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愛

구스타브 에펠

나뭇잎숨결 2009. 5. 6. 18:29

 


 

 

 

“에펠탑은 부인용 모자의 장식 핀처럼 정교하게 파리 위로 뻗어 있었다. 우리가 탑에서 멀어지면, 탑은 꼿꼿하게 수직으로 파리에 군림했다. 우리가 탑에 접근하면, 탑은 우리 위로 몸을 기울였다. 1층 전망대에서 보면 탑은 위쪽으로 나사처럼 올라갔고, 꼭대기에서 보면 탑은 다리를 쫙 뻗고 목을 접어 넣은 채 오그라들었다.” - 블레즈 상드라르

1889년 5월 6일,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 만국박람회가 개막되면서 박람회의 으뜸 볼거리인 에펠탑이 개관하였다. 높이 300미터(이후 첨탑과 통신용 안테나가 추가되어 320미터가 되었다), 무게 7,300톤, 18,038개의 금속 부품과 250만 개의 못이 사용된 이 탑은 곧 파리의 상징물이 되었고, 세계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위대한 건축물로 자리매김 되었다.

 

 

 

공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많은 예술가들이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탑에 대해 풍자적인 비판과 모욕도 쏟아졌다. 소설가 레옹 블루아는 에펠탑을 ‘진실로 비극적인 가로등’이라 칭했고, 시인 프랑수아 코페는 ‘불완전하고 혼란스러우며 일그러진 체육관 장비 같은 철기둥’이라 했고, 소설가 조리 카를 위스망스는 ‘세우다 만 공장 파이프, 암석이나 벽돌로 채워지길 기다리고 있는 뼈대, 깔때기 모양의 그릴’ 등으로 비꼬았고, 기 드 모파상은 ‘높고 깡마른 철사다리로 된 피라미드, 퀴클롭스의 거대한 기념물이 올려질 것처럼 세워진 기반 위에 공장 굴뚝처럼 서 있는 우스울 정도로 가는 뼈대’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공사가 끝나자 모파상을 비롯한 극소수를 빼고는 그 동안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던 예술가들도 세기의 기념탑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1886년 5월 프랑스 정부는 1889년 만국박람회의 볼거리로 300미터 철탑 설계안을 공모했다. 16일밖에 안 되는 짧은 공모 기간이었지만, 놀랍게도 백 개가 넘는 지원서가 접수되었다. 6월 12일 심사위원장 에두아르 로크루아는 만장일치로 에펠탑을 선택했다고 발표했다. 에펠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조직위원회가 지원할 수 있는 공사비는 150만 프랑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에펠이 계산한 예산은 650만 프랑이었다(실제로는 약 800만 프랑이 들었다). 이때 에펠의 모험 정신이 발휘되었다. 그는 공사비를 스스로 부담하기로 하고, 향후 20년 동안 입장료나 임대료 등 탑을 이용한 모든 수익금은 자신의 회사에서 받는 것으로 계약했다. 10월까지 7개월 동안 계속된 박람회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참가 인원은 총 3,200만 명이었고, 800만 프랑의 이익금을 거두었다. 에펠탑 자체만으로는 하루에 1만2천 명에 가까운 인원이 방문하였다. 수익금은 650만 프랑, 그것으로 에펠은 자신이 부담한 모든 비용을 되찾을 수 있었다.


 

 

거대한 탑은 인간의 꿈이 담긴 건축물이다. 높은 탑은 인간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인 중력에 대한 최대한의 저항이며, 하늘에 있는 신에 대한 최선의 경배이기도 하다. 최고의 높이를 구가할 수 있는 재료가 철이라는 것을 에펠은 알고 있었다. 그의 상상력과 기술은 당시 세계 최고의 높이를 생산하였다. 1930년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될 때까지 에펠탑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로 자리를 지켰다. 이 엄청난 공사에 한 건의 인명사고도 없었다는 것은 에펠의 계획과 작업 감독이 얼마나 치밀했는지를 말해준다.

 

 

 

구스타브 에펠은 1832년 12월 15일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32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디종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방정부의 행정관 알렉상드르 에펠이었고, 어머니는 목재상의 딸 카트린 에펠이었다. 구스타브는 장남이자 외아들이었고, 두 살 터울의 누이 동생 마리와 로르가 있었다. 아무런 구김살 없이 유년기를 보낸 구스타브는 학교에 들어갔다. 학교는 구스타브에게 지옥이었다. 쓸모 없는 것들을 암기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싫었다. 그래도 루아얄 고등학교에서의 마지막 두 해는 역사 선생님과 문학 선생님을 만나 지옥을 견딜 수 있었다. 구스타브는 결국 과학과 문학을 통해 대학 입학자격을 얻었다.


어린아이의 성장에는 보통 부모나 학교 외에 또 다른 스승이 있게 마련이다. 구스타브 에펠에게는 삼촌 장 바티스트 모렐라 에펠과 삼촌의 친구 미셸 페레가 있었다. 모렐라는 화학에 뛰어났다. 그는 식초와 증류 과정을 개발해 큰 공장을 세웠다. 구스타브는 삼촌을 따라다니며 화학과 수학의 실용적 가치를 배웠다. 미셸 페레는 리옹 근처의 광산을 소유한 유명한 화학자였다. 미셸은 구스타브와 철학과 신학을 주제로 자주 토론했고, 구스타브를 유황산 제조에 쓰이는 구리 채취 동굴에 데려가기도 했다. 구스타브가 나중에 전공을 화학으로 선택한 것도, 자유주의적 사상을 갖게 된 것도 삼촌과 삼촌 친구 덕분이었다.

 

 

 

 

 

 

 

구스타브 에펠은 지독한 노력파였다. 샤를 누보의 개인비서로 일할 때에는 거의 매일 지칠 줄 모르고 밤 늦게까지 일했다. 일요일에는 경제학 개인교습을 받았다. 학교 공부는 못했지만 상상력이 뛰어난 그는 기발한 발상으로 새로운 방법론을 정립해나갔다. 그는 절대 어림잡아 일을 하지 않았고, 철저한 계산으로 확실한 결과를 예상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에펠이 등장함으로써 프랑스의 철교 건설 능력은 영국의 것을 능가하기 시작했다.

 

1858년 갈론 강 철교를 완성한 후 명성을 얻은 에펠은 수많은 다리를 놓을 수 있었다. 1867년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기계관의 중앙 아치 대들보를 설계했다. 이 작업을 하면서 그는 모든 연철 건축의 기초가 될 계산법을 만들어냈다. 1877년에는 포르투갈의 도우루 강에 강철 아치 다리인 마리아 피아교를 만들었으며, 이후 남부 프랑스 트뤼에르를 가로지르는 162m의 더 넓은 아치교인 가라비 고가교를 만들었다. 가라비교는 강 수면에서 120m 위에 놓였으므로 수년 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다리였다. 이제 에펠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그는 프랑스와 미국의 영원한 우정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 작업에 함께 했다. 뉴욕의 베들로 섬에 세워질 이 여신상은 프랑스에서 만들어져 미국으로 수송될 계획이었다. 에펠은 여신상의 철골 구조물을 만들었다. 거대한 공공건축물을 주로 만들었기에 자신의 사상을 피력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 작업이야말로 에펠의 자유주의 사상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에펠이 늘 성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내의 이른 죽음은 가정적이었던 그에게 크나큰 아픔이었다. 마리(에펠의 여동생과 이름이 같아 마르그리트라 불렀다)는 1862년 에펠과 혼인해서 세 딸과 두 아들을 낳아 행복하게 살다가, 1877년 마리아 피아교의 완공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아내의 죽음이 너무도 가슴 아팠기 때문에 에펠은 끝내 재혼하지 않았다. 파나마 운하의 실패도 뼈아픈 것이었다. 이 실패로 인해 에펠은 사기 혐의로 고소당했고 유죄 판결을 받기까지 했다. 상심한 그는 회사의 대표를 사임하였다.

 

61세에 사업에서 은퇴했지만 에펠은 여전히 새로운 도전에 몰두하였다. 그가 생각한 것은 파리의 도심순환 지하철, 영국 해협을 건너는 지하 다리, 몽블랑의 천문 기상대 등이었는데, 모두 완수하지 못했다. 그러나 포기할 줄 모르는 60대 노인의 열정과 도전 정신은 감동적인 것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몰두한 것은 공기 역학 문제였다. 그것은 높은 건물을 지으면서 늘 주의를 기울이곤 했던 문제였다. 그는 에펠 탑의 높이를 이용해 많은 실험을 했다. 그리고 파리 교외의 오테유에 최초의 공기역학 실험실을 만들어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도 작업을 계속했으며, 1921년 실험실을 국가에 기증했다.

 

 

구스타브 에펠의 말년은 지극히 평안했다. 그는 1923년 12월 28일 라블레 가의 집에서 91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에펠은 갔지만, 그가 남긴 건축물은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 특히 에펠탑은 자신의 사상을 담은 에펠의 대표작이다. 에펠탑에는 그의 전통에 구애 받지 않는 실용주의와 자유주의 정신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것은 파리의 영혼을 상징하는 영적인 기념물이 되었다. 20세기의 위대한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이렇게 말했다. “에펠탑은 ‘사랑 받는 파리’의 표지로서, 파리의 ‘사랑 받는 표지’로서 모든 이의 마음 속에 있다. 이러한 찬양은 한 인간의, 한 장소의, 한 시대의 재능에 대한 경배이다.”

 

 

 

데이비드 하비의 <에펠>(이현주 옮김, 생각의나무, 2005)은 파리의 상징물을 만든 위대한 건축가 구스타브 에펠의 모든 것을 담은 책이다. 에펠이 시도한 작업은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매우 정교하고도 난해한 것이었다. 그런 작업에 어림짐작이란 있을 수 없었다. 에펠이 그런 정교한 작업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 책은 오직 ‘열정’과 ‘노력’이었다고 말한다. 그의 열정은 대중들의 온갖 비난과 불평을 이겨낼 수 있었으며, 그의 노력은 학교의 열등생을 사회의 우등생으로 만들었다. 사회의 우등생이라는 평가는 약하다. 그는 역사의 창조자였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볼 일이다.

 

 

에펠건축사의 대사건들

우르술라 무쉘러의 <건축사의 대사건들>(김수은 옮김, 열대림, 2005)은 서구의 오늘이 있게 한 위대한 건축의 역사를 짚어낸다. 건축은 사상의 구현이고 권력의 상징이며 생활양식의 구현이자 예술적인 표현이다. 특히 한 시대, 한 나라를 상징하는 건축물은 스펙터클한 사건이다. 하늘 높이 치솟은 탑, 쓸쓸한 황무지에 우뚝 솟은 피라미드, 호화롭기 그지없는 궁전, 신의 뜻을 지상에 구현한 사원 등은 현실에 얽매인 인간을 꿈속으로 안내한다. 그러나 건축처럼 복합적인 것이 있겠는가? 거대한 힘이 투입되어야 하는 만큼 건축물에는 엄청난 사건과 열정과 노력과 그리고 상상하기도 힘든 비극이 들어 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줄거리를 담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