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들의 일부는 무엇보다도 이론가로서의 나의 활동이 아니라 소설가로서의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의미에서 자서전적이거나 자기비판적이다. 일반적으로 나는 두 가지 역할의 혼합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학이란 무엇인가 설명하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경험에 의존하는 것도 필요하다. ……더군다나 <문학론의 선언>이라는 장르는 아주 광범위하게 공인되어 있다.
- 움베르토 에코, 김운찬 옮김, <문학의 이해-서문>, 열린책들, 2002 , p.6
우리는 이 등장인물들이 살아가고,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우주의 공간을 찾아보아야 할 겁니다. 우리는 그들을 우리 및 다른 사람의 삶의 모델로 선택하며,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다고, 가르강튀아 같은 식욕, 돈키호테 같은 행동, 오셀로 같은 질투, 햄릿 같은 의혹이 있다고, 또는 치유할 수 없는 돈 후안 같은 인물, 또는 페르페투아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때 무엇을 말하려는지 분명해지지요. 문학에서 이것은 단지 등장인물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나 물건들에서도 일어납니다. 미켈란젤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는 여자들, 담벼락 위에 꽂힌 날카로운 병 조각들, 눈부시게 작렬하는 태양, 사악한 취향의 좋은 것들, 한 줌의 먼지에서 나오는 두려움, 울타리, 맑고 신선하고 달콤한 강물, 잔혹한 식사. 이런 것들은 무엇 때문에 집요한 은유들이 되어 매 순간마다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아니면 우리가 아닌 것과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반복해서 말해 줄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위의 책, 문학의 몇 가지 기능에 대해 pp. 22~23.
몇 가지 기능에 대해
「천국 편」읽기
『공산당 선언』의 문체에 대해
발루아의 안개
와일드: 아포리즘과 역설
학사 예술가의 초상
라만차와 바벨탑 사이에서
보르헤스와 영향에 대한 나의 고민
캄포레시에 대해: 육체, 피, 삶
상징에 대해
문체에 대해
빗속의 신호등
형식에서 지저분한 것들
상호 텍스트적 아이러니와 읽기의 층위들
『시학』과 우리
반미 3세대에 걸친 미국의 신화
거짓의 힘
나는 어떻게 소설을 쓰는가
이 책은 문학의 생산과 수용에 관한 이론에서부터 자전적 연대기에 이르기까지 에코의 문학에 관한 생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문학 이론서인 동시에 문학에 대한 에코의 사랑을 절절하게 고백하는 문학 편력기이기도 한 이 책에서 에코는 문학은 죽는 방법까지 가르쳐 준다고 말할 정도로 문학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다. 문학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리고 문학이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웅변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문학의 몇 가지 기능에 대해>에서 시작하여, 마르크스, 단테, 네르발, 와일드, 조이스, 보르헤스 등의 작품에 대한 비평과 문체, 상징, 형식, 아이러니 등 문학 이론의 핵심적인 개념들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 등을 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년기에서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글쓰기를 요약하고 있는 <나는 어떻게 소설을 쓰는가>로 마무리 짓고 있다. 이 책은 문학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로 우리를 이끌어 주면서, 문학의 존재 이유를 매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성공한 작가들이 자신들의 작품 세계에 대하여 밝히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것은 스티븐 킹의 경우처럼 자신의 글쓰기 비법을 드러내는 것이 될 수도 있고, 폴 오스터의 경우처럼 작가로서 성공하기까지의 고난에 찬 여정을 보여 줌으로써 역설적으로 글쓰기의 매력과 냉정한 현실을 이중적으로 드러내는 자전적인 소설의 모습을 띨 수도 있다. 전자의 관심이 실용적인 차원에 기울어 있다면 후자는 노스탤지어로서의 개인적 체험에 거의 전적으로 기대고 있다. 하지만 에코의 경우는 좀 다르다. 에코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문학의 <기능>, 그리고 소설가와 이론가, 독자, 텍스트로 이루어진 문학 세계에 대한 분석, 즉 문학이라는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한 분석이다. 따라서 서문에서부터 <문학론의 선언>을 공공연하게 표방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문학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이론이나 다른 작가들의 세계를 참조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이란 무엇인지 말하기 위해 자전적인 요소들을 참조하고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책에는 <문학의 몇 가지 기능에 대해>에서부터 <나는 어떻게 소설을 쓰는가>까지 총 18편의 글이 실려 있다. 문학의 기능을 논하고 있는 첫 번째 글에서 에코는 문학의 존재 이유에 대해 말하면서 그 첫 번째 근거로 문학 그 자체의 즐거움을 든다. 하지만 곧바로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럴 경우, 문학은 조깅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우선 문학은 우리의 집단적 유산인 언어를 생생하게 한다. 단테가 없는 통일된 이탈리아, 호메로스 없는 그리스 문명, 루터의 ?성서? 번역이 없는 독일의 정체성, 푸슈킨이 없는 러시아어, 건국 신화의 서서사들이 없는 인도 문명은 상상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학은 우리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말한다. 그래서 문학은 우리에게 죽는 방법까지 가르쳐 준다.
이어지는 글을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한 가지는 단테, 마르크스, 네르발, 와일드, 조이스, 보르헤스, 아리스토텔레스 등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과 영향에 대한 분석이고, 다른 하나는 문체, 상징, 형식, 아이러니 등 문학 이론의 핵심적인 개념들에 대한 분석이다. 작가의 작품론은 하나의 주제를 통해 한 작가의 근본적인 특징을 짚어 내고, 개념에 대한 분석은 그 개념의 근원적인 의미를 다시 캐물으면서 그 개념의 핵심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예를 들어 <상징에 대해>라는 글에서는 각 시대가 상징을 이해하는 여러 방식을 보여 주면서 우리가 상징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다.
나는 어떻게 소설을 쓰는가
이 책의 마지막 글 <나는 어떻게 소설을 쓰는가>에서, 에코는 비로소 자신의 문학 세계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다. 먼저 에코는 어린 시절의 글쓰기에 대한 추억, 습작 시절의 실패담, 그리고 철학적 성찰과 평론 활동에만 전념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후 30년 동안 이 결심을 지키기까지, 소설가가 아니라 이론가로 산 자신의 삶을 정리한다. 그는 이러한 결심 때문에 전혀 <괴로워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에코는 창조적 글쓰기에 절망하여 <어쩔 수 없이> 학문적 글쓰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플라톤적인 경멸적인 시선으로 시인들을 거짓말들의 포로, 모방의 모방자들로 보았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에코는 마흔여섯 살에서 마흔 여덟 살 사이에 첫 소설 <장미의 이름>을 쓴다. 그리고 이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바우돌리노>에 이르기까지 에코에게는 소설을 쓰게 만든 동력이 되었던 <씨앗 관념>이라는 것이 있었다. 에코는 이 글에서 그러한 씨앗 관념들을 펼치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를, 즉 각 작품의 서술을 위한 현장답사와 시대에 맞는 문체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자신의 글쓰기 습관, 컴퓨터가 자신의 글쓰기에 미친 영향, 그리고 어느 순간에 어떤 필기구로 어떤 종이에 썼는지에 이르기까지, 실제 작업 순서와 소설의 전반적인 집필 과정을 세세하게 독자와 문학 지망생들이 궁금해할 만한 모든 것에 대해서 압축적으로 일러 준다.
에코는 글쓰기의 진짜 즐거움은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는 데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소설이 끝날 때 슬픔이 시작되고 바로 그러한 슬픔이 또 다른 소설을 쓰게 만드는 욕망을 일게 한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글은 오로지 어떤 <독자>를 위해 쓰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쓰는 글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지독한 무신론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분류에 해당되지 않은 두 개의 글이 더 많은 주목을 끈다. 하나는 <반미 3세대에 걸친 미국의 신화>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의 힘>이다. 먼저, ?반미 3세대에 걸친 미국의 신화?에서 에코는 193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3세대에 걸친 이탈리아의 젊은이들(무솔리니를 포함하여)이 미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고, 미국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했으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설명하면서, 매혹과 반발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특히 에코는 당대의 지식인 청년들이 미국에 대해 쓴 많은 글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특히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죽스물네 살의 나이에 요절한 자이메 핀토르라는 청년이 쓴 다음과 같은 글은 우리의 미국에 대한 감정과 태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만든다(또한 에코는 서로 다른 입장들의 파노라마를 보여 주면서 격론이 오고가는 대화의 장을 만들어 내고, 이를 통해 글의 환기력을 강화시킨다).
이편 또는 저편에 몰두한 세력들은 우리 경험의 과정을 수정할 수도 있고, 우리를 쓸모없는 조각들처럼 구석으로 내동댕이치거나, 어느 기슭으로 안전하게 인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이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미국인들은 자신에게 제시되는 것을 쉽게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웃음을 잃지 마라Keep smiling.> 이 평화의 <슬로건>이 그 모든 건설적 음악들과 함께 미국에서 왔을 때, 유럽은 텅 빈 진열장이었고, 전체주의 국가들에 부과된 풍습들의 엄격함은 단지 파시스트 반동의 절망적이고 쓰라린 얼굴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미국 낙관론의 극단적인 단순함은, 인간애의 표시로 상복(喪服)을 입어야 한다고 확신했던 사람들이나, 죽은 자들의 자부심을 산 자들의 건강함보다 높게 평가했던 사람들을 격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자기 자식들에 대한 미국의 위대한 자부심은, 그들이 역사의 가장 험준한 길을 걸었으며, 또한 거의 멈춤 없는 발전의 위험과 함정들을 피했다는 의식일 것이다. 풍요로움과 관료적 타락, 갱들과 위기, 그 모든 것은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 미국의 유일한 역사이다. ……미국 문명을 가리키는 어리석은 말이 하나 있으니 바로 물질문명이다. 생산자들의 문명.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욕망들에 자신의 힘을 낭비하지도 않았고, <정신적 가치들>의 쉬운 함정에도 빠지지 않았던 국민의 자부심이다. 그들은 기술을 고유의 삶으로 삼았고, 집단 노동의 일상적 실천에서 새로운 애정들이 탄생함을 느꼈으며, 정복한 지평선에서 새로운 전설들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낭만적 비평가들이 무엇을 생각하든 상관없이, 그토록 심원한 혁명 경험은 침묵 속에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1차 세계 대전 후 유럽에서는 퇴폐적 문화의 테마들을 다시 취하거나, 초현실주의처럼 필연적으로 미래가 없는 공식들을 채택하는 동안, 미국은 새로운 소설과 새로운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였고, 영화를 발명하였다. (반미 3세대에 걸친 미국의 신화, pp. 360~361)
또한 <거짓의 힘>은 세계의 역사를 바꾼 엄청난 거짓말들을 열거하면서 이러한 거짓말들 또한 다른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현상들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진리로 간주하는 것들 또한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지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결국 교양 있는 사람들의 첫 번째 의무는 매일 백과사전을 다시 쓰기 위해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