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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의 거대한 힘을 발견하는 소설의 힘

나뭇잎숨결 2009. 3. 18. 19:45

사소한 것의 거대한 힘을 발견하는 소설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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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이래 최고의 체코 출신 작가로 꼽히는 밀란 쿤데라(79ㆍ사진)가 2005년 발표한 에세이집이다. 총 7부로 구성된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를 거칠게나마 요약한다면 ‘진정한 소설의 요건은 무엇인가’ 혹은 ‘소설가는 무엇을 써야 하는가’가 될 것이다. <농담> <웃음과 망각의 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느림> 등 진지한 사유와 파격적 형식을 갖춘 문제작을 줄기차게 내놓고 있는 쿤데라의 소설론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쿤데라는 16~17세기 활동한 라블레(<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이야기>)와 세르반테스(<돈키호테>)를 “소설에서 특별한 가치, 미적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했던”(15쪽) 비조(鼻祖)격 작가로 꼽으면서 이들을 기점으로 미학적 특질을 갖춘 장르로서 소설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기존 산문과 소설을 구분 짓는 행위는 무엇인가. 쿤데라는 ‘커튼 찢기’라고 말한다. “세상은 단장을 마친 상태, 가면을 쓴 상태, 선(先)해석이 가해진 상태다.…세르반테스가 새로운 소설 기법을 개척했던 것은 바로 선해석의 커튼을 찢어 버렸기 때문이다.”(126~127쪽) 책 속 다른 표현을 빌자면 “소설은 자기만의 기원과, 그에 고유한 시기들의 리듬이 있는 자신만의 역사를 갖고 있”(87쪽)을 때 비로소 소설은 세계의 진실에 도달하는 문(門)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오직 소설만이 사소한 것의 거대하고도 신비로운 힘을 발견해낼 수 있다.”(36쪽)

세계와 대면하는 방식으로서 소설의 독자적 입지에 대한 쿤데라의 믿음은 절대적이다. 그는 문학이 철학에 사상적 콘텐츠를 빚지고 있다는 통념을 단호히 거부한다. 일테면 철학적 실존주의가 발흥하기 20~30년 전 소설은 인물 성격에 대한 심리적 분석에서 인간이 처한 상황 조건을 살피는 실존적 분석으로 자체적인 방향 전환을 이뤘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쿤데라는 프란츠 카프카, 헤르만 브로흐(<몽유병자들>), 로베르트 무질(<특성 없는 남자>) 등을 언급하며 일군의 작가들이 실재의 재연이나 스토리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완결적인 상황과 공간을 창조해낸 점을 높이 평가한다. “소설 역시 역사적 시대 설명이나 사회의 묘사 수단으로 존재하기를 거부하고 전적으로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한다.”(96쪽) 그는 소설 형식을 해체하고 단순히 스토리만 남긴다는 이유로 소설의 연극ㆍ영화 각색에 부정적 평가를 내린다. 소설의 근본과 가능성에 대한 노작가의 도저한 믿음이 소설의 위기론이 파다한 오늘날을 곱씹게 한다.

 

 

기묘한, 매우 기묘한, 믿을 수 없는 하룻밤

2008 09/09   뉴스메이커 791호

느림
밀란 쿤데라, 김병욱, 민음사, 1995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익명의 서술자 목소리와 만난다. 인칭 대명사가 지시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것은 작가 자신의 것도 아니고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목소리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따라간다. 판독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따라간다. 알 수 없는 서술자의 목소리가 뱉어놓는 말들의 한 묶음. 그것이 우리를 이끈다. “독서는 이해가 아니다. 그저 따라간다. 이 놀라운 무지(無知).”(모리스 블랑쇼) 이 의심 없음, 이 무방비라니! 우리의 따라감은 그렇다.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아무 방비도 없다. 그저 무지한 어린애같이 목소리의 울림을 따라간다. 이 목소리는 소멸을 향하여 다가간다. 목소리는 문득 침묵에 도달한다.

“언제나 놓치는 무엇인가를 되짚으려고 열망하면서, 말하려는 것의 결여로 존재하는 것을 애써 찾”고자(블랑쇼) 했던 우리도 그 서술자의 목소리가 그친 지점에서 서술자와 동시에 침묵으로 빠져나온다. 서술자의 목소리는 공중에서 소멸한다. 서술자의 목소리가 강력하게 암시하던, 손에 닿지 않는 저 너머에 있는 타자의 계시도 아울러 사라진다. ‘느림’에서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시골길, 초원, 숲속의 빈터, 자연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는가?”라는 목소리의 발화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밀란 쿤데라인가, 아니면 소설 속의 일인칭 화자인가?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시대가 호명한 익명의 복수형 서술자의 목소리다.

‘느림’을 펼치는 순간 우리는 익명의 서술자 목소리와 만난다. 일인칭 화자 ‘나’는 성에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아내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는 중이다. 백미러를 통해 바라본 뒤를 따르는 자동차들은 추월의 기미를 엿보고 있다. 추월하려는 운전자들은 빨리 가지도 않고 추월의 기회도 주지 않는 앞 차의 운전자를 저주한다. 자동차의 속도에 제 존재를 전적으로 위임한 자들은 두려움을 모른다. 그들은 단지 속도의 엑스터시 자체에 몰입하기 때문이다.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이다. 오토바이 운전자와는 달리, 뛰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육체 속에 있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물집들, 가쁜 호흡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중, 자신의 나이를 느끼며,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신과 자기 인생의 시간을 의식한다. 인간이 기계에 속도의 능력을 위임하고 나자 모든 게 변한다. 이때부터, 그의 고유한 육체는 관심 밖에 있게 되고 그는 비신체적·비물질적 속도, 순수한 속도, 속도 그 자체, 속도 엑스터시에 몰입한다.” 속도에 관해 말하는 이 익명의 서술자 목소리는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현재의 이야기 위에 시간대가 다른 여러 겹의 이야기를 겹쳐놓는다. 그 첫 번째로 파리에서 어느 시골 성을 향하는 자신의 여행에 이백 년도 더 과거에 있었던 T부인과 한 젊은 기사의 여행을 겹쳐놓는다.

18세기 작가인 비방 드농의 단편소설이 전하는 이야기다. 어느 날 저녁 극장에서 스무 살의 젊은 기사는 T부인을 본다. 그 기사를 정부로 둔 백작부인의 여자친구다. T부인에게는 후작 애인이 있다. 그런데 T부인은 기사에게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그들은 정원을 산책하고, 그 다음 정자에서 정사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성의 한 밀실에서 사랑을 나눈다. 이른 새벽, T부인과 헤어진 기사는 복도들의 미로에서 길을 잃는다. 다시 정원으로 나왔을 때 거기서 T부인의 정부인 후작과 마주친다. 후작은 T부인이 남편에게 의심받지 않도록 방패막이로 기사를 이용했음을, 젊은 기사에게 가짜 정부라는 우스꽝스러운 임무를 맡겼음을 밝히고 기사를 조롱한다. 그리고 기사는 후작이 제공한 마차를 타고 파리로 떠난다. 18세기와 20세기 사이의 차이와 간격은 마차와 자동차의 차이요 속도와 비례한다.

밀란 쿤데라
밤의 정원에서 젊은 기사는 T부인에게 입맞춤을 요구한다. T부인은 그 요구를 받아들인다. 입맞춤은 또 다른 입맞춤으로 이어진다. 입맞춤들은 빨라지고, 간간이 대화를 중단시키고, 대체해버렸다. 한데 돌연 그녀가 몸을 일으켜 길을 되돌아가기로 결심한다. T부인의 이 돌발적인 행동은 무슨 뜻인가? 익명의 서술자 목소리는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최초의 그 성적 욕구의 혼란을 맛본 뒤, 사랑의 쾌락은 아직 무르익지 않은 열매임을 보여줘야 했던 것이요, 그 값을 올리고, 좀더 먹음직스럽게 만들어야 했던 것이요, 파란을, 긴장을, 서스펜스를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T부인이 보여준 것은 쾌락을 도덕의 금기에서 해방시킨 18세기의 느림의 사랑이다. 욕정의 맹목이 만든 서스펜스와 흥분 상태를 가능한 한 가장 오랫동안 연장시키려는, 느림의 지혜요, 감속의 기법인 것이다. 다시 서술자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젊은 아가씨가, 너 하고 싶니, 나도 하고 싶어. 그럼 시간 낭비하지 말자구!” 하는 오늘날의 느림의 지혜도, 감속의 기법도 모르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얼마나 다른가!

느림과 기억, 빠름과 망각 사이에는 실존 수학에서 말하는 기본 방정식이 성립한다.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발걸음을 늦추고, 빨리 잊고자 하는 사람은 발걸음이 빨라진다. 익명의 서술자 목소리는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모두 속도에 취해 있는 오늘의 시대는 망각의 욕망에 취해 있는 것이다. 익명의 서술자 목소리는 이 옛이야기에서 많은 것들을 연역해낸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는 것은 바로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함이고, “그가 발걸음을 빨리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 주길 이제 더 이상 바라지 않음, 자신에게 지쳤고, 자신을 역겨워하고 있으며, 스스로 기억의 그 간들거리는 작은 불꽃을 훅 불어 꺼버리고 싶음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라고.

성의 한 밀실에서 밤새도록 사랑을 나눈 T부인과 기사는 날이 밝자 그들을 깨우러 온 하녀의 도착으로 끝을 맺는다. 성의 복도 속을 헤매다가 밖으로 나온 젊은 기사는 새벽 정원을 산책하는 체하기로 한다. 그러다가 막 도착한 T부인의 정부인 후작을 만난다. 기사는 후작이 내준 마차를 타고 파리로 떠나며 기묘한 인연으로 하룻밤을 지샌 사랑 모험의 모랄에 대해 생각한다. 기사는 그것을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그때 다시 익명의 서술자 목소리가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그 모랄은 여기 있다. 바로 T부인이 그 모랄의 화신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거짓말 했고, 정부인 후작에게 거짓말 했고, 그 젊은 기사에게 거짓말 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익명의 서술자 목소리는 “모든 것을 드러내고, 열어젖히고,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밀려들어오는, 불꽃이다.” (블랑쇼) 이 불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 다른 말들을 뒤섞고, 흩어지고, 잃어버린 것들을 향하게 하고, 달아나고, 가고자 했던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샛길로 접어들게 하고, 그리고 바깥으로 이끈다. 목소리들에 의해 계시된 타자들의 있음으로 농밀해진 그 바깥 말이다. ‘느림’은 독자가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치닫는다. 지난밤을 난교 파티로 지새운 20세기의 벵상은 제 오토바이 쪽으로 가다가 T부인과의 정사로 지친 젊은 기사와 마주친다. 18세기와 20세기가 부딪치는 순간이다. “기묘한, 매우 기묘한, 믿을 수없는 하룻밤”을 보낸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인다. 젊은 기사는 마차 속에서 짙은 피로감 가운데서도 T부인 그의 손가락들 위에 남긴 사랑의 내음을 맡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향수를 “천천히, 꿈꾸듯이” 오래 음미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벵상은 “어서 빨리 이 밤을, 이 잡친 하룻밤을 잊어버리는 것, 이를 지워버리고, 말소하고, 무화해 버리는 것. 그래서 지금 이 순간 그는 속도에 대한 채울 수 없는 갈증을 느낀다.” 젊은 기사가 사랑의 기억을 연장하기 위해서 모든 것의 속도를 늦추려고 하는 반면에 벵상은 모든 기억을 지우고 말소하기 위해서 속도의 엑스터시에 저를 맡기고, 침울한 인류의 일부로 귀속해버리는 것이다.

<장석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