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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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서는 우리 / 눈도 마주치지 말자.”
마치 토라진 누이처럼 말하는 이 시의 서정적 주체는 심신이 몹시 지쳐 있거나 상처받은 상태다. 누가 제 외로움과 괴로움에 대해 말하는 것을 조용히 경청하고 있을 만한 여력이 없다. 다 귀찮다. 내 한 몸이 지어 만드는 생도 질질 끌고 가는 형편인데, 누군가 제 짐을 들어 달랜다. 그러나 나는 피로의 극한상황이거나 마음이 닫힌 상태다. 누군가 고독의 공포에 질린 내게 와서 도와 달라고 매달리는 게 끔찍한 일이겠다. 외재적 대상들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주체에게 여유가 있을 때이다. 내가 그의 속 깊은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는 독백을 할 수밖에 없다. 내가 그에게 ‘말함’을 허락할 때 나와 그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지만, 내가 그에게 ‘말함’을 허락하지 않을 때 그의 언어는 소통이 끊긴 독백과 고립의 언어가 될 수밖에 없다. 내가 그에게 ‘말함’을 허락하고 그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은 나의 ‘자기성’을 유보하고 그를 향해 나의 현존을 아무 조건 없이 열어 주는 것이다. 소통을 한다는 것은 진정한 삶을 산다는 뜻이다. 말을 바꾸면, 소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죽은 것과 같다는 뜻이다. 내가 당신에게 ‘말함’을 허락하는 것은 당신의 타자성, 그 낯섦을 조건 없이 받겠다는 약속이다.
소통의 불능이 불러오는 비극은 얼마나 끔찍한가. 이 시를 읽으며 프란츠 카프카를 얼른 떠올린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이 한 마리 끔찍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프란츠 카프카, 《변신》) 카프카의 소설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현대사회에 대한 끔찍한 알레고리다. 이 가족의 충직한 일원이자 부양자인 그레고르의 말은 어느 날 아침부터 갑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누이동생에게 소통되지 않는다. 어제까지 사랑스런 누이의 오빠이자 부모의 신뢰를 받는 아들이던 그레고르의 타자성이 극대화되자 그는 흉측한 외관을 가진 동물이 되고 만다. 그로 인해 공중(公衆)과의 소통하기가 아니라 가족과의 소통하기가 불능에 이른 것이다 ! 소통을 할 수 없는 한 식구를 나머지 식구들은 이종(異種)의 그 무엇으로 대한다. 식구 중 한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다른 종(種)으로 건너가며 의사소통의 불능상태에 빠져버리자 이들이 누리던 자족적 세계의 평화는 유리그릇과 같이 쉽게 깨지고, 식구들은 미증유의 혼란과 재앙에 빠져 허우적인다. 이 가정에 불안과 절망, 그리고 우울의 그림자가 덮이고, 평화와 질서의 자리를 울부짖음과 고함, 소란이 대체한다. ‘흉칙한 갑충’으로 변신한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혀 몸이 썩고 끝내는 죽음에 이른다.
황인숙 시의 자아는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의 역상(逆像)이다.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당신과의 어떤 소통도 거부하는 이 시구는 서정적 주체의 상황이 심각한 지경에 있음을 암시한다. 나는 당신에게 ‘말함’을 허락할 수가 없다. 당신이 외로운지 괴로운지 미쳤는지 미치고 싶은지를 듣고 싶지 않은 것은 당신의 ‘말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까닭이다. ‘말함’은 말하는 주체가 자기를 이 세계에 계시하는 것, 특히 유일무이한 청자(聽者)에게 “자기 자신을 위험스럽게 폭로하는 일 속에서, 솔직성 속에서, 내면의 깨어져 나감과 모든 은신처를 포기함 속에서”(레비나스) 말하는 주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당신에게 ‘말함’을 허락하는 것은 그 ‘말함’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응답하겠다는 잠재적 약속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말함’을 들어준다는 것은 그 청자가 타자를 향해 기꺼이 자기를 열어 주는 것, 더 나아가 실제적 차원이든 윤리적 차원이든 당신을 책임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말함’을 허락할 수 없다. 그러니 당신은 내게 와서 당신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나를 향해 달려오는 당신을 피해 계속 달아나겠다는 의지는 매우 단호하다. 나는 당신을 실제적이든 윤리적이든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까닭이다. 지금 이 시의 서정적 주체를 지배하는 것은 권태, 피로, 무기력이다. 이 시의 문면 뒤에 숨은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당신의 ‘말함’을 허락할 수가 없다. 나는 당신에게 어떤 대답도 해줄 수 없다. 제발 나를 건드리지 말고 내게 아무런 응답도 요구하지 말고, 나를 ‘응답할 수 없음’, 즉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익명성에 그냥 있게 놓아 다오. 나는 당신과의 되먹임(feedback)이 끊긴 장소에서 쇠나무[鐵木]가 허공에서 꽃을 피우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나대로 살겠다. 이 시의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 당신이 직접 /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누군가에게 제 존재를 의탁해야만 겨우 살 수 있는 존재에게는 이 매정한 말은 그 외로움과 시림이 뼛속까지 식초보다 더 아프게 내려오겠다.
황인숙은 서울 사람이다. 그이는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서 지금은 나라 안에서 몇 번째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유명해진 소설가 신경숙 씨와 함께 공부했다. 1980년대 중반 그이의 대학교 스승인 오규원 시인이 그즈음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해서 문단에 막 나온 제자 황인숙을 추천해서, 내가 하던 출판사에서 내는 무크지 《언어의 세계》에 그이의 시 스무 편가량이 한꺼번에 발표되었다. 그이가 출판사로 와서 처음 만났는데, 그때 그이가 내 손에 쥐어 준 것은 사탕 몇 알이다. 그 무심함이 잘 잊히지 않는다. 그 뒤로 스무 해가 넘는 동안 드문드문 그이를 보아 왔는데, 그 세월 동안 그이는 다달이 봉급을 받는 직장에 매임 없이 글만 써서 생계를 이어 왔다. 얼마 전까지 어떤 광고에서 어여쁜 여배우가 생글거리며 “모두들 부자 되세요!”라고 외쳤다. 이 외침은 한반도 사람에게 이 사회가 ‘술 권하는 사회’가 아니라 ‘자본 권하는 사회’에 들어섰음을 선포하는 나팔소리다. 우리는 날마다 몸과 영혼에 더도 덜도 아닌 자본제적 삶의 양식에 포획되어 있음을 못 잊게 이 외침을 새기며 산다. 이 사회는 돈으로 모든 걸 살 수 있다는 환상을 퍼뜨리는 ‘소비 천국’이다. 이 ‘천국’에서는 자본이 뻔뻔스럽게 주인 됨을 주장하는데, 이 ‘천국’의 사람과 조직과 제도가 오로지 자본에 의해서만 움직이니 틀린 주장도 아니다. 돈이 없으면 그 ‘천국’을 한가롭게 주유(周遊)하기는커녕 아예 그 입구에서부터 입장을 거부당한다. 그 종류도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국폐(國弊)와 없는 자들을 마른 수건에서 물방울 짜내듯이 쥐어짜는 이 자본이 주인 된 사회가 빚어 낸 민곤(民困)들은 다 이 돈의 흐름이 바르지 않은 까닭이지만, 그 흐름에 맞서 그것을 바로잡기보다는 너도나도 그 뒤를 좇기에 바쁘다. 모든 시간과 행위들이 철두철미하게 다 돈으로 환산되는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의 세상에서 가진 것 없이 꿋꿋하게 버틴다는 것은 눈물겨운 일이다. 하루아침에 궁에서 내쳐진 멸망한 왕조의 막내 공주처럼 늘 가난이 사무쳤겠지만, 놀라워라, 그이가 글을 써서 생계를 꾸리느라 적빈에서 벗어날 틈이 없었을 때에도 궁상이나 엄살을 떠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 했다. 그이는 20대 청춘시절의 시고 떫은 곤고(困苦)를 훨씬 지나서도 지칠 줄 모르고 우아하고 발랄하다. 외모와 인격과 시의 그 변화 없이 한결같음에 나는 다시 한 번 놀란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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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어지지 않는 바람 -황인숙의 통과 제의
-김현(문학평론가)
황인숙의 시를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녀의 시는 나처럼 메말라버린 머리만으로 시를 읽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 시구들로 가득차 있다. 그녀로서는 고통스러운 탐색의 결과였을 것이지만, 나는 그것들을 즐겁게, 감각적으로 읽는다. 예를 들어,
아아아아 재밌어 너무 재밌어
풍선처럼 그이는 풋풋 웃겠죠 (36)
라는 시구는 처녀들의 감각적인 웃음을 연상시킨다. 그녀가 처녀로서 무슨 짓을 하고 재미있어하는지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웃음이 즐겁고 감각적이라는 점이다. 그녀의 감각적인 웃음을 그녀 자신도 알고 있어, 그녀는 자기의 웃음이 그이를 풍선처럼 웃게 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이는 입을 풍선처럼 부풀리고 풋풋하게, 혹은 푸우 하며 웃을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미래형으로 담담하게 묘사하는 척하지만 , 그 묘사의 뒤에는 그런 웃음을 바라는 욕망이 숨어 있다. 그녀의 감각적인 시구들은 타인의 욕망까지 감각적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다.
내게 깨끗하게 날이 선 손도끼가 있다면
(가혹하지만, 정말!)
내 목 바로 밑을
가볍게 찍어보고 싶어요. 딱
한 번만. (98)
그녀의 감각은 자기의 죽음까지 감각적으로 선택하려 한다. 깨끗하게 날이 선 손도끼로 자기의 목 밑을 한 번만 쳐봤으면 하는 것이 그녀의 죽음 선택이다. 죽음은 언제나 슬픈 것이지만, 자기 목을 자기 손도끼로, 깨끗하게 날이 선 손도끼로 찍어보겠다는 마음은 그리 슬퍼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간지러울 정도로 감각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간지러움은 자연스럽게 유출된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게 얻어진 것이다.
간지러움, 간지러움
(간지러움은 통증) (72)
감각적으로 사는 사람에겐 그 감각 자체가 통증인 모양이다. 그녀에겐 통증인 감각, 간지러움을 나는 감각적으로 즐겁게 읽는다. 그러다가 감각적이지만은 않은 다른 아름다운 시구들을 만난다. 편안하게 즐기려는 순간, 오래 느껴야 그 즐거움을 알 수 있는 시구들이 내 눈을 찌른다. 예를 들어,
바람은 젖은 풀잎처럼
목덜미에 감기고 (42)
나,
비 온 뒤의 즙 많은 햇살을
빠는 나뭇잎.
그 치켜올려진 입귀에
황혼이 밀려든다 (72)
나, 또는
그건 난다는 것.
날으는 길은 허공
(허와 공으로 길이 나다니!) (102)
와 같은 시구들은 감각적이지만은 않은 시구들이다. 산책을 나온 시인은 비를 맞은 풀잎들을 바람을 통해 목덜미에 느낀다. 바람은 비에 젖은 풀잎처럼 목덜미에 감긴다. 시원하고 축축하고 끈끈하다는 감각이 그 시구에는 뒤섞여 있다. 또, 비 온 뒤의 산책길에서인가, 시인은 황혼녘에 나뭇잎이 햇살을 받고 있은 것을 보고, 나뭇잎에 엉킨 빗방을들을 햇빛이 즙으로 느낀다. 나뭇잎은 즙 많은 햇살을, 다시 말해 맛있게 익은 과일 같은 햇살을 빤다. 그 햇살 - 햇살의 살은 육체라는 뜻이리라 - 의 즙을 빠는 나뭇잎의 치켜 올려진 입귀가 불그스레해진다. 그곳에 황혼이 몰려드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맛있는 것에 몰려든다는 원리가 이 시구의 감각성을 유지하고 있다. 끝으로, 나는 허공으로 날려 한다. 허와 공은 그러나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 아무것도 없는 곳에 길을 내고 나는 날려 한다. 날으는 순간, 허공은 이미 허공이 아니다. 거기에는 무엇인가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의 감각은 단순한 감각과 복잡한 감각으로 나눌 수 있어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녀의 감각은 그것이 단순해보이든, 복잡해보이든, 타자의 개입을 유발하는 감각이다. 나는 이렇게 느꼈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느끼려고 한다. 나는 그 느낌에 당신도 - 혹은 독자도 - 참여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감광균과 다르고 때로 그녀를 김영랑에게 이끄는 요소이다. 그녀는 그 요소를 정현종이나 오규원 같은 시인들에게서 얻어온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얻어온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하기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엇을 얻어오기가 그리 쉽기나 한가. 그녀의 욕망은 너무나 크고 간절해서, 자기의 욕망에 다른 사람들을 꼭 이끌어들여야겠다는 의지가 그 요소를 낳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올바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요소를 낳은 그녀의 강한 욕망은 무엇일까?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알지 못하는 욕망은 강렬하게 그 욕망을 욕망하지 못한다. 강렬하게 욕망하는 욕망은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을 지각하는 욕망이다.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으며, 내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이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욕망은 무서운 욕망이다. 그것은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욕망의 주체가 그 욕망의 욕망을 잘못 아는 수가 많다. 그래서 욕망의 욕망은 때로 왜곡되고 변형된다. 그것을 인정하고 욕망이 무엇을 욕망하는가를 읽어야 한다. 그러면 욕망의 표면적 구조와 심층적 구조가 다 같이 드러날 수 있다. 시인은 우선 자기가 주저앉아 있으며, 그래서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을 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꿈꾸기는 별난 짓 하기와 마찬가지이다.
나는 꿈을 꾸고
그곳은 은사시나무 숲,
난 그 속에 가만히 앉아 있죠.
갈잎은 서리에 뒤엉켜 있고,
난 울지 않죠, 또 웃지도.
은빛나는 밑둥을 쓸어보죠.
그건 딱딱하고 차갑고
그 숲의 바람만큼이나.
난 위를 올려다보기도 하죠.
윗가지는 반짝거리고
나무는 굉장히 높고
난 가만히 앉아만 있죠.
까치가 지나가며 깍깍대기도 하고
아주 조용하죠.
그러다 꿈이 깨요. (12)
시인을 꿈을 꾸고 있다. 그녀는 은사시나무 숲 속에 있다. 갈잎은 서리에 뒤엉켜 있다. 나무 밑둥은 딱딱하고 차갑다. 위를 보면, 나무는 굉장히 높고 윗가지는 반짝거린다(햇빛을 받아서일까. 달빛을 받아서일까? 나뭇잎들이 다 져서 그녀는 김춘수처럼 금빛-은빛 새들을 날려보내지는 못한다). 때로는 까치가 지나가면서 깍깍댄다. 바람은 차고, 주위는 조용하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녀는 꿈을 깬다. 이 시구에서 의미 있는 요소들은, 날씨가 차고 잎은 다 떨여졌다. 시인은 나무 밑둥에 앉아 있다. 그녀는 때로 위를 바라다본다. 위는 반짝거린다라는 것이고, 거기에 부가 요소들로, 그녀는 나무 밑둥을 만진다. 주위는 조용하다는 것이 덧붙여질 수 있다.
나무는 시인의 상상력의 한 뿌리가 될 정도로 그녀의 시에 되풀이해서 나오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의 의미는 매우 복합적이며, 때로는 애매모호하기까지 하다. 나무는
어느 날 갑자기 나무는 말이 없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
둘
(탄식과 허우적댐으로
떠오르게 하는)
이파리를
떨군다 (52)
에서처럼 의인화의 대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들벚나무들은 낯설지 않게
나를 맞이한다
조금씩 몸을 비껴
둥근 빈터를 마련하고
살랑살랑 기억을 일깨우려는 듯
마른 꽃잎들이 떠오른다 (62)
에서처럼 나와 대립되어 있는 자연의 대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말라죽은 나무를 껴안고 나는 중얼거린다
나는 건강이 역겹다 (74)
에서처럼 그 의미가 분명치 않은 나무도 있다. 내가 말라죽은 나무처럼 말랐다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껴안을 수 있는 다른 대상일까? 여하튼 그 나무는 그녀의 머리속에 뿌리가 억세게 내려
혀를 짓누르고
꿈을 지배 (81)
한다. 그래서 그녀는 꿈속에서도 쉬지 못한다. 그 나무의 의미를 시인은 한번 밝힌 적이 있는데. 그녀를 뒤따르면, 그녀의 나무는 진정한 나무, 의지의 나무, 욕망의 나무이다. 그러니 십대의 나무, 이십대의 나무, 불혹의 나무가 각각 다르다. 나무는 욕망의 나무이기 때문에, 윗가지가 항상 반짝거린다! 그러나 그 표면적 의미 밑에,
오 집어치우자, 갈참나무들,
단풍나무들, 오동나무들.
우리가 어느 나무의 몸을 통해 나온 욕망인가를. (111)
에서 알 수 있는 심층적 의미가 웅크리고 있다. 그 의미란 우리는 나무의 몸을 통해 나온 욕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욕망이다. 우리는 나무의 몸을 통해 나왔다. 그 나무숲에서의 잠은 "촉촉한 부드러운 미립자의 버섯의 세계"(109)로의 침잠이다.
그 욕망의 나무의 윗가지를 시인은 때로 바라다본다. 그러나 그녀는 바라다볼 뿐 그곳으로 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나무 밑둥에 앉아 때로 그것을 만지작거린다. 그것은 차갑고 딱딱하다. 욕망의 하늘은 높고 욕망의 주체의 땅은 차갑고 조용하다. 그것을 이상의 세계는 높고 현실의 세계는 낮다고 번역할 수 있을까? 그것은 너무 쉬운 번역이 아닐까? 그러나 그 번역이 틀린 번역은 아닌 것이 시인은 고양이가 되어 그 구조를 다시 살고 있는 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가시덤불 속을 누벼누벼
너른 벌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로 놀리라.
(-----)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두운 벌판에 혼자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핧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14~15)
시인은 다음 세상에는 고양이로 태어나길 바란다. 아니 태어나겠다라고 말한다. 집에서 길들여진 고양이가 아니라 들고양이로 그녀는 살아갈 작정이다. 어두운 벌판에 혼자 남게 되어도, 그녀는 안락한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다. 그녀는 거센 바람이 찬 비와 함께 쏘다니는 빈 들판에서, 놓친 참새를 쫒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꿀 생각이다. 다짐으로 이뤄진 이 시의 매력은 정적인 앉아 있음의 세계에서 그녀가 나와 동적인 움직임의 꿈을 꾸려 한 데 있다. 정적/ 동적 차이만 있을 뿐, 이상/현실의 대립구조는 이 두편의 시에서 거의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사실 그 정적/동적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정적인 아무는 동적인 고양이로 바뀌고, 주변 역시 반짝이고 터져나가고 날아드는 것들로 바뀐다. 그녀의 시에서, 고양이는 굴뚝 위의 야릇한 새(19) 붉은 지네(21), 물에서 풀려난 바다 거북(22), 시내를 건너는 달팽이(25), 쪼롱쪼롱 울며 날아가는 새(47) 들과 같은 무리를 이루며,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은, 두려움 없이 반짝이는 하늘의 별들(23), 터져나가는 이슬방울(24), 흰 불꽃을 튕기며 몰아치는 바람(26), 나비처럼 날아드는 달님(41)들과 같은 무리를 이룬다. 물론 그녀의 시에서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이 완연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 삼투하고 서로 보완한다. 그것이 그녀의 시에 더 많은 탄력성을 부여한다.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의 대립은 그러므러 극복되어야 할 것이지 분류되고 고착되어져서는 안 될 대립이다.
시인은 그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앉아 있는 상태에서 움직임의 상태로 옮겨가려 한다. 무엇하러? 꿈을 꾸려고, 꿈은 왜? 새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새 삶은 어떻게 살 수 있는가?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난 별난 짓을 함으로써이다. 꿈꾸기는 결국 별난 짓 하기와 같다.
새로 태어나기
썩은 고기도 그의 젓니엔
능금처럼 싱그럽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
우리가 하는 것,
별짓하는 동안만은
세상도 살 만한 것? (49)
별(난) 짓을 하는 동안은 세상도 살 만하다. 그 별난 짓을 한 시인은 인공의 낙원 만들기라고 불렀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그것이 역사적 허무주의가 아닌가 하는 반론이 제시되어 있다. 역사적 전망을 획득하지 못한 사람들만이 별난 짓이라는 개인적 탈출구로 역사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별난 짓이 오히려 역사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역사주의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생각한다.
그 입구를 열고 그곳으로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 입구를 발견하지 못하고 역사주의로 곧바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제일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자신의 길은 언제나 올바르다라는 오만이고, 자기 길을 안 따르는 사람들은 다 개새끼들이다라는 파시즘적 사유이다. 그 오만과 파시즘은 역사주의의 온상이고 함정이다. 그것 때문에 그곳에서 서둘러 빠져 안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인은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을 꾼다. 꿈꾸는 꿈의 주체는 이제 자기의 욕망을 서서히 드러낸다. 시인은 우선 누구를 찾아나서고 싶다고 말한다,
저처럼
종종걸음으로
나도
누군가를
찾아나서고
싶다----(46)
성긴 빗방울이 바쁘게 떨어진다. 그녀는 그 빗방울을 보면서 나도 누군가를 찾아나서고 싶다고 말한다. "당연히 나는 나무토막이다"(123)라고 단언하던 시인은 누군가를 찾아나서고 싶다고 느낀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 누군가가 민중이건, 개인이건, 여하튼 그녀는 자신을 불감증-마스터베이션을 벗어날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나서려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녀가 아직 찾아나선 것이 아니고 찾아나서고 싶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아직도 그녀의 꿈속에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환멸스러운 사랑이며, 망측한 사랑(123)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 다음 그녀가 꾸는 꿈은
웬일인지 모르지만
한적한 뜰을 보면
나는 들어가
서성이고 싶어라 (48)
에서 알 수 있듯 빈곳을 메꾸고 싶다는 꿈이다. 그녀는 한적한 뜰 - 인적 없는 텅 빈 뜰을 보면 그것에 들어가 서성이고 싶다고 말한다. 한적한 뜰은 선가에서는 마음의 한 표상이지만. 이시에서의 뜰은 마음의 표상이 아니라 결여의 표상이다. 그것은 구멍과 같은 이미지 무리이다. 구멍을 보면 채우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이라고 말한 것은 사르트르이다. 옹이에 손가락을 넣고 싶어한는 심정이나 해변가에 모래성을 쌓고 그곳에 손을 넣는 심정은 성적인 충동이 아니라, 아니, 이라기보다는, 존재 결핍을 채우고 싶어하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한적한 뜰에 들어가 서성이거 싶다는 것은 결여된 곳을 채우고 싶다라는 뜻이다. 결여되고 있는 것으로 가득찬 마음을 어떻게 더 채울 수 있을까? 서성이는 것 빼고서,
그리고 그녀는 또 별난 꿈을 꾼다 ;
어지러워 둥근, 가는 나뭇가지에
발가락을 걸고 매달리고 싶다 (105)
이 꿈이 별난 것은 어지러우면 편히 쉬어야 할 것인데 어지러우니까 거꾸로 매달린다는 모순스러운 움직임 때문이다. 그녀는 발가락을 걸고 거꾸로 매달리고 싶어한다. 어디에? 가늘고 둥근 나뭇가지에. 나무에는 나뭇잎이 없고 나뭇가지만 있다. 그 나뭇가지는 잎이 다 졌으니까 앙상한 나뭇가지일텐데 시인은 그 나뭇가지가 둥글고 가늘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 나뭇가지는 예쁜 어린 나뭇가지이다. 그녀의 마음은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리는 것은 어린 아이나 하는 짓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더구나 거꾸로 매달리면 어지럽다. 그래서 미리 어지럽다라고 소리를 내지른다. 나는 어린애처럼 살고 싶다라는 것이 이 시구를 지탱하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래야
꿈같은 기분
즐거운 추억거리를 (90)
오래 간직할 수 있다. 즐거운 기분을 항상 간직할 수 있고 즐거운 추억거리를 많이 간직하고 있으면, 그는 부자이다. 그는 삶을 어렵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으면서, 별난 움직임의 세계를 꿈꾸는 그녀의 시를 뭐라 부를 수 있을까? 나는 그녀의 시를 통과 제의의 시라고 부르고 싶다. 그녀의 시는 통과 제의를 두려운 마음으로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아니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시이다. 통과 제의가 끝나면,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자기의 꿈을 하나 둘 슬그머니 드러낸다. 영리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 삶의 냄새를 미리 피움으로써 자기의 삶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미리 살핀다. 그런 의미에서 근의 시는 애드벌룬의 시이기도 하다.
그녀의 표면상의 욕망은 나는 별난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통과 제의가 끝난 뒤에 별난 삶은 결국 일반적인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거기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의 숨은 욕망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떻게 끝까지 별난 삶만을 살 수 있겠는가? 그녀가 이제 성실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역사 허무주의인지도 모르겠다.
부기 ; 황인숙은 첫 시집인 <새들은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문학과 지성사,1988)를 상제한 후, 계속 활발한 시작 활동을 하고 있다. 그녀의 시집의 제목은 시집의 표지와 안표에는 "새들은-----"이라고 표기 되어 있으나. 속표지와 판권란에는 "새는-----"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시인은 "새가-----"가 옳은 제목이라고 밝히고 있다. 본문에서의 괄호 속의 숫자는 그 시집의 면수를 나타낸다. 이 글은 그 시집만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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