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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이토스, 숨은 조화

나뭇잎숨결 2009. 3. 18. 21:52

  

 

 
헤라클레이토스는 진정으로 보기 드문 꽃이다. 그는 가장 심오한 영혼이며, 히말라야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에베레스트다. 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모호한 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호하지 않다. 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질(質)의 존재가 필요하다. 이것이 문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모호한 이로 단정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만일 인도 또는 동양에서 태어났다면 그는 붓다로 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역사, 그리스의 철학사에서 그는 이방인이고 아웃사이더(outsider)였다. 그리스에서 그는 깨달은 사람으로 알려진 것이 아니라 “모호한 사람”, “어둠의 인간”, “수수께끼를 내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리스 철학과 서양 사상의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철학자로 여기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기껏해야 그는 시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마저 용인하기 어려웠던지 나중에 다른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격적으로 결점이 있음에 틀림없다. 생물학적으로 무엇인가 잘못된 사람이다. 그가 그토록 모호하고 역설적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라클레이토스를 괴벽스러운 사람, 약간 돈 사람으로 여겼으며, 이런 생각을 가졌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양 전체를 지배한다. 만약 헤라클레이토스를 받아들였다면 서양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헤라클레이토스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는 서양 사상의 주된 흐름에서 동떨어진 인물이 되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고탐 붓다, 노자, 또는 바쇼(Basho) 바쇼: (1644-1694) 파초(芭蕉). 일본 겐로쿠(元祿) 시대의 시인이며 선객. 두보(杜甫)의 영향을 받은 자연주의 시를 남겼다.같은 사람이었다. 그리스는 그에게 어울리는 토양이 아니었다. 만일 동양에 태어났다면 그는 거대한 나무가 되었을 것이다. 그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고 길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기이하고 괴벽스러운 사람, 외국인 또는 외계인처럼 별난 사람에 불과했다. 그는 그리스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역사의 어두운 뒤안길에 묻혀 서서히 잊혀졌다.

헤라클레이토스가 태어나던 당시 인류는 절정을 맞고 있었다. 커다란 변형의 시대였다. 한 개인에게 변형이 일어나듯이 인류 전체가 변화를 맞게 되는 시점이 있다. 인간의 육체는 7년을 주기로 변화한다. 칠십 년을 산다고 가정하면 그대의 생물학적 체계는 열 번의 변화를 겪는다. 육체가 변화하는 시점의 시간적 틈을 잘 이용하면 명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주 쉬워진다.

예를 들어, 열 네 살이 되면 성(性)이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 육체가 생화학적 변화를 맞는다. 이 기간에 명상의 차원으로 들어가도록 인도 받으면 일이 아주 쉬워진다. 육체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낡은 패턴이 가고 새로운 틀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거기에 틈이 있다. 스물 한 살 때 다시 큰 변화가 일어난다. 육체는 7년마다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한다. 낡은 세포 전체가 죽고 새로운 세포가 태어난다. 서른 다섯 살 때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난다. 이런 식으로 육체는 7년마다 낡은 것이 가고 새로운 것이 태어나는 시점을 맞는다. 이 변형의 시점에서는 모든 것이 유동적이다.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이 때가 아주 중요한 시점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일이 인류 전체에게도 일어난다. 2천 5백년마다 절정이 온다. 이 때를 이용하면 쉽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다른 때에는 이렇게 쉽지 않다. 그러나 최정상에 도달한 순간에는 강물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이 형성된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다. 아무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2천 5백 년 전 인도에서는 고탐 붓다와 마하비라 마하비라(B.C.448-376): 자이나교의 개조(開祖). 가 있었다. 중국에는 노자와 장자, 이란에는 짜라투스트라, 그리고 그리스에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있었다. 그들은 최정상에 달한 인물이었다. 이전에는 아무도 그런 정상에 오른 적이 없었다. 설령 정상에 오른 인물이 있었다 해도 그들은 역사의 일부가 아니다. 역사는 예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2천 5백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다시 절정의 순간이 오고 있다. 다시 우리는 유동적인 시대를 맞고 있다. 낡은 것이 무의미해 졌다. 이제 과거는 아무런 중요성도 없고 미래는 불확실하다. 여기에 틈이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인류는 다시 정상에 도달할 것이다. 조금만 주의 깊게 깨어 있으면 이 시기를 잘 이용할 수 있다. 삶의 수레바퀴에서 간단하게 빠져 나오는 것이 가능하다.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을 때에는 변형이 어렵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동적인 상황에서는 쉽게 변형이 일어난다.

이렇게 모든 것이 유동적인 시대에 태어난 우리는 행운아다.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다. 기존의 규범과 계율은 무용해졌고, 새로운 틀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곧 새로운 패턴이 형성될 것이다.
 
                                                                                                              -오쇼 라즈니쉬, <서양의 붓다 헤라클레이토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