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帛書)

피에르 아벨라르는 이런 사랑을 했다(네이버에서)

나뭇잎숨결 2009. 4. 21. 18:30


그는 논리학자였다. 머리로만 따지면 당대의 그 누구보다도 더 탁월했다. 따라서 그는 기고만장했다. 항상 이치를 따지고 논리를 내세웠으며 상대방의 감정 따위는 개의치 않고 자기 의견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이런 성품은 그의 삶을 무척이나 힘들게 만든 원인이었다. 사람들은 앞에서 그의 실력을 칭찬하고 뒤에서 그의 불운을 기원했다.

 

철학 논쟁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진 적이 없었고, 심지어 스승을 굴복시킬 정도로 탁월한 실력의 소유자였지만, 그런 집요함과 고지식함 때문에 가는 곳마다 적을 만들었다. 그리고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벌였던 연애는 그 무엇보다도 큰 상처와 치욕을 그에게 남겨주었다. 이후 연인과 결별하고 사제가 되었지만, 그의 삶은 평온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향의 어느 수도원 원장으로 부임했지만, 수사들의 비행을 좌시하지 못하고 비판을 가해 하마터면 독살당할 뻔했다. 이단 시비는 말년까지도 그를 괴롭혔다. 임종의 자리에서 그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을까? 갓난아기 때부터 남에게 맡겨 키운 아들의 모습, 그리고 그 아이의 어머니이며 자신의 유일무이한 사랑이었던 여인의 모습,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 자신이 입은 상처와 치욕……. 그는 눈을 감았다. 1142년 4월 21일, 철학자이자 신학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세 최대의 스캔들’의 당사자인 피에르 아벨라르는 그렇게 영원한 휴식으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피에르 아벨라르는 1079년에 프랑스 브르타뉴의 르 팔레에서 태어났다. 흔히 그의 성(姓)으로 여겨지는 ‘아벨라르(아벨라르두스)’는 사실 예명이며 그 정확한 뜻은 알 수 없다. 아벨라르는 일찌감치 고향을 떠나 저명한 학자인 샹포의 기욤 문하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한다. 그는 철학 논쟁에서 스승을 압도하여 명성을 얻지만, 도리어 스승의 정치적 보복으로 입지가 좁아진다. 이것은 아벨라르가 평생 겪게 될 질곡의 서막이나 마찬가지였다.


매우 솔직하고 논리적인 성격이었던 그는 어딜 가나 주위 사람들의 위선과 거짓을 폭로하는 데 열심이었고, 그 정도가 지나친 나머지 숱한 적들을 만들었다. 그야말로 “적을 만드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던 셈이다. “세상이 날 증오하게 된 것은 논리학 때문이오.” 아벨라르가 연인 엘로이즈에게 한 말이다. 그가 지닌 논리학자로서의 재능은 신학자가 되기엔 오히려 불리했다. 신학이란 근본적으로 이성이 아닌 권위(계시)에 근거한 체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에 들어있는 갖가지 모순은 논리가 아니라 비약, 즉 ‘신앙’으로만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타협하지 않았고, 계속 신학에 논리를 적용함으로써 훗날 큰 곤경에 처한다. 1114년, 그는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당시 철학과 신학 분야의 최고봉인 파리 노트르담 성당 부설 학교의 강사로 부임한다.


 

 

1100년경에 태어난 엘로이즈는 아벨라르가 재직하던 학교의 모기관인 노트르담 성당의 참사회원 퓔베르의 조카딸이었다. 여자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시대였지만, 그녀는 어려서부터 수녀원에서 자라며 비교적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20년 연하의 엘로이즈에게 반한 아벨라르는 의도적으로 퓔베르에게 접근했고, 결국 참사회원은 품행이 훌륭한 것으로 알려진 이 신임 강사에게 조카딸의 개인교습을 부탁한다. 두 사람이 과연 언제 선을 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이 한 ‘공부’에 대한 아벨라르의 회고는 대략 이러했다.

 

“책을 펼쳐 놓고 학문에 관한 대화보다는 사랑에 관한 대화가 더욱 많았으며, 설명보다는 키스가 더욱 많았네. 내 손은 책보다 그녀의 가슴으로 가는 일이 많았지. 우리들의 눈은 문자를 더듬을 때보다 서로를 마주보는 일이 더 많았네. 되도록 의심받지 않게 하기 위해, 때로 나는 그녀에게 매를 들었지. 분노의 매가 아니라 사랑의 매, 미움의 매가 아니라 애정의 매였네. 이 매질은 어떤 향료보다도 달콤했네. 결국 우리들은 사랑의 모든 형태에 탐닉했으며, 사랑이 베풀어줄 수 있는 모든 희열을 맛보았던 걸세. 이러한 기쁨들이 새로우면 새로울수록 우리는 더욱 열정적으로 거기에 빠져들었고, 그래서 쉽게 포화 상태에 도달하지도 않았네.”

 

아벨라르는 학문이고 수업이고 모두 내팽개치다시피 하며 애정 행각에 몰두한다. 이를 알게 된 퓔베르가 개입해 두 사람을 갈라놓지만, 머지않아 엘로이즈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빼돌려 고향인 브르타뉴에 있는 자기 누이의 집으로 보낸다. 혼자 파리로 돌아온 아벨라르는 퓔베르를 찾아가 엘로이즈와 정식으로 결혼함으로써 책임을 지겠지만, 본인은 장차 성직자가 될 예정이므로 결혼 사실은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양해를 구한다. 엘로이즈는 애인의 앞길을 막을까봐 오히려 결혼을 거부했지만, 퓔베르는 이 타협안에 응한다. 사내아이를 낳아 아벨라르의 누이에게 맡긴 다음, 엘로이즈는 파리로 돌아와서 아벨라르와 비밀 결혼식을 올린다. 하지만 결혼식 이후 두 사람은 예전처럼 따로 살아가며 거의 만나지 못한다. 퓔베르는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아벨라르의 결혼 사실을 여기저기 알렸고, 이에 항의하는 엘로이즈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아벨라르는 다시 한 번 엘로이즈를 빼돌려 수녀원으로 피신시키고, 노발대발한 퓔베르는 친척들과 함께 잔인하기 짝이 없는 복수를 계획한다.

 


한밤중에 자고 있는 아벨라르를 덮쳐 거세해 버린 것이다. 왜 굳이 그토록 잔인한, 그리고 번거로운 복수를 감행했던 것일까? 그것만이 이 잘나고 오만한 철학자를 죽음보다도 더 끔찍한 처지로 만드는 방법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이 사건 이후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에게 수녀가 되기를 권하고, 본인도 파리 북부의 생드니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가 된다. 원래 기독교에서는 고환이나 음경이 손상된 남성을 성직자로 삼지 못하게 하는 전통이 있었지만, 신학자로서의 경력 덕분인지 그는 예외적으로 빨리 사제 서품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삶은 결코 평온하지 못했다. 1121년에는 수아송 공의회에서 삼위일체에 관해 이단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하는가 하면, 수도원에 돌아와서는 수사들의 온갖 타락상을 공개적으로 질책하여 신변이 위험해진다. 이듬해에 그는 생드니 수도원을 떠나 파라클레 수도원을 개척한다. 이곳은 한동안 소원했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인연을 다시 한 번 엮어주는 장소가 되었으니, 머지않아 엘로이즈가 있던 수녀원이 그만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당시 브르타뉴의 생질다드뤼 수도원에 원장으로 가 있던 아벨라르는 갈 곳 없는 신세가 된 엘로이즈와 다른 수녀들이 파라클레 수도원에 들어와 살 수 있도록 주선한다. 이로써 두 사람은 그 끔찍한 사건 이후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재회한다.

 

 

수년 뒤에 아벨라르는 <나의 불행한 이야기>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한다. 서한체 형식의 ‘위로문’인 이 작품은 가상의 수신자에게 자신의 불행을 설명함으로써 “너보다 더 힘든 나도 살거든?” 하고 격려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 작품은 당시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며 애독되었고, 심지어 수녀였던 엘로이즈의 손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가 이에 대해 답장을 써보냄으로써 두 사람의 유명한 왕복 서한이 시작된다. 1132년부터 1137년까지 오간 12통의 편지 가운데 아벨라르가 보낸 것은 8통, 엘로이즈가 보낸 것은 4통이다. 이것이 오늘날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편지’로 알려진 것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과거를 추억함에 있어 소극적인 아벨라르와는 달리 엘로이즈는 매우 적극적이라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낱낱이 까발려진 <나의 불행한 이야기>에서 아벨라르의 말투는 적잖이 변명조이며 체념조였다. 이에 대한 반발이었을까. 수녀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엘로이즈는 남편의 무관심에 대한 원망, 그리고 아직도 여전한 자신의 애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저를 결혼상대로 적합하다고 하여 전 우주를 영구히 지배하도록 해주겠노라고 확약한다 하더라도, 그의 황후로 불리기보다는 당신의 창부라 불리는 쪽이 제게는 훨씬 가치 있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양측 모두 수도자라는 신분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을까? 당혹스러워진 아벨라르는 더 이상 과거지사를 꺼내지 말도록 당부하고, 엘로이즈는 이 말에 순순히 복종한다. 이때부터 이들의 편지는 수도에 관한 견해를 교환하는 내용이 주가 된다. 엘로이즈의 솔직한 애정 표현을 관용하지 못한 아벨라르의 태도에는 ‘쫀쫀한’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남성’을 상실한 그로선 과거의 열정을 되새기는 일 자체가 적잖은 고통이었으리라. 이 당시 두 사람이 주고받은 몇 통의 서한은 중세는 물론이고 현대에 와서도 연애편지의 대명사가 된다. 어쩌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더욱 감동적인 까닭은 이들이 지닌 어마어마한 애정보다도 오히려 이들을 둘러싼 어마어마한 불운 때문은 아니었을까.

 

 

수도원 및 십자군 운동의 핵심 인물이며 훗날 성자로 추대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아벨라르의 말년을 고통스럽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베르나르가 공의회에서 이단 혐의를 제기하자 이미 60대였던 아벨라르는 교황에게 탄원하러 로마로 가다가 클뤼니 수도원에 그냥 눌러앉는다. 이 수도원의 원장이며 교계의 실력자였던 가경자 페트루스는 아벨라르에게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어 베르나르와의 화해를 주선한다. 2년 뒤에 아벨라르가 사망하자 그 시신을 비밀리에 파라클레까지 옮겨주고, 심지어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아스트랄라브를 위해 훗날 힘을 써준 사람도 페트루스였다.


아벨라르를 먼저 보낸 뒤, 엘로이즈는 22년을 더 살았다. 애초에는 남편의 소원 때문에 마지못해 받아들인 수녀로서의 삶이었지만, 그녀는 타고난 명민함을 발휘하여 명망이 높아진다. 1164년 5월 16일, 엘로이즈가 사망하며 남긴 유언에 따라 사람들은 그녀의 시신을 파라클레의 예배당 안에 있는 아벨라르의 무덤 속에 합장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사후에도 좀처럼 안식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1497년에는 두 사람의 유해가 분리 안치되었으며, 1621년에는 다시 합장되었다. 1780년에 다시 무덤이 열려 유해의 상태가 확인되었으며, 1791년에 파라클레 수녀원이 없어지자 노장슈르센으로 이장되었다.

 

 

 

두 사람이 마침내 안식을 찾은 것은 프랑스 혁명 직후의 일이었다. 정부는 마침 새로 조성중인 파리의 공동묘지에 두 사람의 무덤을 만들어주기로 한다. 1817년 11월 6일, 두 사람은 페르 라 셰즈로 이장되고, 훌륭한 대리석 석상으로 장식된 이들의 무덤은 이후 수많은 연인들의 순례지가 된다. 에버하르트 호르트는 이렇게 썼다. “엘로이즈와 아벨라르가 서로 사랑하는 연인으로서 함께 지냈던 기간은 채 1년도 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녀가 평생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행복은 죽어서 남편과 합장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해진 셈이다. “즉 그때부터 수세기 이상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와 떨어지지 않고 하나가 된 것이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유명한 왕복 서간집은 이미 여러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 그 중 을유문고 판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정봉구 옮김, 을유문화사, 1975)와 그 개정판(1999), 그리고 정음문고 판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전규태 편역, 정음사, 1976)는 선역본으로 수도원 운영 등에 관한 전문적인 내용을 다룬 편지는 제외되었다. 완역본으로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강계순 편역, 제3기획, 1988)가 있다. 위의 본문에서 편지 인용문은 이 마지막 책에서 가져왔다.

 

중세 최대의 연애사건내 사랑의 역사하늘을 훔친 사랑

전기 중에서는 우선 에버하르트 호르스트의 <중세 최대의 연애사건: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금단의 사랑>(모명숙 옮김, 생각의나무, 2005)이 비교적 짧은 반면 상당히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1천 년 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책마다 주요 사건의 연대가 조금씩 틀린데, 위 본문의 연대 및 고유명사 표기는 이 책을 주로 참고했다. 제임스 버지의 <내 사랑의 역사: 엘로이즈 & 아벨라르>(유원기 옮김, 북폴리오, 2006)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나온 관련서 중에서는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특히 당시의 시대상이며 아벨라르의 철학 사상 등을 쉽고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큰 도움이 된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이야기를 각색한 소설로는 매리온 미드의 <하늘을 훔친 사랑>(전2권, 김승욱 옮김, 궁리, 2000)이 있다. 또한 철학자인 장 자크 루소가 이들의 이야기를 원용해 지은 서간체 소설 <신(新)엘로이즈>(전2권, 서익원 옮김, 한길사, 2008)도 최근에 번역되어 나왔다.


중세의 ‘궁정식 사랑’을 우의적으로 묘사한 기욤 드 로리스의 <장미와의 사랑 이야기>(김명복 옮김, 솔, 1995)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인용한 문학 작품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궁정식 사랑’의 교과서로 불리는 앙드레 카펠라누스의 <궁정식 사랑 기법>(김명복 옮김, 현음사, 1992)도 참고할 만하다. 같은 책이 안드레아스의 <참다운 사랑의 기술과 허튼 사랑의 질책>(김영락 옮김, 범우사, 1997)이란 다른 번역본으로도 나와 있다.

 

‘중세 최고의 스캔들’의 주인공으로서는 유명한 아벨라르지만, 오늘날 그의 사상사적 위상은 생각만큼 높진 않다. 훗날 중세 철학의 주류를 형성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가 그의 사망 후에야 비로소 유럽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위의 본문에서는 그의 철학 및 신학 분야의 업적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는데, 보다 전문적인 논의는 에티엔느 질송의 <중세철학사>(김기찬 옮김, 현대사상사, 1997), 클라우스 리젠후버의 <중세사상사>(이용주 옮김, 열린책들, 2007), K. 플라시의 <중세철학 이야기>(신창석 옮김, 서광사, 1998) 등을 참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