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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의 영성

나뭇잎숨결 2008. 10. 21. 07:42
▒ [이냐시오영성] 01. Ignatius de Loyola의 시대적 배경 및 생애
[영성주제] : 聖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의 영성 目次

I. 성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 영성의 개요 및 생애

1. 聖 Ignatius의 소개
2. 聖 Ignatius의 생애

Ⅱ. 성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의 영성적 배경

Ⅲ. 성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 영성의 주요 내용

1. 緖論
2. ‘人間性’을 토대로 한 ‘관상’
3. 순명(섬김)
4. 感覺的 靈性 - ‘五官’을 중요시한 靈性
5. ‘식별’의 영성

IV. 성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의 영신 식별

1. 영신 식별이란?
2. 영신 식별의 기준
3. 영신 식별과 회심의 내적 체험
4. 영신 식별의 세 가지 단계
5. 영신 식별의 실천적 방법
5.1 영신 식별을 위한 조건
5.2 결정하는 방법

Ⅴ.성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의 영신수련

1. ‘영신수련’의 의미와 목적
2. [영신수련] 실행으로서의 ‘피정’
3. 聖 Ignatius [영신수련]의 구조
3.1. [영신수련]의 기원
3.2. [영신수련]의 구조
4. 그리스도교적 삶의 실천으로써 ‘영신수련’

1. 聖 Ignatius(이냐시오)의 연표

1491년. 스페인 로욜라에서 탄생하다.

1506년. 카스틸 지방의 아레발로에서 후안 벨라스케스 데 켈랴르의 시종으로 일하기 시작.
1521년. 5월 20일 팜플로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6월24일 병자성사를 받다.
           8-9월에 루돌프의 "그리스도전"과 자코보 데 보라지네의 "성인열전"을 읽고 회심.

1522년. 3월 21일 몬세라트에 도착하다.
           3월 25일부터 1523년 2월까지 만레사에 머물다.
           8-9월에 카르도넬 강가에서 조명을 받고 "영신수련"을 쓰기 시작하다.

1523년. 3월 중순에 바르셀로나를 떠나 예루살렘과 요파 등으로 성지 순례를 시작하다.

1524년. 1월 베니스에 도착하고 2월에 바르셀로나에 이르다.

1525년. 1월 정도 바르셀로나에 머물면서 사도직과 라틴어 문법공부를 시작하다.

1526년. 3월말 바르셀로나를 떠나 알카라에서 논리학과 물리학을 공부하다.
           사도직을 시작하면서 의혹과 신문을 받아 투옥되다.

1527년. 6월 21일에 알카라를 떠나 살라망카로 가다.
           투옥되어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신학강의를 하는 것이 금지되다.
           9월 중순에 파리로 출발하다.

1528년. 2월 2일 파리에 도착하여 몽테규 대학에서 라틴어를 시작하다.

1529년. 10월 1일 상트 바르브 대학에서 인문학을 시작하다.
            피에르 파브르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를 만나다.

1533년. 3월 13일 인문학강의 자격시험을 합격하고 도미니코회원에게서 신학을 시작하다.
           4월 13일 라이네스와 살메론을 만나다.

1534년. 4월에 인문학 석사학위를 받다.
           8월 15일 7명의 동지와 함께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서원을 하다.

1536년. 베니스에서 병원을 방문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영신수련을 지도하면서 보내다.

1537년. 6월 24일 파브르, 라이네스와 함께 사제서품을 받다.
           로마로 향하던 11월 중순경에 라 스토르타에서 현시를 받다.

1539년. 3월 중순에서 6월 24일까지 예수회 첫 동지들이 모여 사도직 활동을 벌일 새로운
           수도회 창립을 숙의하다.
           9월 3일 교황 바오로 3세는 예수회 회헌 초안을 읽고 예수회를 구두로 잠정인가.

1540년. 포루투칼과 인도를 향해 로드리게스는 3월 4일에, 사베리오는 3월 16일에 떠남.
           교황 바오로 3세가 9월 27일 칙서 Regimini를 통해 공식인가를 하다.

1541년. 4월 8일 총장으로 선출되어
           4월 19일 St. Paul's-Outside-the-Walls 성당에서 장엄서원을 하다.

1542년. 예수회 회원을 파견하여 코임브라와 파두아에서 대학을 시작하다.

1544년. 1월 청빈을 중심으로 "예수회 회헌"을 작성하기 시작하다.

1545년. 11월 29일 나달을 예수회에 받아들였고
           교황의 요청으로 라이네스와 살메론을 트리엔트 공의회에 파견하다.

1546년. 10월 9일 성 프란치스꼬 보르하를 예수회에 받아들였고
           예수회 최초의 관구인 포르쿠갈 관구를 설정하다.

1547년. 폴랑코를 예수회 비서로 임명하다.

1548년. 예수회원을 메시나로 파견하여 대학을 설립하다.
           7월 31일 "영신수련"을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인가받아 출판하다.

1551년. 2월 22일 로마대학을 설립하고 다른 많은 대학을 설립할 구상을 하다.

1553년. 8월에 자서전 구술을 시작하다.

1556년. 7월 31일 타계하다.

1583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예수회 회헌을 인가하다.

1609년. 12월 3일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복되다.

1622년. 3월 12일 프란치스코 사베리와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되다.
1. 聖 Ignatius(이냐시오) 영성의 개요

聖 Ignatius가 활동했던 시기의 유럽은 그야말로 ‘격동과 흥분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주석-1) : 한국 예수회, 「이냐시오 로욜라 자서전」, 분도출판사, 1978, 16쪽]

정치적으로는 군주국가들이 등장하면서 그리스도교 제국의 보편정신이 점차로 지역국가의 자국 일변도 주의로 전환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11세기 이후 도시의 성장으로 인한 상업의 발달과 화폐경제의 발전으로 자본주의 정신이 등장하였던 시기였다.

또한 문화적으로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르네쌍스 인문주의로 인해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이 고양되었으며, 이는 교회 안에도 수용되어 성사적 교회를 통한 구원보다는 인간 개인과 신의 만남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의 변화 속에서 교회는 일련의 불행한 사건으로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교황권의 약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교회의 세속화와 성직자들의 비도덕적 생활로 종교개혁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한 시기였다.
[(주석-2) : 김성태, 「세계 가톨릭 교회사 - 강의록」, 가톨릭 신학대학, 1992, 82-92쪽]

이러한 주변 세계의 변화 속에 聖 Ignatius 역시 무감각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 시대적 영향을 받지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같은 역사적, 시대적인 요인들이 聖 Ignatius 성인의 생애와 사명 그리고 영성에 광범위하게 작용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2. 聖 Ignatius(이냐시오)의 생애

聖 Ignatius는 1491년 가스띨랴 왕국의 기뿌즈코아 지방에 있는 바스코 귀족 가문에서 열세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왕실에 대한 충성을 자랑삼는 독실한 가톨릭 가문에서 태어난 聖 Ignatius는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 성직의 길로 나가야 할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속생활’에 더 마음이 끌렸던 것 같다.
[(주석-3): K. 라너, P. 임호프, 「로욜라의 성이냐시오」, 김태관 역, 성바오로출판사, 1993, 10쪽]

聖 Ignatius는 1507년부터 1517년까지 스페인의 왕실 재무상 후안 벨라스께르 데껠랴르의 시중을 들면서 그의 신분에 상응하는 교육을 받았으며, 우아하고 기품있는 기사로 성장하였다. 1517년에 벨라스께르가 죽자 聖 Ignatius는 당시 나바르라 태수이며 그 지역수비를 맡은 나헤라 공작의 군대에 입대하였다.

1521년에는 나바라의 수도 팜플로나가 에스파로스의 군주인 아드레 드 푸아가 지휘하는 군대의 공격을 받자 수비군의 선봉에 서서 완강히 저항하였다. 그러나 聖 Ignatius는 이 싸움에서 불란서군의 포격으로 심한 부상을 당하였다. 전투가 끝난 뒤 불란서군은 聖 Ignatius를 로욜라에 있는 가족에게 후송했으며, 그곳에서 聖 Ignatius는 고통스럽고도 힘든 회복기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로욜라에서의 회복기간은 聖 Ignatius에게 인생의 여정을 바꾸어 성공의 화관을 쓰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聖 Ignatius는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지루한 시간을 메우려고 그 당시 유행하던 흥미진진한 기사소설을 찾았지만 로욜라 성 안에는 그런 책이 없었다. 대신에 聖 Ignatius는 종교서적 몇 권을 얻을 수 있었다.

聖 Ignatius는 이렇게 병상에 누워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열전」을 읽으면서 중대한 발견을 했다. 즉 聖 Ignatius는 궁인으로서의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유쾌함을 느끼지만 일단 그런 생각들이 끝나고 나면 불만과 침울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책으로 읽은 성인들의 생애를 생각해 보고 그들의 삶을 모방하는 상상을 할 때면 그렇게 즐거워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聖 Ignatius는 하느님 사랑을 위해 성인들이 이루었던 위대한 행업을 자신도 이루기 위하여 속세의 욕망과 야심을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이렇게 책을 읽고 명상하는 가운데 시작된 聖 Ignatius의 회심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다.

聖 Ignatius는 자신의 과거의 삶을 속죄하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였다. 聖 Ignatius는 1522년 초에 로욜라를 떠나 까따로나에 있는 몽세르라트 성모 성지로 갔고 그곳 가까이에 있는 만레사에서 수개월을 보내면서 자기 생애에 가장 중대한 체험을 하게 된다.
[(주석-4) : 자서전 제3장에는 그 체험에 관해 긴 이야기로 담겨져 있고, 이냐시오도 만레사의 시절을 자기의 ‘초대교회’라고 언급한다. 예수회 전통으로는 만레사 시절이 그의 생애의 결정적 단계로 간주하고 있다. 즉 만레사는 이냐시오에게 있어서 ‘초대교회’였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 직접적인 교육, 다시말해서 [하느님의 교육]을 시사한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이 체험한 젊은 시절릐 열정을 생각해 보기도 했으나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인도 되었던 특이한 예비신자에 관해서도 깊이 생각했다(참조: 알렝 기옐무,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와 예수회”, 김정옥, 한국 예수회, 1981, 20쪽 이하)]

1523년 聖 Ignatius는 로마와 베니스를 거쳐 예루살렘 여행길에 오르지만 이듬해에 스페인으로 귀국한다. 마침내 聖 Ignatius는 영혼들을 도울 수 있기 위해서 정규교육을 받기로 작정한다. 그리하여 1524년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1534년 빠리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얻기까지의 장기간의 면학생활이 시작된다.

1526년 聖 Ignatius는 바르셀로나에서 알칼라 대학으로 옮겨갔고, 이듬해에는 스페인 지성의 최대의 요람인 살라망까대학으로 갔다. 그런데 이 두곳에서 다 종교재판에 결려 심각한 고통을 받았으며,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주석-5) : 이냐시오가 유학 시절 ‘계명파’로 오인 받은 사건으로서, 자서전 6, 7장에는 이 사건들이 소상하게 술회되고 있으므로 자세한 사항을 참조할 수 있다.]

聖 Ignatius는 스페인에서 종교재판에 더 시달리지 않기 위해 1528년 빠리로 건너갔다.

1538년까지 빠리에 있으면서 쌩 바르브에서 인문과정을 마쳤고 그후 쌩 쟈크 도미니꼬회 학원에서 1년간 신학을 연구했다. 聖 Ignatius의 빠리 시절은 매우 의미있는 시기였다. 후에 새 수도회를 발족시킬 동지들을 모은 것도 빠리에서 했으며, 특히 1534년 8월 15일 몽마르뜨르 소성당에서 발한 서원 등은 예수회의 전주였으며, 그 창립의 길을 닦았다.

면학이 끝나갈 무렵, 聖 Ignatius와 그 동지들은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터키인들의 개종을 위해 일하기로 작정하지만, 그 일이 성사되지 않아 1538년 로마로 가서 그 이듬해에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과 영혼들의 봉사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교황에게 전적으로 자신들의 소임을 맡긴다.

그러므로 1540년에 聖 Ignatius의 전반기 생애와 활동의 절정이자 결실이라 할 수 있는 예수회가 탄생한다. 聖 Ignatius는 1541년 4월 예수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1556년 7월 31일 서거하기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

이렇게 聖 Ignatius는 자신의 회심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였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인가 행동하고 싶어했다. 하느님께 대한 그러한 갈망은 기나긴 순례의 여정을 걷는 사이 더욱 단련되었고 확고해졌다. 聖 Ignatius는 언제나 하느님이 자신을 비추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목격했다.

즉 하느님이 그의 영혼에 신비로이 개입하신 것이다. 따라서 聖 Ignatius는 신적인 사물을 지각하고 통찰하여 그것에 완전히 압도된 인간이며, 신비가인 것이다.
[(주석-6) : 한국 예수회, 「이냐시오 로욜라 자서전」, 분도출판사, 1978, 12-29쪽] ......(이냐시오 성인 생애의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내용 참조)
[참고자료] : 聖 Ignatius(이냐시오)의 생애(세부자료)

이 자료는 1997년에 이냐시오 영성연구소에서 번역 출간한 "이냐시오 로욜라 자서전"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이냐시오는 1491년 스페인에 있던 카스틸(Castile) 왕국의 기푸스코아(Guipuzcoa) 지방에 있는 바스크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열 세 남매 중 막내였다. 가문의 영지와 성채가 아스페이타아(Azpeitia) 읍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곳 지명이 로욜라였다. 그리하여 이냐시오의 본래 이름은 이니고 로페스 데 로욜라(Inigo Lopez de Loyola)로 알려져 있다. 이냐시오라는 이름은 훨씬 후, 그가 파리에서 지낼 때에 초대 교부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에 대한 신심에서 지어 붙인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이냐시오란 이니고의 라틴어 명사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기 오래 전에 이냐시오는 젊은 궁정조신이자 의기양양한 기사였으며 스페인 국왕에게 봉사하는 군인이엇다. 그는 스페인의 왕실 재무상 후안 벨라스케스 데 켈랴르(Juan Velazquez de Cuellar)에게 1507년부터 1517년까지 시중을 들었다.

그뒤에는 당시 나바라의 태수요 그 지역 수비를 맡은 나헤라(Najera) 공작의 군대에 입대하였다. 스페인 북부의 피레네 산맥에 연한 이 지역은 페르디난도 국왕이 1512년 정벌하여 합병한 영토로서 프랑스의 침공 위협을 받고 있었다. 사실 1521년 봄 프랑스군은 이곳을 침공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와 1521년 재건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로 5세 사이에 벌어진 장기간에 걸친 전쟁의 서곡이었었다. 스페인 왕 카를로 5세는 1516년 조부 페르디난도를 계승했다. 프랑스군은 공격을 시작하여 나바라(Navarre)의 팜플로나를 점령했으나 스페인 수비대는 성채에서 강력하게 저항을 하였다. 이냐시오는 수비대의 선봉에서 싸우다가 1521년 5월 20일 프랑스군의 성채 포격에서 중상을 입었다. 앞서 말한 것같이 이 자서전은 이 대목에서 시작한다.

전투가 끝난 뒤 프랑스군은 그를 로욜라에 있는 가족에게 후송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고통스럽고도 힘든 회복기를 보내야 했다. 늦여름이 다가오면서 건강이 차츰 회복되어 가가 그는 평소에 즐겨 있던 무협소설 대신, 종교서적 몇 권을 얻울 수 있게 되었다. 이 책들은 중세에 널리 읽혔던 것으로, 스페인어로 옮겨져 출판된 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중 작센의 루돌프라는 독일 카르투시오의 회원이 쓴 "그리스오전"이 있고, 다른 한 권은 13세기 도미니코회 저술가 카코보 데 보라진느(Jacopo de Voragine)가 지은 ""성인열전"이라는 성인들의 행적집이 있었다.

그 두툼한 책자들을 읽고 명상하는 가운데 이냐시오의 회심은 시작된다. 그리하여 책에 감명받은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그 역시 책의 가치와 위력을 철저하게 주장하는 인물이 되었다. 회복기에 든 그에게는 지금까지 알아왔고 꿈꾸어 온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의 길과 성공이 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어렴풋이 비쳐왓다. 그는 두 갈래 낭만적 이상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번민하였고, 그 자신의 말대로 "자기를 망설이게 하는 영들의 차이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는 하느님 사랑을 위해 성인들이 이루었던 위대한 행업을 자신도 이루기 위하여 속세의 욕망과 야심을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속죄하는 순례자가 되어 가능한 한 빨리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였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가 묘사할 수 있는 것보다도 그가 직접 한 말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 줄 것이다. 여기서도 주요 사건을 그저 지적하고 몇 가지 측면을 관찰하는 데서 그치기로 한다. 그는 1522년 초에 로욜라를 떠나 카탈로니아(Catalonia)에 있는 몬세라트(Montserrat) 성모 성지로 갔고 그곳 가까이에 있는 만레사(Manresa)에서 수개월을 보냈다. 만레사에서 그는 자기 생애에 가장 중대한 체험을 하게 된다. 자서전 제3장에는 그 체험에 관해 꽤 긴 이야기가 담겨져 있고, 본인도 만레사 시절을 자기의 초대교회라고 여러번 언급한 바 있다. 예수회 전통으로는 만레사 시절이 그의 생애의 결정적 단계로 간주되어 왔다. 이냐시오의 말대로, "선생님처럼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의 정신은 계몽되고 그의 이해력은 무한히 깊어졌다. 기사 이냐시오는, 영성상의 옛 어휘를 사용한다면, 이제그리스도의 병사가 되었고, 영원한 임금, 그리스도의 규범을 따르는 사도직이 이제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직도 기나긴 여로를 가야하는 순례의 몸이지만, 그의 눈은 열리고 미래의 진로는 정해진 것이다.

1523년 그는 로마와 베니스를 거쳐 예루살렘 여행길에 오른다. 그러나 성지 수호를 책임지던 프란치스코회 장상들은 성지에 남아 있겠다는 이냐시오의 간청을 일축했기 때문에, 이듬해 그는 스페인으로 귀국한다. 마침내 그는 그가 표현한 대로, "영혼들을 돕기 위하여(to help souls)" 정규교육을 받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1524년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1534년 파리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얻기까지의 장기간의 면학생활이 시작된다. 이냐시오는 몇 군데 명문대학에서 공부했고, 그 덕분에 당대 유럽을 휩쓸던 사상적 종교적 사조에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대는 그야말로 격동과 흥분의 시대였다. 신세계가 발견되고 식민지 개척이 활발했고, 강대국 사이에는 긴장과 마찰이 그칠 새 없었으며, 인문주의의 참신한 도적과 영향이 극치에 달했고, 비텐베르그(Wittenberg)에서 시작한 루터의 저항과 개혁으로 인한 종교 위기가 날로 심각해지고, 분열은 결정적인 단계에 돌입하고 있었다. 영성적 소명과 면학에 아무리 몰두한다 하더라도 이냐시오로서는 주변세계의 이 문제점들을 모를 수가 없었고, 또 거기서 영향을 받지 않을 수도 없었다. 자서전에서는 이 같은 역사적 요인에 관해서 별로 말이 없지만, 분명히 이 요인들이 그의 생애와 사명에 광범위하게 작용했고, 그의 발전에 중대한 일익을 담당했다고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1526년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알카라(Alcala) 대학으로 옮겨갔고, 이듬해에는 당대 스페인 지성의 최대의 요람이요 가장 선구적이면서도 유서가 깊은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으로 갔다. 그런데 두 곳에서 다 그는 종교재판에 걸려 심각한 고통을 받았으며 계몽파(alumbrados)라는 혐의로 조사를 받고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자서전 6,7장에는 이 사건들이 퍽 소상하게 술회되고 있다. 스페인에서 종교재판에 더 시달리지 않기 위해 1528년초에 그는 파리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보수적인 몽테규(Montaigu)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좀더 자유로운 상트 바르브(Sante-Barbe) 대학으로 적을 옮겼다. 1535년까지 파리에 있으면서 상트 바르브에서 인문과정을 마쳤고 그 후 상 쟈크(Saint-Jacques) 도미니코회 학원에서 1년간 신학을 연구했다.

파리시절은 그의 면학에 있어서나 예수회의 장래에 있어서 매우 의미깊은 시기였다. 후에 새 수도회를 발족시킬 동지들을 모은 것도 파리에서였다. 영성생활의 결속, 그들이 품은 지향, 특히 1534년 8월 15일 몽마르트르 소성당에서 발한 서원 등은 예수회의 서곡이었으며, 그 창립의 길을 닦았다.

면학이 끝나갈 무렵, 이냐시오와 동지들은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터키인들의 개종을 위해 일하기로 작정한다. 그 일이 성사되지 않을 경우에는 로마에 가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과 영혼들의 봉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어느 곳에든지 그들을 파견할 수 있도록" 교황의 의향에 자신들을 맡기기로 했다.

1535년 봄 이냐시오는 스페인에 일시 귀국했는데 고향 기푸스코아에서 수개월 지내는 동안 상당히 활동적인 개혁자로 그 면모가 부각되어 갔다.

그해 연말 그는 베니스로 가서 파리로부터 오는 동지들과 합류하기 위하여 이탈리아로 떠났다. 아홉 명의 동지들은 1537년 초에 베니스에서 이냐시오와 합류했다. 이것이 성지로 떠나기 위한 첫걸음이었는데, 그 해가 다 가도록 동방으로 출범하는 배가 없어서 그들은 교황에게 봉사하기로 하고 로마로 떠난다.

여기서 이냐시오의 순례는 끝나는 것이다. 그는 자기 목적지에 이르렀고, 그의 새로운 사도적 임무, 즉 새 수도회의 창립자요 지도자로서의 사명이 시작된다. 그의 자서전은 여기서 일단 끝난다. 자기 회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신상 이야기도 실상 여기서 매듭을 짓는 것이 논리적이기도 하다. 로마에 도착한 이후의 사건들은 잘 알려져 있을 뿐더러 예수회 초창기의 역사(res gestae)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냐시오가 카마라에게 "그 뒤의 일은 나달 신부가 이야기할 것이다." 라고 말을 끊은 것도 그런 까닭에서이다.

1538년 이냐시오와 그 일행이 로마에 당도했을 무렵은 교황 바오로 3세의 재위 시기였다. 프랑스 출신으로 4년 전에 교황위에 올랐고 그의 재위 기간은 매우 길었다.

이냐시오가 본 로마는 "좋은 열매을 맺기에는 너무도 불모지이고 악이 번창하고 있는" 도시였지만, 가톨릭 내부의 개혁과 쇄신을 부르짖는 기수들이 교황의 후원 아래 서서히 로마로 집결하고 있었다.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바오로 3세의 재위 기간 중에 사실 가톨릭 교회사의 새장이 열렸다. 교황은 가장 유능하고 헌신적인 개혁가들을 로마로 초대하였고, 교황청 행정기구에 새로운 활력과 영도력을 불어넣었다. 교황은 등극하자마자 가톨릭 교회가 부딪치고 있는 중대 문제를 취급할 공의회를 소집하고자 고심하였고, 드디어 1545년말 트리엔트에서 공의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단을 단절시키고 부패를 종식시키며 종교생활을 부흥시키기 위하여 그 밖의 여러 대책들을 강구하였다. 이 방대한 작업에 있어서 이냐시오와 예수회원들은 뛰어난 역할을 했으며, 그 시련의 시대에 가톨릭 종교부흥을 추진햇던 요원들이었다고 하겠다. 그렇게 중대한 시기에 순례 사제들이 돌연 이 영원의 도시에 도착하였다는 것은 분명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 사건일 것이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오랜 친구이며 우인인 이사벨 로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냐시오는 로마에 온 처음 몇 달 동안의 일을 재미있게 기술하고 있다. 처음에 그와 그이 동지들은 의혹과 적의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냐시오는 이것을 가장 혹심한 박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로마의 저명인사요 개혁파의 지도급인 가스파로 콘타리니(Gasparo Contarini) 추기경의 후원을 얻게 되고, 이냐시오가 프라스카티(Frascati)로 직접 교황을 알현하여 그의 후원을 얻게 되자, 일행은 공대를 받고 자유로이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활동이란 설교, 아동 교육, 고해성사, 이냐시오가 회심한 이후 여러 해 동안 고안하고 수정해 왔던 영신수련의 지도, 그 밖의 자선사업 등이었다.

바오로 3세는 이냐시오의 동지 피에르 파브르(Peter Favere)와 디에고 라이네스(Diego Lainez)에게 로마의 교황청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도록 임명했으며, 그 이후에는 다른 고위 성직자들도 그들의 봉사를 요청해 왔다. 그들은 인도 제국으로 가라는 위촉도 받았다. 파리의 상트 바르브 대학 학장이던 디에고 데 구베아는 인도 선교를 마음에 두고 이냐시오 일행을 포르투갈 국왕에게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1540년초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리스본으로 출발함으로써 예수회의 대선교사업이 드디어 막을 열게 되었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이냐시오로서는 수도회를 창설할 생각은 없었다. 그와 동지들은 단지 목적이 같고 열성이 같아 단결해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사제였고 파리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획득한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을 섬기고 영혼들에게 봉사하기로 작정한 몸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활동에서 오는 규모와 성격이 더욱 외형적인 신분과 조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1539년 봄 로마에 있는 일행은 그 같은 조직문제에 관해서 장시간의 토론을 가진 끝에 공식인가를 신청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계획에 대한 짧막한 약식문서를 채택하였다. 예수회의 초기 면모 혹은 창립 초안(Prima summa)이라 할 이 문서는 콘타리니 추기경의 주선으로 그해 여름 교황에게 제출되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9월에 잠정인가를 내렸는데, 공식 인가 칙서(Regimini militantis ecclesiae)가 나오기까지는 그뒤로도 일년이 걸렸다. 공식 인가가 지연된 이유는 이냐시오와 그이 동지들이 제시한 수도회의 목적이 너무도 개혁적 이념을 띠고 있어서 로마 당국의 반대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539년부터 40년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은 드디어 예수회를 탄생시켰다. 이 과업은 이냐시오의 전반기 생애와 활동의 절정이자 결실이라 할 수 있었다.
회원들이 계속 증가되었고, 동지들은 교황의 명령을 받아 여러 선교지로 분산되어 갔으며, 예수회의 광범위한 사업이 개설되었다. 초창기 동지들 중에서는 이냐시오 환자 로마에 남아 날로 성장하는 수도회를 통솔하고 있었다. 1541년 4월 그는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1556년 7월 31일 서거하기까지 그 직책을 수행하였다.

마지막 15년 간의 세월은 그의 전반기 생애와 비교하면 한 곳에 정착하여 보낸 지루한 삶이라고 해야 하겠다. 수도회 행정이라는 틀에 박히고 지루한 직무에 시달리면서도,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는 1천여 명의 회원으로 이루어진 예수회의 활동을 발전시켰고 통솔했다. 그는 회헌을 작성하였고, 방대한 서신 왕래로 회원들과 상담하고 조언하였다. 유럽 전역에 중등 교육기관과 대학들을 개설하는 데도 주역을 맡았다. 그는 많은 유익한 과업을 위해서 회원들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는 일찍이 로욜라성에서 머리에 그리던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사명이 현실적으로 실현되어 가는 것을 눈앞에 똑똑히 보았다.

우리는 이냐시오의 생애에서 두 가지 측면을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그의 종교체험과 방향의 특수한 성격이고, 또 하나는 이냐시오의 생애가 지니는 역사적 성겨과 그 의의이다. 물론 두 측면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이냐시오의 회심과 영성의 성장은 역사의 맥락 속에서 일어난 것이며, 거기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이와 같은 성장은 시대의 사조와 요청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에 양향을 미치고 있다. 이냐시오 로욜라의 경우도 시대를 타고낫다는 표현이 적합한 것이라고 하겠다. 우선 우리는 이 두 측면을 차례로 분리시켜 먼저 이냐시오 생애의 내면적 개인의 면모를 관찰하고, 그 생애가 지니는 역사적 측면을 개괄해 볼까 한다.

로욜라성에서 그가 겪었고 그를 돌변시킨 체험은 무엇이었던가? 그리고 몬세라트와 만레사에서 겪었던 체험은 또한 무엇이었던가? 자서전에도 이 야기들이 상당히 길게 서술되어 있으며, 그가 변모해 가는 현저한 모습 몇 가지는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그러면 그의 회심 체험을 분석해 더 보탤 말이 었을까?

우리가 간과해서 안될 점은 그 체험이 두드러지게 행동 본위의 성격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이냐시오는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인가 행동하고 싶어했다. 성인들의 행적에 감명을 받아 자기도 임금 그리스도를 섬기면서 살고 일하고 싶었던 것이다. 기나긴 순례의 여정을 걷는 사이 그의 결심은 달련되고 확고해졌음이 사실이지만, 시종일관 그를 지배하고 있었던 한 가지 신념은 고결한 행위를 성취하고 능동적 봉사의 생애를 영위하겠다는 결의였다.

이것은 기사도 정신, 군주를 받들던 기사로서의 헌신이 종교적 차원으로 전이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한다. 그럴듯한 해석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만든 이유, 이냐시오의 새로운 결의가 얼마나 열렬했었나 하는 점, 그의 생애를 변모시키고 활력을 제공한 방법 등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되지 못한다. 이냐시오는 하느님께서 자기를 비추시고 인도하심을 목격하였다. 예수회 전통도 하느님께서 그의 영혼에 신비로이 개입하신 사실을 수긍해 왔다. 그는 신적인 사물(the divine)을 지각하고 통찰하여 그것에 완전히 압도된 인간이며, 그런 듯에서 하나의 신비가라 불러도 이의가 없을 줄 안다.

그렇지만 그가 영감받은 내용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그를 행동으로 몰입시켰던가 하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서전은 이 문제에 대하여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어느 면에서는 이냐시오가 자신의 생애를 술회하는 대상들이 능동적 봉사라고 하는 그의 이념을 이미 체득하고 있거나 그 이념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영신수련을 받아 그 이념으로 훈련받은 예수회 내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납득이 갈 만도 하다.

이 문제에 관해서 무엇인가 밝혀줄 수 있는 것은 "영신수련"이 아닌가 한다. 혹자는 이 책이 "이냐시오의 회심과정과 생애 변천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또한 신비주의적 색채가 전혀 없이 담아놓았다" 고 평한다. "영신수련"은 이냐시오가 저술한 것으로서 기도, 묵상, 양심성찰을 행하는 체계적이고도 질서정연한 절차를 다루고 있다. 복사된 현존 책자는 영신수련을 지도하는 사람의 안내원 노릇을 하는 지침서 내지는 개요라고 하겠다.

이냐시오는 이 영신수련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하여 엮었다. 거기에는 특별히 취급되는 수련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관한 묵상'이요, 다른 하나는 '두 개의 깃발에 관한 묵상'이다. 이것은 로욜라성의 병상에서 읽은 내용에서 추려 뽑은 것인데, 본질적 중요성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항상 인정받아 온 것으로서 이냐시오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요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냐시오는 세계를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싸움터로 보았다. 양자는 모든 인간을 자기 깃발 아래로 끌어들이고자 노력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인간 영혼의 영적 싸움이지만, 또한 만인이 부딪치는 현실문제이자 인류 드라마의 진면모인 것이다. 영원하신 임금 그리스도의 소명은 우리측의 응답을 당연히 요구한다. 그리고 영혼들을 점유하고 세상을 정복하는 일에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도록 모두가 부름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부르시고 특히 개인들에게 '나의 소원은 전세계와 모든 원수를 다 정복하고, 내 아버지의 영광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과업에 참여코자 하는 자는 나와 함께 기꺼이 수고해야 하리라. 고통 중에 나를 따르는 사람은 영광 중에 나를 따를 수 있느니라."(영신수련 95항)

요컨대 이냐시의 회심은 곧 구세경륜을 감지한 것이며, 그이 새 삶은 영원하신 임금의 도전에 응하는 삶이었다.
이냐시오의 비전, 사상, 영성에 관해서는 많은 말을 할 수 있겠고 방대한 연구서도 나와 있다. 그러나 근본 원리는 간단 명료하다. 이냐시오는 세계를 구세사의 무대로 본다. 거기서 인간들은 하느님께 행동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 하느님은 항상 창조하시고 일하시는 분이시며(Deus operarius), "땅 위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 안에서 나를 위하여 일하시고 수고하신다."

인간 각자는 전반적인 투쟁을 관찰 판별하고 나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할 것이며, 영성 투쟁에 개입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수고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문제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결정적으로 투신하고 가담하는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냐시오가 일찍이 로욜라성에서 체험한 것, 즉 "영의 식별"이 선행된다. 그리하여 수도생활은 목적이 확고한 활동생활이 되고, 이냐시오의 회심은 곧 이 진지한 활동의 원천을 이룬 것이다. 나달 신부의 유명한 말대로 그는 활동 중의 관상가가 된 것이다.

이냐시오의 생애가 갖는 역사적 의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겠다. 첫째 그 생애는 시대를 반영하고 특징짓고 있으며, 둘째로는 16세기 가톨릭 세계의 쇄신과 부흥에 위대한 공헌을 남겼다는 것이다. 물론 후자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전자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이냐시오의 체험은 시대의 분위기 내지 요청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에, 물론 시대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 원천을 들여다볼 때에, 그 체험은 당대에 번성하던 수많은 영성사조들을 종합하고 개괄한 체험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회심이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것이요, 인간의 자기훈련을 강조한 것이며, 독립성과 개인의 자주성을 살린 것이요, 고도의 활동적 사도직으로 결실될 체험이었다. 또한 수도적 헌신과 세상에 대한 봉사를 격리시키던 그 간격을 메운 것이었다. 사건들의 맥락 안에서 일어난 체험이면서, 사건들 속으로 완전히 개입하는 체험이었다. 이냐시오의 체험이 담고 있는 전체적 역사성을 본면 그 체험에서 우러난 놀라운 활력과 당대의 젊은이들을 그토록 많이 끌어오던 매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냐시오와 예수회원들이 가톨릭 영성의 새 계기와 발전을 이룩한다는 이 평은 자주 있어온 것이다. 중세의 낡은 신심과 수도원 제도를 타파하고, 시대에 호응하며, 능률적으로 사회에 개입하는 역동적인 수도행활의 개념을 그들은 도입했던 것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문제를 연구하고, 이냐시오의 체험과 수도회 창설이 14세기의 신앙정화 운동인 신심 중용주의(Devotio moderna)에 영향을 입었으며, 가톨릭 종교개혁의 쇄신 적응의정신을 대표한다고 해석한 사람도 있다.

이냐시오와 그의 동지들이 1539년에 작성한 예수회의 목적과 취지 및 조직에 관한 성명서는 이 견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다만 현대인으로서는 당대의 그 취지와 조직이 얼마나 혁명적이엇던가를 충분히 짐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그 이념과 원리가 이미 보편화된 환경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로서는 다만 그들이 수행해 온 업적들을 측정해 볼 따름이며, 그 모든 것이 어느 한 스페인 기사의 영성적 모험에 그 원천을 두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뒤에 이어질 자서전은 바로 그 기사의 '순례의 여정'을 우리에게 들려줄 것이다. -끝-

 

 예수회(Society of Jesus). 세계 112개국에서 230여개 대학과 4,000여개 중ㆍ고교, 2000여개 연구소를 운영하는 가톨릭 수도회다. 서강대학교는 바로 이런 예수회 정신에 의해 겁립된 대학이다. 초기의 역동성은 지금보다 더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이 동요하던 악조건 속에서도 예수회는 공식 출범(1540년) 10년 만에 30여개의 대학을 설립하고 30년 만에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깔았다. 때문에 예수회는 가장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로도 손꼽힌다.

 

경제라는 시각에서 바라본 예수회의 성공요인은 남다른 리더십. 창립을 주도한 성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de Loyola)의 인생역정과 사상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491년 에스파냐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당초 진로는 군인이었으나 30세 무렵 진로를 바꿨다. 프랑스와의 전투 중에 다리가 으스러지는 부상을 입은 탓이다.

 

휴양 중의 로욜라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진정한 기사도’라고 생각하고 참회와 수양의 길로 접어들었다. 늦은 나이에 신학 공부를 마친 그는 ‘청빈과 정결, 교황에 대한 순종’을 맹세하고 예수회를 세웠다. 형식적인 관습을 타파해 ‘위장 프로테스탄트’라는 비난까지 샀던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영성수련’과 교육.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정신적 완성까지 중시했기 때문이다. 1556년 7월31일 그가 65세로 사망한 뒤에도 예수회는 세계로 선교사를 보냈다. 마테오 리치 등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과 일본에서 활약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로욜라 사망 452주기. 세계화와 정보화의 진전, 테러와 전쟁 위험에 둘러싸인 요즘의 상황이 대항해 시대와 인쇄술, 종교갈등을 겪던 로욜라 시대와 비슷해 보인다. 이 때문일까. ▦확고한 자아의식과 ▦독창성 ▦타인에 대한 헌신과 사랑이라는 로욜라의 리더십이 가슴에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