문한다. “원하는 게 뭐지Che vuoi?”

그런데 “사람이 그의 욕망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은 그가 요구하는 것이 무언지를 모른다는 것보다는..그가 욕망하는 곳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이다.”(ES:312) ‘자신’의 욕망은 사실 타자가 나를 욕망했으면 하는 것이고, 따라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며, 한마디로 ‘타자의 욕망’désir de l'Autre이다. 예컨대 어머니에게 남근으로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아이의 욕망이 그렇다. 그러한 욕망으로 인해 아이는 어머니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것이며, 결국은 어머니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간주한다. 그가 욕망하는 것은 바로 타자로서 그가 욕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욕망으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길은 타자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그가 나에 대해 원하는 게 뭐지?”라고. 이 말은 결국 “타자가 나에게 원하는 것은 뭐지?”란 질문일 뿐이다. 요컨대 “원하는 게 뭐지?”의 물음표는 타자의 공간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ES:312).

라캉이 그린 다음 그래프는 이러한 질문에 관한 것이다(그림 7).



            Che vuoi?

      S/a             d

  

  

  

          s(A)       A

   S                         Voix

        m              i(a)

  

             I(A)  S/

            (그림 7)36)


여기서 물음표의 머리처럼 구부러진 ‘곡선’은 욕망(d)의 벡터인데, 라캉은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란 명제를 그 물음표가 타자의 원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표시한다. 그 욕망의 곡선은 “원하는 게 뭐지?”라는 질문의 곡선인 셈이다. 그 곡선의 끝에 있는 공식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환상의 구조’라고 부르는 것임을 표시한다. 주체로 하여금 욕망하게끔 만드는 대상, 그리하여 의 구멍을 메울 기표를 찾아내고 그것과 자신의 욕망을 동일시하게 하는 대상, 그리고 그 결과 찾아낸 욕망의 대상, 이것이 바로 ‘대상 (a)’인 것이다. 라캉은 이 환상의 공식은 주체가 스스로를 타자의 향유joussance를 위한 도구로 만들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한다.(ES:320) 즉 자신을 타자로 하여금 타자 안의 결핍을 메우는 대상으로 향유하게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도착perversion과 신경증의 차이는 환상의 구조를 통해 설명된다. 도착에서는 a가 특권화된다. 그것은 특정한 대상으로서 a에 쏠리는 것이며, “환상의 대상 a로써 A/를, 즉 타자 안의 결핍을 대체하는 것이다.”(ES:320) 예컨대 구두뒤축만 보아도 오르가즘을 느낀다는 페티시즘은 타자의 결핍--남근의 결핍--을 대체하는 것으로서 구두뒤축이라는 대상 a가 유독 특권화되는 것이다.

반면 신경증neurotic에서는 S/가 강조된다. 예를 들면 멀쩡한 테이블보에 잉크를 뿌리고 하녀에게 빨래를 시키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실패한 첫날밤’--남근의 결핍--을 메우려고 하는 것이고, 이는 하녀에게 빨래를 하라고 시키는 자신의 요구와 자신의 남근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라캉의 공식과 연관지어 말하자면, 신경증은 타자의 결핍(A/)과 자신의 요구를 동일시하는 것이고, Φ와 D를 동일시하는 것이며(ES:321), “(-ψ)가 환상의 S/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ES:323). 다시 말해 ‘주체’가 자신의 요구를 자신의 근원적 결핍을 메워줄 수 있는 대상(남근)이라고 상상하는 것이 신경증이라는 것이다.


(4)무의식의 이중적 구조


이상의 과정 전체를 라캉은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총괄한다(그림 8).


    


           S(A/)           (S/D)    

Jouissance                           Castration     

    

       (S/a)                  d    

    

    

              s(A)         A        

  Signifiant                        Voix    

    

             m                i(a)  

    

    

                 I(A)    S/  

                 (그림 8)37)


상부에 있는 그림에서 욕망의 벡터는 타자에서 시작하여 (S/D)를 거쳐 S(A/)에 이르며, 일단은 s(A)로 나아간다. 여기서 S(A/)-->s(A)는 타자의 결핍의 기표가 환상의 구조(S/a)를 통해 결국은 타자의 메시지(s(A))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즉 남근이라는 중심기표가 환상의 구조에 있는 구멍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ψ)(objet a)는 상징적인 것으로 전환되며, 이 중심기표를 경유하여 나타나는 욕망의 대상은 마치 그것이 기의인 것인양 고정된다. 결핍으로서 욕망이 마치 그것을 메울 진정한 대상을 찾아내기라도 한것처럼.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그 경우에도 그것은 단지 타자로서의 의미, 즉 타자의 메시지일 뿐이다. 이는 타자에서 시작된 욕망의 벡터가 타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욕망을 통해 주체가 타자에 종속되는 경로를 다시 한번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욕망의 벡터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상상적 동일시의 벡터 d->(S/a)는, 앞서 나(moi)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욕망과 환상의, 욕망의 대상과 환상으로서 대상의 상상적 동일시를 표시한다. 이는 아마 환상의 벡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인데, 자크-알랭 밀레르는 ‘충동the drive의 벡터’라고 부른다.  그것은 아마도 상상적 동일시 속에서 대상을 남근으로 동일시함으로써 그 대상을 추구하는 힘(충동)이 만들어지고 작용한다는 의미일 것이다.38)

그리고 놓쳐선 안될 것은 이 그림의 최종적 종착지가 타자의 메시지를 통해 구성되는 동일성(I(A))라는 점이다. 방금 언급한 욕망의 벡터는 주체가 남근이란 상징을 통해 타자 속의 근원적 결핍이 결국은 타자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동일성이 형성되는 전체과정의 일부임을 이 총괄적인 그림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개체가 자명한 주체의 자리에 서게 되는 과정과 기표와 욕망이라는 이중적 경로를 통해서 주체화되는 메카니즘을 정교하게 요약하고 있는 셈이다.39)

이는 동시에 개인을 주체화하는 무의식의 구조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앞서 (그림 8)에서 보듯이 기표와 욕망에 의해 구성되는 이층구조를 이루고 있다.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일층과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란 말로 요약되는 두 층이 접합되어 있는 구조로서, 그 내부에서 이중적인 동일시가 각각 행해지며 그 결과 타자의 담론을 자신의 담론으로,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동일성이 형성되는 이중의 메카니즘이 작동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층구조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층이 동형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상층의 그래프와 하층의 그래프가 동형성을 갖는다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는 기표를 통해 무의식이 조직되는 메카니즘과 욕망의 변증법을 통해 무의식이 조직되는 메카니즘이 동일한 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무의식이란 이러한 동형성을 갖는 이중적인 메카니즘을 통해 구조화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무의식은 단지 기표나 언어적 구조만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또한 단지 욕망과 충동의 동력학만으로 환원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언어적인 구조화와 욕망의 동력학이 동시에 고려될 때 비로소 무의식에 올바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캉이 프로이트와 소쉬르를, 언어와 욕망을 접합하려 한 것은 무의식의 이러한 이중구조를 통해 거꾸로 (소급적으로!) 정당화되는 셈이다.

다른 한편 이 총괄적인 그림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욕망에 대한 기표의 우위성이다. 그림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욕망의 그래프 전체는 언어적 구조의 그래프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언어는 욕망의 ‘하부구조’다. 이는 언어적 구조가 욕구/요구/욕망의 변증법을 조직하는데 근본적인 구성요소라는 점, 다시 말해 욕망과 남근은 언어적 상징을 통해 조직되는 것이라는 점을 통해 확인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욕망은 언어적 구조를 벗어나지 않으며, 상징계를 통해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명제가 정신분석과 언어학의 동맹을 위한 공동선언문의 제1조인 셈이다.


5.무의식과 주체


라캉의 문제설정의 요체는 ‘인간’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주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하나의 개체가 어떻게 해서 ‘인간’이라 불리는 주체로 되는가 하는 것이며, 마찬가지 말이지만 그 개체가 ‘인간’을 둘러싼 문화적 질서 속에 어떻게 포섭되어 가는가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타자’는 주체를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라캉의 대답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타자’의 메시지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리고 그것에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개인은 주체가 된다는 것이었다. 알튀세르 식으로 표현하면 대문자 타자(대문자 주체)의 ‘호명’interpellation에 대답함으로써 개인은 (소문자)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40). 개인이 ‘인간’으로서, 아니 특정한 주체로서 어떤 동일성(정체성identité)을 획득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유지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주체가 되었음을 뜻하는 결과물인 셈이다. 다시 말해 개개의 주체가 갖는 동일성은 이처럼 타자에 의해 형성된 것이란 말이다. 앞의 그림은 타자에 의해 이러한 동일성I(A)이 형성되는 복합적인 과정의 도해였다는 점에서, 라캉 이론의 개념적 구조를 이러한 관점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그렇게 형성된 동일성이 주체 자신의 이미지i(a)로서 동일시되며, 결국은 그것이 상상적 동일시라는 오인을 통해 개인을 지배한다는 것을 또한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는 동일성이 개인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고, 그 지배의 효과가 바로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을 ‘인간’이란 이름의 주체로 만들어내는 이 타자의 메시지는 어떻게 개인에게 전달되는가? 그것은 무의식을 통해 전달된다는 것이 라캉의 대답이다. 즉 무의식은 타자의 편지lettre를 배달하는 배달부인 셈이다. 무의식은 주체가 사고하고 욕망하는 자리며, 사고와 욕망이 행해지는 메카니즘이고, 따라서 사고와 욕망을 구성하는 구조다. 사고와 욕망은 이러한 무의식의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며, 따라서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고와 욕망이 행해지는 무의식의 이중적 구조를 통해서, 그리고 그 이중구조의 작용과 효과를 고정하는 고정점을 통해서 타자는 주체에게 말한다. 말 그대로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인 것이다. 주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주체의 입을 통해 나가는 것일 뿐이다. 결국 앞의 그림은 무의식이 타자의 메시지를 배달하는 이중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며, 주체란 결코 발신인이 아니라 수신인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discours de l'Autre”에서 de가 ‘객관적 결정’이란 뜻이라고 할 때(ES:312), 무의식은 개인의 사고를 객관적으로 결정하는 요인임을 뜻한다.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désir de l'Autre”에서 de는 주체적 결정이란 의미라고 할 때(ES:312), 무의식은 개인의 욕망을 객관적으로 결정하는 요인임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라캉은 프로이트의 “Wo es war, soll ich werden”을41) 다시 번역하여, “에스Es가 있던 곳에 내가 존재하게 되는 것은 나의 의무다”라고 말한다. 에스란 타자의 담론이요 욕망으로서 무의식이 전달하는 타자의 메시지며, 개인에게 전달되는 동일성이다. 이제 개인은 그 ‘에스’의 자리에 가야 한다. 따라서 “무의식은 주체의 설립institution을 위한 결정적 효과”(ES:285)고, “주체가 자신의 의미화 장소sa place signifiante를 발견하는 곳 역시 바로 그곳(무의식)”(ES:285)인 것이다. 하나의 주체가 된 개인은 이제 동시에 타자의 질서 속에 포섭되고 그에 복종하는 신민(臣民sujet)이 되게 된다. 이를 ‘주체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무의식이란 개인의 사고와 욕망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지반이요 공간이며, 동시에 사고와 욕망이 그 안에 제한되는 공간이다. 그것은 사고와 욕망에 의해 짜여지는 표상représentation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다. 즉 다양한 표상들이 얽히고 연출되는 무대Schauplatz인 것이다. 무의식은 표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표상체계’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말한다. 상징이 그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경우에 한해서만.”42) 요컨대 무의식의 이중구조는 인간의 사고와 욕망이, 일반적으로 말해서 표상이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자, 동시에 표상을 가두는 질서다. 무의식을 통해 이제 개인은 그 사회의 표상체계 속으로, 그 질서 속으로 들어간다. 결국 무의식의 이중구조는 주체의 자리에 개인을 묶어주는 이중의 끈인 셈이다.

이러한 라캉의 이론은, 어떤 개인이 질서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르는 것을 상징화된 표상체계를 통해 파악하는 것이란 점에서 우리는 ‘표상체계의 패러다임’이라고 본다. 라캉의 영향 아래 형성된 다양한 개념은 이러한 표상체계의 패러다임에 속한다. 예컨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으로서, “대중적인 표상체계”로서 정의할 때,43) 푸코가 무의식으로서, 표상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에피스테메épistémè를 정의할 때,44) 라클라우가 담론구성체를 접합에 의해 의미가 항상 타협되고 구성되는 구조로서 정의할 때,45) 심지어 보르리야르J. Baudrillard가 거울에 비친 ‘상상계’(라캉과는 다른 뜻이다)의 거울 속에 모든 것을 쑤셔넣을 때, 결정적인 것은 공통되다. 그것은, 표상을 조직하고 구성하는 표상체계로, 그리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의미작용으로 사고와 행동의 주체화/종속화를 환원한다는 것이다. 물론 앞서 말한 논자들이 그러한 공통성만큼이나 상이한 문제설정 및 이탈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는 점은 분명 하지만46).

앞서 보았듯이 라캉에게 욕망은 기표의 개입에 의해 발생하고 정의된다. 타자로서 무의식은 상징을 통해 욕망을 질서지운다. 욕망의 중심 또한 (음경penis이 아닌) 남근phallus라는 기표로 정의된다. 요컨대 의식적/무의식적 사고와 욕망은 표상으로 환원되고, 표상은 기표로 환원된다. 타자라는 질서 역시 기표와 상징적 질서로 환원된다. 기표들이 조직되어 만들어내는 의미작용의 질서가 주체를 지배한다. 한마디로 ‘기표의 물질성’이 이제 모든 것의 지배자임이 드러난 것이다! ‘기표의 물질성’은 ‘기표의 전제정’으로 귀결된 것이다. “무의식의 언어적 구조”가 라캉의 이론에서 가장 근본적인 명제인 것처럼, 기표의 물질성/기표의 전제정이야말로 ‘표상체계의 패러다임’의 가장 근본적인 명제인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 힘이 과연 기표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그것은 주체를 표상으로 환원하는 문제설정 자체에서 나오는 동어반복적 결론 아닐까?

다른 한편 라캉의 이론이나 표상체계의 패러다임 전체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동일시’에 의해 주체의 형성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소외’와 ‘분열’이 있지만, 모든 주체는 기표의 질서를 받아들이며, 타자의 메시지에 자신을 동일시한다. 상징적으로, 상상적으로. ‘오인’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한마디로 주체는 동일시의 결과물인 것이고, 이런 점에서 주체의 형성은 ‘주체화’하는 것이고, ‘신민화’하는 것이다. 여기에 ‘저항’이 사고될 수 없지 않느냐고 묻는 것은 차라리 부차적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동일시를 특권화시킴으로써 잊혀지는 것들이 있다는 점이다. 즉 기존의 질서는 동일시없이도 주체로 만들어내려(내야) 하며, 그러기 위해 (기표보다는 차라리) 폭력과 감금, 공포와 협박, 감시와 강제 등이 동원된다는 사실이 동일시라는 말에 가려 은폐되고 잊혀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표상체계의 패러다임으로서 라캉의 주체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다.47)

이러한 두가지 특징은 서로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동일시는 기표의 물질성이 가능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며, 기표의 물질성은 동일성에 의해 주체가 구성되는 것을 사회적, 객관적 수준에서 가능하게 해주는 물질적 조건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푸코의 발언에 눈길을 돌리는 것이 유효하리라고 본다.


“여기서 우리가 분석의 근거로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언어나 기호라는 진부한 모델이 아니라 전투나 전쟁같은 역동적인 모델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모습을 규정했던 힘은 언어라기보다는 전쟁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즉 의미의 관계가 아니라 권력관계를 주목해야 한다는 뜻이지요...기호학은 갈등을 언어와 대화라는 고요한 플라톤 식의 형태로 환원시킴으로써 광포하고 피에 물들어 있으며 치명적인 성격을 띠는 갈등의 참모습을 역시 외면하고 있습니다.”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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