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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의 주체이론과 아버지의 은유

나뭇잎숨결 2009. 3. 18. 10:34

라깡의 주체이론과 아버지의 은유  

주체에 대한 라깡의 이론이 갖는 새로움은 '무의식의 주체로서의 주체'가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그 때 무의식은 주체의 내부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그 어떤 음침한 지대가 아니라 '깊이를 갖고 있지 않고' 다만 '언어처럼 구조화된 무의식'이다. '언어처럼 구조화된 무의식'이라는 가설은 프로이트의 꿈이론의 개념들과 구조주의 언어학의 개념들을 바탕으로 무의식의 과정은 언어와 유사하게 기능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이는 라깡의 새로운 주체이론의 근간이 된다. 이 글은 이와 같은 '새로운 주체'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 글은 제목이 시사하는 바처럼 라깡의 주체이론 전반을 포괄적으로 다루지는 않으며 정확히 말하면 '무의식의 주체가 어떻게 최초로 형성되는가'에 그 초점이 맞추어졌다.1)

 

라깡에 있어서의 '주체'의 형성은 무의식의 도래와 일치하며 이때 형성된 주체는 분열된 구조를 갖는 주체, 즉 무의식의 주체이다. 곧 보게 되겠지만 '거울 단계'와 오이디푸스 단계를 거친 어린아이는 이른바 '아버지의 이름'의 은유를 통하여 상징계로 진입함으로써 '말하는 주체'가 되는 동시에 또한 '무의식의 주체'요 '욕망의 주체'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아버지'는 '아버지의 기능'을 뜻하며 실제 아버지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다. '아버지의 이름'은 이와 같은 상징적 기능의 인지와 관련된 지칭이며, 그 상징적 기능은 '아버지의 법'이 행사되는 장소, 즉 상징적 영역에 국한되어 있다. 결국 '아버지'는 은유이며, 주체는 그 은유라는 언어의 매커니즘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분열과 소외의 구조를 배태한 채 형성되는 것이다.

 

 

I. 거울 단계와 오이디푸스

 

라깡의 그 유명한 '거울 단계(le stade du miroir)'라는 것은 어린아이가 자기 신체 이미지를 획득해 가는 동일시의 경험을 설명한다. 이와 같이 신체 이미지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내'가 구조화되는 것이다. 라깡에 따르면 거울 단계 이전에 어린아이는 자신의 신체를 통일된 전체가 아닌 흩어진 어떤 것으로 경험한다. 이른바 산산이 '조각난 신체(le corps morcele)'의 환상이라는 독특한 심리 상태가 '거울 단계'에서 극복되는 것이다. 우리가 꿈에서나 혹은 정신병의 상태에서 빠지게 되기도 하는 이런 '조각난 신체'의 환상적 경험은 '실제 나'와 '거울 속에 비친 나'를 오가는 거울의 변증법으로 극복되어, 우리는 신체의 흩어짐에 대한 불안을 없애고 '정형외과적(orthopedique)' 형태를 거쳐 결국 자기 신체의 통일성을 얻게 된다.2)

거울 단계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처음에 어린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 신체의 이미지를 다가가서 만질 수 있는 실제 대상의 이미지로 지각한다. 한마디로 말해 자기와 타자를 혼동하고 있는 상태이다.3) 그러나 두 번째 시기에서 어린아이는 거울 속의 '타자'가 실제 존재가 아니라 이미지일 뿐이라는 사실을 어느 사이엔가 깨닫게 되며, 따라서 타자의 이미지와 타자의 실재를 구분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거울 단계의 세 번째 시기는 선행하는 두 시기들이 종합되는 양상을 띠어서, 어린아이는 거울에 비친 모습이 단지 이미지일 뿐이라는 사실과 그 이미지가 바로 자신의 이미지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이렇게 이미지를 통해서 스스로를 인식하면서 어린아이는 조각난 신체의 흩어짐을 극복하여 통일된 전체로서의 신체 표상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이 신체 이미지를 바탕으로 주체의 동일성이 기본적으로 확립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주체의 동일성이 획득되는 과정이 이미지와 관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린아이는 시각적 이미지라는 그 어떤 가상적인 것을 통해서 자신을 인지한다. 그의 신체 이미지는 분명 그 자신은 아니며, 그러나 어쨌든 그것 안에서 자기 스스로를 인지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다. 결국 거울 단계에서의 어린아이는 가상적인 차원, 이른바 '이미지계(l'imaginaire)'에 종속됨을 알 수 있다.4) 거울 단계의 어린아이는 자기 신체에 대하여 특정한 인식을 갖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기 때문에 단지 가상적 인지만을 하게 된다.

이렇게 '내'가 형성되는 예비과정을 상징화하고 있는 거울 단계는 그 구성 원리상 이미지계 안에서의 소외의 운명을 이미 안고 있는 셈이다. 거울에 비친 이미지로부터의 자기인식은 시각적으로 볼 때 외적이며 좌우가 뒤바뀐 상태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자기 동일성을 획득하려는 주체에게 있어서의 자기 인식은 애초부터 이미지적인 소외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게 되며, 결정적으로 주체는 자기 스스로를 끊임없이 오인하게 된다. 거울 단계에서부터 '나'는 만성적 자기 '오인(la meconnaissance)'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5)

거울 단계의 마지막 시기에 어린아이는 이미 어느 정도 주체로 형성될 준비를 시작하며 이와 동시에 그의 어머니와 긴밀한 융화관계를 맺게 된다. 여기가 바로 오이디푸스가 등장하는 대목이다. 오이디푸스 단계도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어서 그 최초 시기와 거울 단계의 마지막 시기가 일치한다고 도식적으로 말할 수 있겠다.6) 어린아이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함과 자기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함이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최초의 동일시 단계가 오이디푸스의 첫 시기이며, 두 번째 시기는 아버지의 금지가 거세로 다가오는 시기이고, 마지막 시기가 바로 '아버지의 이름'이 문제되는 시기, 즉 상징계로 진입하는 시기로서 아이가 이번에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두 번째 동일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오이디푸스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 내가 결정적으로 주체로 구조화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최초시기에 발견되는 어머니와의 융화관계는 어린아이가 그의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어머니가 아이를 돌봐주고 그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어린아이는 그의 어머니에게 결여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이 되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해 오이디푸스 1기의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하며, 어머니의 욕망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그러면 어머니에게 결여된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남근(le Phallus)'이며, 아이는 어머니와의 융화관계에서 스스로 '어머니의 남근'이 되려고 - 아니 그보다 '어머니의 남근'으로 '있으려고' 한다. 라깡은 이런 상황을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다시 말해 '남근이냐 아니냐(to be or not to be le Phallus)'의 문제로 표현하고 있다.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남근으로 있어야만 하고 또 남근으로 있으면 충분한 것이다.7)

어머니와 아이의 융화관계는 제3자의 개입이 없을 때에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 아버지가 틈입(闖入)함으로써 오이디푸스의 새로운 시기가 시작된다. 오이디푸스 2기에서의 이와 같은 아버지의 틈입은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금지로 나타난다.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하여 당당한 권리를 갖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여 아이에게 '박탈', 다시 말해 '실제 대상(어머니)의 상상적 결여'의 감정을 겪게 만든다.8) 따라서 아이는 스스로를 남근과 동일시할 수 있음에 의문을 제기하고는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기를 포기하게 된다. 한편 이와 같은 상황을 아이가 생각하는 어머니의 입장에서 기술한다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서 남근을 빼앗아 가 '상실'하게 만드는데, 이 때 '어머니의 남근'은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한 어린아이 바로 그 자체인 것이다. 역시 남근이냐 아니냐 이것이 문제이다.

아버지의 틈입은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에서 아버지가 일종의 타자로 등장하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나타난 아버지가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 즉 남근적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어 아이는 어머니를 놓고 아버지와 상상 속에서 경쟁하게 된다. 그러나 경쟁의 승패는 남근적 대상이 과연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어린아이는 그것이 결국 아버지에게 귀속되어 있음을 깨닫고 거기서 '아버지의 법'을 만나게 된다. 어머니가 아이의 요구를 만족시켜주지만 그것도 역시 아버지를 통해서 제공됨을 인식하고 아이는 자신의 욕망이 어머니를 가로질러 필연적으로 '아버지의 법'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이렇듯이 어머니도 '아버지의 법'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타자에게서 그 타자의 타자와 조우함을 의미한다.

어머니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의 법칙에 종속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어린아이 자신의 욕망도 역시 타자가 갖거나 갖지 않은 대상에 종속되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어머니가 더 이상 단순히 그 자신의 욕망의 대상에 의존하지 않고 타자가 갖거나 갖지 않은 대상에 의존적이라는 사실로부터 '아버지의 법'이 최초로 출현한다. 바야흐로 '남근을 가졌느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인 소유의 변증법이 어머니의 욕망의 문제와 연결되어 대두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아이의 욕망의 문제를 좌우했던 '어머니의 남근이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인 존재의 변증법이 소유의 변증법으로 대체된다. 이렇게 등장한 '아버지(le Pere)'는 남근을 가진 자 또는 남근의 장소로 상징화된 아버지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이디푸스 2기를 마감하면서 어린아이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자신이 어머니에 의해 욕망된 남근적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확실성이 흔들리자 아이는 더 이상 남근으로 있지 않음, 즉 남근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경우처럼 그것을 갖고 있지 않음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아이는 어머니가 남근이 있다고 상정되는 그 곳에서, 그리고 그것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바로 그 곳에서 그것을 욕망할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된다. 여기에 바로 거세 콤플렉스의 핵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거세 콤플렉스에 대한 라깡의 해석에 따르면, 남근을 갖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을 가질 수 없다고 가정되었어야만 하며, 이 거세되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남근을 가진다는 가정에는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이제 남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실제적으로 개입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며 그것은 오이디푸스 3기에서 전개된다.

오이디푸스 3기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사라지는 시기로서 아이가 상상 속에서 어머니를 놓고 그의 아버지와 벌이는 남근 경쟁이 그 종말을 고하게 된다. 결국 아버지가 '남근적'이라는 속성을 부여받게 된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이 시기에 남근으로서가 아니라 남근을 가진 존재로서 충분한 증거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남근이 더 이상 아버지가 어머니에게서 상실시킨 대상이 아니라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그 위치가 재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오이디푸스의 마지막 시기는 결국 법의 상징화로 특징 지워진다. 이런 상징화에 힘입어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의 정확한 장소를 알아낼 수 있으며, 아버지는 바로 이런 조건하에서만 법을 대표하는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아버지가 더 이상 그에게 경쟁 남근이 아니므로, 어린아이는 남근과의 관계를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소유의 문제로 수정한다. 아버지는 이제 남근을 '가진' 만큼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을 어머니로부터 상실시킨 자가 아니다. 남근을 가졌다는 것은 남근을 그 있어야 할 장소에 복원시켜서 거기서 어머니로 하여금 욕망하게끔 하였음을 의미한다. 이제 어머니와 아이는 소유의 변증법에 위치하므로, 남근을 갖지 않은 어머니는 그것을 가진 자 곁에서 그것을 욕망할 수 있고 역시 남근을 갖지 않은 아이는 그것이 현재 있는 장소에서 남근을 탐내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남근을 가졌느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이다.

소유의 변증법은 필연적으로 동일시의 과정을 초래한다. 성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남근을 중심으로 한 동일시의 논리가 개입한다. 남자아이는 어머니의 남근이 되기를 포기하고 남근을 가진 것으로 상정된 아버지와 동일시함으로써 남근을 가진 양태로 소유의 변증법에 참여한다. 여자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의 위치에서 벗어나서 남근을 갖지 않은 양태로 소유의 변증법을 만나게 된다. 결과적으로 여아는 어머니와 동일시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어머니와 같이 남근이 어디 있는지 알고 어디서 얻어야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을 '가진' 아버지 쪽에서 찾아야 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남아든 여아든 간에 그의 어머니가 남근을 '가진' 아버지를 선호함이 분명해짐에 따라 남근은 제자리를 찾게 된다. 어린아이가 보기에 어머니가 아버지를 선호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남근의 문제가 존재의 영역에서 소유의 영역으로 이행되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다음에서 살펴보게 될 '아버지의 이름'의 은유 과정이 발동하기 시작했음을 알려준다.

 

 

II. 아버지의 은유와 욕망의 주체

 

프로이트가 기술한 '포르트-다(fort-da)' 놀이는 어린아이가 어떻게 상징계로 진입하는지 그 과정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9) 여기서 어린아이는 상실된 대상을 상징적으로 지배함으로써 상징계로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와 같은 상징계로의 진입이 바로 '주체'의 출현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어린아이는 이른바 '아버지의 이름(le Nom-du-Pere)'의 은유를 완수함으로써 상징계로 진입하며 그 결과 비로소 주체로 되느니 만큼 이제 '아버지의 은유(la metaphore paternelle)'와 주체 형성과의 관계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포르트-다'는 사라짐과 돌아옴에 대한 하나의 완벽한 놀이이다. 보통은 아이가 실패를 계속해서 던지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서 그 행위만을 놀이로 간주하나, 프로이트가 보기에 사실은 두 번째 행위, 즉 실패를 다시 나타나게 하는 그 행위에서 아이는 가장 큰 기쁨을 얻는다는 것이다. 놀이의 핵심은 바로 두 번째 행위에 있는 셈이다. 프로이트의 해석에 따르면 이 놀이는 반대 의사 표시 없이 그의 어머니의 떠남을 허용하기 위해서 어린아이가 수행한 포기, 다시 말해 충동의 만족을 포기함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어린아이는 그에게 사용 가능하게 주어진 물건을 가지고 스스로를 상황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사라짐-나타남'을 나름대로 벌충하는 놀이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놀이만큼 라깡이 말하고자 하는 '기표적 대체', 즉 은유를 더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예는 찾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은유는 이중적으로 이루어진다. 실패 그 자체는 이미 어머니의 은유이며, '현전-부재'가 또 하나의 은유가 된다. 그것은 이 놀이가 바로 '돌아옴-떠남'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유희 활동은 그가 상황을 그에게 유리하도록 완전히 뒤집어 놓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사실 이 점이 프로이트의 관찰이 시사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어린아이가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켜 놓았다고 하는 까닭은 그의 어머니를 '상징적으로' 떠난 것이 이제부터는 어린아이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발생된 상징적 역전은 지배의 과정이 실제로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아이는 동일시의 작업을 통해 부재를 지배하게 된다. 과거에 부재함으로써 아이를 쫒아버린 것이 어머니였다면, 이제 실패를 던짐으로써 어머니를 쫒아버리는 것은 바로 어린아이 자신이 된다. 이로부터 상실된 대상(어머니)의 부재를 자신이 지배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서 아이는 크나큰 환희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한편 다른 시각에서 보면 '포르트-다' 놀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준다. 이제 어린아이는 더 이상 어머니의 욕망의 유일한 대상이 되지 않도록 근본적인 지배를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아이는 '타자(l'Autre)의 결여를 채워주는 대상', 즉 '남근(le Phallus)'이 더 이상 아닐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는 자신의 욕망을 상실된 대상을 대체하는 대상들을 향한 주체의 욕망으로서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상실된 대상을 상징적으로 지배하게 되었음을 알리는 결정적인 표식은 무엇보다도 상징계로의 진입, 바로 언어의 출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상징계의 등장은 '원억압(le refoulement originaire)'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아버지의 이름'의 은유가 수행됨에 따라 이루어진다. 여기서 '원억압'이란 '은유화(la metaphorisation)'로 이루어진 구조화의 과정을 말하며, 구체적으로 '은유화'란 '남근적 기표(le signifiant phallique)'를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기표로 대체하는 이른바 '기표적 대체' 안에서 수행되는 '상징화(la symbolisation)'를 지칭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상징화란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라깡은 다음과 같은 알 듯 모를 듯한 공식을 말하곤 하는데, 이것이 바로 상징화의 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겠는가? - "만약 우리가 사물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는 말로 사물을 상징화하면서 그 사물을 죽인다"; "말(la parole)은 사물(la chose)을 죽인 살인자이다".10) 상징화는 무엇보다도 주관적 경험을 상정한다. 이 주관적 경험에 의해서 아이는 직접적 체험에 대체물을 주기 위해 직접적 체험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라깡이 제시하는 다음 공식의 의미일 것이다 - "사물은 표상 되기 위해서는 사라져야만 한다".

아이의 '직접적 체험'이란 '존재의 변증법' 안에서의 그의 상태를 나타내는 다음과 같은 표현 양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의 유일한 대상으로서 존재하며, 어머니의 결여를 채워주는 대상으로서 존재하고, 어머니의 남근으로서 존재한다. 존재 안에서의 이러한 체험들에 대체물을 주기 위해서 아이는 소유의 차원으로 다가가게 된다. 이와 같이 '소유의 변증법'으로 진입한다는 것은 아이가 자기 스스로를 체험과, 그리고 그 체험을 표상하기 위해 불러들인 상징적 대체물과 구별할 수 있음을 가정한다. 다른 말로 해서 이 과정에는 아이가 스스로를 단지 타자(l'Autre)의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서 정립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체의 출현은 처음으로 아이가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써 비롯된다.

언어를 맨 처음 사용하면서 어린아이는 상실된 대상을 자신이 포기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지칭하려고 노력한다. 그와 같은 지칭은 '남근적 기표', 즉 '어머니의 욕망의 기표'를 억압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 무의식 속에 억압된 이 기표는 차후에 오는 모든 기표의 발화 연쇄(S2..S3..S4..)를 지배하는 최초의 기표(S1)가 된다. 이렇듯이 원억압은 직접적으로 체험된 실재계에서부터 그 실재계가 언어로 상징화되는 이행과정을 보장하는 역할을 한다. 라깡은 이런 근본적인 사건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물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는 말로 사물을 상징화하면서 사물을 죽인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렇듯이 원억압이 언어에 의한 상징화, 다시 말해 '아버지의 은유'를 가능케 한다면 일반적으로 은유는 어떤 메커니즘을 갖는지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원래 은유란 새로운 기표(S2)를 도입하여 그 새 기표가 예전의 기표(S1)를 의미의 횡선 아래로 보내는 과정이다. 그 결과 예전 기표는 무의식으로서 잠정적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라깡은 이런 대체의 원리를 다음과 같은 은유 공식으로 도식화한다.11)

 

S2 S1 I

――― ? ――― ―→ S2 ( ―― )

S1 x s1

 

공식의 우변에 보이는 무의식을 나타내는 기호(I)는 S1이 S2로 대체되기 위해서 억압되었음을 나타낸다. S2는 이제 어머니의 욕망의 기의, 즉 남근의 기의(s1)와 연결된 기표가 되었다.

우리는 위의 공식으로 표현되는 은유의 메커니즘을 '포르트-다' 놀이에 적용하여 설명해볼 수 있다. 놀이를 하면서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현전-부재를 통하여 자신의 원초적 욕망의 표현을 포기하는 방법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어머니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어머니가 원하는 것이 오직 나이기를 나는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원하는 것이 오로지 나뿐만은 아니며 어머니를 움직이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있음이 너무나 명백하다. 어머니를 움직이는 것, 그것은 x이며, 그것은 기의이다. 어머니의 돌아옴과 떠나감의 기의는 다름 아닌 남근인 것이다.

이런 원초적 욕망의 표현을 의미 관계, 즉 기표/기의 관계로 바꿔서 표현해 보면(S1/s1), 어머니의 욕망의 기표(S1) 아래에 기의(s1)로서 어머니의 욕망의 관념인 남근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오이디푸스 단계의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먼저 경쟁적인 '남근적 대상'으로, 그 후 '남근을 가진 존재'로 나타남을 이미 보았다. 아이가 어머니의 부재의 원인을 남근을 가진 '상징적 아버지(le Pere)'와 연관지어서 지칭할 수 있을 바로 그 때부터 기표/기의의 의미 관계가 아이에 의해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가 바로 '아버지의 이름'이 명시적으로 개입하는 순간이며, 또한 '아버지의 이름'이 구현하고 있는 '상징적 법(la Loi)'이 등장하는 대목인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새로운 기표(S2)로서 아이에게 있어서 최초의 기표인 어머니의 욕망의 기표를 대체하게 된다. 라깡의 은유공식으로 설명해 보면, 아버지(S2)는 어머니(S1)를 대신하여 등장한다. 그 어머니(S1)는 이미 그 어떤 x와 관련이 있는 그런 어머니이다. 다시 말해 아이와 어머니의 관계에서 기의의 역할을 하는 그 어떤 x와 이미 연결되어 있는 어머니(S1)를 아버지라는 새로운 기표(S2)가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표적 대체의 과정에서 어머니의 욕망의 기표(S1)는 원억압의 대상이 되어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이와 같은 기표적 대체의 은유 과정을 라깡은 아래의 공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아버지의 이름 어머니의 욕망 타자

―――――――――― ? ――――――――――――― ――→ 아버지의 이름 ( ――― )

어머니의 욕망 주체가 갖는 기의 남근

 

이 공식에서는 억압의 표식이 무의식의 기호(I) 대신에 '타자'라는 기호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타자 안에 있는 기표는 통상적으로 주체에게는 닫혀진 채 있는 기표인데, 그 까닭은 이 기표가 보통은 억압된 상태로 있기를 고수하며, 따라서 자동적으로 반복함으로써 기의 안에 다시 나타나려 고집하기 때문이다.12)

실제로 이런 자동적인 반복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과가 초래된다. '아버지(le Pere)'를 지칭하면서 어린아이는 사실은 항상 자신의 욕망의 근본적 대상을 지칭하기를 되풀이한다. 그러나 이제 아이는 아버지를 은유적으로 지칭한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아이에게 무의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의 기호는 주체도 모르는 사이에 실행되는 지칭의 과정에서 욕망의 근본적인 대상의 영속성을 표명하는 소임을 맡게 되었다. 라깡은 이와 같은 상황을 가리켜서, 언어는 영구히 표현하게 만든다고 말하고 있다. 상호 주관적인 소통에 사용되는 상징들의 목록과 체계에 위배되지 않도록 표현들을 사회화하면서 언어는 욕망의 대상을 계속 다르게 표현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원억압과 '아버지의 은유'에 의해서 욕망은 언어에 의한 중개를 필요로 하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바로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기표가 언어 안에서 욕망을 소외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유는 욕망이 말로 되면서부터 그 표현된 욕망은 더 이상 욕망이 아니라 욕망의 반영일 뿐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유의 욕망을 위해서 억압된 존재의 욕망은 이제부터 어린아이에게 그의 욕망의 대상을 정함에 있어서 상실된 대상을 대체하는 대상들의 영역에서 찾을 것을 강요한다. 이를 위해서 욕망은 '말(la parole)'이 되어 '요구(la demande)'의 형태로 나타내질 수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그러나 요구로 표현되면서 욕망은 더욱 더 담화의 기표 연쇄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된다. 하나의 대상에서 또 다른 대상으로 욕망은 항상 무한한 대체물의 연속을 지칭하게 되며, 동시에 대체된 대상들을 상징화하는 기표들의 무한 연속을 지칭하게 되는 것이다. 주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자신의 원초적 욕망을 지칭하려고 고집하면서 이와 같은 욕망의 무한한 지칭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은 자신이 언어화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에 항상 집착하지만 결코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 따라서 욕망은 계속 새롭게 생겨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욕망은 그가 겨냥하는 대상과 또는 이 대상을 적확하게 상징화할 수 있는 기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곳에 항상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욕망은 이른바 환유(la metonymie)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13) 이렇듯이 '아버지의 이름'의 은유는 어린아이로 하여금 부분을 전체로 간주하도록 강요한다. 다시 말해 전체인 상실된 대상 대신에 부분일 뿐인 대체된 대상, 즉 대용품을 취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수한 두뇌'가 '두뇌'라는 부분으로 '인재' 전체를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욕망은 부분(代用의 대상들)으로 이루어진 욕망의 표현으로 전체(상실된 대상)에 대한 욕망을 지칭하려 고집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아버지의 은유'는 어린아이의 심리발달 과정상에서 하나의 중요한 구조적 계기를 이루고 있다. '아버지의 은유'는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상징적 차원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아버지의 은유에 의해서 아이는 그의 어머니에게 이미지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상태로부터 분리되어서 상징계로 진입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미지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과 더불어서 아버지의 은유는 '욕망의 주체'로서의 자격을 아이에게 부여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자격부여는 새로운 소외의 대가를 치르고서야 이루어진다. '욕망 하는 주체(le sujet desirant)'가 되자마자, 욕망은 언어의 포로가 되어 언어 안으로 사라지게 되며, 욕망은 오직 욕망의 대상에 환유적 대상의 성질을 강요하는 대체적 기표를 위해서만 표상되기에 이르렀다.

 

 

III. 주체의 분열과 소외

 

'아버지의 이름'의 은유는 어린아이로 하여금 '상징계'로 진입함으로써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주체'가 되도록 한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의 은유'가 이 주체에게 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정신적 '분열'의 구조를 만들어 놓고 만다는 데 있다. '아버지의 이름'의 은유를 지배하는 원리 자체는 '기표적 대체'와 같은 전적으로 기표와 관계되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 지탱된다. 따라서 주체가 형성됨에 있어서 그것이 분열의 구조를 갖게 됨은 바로 기표적인 것에 기인하며, 바꿔 말하면 '주체는 언어에 의해서 분열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게다가 아버지의 은유는 원억압(1차적 억압)에 의해, 다시 말해 무의식의 출현에 의해서 지지되느니 만큼, 그 자체로서의 '무의식도 역시 기표적인 것에 종속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메타심리학적 구성은 '언어처럼 구조화된 무의식'이라는 라깡의 유명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논증이 될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주체의 구조'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 된다.

자끄 라깡에게 있어서 '분열'은 프로이트에서와는 달리 일의적(一義的)이다.14) '분열'은 주체성을 규정함에 있어서 맨 처음에 위치한 시발점으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갖고 있다. 왜냐하면 '분열'에 의해서 비로소 주체가 출현하며 또한 주체는 '분열'에 의해 나타나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그 어떤 심적 양태로 구조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깡에게 있어서의 '분열'은 '체계내 분열'도 '체계간 분열'도 아니며, 심적 장치를 '다체계적 체계(le systeme plurisystemique)'로 만드는 그 어떤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분열'은 주체 자체를 상징적 질서라는 제 3의 질서에 종속시키면서 주체의 출현을 알리는 개시(開始) 분열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처음으로 출현한 주체가 곧바로 상징적 질서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은 '이미지계(l'Imaginaire)'와 '실재계(le Reel)'를 '상징계(le Symbolique)'라는 제 3의 질서가 연결해 주며 주체는 결국 '상징계'의 중개를 통해서만 '실재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작용은 '아버지의 은유'의 과정이 수행됨에 따라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아버지의 은유' 과정을 따라서 하나의 언어기호('아버지의 은유' S2)는 무의식이 되어버린 욕망의 원초적 대상(어머니의 욕망의 기표, 즉 '남근적 기표' S1)을 은유적으로 지칭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이렇듯 어린아이가 그의 욕망의 대상을 부지불식간에 '아버지의 이름'의 기표로 지칭하기를 계속한다면, 오직 한가지 결론만이 타당해 보이는데, 이는 '그가 말하는 것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어린아이는 '그가 언표하는 것에서 그가 진정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채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언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도구로 우리가 말하는 가운데 진정 말하고 있다고 믿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 주관적 활동인 것이다. 이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다름 아닌 발화 주체가 근접하지 못하는 무의식이다.

이렇듯 기표적인 것에 의해서 주체의 분열이 야기된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언어는 무의식을 조건짓는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언어는 무의식을 도래하도록 하며 무의식을 어떤 일정한 곳에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언어는 무의식의 결정 요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라깡은 자기 이론을 해설한 르메르(Lemaire)의 책 서문에서, "언어는 무의식의 조건이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무의식은 "언어의 논리적 귀결"이며 "실제로 언어 없이 무의식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15) 라깡에 따르면 주체가 분열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발화 존재(l'etre parlant = le parletre)'에게 있어서만 주체가 있다는 것을 상정하는 셈이다. 라깡의 주장을 요약하면, 주체를 그 분열의 과정, 즉 무의식의 도래 과정에서 구조화하면서 주체를 형성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기표적인 것, 다시 말해 언어이다.16)

또한 원억압과 '아버지의 은유'에 의해서 확립된 주체의 분열은 차후의 이차적 억압으로 말미암아 영속화되고 만다. 이차적 억압은 무의식의 장소를 담론의 진행 상에서 구성된 기표들의 장소로 만들어서 주체가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된 언어의 구성과 유사한 기표적 구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라깡은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라고 했던 것이다.17) 분열 때문에 '주체의 타자'가 발화하는 담론은 주체에게는 빗겨가는 '타 주체'의 담론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기표적인 것에 의한 주체의 분열은 주체성의 또 다른 근본적 속성을 만든다. 언어에서의 그리고 언어에 의한 주체의 소외가 바로 그것이다. 주체가 상징적인 것과 맺는 관계의 방식 때문에 주체의 소외가 발생하는 것이다. 주체는 기표 연쇄 속에서 증발되어 버리고 말아 철저히 비본질적이게 되는 그의 성격을 상징적인 질서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내게 된다. 알다시피 언어의 고유함은 바로 실재를 상징적 대체물로 바꿔 표현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이 상징적 대체물은 체험된 실재와 그 실재를 의미하는 것 사이에 어김없이 분열의 틈을 만들어 놓고 만다. 다시 말해서 이 실재를 의미하는 상징적 대체물은 실재 그 자체가 아니며 실재는 그것에 의해 단지 표상될 뿐이다. 그래서 라깡은 "사물은 표상 되기 위해서는 사라져야만 한다"고 공식화하였던 것이다.

이렇듯이 언어는 독특한 속성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어떤 실재의 현전을 그 실재 자체가 부재한 연후에라야 표상할 수 있는 속성을 말한다. 라깡의 말을 인용해 보면, "부재조차도 이미 그것이 부재로 이루어진 현전일 뿐인 단어를 가지고 그 스스로를 지칭하게 된다"는 것이다.18) 이와 같은 상황에서 주체가 그 자신의 담화 혹은 담론과 맺는 관계는 역시 분열의 성격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주체는 분열의 틈을 거쳐서만 스스로의 담론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갖는 것이다. 주체는 단지 하나의 상징으로 표상되기 위해서 주체로서는 사라지게 되며, 다시 말해 주체의 자격을 이제부터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라깡의 사위이자 그의 『세미나』의 출간을 책임 맡은 밀레르(J.-A. Miller)는 주체가 그의 담화 연쇄와 갖는 이런 독특한 관계를 지칭하기 위하여 '봉합(縫合, sutur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19) 밀레르에 따르면 주체는 그의 담론에서 '결여되어 있는 요소'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마치 자리를 잡아주는 일종의 대리인을 세워놓고 주체가 자리를 비운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주체는 거기에 결여되어 '있으므로' 완전히 부재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자리를 잡아주는 임무를 우리가 일상적으로 어떤 상징 기호들에 부여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선 우리의 이름이 이 역할을 감당하며 '나', '너', '그', '우리' 등의 인칭대명사가 단골 대리인이 된다. 어원적으로 보아도 명백한 '대-명사(pro-nom)'의 기능은 바로 주체의 담론에서 주체의 상징적 표상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주체가 자신의 담론과 맺는 특이한 관계는 결국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주체가 그의 담론에 현전하려면 스스로 그의 존재에는 부재한 것으로 드러나야만 한다. 이런 관계는 다시 한번 주체의 분열 구조를 나타내줄 뿐만 아니라, 주체는 언어로 표현되자마자 자신의 원인인 언어 안에서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해준다. 중요한 것은 주체가 언어의 원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언어가 주체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언어에 의해서 도래한 주체는 언어가 원인인 만큼 결과의 양태로 출현하게 된다. 그러나 언어의 결과인 주체는 그를 존재하게 한 원인인 언어에 의해서 존재하자마자 그의 본래적 존재로부터 멀리 사라져버리게 되고 마는 것이다.

라깡은 이러한 사라짐을 가리켜 주체의 '페이딩(le fading)'이라 명명하였다. 주체의 '소실'을 의미하는 이 용어는 주체가 언어를 통하여 표상으로서만, 다시 말해 가면을 쓴 채의 상태로만 스스로를 파악할 수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그런데 가면이란 그것을 쓴 주체를 그 자신 스스로에게 감추면서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자신의 고유한 담론에서의 주체의 이와 같은 소외를 라깡은 주체의 '재분열(la refente)' 또는 '분리(la separation)'라 부르기도 한다.20)

한편 언어는 서로 대립 관계에 있는 기호들의 체계이다. 그러므로 기표 연쇄상에 있는 어떤 하나의 기표는 나머지 모든 다른 기표들과의 관계 하에서만, 즉 맥락에 따라서만 그 의미를 갖는다.21) 기표들의 연쇄가 그 연쇄의 마지막에 위치한 기표가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정지되어야만 전체 의미가 소급적으로 산출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라깡의 그 유명한 '욕망의 그래프'에서 '접합점'이 뜻하고 있는 바이다.22) 그런데 주체를 출현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기표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주체는 자신의 원인이 된 언어로 표상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앞에서의 결론이었다. 이때 기표는 어떤 또 다른 기표를 대신하여 주체를 표상하는, 다시 말해 '대신 표현해주는' 그런 것이며, 이는 언어 체계의 내적 구조상 불가피한 사실이다.

이렇듯이 주체는 대표자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담론에 나타나기 때문에, 만약 담론에서 주체를 주체로 내세우는 것이 기표라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다른 기표와 연관해서만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주체는 기표의 결과로서만 간주되어야 하며 어떤 명목에서든지 간에 주체는 기표의 원인이 될 수 없다. 라깡의 '지워진 주체(S)'의 개념은 바로 이와 같은 결론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주체는 기표적인 것에 의해서 등장함에 있어서 결코 '지워진 주체'로서만, 다시 말해 스스로에게 소실 내지 소외된 채로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 주 석-

 

1. 이 글은 필자가 한국 외국어대 철학과에서 1996년 2학기에 행한 강의의 후반부를 바탕으로 쓰여졌음을 밝히면서 지루한 강의를 경청해준 학생들에게 감사한다. 라깡의 주체이론 전반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김형효 교수의 역작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의 제4장과 그의 논문 「라깡의 반철학과 욕망으로서의 주체」(『현대 존재론의 향방』, 철학과 현실사, 212-235쪽)를 참조해야 할 것이다.

2. Lacan, Ecrits, p.97.

3. Lacan, Ecrits, p.113. 실제로 어린아이는 우선 타자 안에서 자신을 보고 인식한다고 라깡은 보고하고 있다. 생후 6개월에서 2년 반 사이의 아이는 전이된 감정의 반응을 보여서, 다른 아이를 때리고 오히려 맞았다고 말하고 남이 넘어지는 것을 보고 자기가 울음을 터뜨린다는 것이다.

4. 'l'imaginaire'를 흔히 '상상계'라고 번역하나, '이미지(image)와 관계된 것'을 의미하므로 '이미지계'라고 옮긴다.

5. Lacan, Ecrits, p.99.

6. J.-B.Fages, Comprendre Jacques Lacan, Privat, p.21.

7. 남근의 문제를 '존재의 변증법'과 '소유의 변증법'으로 설명하고 있는 라깡의 텍스트는 '아버지의 이름'의 은유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진 그의 1957-1958년 『세미나』(Seminaire V : Les formation de l'inconscient)이지만 이 텍스트는 현재 미발행의 타자본 상태이므로 그 내용이 풍부하게 인용된 J.Dor, Introduction a la lecture de Lacan(1), p.97-122에서 자유롭게 재인용한다.

8. 아버지가 '금지(l'interdiction)'로 등장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금지하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어머니를 금지시킨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속하며 아이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면서 아버지는 아이에게서 어머니를 '박탈'하고 있는 셈이다. 라깡은 '대상의 결여(le manque de l'objet)'를 세 가지 양태, 즉 '박탈(la frustration)', '상실(la privation)' 그리고 '거세(la castration)'로 구분하고 있다. 이들 결여 양태 사이에는 그 질과 대상의 차이가 있어서, '박탈'은 '실제적 대상의 상상적 결여'를, '상실'은 '상징적 대상의 실제적 결여'를, 끝으로 '거세'는 '이미지적 대상의 상징적 결여'를 각각 의미한다.(Lacan, Seminaire IV (1956-1957) : La relation d'objet, p.25-39)

9. Freud, Jenseits des Lustprinzips(1920), S.E., XVIII, p.1-64. 프로이트는 어느 날 자신의 입장을 확인시켜 주는 관찰을 하게 된다. 한 어린아이가 끈으로 묶은 나무 실패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흔히 보통의 아이들은 그 경우 실패를 끈으로 질질 끌고 다니면서 자동차 놀이를 할 테지만 그 어린아이는 독특하게 실패 던지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실패를 침대 가장자리로 넘겨 커튼 쪽으로 던져서 그 실패가 안보이게 되면 '오오(o-o-o-o)'라고 외치고, 끈을 잡아 당겨 다시 실패가 눈앞에 나타나면 기쁨에 넘쳐서 '다(da)'라고 외치는 것을 관찰하였다. 어린아이가 외치는 '오오'라는 발음은 '멀리' 또는 '떠난' 등을 뜻하는 독어의 'fort'를 의미하며, 'da'는 우리말로 '여기'를 뜻한다.

10. Lacan, Ecrits, p.319.

11. Lacan, Ecrits, p.557. 논의의 편의상 라깡의 원래 공식에서 'S''를 'S1'으로 'S'를 'S2'로 바꾸었다.

12. Lacan, Ecrits, p.557.

13. Anika Lemaire, Jacques Lacan, p.295.

14. '분열(die Spaltung)'이라는 용어는 예비적 고찰을 필요로 한다.(Cf. J.Laplanche et J.-B.Pontalis, Vocabulaire de la psychanalyse, p.67-70) 정신적 '분열'이라는 개념은 이미 19세기 말엽의 정신병리학에 의해 암시적으로나마 형성되어 자네(Pierre Janet, 1859-1947)의 연구에서 그 윤곽이 분명하게 잡혔으며, 특히 브로이어(J.Breuer, 1842-1925)와 프로이트의 공저인 『히스테리 연구(Studien uber Hysterie)』(1893-1895)에 등장하는 '이중 의식' 또는 '의식의 유리(遊離)'와 같은 표현들은 바로 '주체의 정신적 분열'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분열'의 개념은 '의식의 분열', '의식 내용의 분열', '정신분열' 등의 표현형태 속에서도 발견되며, 바로 이런 표현들을 바탕으로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일관된 개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미 1893년부터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상태에서 의식 주체는 그의 표상들 중의 일부분으로부터 분리된다고 하는 사실을 확립하였다. 따라서 무의식은 억압에 의해 의식의 영역과는 분리된 채로 유지될 수 있는 독립된 장소로서 나타나며, 바로 이런 점에서 정신 또는 의식의 분열을 주체의 분열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있어서 '분열'의 개념은 차후에 '자아분열(die Ichspaltung)'이라는 그의 용어에서도 발견되는데, 이 '자아분열' 개념은 프로이트의 저서 가운데 특히 1927년부터 1938년까지의 작업에서 점차적으로 확립되었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말하는 '자아분열'은 고유한 의미의 '정신분열'과는 일견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라쁠랑쉬와 뽕딸리스가 지적하고 있듯이, '자아분열'은 무엇보다도 자아라는 하나의 조직 또는 영역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체계내 분열(le clivage intrasystemique)'인 반면, '정신분열'은 조직들 사이의 분열과 같은 '체계간 분열(la division intersystemique)'이다. 프로이트가 브로이어와 함께 『히스테리 연구』에서 밝힌 '분열'은 바로 이 '체계간 분열'이었으며, 예를 들어 프로이트가 1920년부터 발전시킨 - 흔히 그의 제2의 '장소론(die Topik)'으로 약칭되는 - 인격개념에 비추어 보면 '자아'와 '이드(le ca)' 사이의 분열도 역시 '체계간 분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프로이트에 있어서 '분열'의 개념은 이렇듯 다의적(多義的)이다. '분열'은 심적 장치가 여러 영역으로 구분됨을 뜻하기도 하며, 또 한편 하나의 정신 영역 그 자체가 분리됨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15. Anika Lemaire, Jacques Lacan, p.14.

16. 라깡의 이와 같은 이론은 당대의 정신분석과는 확연한 차이를 갖고 있었으며 그 대립이 극적으로 표출되기도 하여서, 저 유명한 '본느발 회의(le colloque de Bonneval)'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1960년 에이(H.Ey)에 의해서 조직된 이 토론회는 '무의식'을 주제로 본느발에서 개최되었는데, 거기서 라쁠랑쉬(J.Laplanche)는 라깡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결론을 발표하였다. 라쁠랑쉬에 따르면 무의식이 언어의 조건이며 (라깡에서처럼) 언어가 무의식의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라깡은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개입하였고 그 텍스트는 『에크리(Ecrits)』 속에 「무의식의 위치」라는 제목을 달고 실려 있으며 앞서 언급한 르메르(Lemaire)의 책 서문에서도 그 때의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17. Lacan, Ecrits, p.514.

18. Lacan, Ecrits, p.276.

19. J.-A.Miller, "La suture", Cahiers pour l'analyse, 1966, n°1-2, p.39.

20. Lacan, Ecrits, p.842.

21. 이와 같은 언어 기호의 속성을 가리켜 소쉬르(Saussure)가 '기호의 가치(la valeur du signe)'라고 명명하였다는 것과 그것이 라깡의 '접합점(le point de capiton)' 개념과 공통의 외연(外延)을 갖는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발화 연쇄상에서 하나의 기표는 차후에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됨을 '접합점'은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22. Lacan, Ecrits, p.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