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나무의 농사
- 문태준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 시집 『맨발』(창비, 2004)
* 문태준 :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박사 졸업. 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등이 있다. 현재 불교방송 프로듀서.
이 시는 산수유나무의 그늘에 대한 참신한 문학적 발상을 바탕으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1∼2행에서 화자는 산수유나무의 노란 꽃을 보며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산수유나무의 그늘을 산수유나무가 땅 위에 피운 또 하나의 꽃으로 본 것으로, 그늘은 산수유나무의 또 다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3~5행에서 화자는 산수유나무 그늘과 점점 좁아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비하면서 그늘을 산수유나무가 한 해 동안 열심히 농사지은 결과물로 표현한다. 이때 ‘농사’는 생명을 키우고 그 생명이 성장하여 다른 생명을 키우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상생과 나눔을 의미한다.
6∼9행에서 화자는 산수유나무를 농부로 보고 작은 산수유나무의 꽃을 좁쌀에 빗대어 그 작은 꽃이 만들어 내는 그늘이 다섯 되 무게가 될 정도로 밀도가 높음을 표현한다. 이는 산수유나무는 다른 생명의 휴식을 허락하는 미덕을 발휘하는 반면, 우리 인간은 마음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타인을 위한 그늘을 만들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농사는 인간만이 짓는 것이라는 사고와 화려한 꽃에만 집중하는 관념을 깬 새로운 시각으로 타인을 위한 배려에 인색하고 베풀 줄 모르는 우리의 현실을 반성하게 한다.
봄꽃이 핀다. 팡팡 소리를 내는 것처럼 경쾌하게 꽃이 핀다. 날이 흐려도, 비가 내려도 꽃봉오리는 부지런히 때를 찾아 핀다. 반자연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일이 잔뜩 일어나는 세상인 줄만 알았더니, 아직도 자연은 제 할 일을 해주고 있다니. 이런 섭리를 느끼는 순간에는 감사함이 깃든다. 겨울을 이겨낸 봄꽃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전해준다.
오늘 아침에 보니 매일 오고가는 길목에 선 나무도 노랗게 봄꽃을 달고 있다. 꽃을 보고서야 비로소 나무의 종류를 알게 되었다. 노랗고 자잘한 꽃을 피운 그 나무는 산수유나무였다. 바야흐로 이제 산수유 꽃 피는 계절이 돌아왔으니 문태준 시인의 이 시를 읽을 때가 되었다. 바로 ‘산수유나무의 농사’라는 시이다.
봄에는 ‘개나리 노란 꽃그늘’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 시를 보면 또 다른 노란 꽃그늘이 있음을 알게 된다. 시인은 산수유나무꽃을 일반인의 시선보다 훨씬 깊게 읽어낸다. 마치 땅의 농부처럼 산수유나무는 묵묵하고 성실하게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나무의 농사가 성공하면 그 덕은 우리들 사람이 받게 될 것이다. 곧 다가올 여름 한때 산수유나무 밑에서 땀을 식힐 한 사람을 위해 산수유나무는 일찍부터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소리 없이 이루어지는 자연의 섭리와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이라니. 봄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그야말로 딱 좋은 장면이다.(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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