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愛

건축, ‘적을수록 낫다(less is more)'

나뭇잎숨결 2017. 2. 15. 09:52

건축, ‘적을수록 낫다(less is more)'

 

- 미스 반 데어 로에

 

 

집과 길은 같다. 왜 사람들이 제주 올레길을 그렇게 좋아할까? 그 길은 장식이 적은 길이기 때문이다. 장식이 적은 길은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한다. 시야를 가리지 않는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공간의 주인은 사람이다. 장식이 적은 공간일수록 그 공간에서 사람의 호흡을 느낄 수가 있다.

 

공간은 단지 생물학적인 주거의 의미가 아니라 그 공간에 거처하는 이의 사회적 철학적인 실존의 상황을 반영한다. 같은 초가삼칸에도 안빈낙도의 경지에 이른 사유의 공간이 있을 수 있지만,  중심에서 내어 쫒긴 자의 처절한 울부짖음의 상징일 수도 있다. 건축은 단지 인간이 외부의 환경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1차적인 의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영원회귀의 모태공간, 상생의 자연친화적인 의미까지 확대된 존재의 동굴이다. 건축은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거주하고 체험하는 장소이자 인공물이며, 도시를 구성하는 공공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러한 토대는  인간과 사회, 도시와 문맥, 구축과 물성, 전통과 기술에 대해 지적인 탐구와 뛰어난 상상력으로 인간의 공통된 가치를 실현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Mies van der Rohe Haus in Berlin-Hohenschönhausen

 

 

1922년 베를린의 한 건축 현상설계에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철골조와 유리만으로 된 프리드리히가(街) 오피스빌딩안(案)을 제출하기 전까지 인류 역사상 어느 건축가도 그런 건물을 그린 적이 없었다. 현대 도시의 특징인 글라스타워(유리 마천루)는 거기서 시작된 것이다. 거의 실험적 제안은 같은 해 발표된 ‘글라스 스카이스크레이퍼’에서 한층 구체화 되었다.

 

 조로하는 천재들과는 달리 미스는 세기의 역작인 글라스타워를 만든 이후에도 반세기 동안 끊임없이 위대한 건축 작품을 만들었다. 1886년에 태어나 1969년 영면할 때까지 평생 그는 건축에 몰입하였다. 카롤링거 왕조의 수도였던 독일 아헨의 묘비 석공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미스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미술적 능력을 인정받아 일찍부터 중요한 건축가들에게 건축 교육을 받았다.

 

 1907년 스물하나의 나이에 실력 있는 젊은 건축가를 찾던 건축주에게 발탁되어 첫 작품을 만들게 되었을 때 건축주가 그에게 이탈리아 여행의 기회를 주었으나 2년 넘게 지중해를 여행했던 르 코르뷔지에와 달리 미스는 고향의 침침하고 흐린 날씨가 그리워 햇볕 가득한 지중해를 떠나 중도에 돌아온다. 1908년 미스는 독일공작연맹의 지도자인 페터 베렌스의 사무실에 들어가 그로피우스, 아돌프 마이어, 르 코르뷔지에 등과 함께 일한다. 이때 싱켈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그에게 구속될까 두려워 그때의 스케치 모두를 불살라 버렸으나 싱켈적인 신고전주의적 사상과 비례는 오랫동안 그의 작품에 남는다.

 

 베렌스 사무실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헤이그의 크뢸러 하우스 설계였는데 크뢸러 부인의 설득으로 자기 자신의 안을 만들었으나 결국 그 일로 사무실을 떠나게 된다. 베렌스의 사무실을 나온 후 1913년에 결혼하고 상류사회에 발을 딛게 되면서 미스는 젊은 예술가, 지성인 그룹에 참여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발칸 전선의 철도 엔지니어로 참전하였다.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세 딸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으나 결혼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때부터 20년 동안 베를린 중심부의 옛 주거 지역에 집 겸 사무실을 차리고 직업 건축가로서의 길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부터 이탈리아 고전주의의 세계를 벗어나 역사주의를 배격하는 모더니즘의 물결에 참여한다.

 

 미스는 처음에는 1920년대 표현주의 건축의 대표적 그룹인 11월 그룹의 방관자로 있다가 나중에는 주동자로 적극 참여한다. 자유필름연맹, 사회주의연합 등 전위 운동은 물론 독인예술동맹에서 브루노 타우트, 한스 펠치히, 휴고 헤링, 그로피우스 등과 함께 일한다. 이런 사회 활동 중에도 그의 건축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계속되어 유명한 다섯 프로젝트를 목탄과 파스텔로 표현한, 미술전보다 더 미술적인 건축전시회를 연다. 첫 번째 작품이 바로 글라스타워의 효시인 프리드리히 오피스빌딩이었다.

 

 책표지를 클릭하시면 창을 닫습니다.

 다섯 프로젝트 전시회의 처음은 베를린에서, 다음은 그로피우스의 초청으로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3주년 기념전에서, 마지막은 파리의 데스틸 건축전에 초대되었다. 이후 그는 강한 영향력을 가진 건축가 그룹인 제네르링의 리더가 되고 독일공작연맹과 함께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를 맡게 된다. 바이센호프 주거단지에 족일의 지도적 건축가 이외에 르 코르뷔지에, J. J. P 오우드 등 세계적 건축가를 초대하면서 미스는 서서히 지도적 건축가로 자리하게 된다.

 

 미스는 서른셋에 단독주택과 연립주택군 중 단 하나인 아파트먼트를 설계하고 마스터플랜을 주도한다. 첫 번째 마스터플랜은 힐사이드를 조각적으로 처리한 것이었으나 최종안은 독일 빌라 단지의 전형적 배치 방식을 따른 것이었다. 많은 건축가들이 새로운 가구와 모던 인테리어를 시도하고자 하였으나 예산과 공정 때문에 이루지 못하였는데 미스는 내부 공간의 유동성과 가변성을 강조하기 위해 처음으로 가동벽을 사용하고 그의 첫 의자인 튜블러 스틸 의자를 만든다. 이를 계기로 유명한 바르셀로나 의자와 투겐드하트 의자를 연이어 만들게 된다.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는 또 다른 관점에서 미스 생애의 중요한 전기를 이룬다. 이때 처음으로 뛰어난 디자이너이기도 한 릴리 라이흐를 만난다. 그녀는 그가 사무실에서 작품을 놓고 토론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바이센호프 주거 단지 이후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10여년 넘게 그녀가 위대한 천재에게 미친 영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라이흐는 뛰어난 조각가이기도 했으며 직물과 텍스타일 산업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1927년 미스와 라이흐는 ‘벨벳과 실크 카페’를 함께 디자인하고 다음에는 실크 제작자인 크렐휄트의 집과 공장을 설계한다. 이어서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주택의 하나인 직물 제작자 투겐트하트의 집을 짓게 된다. 투겐트하트 하우스에서 미스가 예산에 구애받지 않고 문손잡이에서 커튼레일에 이르는 집의 모든 부분을 디자인하게 된 것은 라이흐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투겐트하트 하우스는 그리테와 프리츠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가 탄생시킨 아른다운 공간이다. 그리테는 브르노시(市)와 스필베르크성을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땅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두 아이를 가진 그리테가 미혼인 프리츠와 만나면서 브릭 하우스에서 살고 있던 미술 평론가 푹스로부터 미스를 소개받는다. 미스는 처음에는 개인 주택이라 망설였으나 현장을 가보고 크게 만족하여 설계에 착수하였고 드디어 1930년 완성하였다. 프라하에 간 건축가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브르노에 가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현대 건축 최고의 주택이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서 있다.

 

 투겐트하트 하우스와 거의 동시에 현대 건축의 위대한 걸작인 바르셀로나 세계박람회 독일관을 설계한다. 원래는 국가관이기보다 산업관이었고 미스에게 맡겨진 일은 예술감독이었으나 부감독인 라이흐와 함께 일하면서 국가적 정체성 표현에 더 큰 역점을 두게 되었다. 독일관은 전시공간으로 지은 집이 아니라 파빌리온 뒤의 270여 개의 독일 상품이 전시된 전시장으로 가는 입구 기능을 하는 공식 행사의 리셉션 장소로 기획되었으며, 오프닝 때 스페인 왕과 왕비가 오니스월 앞에 놓인 골든 북에 서명하고 리셉션라인을 마주한 곳에 왕관같이 놓인 바르셀로나 의자에 앉도록 공간 설계가 이루어졌다.

 

 1931년 미스는 최고의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나 1933년부터 독일 경제는 하강하고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다. 바이마르공화국의 문화 열정이 나치에 굴복한 것을 미스는 용납할 수 없었다. 이후 현상설계마다 낙선한다. 그로피우스의 지명으로 바우하우스의 교장으로 지명된 후 새로운 커리큘럼을 도입하고 새로운 교수진을 영입하고 라이흐를 인테리어 책임자로 지명하는 등 바우하우스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나치가 문을 닫게 한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미국에서 여러 제의가 들어왔다. 그로피우스에 앞서 하버드대학에 석좌교수로 초대받았으나 같은 시기에 시카고의 아머대학[일리노이 공대(IIT)의 전신]으로부터 학장으로 초대되자 아머대학으로 간다. 새로운 캠퍼스를 마련하고 교육 프로그램과 교수 선발권 모두를 위임받고 독일을 떠나 시카고에 정착한 후 미스는 평생을 시카고에서 보내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캠퍼스 건설이 중단되자 대부분의 시간을 교육 특히 커리큘럼 개발에 몰두한다. 커리큘럼의 기본 구조는 바우하우스의 기본 코스를 따른 것이나 “건축은 시대정신(Zeitgeit)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그의 건축 철학이 커리큘럼의 기반이 되었다. 미스가 취임식 때 인용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아름다움은 진실의 빛남”이라는 말은 건축의 질서, 명증성, 보편성에 대한 그의 신념을 대변한 것이다. 미스는 교육에 몰두하면서도 그의 사상을 체계화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후 30년 동안 미국에서의 그의 위대한 협력의 시대는 모두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미스의 활동은 창조적이며 진실하던 역사적 참여의 시기인 독일에서의 생활과는 달랐다. 이미 그의 이름은 세계의 것이었고 그에게는 릴리 라이흐 이외에도 그를 이해하며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30년에 걸친 미국에서의 여생은 위대하였으나 글라스타워,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의 섬광 같은 것은 다시 이루지 못하였다. 미국에서의 영광스러운 30년은 장엄한 낙조와 같은 시간이었다. 시카고의 860호반 아파트. 뉴욕의 시그램 빌딩, 베를린의 신독일 미술관 등은 또 다른 걸작들이지만 시대정신의 치열한 각인은 아니었다.

 

 

 

 

 필립 존슨이 쓴 『미스 반 데어 로에』라는 책은 미스의 형이상학과 조형의지를 알게 하는 저작으로 책 뒤에는 미스가 평생을 쓴 글이 실려 있다. 30년을 미국에 살았으면서도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세속과 떨어져 살았던 그의 글을 읽으면서 ‘적을수록 낫다(less is more)'라는 절제의 미학을 감동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의 콘크리트 하우스, 브릭 하우스와 글라스타워에 감동하여 1968년 신문회관에서 연 두 번째 전시회에서 콘크리트 하우스, 브릭 하우스, 메탈 하우스, 캐피탈 하우스라는 이름의 실험주택을 선보이고 다음 해에 글라스타워의 다음 단계를 의도한 스카이 빌리지를 발표하기도 했다.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미스의 건축을 보고 당황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추종자들에게 실망하여 “미스는 위대하였으나 현대 건축은 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미스(miss)되었다”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유럽의 건축을 알게 되고 현대 도시들을 이해하게 되면서 미스 건축의 역사적 의미와 미학적 기반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미스의 프리드리히가 오피스빌딩 스케치를 보고 그의 엄청난 미술적 재능에 놀랐다.

 

 미스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끝없는 버림을 통해 드디어 ‘less is more'를 실현한 것이다. 미스는 건축을 통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양날개를 가진 현대 문명의 시대정신을 가장 아름다운 건축과 도시의 미술 형식으로 실현한 진정한 20세기 문명의 상징적 건축가다.

 

 

 가우디, 매킨토시, 라이트, 르 코르뷔지에 등 위대한 천재들이 현대 건축에 미친 영향보다 미스 한 사람의 영향이 더 크고 깊다. 그들이 건축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크지만 현대 도시와 현대 건축에 미친 영향은 미스보다 크지 않다. 라이트가 농촌 스타일의 자연 친화적 도시 건설을 주장하다가 만년에 마일하이타워를 발표하면서 혁명적인 초고층 도시 제안을 하고, 르 코르뷔지에가 이미 1930년에 ‘빛나는 도시’라는 이름으로 파리의 혁명적 도시구조 개혁을 제안하였으나 정작 지나고 보니 현대 도시는 미스가 1920년에 제안한 글라스타워를 기본 형식으로 삼은 셈이 되었다.

 

 미스는 건축에 있어서는 혁명적이었으나 도시에 관해서는 자연과 역사가 이룬 현존하는 질서로 이해하고, 기존 도시를 새로운 건축 형식으로 진화하도록 건축과 도시의 대위법적 구조개혁을 주장한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현대 도시의 대세가 되었다. 그의 건축은 건축 철학과 미학의 가능성과 보편성을 제안한 것이었다. 초기의 콘크리트 하우스, 브릭 하우스, 글라스타워 등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가능성을 건축 형식으로 제안한 것이며, 이전의 모든 건축과 다른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 바르셀로나 파빌리온 역시 역사시대의 건축과 다른 이차원집합의 건축 형식을 실험한 것이다. 투겐트하트 하우스 역시 독특한 대지에 특별한 주인을 위해 설계된 개인주택이면서 어느 대지 어느 주인에게나 가능한 주거 형식을 선보인 것이다.

 

 보편 공간이 되어야 하는 업무공간과 전시공간에 있어서 그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무것도 없어서’ ‘모든 것을 담는’ 새로운 현대적 공간을 창출하였고, 지금 그의 미학은 다시 의상을 바꾸어 세계를 풍미하고 있다. 생각할수록 신기한 것이 아메리카 대륙은 북미는 대부분 영국의 식민지였고 남미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는데 정작 영국과 스페인의 건축가인 매킨토시와 가우디가 아메리카 대륙에 미친 영향은 미미한데 반해, 아메리카 대륙에 전혀 진출하지 못했던 독일의 미스가 아메리카 건축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매킨토시와 가우디가 개인적 천재에 몰두했던 데 비해 개인적 천재를 억제하고 역사의 의지와 소명에 충실하고자 노력한 미스의 작가정신에 더 많은 건축가들이 공감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매너리즘에 가까운 포스트모더니즘이 탈(脫, post)되고, 해체주의가 해체되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건축의 흐름이 미스의 세계를 다시 잇고 있는 듯한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미스는 아직 여전히 새롭다.


건축은 타인과 함께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한 삶의 방식을 규명하는 것이다.  변화하는 공동체 속에 존재하는 인간적 가치를 탐구하고 지역성에 바탕을 둔 미래의 공간적 잠재력을 제안하는 건축물을 설계되고 있다. 건축의 관심사는 일상적 도구에서 도시로, 개인에서 사회로 이르는 모든 건조 환경 안에서 건축을 생각하고, 이를 위해 도시와 자연, 재료와 구축, 고정과 변화, 도시와 건축 사이에서 파생되는 연속적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여기’라는 장소와 ‘지금’이라는 현재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건축은 기술에서 가능성이 발견되고 기술로 실천되며, 물질적 수단을 넘어 새로운 인식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제주 올레길에서

 

 

 

 

 


'공간愛'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평 비한재(祕閒齋)  (0) 2017.02.21
대리석 회랑(回廊)이 있는 집  (0) 2017.02.21
계단에 관하여  (0) 2017.02.14
한옥의 아름다움, 강릉 선교장  (0) 2017.01.27
저에너지 스마트 홈의 오늘 'MoNo House'   (0) 2015.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