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帛書)

토마스 아퀴나스의 진리론

나뭇잎숨결 2013. 1. 28. 08:07

 

 

 

 

1. 중세의 지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양심’과 ‘의식’, 현대 사회 치유의 단초를 제시하다

13세기 서구 유럽은 십자군 전쟁으로 점철된 위기의 시대였다. 이러한 시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자로서 청빈, 박애, 무소유와 영혼의 순수한 자유 정신을 몸소 실천하며 평생 진리를 추구했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계승해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이루며 스콜라철학을 완성한 시대의 지성이었다.《진리론》(책세상문고?고전의 세계 082)은 중세의 가장 위대한 성인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3대 대전 중 최후의 저술인《진리론Quaestiones Disputatae de Veritate》에서 ‘양심’과 ‘의식’에 관한 논의를 옮긴 것으로, 국내에는 처음 소개된다.

《진리론》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강의록을 기초로 작성된 것으로, 종교적·철학적 주제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의 관심사 등 전통적 사유에서는 잘 다루지 않았던 다양하고 깊이 있는 주제를 포함하고 있으며, 강의에서 이루어진 토론을 반영하며 당대의 논쟁적이고 생생한 사유의 흐름을 보여준다.《진리론》저술의 바탕이 된 이 강의는 당시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성직자들의 강한 거부감을 깊은 논의를 통해 해결해보자는 것과 특권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철학과 신학을 대중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 저작은, 오랫동안 신학의 시녀로 오해되어왔으며 일반 독자가 접할 기회가 드물었던 중세철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여기서 논의된 수많은 항목 중에서 ‘양심’과 ‘의식’을 번역한 것은 철학이 현실의 삶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역자의 신념에서 비롯됐다. ‘양심’을 철학적 용어로 정립하고, 우리의 의식과 행위의 제일원리로 본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만의 탁월한 사유였다. 그에 따르면 의식이란 앎을 우리 삶의 여정에 적용하는 것이며, 의식의 행위란 잘잘못을 판단하는 행위라는 측면에서 양심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의식은 본질적으로 양심에 기초해 있으며, 양심이 의식을 형성하는 근본 원리라는 것이다. 양심과 의식을 구분하면서도 이 둘의 관계를 필연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이 책은 인간 행위의 존엄함과 자율적 인간의 토대를 마련해주며, 양심의 소리가 외면당하는 현대 사회의 비극을 치유할 단초를 제시하고 있다.

2. 토마스 아퀴나스, 위기와 격동의 세기에 태어난 성인

3세기 서구는 ‘그리스도 지성이 위기에 처했던 격동기’인 동시에 ‘기독교적인 서구 문화가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는 황금기’이기도 했다. 두 세기 동안이나 지속되던 십자군 전쟁이 그리스도교의 최종적인 패배로 종결된 이후, 교황권의 쇠퇴와 세속화가 가속화되고 정교의 분리가 발 빠르게 진행되었다. 표면적으로는 가장 불행하고 비참했던 ‘암흑의 시대’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중세 문화를 꽃피우게 되는 새로운 가치관과 비전을 가지고 나타난 두 가지가 있었으니, 바로 ‘탁발 수도회’와 ‘스콜라(대학)’이다.

불멸의 성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탄생시킨 수도회 13세기 초 혜성처럼 나타난 두 탁발 수도회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 수도회’였다. 그중 도미니크 수도회를 창시한 성 도미니크는 스페인의 한 성당의 사무장으로 본당 신부를 보좌하는 길에 십자군 전쟁에 의해 폐허가 된 삶의 터전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목격하게 된다. 그 후 도미니크는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 작은 구호소를 마련해 집과 부모와 경작지를 잃어버린 이들을 구호하면서,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교육이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느낀다. 올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을 가지게 하는 것 그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만이 그들을 지옥 같은 비참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임을 깨닫고, 교육에 전념하는 탁발 수도회 ‘도미니크회‘를 탄생시킨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처음 만났던 도미니크회 수도자들을 “시냇물을 찾아 날렵하게 뛰어다니는 사슴”처럼 매력적이었다고 묘사했다. 그는 도미니크회 수도자들의 삶과 정신에 매료되어 망설임 없이 도미니크 수도회에 입회하고,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만나면서는 스승의 학식과 인품에 감화해 자신도 평생 학문 탐구를 할 것을 결심한다.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는 후일 로마 교황의 대주교 추천까지 마다하며 평수사로서 도미니크회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삶에 전념하는데, 그의 놀라운 학문적 업적들은 이러한 그의 소명 의식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도미니크회는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불멸의 철학자를 낳았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미니크회가 유럽 가톨릭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성장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스콜라철학의 완성자 토마스 아퀴나스 한편, ‘스콜라’ 즉 대학의 성립은 그리스도교가 ‘한 민족의 역사적 종교’가 아닌 인류를 위한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 잡게 했다. 스콜라철학은 교회나 수도원의 부속학교에서 출발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바탕으로 가톨릭 사상을 재정립하면서, 교부철학보다 좀 더 보편적이고 학문적으로 연구된 대학의 철학을 표방했다. 아우구스티누스로 대표되는 교부철학이 플라톤 전통에 입각한 영성적, 초월적, 교회 특권적 철학이라면, 스콜라철학은 대학의 성장과 더불어 좀 더 학문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한 보편적 철학인 것이다. 초기까지만 해도 이성은 신앙의 도구로서의 역할'철학은 신학의 시녀이다'을 견지해왔으나, 중기의 스콜라철학은 그동안 긴장 관계에 있던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이루어냈다.

‘이성’이 더 이상 신앙의 시녀가 아니라 신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반자의 역할을 하게 되며 ‘조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러한 업적의 중심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다. 스콜라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단순히 믿을 통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신이 무엇인지 몰라도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곧 그들의 신앙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의 다섯 가지 길’은 가장 잘 알려진 이론이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정신적 대부이며 ‘만물 박사’라고 칭해지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더불어 도미니크 학파의 꽃이자 ‘천사 박사’로 칭해지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콜라철학을 완성시킨, 13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성이었다.

3. 순수한 양심 토마스 아퀴나스의 진리에 대한 중단 없는 추구

토마스 아퀴나스는 1265년 40세가 되던 해에 스콜라철학을 완성한 저서《신학 대전》과《진리론》을 동시에 저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진리론》은 출간을 위해 저술된 것이 아니었다. 이 저서의 원래 제목은 “진리에 대해 논의한 문제들”로,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한 대학 강의록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제에 대한 간단한 강의를 하고 서로 대립되는 결론을 제시한 후 수강자들에게 어느 결론이 더 적합한 것인지를 선택하고 이유를 설명하게 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자연스럽게 서로 반대되는 견해를 가진 수강자들 간에 토론이 형성되고 최종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를 중재했다. 이처럼《진리론》은 세미나 형식의 토론을 통해 논의된 것을 기반으로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른 대전《대-이교도 대전》이나《신학 대전》이 지니지 않은 독특한 장점을 가지는데, 바로 ‘열려 있음’이다.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학생, 일반 대중, 종교인과 비종교인이 함께 토론한 것으로 청중들의 개별적인 호기심을 일으키고 당시 논란이 되었던 것을 모두 다루며 다각도로 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진리가 바뀔 수는 없는가’, ‘지옥에도 벌레가 있는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의식은 활동하는가?’ 등 다양한 질문들이 등장한다. 구체적으로는 전체 12개 논의와 총 243개의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다루는 논의들은 진리와 신에 있어서의 진리에 대한 앎, 천사와 인간, 섭리와 운명 그리고 예정설, 은총과 정의, 이성과 양심(의식) 그리고 자유의지, 감정, 법열, 예언, 교육 등이다. 매 장마다 문제가 되는 주제에 대해서 ‘반대의 견해들’, ‘이에 대립하는 견해들’,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 ‘반대의 견해들에 대한 해결책’의 순서로 쓰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은 논리학, 윤리학 등 근대 이후의 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진리론》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 중세철학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하고, 진리가 해체된 암흑의 시대에 진리의 빛을 밝혀주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책세상문고?고전의 세계’로 먼저 ‘양심’과 ‘의식’에 관한 논의를 번역해 출간함으로써 이 저작의 가치를 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도덕 판단의 제일원리로서의 양심 칸트는 자신에게 두려운 것 두 가지가 “하늘에서 빛나는 별과 양심의 소리”라고 말했다. 인간이 자신의 행위의 주인이 되는 자율적인 인간이고자 한다면 옳고 그름, 선과 악을 판단해주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러한 원리가 ‘양심synderesi’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이 곧 신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언명에서 보듯, 오늘날 종교는 도덕의 담지자가 되지 못하며, 무한 경쟁의 논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고 있다. 선의의 경쟁은 상생을 불러올 수 있지만 무한 경쟁은 오직 남을 이겨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정글의 법칙을 생활화하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양심이라는 원리가 있다는 사실조차 거북하게 느낄지 모른다. 애써 양심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양심을 능력으로 키우지 못하고 소멸시키기에 이르렀다.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양심의 소리’를 듣기 어려운 이유이다. 사르트르가 “타인이 곧 지옥이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를 그린 말일지 모른다. 인간다운 사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 살 만한 사회는 사회 구성원들이 건강한 양심을 회복하고, 양심에 따른 행위를 하는 자율적인 사람들이 넘쳐날 때 가능할 것이다.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인식으로서의 의식 현대인들에게 의식의 문제는 그리 흥미를 유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의식에 대립하는 개념, ‘무의식’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프로이트나 융이 무의식의 영역을 발견한 후 정신분석학,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무의식은 시, 문학, 영화 그리고 철학에도 다양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라캉은 인간 행동 전체를 무의식과 관련하여 해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의식조차 다 알지 못하는데, 무의식만을 탐구하여 어떻게 나를 알고 인간을 알고 인간 행위를 알 수 있을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잠을 잘 때에도 의식은 소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잠자는 이에게도 의식이 습성의 뿌리에 잔존한다.”

우리에게 ‘의식’이란 판단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인지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어떤 것을 ‘의식한다’는 것은 ‘사태에 대한 주의’를 의미하지 도덕적인 규범으로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의식의 행위란 그것이 잘잘못을 판단하는 행위라는 측면에서 양심과 긴밀히 연관된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필연적으로 양심과 결부된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양심과 의식’에 관해 각각 처음으로 던진 질문은 ‘능력인가 습성인가 혹은 행위인가’ 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양심을 습성의 일종이라고 보았다. 습성으로서의 양심은 한 개인의 의식을 특징짓는 제일원리로 작용한다. 이러한 양심은 사용하지 않으면 (완전히 소멸할 수는 없지만) 거의 소멸될 수 있고, 더 많이 사용할수록 더 분명하고 강한 능력‘처럼’ 작동한다. 즉 습성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면서 ‘제2의 본성’이 될 때 이를 ‘능력’이라 부를 수 있는데, 선에 기우는 경향으로서의 양심이 제2의 본성처럼 되면 그때야 능력으로 작동되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은 습성도 능력도 아닌 행위라고 결론 내린다. 의식이 ‘항상 (가능성이 아닌 현실성으로서) 행위 중에 있다’는 것은, 나의 자아는 항상 내가 인지하고 있는 것이며 항상 나에게 현존하고 있는 것임을 말한다. 나의 모든 행위가 항상 현존하는 ‘나의 의식’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의식이란 항상 ‘종합적으로’ 인식하는 행위이다. 예컨대 내가 교사인 것을 의식한다는 것은 교사의 개념, 교사의 역할, 교사의 의무, 교사로서의 태도, 나아가 구체적으로 어떤 학생들의 교사인 것을 종합적으로 인지함을 의미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의식이 학문과 지혜를 완성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식이란 ‘윤리적·도덕적 지평’ 즉 ‘양심의 원리’와 불가분하다고 할 수 있다. 의식은 양심에 첫 원인을 둔다는 것, 즉 양심이 의식의 제일원리라는 ‘양심과 의식’에 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고찰은 인간 의식과 도덕적 행위에 대한 이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선에 기우는 습성으로서의 ‘양심’을 능력으로 키우고 작동시키며 그것에 기초한 행위로서의 ‘의식’을 행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자율적이고 도덕적인 주체이며, 자율적·도덕적 주체로 삶을 살아갈 때 인간 존재의 존엄성이 발현된다. 13세기 유럽 암흑의 시대에 중단 없는 절대적 진리 탐구로 빛을 밝혀주었던 이 저작은, 오늘날에도 인간성 위기를 보완해줄 사유로서 우리 삶의 여정에 진정한 이정표를 제시해주는 예언자적 음성을 들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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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년~1274년 3월 7일)는 중세 기독교의 대표적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이다. 또한 그는 자연 신학의 으뜸가는 선구자이며 로마 가톨릭에서 오랫동안 주요 철학적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는 토마스 학파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교회학자 33명 중 하나이며, 로마 가톨릭에서는 그를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로 여기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이름을 딴 학교나 연구소 등이 많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근교 로카세카 성(Roccaseca)에서 아퀴노(Aquino) 지방 영주 중 하나인 란돌포의 9남매 중 일곱 번째 아들(아들 넷 중에서는 막내)로 태어났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탄생 연월일을 명시한 기록은 전무하다. 이에 따라 그가 사망한 날짜, 즉 1274년 3월 7일을 기준으로 그가 태어난 해를 추정할 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애에 대한 최초의 기록자인 토코의 굴리엘모(Guillaume de Tocco)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49살이 되는 해’에 사망했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또다른 전기작가인 베르나르 귀(Bernard Gui)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49살을 넘겨 50번째 해를 막 시작할 무렵’에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루카의 톨로메오(Tolomeo de Lucca)의 경우, ‘(토마스 아퀴나스는) 50살에 사망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가 48세에 사망했다고 말한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런 서로 엇갈리는 기록들을 통해 볼 때 토마스 아퀴나스가 탄생한 해는 최소한 그가 48살까지는 살았다는 가정하에 1224년으로부터 1226년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연구자들이 일반적으로 다소 사실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하는 루카의 톨로메오의 기록보다는 토코와 베르나르의 기록에 더 무게를 둔 1224년과 1225년 사이에 태어났다는 설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하지만 이를 확정지을 만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1226년 더 나아가 1227년 출생설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

 

[편집] 소년기그의 아버지는 1230/1231년경 막내아들 토마스를 성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의 몬테 카시노 수도원으로 보냈다. 여기서 토마스는 수도사 수업을 받는다. 전기작가들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몬테 카시노 대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까닭이 그가 미래의 수도원장으로 성장하길 바랐던 토마스의 부모들의 기원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1239년 경 토마스는 당시의 정치적 혼란 때문에 수도사가 되는 수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그래서 몬테 카시노 수도원을 나온 후 당시 프레데리쿠스 2세의 후원으로 성장일로에 있던 나폴리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나폴리 대학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시의 7개의 필수 학문인 문법, 논리학, 수사학, 대수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학자들은 이때 토마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을 접했다고 추정한다. 특히 도미니코회 수도사들과의 만남은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계기로 작용한다. 미래의 몬테 카시노 수도원장으로 성장해줄 것이라는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린 채 1244년 토마스 아퀴나스가 당시 프란체스코회와 더불어 새롭게 등장한 도미니코회의 수도사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에 당황한 토마스의 가족은 도미니코 수도원의 주선으로 파리로 유학가던 토마스를 도중에 납치하여 로카세카 성에 감금했다. 그리고 약 1년여 간 회유와 협박을 동원하여 도미니코회에서 탈퇴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어떤 노력으로도 그의 소신을 굽힐 수 없음을 알게 된 가족들은 결국 1245년 여름 토마스 아퀴나스를 나폴리의 도미니코회 소속의 수도원으로 되돌려 보낸다.

 

이와 같이 귀족의 아들로서 몬테 카시노의 수도원장이 될 수 있는 화려한 삶 대신 소박한 삶을 사는 수도사가 되기를 선택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일화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누릴 수 있었던 모든 화려한 삶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방하기로 결심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일화를 연상시킨다. 더 나아가 화려한 미래가 보장된 길 대신 청빈한 수도사의 길을 선택한 소년 토마스 아퀴나스의 일화를 통해 우리는 이후 재속 성직자들과의 논쟁에서 탁발 수도회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단호한 수도사와 대주교직을 정중히 사절하게 되는 겸손한 수도사의 모습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편집] 청년기토마스 아퀴나스가 가족들의 연금에서 풀려나 나폴리로 돌아온 1245년부터 1248년까지의 행적, 특히 그가 1245년부터 1248년 전반기까지, 즉 그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따라 독일의 쾰른으로 떠날 때까지 약 3년 남짓한 기간 동안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특히 그가 파리 대학교의 학생으로서 정규 교육 과정을 받았는지 여부에 대해 학자들은 논쟁을 거듭하고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그 3년간 파리 대학교 혹은 파리의 도미니코회에서 토마스가 7개의 필수 과목을 공부했었을 것이며 알베르투스의 신학 강의를 들었을 가능성 정도는 추측할 수 있다. 어쨌든 3년간의 파리 체제 이후 1248년 토마스는 쾰른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로부터 4년간 지도를 받게 된다. 이 시기에 토마스는 알베르투스의 영향 아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물론 디오니시우스의 신학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수행한다. 당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다른 동료들이 붙여준 별명은 그의 우람한 몸집과 과묵한 성격을 바라보던 동료들의 장난기가 섞인 ‘시칠리아의 벙어리 황소’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별명과 관련하여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알베르투스가 “지금 벙어리 황소라 불리는 저 수도사의 우렁찬 목소리를 온세상이 듣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 별명과 이와 얽힌 일화와 전설들이 사실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 전설들은 이국 땅에서 어눌한 외국어 구사능력으로 인해 혹은 몇몇 전설이 전하듯이 말더듬이였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그래서 벙어리 황소라는 별명으로 동료들에게 놀림을 받았던 이 소심하고 섬세한 감성을 가진 청년 수도사 토마스의 숨겨진 일면을 드러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더 나아가 소심한 젊은 제자의 침묵 뒤에 숨겨진 무한한 재능과 역량을 꿰뚫어보고 이것이 꽃피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 스승 알베르투스의 자상함과 혜안이 그가 전수한 학문적 지식과 더불어 미래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어떤 영감으로 작용하게 되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하는 데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편집] 명제집 강독자1251년 말에서 1252년 초엽 알베르투스는 도미니코회 총장으로부터 파리에서 강의를 할만한 신학자를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에 알베르투스는 "학문과 삶에서 빛나는 성취를 이룬" 토마스 아퀴나스를 파리 대학교의 교수로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벙어리 황소의 역량을 누구보다도 일찍 꿰뚫어 본 알베르투스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특히 당대 최고의 학자 알베르투스의 강의, 심지어 그의 신학강의까지도 일부 분담할 만큼 신뢰를 얻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재능과 역량에 대해 의심할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도미니코회의 총장은 토마스가 당시 기독교 세계의 문화/학문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던 파리대학에 도미니코회의 대표자로서 추천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무엇보다도 그의 어린 나이, 즉 스물 일곱의 나이에 난색을 표했다. 무엇보다도 총장은 파리대학의 교수로 학문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수많은 문제들과 씨름을 벌일만한 노련한 학자를 원했다. 그의 복안은 종단의 정신을 대표하는 자리에 당대 도미니코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인물이자 중세사회 최고의 지성인인 알베르투스를 파리대학으로 불러오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베르투스는 파리대학 교수로 "벙어리 황소"로 불릴 만큼 조용하고 소극적이며 이제 소년의 티를 갓 벗어난 토마스 아퀴나스를 추천했다. 총장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총장의 당혹감과 주저함에도 불구하고 알베르투스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파리로 가야 한다는 입장에서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총장의 망설임이 길어지자 알베르투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미니코회의 선배 수도사이자 당시 추기경이었던 생 셰르의 위그(Hugues de Saint Cher)까지 설득하여 총장에게 결정적인 압력을 가한다. 결국 위그의 지원까지 등에 업은 알베르투스의 요구는 관철되었다. 이렇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페트루스 롬바르두스 명제집 강독자로서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 강의를 하게 되며 1252년부터 시작하여 125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이 강의와 더불어 신학교수로서의 자격을 얻기 위한 필수과정으로서 명제집 주석 집필에 착수하게 된다.

 

[편집] 파리대학교수(1차 파리체류기)1256년 명제집 주석 작업이 완결될 즈음에 이르러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대학 신학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이 결코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토마스가 파리로 올 당시부터 파리의 분위기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재속성직자들과 교수들이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와 같은 탁발수도회 출신 수도사들의 파리대학 교수 취임에 대해 오랫동안 품어왔던 불만과 이에 따른 대립이 극에 달하여 재속교수들과 수도회출신 교수들 사이의 분쟁이 유혈폭력사태로 이어질 만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취임강연은 수도회 출신 교수를 반대하는 편의 사람들이 청중들의 입장을 방해하는 가운데 만약의 폭력사태를 막기 위해 프랑스 왕의 군대가 강연장까지 배치되어 삼엄한 경호를 펼친 상태로 진행되었다고 전해진다. 비슷한 시기에 교수가 된 동시대의 또다른 거장 보나벤투라의 경우도 신학교수로 취임할 자격을 갖추고서도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릴없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애초에 도미니코회 총장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연륜과 조용한 성격에 대해 우려했던 것도 파리가 이런 분위기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쾰른에서의 알베르투스와의 만남은 단순히 토마스의 성취를 단순히 학문의 영역에서만 머물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말대로 "삶"에서도 가능케 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쾰른 체제기에 얻었던 스승 알베르투스의 신뢰와 명제집 주석 및 강해 과정에서 재차 확인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더해지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대학자로서 각성하게 된다. 영민했지만 소심한 성격으로 쉽게 자신을 표현하지는 못하던 재능있는 청년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신의 소심함과 섬세함을 신중함과 정교함으로 변모시켜 체화함으로써 그의 스승 알베르투스 및 친구 보나벤투라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학자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덩치만 큰 수줍은 말더듬이 벙어리 황소가 적들의 입장을 단호하게, 그리고 조목조목 철두철미하게 비판하며 동료수도사들과 수도회를 위기로부터 구하기 위해 최전선으로 뛰어든 위풍당당한 영웅으로 변모한 것 역시 이 때부터였다. 실제로 수도회를 비판하는 데 앞장섰던 재속성직자들 및 교수들의 수장 기욤 드 생따무르(Guillaume de Saint Amour)의 입장을 주도면밀하게 반박함으로써 교황청이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두 미래의 교회학자, 즉 토마스 아퀴나스와 프란체스코회의 보나벤투라의 투쟁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비록 소란스러운 가운데 진행되기는 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교수로서의 첫 강연은 대가로서 성숙해가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첫 승리를 기념하는 이정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런 "삶"에서의 승리를 거두지 못했더라면 '욥기 주석', 그리고 '진리에 관한 정규토론집', 그리고 자유토론집 VII과 XI과 같은 이 시기에 저술되거나 막 써내려가기 시작한 작품들은 물론, 오늘날 천사적 박사라 불리는 위대한 스콜라학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편집] 이탈리아 체류기1259년말부터 1261년까지 토마스 아퀴나스의 행방은 묘연하다. 그가 1259년말에서 1260년초 사이에 후임자에게 교수직책을 물려준 이후 파리를 떠났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디로 갔는지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때 그가 아냐니에서 교황청 강독자로서 2년간 머물렀다는 의견이 주목받은 바 있지만 이는 어떤 사료에서도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오늘날에는 사실상 이 의견에 동의하는 학자는 찾기 어렵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토마스 아퀴나스가 본래 자신이 속한 교구인 나폴리로 되돌아갔을 것으로 대개 추정하고 있다. 한편 그의 행선지만큼 그가 이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런 막연한 가운데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 하나는 파리를 떠날 즈음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이교도대전'을 집필하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다.

 

이렇게 모든 사료에서 사라졌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1261년 9월 14일 현재 그가 오르비에토에 체류중임을 확인해주는 기록을 통해 약 2년 만에 재등장하게 된다. 이후 1265년 로마로 떠나기 직전까지 토마스 아퀴나스는 수도회를 대표하는 선생으로서, 학자로서 또한 성직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다. 이 시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욥기 주석'과 '대이교도대전', 그리고 '디오니시우스의 신명론 주석'을 완성했으며 '4복음서 연속주해'의 상당부분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교회의 요구에 따라 '그리스인들의 오류를 반박하며'을 비롯한 다수의 소논문들을 작성한 것 외에도 오르비에토는 물론 주변의 도시까지 방문하여 성직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행적을 살펴보면 높아져가는 명망과 더불어 문자 그대로 눈코 뜰새 없이 바빠져가는 한 수도사의 강행군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높아져 가는 명망과 쌓여가는 피로 속에서도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변사람들에게 겸손하고 성실한 선생님이자 동료였고 또 따뜻하고 겸손한 사목자이자 수도사였다. 이와 같은 면모는 다음의 일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르비에토의 수도원으로 한 젊은 수도사가 수도원장에게 심부름을 왔다가 원장실에서 나가자마자 복도에서 가장 먼저 만난 수도사와 함께 어디에 다녀오라는 원장의 지시를 받게 된다. 이 젊은 수도사는 원장실을 나서자마자 복도에 서있던 뚱뚱한 수도사의 소매를 잡아 채고는 원장의 지시이니 같이 길을 나서자고 했다. 그런데 이 젊은 수도사의 빠른 걸음을 뚱뚱한 수도사가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젊고 팔팔한 수도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따라오는 이 뚱뚱하고 느려터진 수도사에게 그로 인해 지체된 시간을 탓하며 오르비에토 시내에서 한복판에서 꽤 고약한 말들을 퍼부었다고 한다. 오르비에토의 사람들은 기겁을 한 표정과 침묵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결국 한 사람이 보다 못해 이 젊은 수도사에게 묻기에 이른다. "저 분이 온 세상에 이름난 토마스 아퀴나스 수도사이신 건 알고 계십니까? 도대체 저 분이 무슨 잘못을 하셨고 댁은 누구시길래 저 분을 이리도 혹독하게 대하십니까?" 이 말을 듣고 젊은 수도사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과 같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토마스 수도사에게 거듭 머리가 땅에 닿도록 숙이며 사죄를 했다고 한다. 한편 젊은 수도사가 투박을 주는 동안 한숨을 돌렸을 토마스 수도사에게 왜 한마디도 불평없이 그런 불편한 지경을 고스란히 당하셨느냐고 사람들이 묻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수도사의 본분은 순종과 겸양입니다. 저 젊은 수도사와 저는 그 본분을 따랐을 뿐입니다."

 

1265년부터 1268년까지 그 상징적인 이름에 걸맞지 않는 학문적 불모지였던 로마로 불려간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의 수도원에서 교수로서의 활동은 물론 저작활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그의 대표작 '신학대전'의 집필에 착수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또한 이 시기는 '신의 권능에 관한 정규토론집'을 비롯하여 '영혼에 관한 정규토론집', 그리고 '영적피조물에 관한 정규토론집' 등과 같은 작품들이 완성되는 등 풍요로운 결실을 맺는 시기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이 시기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연구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바로 이 때부터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욤 모어베크(Guillaume Moerbeke)의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 번역본을 사용하여 '영혼론'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들에 대한 주석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9년 남짓한 이탈리아 체재기간은 '대이교도대전'이 완성되고 '신학대전'과 같은 작품이 집필되기 시작한 시기이자, 그의 성숙한 사유를 반영하는 수많은 주요저작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할 때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막 꽃피우기 시작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숙한 사상들이 반영되어 있다고 평가되는 이 시기의 저작들은 골방에 들어앉아 오로지 펜과 책만 붙들고 앉아 있던 그저 영민하기만 했던 학자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무엇보다도 겸손한 순종의 태도로 신도와 동료들에게 잠깐의 강론을 하기 위해 며칠이 걸릴 지 모를 먼길을 떠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책임감과 사명감 강한 성직자였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기에 완성되었거나 집필되기 시작한 두 대전을 비롯한 저작들은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책임감과 사명감 강한 인간의 초인적인 노력의 결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집] 파리대학교수(2차 파리체류기)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대학 사상 처음으로 두차례나 교수직을 역임하는 영광을 안게 된다. 하지만 1268년으로부터 1272년까지 4년간의 파리체재기간은 겉으로 드러난 영광조차 느낄 시간도 없는 파란의 세월이었다. 먼저 그가 교수에 취임할 당시 잠시 주춤했다가 또다시 수면으로 떠오른 재속성직자 및 재속교수들의 수도회 공격에 대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베로에스주의자들과는 지성의 단일성의 문제를 둘러싸고, 그리고 보나벤투라나 그의 제자 요하네스 페캄과 같은 학자들과는 창조된 세상의 영원성의 철학적 입증 가능성의 문제와 실체적 형상의 단일성의 문제를 두고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공방전을 벌여야 했다. 이런 맹렬한 공방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혼란스러운 지경으로 치닫게 되었으며 심지어 1270년 파리대주교 에티엔 텅피에(Etienne Tempier)에 의해 13개의 명제가 정죄되는 과정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까지도 정죄의 대상으로 거론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회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또한 학생들을 올바르게 지도해야하는 교수로서, 그리고 성직자로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느꼈을 책임감과 압박감은 엄청 났을 것이다. 그런 압박감은 종종 이 시기에 쓰여진 논박서, 예컨대 '세계의 영원성에 관하여'와 같은 저서에 자신과 대립하고 있는 상대에 대해 예의 냉정함과 침착함을 잃고 노기까지 드러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프랑스 왕으로부터 식사초대를 받은 자리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갑자기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모든 사람들이 놀랄 만큼 세게 식탁을 내려치며 "그래! 마니교도들을 논박할 방법을 찾았다"를 큰소리로 외치고는 비서들에게 자신이 하는 말을 받아 적으라고 호들갑을 떨었던 모양이다. 어지간하면 왕에 대한 결례로 큰 벌을 받았을테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구적 열의에 감동한 왕은 토마스가 비서들에게 구술하는 동안 조용히 기다렸다고 한다.

 

두 번째 파리대학교수로 활동하던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가 처했던 상황이 어려웠던 것만큼 잠시의 쉴 틈도 없었다. 아마도 이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만년에 건강악화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을 만성적인 수면부족에 시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이런 토마스 아퀴나스의 쉼없는 활동은 이 시기에 완성한 작품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질과 양으로 결과를 맺었다. 마태오 복음, 바울서간 및 요한복음에 대한 방대한 주석 및 강해를 이 시기에 행했으며 '악에 관한 정규토론집' 및 자유토론집의 상당수는 이 시기에 토론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그리고 신학대전의 1부와 2부를 역시 파리에서 두 번째 교수생활 당시 완성했으며 '영혼론 주석'과 '감각과 감각물에 관하여 주석'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들도 이 시기에 완성하거나 집필했다. 특히 이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활동과 저작활동, 특히 엄청난 저술량과 그것을 능가하는 질적인 완성도, 특히 신학대전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에 대한 주석들이 보여주는 완성도는 '기적적'이라는 수식어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편집] 만년1272년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를 떠나 나폴리로 향한다. 이곳에서 그가 절필하게 되는 1273년까지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도 바울의 서간문에 대한 주해작업과 시편 주해, 그리고 결국 미완성으로 남게 되는 신학대전의 3부와 같은 대작과 함께 여러 소논문들을 작성한다. 이렇게 끊임없이 집필에 여념이 없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오스 축일미사 중 어떤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을 보여 주변을 당황케 했다. 그리고 그 미사 이후 가족들의 연금으로부터 풀려난 뒤로 단 한차례도 멈춘 적이 없었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위대한 저작활동이 완전히 멈추게 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3부 중 속죄에 대해 집필 중이었다고 한다. 그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게 된 것을 기이하게 생각한 그의 비서 레지날드가 토마스에게 그 이유를 묻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레지날드 난 더이상 할 수 없네"라고 답한다. 이 답을 듣고 더욱 걱정이 되어 재차 이유를 묻는 레지날드에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내가 본 것에 비하면 내가 쓴 것들은 모두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가 종종 명상 중에 의식을 잃곤 했다는 증언들이 전기문에 등장하고 1273년 12월부터는 침대에서 일어나고 누울 때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건강상태가 이 무렵부터 급격히 악화일로를 걸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1273년 12월 말부터 1274년 1월 초 무렵 여동생 테오도라를 방문할 무렵의 기록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거의 아무 말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음을 전하고 있다. 이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제 내가 바라는 것 한 가지는 신이 내 저술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듯이 내 인생도 빨리 끝내줬으면 하는 것이라네"라고 힘겹게 말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리용 공의회에 참석하라는 교황의 명에 따라 리용으로 향하던 2월 중순 이후로는 여행의 피로까지 겹쳐진 탓인지 기록에 따르면 식욕까지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결국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을 만큼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2월 말 포사누오바의 시토회 수도원에 머물게 된다. 일부 진위를 확인하기 어려운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곳에서 일생의 마지막 활동으로서 아가에 대한 짧은 주해를 남겼다고 하는데,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이 주해는 아마도 구술된 내용에 대한 보고서(Reportatio) 형식이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원본이나 사본은 물론, 그의 사후 이 주해를 접했다는 증언조차 확인할 수 없다. 1274년 3월 7일 토마스 아퀴나스는 100여 명의 수도사와 평신도들이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영면에 들어간다.

 

[편집] 사후1274년 5월 2일 수요일 파리대학 총장과 운영진은 당시 철학부에 속해 있는 모든 교수들의 이름으로 도미니코회 총회에 비통함이 담긴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젊을 시절부터 자라고 배우며 가르쳤던 파리에 묻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이 담겨 있었다. 물론 이 파리대학 총장과 교수들의 부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포사누오바의 시토회 수도원이 '위대한 성인'의 시신을 내줄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추모와 존경의 표현만이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보내진 반응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가 죽은 지 정확히 3년째 되던 1277년 3월 7일 파리와 3월 18일 옥스퍼드에서 각각 에티엔 텅피에, 그리고 같은 도미니코회 출신의 로버트 킬워드비에 의해, 그리고 1286년 4월 30일 또다시 옥스퍼드에서 킬워드비의 후임 요하네스 페캄에 의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체적 형상의 단일성 이론을 포함한 몇몇 주요 이론들이 단죄 당하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토마스 아퀴나스가 49세의 나이로 죽은 지 49년째 되던 1323년 7월 18일 가톨릭 교회의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이후 그의 이론들에 대한 단죄는 모두 철회되었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옥스포드에서 요하네스 페캄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 당한 지 39년이 지난 해인 1325년 2월 14일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통성을 교황청이 재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1567년 4월 15일 토마스 아퀴나스를 교회학자로 공표한다. 한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성심사와 관련하여 토마스가 성인의 격에 어울릴 만한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지적에 대해 당시 교황 요한 2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를 일축했다고 한다.

 

"그가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그만큼의 기적들을 행한 것이다"

 

[편집] 철학사상그는 크리스트교 교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합하여 스콜라 철학을 대성한 중세 기독교 최대의 신학자이다. 그의 근본 사상은 이성과 신앙, 철학과 신학은 엄밀히 구별되지만, 이것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닌 신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필연적인 조화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자연이 은총에 의해 버림을 받지 않고 완성되는 것처럼 자연적 이성은 신앙의 전단계로 신앙에 봉사하는 것이라 하였다.

 

[편집] 주요저작[편집] 대전명제집 주석 (Scriptum super Libros Sententiarum, 1252-56)

대이교도대전 (Summa contra gentiles, 1259-1264)

신학대전 (Summa theologiae, I, II 1266-1272, III 1272-73, 미완성)

[편집] 정규토론집진리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nes disputatae de ueritate, 1256-1259)

신의 전능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nes disputatae de potentia dei, 1265-1266)

영혼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nes disputatae de anima, 1266-1267)

영적피조물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 disputata de spiritualibus creaturis, 1267-1268)

악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nes disputatae de malo, 1270(1-15문)/1272(16문))

덕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nes disputatae de uirtutibus, 1271/1272)

육화될 말씀의 결합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nes disputatae de unione verbi incarnati, 1272)

[편집] 자유토론집자유토론집 VII-XI (Quaestiones de quodlibet VII-XI, 1256-59)

자유토론집 I-VI, XII (Quaestiones de quodlibet I-VI, XII, 1268-72)

[편집] 성서주해 및 강독이사야서 주해 (Expositio super Isaiam ad litteram, 1252)

예레미아서 및 애가 주해 (Super Isaiam et Threnos, 1252)

이사야서 주해 (Expositio super Isaiam ad litteram, 1252)

취임강연록 (Principium "Rigans montes de superioibus" et "Hic est liber mandatorum dei", 1256)

욥기 주해 (Expositio super Iob ad litteram, 1261-65)

4복음서 연속 주해 (Glossa continua super Evangelica, Catena aurea, 1265-68)

마태오복음 강독 (Lectura super Mathaeum, 1269-70)

요한복음 강독 (Lectura super Ioannem, 1270-72)

바울서간문 주석 및 강해 (Expositio et Lectura super Epistolas Pauli Apostoli, 1265-73)

시편 강연록 (postilla super Psalmos, 1273)

 

 

 

[편집]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영혼론 주석 (Sententia Libri de anima, 1267-68)

감각과 감각물에 관하여 주석 (Sententia Libri de sensu et sensato, 1268-69)

자연학 주석 (Sententia super Physicam, 1268-69)

기상학 주석 (Sententia super Mateora, 1270)

명제론 주석 (Expositio Libri peryermenias, 1270/71 미완성)

분석후서 주석 (Expositio Libri posteriorum, 1271/72)

니코마코스 윤리학 주석 (Sententia Libri ethicorum, 1271-72)

정치학 주석 (Sententia Libri politicorum, 1269-72)

형이상학 주석 (Sententia super Metaphysicam, 1270-71)

천체와 세계에 관하여 주석 (Sententia super Librum de caelo et mundo, 1272-73 미완성)

생성과 소멸에 관하여 주석 (Sententia super Libros de generatione et corruptione, 1272/73 미완성)

[편집] 기타주석서보에티우스의 삼위일체론 주석 (Super Boetium de trinitate, 1257-58/59)

보에티우스의 주간론 주석 (Expositio libri Boetii de ebdomadibus, 1259(?))

디오니시우스의 신명론 주석 (Super Librum Dionysii de diuinis nominibus, 1261-65 혹은 1265-68)

원인론 주석 (Super librum de Causis, 1261-65 혹은 1265-68)

[편집] 논박서전례와 수도회를 업신여기는 자들을 반박하며 (Contra impugnantes Dei cultum et religionem), 1256)

영적 삶의 완전성에 관하여 (De perfectione spiritualis uitae, 1270)

수도회를 부인하는 자들을 논박하며 (Contra doctrinam retrahentum a religione, 1271)

지성단일성론에 관하여 아베로에스주의자를 반박하며 (De unitate intellectus contra auerroistas, 1269/70)

세상의 영원성에 관하여 (De aeternitate mundi, 1261-65 혹은 1265-68)

[편집] 소논문자연의 원리들에 관하여 (De principiis naturae, 1252-56)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 (De ente et essentia, 1252-56)

신학요강 (Compendium theologiae, 1265-67 미완성)

군주의 통치에 관하여 (De regno ad regem Cypri, 1267)

분리된 실체에 관하여 (De substantiis separatis, 1271 미완성)

요소들의 결합에 관하여 (De mixtione elementorum ad magistrum Philippum de Caestro Caeli, 1269(?))

심장의 박동에 관하여 (De motu cordis ad magistrum Philippum de Caestro Caeli, 1273)

  [편집] 바깥 고리Corpus Thomisticum: 라틴어: Busa Edition 전집 및 인덱스 서비스제공

갈리카 프랑스 국립도서관 고문서 서비스: 라틴어,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고인쇄본 및 Leonine Edition(일부)-pdf 포맷

신학대전: 불어, 파리1대학

Edition Cerf E-문서서비스: 불어, 토마스 아퀴나스 선집

토마스 아퀴나스 선집: 영어

라틴어 도서관 라틴어. 신학대전 일부와 몇몇 소논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