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프카의 城을 읽다 가지치기를 하면서 본 또 다른 성들, 스위스의 엥가딘성과 독일의 엘쯔성, 두 성은 그 지향자체가 다르다. 엥가딘성은 일반 주택들과 조화를 이룬 땅에 안착하고자 하는 평화를 지향한다면 독일의 엘쯔성은 격리와 거리를 통해 천상지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엥가딘성은 고향의 따뜻한 모습이 엘쯔성은 어린시절 크레파스로 그렸던 성탄카드의 바로 그 성당이 아닌가? 뎅그렁 뎅그렁 종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두 성은 모두 그 성이 축조되던 당대주류의 이상을 반영한다. 모든 성들은 자기만의 샹그리라를 구획하기 위해, 혹은 지켜내기 위해 성 앞에 해자를 두어 성과 밖(속)을 구획한다. 마치 불교의 일주문을 지나는 것과 비슷하다. 성이든 일반 건축이든 건축은 사유한다. 우리는 그 건축, 혹은 집, 방에서 자기 안의 샹그리라를 찾고 있음을. <언젠가 그곳에 돌아가리라, 는 귀거래사>는 모든 이가 오늘을 견디는 또 하나의 힘이다. 그런데, 샹그리라 하면 전원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샹그리라는 무엇보다 그 마음의 상태도 중요하지만 자연과의 일체감이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당장 전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 대체물이 건축(집)이다. 도시건축은 유예된 샹그리라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사유하는 건축 개념이 가능하다. 건축, 하면 떠오르는 르 코르뷔지에, 41살의 그가 지은 사보아 주택은 바로 그런 이상을 꿈꾸고 있다.
"현대인이 원히는 것은 수도사의 방이다. 조명과 난방이 잘되어 있고, 모퉁이에서 별을 볼 수 있으면 그만이다."
사보아저택에서는 둘로 꺽인 경사로를 통해 2층으로 도달된다. 주거공간은 <안채>의 두 변을 차지하고 있다. 2층 면적의 대략 1/3이 테라스로 개구되어 있으며 바깥쪽은 벽에 둘러싸여 있다. 시계는 가로로 긴 창틀 안에서 멀리 펼쳐진다. 경사로는 다시 일광 욕실쪽으로 열리고 하늘로 올라가는 상승을 계속한다. 사실 이 주택은 주위 풍경쪽을 행해 열려 있지 않고 지중해지방 주택의 파티오처럼 하늘을 행해 열려있는 것이다. 일광욕실 스크린은 평면되에서 보면 직성과 곡선이 섞여 있으며 이 시대의 그림에 나오는 컵이나 병, 주전자 등의 윤곽을 상기케 된다.
여기서 이들 형태는 그리스적인 조용함 안에 깃들어 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같은 형태가 또 한번 채택되는 데 이 때는 소란할 정도로 조형적인 격렬함이 침입하게 된다. 이는 사보아저택의 지붕과 마르세이유의 유니테 다비타시온 지붕을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더욱 후일이 되면 이와같은 형태가 과일의 벗긴 껍질처럼 비틀리며 치올린다. 그것은 롱샨이기도 하며 또한 공장주 빌딩의 비스듬한 벽에 경사지어 배치된 나무판자가 현기증을 일으키게 할 것 같은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회의실이기도 하다. ...포와시의 첫째 특징은 뭐니뭐니해도 경사로이다. 이 경사로 덕분에 테라스에 오르는 것이 의식과도 같은 상승으로 바뀐다.
- 최창길, 예명해, <르 꼬르뷔제의 생애> 집문당, 1997, 112~113
건축학개론 시간에 꼭 듣는 코르뷔지에의 건축 방샹성------------
1.필로티
철근 콘크리티나 철골구조물의 발달은 구조체로서의 벽이 유지하고 있었던 기능적 필연성을 제거하고 콘크리트와 철골기둥으로 구조체를 대신 할 수 있게 했다. 이같은 발달은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여 완전히 해방실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끌어 주었고, 이같은 생각은 꼬르뷔제의 경우 상당히 일찍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1920년 이전에 이미 꼬르뷔제는 지면 4-5m 위에 조립한 격자위에 얹은 도시계획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이후 도시계획에서 선언한 “지면에서의 해방”은 그 구상의 결론이다. 1929년에 이르자 꼬르뷔제는 이같은 구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하여 모든 지면은 사람들의 활동과 식물을 위해 할애되어야 하며 일과 거주를 위한 공간은 지면위에 잡으면 된다고 제안하였다. 시트로앙 주택계획에서는 가구의 다리와 같은 필로티가 “거주하는 상자”를 지탱하고 있는데 이러한 건축은 지구위의 어디서나 응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호상도시”로까지 확대될 수 있었다. 꼬르뷔제는 1929년의 작품인 사보아주택에서 1953년 낭트 제레 유니테 다비타싱옹에서도 같은 구상을 연이어 관찰시켰다.
2.옥상정원
옥상정원의 장점을 이해시키기위해 꼬르뷔제는 주로 실용적인 이유를 들었다. 그에 의하면 옥상정원의 장점은 눈이 많은 북유럽지방의 경우 눈이 녹아 흐르는 물을 누수의 위험없이 제거할수 있다는 점인데 이때, 물이 집의 중심을 행해 흐를 수도 있지만, 이물은 주택내부에서 오르는 열이 있기 때문에 동결의 위험은 없게 된다. 여기에 엷은 층의 흙을 덮어두는 경우 옥상정원은 언제나 적당한 습기가 유지되어 식물이 자랄 수 있기 때문에 주거공간을 추위와 더위로부터 완전히 차단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이같이 옥상정원의 초기개념은 이후 작품인 사보아 주택에 이르러서는 보다 조형적인 세계로의 귀결되어 선박의 이미지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유럽 각지의 유니테 다비시옹의 옥상이나 샹디갈의 사무동과 회의동도 옥상에서와 같이“빛아래 집합된 입채의 교묘하고 장려한 연출로 승화되어 공간의 새로운 차원을 풍요하게 해있다.
3.자유로운 평면
지금까지 건축의 평면은 구조벽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1914-1915년에 걸쳐 꼬르뷔제는 건축의 참된 유용성을 추구하였다.
즉 내부공간의 구성을 사용자의 자유에 맡긴다는 사고방식은 1932년 아지에의 오뷰계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되고, 바이센호프주택에서 꼬르뷔제는 가동식 간막이를 도입해서 야간에는 거실을 3개의 작은 침실로 바뀔 수 있게 처리했는데 이 작픔에서 나타난 자유로운 평면의 개념은 단지 주거공간에 참다운 가동성을 확보한다는 방법에 그치치 않고 그의 공간적이고 조형적인 의지를 관철시키는 방법이 된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4.가로로 긴 창
꼬르뷔제가 제안한 도미노 시스템은 파사드의 폭안에서 창의 가로 폭은 무제한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특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실내공간은 한결같이 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트로안 주택이나 바이센호프주택에서 이같은 창들을 필로티위에 얹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어 국제연맹본부 계획안에서는 길이 200미터에 이르는 가로로 긴 창이 선보이게 되기도 한다.
5.자유로운 파사드(입면)
자유로운 파사드의 건축원리는 독립되어 구성된 원리라기 보다는 이상의 네가지 원리의 준수에 뒤따르는 조형상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이같은 파사드의 구성원리는 미스의 경우처럼 완전한 유리상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꼬르뷔제의 경우 파사드란 회화의 화면과 마찮가지로 항상 개구부와 비개구부로 질서가 부요되어야 하는 면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여행의 기술》, 《불안》, 《동물원에 가기》,《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 가》로 유명한 '일상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최신작 《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이 얘기하면 건축조차도 다른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떤 공간과 어떤 희망이 일치했을 때, 우리는 그곳을 '집'이라 부른다. 건축은 행복의 가능성을 전한다.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처럼, 건축 또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거나 불행에 잠기게 할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은 건축물을, 인간이 보다 균형 잡히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밑그림을 그리는 도구로서 분석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건물에서 이상적인 삶, 현재의 삶에서 결여된 모든 요소들이 가득 채워진 삶의 영감을 발견할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이상적으로 되고자 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 보여주는 것이 바로 건축의 할 일이라고 말한다. 테라스가 딸린 소박한 집에서 세계의 유명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건축물을 조명하면서, 건축이 어떻게 행복의 가능성을 증진시키는지, 더 나아가 개인주택과 공공건물(안드레아 팔라디오의 건물에서부터 르 코르뷔지에, 노먼 포스터의 건물에 이르기까지)이 인간의 감정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탐구한다. 건축의 철학과 심리학을 아우르는 이 책은 집, 거리, 우리 자신에 관한 생각, 시각이 바뀌길 기대한다.
알랭드 보통이 본 푸아시 언덕의 <사보아 저택>애 대한 단상이다.
1928년 봄 파리에서 피에르와 에밀리 사부아라는 이름의 부부는 41살의 스위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를 찾아가 자신들과 어린 아들 로제를 위해 시골집을 설계해 달라고 부탁했다. 집이 들어설 곳은 파리 서부 푸아시에 있는 숲이 우거진 땅으로 센 강을 굽어보는 곳이었다(중략)
르 코르뷔지에는 미래의 주택들이 금욕적이고 깨끗하며, 규율과 검약이 지배하는 곳이기를 바랐다. 그는 모든 장식에 대한 혐오 때문에 영국 왕족과 그들이 매년 의회 개회를 위해 타고 가는 장식이 화려한 황금마차를 가엾게 여겼다.(중략)
푸아시의 언덕 꼭대기에 있는 담 뒤로 난 좁은 자갈기을 빽빽한 숲을 통과하다 빈터로 이어진다. 그 한가운데 얇고 흰 사각형 상자 모양의 건물이 서 있다. 그 옆면으로는 띠 모양의 유리창들이 늘어서 있으며, 믿을수 없을 정도로 가느다란 기둥들이 땅 위에 떠 있는 이 건물을 지탱한다. 빌라 사부아의 지붕에 있는 구조물은 급수탑이나 가사 실린더를 닮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반원형의 보호벽을 갖춘 테라스다. 이 집은 섬세하게 다듬은 정밀기계처럼 보이기도 하고, 목적을 알수 없는 산업용 물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흠 하나 없는 하얀 표면은 화창한 날이면 에게 해의 섬에 있는 어부의 오두막처럼 환한 햇빛을 강렬하게 반사한다. 이 집은 잠시 머물러온 손님처럼 보인다. 지붕위의 장치로 신호를 받으면 감추어진 엔진에 시동을 걸어 천천히 주위의 나무들과 역사적인 스타일을 떠른 별장들 위로 솟아올라 머나먼 은하수의 고향을 향하여 긴 여행을 시작할 거 같다.(중략)
르 코르뷔지에는 빌라 사부아의 중앙계단을 만들면서 단지 사람들을 위층으로 올려부내는 것 외에 다른 일도 하려고 했다. 이것은 앙주 자크 가브리엘이 그곳에서 남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베르시이유의 프티트리아농의 고전주의적 건물에서 했던 일과 다를 것이 없다. 르 코르뷔지에는 영혼의 어떤 상태를 불러내려 했던 것이다.
- 알랭 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 중에서
건물은 말을 한다. 건물은 우리의 기억과 이상의 저장소가 되어 일상을 부식시키는 온갖 불운에서 비껴난 이상화된 삶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건물은 우리의 열망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한다. 인간의 약함을 채워준다. 다시 말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사면이 창인 빌라인 이 집은 그 <창>으로 세계의 사계와 밤과 낮을 집안으로 끌어들인다.
사면이 창인 http://cafe.daum.net/stc1900/T1B5/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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