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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의 정원 혹은 아타락시아(Ataraxia)

나뭇잎숨결 2009. 1. 12. 13:52

“정직한 자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만 부정직한 자는 고통으로 가득하다” (에피쿠로스)

 

 

 

1. 정원을 거닌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os, B.C. 341-270)는 사모스섬 출신으로 아테네에서 활동, 교외에 한 정원을 구해서 그의 학원을 ‘에피쿠로스의 정원’이라 부르며 이곳에서 사람들과 공동생활함, 소박하고 절제된 삶을 삶, 빵과 치즈, 올리브를 먹고, 포도주를 조금 마시고, 해먹에서 잠자고, 정원을 산책하면서 친구들과 대화를 즐기는 생활을 함, 만년에 길고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했으나 죽을 때까지 위엄과 용기를 잃지 않았다.

 

2. 헬레니즘과 로마시대의 허무주의와 개인주의

 

(1)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더 이상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고 정치에 관심과 책임을 가지는 것을 자기 개발의 일환으로 여기지 않음,

(2) 개인적인 창의성으로는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것으로 보임.

로마 제국의 거대하고 비인간적인 관료제 속으로 흡수되면서 각각의 개인들은 무기력감을 느낌.

 

3. 행복, 욕구, 쾌락의 3중주-쾌락주의 윤리

 

(1)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삶의 목표는 ‘행복’=쾌락

‘쾌락을 낳지 않는 것이라면 어떤 행동도 할 필요가 없고, 고통을 낳지 않는 것이라면 어떤 행동도 반대할 필요가 없다’

 

(2) 욕구의 종류

욕구-A. 자연스러운 욕구-a. 필요한 욕구(식욕, 잠자고 싶은 욕구, 휴식의 욕구)=충족될수있음

                                  -b. 불필요한 욕구(성욕)=지나치게격렬한 쾌락을 낳음, 극복해야함

        B. 헛된 욕구(화려한 옷을 입고 싶든지 색다른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충족될필요없음

 

* 자연스럽고 필요한 욕구 중에서 에피쿠로스가 중시하는 것은 휴식의 욕구이다. 휴식이란 몸과 마음 모두의 휴식을 가리킨다. 진정으로 선한 사람(즉, 가장 큰 쾌락을 경험하는 사람)은 모든 불필요한 욕구들을 극복하고 자신의 필요한 욕구들을 가장 적당한 방식으로 충족시키며 많은 시간을 몸과 마음의 휴식으로 보내고, 걱정거리가 없는 사람(소극적 쾌락주의)

 

**  쾌락주의를 극단적으로 밀고 갈 경우 ‘삶의 부재가 삶 자체보다 낫다’는 결론 도출

ex> 프로이트는 <쾌감 원칙을 넘어서>에서 ‘쾌감원칙’의 배후에는 타나토스(Thanatos), 곧 죽음의 본능이 있다고 말한다. 

 

(3) 쾌락(hedone)

감성의 만족,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유쾌한 감정,

육체적쾌락 추구-키레네(Cyrene) 학파, 정신적쾌락 추구-에피쿠로스 학파

 

(a) 쾌락의 참된 의미

모든 욕구가 채워질 때 기쁨과 만족을 얻는가? 아니다. 어떤 욕구는 채워짐으로써 오히려 우리에게 더 많은 고통과 슬픔을 주기도 한다. 한 순감의 미움 때문에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신뢰를 저버렸을 때, 우리가 얻는 것은 기쁨 대신 커다란 고통과 불행이다. 모든 욕구는 충족으로 쾌락을 얻는 것이 아니고, 질이 좋은 선한 기쁨을 통해서 만이다. 곧 육체적인 욕구는 정신적인 욕구로 일시적인 것은 영원하고 순결한 것으로 발전되어야 하며, 여기에 우리의 이성적인 사고가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의 쾌락은 우리의 수준 낮은 욕망을 채우기 보다는 억제하고, 세상에 널려 있는 거센 유혹을 이겨냄으로써 가능하다.

 

(b) 쾌락의 상태

아무리 고상한 쾌락이라 하더라도 지속될 수 없다면 우리는 다시 괴롭고 고통스런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 지속적인 쾌락의 상태는 현란한 세상의 손짓에 흔들리지 않는 의지로서 가능하다. 따라서 쾌락은 불안과 공포가 없는 평화로운 상태이다. 이렇듯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불안이 없는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함.

* 쾌락주의라는 오해; 에피쿠로스를 쾌락주의, 미식주의, 식도락, 향락주의 등의 뜻으로 사용하는 것은 로마인이 그의 사상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쾌락을 ‘적극적인 쾌감’으로 받아들임

 

 

EBSi 교양강좌 “사상가와의 만남” 이창우 (가톨릭대 철학과)

 

에피쿠로스 Epikouros (기원전 341-271)

 

Ⅰ. 생애

 

에피쿠로스는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많은 비난과 편견에 시달려야했던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 고대 때부터 이런 편견과 비난은 있었다. 중세 이후에는 에피쿠로스 철학의 반(反) 그리스도교적 특징 때문에 에피쿠로스에 대한 편견과 비난은 극단적인 수준에 이를 정도였다. 한 전승에 의하면 에피쿠로스는 지나치게 먹고 마시는 탐닉에 빠진 사람이었다. 너무 많이 먹은 탓에 하루에도 몇 번씩 먹은 것을 토해 내야 했다는 것이다. 그는 밤마다 벌어지는 연회에서 자신의 정력을 모두 탕진해 버렸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너무 지나칠 정도로 사랑의 향락에 흠뻑 빠져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몇몇 단편에 포함되어 있는 창기와의 잦은 서신 교환은 그 자체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그 중 한 여자와 그 여자의 집에서 동거했다는 사실은 특히나 매우 대단한 스캔들이었다. 그 외에도 악의 있는 어떤 적대자는 12통의 음란한 편지를 그가 쓴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이 모든 못된 짓을 하느라고 진지한 학문 연구를 등한히 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에피쿠로스를 여지없이 깎아내리고 평가절하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엄격한 스토아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그를 단 한마디로 “방탕자”라고 부른다. 또 다른 후세 사람은 에피쿠로스와 그의 제자들을 심지어 “에피쿠로스의 돼지들”이라고까지 부르기도 했다.

이런 비난 그리고 이런 비난을 전승해 주는 보고들에 대해서 우리는 유의해야한다. 이런 전승들의 출처는 대부분 비(非) 에피쿠로스 계열, 특히 라이벌 관계에 있던 다른 학파 계열임을 주지해야한다. 특히 이런 전승들 중 상당수가 고대 후기 혹은 중세 초기의 그리스도교 교부에서 비롯됨을 유의해야한다. 이런 사람들은 에피쿠로스학파의 영향력을 어떻게 하든지 감소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이런 의도는 에피쿠로스의 역사적 모습에 대한 왜곡된 혹은 과장된 기술을 유발할 수 있음을 우리가 고려해야한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의 제자들과 후대의 추종자들이 스승의 이런 모습을 극구 부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우리는 이들의 증언에 대해서도 귀를 열어야한다. 라이벌 관계에 있는 타 학파의 증언이 아니라 이들 제자들의 증언이 에피쿠로스의 역사적 모습에 대한 정당한 재구성에 기여하는 바가 더 클 수 있음을 우리는 배제해서는 안 된다.

이들 제자들에 따르면 에피쿠로스는 금욕주의자로 칭송받았다. 학파 내부에서는 어쩌다가 가끔 기껏해야 딱 한 잔의 포도주만을 마셨을 뿐, 대개는 물을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또한 아주 어려운 시절에는 보잘것없는 콩요리로 연명했다. 어떤 제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생활을 다른 사람의 생활과 비교해 볼 때, 사람들은 그의 온화함과 자기만족을 보면 그의 생활을 하나의 신화라 부른다.” 또한 그의 말에 따르자면, 에피쿠로스를 비난하는 사람들과는 정반대로 에피쿠로스는 관능적인 사랑을 삼가 했다고 한다.

이 철학자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더 있다. 그는 그의 가족과 친구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세심하게 배려하였다고 한다. 나아가 노예와도 인간적인 유대 관계를 맺었다. 노예에게도 철학적인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유언장에는 노예를 해방시킬 것을 지시하였다.

모든 전해지는 전승들을 종합할 때 에피쿠로스의 인생사는 아래와 같이 정리된다. 에피쿠로스는 기원전 341년에 사모스(Samos) 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테네의 시민권을 지녔으며, 그보다 이미 몇 십 년 전에, 즉 에피쿠로스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아테네에 거주한 적이 있었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에 대해 기록하기를, 이미 14세에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관심을 한번도 등한시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18세가 되었을 때 아테네로 가서 희극 시인 메난드로스(Menandros)의 곁에서 시민의 의무인 군복무를 2년 동안 수행했다. 그 후 15년 동안 그가 보인 행적에 대해서는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가 페르시아 본토에 있는 사모스 북서쪽의 작은 마을 콜로폰(Kolophon)에서 잠시 학교선생으로 있으면서 아이들을 가르쳤을지도 모르는데, 당시 그곳에는 그의 가족이 살고 있었다.

에피쿠로스는 31세부터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짧은 시간 동안 레스보스(Lesbos)에 있는 뮈틸레네(Mytilene)에, 그 다음에는 고대 트로이아(Troia) 유적지 부근에 있는 항구 람프사코스(Lampsakos)에 철학 학교를 세웠으며, 기원전 306년에 36세의 나이로 아테네에 돌아왔다. 에피쿠로스가 아테네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통해, 이제 철학의 중심지에서 제자를 모을 자신감이 그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교외에 정원(garden)을 샀는데, 그 정원을 따라 훗날 그의 학교는 ‘에피쿠로스의 정원’이라고도 불렸다. 에피쿠로스는 이 정원에서 메트로도로스, 헤르마르코스 등 그의 가장 중요한 동료들 및 친구들과 기원전 271년에 죽을 때까지 생활하고 연구했다. 정원은 이들 모두에게 있어 학교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학문의 공동체를 넘어서서 삶의 공동체, 정서적 공동체였다. 이런 점에서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플라톤의 학교 아카데미아(Akademia)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교 뤼케이온(Lycheion)과 분명히 달랐다.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의 공동생활은 구성원들 상호간의 우정과 스승에 대한 공동의 존경에 기초한 것이었다. 스승은 자신의 추종자들을 다름 아닌 철학을 통해 미신과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롭게 해주었거니와, 추종자들도 행복한 삶에 대한 스승의 철학 및 교훈들을 그들의 공동체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공동체에는 여자들과 노예들도 속해 있었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인종, 성, 신분, 빈부격차의 제약이 없는 자유의 해방구였다. 그 해방은 철학이라는 엄밀하고도 섬세한 지적 기획에 의해 매개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 해방구는 단지 지적인 성격만 갖는 것은 아니었다. 구성원들 상호 간의 존중과 우정 그리고 가족보다 강한 정서적 유대가 거기에 있었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역사상 보기 드문 실험적 삶의 양식이었다. 

 

Ⅱ. 저술

 

에피쿠로스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기원후 2세기 전후 무렵에 활동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전승에 의하면 에피쿠로스는 마흔 한 개의 저술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 학문적 저술들은 몇 개의 토막글을 제외하고는 다 소실되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에피쿠로스의 주저(主著)에는 우선 전 37권으로 이루어진 자연(철)학적 저술『사물본성론』이 있다. 또한 인식론적 저술 『규준론』(On The Criterion)도 주저였을 것이다. 『인생론』과 『목적론』, 『선택과 회피』를 비롯한 윤리서도 중요 저작이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자연학자에 대한 반론』과 『메가라 철학자에 대한 반론』, 『테오프라스토스에 대한 반론』과 같은 논박서도 썼다. 이는 에피쿠로스가 당시 아테네에 활동하던 타 학파 사람들과 실제로 논전을 벌였으리라는 개연성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학문적 저술들은 소실되었지만 비학문적 글들은 많지는 않지만 몇 개는 우리에게 전해진다. 전승사적으로 이는 불행 중 다행이다. 이 중에서 에피쿠로스의 편지들은 에피쿠로스 철학의 복원을 위해서 아주 중요하다. 이들 편지들은 에피쿠로스 철학의 핵심을 요약하기도 하고, 심지어 몇몇 논점은 어느 정도 상세히 개진해주기 때문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쓴 「에피쿠로스의 생애」에는 세 통의 편지가 보존되어 있다. 이 중 가장 길고 가장 중요한 편지인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는 원자론의 주요 원리를 어렵사리 압축해서 요약한다. 둘째 편지 『퓌토클레스에게 보내는 편지』는 천문 현상을 다룬다. 셋째 편지인 『메노이케오스에게 보내는 편지』는 에피쿠로스의 윤리 이론을 다소 지나치게 단순화하기는 했지만 비교적 명료하게 그 핵심을 요약해준다.

디오게네스는 이러한 편지 외에도 일종의 매뉴얼 혹은 핸드북 형식으로 된 에피쿠로스적 『핵심 교설』을 모아 전해준다. 이외에도 격언 형태의 『바티칸 명제』(Vaticanae Sententiae)가 바티칸 사본을 통해 전해지는데, 이 역시 에피쿠로스 사상을 복원할 때 참조해야하는 귀중한 문헌이다. 그리고 『사물본성론』의 일부 토막글들이 18세기에 발굴된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담겨있다.

로마공화정 말기의 루크레티우스가 지은 서사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에피쿠로스 철학 재구성을 위해서 항상 참조해야하는 중요한 문헌이다. 이외에도 에피쿠로스가 직접 쓰거나 말한 것이 아니라 타 학파 사람들이 에피쿠로스의 사상에 대해 보고하는 문헌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도 에피쿠로스 사상의 복원을 위해서 긴요한 자료가 된다. 키케로, 플루타르코스, 아우구스티누스의 텍스트들에는 이런 보고가 담겨져 있다.

 

Ⅲ. 사상

 

1. 쾌락과 선

에피쿠로스는 대부분의 그리스 철학자들이 그렇게 말했던 것처럼 인간의 삶의 목적은 행복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왜 사는가? 인생의 긴 항로 위에서 지금 내가 이러한 일과 행위를 하고 있는데, 왜 이런 일과 행위를 하고 있는가? 에피쿠로스가 볼 때 그리고 상식적으로 볼 때 답은 분명하다. 그 모두가 행복을 위해서이다.

그렇지만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고 그리스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는 것은 행복을 정의해주는 것, 다시 말해 행복의 구성요소가 구체적으로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직면하여 에피쿠로스는 지극히 상식적인 답변을 한다. 그리고 이 답변은 경험 관찰에 토대를 둔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무엇보다도 고통과 괴로움을 피하는 것이다. 좀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행복은 즐거움, 즉 쾌락이다. 모든 동물들의 행동과 삶은 이 사실을 보여준다. 이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는 고통을 피하는 것 혹은 쾌를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모든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쾌(快)를 욕구하고 쾌를 최고 선(善)으로 기뻐한다. 반면에 고통은 최고 악으로 혐오하고 이를 가능한 피한다. 동물은 잘못되지 않는 한 그리고 그 본성(nature)이 흠 없이 건강하게 판단하는 한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 따라서 왜 쾌가 추구되고 고통이 회피되는가에 관해서는 증명과 토론을 할 이유가 없다. 그(=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이 사실은 지각되는 것이다. 불은 뜨겁고, 눈은 희고, 꿀은 달다는 것이 지각되듯이 말이다. (키케로, 『최고선악론』 1.29-32)

 

동물적 삶에 관한 이런 경험 관찰로부터 에피쿠로스는 인간 삶의 목적을 쾌락으로 설정한다. 인간 역시 자연적 유기체의 한 종이기 때문이다. 선(善)은 쾌이며, 악(惡)은 고통이다. 그리고 그 역도 성립한다. 행복은 최고 선이며, 불행은 최고 악이다. 쾌락주의는 이렇게 탄생했다.

 

쾌가 축복받은 삶의 출발점이자 끝점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쾌는 중요한 그리고 생득적(生得的)인 선(善)이라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선택행동 및 회피행동은 쾌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우리의 쾌 경험을 모든 좋은 것을 판단하는 척도로 사용하면서 쾌에로 소급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10.128-9)

 

2. 쾌락에 관한 오해

에피쿠로스가 쾌락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면, 그는 어떤 종류의 쾌락을 진정한 쾌락으로 이해했을까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조심스럽게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에피쿠로스에 대한 많은 근거없는 비난과 편견은 이 문제제기의 의미에 유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이 문제제기에 관한 에피쿠로스 자신의 답변은 아래의 지문 분석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쾌락이 주된 선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지하고, 우리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삐딱하게 해석하는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방탕한 사람들의 쾌락이나 또는 관능적 즐거움에 속하는 쾌락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고통으로부터의 부재(不在)와 영혼의 혼란으로부터의 부재를 의미한다. 즐거운 삶을 낳는 것은, 음주와 계속되는 파티, 성적 쾌락, 기름진 식탁에 차린 어류나 맛난 음식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선택과 거부라는 모든 행위의 원인을 추적하고 오만가지 정신적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억견(臆見, 근거없는 판단이나 믿음)을 몰아내는 냉정한 추론이다. (…) 어떠한 쾌락도 본래적으로 악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쾌락들의 작용인은 쾌락에 대한 매우 많은 혼란을 가져온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10.131-2, 141.)

 

에피쿠로스가 신체적인 즐거움을 경멸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신체적인 즐거움을 에피쿠로스적 쾌락의 대표 유형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함이 이 지문에서 명시되고 있다. 에피쿠로스가 생각하는 쾌락의 극치는 정신의 아름답고도 지속적인 황홀경에서 구현된다. 즉 대화를 나누고, 음악에 귀 기울이며,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특히 무엇보다도 철학함이라는 지적 수행을 통해 경험하는 쾌가 에피쿠로스적 쾌락의 대표 유형이다. ‘냉정한 추론’은 엄밀하고도 집중적인 지적 탐구, 특별히 철학적 탐구를 말한다. 이런 쾌는 육체적․감각적 쾌처럼 순간 순간 발생했다가 이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이고 사적인 감각의 차원에서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에피쿠로스적 쾌는 전일생을 통해서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유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사적이지 않다. 에피쿠로스가 생각하는 쾌는 강력한 자극이라기보다는 은은하면서도 부드러운, 그리고 사라지지않고 지속되는 것이다. 그것은 나만 느끼는 것이라기보다는 타인과 나눌 수 있는 것이며 타인에게 전파 혹은 감염될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중요한 논점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에피쿠로스의 쾌락 개념은 공(空, empty) 개념이다. 어떤 의미에서 에피쿠로스적 쾌락은 없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은 ‘고통의 부재(不在)’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쾌락은 정의상 ‘고통과 혼란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쾌락은 적극적으로 만족된다기보다는 고통이나 괴로움을 제거함을 통해서 실현된다. 고통과 괴로움이 하나도 없을 때 진정한 쾌락이 구현된다. 그때에는 쾌락이 ‘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고통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런 의미에서 쾌락은 공 개념이다. 혹은 보다 약화시켜 말하자면, 쾌락은 적극적 개념이 아니라 소극적 혹은 부정적(negativ) 개념이다.

따라서 우리는 쾌락주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우리는 에피쿠로스로부터 배울수 있다. 쾌락의 본질을 육체적 자극의 최대화로서 이해하는 방식은 속류적인 쾌락주의이며, 에피쿠로스는 다름 아니라 속류적 쾌락주의와 싸우고자했다.

불행한 자는 육체적으로 고통을 느끼는 사람만은 아니다. 정신적인 괴로움에 시달리는 사람, 지문의 용어로 표현하면, ‘영혼의 혼란’ 속에 빠진 사람은 더 불행하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런 영혼의 혼란을 흔히 ‘정념’(情念, passion)이라 불렀다. 두려움, 공포, 탐닉, 욕망, 증오, 후회, 시기, 질투, 슬픔, 절망 등은 우리를 뒤흔들어 놓는 정념의 예들이다. 불행한 자의 삶은 정념으로 뒤덮여 있다. 에피쿠로스는 정념을 하나의 ‘격렬한 운동’으로 보았다. 이런 정념에 우리가 빠져있을 때에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제어할 수가 없다. 마치 브레이크가 터져버린 기관차의 운전자가 어찌할 줄 모르면서 기관차의 질주 방향대로 자신을 맡길 수 밖에 없는 경험을 하듯이, 정념에 빠졌을 때 우리는 정념이 우리 삶을 모는 방향으로 우리를 맡길 수 밖에 없는 체험을 한다. 우리는 정념의 운동에 의하여 지배당하는 것이다. 정념은 격렬한 운동 중에 있는 정신적 사건들의 연속이다.

행복은 격렬한 운동과 반대 관계에 있다. 호수 표면처럼 잔잔하고 고요함이 행복의 증후이다. 행복은 지극히 안정적이고도 지속적인 상태이다. 따라서 쾌락은 ‘영혼의 혼란으로부터의 해방’, 즉 ‘정념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정의된다. 이런 상태를 에피쿠로스는 ‘영혼의 평온’(ataraxia)이라 불렀다.

 

3. 쾌락, 합리성 그리고 도덕

에피쿠로스에게 있어 모든 쾌락은 선이지만 그렇다고해서 모든 쾌락이 선택할만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고통은 악이지만 모든 고통이 회피 혹은 거부할만한 것은 아니다. ‘좋음’이라는 가치와 ‘선택할만함’이라는 가치는 구분되고, 마찬가지로 ‘나쁨’이라는 가치와 ‘거부할만함’의 가치는 구분된다.

 

그러므로 모든 쾌락은 그 자신의 본성에 의해서 선(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쾌락이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모든 고통이 악이지만 모든 고통이 반드시 회피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과 꼭 같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10.129)

 

쾌가 근본적이면서도 생득적인 선이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가 모든 쾌를 다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경우에 따라 쾌의 결과로 우리에게 더 큰 고통이나 괴로움이 발생될 것임을 우리가 확실히 예측한다면, 우리는 그런 쾌를 추구하지 않고 포기한다. 당뇨병 환자가 자신이 원래 좋아하는 카푸치노를 포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애연가가 담배를 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오랫동안 고통을 참고 난 후 더 많은 쾌가 생기는 경우에는 우리는 그러한 많은 고통이 쾌보다 낫다고 여긴다. 우리가 치과의사를 찾아가서 치아 진료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에피쿠로스에게 있어 좋은 쾌와 나쁜 쾌의 구분은 없지만 선택할만한 쾌와 거부해야할 쾌의 구분은 있다. 마찬가지로 나쁜 고통과 좋은 고통의 구분은 없지만 선택할만한 고통과 거부해야할 고통의 구분은 있다.

따라서 쾌락의 확보를 위해서는 우리는 합리적 능력을 필요로 한다. 행복은 합리성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쾌와 고통의 상대적 양과 정도를 계산하고 평가할줄 알아야하며, 쾌와 고통을 발생시키는 인과적 연관관계를 이해하고, 예측할줄 알아야한다.

진정한 쾌락에 도달하기위해서는 계산적․예측적 합리성만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지혜, 용기, 절제, 정의로움과 같은 전통적 덕목도 필요로 한다. 그리스의 전통적 견해와 관습에 따르면 지혜, 용기, 절제, 정의로움을 모두 갖춘 사람은 덕인(德人)으로 통하며 시대의 사표(師表)로 존경받는 사람이다. 에피쿠로스가 생각하는 쾌락적 삶과 전통적으로 존경받는 덕자의 삶은 외연상 일치한다. 에피쿠로스가 설정한 쾌락적 삶은 도덕적․이성적 삶일 수 밖에 없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도덕성을 필요로 하기때문이다. 이때 ‘필요로 한다’는 말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에피쿠로스는 스토아 학파와 같은 도덕주의자가 아니다. 스토아에게 있어서 도덕성은 그 자체로 선이고,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이다. 하지만 에피쿠로스에게 있어서 도덕성은 자체적 가치가 아니라 도구적 가치, 그것도 필수적인 도구적 가치이다.

 

당신들(=스토아)의 아름답고도 찬란한 덕(德)에 관해 말하자면, 이것이 쾌를 산출하지 않는다면 누가 이것을 ‘칭송할 만한’ 혹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간주하겠는가? 우리가 의료술을 높이 인정하는 것은 이 기술 자체 때문이 아니라 탁월한 건강 때문인 것처럼 (...) ‘삶의 기술’로 간주되어야 할 지혜 및 분별력(prudentia)도, 이로부터 아무것도 산출되지 않는다면, 찾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것을 찾는데, 그 이유는 이것은 쾌를 발견하고 확보하는 ‘전문가’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바로 좋음과 나쁨에 관한 무지 때문에 고달파진다. 이런 결점 때문에 우리는 또 최고의 쾌를 박탈당하며 마음의 극심한 근심으로 고통받게 된다. 분별력이 우리를 쾌락에로 믿음직스럽게 인도하는 인도자가 되게끔 해야 한다. 분별력으로 인해 두려움과 욕망이 제거되고 헛된 억견들이 추방되도록 해야한다. (키케로, 『최고선악론』 1.42-3]

 

지혜, 용기, 절제, 정의와 같은 덕목은 일종의 테크닉, 삶의 기술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도구적이다. 무엇을 위한 도구인가? 진정한 쾌를 발견하고 확보해주기위한 도구이다. 마음의 정념들의 원인을 발견하고 제거해주는 기술이다. 메노이케오스 편지(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10.132)에서 에피쿠로스는 분명히 말한다: “분별력 및 정의로움 없이는 쾌의 삶은 없고, 쾌의 삶 없이는 분별력 및 정의로움의 삶은 없다.”

 

이렇게 볼 때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다소 이중적이다. 에피쿠로스에게 있어 쾌락이 핵심 가치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쾌락주의자는 아니다. 오히려 그는 ‘금욕주의자’라고 불려야 옳다. 이 점에서 라틴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에피쿠로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스도교에게 있어 금욕주의적 요소가 중요한 것이라면, 바로 이점에서 에피쿠로스는 그리스도교와 친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