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 혁명 Power Vs Force
데이비드 호킨스 지음 ; 이종수 옮김 한문화 1997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 - 인간 정신의 진화에 관한 전문가이자 명강의로서 널리 알려진 그는 1952년부터 정신요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미국 정신치료협회의 종신회원으로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다수의 과학 논문과 강연 테이프를 발표했으며, 1973년에는 <음식을 통한 정신 치료>를 노벨상 수상자인 라이너스 폴링과 공동 저작하여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0여 년에 걸친 연구와 수천명의 대상으로 한 실험의 열매인 이 책은. "표면의식에서는 모른다고 생각되는 것도 인간의 깊은 잠재의식에서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음"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그동안 잠자고 있었던 내면의 신성이 활성화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해 준다.
소개의 말
운동역학으로 번역되는 kinesiology라는 명사는 '운동"을 뜻하는 그리스 어 kinesis에서 유래한 말로서, 신체의 조건에 따라 적용되는 근육과 그 움직임에 대한 학문이다.
시작에 앞서
의식의 새로운 패러다임
단순한 것을 설명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단순한 것들을 좀더 명백히 하는 데에 바쳐졌다. 아무리 단순한 것이라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면, 우주의 본성과 인생 자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력은 한층 더 높아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운동역학은 본격적으로 제자리를 잡은 공인된 과학으로서, 자극에 대한 근육의 반응에 기초를 두고 있다. 긍정적인 자극은 근육에 강한 반응을 초래하고, 부정적인 자극은 현저히 약한 반응을 가져온다. 굿하트가 처음 연구를 시작했지만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존 다이아몬드 박사의 저서를 통해서이다.
이 책에 반영된 연구 결과는 다이아몬드 박사의 단계에서 몇 단계 더 진전된 것이다.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생명을 더욱 생명답게 하는 것과 생명을 낭비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진실과 거짓까지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구비되어 있음이 밝혀졌다고 할 수 있다.
시험 자체는 단순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고, 너무나도 간단하다. 근육의 강한(양성) 반응은 객관적으로 진실일 때 나타나고, 약한(음성) 반응은 피험자가 거짓말을 들을 때 일어난다. 이러한 현상은 피험자가 주어진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견이나 지식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으며, 모집단(母集團)의 문화적인 차이나 시간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이 시험은 과학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며, 어느 누가 실시해도 충분한 정당성이 있다고 믿는다. 이 기술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어떠한 주제이든 그 그릇됨과 진실성을 온전하게 분별할 수 있는 객관성을 제공해 준다. 16-17
독자들이 이러한 탐구의 골자를 이해하지 못할까 하는 염려에서 결론을 미리 말하고자 한다. 인간 개개인의 마음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연결된 컴퓨터의 터미널과 같다. 이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는 인류의 의식 세계 자체이고, 우리 자신의 의식은 단지 모든 인류의 공통된 의식에 뿌리를 둔 데이터베이스의 개인적인 표현일 뿐이다. 이 데이터베이스는 실로 비범한 데가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바로 그 데이터베이스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사람은 탄생하자마자 이 천재적인 데이터베이스를 열람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다. 22
잠재력은 알고 있다
철학과 철학에서 파생된 수많은 곁가지 학문들은 추상적인 개념을 창조함으로써 인간 경험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면서, 궁극적인 실재와의 일치점을 저당잡히고 있다. 정치 체계는 인간의 상대적인 가치 기준에 기초하고 있지만, 이것이 꼭 들어맞는다는 사실적인 기반은 어디에도 없다. 사회의 도덕 체계는 복잡미묘한 인간 행동을 옳고 그름의 단순한 범주 안에 마구잡이로 집어넣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무의식의 세계를 다루는 정신분석학은 이러한 혼란을 가중시켰을 뿐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치료 방법과 다양한 관점을 가지는 심리학을 출현시켰다. 인간 자신을 이해하려는 이와 같은 중구난방의 노력은 결국, 그 진술은 아마도 어느 정도는 진실일 것이라는 식으로 의미상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인과관계의 본질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딱 떨어지는 결과가 얻어질 때라도 그 원인을 조작하여 엉뚱한 데로 돌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사고 체계의 치명적인 결함으로는, (1)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2) 밑그림과 용어 선택에는 본래부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데에 대한 인식의 부족, (3) 의식자체의 본질에 대한 몰이해, (4) 인간 관계의 본질에 대한 오해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결함은, 인간 경험의 주요 영역을 새로운 안목과 새로운 방식으로 탐색하려 할 때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인간 사회는 문제의 원인을 명확히 모르면서 그 결과만을 고치려고 부단히 안간힘을 써 왔고, 바로 그것이 인간 의식의 진보가 그토록 느리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이유의 한 가지이다. 29
* 한 사회가 나아갈 길은 대부분 편의주의, 부정확한 통계, 감상주의, 정치와 언론의 압력, 개인의 편견과 기득권 등에 의해 좌우되어 왔다. 모든 사람들의 삶을 위한 중요한 결정은 항상 실패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이미 안고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져 왔다.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어 나갈 뚜렷한 기준이 없으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힘에만 거듭거듭 의존함으로써 (법률,조세,전쟁,법칙과 규칙과 같은 것) 비싼 대가를 치러 왔다.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력을 활용할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인간에게 주어진 감정과 이성의 능력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은, 개인이나 집단의 치열한 생존 경쟁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너무나 분명하다. 우리들은 이성에 따라 행동했다고 말하곤 하지만, 사실은 초보적인 인식의 패턴을 작용시켰을 뿐일 때가 대부분이다.
자료를 논리적으로 배열하는 것은 인식의 패턴 체계를 강화시키는 데에 불과한데도, 그것이 곧 '진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진실'이란 상황의 진실 이외에는 존재할 수 없으며, 어느 특별한 관점의 견지에서 볼 때만 진실일 뿐이다. 진실이란 본질적으로 말해질 수 없는 무엇이다.
* 우주 안의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우리들 연구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 중 하나인 의식의 에너지 장이라는 지도책을 그리는 일은, 다른 학자들이 탐색해 온 모든 길들과 상호관련됨은 물론 그들에 의해 인증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경험의 다양한 표현들이 전체를 포용하는 하나의 패러다임 안에서 통합되어야 하리라 믿는다. 그러한 통찰력에 의해서만 주체와 객체라는 인위적인 이원성을 우회할 수 있으며, 이원성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는 제한된 관점을 뛰어넘을 수 있다. 주체와 객체란 사실은, 하나인 것이며 같은 것이다.
주체와 객체를 동일시함으로써 우리는 시간 개념의 속박성을 초월할 수 있다. 시간의 제약이야말로 삶을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 커다란 장애가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 기억할 수 없는 먼 옛적부터 우리는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인간 행동에서 어떤 일관성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그런 노력은 수많은 학설을 낳은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이해하려는' 노력이란 선형적인 것, 다시 말하자면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인생의 과정을 보면 유기체적이다. 다시 말하자면 비선형적이다. 이러한 모순이야말로 인간이 지적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는 원인인 것이다.
인간의 진보에 가장 큰 장애물은, 의식 자체의 본성에 대한 앎의 결핍이다. 시선을 안으로 돌려 순간순간 마음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마음이라는 것은 사물을 미처 알기도 전에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의 행동이 심사숙고의 결과라는 생각은 허황된 망상임에 틀림없다.
결정에 이르는 과정은 의식 자체의 고유 기능이다. 마음은 수백만에 이르는 자료들과 그들 사이의 상관 관계를 꿰뚫어보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각할 수 있는 이해의 정도를 넘어서서, 선택을 감행하는 것이다. 이는 비선형 동역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이 '끌개(attractors)'라고 부르는 에너지 패턴에 의해 지배되는 보편적인 기능이다. 32
제1부 방법
제1장 앎의 도약
육체가 마음과 동시에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운동역학은 마음과 육체의 뗄 수 없는 상관 관계를 드러내 주었다. 그리하여 운동역학은, 질병이 진행되는 과정 뒤의 미묘한 메커니즘 안에는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길잡이 노릇을 하기에 이르렀다. 38
* 우리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의식의 무한한 차원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의식 안에는, 타고난 '인간성'을 행동을 통해 발휘하도록 해주는 엄청나게 강력한 끌개 장이 존재한다. 그 거대한 끌개 장 안에는 상대적으로 연약한 에너지와 힘의 장도 존재한다. 이러한 에너지 장이 번갈아 가며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며, 그리하여 인간 역사를 관통하여 어느 시대 어느 문화에도 정의될 수 있는 패턴들이 일관성을 띠고 나타나게 된다. 끌개 장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다양한 상호 작용이 인류의 역사와 문명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의식 세계의 지도를 그리고자 하는 연구를 위해 우리는 비선형 동역학에서 비롯된 '끌개'의 개념을 차용했다. 이 끌개에 대한 연구는 임계점 분석(critical point analysis)을 이용하여 에너지 장의 범위를 찾아내는 일과도 관련된다. 임계점 분석이란 고도로 복잡한 시스템 안에도 가장 작은 힘으로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특별하고 결정적인 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도출된 테크닉이다. 풍차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그 메커니즘에서 벗어나게 하는 작은 터치에도 정지될 수 있고, 포인트만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거대한 기관차도 손가락 하나로 세울 수 있다. 42
끌개 패턴과 눈에 보이는 사건을 연결해 주는 에너지는 눈에 보이고 보이지 않는 양쪽 모두의 차원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우리는 이 에너지를 눈에 보이는 분명한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불분명한 세계를, 결정론적인 것과 비결정론적인 것을 연결시켜 주는 무지개라고 상상해도 좋을 것이다.
우주의 원리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이 우주를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들이포개는 힘)와 눈에 보이는 질서(밖으로 펼치는 힘)로 이루어진 홀로그램으로 묘사한 데이비드 봄의 우주관과 일치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학적인 통찰력이 의식을 초월하여 참된 앎의 경지에 도달한 옛 성인들이 경험한 바와 같다는 사실이다. 데이비드 봄은 안으로 들이포개는 힘과 밖으로 펼치는 힘의 영역을 둘 다 초월하는 하나의 '근원'을 가정한 바 있는데, 이는 깨달은 성인들이 경험한 참된 앎의 상태와 그렇게도 흡사할 수가 없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뇌의 신경 조직망은 끌개 패턴의 시스템과 같이 작용하고, 축적된 기억들은 끌개처럼 작용하며, 신경세포 하나하나는 우연에 의해 닥치는 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신경계 전체는 우연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기에 이르렀다. 46
이러한 의식의 진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혼돈이론의 한 가지 중요한 원리가 '초기 조건에의 민감한 의존성'이다. 이 원리는 초기의 미세한 변화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엄청난 변화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뜻이다. 48
우리 연구는 루퍼트 셀드레이크의 '형태생성의 장'에 관한 가설과 칼 프리밤의 '뇌의 마음과 기능에 관한 홀로그래피 모델'과도 일치한다.(특기할 것은 홀로그래피로 보는 우주 모델에서는 개인의 발전이 전체의 복지와 진보에 공헌한다는 점이다.) 우리 연구는 노벨상 수상자인 존 에클리스 경이 도달한 결론과도 일치한다.
에클리스 경은 뇌는 마음 속에 존재하는 일련의 에너지 패턴을 받아들이는 수신기에 지나지 않고, 이 에너지 패턴은 의식이 생각의 형태로 표현되는 것처럼 존재한다고 말한 바 있다. 생각이 '나의 것'이라고 믿는 것은 에고의 헛된 수작에 불과하다. 비범한 천재들은 자신의 월등한 앎의 원천을, 많은 사람들이 '신성(神性)'이라고 불렀던 모든 의식의 기저에 있는 그 무엇으로 돌리곤 한다. 49
제2장 역사와 방법론
역사적 배경
1971년, 세 명의 물리요법사들은 근육 시험에 관한 결정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의 조지 굿하트 박사는, 자신의 임상 경험을 통해 근육 시험 방법을 광범위하게 연구해 오던 중, 모든 근육의 강약 정도는 그 근육에 상응하는 기관의 건강이나 병변과 관련성을 가진다는 획기적인 발견을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각 근육이 침술의 경혈점과 상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는 침술의 경혈점이 갖는 의학적 중요성에 대한 펠릭스 만이라는 의사의 연구와 흡사했다. 51
시험 기법
두 사람이 필요하다. 한 사람은 피험자로서, 한 팔을 바닥과 수평으로 유지하며 옆으로 올린다. 시험자는 두 손가락으로 올려진 팔의 손목을 누르며 '저항'하라고 말한다. 피험자는 팔이 아래로 내려가는 압력에 온 힘을 다해 저항한다. 이것이 시험의 전부이다.
시험자와 피험자는 서로 말할 수 있다. 피험자가 시험자의 질문을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동안, 피험자의 팔의 힘이 시험자의 누르는 힘에 측정된다. 55
또 하나 중요한 현상은 피험자들이 마음 속에 사물의 영상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똑같은 반응이 나왔다는 것이다. 56
제3장 시험 결과와 해석
* 우리 연구의 목적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의식의 에너지장에 관한 실제적인 지도를 그려내는 데에 있다. 독자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에너지 장의 수치 등은 대강의 숫자로 나타냈다.
밑에 나오는 '의식의 지도'에서 측정된 수치는 감정이나 인식, 태도, 세계관. 영적 믿음 등을 통해 나타나는 특정한 의식 세계와 서로 상응한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이 도표는 인간 행동의 전영역을 포함하는 더 광범위한 것으로 확장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의식 세계를 수치화하는 데 있어서 '용기'의 수준인 200이 일종의 분기점이라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어떠한 생각이나 태도나 느낌이든 그 수치가 200 이하로 나타났다면, 그것은 근육반응이 약하게 나왔다는 것을 뜻한다. 수치가 200 이상으로 나타났다면 그 생각이나 느낌, 태도, 사물, 혹은 역사적 인물들은 피험자의 근육 반응을 강하게 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 200이라는 수치야말로 끌개가 강하냐 약하냐, 영향력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의 분기점인 것이다.
의식의 지도
신의 관점 세속의 관점 수준 대수의 수치 감정 과정
자아 존재 깨달음 700~1000 언어 이전 순수 의식
항상 존재하는 완전한 평화 600 축복 자각
하나 전부 갖춘 기쁨 540 고요함 거룩함
사랑 자비로운 사랑 500 존경 계시
현명함 의미 있는 이성 400 이해 추상
인정 많은 화목한 포용 350 용서 낙관
감화 주는 희망에 찬 자발성 310 낙관 의향
능력이 있는 만족한 중용 250 신뢰 해방
용납하는 가능한 용기 200 긍정 힘을 주는
무관심한 요구가 많은 자존심 175 경멸 과장
복수에 찬 적대의 분노 150 미움 공격
부정하는 실망하는 욕망 125 갈망 구속
징벌의 무서운 두려움 100 근심 물러남
경멸의 비극의 슬픔 75 후회 낙담
비난하는 절망의 무기력 50 절망 포기
원한을 품음 사악한 죄의식 30 비난 파괴
멸시하는 비참한 수치심 20 굴욕 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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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인간의 의식 수준
200 이하의 수준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삶의 태도는 '살아남기' 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수준은 가난과 결핍에서 비롯되는 절망과 우울의 영역이다. 그보다 높은 '분노'와 '욕망'의 단계에 이르면, 개인은 생존을 위해 자기 본위의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자존심'의 수준에 이르면, 살아남으려는 본능이 다른 사람에게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최초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긍정과 부정의 갈림길이 되는 '용기'의 수준에 이르면, 다른 사람들의 안녕이 점차 중요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500의 수치에 이르면,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고려하게 되어, 그것이 그 사람을 움직이는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600대에 가까워지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눈뜸에 관심을 갖게 되고, 600대에 이르면 인간의 선과 깨달음을 위한 추구가 삶의 기본적인 목표가 된다. 700에서 1000까지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한 삶이다.
앞의 도표를 봄으로써 우리는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는지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겉보기에는 가치가 없어 보이는 태도들도 검증해 보면, 딱히 좋다거나 나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도덕적인 판단이란 수준이 높아진 상태에서만이 뒤를 돌아다보면서 할 수 있는 기능인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슬픔'에 차 있는 사람(에너지 레벨 75)은 '분노'의 수준(150)에 올라감으로써 휠씬 진전된 상태에 도달한다. 분노 자체는 파괴적인 감정이고 낮은 수준의 의식 상태이지만, 사회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개인뿐만 아니라 소문화권도 질식시킬 수 있는 '무기력' 상태보다는 더 활기찬 에너지라 할 수 있다.
절망에 찬 사람들이 절망을 벗어나서 어떤 것을 원할 수만 있다면('욕망'125), 그런 후 다시 '분노'(150)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자존심'(175)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면, 200의 수치로 측정되는 '용기'의 단계까지도 충분히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용기'의 수준은 개인이나 집단적인 상태의 개선을 비로소 생각하게 되는 분기점이다.
반면에, 조건 없는 '사랑'의 상태에 이르러 사랑이 주는 것이 생활화된 사람에게는 그 이하의 수준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개인의 의식 향상을 위해 나아감에 따라 우리의 생각은 향상의 방향으로 저절로 계속되고, 또 저절로 좋은 방향으로 개선되어, 결국은 자아 향상이 우리의 생활 자체가 된다.
이러한 현상은 자기 연민이나 편협성 같은 부정적인 태도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자조自助 그룹의 회원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다. '의식의 지도'에서 하위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기 연민이나 편협성 등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또 그들의 생각을 정당한 것으로 믿고 수호한다.
* 이 도표가 가져다주는 인식론적인 효과는 미묘하긴 하지만 광범위하다. 스포츠, 의학, 심리학, 정신의학, 인간 관계와 행복에 대한 일반적인 탐구에 이르기까지 실용적으로 쓰여질 수 있다. 의식의 지도를 숙고하여 들여다봄으로써 인과관계에 대한 새로운 자각도 싹틀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의식 수준과 더불어 의식의 지도를 들여다보는 인지 능력도 향상되어서, 세상 사람들이 흔히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사실은 '결과물' 이라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 자기 자신이 인식한 결과물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됨으로써 그 사람은 비로소 피해자의 입장을 초월하여 '나를 지배하는 외부의 어떤 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이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인지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인지, 배움의 기회로 작용할 것인지 우리를 억압하는 요소로 작용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태도인 것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란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에 저항하거나 도피하고자 함으로써 스스로를 그물에 가두는 데서 생겨나는 것일 뿐,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 자체에 어떤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스트레스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혈압을 올리는 시끄러운 음악이 다른 사람에게는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이혼도 원하지 않을 때에는 큰 아픔이 되지만, 원하는 사람에게는 해방을 뜻한다.
오랜 세월 동안 수백만 번에 걸친 시험을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태도와 감정들의 수준을 정확한 숫자로 나타낼 수 있었다.
우선 측정 숫자가 산수의 값이 아닌 대수의 값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따라서 수준 300은 150의 두 배가 아니라, 300의 10승을 말한다. 그러므로 아주 작은 수치가 증가하더라도 그 잠재력은 굉장한 진보를 이룩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69
에너지 수준 20: 수치심
수치심의 수준은 위험할 정도로 죽음과 가장 가까운 상태로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지만, 자살을 할 수도 없으니 마지못해 살아간다는 식의 자세이다. 이 수준의 공통점은 죽음이라는 것을 피하고 있을 뿐이다. '체면을 잃었을 때'의 아픔이나, 모욕을 당하거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을 때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수치심'의 단계에서는, 자기 자신이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슬그머니 도망친다. 원시 사회에서는 수치스런 죄를 저지른 자를 추방했으며, 추방이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성폭행과 같은 어린 시절의 경험은 '수치심'을 초래하므로 이를 치유하지 않으면 그 피해가 평생 계속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수치심은 신경증을 초래한다. 또한 정서적-심리적 건강에 파괴적으로 작용하여 열등감에 사로잡혀 지내게 되며, 이로 인해 신체적 질병으로까지 발전하기 쉽다. '수치심'이 성격의 바탕이 되면 수줍음을 잘 타고 내성적이며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수치심'은 잔인성의 도구로 쓰이며, 여기에 희생된 피해자는 자기 자신들 또한 잔인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수치심'에 찬 어린이들은 동물을 학대하고, 자기들끼리도 잔인하게 굴곤 한다.
'수치심'이 바탕이 되는 성격의 사람들은 융통성 없는 완벽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수치심을 보상하려고 하며, 무엇에 사로잡힌 것같이 자신을 몰아간다. 수치심에 사로잡힌 과격한 도덕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무의식적인 수치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영하여 그들을 공격함으로써 자신들을 정당화시킨다. 연쇄살인자들은 '나쁜' 여자들을 벌하여 성도덕을 세운다는 미명하에 자신을 정당화시키면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잦다.
수치심은 개인의 전체 수준을 끌어내리기 때문에 다른 부정적인 감정에도 영향을 받기가 쉽고, 자만심이나 분노, 죄의식을 낳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70-71
에너지 수준 30: 죄의식
처벌과 농간의 수단으로 우리 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죄의식'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자기 연민이나 자기 학대, 피해 의식에서 생기는 여러 증상들이 바로 그것이다. 무의식적인 죄의식은 정신 이상에 원인이 있는 신체의 질병을 초래하고, 사고를 저지르기 쉽고, 자살을 감행하기도 한다. 전생애를 바쳐서 죄의식과 싸우는 사람들도 많고, 죄의식을 전면 부인함으로써 필사적인 도피를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역시 죄의식의 소산이다.
'죄의식'에 가득 찬 사람들은 종교 단체의 선동자들에 의해 강요당하고 조종당하기 쉽다. '죄와 구원'을 파는 파렴치한들은 응징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죄의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덮어씌우는 경향이 짙다.
자학성이 심해지면 공공연한 동물 학살로 잔인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죄의식은 분노를 일으키고, 살상은 이러한 분노의 표현이 된다. 사형이란, 죽이는 행위가 죄의식에 물든 사람들을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용서에 인색한 미국 사회는 그 죄인들을 언론으로 실컷 두들긴 후 형벌을 결정한다. 하지만 형벌 때문에 범죄가 억제되었다는 사례는 지금껏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에너지 수준 50: 무기력
이 수준은 빈곤, 절망, 자포자기로 특징지어진다. 현재와 미래가 황폐해 보이고, 비애가 인생의 주제로 보인다. 이 단계는 아무 희망이 없는 상태로서, 여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도움이 필요하나 그 도움조차도 그들에게는 쓸모없게 느껴질 뿐이다. 보살펴주는 사람에 의해 외부의 에너지가 조달되지 않는 한, 무기력에 의한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살려는 의욕 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자극에 무감각하며, 시선은 더 이상 사물을 좇지 않고, 주어진 음식을 삼킬만한 에너지가 없는 상태에 이른다.
집도 없이 헤매는 사람들과 사회의 낙오자가 이 수준에 속한다. 나이 든 노인들의 체념 상태이기도 하고, 또 만성 질병이나 심한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의 수준이기도 하다. 무기력한 사람들은 의지해야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들을 무거운 짐처럼 느끼기가 쉽다.
사회에서는 자원의 낭비로 보이는 이 수준의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만한 동기를 갖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조차 갖기 힘든 희망의 포기 상태이다.
에너지 수준 75: 슬픔
이 상태는 슬픔, 상실, 낙담의 수준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경험을 하지만 이 수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되는 후회와 우울함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비탄, 공허, 그리고 과거에 대한 후회가 이 수준을 지배한다. 실패를 생활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만성적인 도박 등으로 돈, 건강, 직장, 친구, 가족, 기회를 잃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어렸을 때의 커다란 상실은 슬픔과 비탄을 삶의 필요악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쉽게 만든다. 비탄에 빠진 사람들은 만사를 슬픔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린이들이 자라는 것도 슬프고, 세상 만사 돌아가는 것도 슬프고, 삶 자체가 슬프다. 바라보는 모든 것이 슬픔으로 채색된다. 잃은 것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으며 그 기억은 영원히 사라질 수 없다는 생각이야말로 상실이 가져다주는 가장 큰 폐해이다. 그들은 하나를 잃어버렸으면서도 전부를 잃어버린 양 일반화시키고, 그리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 사랑 자체의 상실이 된다. 그러한 감정적인 상실은 심각한 우울증이나 죽음을 불러오기도 한다.
'슬픔'은 인생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지만 '무기력'의 상태보다는 더 많은 에너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충격받은 무기력증 환자가 울기 시작하면 그것은 회복의 조짐이다. 또 일단 울기 시작하면 무기력증에서 벗어나 음식을 먹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72-73
에너지 수준 100: 두려움
100의 수준에는 좀더 활발한 에너지가 보인다. 위험에 대한 두려움은 건강한 반응인 것이다. 세상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고, 그런 두려움이 인간을 활동하게 하는 원천이 되기도 하다. 적에 대한 두려움, 늙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거절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사회적인 다수의 두려움은 인간 행동의 근본적인 동기가 된다.
이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위험해 보이고, 함정과 위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려움은 독재자가 민중의 통제를 위해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도구이고, 불안감의 조성은 시장을 독점하려는 회사들의 상투적인 수단이다. 언론이나 광고업계들도 두려움을 점유하여 시장 점유율을 늘리고 있다.
두려움의 확산은 인간의 상상력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다. 일단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세상은 온통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두려움은 강박관념이 되어 여러 가지 형태로 번져간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끝나는 데 대한 두려움은 질투를 유발하고, 만성 스트레스를 초래한다. 두려움은 편집증이나 신경증적인 상태로 진전될 수 있고, 전염성이 있어서 사회 전체를 지배할 수도 있다.
두려움은 개인의 성장을 제한하고 억압 상태를 초래한다. 두려움의 수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뚫고 일어설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거기에 짓눌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그보다 높은 수준으로 갈 수 없다. 그러므로 두려움의 수준에 사는 사람들은 이를 극복한 것으로 보이는 강력한 지도자를 희망하며, 그 지도자가 자신들을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기대한다. 73-74
에너지 수준 125: 욕망
욕망의 수준에는 더 많은 에너지가 발견된다. 경제적인 욕구를 위시한 욕망이야말로 인간 행위의 광범위한 동기로서 작용한다. 광고업자들은 본능적인 욕망을 이용하여 육감적인 유혹을 한다. 목표로 달성과 보상을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욕망은 우리를 다그친다. 금전, 명예, 권력에 대한 욕망은 '두려움'의 수준을 벗어난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욕망은 또한 집착의 수준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에서 때로는 욕망이 인생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 동기가 어디에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끊임없이 요구를 함으로써 사랑과 관심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성적인 매혹에 대한 욕구는 화장과 패션 산업의 번영을 불러왔다.
욕망이란 축적이나 탐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욕망이란 언제나 계속되는 에너지 장이기 때문에 만족이란 있을 수 없으며, 하나를 채우고 나면 다른 무엇인가를 또 채우고 싶어진다.
욕망의 수준이 무기력이나 슬픔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인 것은 분명하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원하는'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TV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무기력'에 빠진 사람들에게 '갖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더 나은 삶을 추구하도록 만든 것이다.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사람은 성취로 가는 출발선에 설 수 있다. 욕망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더 높은 수준으로 뛰어오르는 도약대가 될 수 있다. 75
에너지 수준 150: 분노
분노는 살인이나 전쟁으로 발전할 수도 있지만, 에너지 수준 자체는 죽음의 주위에서 맴도는 단계에서 훨씬 벗어난 상태이다. 분노는 파괴적일 수도 있고 건설적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무기력'이나 '슬픔'에서 벗어나 '두려움'을 극복하는 상태에 이르면, 이제 그들은 무엇인가를 원하기 시작한다. '욕망'은 좌절감을 초래하고, 좌절감은 '분노'를 가져온다. 그런 이유로 '분노'는 억압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 사회에 대한 희생은 분노를 유발하고, 그것이 사회 구조에 대변혁을 가져온 커다란 사회 운동으로 발전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분노'는 흔히 분개나 복수로 표현되고, 따라서 폭발적이고 위험하다. 성급한 사람들, 즉 사소한 일에 과민하고 못된 짓만 하고 잘 싸우고 소송을 일삼는 사람들이 이 '분노'의 수준에 속한다.
'분노'는 좌절된 욕구에서 생기므로 그 아래 수준인 욕망의 에너지 장에 기초를 두고 있다. 좌절은 지나친 욕망에서 온다. 분노는 증오로 전환되기 쉽고, 증오는 한 개인의 삶 전체를 부식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76
에너지 수준 175: 자존심
175로 측정되는 '자존심'은 미국 해병대를 통솔할 만한 충분한 에너지 수준이다. 이것은 미국 국민이 대부분 동경하는 수준이다. 이 수준에 이른 사람들은 낮은 에너지 장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훨씬 긍정적이다. 자존심의 향상은 낮은 의식 세계에서 그들이 경험한 모든 고통의 진통제가 되어 준다.
자존심은 '수치심', '죄의식', 혹은 '두려움'에서부터 비약한 상태이다. 그래서 자존심은 좋은 덕목으로 평가받으며 사회적으로 권장되고 있다. 그러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존심은 분기점인 200을 훨씬 밑도는 수준이다. 더 낮은 수준에 비교할 때에만 좋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자존심의 팽만은 추락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점이다. 자존심이 약점 투성이인 것은, 자존심이란 외부 조건에 의존해서 생기는 것이며 또 그것 없이는 언제라도 낮은 수준의 의식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부풀어오른 자존심은 비난에 약하다. 자존심은 아주 쉽게 '수치심'의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여전히 약한 수준이다.
'자존심'은 분열과 파벌주의를 초래하며, 그래서 큰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람들은 '자존심'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치러 왔으며, 군대는 지금도 애국심이라는 '자존심' 아래 서로를 죽이는 짓을 멈추지 않고 있다. 종교 전쟁, 정치적인 테러리즘, 중동과 중유럽의 광적이고 무서운 역사는 '자존심'의 대가이고, 사회 전체가 치러야 했던 벌이었다.
'자존심'의 약점은 오만과 부정(否定)이다. 이러한 특성상 '자존심'에 가득 찬 사람들은 의식의 성장을 스스로 차단한다. '자존심'이 있는 한 집착에서 해방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존심에 가득 찬 사람들은 감정적인 문제임에도 그것을 부인하거나, 자신의 성품이 갖고 있는 약점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정하는 문제의 근원에는 '자존심'이 자리잡고 있다. '자존심'은 진실한 성장과 명예를 안겨줄 수 있는 참된 내면의 힘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인 것이다. 77
에너지 수준 200 용기
200의 수준에서는 내면의 참된 잠재력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에너지 수준 200 이하인 피험자들 모두가 약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기술한 바 있다. 우리는 이 수준에서 비로소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갖기 시작하며, 이 단계야말로 탐구, 성취, 인내, 결단의 영역이다. 이보다 낮은 수준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희망이 없고, 슬프고, 무섭고, 좌절감으로 가득 차 보인다. 하지만 '용기'의 수준에 이르면 인생이 흥미롭고, 도전적이고, 자극적인 것이 된다.
'용기'는 우리에게 기꺼이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게 도와주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긍정적으로 전환시켜 준다. 이 수준에 이르러 우리는 비로소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기회를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이 수준에 이르면 두려움이나 성격의 결함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 두려움이나 결점에도 불구하고 성장할 수 있으며, 걱정하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낮은 의식 수준에서와는 달리 노력 자체를 마비시키지는 않는다. 200 이하의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마는 장애물을 만난다 할지라도 잠재력을 갖기 시작한 이 수준의 사람들은 이를 자극제로 활용한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자기가 흡수하여 소모하는 에너지만큼 세상에 그 에너지를 돌려보낸다. 무엇인가를 성취함으로써 또다른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힘을 얻고 더욱 더 용기백배하게 된다. 바로 이 수준에서 비로소 생산성이 생기기 시작한다.
인류의 전체의식 수준은 오랫동안 190에 머물렀으나, 20년 전부터 204의 수치로 괄목할 만한 비약을 보여주고 있음은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에너지 수준 250: 중용
이 수준이 매우 긍정적인 에너지인 것은, 낮은 수준의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편파적인 관점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기 때문이다. 250 이하의 수준에서는 사물을 이원적이고 융통성 없는 관점으로 바라보며, 이 때문에 흑과 백으로 분명히 가를 수 없는 복잡다단한 세상사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편파적인 태도는 극단적인 대립을 초래하고, 대립은 분열과 반대를 낳는다. 동양 무술에서도 유연하지 않은 동작은 큰 약점으로 취급된다. 구부릴 줄 모르는 완고함은 그만큼 부러지기 쉬운 것이다.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반대와 장애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중용'의 태도는 유연성과 포용력,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파악 능력을 갖게 해준다. '중용'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우리는 결과를 비교적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또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패배하거나 좌절하거나 놀라는 일도 없게 된다.
'중용'의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가 이 직장에 못 들어가면 다른 직장에 들어가면 되지"라고 생각한다. 이 단계는 내면의 자신을 신뢰하는 출발점으로서, 자신의 잠재력을 느끼기 시작하며, 쉽게 위협을 느끼지도 않는다.
'중용'의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끼고,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자기 신뢰를 잃지 않는다. 함께 지내기가 쉽고, 친하게 지내더라도 전혀 위헌하지 않다. 그들은 대립이나 경쟁 심리, 죄책감 등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화하고 근본적으로 정서가 안정되어 있다. 그들의 태도는 비난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싶다는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중용'에 다다른 사람들은 자유를 아주 중시하므로, 그들을 규제하려는 일은 아주 어렵다. 78
에너지 수준 310: 자발성
매우 긍적적인 이 수준의 에너지는 더 높은 수준에 이르기 위한 관문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용'의 단계는 직장의 일이 적절하게 굴러가는 수준이지만, '자발성'의 단계는 주어진 과제가 훌륭히 이루어지고 성공의 결실을 맺는 수준이다. 성장이 빠르고, 마치 향상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보인다.
'자발성'이란 인생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저항을 극복하고 기꺼이 참여하는 마음이다. 이들은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 있어 다른 사람들을 진실로 친절하게 대하고, 사회적·경제적 성공이 저절로 따른다. '자발성'의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실직을 해도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들은 밑바닥 일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며 사회의 선에 이바지한다. 그들은 또한 내면의 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배움에 장벽을 두지 않는다.
이 수준에 이르면 자긍심이 높고, 이것은 사회적인 인정, 존중, 또는 보상 등에서 오는 반응에 의해 보강된다. '자발성'이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기꺼이 응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들은 사회를 움직이고 사회에 기여한다. 곤경으로부터의 회복 능력, 시련을 통한 배움을 통해 이들은 자기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수준으로 향상한다. 그들은 '자존심'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결점을 기꺼이 바라보려고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기꺼이 배우려고 한다. 이들은 아주 훌륭한 학생들이며 또 쉽게 가르칠 수 있어서, 사회의 아주 중요한 자원이 된다. 80
에너지 수준 350: 포용
이 수준에 이르면 우리 자신이 인생의 모든 경험을 창조하고 원천이 된다는 이해를 하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책임감이야말로 이 단계의 특징으로, 인생의 여러 외적인 힘에 대응하면서도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200 이하의 사람들은 무력하며, 자신들을 인생이란 폭군의 피해자로 바라보기 쉽다. 이러한 생각은 자신의 행복이나 문제의 근원이 '밖'에 있다고 믿는 데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 수준에 이르면 행복의 근원이 자신 속에 존재한다고 깨달음으로써 커다란 도약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외부'의 그 어떤 것도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 또 사랑이란 다른 사람들에게서 오거나 그들에 의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게 된다.
'포용'이란 무기력의 형태인 무저항과는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포용'이란 슬프고 기쁜 인생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세상사를 특정한 방향으로 억지로 끌어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포용하는 마음은 감정적인 온화함을 가져오고, 부정의 단계를 벗어나 보고 느끼는 능력을 넓혀 준다. 그들은 이제 사물을 오해나 왜곡의 감정 없이 볼 수 있다. 경험의 의의를 깊게 이해함으로써 결국 사물에 대해 '부분적이 아닌 전체적인 이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포용'이란 군형, 조화, 지나치지 않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포용'의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옳고 그름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문제 해결과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정열을 쏟는다. 어려운 과제나 일을 만나더라도 괴로워하거나 곤혹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눈앞의 목표보다는 장기적인 목표가 항상 중요하고, 자기 훈련과 일의 숙달이 무엇보다 우위에 있다.
'포용'의 수준에 이르면 대립되는 의견이나 갈등에도 극단주의를 택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고 보고, 평등의 가치를 중요시한다. 저급한 수준의 사람들이 융통성 없이 경직된 사고에 사로잡히기 쉬운 반면, 이 수준의 사람들은 문제 해결 과정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형태의 대답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으로써 차별과 편협을 초월한다. 평등이란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에 눈을 뜸으로써, 거부보다는 '포용'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81-82
에너지 수준 400: 이성
이 수준에 이르면 이보다 하위 수준의 감정 단계를 벗어남으로써 지성과 이성이 삶의 전면에 떠오르게 된다. '이성'의 단계에서는 광범위하고 복잡한 자료들을 처리할 능력을 갖고 있어 빠르고 정확한 판단력을 조여준다. 관계의 미묘함, 점진전인 변화와 분명한 차이점이 있는 것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지고, 추상적인 개념과 상징 체계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과학, 의학, 그리고 개념화에 대한 이해 수준이 점차 증가되는 것도 이 수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교육과 지식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추구되곤 한다. 이해와 정보가 성취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된다는 점이, 400 수준의 가장 뚜렷한 특성이다. 노벨상 수상자, 위대한 지도자, 대법원의 판사들이 이 수준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도 이 수준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수준의 결점은 상징과 그 상징이 뜻하는 바를 뚜렷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또 세상사에 대한 객관적·주관적인 이원론 때문에 사물의 인과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이 수준에서는 나무에 가려 숲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쉽고, 개념과 이론의 탐닉에 의해 본질의 중요성을 찾지 못하고 지식 자체로 그치고 마는 경우가 흔하다. '이성'의 수준은 본질이나 복잡한 문제의 핵심에 대한 통찰력을 갖지 못함으로써 한계를 갖게 된다.
이성만으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성은 광범위한 지식과 문헌을 생산해 내지만, 방대한 자료와 결론 사이의 모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 모든 철학 이론은 저마다 그럴듯하게 들린다. 이지적인 방법론이 지배하는 현 사회에서 이성이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설적으로 더 높은 의식세계로 나아가는 데 커다란 장애물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수준을 초월한다는 것은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는 흔치 않는 일이다. 83
에너지 수준 500: 사랑
언론이나 TV에서 묘사하는 사랑은 여기서 말하는 수준의 사랑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란 육체적 매력, 소유욕, 통제, 탐닉, 에로티시즘, 신선함 등의 격렬한 감정과 결합된 형태를 띤다. 그러한 사랑은 속절없이 무너지기 쉽고, 주어진 조건에 따라 파도치곤 한다. 사랑에 좌절하게 되면 그동안 숨겨졌던 노여움과 의존성이 발가벗겨져서 그 정체를 드러낸다.
사랑은 미움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같이 되어 있지만, 이러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지독한 감상주의의 소산에 불과하다. '자존심'에서 비롯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그런 관계 속에서는 사랑이 머무르지 않는다.
500의 에너지 수준은 조건 없고 변함 없고 영원한 사랑에의 눈뜸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사랑이란 외부의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내부에서 그 근원을 찾기에 이 수준에서의 사랑은 오르내림의 파동을 보이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것이 존재 자체가 된다. 사랑은 용서와 보살핌의 세계로 가는 길이다. 사랑은 지적인 것도 아니고, 표면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고양시켜 주고, 그 동기의 순수성으로 인해 크나큰 성취를 이루게 하기도 한다.
이 수준에 이르면 사물의 본질을 분별할 수 있는 역량이 증대하여 문제의 핵심을 꿰뚫을 수 있게 된다. '이성'의 수준을 넘어서게 됨에 따라 문제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전후 과정을 섬세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성은 문제를 일일이 따지는 경향이 있지만, 사랑은 전체를 다룬다.
직감 혹은 육감이라고 불리는 이 사랑의 능력은, 사물을 꼬치꼬치 따지지 않아도 즉각 알아차릴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말하면 추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일어나는 현상 자체는 아주 구체적이다. 사랑의 느낌을 가지면 뇌에서는 엔도르핀endolphin이 분비된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진 바 있다.
사랑은 신분이나 입장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가진다. 사랑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있을 수 없기에 '너와 나의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 사랑이란 모든 것을 감싸안고, 자아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켜 준다. 사랑은 삶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하여 삶을 힘차게 긍정하게 한다. 사랑은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공격하거나 비난하기보다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여 그것을 녹여 버린다.
이 수준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단계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도 열심히 사랑이라는 주제에 매혹당하고 있고 현존하는 모든 종교가 500 혹은 그 이상의 수치로 측정됨에도 불구하고, 세계 인구의 0.4%만이 이러한 수준의 의식 세계에 도달한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84-85
에너지 수준 540: 기쁨
'사랑'에 조건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내면의 '기쁨'이 점차 차오르게 된다. 이 수준에서의 '기쁨'이란 사건의 갑작스런 즐거움이 아니라, 모든 활동에 동반되는 항구적인 것이다. 기쁨이란 외부의 어딘가에 근원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매순간마다 솟구치는 것이다. 540의 수준에서는 치유가 시작되며, 영적인 자조 그룹은 이 수준에 속한다.
540 이상부터는 성인, 영적 치유자, 그리고 그 제자들의 영역이다. 이 에너지 장의 특징은 계속되는 역경 속에서도 인내하고,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수준의 특징은 이들이 갖는 자비의 마음 상태이다. 이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이들에게는 사랑과 평화를 널리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 수준에 이르면 창조의 정교한 아름다움과 완전함에 눈뜨게 된다. 세상 만물은 억지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랑과 신성의 표현이다. 이 세상 모든 개개인은 신의 뜻에 따라 생명을 부여받았고, 신성 안으로 녹아들어 갈 것이다. 이들은 우리들이 기대하지 못하는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에너지 장의 잠재력이 발현된 것이지, 어느 한 개인의 힘은 결코 아니다.
이 수준에서 느끼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은, 이보다 낮은 수준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어느 특정한 개인보다는 생명 자체의 유익을 위해 쓰려는 강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 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이런 능력은,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사랑의 능력도 증폭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사망 선고를 듣고도 다시 살아난 사람들은 그 경험을 통해 삶의 전환점을 맞이한 사람들이 적지 않고, 또 그들 중 대부분은 540~600의 에너지 수준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86
에너지 수준 600: 평화
이 에너지 장은 초월이나 자아 실현, 신 의식 등의 용어로 묘사되는 경험과 깊이 관련된다. 이 수준은 천만 명 중 한 명 꼴로 나타나는 아주 드문 현상이다.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주관과 객관의 차이가, 또 특별한 관점이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복의 상태에 잠겨 있으므로 세상일에 더 이상 흥미를 갖지 않고, 따라서 범인의 생활을 하지 않는다.
영적 지도자가 되기도 하고, 확연히 드러나진 않지만 인류의 개선을 위해 일하기도 한다. 또한 자신의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하여 사회에 커다란 공헌을 하기도 하지만 이는 드문 경우에 속한다. 이들은 성인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어서, 성인으로 추대되는 일이 드물지만은 않다. 기존 종교의 형식을 초월한 이 수준의 사람들은, 모든 종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순수한 영성의 소유자들이다.
600이나 그 이상의 수준에서는 아무것도 멈춰 있지 않는데도, 아니 오히려 발랄하고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는 세사인데도, 세상 전체가시간과 공간이 멈춰 서 있는 가운데 마치 슬로 모션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이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세상과 다를 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세상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무한한 가능성과 의.미로 가득 찬 진화의 춤을 계속 추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놀라운 계시는 이성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의 마음은 그 무엇도 개념화시키는 일이 없이 절대의 침묵에 잠겨 있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구분이 사라지고, 바라보는 사람이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가 풍경과 하나가 된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지금 여기 계시는' 분에 의해 연결되어 있고, 그 분의 힘은 무한하고, 끝없이 온화하고, 그러면서도 바위처럼 견고하다.
600~700의 수치로 측정되는 위대한 미술, 음악, 건축 작품들은 잠깐 동안이나마 우리들의 의식을 더 높은 세계로 고양시켜 주며, 시간을 뛰어넘어 영감을 불어넣는 원천이 되어 준다. 87
에너지 수준 700~1,000: 깨달음
이 수준은 영적 완성자의 단계로서, 수많은 세대를 통하여 군중들이 추종하고 따르며 영성의 원천으로 삼는다. 이 사람들은 신성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이들 자체가 신성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강렬한 영감의 소유자로서, 이들은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주는 끌개 에너지 장을 형성한다.
이 수준에서는 개성을 띤 어느 한 사람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더 이상 분리되는 일이 없다. '진아(Self)'와 '의식'과 '신성'이 하나로 동일시된다. '보이지 않는' 세계조차도 마음을 뛰어넘어 '진아'로서 경험된다. 이렇게 에고를 초월함으로써 인간 완성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는 모범이 된다. 이 수준이야말로 인간의 몸을 입고 도달할 수 있는 최고봉인 것이다.
심오한 가르침은 사람들의 정신을 앙양하고, 인간성의 자극에 눈뜨도록 부추긴다. 이러한 비전을 갖는 것은 '은총'이라 불리며, 이 은총에 의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의 단계에서는 시간과 개별성을 뛰어넘게 된다.
육신인 '나'에 대한 관념이 없어져서, 운명이라는 것에도 연연해하지 않는다. 육신이란 마음의 창문을 통한 의식의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의사 소통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다. 자아는 보다 큰 '진아'에로 녹아 들어간다. 이 단계는 이원성을 뛰어넘는, 완전한 '하나(Oneness)'이다. 의식의 분화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며, 항상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깨달음의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을 묘사한 그림들은 소위 '무드라mudra'라 불리는 특별한 손 모양을 보여주는데, 손바닥에서는 축복의 에너지가 발산되고 있다. 이것은 이들이 축복의 에너지 장을 인류의 의식 세계로 보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신성한 은총은 1,000에 이르는 것으로 측정되며, 역사에 기록된 인간으로서는 가장 높은 수준으로서, 우리가 아는 세 성인에게는 주(Lord)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주 크리슈나(Lord Krishna), 주 부처(Lord Buddha), 주 예수 그리스도(Lord Jesus Christ)가 그분들이다. 88-89
제4장 의식 수준의 사회적 분포
400대의 수준에서는 지성의 눈뜸으로 진정한 식자층이 나타나고, 보다 높은 수준의 교육으로 전문가 층과 과학자, 행정 관리 등이 형성된다. 92
생활 속에서의 임계점 분석
무엇보다도 먼저, 진정한 교사는 개인의 삶을 통제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우리가 어떻게 의식 수준을 높여갈 수 있는가에 중점을 둔다. 노벨상을 받은 수녀 테레사는 700으로 측정되고, 1956년 세상을 떠난 인도의 성인 라마나 마하르시도 같은 수치에서 측정된다. 120
500이나 그 이상의 수치로 측정되는 진실의 수준은 그것이 어디서 나온 것이든 아주 유익한 것이다. 사랑은 500에서 측정되고, 모든 인간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500이상에서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은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진정한 교사라면 물질적인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다.
운동역학 시험의 적절한 사용은 자아발견과 성숙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인간성의 약점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며 이런 약점들과 분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지각할 때, 우리는 우리 모두에게 자비심을 느낀다.
죄의식을 느껴야 마땅할 그 무엇도 없으며, 비난해야 할 그 무엇도 없다. 미워해야 할 사람은 없지만, 피하는 편이 더 좋은 사람은 있다. 맹목적으로 걸었던 길들이지만 점차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의식 수준을 스스로 선택했고, 어느 누구도 주어진 시점에서 달리 선택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곳'으로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도약은 도약의 발판을 필요로 한다. 고통은 진화를 위해 존재한다. 축적된 아픔은 결국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한다. 물론 그 작용이 매우 느리긴 하지만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고통이 필요하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인간의 고통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리하여 배움을 얻기까지 그토록 기나긴 시간이 필요한 것은, 바닥까지 내려가야만 바닥을 치고 솟아오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인간의 문화는 진화의 발걸음을 한 걸음씩 내딛고 있는 것이다. 122
우리는 생명 자체이다. "너에게 좋은 것은 나에게도 좋다"는 말은 과학적으로도 사실임에 틀림없다.
자신과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소박한 친절은, 각자의 의식 수준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 이러한 친절은 반발을 불러오는 법이 없고, 의식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법도 없으며, 상실이나 절망을 불러오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친절이 최대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찬절을 베푸는 데 있어서 어떠한 예외가 있어서도 안 되고, 적당히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한 수단으로 쓰여서도 안 된다. 대가 없이 베푸는 친절의 힘은 끝없이 멀리 퍼져 나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끼리끼리 모이고', '동종의 사람들끼리 회합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 또한 동종의 사람들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행동의 결과는 생각지도 않은 방향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가 베푼 작은 친절이, 1년 후 황량한 고속도로에서 만난 낯선 사람의 도움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눈에 보이는 '이것'이 눈에 보이는 '저것'의 원인이 되는 법은 거의 없다. 우리가 우리의 행동이나 동기를 바꿀 때, 이 변화는 에너지 장에 작용하여 좋은 방향으로 반응을 초래할 가능성을 높여 준다. 내면의 추구는 은행구좌에 계속 적금을 하는 것과 같지만, 그렇다고 그 구좌에서 아무 때나 돈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적금의 배급은 저축된 힘을 생에 돌려줄 기회를 항상 기다리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에 의해 결정된다. 123
제8장 잠재력의 근원
자세히 살펴보면 잠재력은 의미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행동 동기와 깊이 관련되어 있고, 원리 원칙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잠재력은 우리가 고귀하다고 여기는 인간의 본성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표면 의식의 힘은 우리가 어리석고 우둔하다고 부르는 본성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
잠재력은 정신의 앙양과 고귀함에 호소한다. 표면의 힘은 언제나 합리성과 정당성을 요구하지만, 잠재력은 정당화 과정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표면의 힘은 부분과 관계가 깊지만, 잠재력은 전체와 관련이 되어 있다.
표면의 힘의 본질을 분석해 보면 왜 항상 표면의 힘은 잠재력에 굴복하게 되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기본적인 물리 법칙의 힘과도 서로 상응한다. 표면의 힘은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므로 그 힘의 효과는 애초부터 한계가 있다. 표면의 힘을 우리는 운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힘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이거나, 반대의 힘에 저항하여 여기에서 저기로 가려고 하는 힘이다. 반면에, 잠재력은 정적 자체이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장(場)과도 같다.
표면의 힘은 불완전하고 에너지 공급이 항상 필요하다. 잠재력은 전체이고 완전하므로 외부의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는다. 잠재력은 자비심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우리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표면의 힘은 판단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우리 자신에 대해 나쁜 느낌을 갖게 한다.
표면의 힘은 항상 이에 반하는 또다른 힘을 초래하며, 하나로 만들지 않고 분열시킨다. 분열은 언제나 갈등을 의미하며, 항상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표면의 힘은 분열을 초래하기 때문에 반드시 승패의 가름을 요구하고, 누군가는 패배하게 되어 있으므로 항상 적이 생기기 마련이다. 끊임없이 적과 대면해야 하므로, 표면의 힘은 늘상 방어의 자세가 필요하다. 경제든 정치든 국제 문제든, 방어를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비용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 128
자존심, 목적의 고귀함, 삶의 질을 위한 희생, 이 모든 것은 감동적이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덕목들이다. 그러나 물질적인 세상에서 실제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들은 우리에게 강력한 의미를 주는 개념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그러한 상징들 때문에 우리의 행동 동기를 추상적인 원칙에 갖다붙이곤 한다. 하나의 상징은 엄청난 잠재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이는 우리의 의식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원칙 때문이다.
삶에 의미를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삶에 의미를 잃은 사람들은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삶에 의미가 없어지면 절망에 빠지게 되고, 완전한 의미를 상실하게 되면 삶을 저버리게 된다. 표면의 힘은 일시적인 목표는 갖는다. 하지만 목표가 달성된 후에는 무의미한 공허만이 남게 된다.
반면에, 잠재력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동기 부여를 한다. 모든 사람의 복지와 안녕의 향상을 위해 인생을 바친다면 우리의 인생은 결코 의미를 잃는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 경제적인 성공에 있다면, 성공을 한 이후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중년 남녀들이 보여주는 우울증의 가장 흔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환상이 깨지는 공허감은 잠재력이 발산되는 원리 원칙에 자신의 삶을 맞추어 놓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128
영감은 창조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고, 들이포개진 우주는 인간의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은 의미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마음과 물질에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루퍼트 셀드레이크의 형태발생의 장, 혹은 M-장에 관한 가설 또한 잠재력의 이해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장은 에너지의 주형(鑄型)처럼 작용하여 생의 다양한 수준과 형태를 만들어 준다. 같은 종(種)에 속하는 동물이나 식물이 똑같은 형상을 갖는 것은 바로 M-장의 작용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M-장과 비슷한 그 어떤 것이 우리의 생각이나 영상에 깔려 있고, 의식의 장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형성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M-장이 배움에 도움을 준다는 것은 광범위한 시험을 거쳐 입증되었다.
로저 배니스터는 1마일을 4분 이내에 주파함으로써 새로운 M-장을 창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간의 의식에 존재하는 믿음 체계는 1마일을 4분 이내에 주파할 수는 없다는 인간 가능성의 한계였다. 새로운 M-장이 생겨나자 많은 주자들이 갑자기 4분 이내의 기록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131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같은 생각을, 그것도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는 현상이 적잖게 일어나고 있다. M-장은 자석의 자력과도 같이 잘 조직된 원칙으로 작용한다. 132
사랑·자비·용서는 어찌 보면 굴욕과 패배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강력한 힘이다. 복수·비난·힐난 등은 예외없이 약한 반응을 가져온다.
인류 역사를 통해 진정 위대한 사람들은 강력한 끌개가 이끄는 대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감복하는 위대한 힘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들은 그 힘의 근원을 자신이 아닌 좀더 큰 근원으로 돌리곤 했다.
인류가 형성된 이래 모든 위대한 교사들은 오직 한 가지만을, 시대나 언어는 달랐지만 오직 한 가지만을 거듭 가르쳤을 뿐이다. '강력한 끌개를 위해 약한 끌개를 포기하라' 135
제2부 연구
제1장 삶의 자세와 잠재력의 패턴
한 사람이 동굴에 홀로 앉아 있어도 그의 생각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삶을 돕기 위해 행해지는 행동과 결정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삶에 도움을 준다. 우리가 만드는 물결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온다. 이러한 얘기가 한때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취급되었지만, 이제 이 현상은 과학적인 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우주의 모든 것은 특정한 파장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이 에너지 패턴은 영구히 존재하며, 그러한 원리를 아는 사람들에 의해 읽혀질 수 있다. 모든 언어·행동·동기가 영원한 기록을 남기게 된다. 모든 생각은 저절로 알려지게 되고, 영원한 기록으로 남는다. 거기에는 어떠한 비밀도 없다. 우리의 영혼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시간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서 있다. 우리는 결국, 저마다 우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143
제2장 정치와 잠재력
45킬로그램의 가냘픈 '유색 인종' 간디는 혼자만의 힘으로 지구의 2/3의 인구를 지배하던 가장 거대한 대영제국을 굴복시켰다.
간디는 대영제국을 굴복시켰을 뿐만, 오래된 식민주의의 철폐를 불러왔으며, 이 위업을 단지 원칙의 고수에 의해 성취했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 주권, 그리고 자결권이 그가 주창한 원칙들이다.
폭력은 표면의 힘이다. 간디는 표면의 힘이 아닌 잠재력으로 움직였으므로,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도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보편적인 법칙(700의 수치)에 호소함으로써 사람들의 의기를 투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의지가 자신들이 믿는 원칙에 입각해서 뭉치게 되면, 이것에 대한 정복은 불가능해진다. 식민주의(175에서 측정)는 통치국가의 이익 추구라는 원칙에 의해 운영되었다. 간디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기 희생이라는 잠재력과 이기주의라는 표면력이 대립되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었다. 145
사회의 잠재력과 삶이라는 경기
1930년 초반의 유능한 미국 사업가인 롤랜드 H.는 알코올 중독을 고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했지만 효과가 없어 결국 스위스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칼 융을 찾아가게 되었다. 융은 이 사람을 1년 정도 치료한 결과 어느 정도의 진전을 볼 수 있었다. 롤랜드는 큰 희망을 안고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곧 알코올 중독이 재발하고 말았다.
롤랜드는 스위스로 돌아가 융에게 치료를 계속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융은 겸손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신의 과학이나 예술로는 더 이상 그를 도울 수 없지만 인간의 역사를 볼 때 사람들이 자신을 버리고 영적 조직이나 신의 가호에 모든 것을 맡기게 되면 가끔씩은 회복의 기적이 찾아오기도 했다고.
롤랜드는 큰 실망을 안고 미국으로 돌아왔지만 융의 조언에 따라 옥스퍼드 그룹을 찾게 되었다. 그들은 삶의 문제를 정기적으로 토론하는 개인들의 집합이었으며, 나중에 알코올 중독자 갱생의 회원들이 자신들의 원칙으로 받아들였던 영적인 원칙을 갖고 있었다.
이로 인해 롤랜드는 결국 치유되었고, 그의 치유는 가망 없는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인 애드윈, 일명 '에비Ebby'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었다. 롤랜드가 에비에게 치유의 경과를 말하고 난 후 에비 또한 똑같은 방법으로 치유되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이 형식은 에비에게서 그의 친구인 빌에게 전파되었다. 172-173
제6장 예술과 잠재력
예술이 인간에게 주는 유산은 내면적인 것이다. 예술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과 민감성이 자라나기 시작하며, 혼란한 세상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게 되고 기쁨을 갖게 된다. '예술'과 '사랑'이야말로 인류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음악으로 유명한 에스토니아의 현대음악 작고가인 아르보 파르트Arvo Part가 자신의 작곡 과정을 묘사한 글은, 끌개 패턴이 천재적 예술인들에게 어떻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잘 보여준다.
곡을 쓰려면 오랫동안 뜸을 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어떤 경우엔 5년이 걸리기도 한다…… 나의 삶 속에서, 나의 음악 속에서, 나의 작업 속에서, 나의 어두운 시간 속에서, 나는 '이 한 가지'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느낌엔 사로잡히곤 한다. 복잡성과 다면성은 나를 혼돈시킬 뿐이다. 나는 모든 것이 일치된 하나의 조화점을 찾아야 하나고 느낀다.
내가 느끼는 이 한 가지는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찾을 수 있는가? 이것은 여러 가지 변장을 하고 그 흔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모든 것은 떨어져 나가고…… 나만 홀로 침묵과 더불어 존재한다. 오직 하나의 음만이 연주될 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다. 시간과 무시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순간과 영원은 우리들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 179
세계적인 건축물 중에서도 성당은 특별한 경외의 대상이 된다. 성당의 에너지는 모든 건축물 중에서 가장 높은 수치로 측정된다. 이것은 몇 가지 요인에 의한 것 같다. 성당은 음악·조각·그림·공간 설계 등 여러 예술적 요인이 결합되어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당은 신에게 봉헌된 건물이다. 창조주의 이름으로 생겨나게 된 것들은 가장 높은 끌개 패턴을 보여준다. 성당은 우리들에게 영감을 줄 뿐 아니라 인간 내면의 가장 고귀한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하고, 가르치고, 상징하며, 그것을 위해 봉사한다. 180
제7장 천재와 창조의 잠재력
우리가 천재라고 일컫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아주 간소한 것이 보통이다. 그들은 삶을 존중하고, 사물의 표면보다는 근본적인 가치를 보기 때문에 독창성의 자원과 경제성을 중시한다. 시간과 자원이 귀중한 그만큼 필요 이상의 노력은 낭비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천재들은 조용한 생을 즐기며,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미 그것을 '갖고' 있을 때 '가지려고 하는' 노력은 필요치 않다. 천재는 끝없는 공급원과 잇닿아 있으므로 최소의 것만을 필요로 할 뿐이다. 187
인간의 역사란 천재들이 보기에는 너무도 명백한 진실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투쟁 기록이다. 천재란 높은 에너지 끌개 패턴에 접근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특징지워지는 의식의 한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어느 개인의 특성이 아니다. 천재란 어느 개인이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누군가가 '천재인' 것도 아니다. 우리가 천재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보통 이를 부인한다. 천재의 전형적인 특징은 겸손이다. 천재들은 자신들의 통찰력이 뭔가 높은 데서 온 영향 때문이라고 말한다.
천재성이 활활발발 발휘되기까지의 과정에는 공통된 과정이 있다. 그들은 맨 처음 의문을 품고 그 의문을 해결할 때까지 무한정 기다린다.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은 언어가 아닌 다른 형태로 한 순간에 해답을 얻는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음악가들은 음악을 계획한 적이 없다. 마음 속에서 들은 것을 적은 것으로 모든 과정이 끝났다고 말한다. 184
창조성과 천재성은 의식세계에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 속에 똑같은 의식의 정수가 들어 있는 것처럼, 천재 또한 모든 인간 속에 잠재되어 있다. 천재성은 자신을 발현할 수 있는 여건이 무르익기를 기다릴 뿐이다.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동안 천재의 순간을 경험한다. 우리는 별안간 아주 명석한 결정이나 행동을 하며, 이유를 알 수 없이 그 순간에 적절한 말을 찾아내곤 한다. 뜻밖의 상황에서 뜻밖에도 잘 대처하고 나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칭찬하고 싶은 기분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언행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인식의 변화, 다시 말해서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하거나 패러다임이 바뀜으로써 천재성이 발휘되는 경우가 많다. 해답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근원에 대해서는 시대에 따라, 또 문화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이름이 붙여졌다. 서양 문명에서는 그리스의 여신인 뮤즈를 영감의 원천으로 받아들여 왔다.
갑작스러운 눈뜸에 겸허해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은 천재의 능력을 계속적으로 발휘하게 된다. 이것을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들은 그들의 재능을 잃게 되거나 자신들의 성공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 파멸하고 만다. 높은 수준의 잠재력은, 높은 전압과도 같이,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천재성과 창조는 주관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자아나 에고로부터 나오는 현상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울 수 있다. 에고가 죽는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과해야만 배울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천재성이란 불사조는 풀 길 없는 의문과 아무런 보상도 없는 싸움을 벌인 끝에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 문득 날개를 털고 일어나는 그 무엇이다. 패배로부터 승리가 나오고, 실패로부터 성공이 나오며, 겸손으로부터 진정한 자존심이 나오는 것이다. 187
IQ란 상징과 단어들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학문적인 능력의 평가에 불과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치관은 IQ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천재성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의 연구는, 천재성이란 자신의 목표와 가치를 높은 끌개 에너지의 궤도에 올려 놓는 일이라는 것을 잘 보여 준다.
천재란, 인내, 용기, 집중, 끌고 나가는 강한 힘, 절대적인 정직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 재능 하나로는 천재가 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완전에 가까운 숙달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보통 이상의 헌신이 필요하다. 유명하거나 유명하지 않은 천재들의 공통된 의견은 '네가 제일 좋아하는 분야에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라'이다. 189
제8장 진정한 성공
성공적인 사람들의 인생이란 그들이 이룩한 성취의 전체적인 맥락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반면,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이란 '성공한' 사람들의 건강과 인간 관계를 부패시키는 일이 적지 않다. 부유하고 유명하지만 정신이 황폐화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상에서 일컫는 성공이란 단지 유명세에 지나지 않으며, 유명세가 갖고 있는 파괴력은 매일같이 보도될 정도이다. 유명한 사람들은 결혼 생활의 실패, 약물 중독, 알콜중독, 자살 혹은 예기치 않은 죽음 앞에 굴복하는 일이 많다. 190
우리를 향상시키거나 파멸시키는 것은 성공 자체가 아니다. 성공을 우리의 인격체에 어떻게 융화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자만심이냐 겸손이냐, 에고의 강화냐 감사하는 마음이냐, 우리의 재능 때문에 우리 자신을 남들보다 낫다고 평가하느냐 아니면 우리의 재능을 감사의 대상으로 돌리느냐 하는 이 모든 것이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191
완전한 자신감은 성공의 근원이 '여기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온다. 잠재력의 근원이 자신이 아닌 밖에 있다고 믿을 때 개인은 나약해지고, 상처받기 쉬우며, 방어적이 되고,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 된다. 참된 성공은 외부의 조건과는 상관없이 내면에서 우러나오게 되어 있다.
193
지혜란 높은 힘을 가진 끌개 패턴과 결합한 결과물이다. 일상 생활에서는 에너지장이 혼합된 형태로 나타나지만, 가장 높은 힘을 가진 패턴이 우세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비선형 동역학과 끌개 이론에 대한 기초 개념인 '끌개는 전체적인 상황을 창조한다'는 말을 탐구해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위임받은 원칙에서 생겨난 그 사람의 동기가 그 사람의 이해 능력을 결정하고, 그로써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의미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195
제9장 건강과 잠재력
여기서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정신과 육체의 건강은 긍정적인 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반면, 정신과 육체의 질병은 노여움·시기·적대감·자기 연민·공포 같은 부정적인 태도와 관계가 있다. 정신의학의 분야에서 볼 때, 긍정적인 태도는 소위 '복지(welfare)의 감정'이고 부정적인 태도는 '응급(emergency)의 감정'이다. 198
냉소적인 태도로써는 비관적인 인생관을 극복할 수가 없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에는 임상적인 근거가 있다. 끌개 패턴은 그 사람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어느 분야에서든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높은 에너지 장에 자신을 노출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내적 태도가 자연스럽게 바뀌기 시작한다. 이것은 자조 그룹 사이에 잘 알려진 현상으로, 몸만이라도 회합에 참석하라"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높은 에너지 패턴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만으로도 '마찰 현상'이 일어나고, 그래서 소위 '삼투 작용'이 시작되는 것이다.
전통 의학의 관점에서, 스트레스는 인간의 수많은 질병과 병변의 원인이 된다. 문제는 우리가 스트레스의 근원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스트레스의 원인이 외적인 것에서 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든 스트레스는 개인의 태도에 의해 내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유발시키는 것은 인생의 사건들이 아니라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이혼은 처참한 고통을 가져올 수도 있고, 위안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일에서 겪는 어려움은 자극을 가져올 수도 있고 불안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상사를 선생으로 보느냐 괴물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의 태도는 우리의 자세에서 결정되고, 우리의 자세는 동기와 관점에 깊은 관련을 가진다.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는 총체적인 관점에 따라 똑같은 사건이 비극일 수도 있고 희극일 수도 있다. 생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취하는 태도는 곧 몸에 이로운 엔도르핀과 좋지 않은 아드레날린 중 어느 것을 고르느냐는 선택의 문제인 셈이다. 197
건강에 영향을 주는 것이 오로지 내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물론 어리석은 것이다. 많은 다른 요소들이 우리의 건강을 좌우한다. 하지만 이 분야에서도 운동 역학 시험은 역시 유효하다. 인공적인 합성물·인공 색소·방부제·살충제·인공감미료 등은 약한 반응을 보이는 반면, 순수하고 유기적이거나 사람의 손이 간 것들은 강한 반응을 보여준다.
특수한 비타민의 복용이 신경안정제의 지나친 복용에서 오는 불치의 만성 안면마비를 예방한다는 것이었다. 198
건강과 질병
입력에서의 아주 작은 변화가 출력에서는 아주 커다란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과 태도의 우주가 신체의 습관적인 반응의 결과로서 가시화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마음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수백만 갈래의 생각들을 고려한다면, 육체가 그 중 우세한 생각의 패턴을 반영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론 유전과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겠지만. 눈에 보이는 질병을 초래하는 것은 '초기 조건에의 민감한 의존성'의 법칙을 따르는 자극의 반복과 '지속'이다.
만일 병변이 이러한 과정으로 생기는 것이 분명하다면, 모든 질병은 생각의 변화나 우리의 습관적인 반응을 바꿈으로써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류에게 알려진 어떠한 질병이드 자연적으로 치료되었다는 기록이 역사상 허다하게 나타난다.
알코울 중독자 갱생회에서는, 인격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기 전까지는 치유될 수 없다고 말한다. 203
칼 융은 롤랜드에게 "네가 믿든 안 믿든 네가 판단하기에 좋아보이는 영적 그룹에 네 몸을 완전히 맡기고,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병이 치유되기를 바라는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204
삶에 대한 태도의 변화로 고질병을 순식간에 치유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삶의 태도 변화는 오랜 세월의 내적 준비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임계점이 전체적인 체계를 변화시키는 데 드는 최소한의 힘이 위치하는 분기점이라는 것은 앞에서 기술한 바 있다. 장기에서도 졸의 움직임 하나가 게임의 가능성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체계의 하나하나가, 더 좋아지든 더 나빠지든, 그 결과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치료가 불가능한 절망적인 상황이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느 곳, 어느 시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지금껏 기술한 과정을 통하여 질병이나 최악의 상황에서 회복된 누군가가 있어 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진화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하는 데 있어서 우리 자신이나 인류 전체에 자비심을 품는 것은 상황이나 질병의 호전을 위해서나 의식의 진화를 위해서나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치유를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치유를 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수 있다는 단계에 도달하기만 하면 불사의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불행하게도 신체의 원형질은 유전적인 자체의 청사진과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기 쉽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500이상의 수준에서 본다면, 죽음이란 환상에 불과하며 삶이란 계속되는 것이다. 209
스포츠와 잠재력
'운동선수들은 높은 의식상태를 자주 경험하게 된다. 장거리 주자들이 뛰는 동안 평화와 기쁨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고양된 의식세계가 기대 이상의 솜씨를 발휘하는 데에 따르는 고통과 극도의 피로감을 극복하게 한다.
이러한 현상은 운동선수들이 혼신의 힘을 다함으로써 갑자기 기록의 장벽이 무너지고 동작이 유연해지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서 잘 표현된다. 이때 운동선수의 육체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조종되듯이 우아하고 조화로운 아름다움으로 움직인다. 그에 따르는 기쁨은 성공에서 오는 감동과는 아주 다르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삶과 일체가 되는 평화의 기쁨이다.'
'우리는 영화를 비롯한 많은 종류의 운동기록을 측정해 보았다. 스포츠에 관한 모든 영화중에서 프랑스 영화인 '그랑 블루'가 가장 높은 측정치를 나타냈다. 이것은 최근까지 세계기록의 보유자였던 프랑스의 해저 다이빙 챔피언인 쟈크 마욜의 이야기다 이 영화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인 700(보편적인 진리)의 수준으로 측정되었다. 이 영화 자체가 관객들을 높은 수준의 의식 세계로 끌어올리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이 영화는 슬로 모션 기법을 통하여 해저 다이빙 세계 챔피언의 높은 의식 상태를 매우 여실하게 묘사한다. 느린 동작이 가져다주는 감동, 아름다움과 우아함 등이 높은 의식 세계로 빨려들도록 한다. 정지된 듯한 시간 속에서, 바깥 세상의 온갖 소란과는 달리 내적인 고요를 경험하게 된다.
쟈크 마욜은 강력한 집중력에 의해 높은 의식 수준을 유지한다. 그는 거의 항상 명상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는 이 상태에서 보통 사람의 한계를 초월하고 초인적으로 여러 기록을 세운다. 더 깊이 다이브할수록 심장은 느려지고, 혈액순환은 뇌에만 존재하게 된다(돌고래가 그렇듯이). 자크 마욜에 못지않게 뛰어난 선수인 그의 친구는 마욜의 기록을 좇으려다가 목숨을 잃는다. 그는 정상적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의식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3부 의미
인생의 고뇌는 근시안적인 생각을 어떻게 초월하느냐에 있다.
이원성을 초월하고 더 이상 지상에 묶이지 않는 지점으로 진보하지 않는 한,
우리는 더 높은 차원으로 진입할 수 없다.
……여기에는 무슨 거창한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제1장 의식의 데이터베이스
유명한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은 패턴과 상징의 원형(原型)을 연구한 후 '집단 무의식'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어느 종족에게나 바닥 모를 잠재 의식의 심연에 자리잡고 있는 공통된 체험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이 집단 무의식을, 강력하고 우주적이고 조직적인 패턴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인간 의식의 거대하고도 숨겨진 데이터베이스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데이터베이스의 존재는, 인간의 의식에 유용하게 쓰여지는 모든 정보를 포함하여, 인간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검색 과정을 기다리고 있는, 정보의 거대한 창고 이상의 것이다.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이제까지 존재해 온 전인류의 축적된 모든 경험을 통해 어떤 '질문'에도 거기에 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그들의 육감, 직감, 신통함, 꿈, 혹은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얻는 모든 정보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천재의 원천이요, 영감의 샘물이요, 영매들의 신비로운 '예지'의 근원이다. 물론 운동 역학 시험도 여기에 물줄기를 대고 있다. 214
우리에게 익숙한 '성좌'라는 것은, 서로 관련 없는 별에서 나오는 빛의 점들을 연결한 것에 불과하며, 그 점들은 수백만 광년의 차이가 있고 저마다 다른 은하계에 속하는 별들일 수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많은 별들이 이미 오래 전에 타버려서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보는 빛들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아무런 상호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주걱이나 사람이나 곰 등의 형상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성좌' 자체도 결코 아니다. 바라보는 자의 눈에 그런 모양이 하늘에 투사되어 나타난 것일 뿐이다. 하지만 황도대(zodiac)는 우리가 그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 단어의 일차적인 의미에서, 여전히 '실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의식의 데이터베이스는 충전된 배터리라기보다는 잠재력을 지닌 정전기의 콘덴서와 같다. 해답의 잠재력을 지니지 않는 질문이란 있을 수 없다. 질문과 해답은 같은 패러다임에서 창출되고, 따라서 직접적으로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가 없이 '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는 순서에 따라 일어난다기보다는 동시에 일어난다고 보아야 한다. 칼 융은 인간 경험의 장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면서 '동시성(synchronicity)'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원인과 결과가 순서에 따라 일어난다는 뉴턴적인 선형(線形) 개념이 아니라면, 두 사건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그렇다면 무엇일까? 물론 두 사건들은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서 서로 관련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중력장이나 자기장이나 우주풍(宇宙風)이나 에테르에 의해 연결된 것은 아니다. 두 사건은, 두 사건을 동시에 포함하는 같은 등급의 끌개 장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건들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든 시간차를 갖고 순서대로 일어나든 사건으로 관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사건의 '연관'은 관찰자의 의식 세계 내에서만 일어난다. 관찰자는 하나의 연관성을 '바라보고', 그 관계를 가정하며 '짝을 이루는' 사건을 설명한다. 이러한 관계는 관찰자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다. 이 우주에는 눈에 보이는 어떤 필연적인 사건이 존재할 필요성이 있지 않다. 밑에 깔려 있는 끌개 패턴이 없다면, 그 어느 것도 경험될 수 없다. 따라서 눈앞에 현현하는 우주 전체는 동시적인 표현이며 경험 그 자체이다.
전지(全知)란 전능(全能)과 편재(偏在)를 말한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없다. 앎이란 질문을 던짐으로써만 무지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건축가의 마음 속에서 태어났다. 인간의 의식은 보이지 않는 개념을 '그 빌딩'이라는 명백한 경험으로 변화시켜 주는 매개체이다. 그때 시간은 얼어붙는다. 그리하여 1933년 뉴욕시 32번가에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정상적인'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ABC의 수준으로부터 볼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A→B→C의 변천 과정에 완전히 얽매여 있다. 비범한 사람들만이 ABC의 세상에서 산다. 215-6
우주는 매우 협조적이다. 우주가 의식 자체와 다르지 않은 만큼,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창조해 낼 수 있고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우리들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을 인과관계에 의해 차례차례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있다. 우리가 시간 관념에서 비켜서기만 하는 거기에는 어떠한 원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여기에는 또다시 시간 관념을 내포하게 된다. 보이는 우주가 보이지 않는 우주를 만든다고 말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 ... 마찬가지로, 치유는 자비심의 결과이지만, 자비심이 치유의 '원인'은 아니다. 600이나 그 이상의 에너지 장에서는 거의 무엇이든지 치유가 된다.
모든 생명과 모든 형태들의 원천은, 현현되는 것들보다 더 거대한 그 무엇이다. 그렇지만 나타난 것과 나타나게 하는 근원은 다르지 않으며,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는 어떠한 분리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간이란, 이미 완전하게 정립된 홀로그램을 인식하는 한 시점에 불과하다. 시간은 관점의 이동에 따라 나타나는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결과에 불과하다. 홀로그램에는 시작이나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에서나 완전하게 이미 존재한다. 사실상, '완전하지 않게' 보이는 현상도 완전성의 일부일 뿐이다. '펼침'의 현상도 한정된 관점의 반영물일 뿐이다. 들이포갠 우주도 펼쳐진 우주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되는 우주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패러독스는 앵 극단이란 관찰자의 위치에 불과하다는 보다 큰 패러다임 안에서 용해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을 만드신 이는 양쪽을 두루 포용하고, 양쪽을 두루 초월하고, 만무롸 일체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것은, 창조자의 인식을 알아차리고, 창조자의 표현을 의식으로 알아차리는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진술일 뿐이다. 217-218
제2장 의식의 진화
개인들의 운동 역학 시험이나 역사적인 분석에 의해 수치 계산을 해보면, 사람들은 평생 동안 평균 5점 정도의 의식 진전을 이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평생 동안 마주치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우리들은 불과 몇 가지의 교훈만을 배우는 셈이다. 지혜를 얻는 것은 더디고 고통스럽다. 아무리 익숙한 관점이라도 그것이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면 서슴없이 버리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성장과 변화에 대한 저항은 이처럼 심각하다. 220
성장은 억제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경향성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우리 모두에게는 수많은 기회가 항상 주어지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항상 자신들이 좋아하는 상황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선택 범위는 대개는 개인의 비전에 의해 한정된다.
관점· 가치관· 의미 등은 조직적인 끌개 에너지 장의 한 부분에 속하는 에너지 패턴의 기묘한 거미줄을 다른 말로 바꾼 데에 불과하다.
의식의 향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꺼이 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자발성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가져오고, 더 나아가서는 새로운 가설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 사람들이 변화하게 되는 동기는 여러 가지이고 셀 수도 없지만, 어떤 모순이나 수수께끼 같은 것에 접할 때에도 이런 변화가 자주 목격된다. 선(禪) 같은 자기 연마의 분야에서는 이러한 모순이나 수수께끼 같은 난국을 화두(話頭)로 삼아 커다란 진전을 위한 디딤돌로 사용하기도 한다. 222
의식의 분포도에는 두 개의 분기점이 존재하며, 이 분기점들은 의식의 진화를 위한 도약의 발판이 되어 준다. 첫 번째는 200의 수준으로, 이 단계는 잠재력을 최초로 느끼는 수준이다. 이 단계에서는 남을 비난하지 않고 자기의 행동이나 느낌, 믿음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아는 성숙이 시작된다. 원인과 책임이 개인의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기력한 희생자의 처지에 남아 있어야 한다.
두 번째 분기점은 500으로, 이 수준은 사랑, 비판없는 용서의 생활 양식,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과 사건들에 대한 예외없는 무조건의 친절함이다.(12단계의 자조 그룹은 어떠한 경우에도 분노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한다. 설령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나쁜 짓을 했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당신의 반응에 대한 선택의 자유가 있으며 분노를 택하지 않을 수 있다.) 개인이 일단 이러한 믿음으로 행동한다면 그에게는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할 것이고, 의식의 진보에 따라 세상이 더욱 친절해 보일 것이다.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세상은 다양한 방법으로 경험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를 당황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홀로그램에서 보듯이―보는 것은 어느 위치에서 보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면 어느 위치가 '실재'인가?
사실, 우리가 사는 우주는 홀로그램과 같다. 특정한 관점들은 그의 독특한 의식 수준의 반영일 뿐이다. 홀로그램의 한쪽에 서 있는 사람이 보고 느끼는 것은 다른 쪽에 서 있는 사람과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세상은 거울이 아닌 무한한 차원의 홀로그램과 같다. 거울은 시간과 장소에 의해 결정되고 단지 하나의 모양만을 반영해 줄 뿐이다. 청각의 경험도, 과거부터 현재까지 존재하는 모든 소리의 끌개 장이 계속되는 홀로그램에 불과하다.
우리는 물질 세계를 만질 수 있다. 이 세계는 짜임새, 색깔, 차원, 그리고 위치나 모양을 주는 공간적 관계를 갖고 있다. 모든 것은 저변에 깔려 있는 일정한 순서에 지나지 않고, 이것들은 다른 모든 것과 같이 결국에는 모든 존재의 근원인 '시간의 끝'으로 돌아가며, 그 근원은 바로 '지금'이기도 하다.
홀로그램은 본질상,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3차원의 홀로그램에서는 아무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면 4차원의 홀로그램에서는 어떨까? 거기에서는 모든 가능한 상황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변화가 있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초월된 상태에서 순서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지금이라면, 거기에는 여기 저기로 따라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224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우리가 반응하고 있는 세상이 달라진다. 우리가 보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되고자 하는 것 또한 우리의 인식에 따라 결정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의식 수준이 낮을수록 사물에 대한 응시가 힘들어진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흥미있는 사실이다.
아주 낮은 수준에서는 사물과 만나는 초점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반면에, 높은 의식으로 올라갈수록 오래, 그리고 아주 깊게 응시할 수 있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눈빛, 적대적인 눈빛, 그리고 결백에서 나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직시할 수 있는 눈빛들을 떠올려 보라. 잠재력과 인식은 손에 손을 맞잡고 나아간다.
인식이란 어떻게 작용할까? 그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인식이 주관적이고 독창적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법과 대학의 모의재판을 생각해 보라. 많은 목격자들이 같은 사건을 달리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의식이 투영되고 있는 영화관을 생각해 보자. 영사기를 의식 자체라고 본다면 필름에 담긴 영상들은 끌개 에너지 패턴이고, 스크린에 비치는 움직이는 영상들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고 인식하는 세상 자체이다. 필름에 담긴 형태들은 마음 속의 ABC 끌개 장이라 할 수 있고, 스크린에 보이는 A→B→C는 현상 세계로서 눈에 보이는 세상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설정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도와줄 수 있는 좋은 모델이다. 인과 관계는 필름 단계에서 정해지는 것이지 스크린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A→B→C의 사건들을 스크린의 수준에서 결정하려고 하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효과가 엇을 뿐 아니라 그 대가가 어마어마해진다. 인과관계는 필름에 박힌 ABC의 형태인 끌개 패턴에서 나오고, 이것은 의식에 의해 조명되어 마음의 필름에 새겨진다.
의식의 흐름, 즉 생각과 인식, 느낌과 기억의 패턴은 끌개 에너지 장이 이끌고 나가는 것이며, 에너지 장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이처럼 끌개 에너지 장에 지배를 받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선택·믿음·목표에서 오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특정한 형식으로 처리되고 또 특정한 가치관과 의미로 우리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특정한 끌개 장과 일치한다. 어떤 수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하고 신나게 보이는 것이 다른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흥미없고 구역질나는 것이 될 수 있다. 진실이란 이처럼 두려울 만치 주관적인 것이다. 현대 과학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인 학문이라고 신봉하는 것은, 결국 우리들이 믿을 수 있는 측정되고 예측될 수 있는 객관적인 세상이 '저곳' 어딘가에 있다고 느끼는 불안한 강박관념의 표현일 뿐이다.
인간의 정서적 왜곡을 초월함에 있어서, 과학은 그 자체의 기준으로 말미암아 또 하나의 개념적인 왜곡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학이란 전체적인 맥락에서 자료들을 제거할 필요성을 항상 갖고 있지만 결국 그 자료들에 전체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전체적인 맥락에서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
첨단 이론물리학의 최종적인 발견물은 인간 지식의 어느 분야에서도 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저곳'의 구성에 대해 자세히 분석할수록 결국 우리는 우리가 분석하는 것이 사실은 '여기' 있는 의식의 얽히고 설킨 과정들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저곳'에는 의식 자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고 믿는 우리의 습관은 잠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나의 것'으로 보려는 마음의 허영이며 착각인 것이다. 228-229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것을 요청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조건을 유산으로 받아 놓고 있다. 이 마음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마음만이 현실의 유일한 결정론자라는 전제의 왕관을 과감히 벗어 던질 필요가 있다. 우리의 헛된 마음은 스크린에 펼쳐지는 인생의 영화를 절대적으로 보려고 한다. 마음은 마음에 비치는 경험을 진정한 것으로 납득시키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각 개인은 저마다 자신의 세상 경험만이 정확한 것이라고 비밀스럽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 수준을 논하면서 자존심이 갖고 있는 약점의 하나는 부정성(否定性)에 있다는 것에 주목한 바에 있다. 각자의 마음은 자신의 '옳음'을 보호하기 위하여 '부정'의 과정을 밟는다. 이러한 부정성이야말로 인간이 평생 동안 의식 수준을 5점 정도밖에 진전시키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의식의 커다란 진전은 '내가 안다'는 착각을 버릴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기꺼이 변화하려는 태도는 흔히 개인들의 믿음이 다 허물어지고 더 나아갈 수 없는 아주 '밑바닥'에 처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닫힌 상자 속으로는 빛이 들어갈 수 없다. 위기의 좋은 점은 그것이 높은 의식 수준으로 가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인생이란 배움의 터전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삶은 진정한 스승이 되어 줄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루는 삶의 고통스러운 교훈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성장과 발전의 디딤돌로 삼지 않는다면, 삶은 헛되이 낭비될 뿐이다.
우리는 경험하는 것들을 기록하고, 관찰하고, 목격한다. 그렇지만 삶 자체 속에서는 실제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앎은 경험하고 있는 것을 단지 기록할 뿐이다. 앎은 경험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 앎이란 삶 자체와 동일한 무한한 잠재력의 끌개장을 두루 포용한다. 그리고 고도의 깨달음의 수준에서 보면 마음이 미혹된 바가 없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음은 그 내용과 동일시된다. 마음은 자신이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하여 잘했다거나 잘못했다고 항상 판단한다. 마음은 자신이 하는 일이 고작 경험으로 그친다는 것, 엄밀히 말하자면 '경험을 경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을 공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마음이 세상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감각이 경험한 바를 보고할 뿐이다. 명석한 생각이나 깊은 느낌조차도 경험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오직 하나의 기능, '경험을 경험하는' 것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의식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은 순수함이다. 의식은 너무나 잘 속아 넘어간다. 의식은 들리는 것을 모두 다 믿어버린다. 의식이란 테이프만 집어넣으면 곧이곧대로 쏟아져 나오는 녹음기와 같다. 우리는 자신의 의식의 순진무구함을 결코 잃는 법이 없다.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하며, 믿음이 굳다. 의식의 유일한 보호자가 있다면 그것은 들어오는 것을 제대로 분별줄 아는 앎이요, 깨어 있는 정신이다. 230-231
제3장 순수의식 탐구
인간은 자신을 물질적인 육체와 동일시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제한하기 쉽다. 물론, 인간이 육체를 가진 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고 물을 수도 있다. 우리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물질적인 육체의 존재는 감각에 의해 기록된다.
그렇다면 감각을 인식하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이 뒤따르게 된다. 감각이 보고해 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 물질적인 육체보다 더 큰 무엇, 더 포용력 있는 무엇인가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래야 더 작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무엇이란 바로 마음이다. 사람은 마음이 육체를 경험하기 때문에 자신의 육체를 알게 된다. 육체의 일부를 잃은 환자들은 육체에 대한 감각이 전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나는 예전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으로 경험되는 것들을 어떻게 아는가? 생각 그 자체는 그것을 경험할 능력이 없으며, 사소보다 더 근본적이고 사고 밖의 영역의 무엇인가가 생각의 흐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생각의 내용들은 그 무엇에 대한 느낌을 바꾸지 못한다.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삶의 현상을 알고 관찰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인식과 경험으로서 반향을 일으키는 것은 의식 자체이다. 의식 자체는 그 내용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의식을 관통하며 흐르는 생각들은 바다를 헤엄쳐가는 물고기와 같다. 바다의 존재는 고기와 무관하다. 바다의 내용이 물 자체의 본질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무색의 광선과 같이, 의식은 목격된 사물을 비쳐 준다. 이 때문에 전통적인 문학에서는 의식이 '빛'으로 묘사되곤 한다.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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