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9월4일(3월6일)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 동정 /성녀 로살리아 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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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3월6일(9월4일)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 동정 Saint Rose of Viterbo Beata Rosa da Viterbo Vergine Viterbo, 1233/34 - Viterbo, 6 marzo 1251/52 Canonized:1457 Third Order Franciscan
로사(1234 - 1252)는 문자 그대로 영신 생활에서 천재성을 지닌 어린이였다. 이미 9 살 때 성모님의 인도로 3 회(재속프란치스코회) 착복을 원하여 허락받았다. 그녀는 자기 집의 조그만 골방에서 관상생활과 극기 생활을 하였다. 또한 자주 거리에 나가 참회할 것을 비테르보 사람들에게 설교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프레데릭 2 세의 반 교황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제국 당국은 그녀와 부모를 비테르보에서 추방하였다. 로사의 설교. 특히 마니교 이단을 거스려 하는 설교에는 수많은 청중이 몰려들었다. 비테르보로 돌아와 글라라회에 입회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한 자신이 공동체를 설립하려는 계획도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겸손하게 이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1252 년 18 세라는 꽃다운 나이로 하늘의 정배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썩지 않는 유해는 알렉산델 4 세에 의하여 글라라회 수녀원으로 이장되었으며 갈리스토 3 세에 의하여 1457 년 시성되었다. 그녀의 무덤에서는 지금도 계속하여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작은형제회홈에서)
비떼르보에서 태어난 성녀 로사는 병을 앓던 8세때에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성프란치스코의 수도복을 입으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후에도 집에서 그냥 지내면서 평범한 여성으로 자랐다. 병이 회복된 그녀는 평신도의 회개 복장을 하였고, 우리 주님의 고난을 더욱 절실히 체험케 되었으며, 죄인들의 무례함과 배은망덕을 대신 속죄하였다. 그후 12세기경부터 그녀는 타오르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길 수 없어 거리로 뛰쳐 나가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그당시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무수한 경고를 하였다. 이때문에 그녀가 집에 감금되었고, 이리하여 로사와 그 부모는 추방되어 소리아노로 갔는데, 그녀는 여기서 그당시의 독재자인 프레데릭 황제의 죽음을 예고하였고,그것은 꼭 13개월 후에 일어났다. 이때부터 그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고향으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후 그녀는 비떼르보에 있던 로사의 성마리아 수녀원 입회를 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이리하여 그녀의 주임사제가 성당 곁에 수녀원을 만들고 몇몇 동료들과 함께 살도록 주선하였으나, 집으로 돌아와서 곧 운명하니, 그녀의 나이는 17세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하느님께서는 성인들을 통해 기적을 행하신다. 우리는 모든 성인들의 기적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본다. 그 중에서도 더욱 현저히 나타난 기적은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의 일생에서 볼 수 있다.
그녀는 1235년 이탈리아의 비테르보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가난했으나, 자식으로는 로사 하나 밖에 없었으므로 될 수 있는 데까지 주의를 다해 교육 시켰다. 그러나 그녀의 교육에 많은 역할을 한 것은 부모의 힘보다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아직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한 어린 로사가 근처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회 성당에 가서 경건한 모습으로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본 부모나 사람들은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로사는 강론때에 방울 같은 눈동자를 굴리며 신부의 강론 말씀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돌아와, 부모에게나 혹 다른 아이들에게 그대로 들려주었다.
2,3 년 후부터 로사는 이미 고신 극기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 방에 조그마한 제단을 꾸며놓고 대부분을 그 앞에서 기도하며 지냈다. 잘 때에는 한 장의 판자를 요로 삼았고 하루에 불과 몇 시간밖에 안 되었다. 너무 엄한 단식(斷食)때문에 사람들은 그녀의 건강을 염려하였으나 그래도 항상 그녀의 얼굴은 기쁜 빛이 감돌며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거지들을 반가이 대하며 자기 몫인 음식을 나누어 먹이기도 했다.
그 당시 로사에 대한 몇 가지 기적이 전해져 내려온다. 어떤 가난한 집 아이가 하루는 꽃병을 깨뜨렸다. 로사는 불쌍한 생각으로 그 꽃병 조각을 모아 그 위에다 십자가를 그렸다. 그랬더니 즉시 그 병은 전과 같이 되어 금이 난 흔적도 없었다고 한다.
로사는 열 살 때 중병에 걸렸었다. 임종이 가까웠다고 생각될때 그녀는 묵시를 보았다. 즉 천당, 연옥, 지옥의 모양이었다. 그러자 성모님이 나타나서 그녀에게 예쁜관을 씌워 주시며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들어갈 것을 권고하시고, 앞으로의 생활 방식과 그녀가 해야 할 일들, 또 그녀가 받을 박해와 고통에 대해서도 친절히 깨우쳐 주셨다. 이리하여 그녀는 완쾌한 후 거치른 옷에다 끈으로 만든 띠를 허리에 둘렀다.
그녀는 탈혼 중에 어린 예수를 보았다. 그 때 예수게서는 이미 가시관을 쓰시고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그것을 본 로사는 애처로운 생각에 잠겨 자기 몸을 피가 나도록 매질했다고 한다.
그 당시 황제 프리데리코는 교회를 박해하고 그 군대는 이탈리아까지 침입하여 많은 학살을 감행했다. 비테르보와 그 부근의 촌락도 그 마수를 피할 길이 없었다. 바로 이때 로사는 분연(憤然)히 일어나 세상의 불신, 부도덕, 호화와 사치며 기타 부정을 책하는 일 장 연설을 했는데, 그 웅변 태도며 그 말의 구절 마다가 하늘에서 울려나오는 것 같았다. 로사는 네거리와 광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택하여 누구에게도 보일 수 있는 높은 돌이나 기둥에 서서 연설을 햇다. 불과 12세인 이 소녀의 열변은 대단한 반향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그 말에 감탄하여 회개하고 죄의 보속을 했다.
프리데리코의 부하들은 이 소녀를 대단히 불쾌히 생각하여 비테르보 시장으로 하여금 로사의 가족을 즉각 추방하도록 했다. 그 부친은 "지금은 겨울이요, 돈도 없고 정처도 막연하니 잠깐만 여유를 주십시오. 지금 우리를 추방한다면 우리는 뜰에서 굶어 죽을 것입니다."하며 애원했으나 시장은 조금도 동정함이 없이 "너희들은 죽어도 좋다. 어서 빨리 나가라"고 도리어 재촉했다. 이에 부친은 하는 수없이 처자를 거느리고 정든 곳을 떠나 사방을 헤매다가 솔리아노라는 곳에 이르렀다.
이곳 사람들은 불쌍한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곳에 자리를 잡고, 로사는 설교를 시작했는데, 그 반향은 역시 대단했다. 1250년 12월 5일, 로사는 사람들에게 곧 행복할 것을 예언했다. 그러자 그달 13일에 프리데리코 황제가 사망하고, 국내에는 평화가 깃들이게 되었다. 로사의 가족들은 그리운 비테르보 시에 귀환하는 도중 어떤 마을을 통과했는데 그곳은 배교한 어떤 여자의 악한 표양으로 인해 배교자가 많았다. 로사는 그저 묵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 여자의 비행을 질책했으나 상대방도 상대인지라 여러 가지 항변으로써 쉽게 승복하지 않았다.
로사는 "말로써 시비가 결정되지 않으니 기적으로 결정합시다"하고 소경 하나를 데려다 놓고 고치라 하였다. 그런 여자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그 여자는 실패했고 로사는 훌륭히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 그런데도 그 여자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둘이 다 같이 이글이글 타는 불속을 건너가자고 청하였다. 상대는 두려워 승낙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로사는 장작에 불을 지펴놓고 그 가운데에 우뚝 섰다. 그녀는 의복 하나 그을리지 않았고 몸에도 조그마한 화상 하나 없었다. 그때서야 그 여자도 얼굴빛이 변하며 놀랐고 마침내 회개하고 그녀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다시 신앙의 길로 돌아왔다.
성녀의 서거 750주년 기념. 이탈리아. 2001.5.6.
로사의 가족이 비테르보에 들어섰을때 시민의 환영은 대단했다. 15세가 된 로사는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원했으나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자기 작은 방에서 전과 같이 홀로 기도와 극기의 생활을 계속했다. 2년 후 그녀는 17세의 꽃 같은 몸으로 그의 깨끗한 영혼을 하느님 손에 맡겼다.
그녀의 유해는 처음 비테르보 교회에 매장했다가 뒤에 다른 교회로 이장했다. 그때는 이미 5년이 경과한 해였지만 아직 얼굴색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백년이 지났을 무렵 그 교회는 대 화재로 전소되어 성녀 로사의 영구(靈柩)와 의복은 다 소실되었으나 유해만은 무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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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 : 9월 4일 성녀 로살리아 동정 Santa Rosalia Vergine, eremita di Palermo Santa Rosalia Vergine St. Rosalia of Palermo at Palermo, Sicily - c.1160 apparently of natural causes Rosalia = dal nome del fiore
13세기부터 시실리아에서는 성녀 로살리아 공경이 보편화 되었으나, 옛 순교록에는 그의 생애가 기록되지 않고 있다. 스틸팅 신부의 연구에 따르면, 성녀 로살리아는 젊어서 고향을 떠나 시실리의 비보나 교외 몬떼 꼬쉬나의 어느 동굴에서 은수자로 살았다. 후일 그녀는 팔레르모에 페스트가 유행했을 때, 그녀는 이 도시의 주민을 구했기 때문에 그녀가 팔레르모로 주민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으며, 그녀의 은둔소 위에 큰 성당을 세웠다.
1624년 이탈리아의 팔레르모 시에는 무서운 페스트가 발생하여 어떠한 치료 수단도 효과 없이 희생자가 속출했으며 사람들도 매우 불안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도우심 외에는 구할 길이 없다하여 모든 성인의 호칭 기도를 외우며 시가행진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마치 주님의 묵시나 받은 듯이 제각기 다른 길로 열지어 가는 성가대원들이 성녀 로살리아의 이름을 호칭 기도문에 덧붙여 노래했다. 더구나 이상한 것은 이 행렬이 끝나자 그처럼 맹위를 떨치던 열병도 즉각 멈추었다는 것이다.
로살리아는 어렸을 때에 부친과 같이 팔레르모에 와서 부친이 왕궁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녀는 왕비 마르가리타의 총애를 받아 그 감독 하에 좋은 교육을 받았다.
성년이 되어 어떤 귀족에게 출가시키려는 무렵 로살리아는 돌연 종적을 감추었다. 그녀는 우선 어떤 수녀원에 숨었다가 곧 인기척 없는 동굴 속에서 살았다. 그 소재지를 안 사람을 왕비 마르가리타 뿐이었으며, 그녀는 더 조용한 장소를 로살리아에게 택하여 주며 일생을 그 곳에서 지내도록 했다.
로살리아는 기도와 묵상으로 세월을 보냈다. 비바람을 가릴 만한 집이 페레그리노 산 위에 있었는데, 때때로 한 신부가 찾아와 그곳에서 미사를 지내 주었다.
로살리아가 아무도 모르는 이런 산중에서 일생을 마쳤으므로 그녀의 죽음과 묘지를 안 사람도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묘소와 그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셨다. 팔레르모에서 시가행렬이 끝난 후였다.
성녀는 어떤 노인에게 나타나서 "페레그리노 산에 가 보세요, 거기에 내 무덤이 있습니다"했다.
노인이 가보니 과연 가르쳐 준 장소에 무덤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무덤을 헤쳐보니 한 부인의 시체가 나왔다.
STATUE OF SANTA ROSALIA IN THE CAVE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과연 성녀 로살리아의 시체인가? 이런 의문을 둘러싸고 의사와 신부들이 면밀한 조사를 한 결과 거의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는데, 여기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났다.
즉 묘지의 동굴 속에서 발견된 돌 한개에는 성녀 자신이 새겼는지 혹은 다른 사람이 새겼는지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었다.
"퀴스퀴나 및 로제스의 영주 시니발도의 영양 로살리아는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동굴에 거처하기로 정했다."
팔레르모 시민들은 즉시 그녀를 주보 성녀로 결정했다. 성녀가 살던 곳에는 아름다운 성당을 건립하고, 주교좌 성당 옆에는 조그마한 성당을 세워 그곳에 성녀의 유해를 안치했다.
성녀 로살리아는 팔레르모 시민의 신뢰를 어기지 않고 주보로서의 임무를 다했다. 우선 전술한 페스트 종식을 시작으로 1693년의 대지진 때에도 구원의 손을 뻗쳐 다른 도시 촌락에서는 수많은 사상자가 났었지만 팔레르모 시민만은 그 참화를 면했다. 그 뒤 성녀 로살리아에게 대한 흠모는 각국에까지 퍼졌고, 특히 페스트와 지진에 대한 구원의 성녀로 공경을 받게 되었다.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10월7일)
이 축일은 성 비오 5세 교황이 레판토 해전(1571년) 승리 기념일에 제정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자 군사들은 그 때 자신들이 거둔 승리가 묵주기도를 바침으로써 받은, 천주의 거룩하신 어머니의 도움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오늘 이 축제는 하느님 아드님의 사람이 되심, 수난, 그리고 부활의 영광에 특별한 방법으로 참여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이끄심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를 묵상하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로사리오란 말은 장미 꽃다발(Rosario:라틴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로살리아Rosalia 축일:9월4일 *로사리아Rosaria 축일:10월7일.인창동성당게시판681번,140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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