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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폭력으로 치닫는 세계 안에서, 어디에도 망명처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절망은,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극에 달한다. 미군당국은 그의 고향인 서독으로의 귀향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결국 그는 동독에 정착하게 된다.
동독에서 브레히트는 인간에 대한 폭력을 은폐하는 시대에 대한 강렬한 풍자를 담은 실험적인 극작활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그의 이상과는 달리, 사회주의 동독도 1953년 동베를린의 반(反)소비에트 항거를 소련 진압부대를 동원해 처절하게 짓밟은 데 이어 교조적인 스탈린주의가 동독 예술을 지배한다. 브레히트가 꿈꾸던 세계와 추구하던 예술은 그의 생애 안에서 끝내 빛을 발하지 못했고 동베를린 항거 몇 년 뒤 그는 마지막 망명지에서 생을 마친다.
브레히트의 대표적인 시들을 모아놓은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자신의 삶을 통해 마주해야 했던 시대의 폭력에 대한 고발과 내면의 고백을 담고 있다. 그의 시어는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움 보다, ‘서정시가 쓰기 힘든 시대’에 대한 직설적인 언급(‘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미국의 할리우드에서 겪은 “거짓을 사주는 장터”로 가는 비참함(‘허리우드’),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야만의 현실에서 “자신이 미워진”다고 고백(‘살아남은 자의 슬픔’)한다. 독일어의 딱딱한 발음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그의 시들은,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아픔이 지배했던 자신의 삶과 시대를 고발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며 “그는 아름다웠다(He was beautiful)”라고 말한다. 그것은 야만의 시대에서도 누군가는 (비겁하게라도) 살아남아서 그것을 증언해야 한다는 역설과 끝까지 창작을 멈추지 않은 그의 진정성 때문이 아닐까. 브레히트와 달리 많은 이들의 망명과 죄책감은 역사에 대한 외면과 망각에 머물고 말았다. 기억-역사를 망각하고 현실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아름다운 문학을 꿈꾸는 이율배반 보다는 낯설고 투박한 그의 언어와 정직하게 아픈 삶이 더 아름답지 않은가.
이 글을 쓰는 와중에 흐르던 영화 <디어헌터>의 주제곡이 끝나간다. 그러고 보니, 이 음악이 삽입된 영화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다루고 있다. 전쟁터에 남겨진 친구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1970년대 미국 젊은이들의 어두운 표정 사이로 낮게 울리던 기타선율. 이 선율을 들으며 읽은 브레히트의 시집은 낯선 언어로 가득했지만 낯설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느낀 기시감은 역사에 짓밟힌 살아남은 자들의 공통된 아픔에 연관되지 않았을까.
현실이 아름다운 서정시는 아니지만, 살아남은 자의 외면하지 않았던 삶-기록을 통해서 문학은 다시금 아름다움을 얘기하는 자양분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는 어쩔 수 없이 20세기의 가장 폭력적인 시기를 살아내야 했다. 그러나 망각과 무감각이 지배하는, 환멸이 일상화된 현재에서 바라본 그의 삶과 문학은 분명히 아름다웠다. HE WAS BEAUTIFU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