病詩
박진성
1
病은 病을 밀어낸다. 동시에, 病은 자성으로 病을 잡아당긴다. 病이 거느리는 이러한 원심력과 구심력은 시를 밀고나가는 팽팽한 두 힘이다. 두 힘 사이의 긴장, 지루한 공방전 혹은 육박전.
病 자체가 끌어당기는 구심력은, 새벽,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후려치는 바람에 묻어 1996년 병동의 하얀 시트 냄새를 몰아온다. 1996년 2월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몇 알의 약을 집어먹었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엠뷸런스가 울었고, 울면서 떨었고, 깨어보니 어머니가 나무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울었고, 심전도가 떨었고, 산소호흡기가 나를 짓누르고 있었고, 어떤 검사도 내 병의 속내까지 닿을 수는 없었고, 그 해 이월, 아픈 데도 없이 병원을 지키면서 나는 굳게 닫힌 철제문 아래 주저앉아 살,고,싶,다, 손가락으로 먼 나라의 음악처럼 들려오는 네 글자를 그려보았고, 울었고, 나는 아픈 데가 없었으나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고……열아홉 살이었고…
2
병동의 기억은 어떤 주술처럼 나를 옹알거리게 한다. 폴 리쾨르에 기대지 않더라도 사실(事實)과 허구(虛構)는 그 경계선 자체가 희미하다. 언제 내가 아팠던가, 언제 내가 아프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현상들 속에 숨어있는 환상이고 나는 오랫동안 그 환상에 집착해왔다. 그러한 '기억'으로서의 아픔과 현재의 아픔속에서 나는 자꾸만 병동의 기억을 두드린다.
죽음과 삶이 예리한 각으로 서로를 찌르는 응급실, 그 찔린 자리의 피솟음, 찔린 자리의 상처, 상처의 무늬, 무늬를 일렁이게 하는 새벽 병동의 풍경들. 나는 전율한다. 내 시의 나침반은 병원을 향해서 계속 떨고 있을 것이다.
3
두통.
신경과 신경의 전투. 육박전.
두 힘이 교차하는 곳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머문다. 그러한 긴장은 곧바로 '나-살아있음'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내 몸 어딘가가, 혹은 내 정신 어딘가가 끊임없이 아프다는 사실, '나-살아있음'을 강력하게 부정하면서 동시에 삶을 이끌어나가는 동력. 궁극적으로 病은 '내가 아픔'을 통해서 '타인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거대한 구멍이 아닐까, 혹은 그러한 아픔이 온전히 만날 수 있는 날(生)것 그대로의 혼융 상태가 아닐까.
고흐의 그림을 보면 아픔의 소용돌이랄까, 아픈 것들이 내뿜는 환한 빛이 느껴진다. '테오'를 빌려 나는 고흐의 '광기'를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그이의 몸에 달라붙기 위해서 나는 1996년 정신병동, 끊어질 듯 잇대어 흐르던 내 몸 신경의 울분과 울분의 폭발과 발작을 꺼내지 않으면 안 된다. 고흐는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타라스콩으로 가기 위해서는 기차를 타야하듯이 별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죽음의 문을 통과해야한다'라고 썼는데, 내가 읽는 것은 그의 발작 후의 울분, 울분 지나간 자리의 고요이다. 내가 아프다는 사실은 일차적으로는 남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과 닿아있고,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병-상태'의 황홀한 훔쳐보기를 통해 '살아야겠음'을 끊임없이 자각하는 일이다. 이것이 병이 가지고 있는 원심력이다. '병-바깥'에는 어머니가 있고, 내 가난한 할머니가 있고, 어딘가에서 아픈 사람들이 있다. 내가 두 눈에 힘 팍 주고 바라보는 것은 '병-상태' 인간의 적나라한 진실이다. 아파 울부짖는 사람에게 포즈는 없다. 시속 150km의 공을 받아치는 방망이. 打者의 숙명. 죽기 아니면 살기. 한 번 죽은 타자는 다시 타석에 들어선다. 시속 150km의 공이 날아온다. 나는 방망이를 들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는 병을 통해 병 자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병-상태'가 강력하게 환기시키는 '살아야겠음'의 동력이랄까, '接神' 상태의 황홀함, 일정 정도를 넘어버린 불꽃은 자신을 태운다. 나는 공을 받아친 것이다. '아라리'가 난 것이다.
4
'아라리'는 '病'의 몸을 관통하는 원심과 구심의 지루한 공방전이 낳은 '병-상태'의 몸이다. 아라리는 '병-치료'와 '병-발병' 혹은 '병-이후'의 바깥이다. 도저하게 흐르고 있는 '아리랑'의 울분 혹은 신명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공은 던져졌고 나는 받아쳐야한다. 타자의 운명이다. 계속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아라리는 고유의 운동이다. 나는 아라리의 움직임에 몸 싣는다. 공을 받아쳤으니 뛰어야 할 것 아닌가. 타자의 운명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 내가 쏘아올린 공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 뛰어야 한다. 홈런? 안타? 외야플라이? 내야땅볼? 어쨌든 뛰어야 한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당신인가?
ㅡ박진성 시집 『목숨 』 「산문」, 천년의시작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