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안주로 소크라테스와 술판 토론/안광복
토론 프로그램의 주제는 삼빡해야 한다. 공감을 끌어내면서도 절실한 문제라야 관심을 끌 수 있다. 좋은 패널을 섭외하는 일도 중요하다. ‘스타 효과’로 청중의 수를 몇 배로 늘려놓을 터다. 이런 조건을 완벽하게 채우는 놀라운 토론이 있었단다. 패널에는 각종 문학상에 빛나는 중견 작가 둘, 주목받는 언론인, 저명한 철학자, 인정받는 의사에다가 인기절정의 미소년까지 들어있었다. 토론 주제는? 사랑이었다. 사랑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은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공감 폭이 큰 화두다. 이 주제를 놓고 매력적인 패널들이 이야기판을 벌였다니, 귀가 솔깃할 만하다.
플라톤의 <향연>은 바로 이러한 토론의 기록이다. 문학사(文學史)에 길이 빛나는 아리스토파네스와 아가톤, ‘철학자의 교과서’ 소크라테스, 당대의 의사 에릭시마코스, 그리스를 유혹한 미소년 알키비아데스 등이 자리의 주인공들이었다.
<향연>의 원제목은 ‘심포지엄(Symposium)’이다. 지금의 심포지엄은 심각한 얼굴로 논문을 들추며 격식 있게 논의를 펼치는 자리를 뜻하지만, 원래 심포지엄은 ‘향연’이었단다. 술과 음식을 나누는 풀어진 분위기에서 지적 허기도 같이 채우는 대화, 그게 심포지엄이다. <향연>을 요새 식으로 옮긴다면, ‘사랑을 주제로 한 유쾌한 음주 토론’ 정도가 되지 않을까?
“사랑을 주제로 한 유쾌한 음주토론”
<향연>의 무대는 아가톤의 집, 비극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그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다. 이미 전 날 한바탕 큰 잔치가 있었던 터, 사람들은 술에 적당히 질린 상태다. 그래서 의사인 에릭시마코스는 ‘각자의 능력만큼만 마시며’ 대화를 즐기자고 제안한다. 몸에 무리 간 사람들이 건강 챙기며 놀자는 의사에 말에 반대할 이유가 없겠다. 그 다음은 자연스레 사랑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대화자들은 한 사람 씩 돌아가며 사랑의 신 에로스(Eros)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 첫 순서는 파에드로스. 그는 에로스를 인간에게서 가장 뛰어난 부분을 끌어내는 신으로 떠받든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앞에서 당하는 창피보다 큰 곤혹이 어디 있겠는가! 제 아무리 겁쟁이라도 애인 앞에서는 용감해지는 법이다. 찬양의 열기는 다른 사람이 바턴을 넘겨받을수록 점점 커진다. 에로스는 인간 뿐 아니라 우주 만물에 생기와 조화를 이루는 신으로 추앙되더니, 이 날의 주인공인 아가톤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아름답고 정의로우며, 절제 있고 용맹하며 지혜로운 신으로 거듭난다. 천하의 제우스도 에로스만큼 위대할 수 있는지 헷갈릴 정도다.
모두는 아가톤의 말에 열광적인 갈채를 보낸다. 바로 이 때 소크라테스가 입을 연다. 그는 아가톤이 ‘고르기아스 급(級)’의 위대한 연설을 한 나머지, 자신은 망신이나 당하지 않을지 두렵다고 투덜댄다. 하지만 이 말은 소크라테스 특유의 능청일 따름이다. ‘딴지 대왕’ 소크라테스는 불과 몇 마디로 달아오른 분위기를 단번에 박살내 버린다.
육체부터 아름답게 다듬어라
여러분은 모두 에로스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에로스는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다. 에로스는 아름다울 리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 부족한 면을 바라기 마련이다. 그런데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에로스는 아름답기를 원하고 있을 뿐이지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는 아니다.
“플라토닉 러브, 아름다움의 사다리”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왜 새삼 에로스에게 시비를 걸었을까? 에로스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다. 소크라테스는 사랑의 성격을 신화에 빗대어 설명한다. 에로스는 길의 신 포로스와 결핍의 여신 페니아의 자식이다. 그는 어머니를 닮아서 항상 비어있고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다. 반면, 아버지의 능력도 이어받은지라, 자신의 부족을 채워 줄 수단과 방법 역시 끊임없이 찾아내곤 한다. 에로스는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우리네 사랑도 그렇다. 사랑은 우리를 높은 경지로 이끌기도,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생물학적인 설명을 늘어놓는다. 동물들도 생식할 때만큼은 성스럽다. 상대를 절실히 원하고, 자손을 낳고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당해낸다. 왜 그럴까? 죽을 수밖에 없는 생물들은 자식을 퍼뜨려야만 불멸(不滅)을 이루기 때문이다. 불멸에 대한 욕구 탓에 생명체들은 열정과 사랑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생식이 아니고서도 영원할 수 있다. 자신의 명성과 이름을 후대까지 떨치는 방법으로 말이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아직까지 기억되는 이유는 그네들이 ‘영혼의 자식’인 작품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으로 위대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크라테스는 먼저 육체부터 아름답고 훌륭하게 다듬으라고 권한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하나의 몸에 몰두하지 말고 다른 이들의 몸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애인의 몸을 내 것으로 삼고 싶다는 열망에 빠지지 않고, 몸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즐기고 사랑하는 태도를 갖추게 될 터다.
이 단계를 넘어선 사람은 이제 정신의 아름다움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때에도 특정한 몇몇에 주목하기 보다는, 이 모두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그러다 보면, 집착에서 벗어나 아름다움 자체를 즐기는 경지에 이르게 될 터다.
“....... 사다리를 오르듯이 끊임없이 한 단계 씩 올라가야 한다네. 한 명의 아름다운 육체에서 두 명의 아름다운 육체로, 두 명의 아름다운 육체에서 모든 아름다운 육체로, 다시 자신을 드높이는 노력에로, 더 나아가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에로.......”
이는 현대의 신경생리학자들의 충고와도 통한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자신과 관심 있는 상대방만을 바라본다. 정신의 건강은 객관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비로소 회복된다. 때문에, 사랑에 집착하여 가슴앓이를 하는 이들에게 ‘플라토닉 러브’는 효과 만점의 치료법이다. 불멸에 대한 바람에서 사랑이 생긴다면,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사랑은 상대의 정신과 육체를 훌쩍 뛰어넘어 영원한 가치를 일러줄 터다.
아름다움의 사다리 ‘플라토닉 사랑’
소크라테스의 열정적인 설명은 여기서 갑자기 끝난다. 느닷없이 알키비아데스가 뛰어 들어온 탓이다. ‘술자리 토론’인 만큼 발언권이 세미나에서처럼 보장될 리 없다. 술취한 이 미소년은 ‘연인’ 소크라테스를 발견하자마자 열렬한 찬사를 늘어놓는다. “소크라테스 앞에서는 그 외의 누구도 찬양할 수 없다.’고 외치는 막무가내 미소년 덕택에, 졸지에 자리는 ‘소크라테스의 찬양 무대’로 바뀌어 버린다. 알키비아데스의 횡설수설 중에, 결딴난 전쟁터에서 도망치기는커녕, ‘겁먹은 장군을 옆에 끼고 침착하게 왼쪽과 오른 쪽을 살피며’ 퇴각하는 용맹한 졸병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고, 사색에 잠겨 하루 밤 낮을 꼼짝없이 서서 보냈다는 경악스런 일화도 소개된다. 안타깝게도, 소크라테스 뒷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 들어갈 즈음에서 알키비아데스의 주정마저도 흐지부지된다. 술 취한 한 무리가 또 뛰어들어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해진 까닭이다. 유쾌한 술자리 담론을 기록한 <향연>은 이렇게 끝난다.
술자리에서 했던 이야기들을 줄기 잡아 간추리기란 어렵듯, <향연>을 정리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술자리의 매력은 되레 여기에 있지 않을까? 수만 가지로 뻗어가는 대화의 가지는 숱한 생각거리들을 던진다. <향연>은 2,500여 년 전 소크라테스와 함께 하는 술자리로 우리를 이끈다. 포도주를 한잔따라두고 <향연>의 구절들을 따라가 보자. 알코올이 있는 ‘심포지엄’은 유쾌하다.
안광복/중동고 철학교사
서평자 추천 도서
향연
플라톤 지음, 박희영 옮김
읽기 쉬운 번역과 꼼꼼한 해설이 돋보임
국가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향연>의 사랑론을 넘어서, 플라톤 사상의 전면모를 알 수 있는 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