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무릎을 꿇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이 되었느냐, 사랑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무릎을 꿇었느냐?
너도 무릎을 꿇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이 되었느냐, 사랑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무릎을 꿇었느냐?
-Did you fall down on your knees only to be loved, and did you kneel only after becoming love?
[연 중 제 28일 (다 해) 2022. 10. 9. Luc. 17,11-19]
1. 너도 무릎을 꿇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이 되었느냐(정호승)
정호승, 「무릎」과 이육사, 「절정(絶頂)」을 읽어본다,
너도 무릎을 꿇고 나서야 비로소/사랑이 되었느냐/너도 무릎을 꿇어야만/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데에/평생이 걸렸느냐차디찬 바닥에/스스로 무릎을 꿇었을 때가 일어설 때이다/무릎을 꿇고/먼 산을 바라볼 때가 길 떠날 때이다/낙타도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먼저 무릎을 꿇고 사막을 바라본다/낙타도 사막의 길을 가다가/밤이 깊으면 먼저 무릎을 꿇고/찬란한 별들을 바라본다(정호승, 「무릎」)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서릿발 칼날진 그 위 에 서다.//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이육사, 「절정(絶頂)」)
‘무릎을 굻는다’는 것은 단순한 동작으로 무릎을 바닥에 대는 자세를 말한다. 그런데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관념의 구체화로 주로 쓰인다. 기도를 할 때 신 앞에 무릎을 꿇는다. 큰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할 때, 역시 무릎을 꿇는다. 또한 존경하는 분 앞에 앉을 때도 무릎을 꿇는다. 존경이나 애원의 의미를 상대방에게 나타내기 위해서도 무릎을 꿇는다. 무릎을 꿇는 동작과는 상관없이 흔히 ‘바닥을 쳤다’라고 말하는 상황 앞에서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굴복하다’, ‘항복하다’, ‘투항하다’ ‘백기를 던지다’등의 뜻으로도 쓰인다.
정호승 시인의 「무릎」과 이육사의 「절정(絶頂)」에는 이 ‘무릎을 꿇는’ 행위를 통해 상황 인식의 대 전환이 일어난다.
정호승의 시에서는 무릎을 꿇으면서 사랑의 의미를 터득하고 비로서 떠날 때를 바라본 화자의 습명이 나온다. 또 이육사의 시에서도 일제말기 열네번이나 옥고를 치른 화자가 더는 나아갈 길이 없는 상황에서- 수평적 이동도 수직적 이동도 모두 길이 막힌 상황에서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하나를 탄식하면서 무릎을 꿇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관조적 극복이 일어난다.
그러기에 정호승 시인의 「무릎」과 이육사의 「절정(絶頂)」은 시대는 다르지만 ‘정침正寢’의 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정침正寢’은 제사를 지내는 방이다. 말하자면 하늘과 땅이 연결된 공간이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한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공간에 해당한다. 그 꿇음의 공간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에게 자신을 제물삼아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다.
어떤 식으로든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죽음과 유사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신 앞에 무릎을 꿇는 것도, 사람 앞에 무릎을 꿇는 것도, 상황 앞에 무릎을 꿇는 것도 그 어느 것도 결국은 자기 극한에 이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위다. 먼저 자신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늘에게도, 사람에게도, 상황에게도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포기든 내려놓음이든 먼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지만 무릎을 꿇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기에 어떤 이들에게는 무릎을 꿇는 행위는 자기-죽음을 감행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정호승 시인의 ‘너도 무릎을 꿇고 나서야 비로소/사랑이 되었느냐‘ 는 것은 ’습명-홀연 깨달음‘에 해당한다. 또 이육사 시인의 ’그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는 역설 역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이 상황의 소산을 바라보는 현실인식의 차원을 넘어 사유하는 존재이기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상황은 바뀌지 않았는데, 그 상황을 너머섰다는 것에서, 어딘가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사유의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2.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마르틴 하이데거)
사유의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언어라는 존재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를 박이문 선생은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언어 이전의 사유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유 이전의 문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곧 사유와 문명의 바탕이며, 그 구조물 자체이다.”(박이문, 「문명과 언어」)
박이문 선생이 언어와 사유, 그리고 문명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면, 하이데거는 사유와 존재, 사유와 존재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초석을 다듬었다. 하이데거는 사유란 무엇인가가 아니고 사유를 가능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인류에게 선물한 사유하는 지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인류사에 끼친 영향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그의 영향 가운데 후기 철학의 정점으로 왜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를 통해 신과 인간의 관계를 규명하려 했는지. 인간이 신을 기억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인간과 신은 서로에게 속해있기 때문이자, 존재와 인간이 근원적으로 서로 서로에게 내맡겨진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바라본 점에서 ‘존재와 사유’는 병렬관계 보다는 ‘존재-사유’는 필연적인 합성관계라고 보았다.
하이데거는 1914년 「심리주의의 판단에 관한 이론」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16년 「둔스 스코투스의 범주론과 의미론」으로 교수자격 논문이 통과하여 1923년 마르부르크 대학 정교수가 되었다. 1928년 후설의 후임으로 프라이부르크대학에 부임하였다. 1927년 주저 『존재와 시간』을 출간하였다. 1933년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1934년 학과 내의 불화, 당과의 이견으로 총장직을 사퇴하였으나, 이 시기의 정치적 행보는 하이데거의 삶에서 오점으로 남게 된다. 하이데거는 총장직을 사퇴한 후 행한 첫 강의 「언어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서의 논리학」에서 그는 당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간접적으로 시사하였다. 이후 그는 『사유란 무엇인가』(1952년)를 통해 사유의 “전회”라로 불리는 후기 사유의 길을 걸었다. 그의 존재-사유는 데리다의 차연사상, 포스트모더니즘, 후기구조주의, 마르쿠제와 하버마스의 비판이론,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이데거에게 사유는 신(존재)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하여 인간을 필요로 하고, 인간은 현-존재라는 자신의 극단적인 규정을 완수하고자 존재에 속해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①우리의 본질에 붙잡아두는 자는 우리 자신이 붙잡아 두고 있는 자를 몸소 우리 쪽에서 간직하고(be-halten) 있는 동안에만 우리를 붙잡아 두고 있다. 기억이란 사유의 집기執記Versammlung)이다. 기억은 우리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선사받은 선물이다. 선물이기에 감사다. 사유는 기억하는 것이자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더 깊은 사유다.(하이데거, 『사유란 무엇인가』)
②인간의 탁월성은 인간이 사유하는 존재로서 존재에게 개방된 채 존재 앞에 세워지고, 그리하여 존재와 관련된 채로 머무르면서 존재에 응답한다는 점에서 고이 깃들어 있고, 존재는 오직 자신의 요구에 의해서 인간에게 다가와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본래적으로 존재하며, 또한 존속하게 된다.(하이데거, 『사유란 무엇인가』)
③사유는 어떤 길도 인간 본질로부터 출발하여 존재에로 이행하지 못하며 혹은 거꾸로 존재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에게 되돌아가지 못한다. 오히려 사유의 모든 길은 언제나 어떤 존재와 인간 본질의 완전한 관계 안에서 진행될 뿐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사유가 아니다.(하이데거, 『사유란 무엇인가』)
④사유가 어디에서 발원하는지 그 유래를 꿰뚫어볼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철학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서 존재의 사유 속으로 들어서게 된다(『사유의 경험으로부터』)
⑤물음은 어떤 것에 대한 물음으로서 자신에게서 "물어지고 있는것"을 가지고 있다. 모든 어떤 것에 대한 물음은 어떤 방식으로건 어떤 것에 물음을 거는 것이다. 물음에는 물어지고 있 는 것 외에 "물음이 걸려 있는 것"이 속한다. 탐구하는, 다시 말해서 이론적인 물음에서는 물어지고 있는 것이 규정되고 개념화되어야 한다. 이 경우, 물어지고 있는 것에는 본래 의도되고 있는 것으로서 물음이 꾀하고 있는 것이 놓여 있다. 물음은 여기에서 목표에 이르게 된다.(『존재와 시간』)
하이데거에게 신이 신임을 알기 위해, 인간이 인간임을 알기 위해서 존재와 사유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우리의 본질에 붙잡아두는 자는 우리 자신이 붙잡아 두고 있는 자를 몸소 우리 쪽에서 간직하고(be-halten) 있는 동안에만 우리를 붙잡아 두고 있다. 기억이란 사유의 집기執記Versammlung)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 속에서 사유가 이루어진다면 사유란 존재에 의해, 존재를 사유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사유는 다른 그 무엇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존재의 사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존재-사유’는 무엇을 통해 드러나는가? 질문 속에서 “인간의 탁월성은 인간이 사유하는 존재로서 존재에게 개방된 채 존재 앞에 세워지고, 그리하여 존재와 관련된 채로 머무르면서 존재에 응답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사유하는 자가 그들의 말함(Sage)을 통해 존재의 개방가능성을 ‘언어’로 가져오고 언어 안에 보존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이때 존재를 사유하는 인간은 언어라는 거처에 살면서 이 거처를 지키고, 존재를 언어에로 가져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유는 인간의 오감 영역을 넘어선 존재의 소리를 청취하면서, 이 존재에게 낱말을 찾아주는데, 그 낱말로부터 존재의 진리가 언어를 통해 다시 우리에게 온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존재가 말한다’라고 하지 않고 "언어가 말한다"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사유가 단지 수동적으로 존재의 소리를 정취하는 하는 상황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사유는 어떤 길도 인간 본질로부터 출발하여 존재에로 이행하지 못하며 혹은 거꾸로 존재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에게 되돌아가지 못한다.” 말하자면 존재는 능동적인데 반해 사유는 수동적인 것 같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의 능동성에 사유의 수동성이 단지 응대하는 것에 불과한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하이데거에게 있어 '사유'는 하나의 '행위(Handeln)'로 바라보고 있다. 이때 이 '행위'는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능동적인 것'도 아니며, 또한 무언가를 단지 받아들이는 행위인 '수동적인 것'도 아니고, 어떤 '이론적인 것'도 '실천적인 것'도 아니다. 사유는 하나의 길이 된다.
사유는 끊임없이 사유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가는데, “사유의 모든 길은 언제나 어떤 존재와 인간 본질의 완전한 관계 안에서 진행될 뿐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사유가 아니다.” 이 사유의 '행위'란 '이론과 실천'의 구별 이전에 생기며, 또한 모든 실천을 능가하는 어떤 에너지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유란 어떤 현실적인 성과를 위한 행위 이전의 움직임을 잉태하면서 또한 움직이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존재하기-행하기-소유하기)
이렇듯, 하이데거에게 사유는 사유의 길을 가기 위해 기억을 필요로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 기억은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혹은 기념하여 처럼’ ‘선체험’에서 나온 기억이다. 기억은 곧 늘 존재와 함께 있었음을 직관한다는 점에서 감사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이로써 하이데거는 사유는 "인간 본질에 대한 존재의 연관을 수행한다"며, "존재의 진리를 말하도록 존재에 의해 요구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존재자의 존재에 응답하며 다가가는 그런 응답 속에 체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응답은 언어이자, 기억이자, 말건넴이자, 감사이자, 함께 속해 있음이자, 우리에게 더 깊이 사유하도록 이끄는 ‘끌어당김’이라고 할 수 있다.
3.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루카.17,11-19
루카.17,11-19을 읽어본다.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라고 전하는 루카.17,11-19에서 나병환자 열 사람의 치유기적 사화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은총의 선물을 주시는가를 바라보려고 한다.
루카복음사가는 치유의 기적에서 믿음의 기적으로 그 초점을 이동하는 듯, 19절로 메시지가 수렴된다. 루카17,11-19에서 메시지 이동의 중층적인 의미가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이 복음사가가 전하고자 하는 은총의 선물일 듯하다.
복음사가는 <자비, 치유, 감사, 영광. 믿음>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믿음의 지형을 신앙의 메카인 예루살렘에서 범 예루살렘 지역으로 확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표면적으로 마치 자비에 의존한 삶(예루살렘)인가? 믿음에 의존한 삶(범 예루살렘)인가를 묻고 있는 듯하다.
루카 17,11-19는 루카복음에만 있는 특수사료로 Ⓐ의 예루살렘 상경기에 있었던 일이란 점에서 지난주에 이어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반복적으로 제시하고 있기에, 그 지형을 확대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바라보아야 할 듯하다.
지난주 복음이 믿음의 정도인가? 믿음의 태도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루카 17,11-19은 믿음이란 근본적으로 누구와 관계를 맺는 것인가?하는 <관계론>에 초점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믿음의 정도와 태도를 다시 한 번 다른 각도에서 초점화 시켰다고 할 수 있다.
갈릴레아-사마리아-예루살렘이라는 공간지형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믿음의 한 전형을 보여준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 역시 루카복음 사가의 믿음의 <관계론>을 공고히 하는 어떤 의도된 포석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반드시 가려는 이유는 종교의 근본적인 지형을 바꾸고 확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지형, 그 확장의 필연성이 예루살렘 이전부터 하나하나 길을 연다고 할 수 있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라는 질문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루카 17,11-19에서 어떻게 자비를 입은 삶에서 멈추지 않고, 그 삶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찬미와 영광의 단계까지 이를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이유에 해당한다. 왜 예수님은 자비에 대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고 하시는 것일까?
자비의 단계(고통을 함께 나누는 그 단계에서)에서 찬미(기쁨까지 함께 나누는)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음의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 신앙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깊은 의미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예컨데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과 고통을 나눌 수 있는 권리까지는 서로 나눠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기쁨까지 함께 나누는 단계는 쉽지 않다는 것에서 자비에서 찬미의 단계가 자동적인 단계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13절)
한센병이라 불리는 나병이 얼마나 지독한 병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소록도처럼 그들을 공동체에서 완전 격리시킨 병이란 것도 알고 있다. 그들이 예수님 가까이도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살려주세요! 라고 비명을 지르듯,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는 절규 속에는 그들이 어떤 극한 상황에 내몰려있는지 충분히 바라볼 수 있다. 우리를 낫게 해주십시오 라고 외치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탄원에서 나병을 '죄'의 결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라는 그분의 응답은 이미 그 병은 나았다, 라는 함의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자비는 원래의 상태, 훼손되지 않은 창조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임을 바라볼 수 있다. 그들이 그분의 말을 기꺼이 따랐을 때 그들의 그 지독한 불치병도 낫게된다. 이 치유 기적 사화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데, 이 상태를 구원을 받은 믿음의 상태까지는 아니라고 바라보는 루카 복음사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15절)
열 명 가운데 한 사람, 그 사람은 치유기적사화를 통해 창조의 아름다움과 구원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바라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치유를 요청했을 때처럼 자신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을 때,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 창조의 아름다움을 알게 해 준 예수님 발 앞에 감사의 예로 엎드릴 수 있었다. 여기서 루카복음사가가 자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는 바로 그 단계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단계로 바라보았다.
단지 기적을 체험한 아홉 사람과는 달리 예수님께 돌아와 예수님 앞에 엎드린 한 사람의 감사 속에는 단지 병이 나았다는 기쁨에 멈추지 않고(육체의 치유기적), 예수님, 스승님이라고 소리쳐 불렀던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라는 연결까지를 믿음이라고 본 것이다(구원의 기적). 즉 치유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의 정체까지 파악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사가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를 치유기적사화의 앞에 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17절에서 ‘이 외국인 말고는’ 이라고 중심부 담론을 넘어서는 구세사의 확장을 통해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복음사가는 다시 한 번 강조하기에 이른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17절)
우리는 미사 전례 중에 ‘우리의 찬미가 하느님께는 도움이 되지 않으나 우리에게는 도움이 되나이다’라고 기도한다. 17절, 18절, 19절은 바로 그 간절한 기도문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분에게 감사할 수 없을 때, 그분께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할 때, 그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다. 하느님의 사랑을 조정하기 위해서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찬미와 감사의 그 영향이 우리에게 고스란히 주어진다는 것이다. 감사할 수 없는 없는 신앙은, 기복신앙으로 흐르고, 우리 각자가 지고가는 십자가의 의미, 고통과 부활의 의미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사랑의 의미를 모르게 만든다. 신을 부르는 무신론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찬미와 감사는 마르지 않은 신앙 상태를 유지하는 마중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그분의 이름을 부르든 부르지 않든, 자비의 하느님이다. 이 세상의 창조물 모두에게 예외없이 그분은 원래의 아름다운 창조의 상태로 돌아가길 원하고, 원하는 모든 이들을 그 상태로 이끄신다. 우리가 감사하든 감사하지 않든, 청하든 청하지 않든 상관없이, 그분을 믿든 믿지 않든 모든 이의 머리 위에서 태양이 빛나는 것과 같은 무상의 은총을 인류에게 공평하게 내려 주셨고, 주시고, 주실 것이다. 우리의 원래의 창조의 상태,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우리를 끊임없이 돌려놓으시는 분, 현대의학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은 바라보고 찬미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때, 그 모든 감사의 노래는 하느님을 향하고 있지만 실은 우리에게 그대로 돌려지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은 상태가 찬미고 감사하는 일이다. 하이데거가 바라본 사유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생명과 삶의 근원이 어디에서 연유되는지를 바라보는 것, 일회적이고 육체적인 건강회복의 차원을 넘어서는 영원 속의 내 자신의 귀중함, 내가 돌아갈 집을 바라보게 되었음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 시대나 어느 시대나 세 부류의 삶이 존재하는 거 같다.
(1)삶의 풍요로움이 당연히 주어지는 것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고, (2)적어도 주님의 자비로 이 삶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3)나아가 우리의 삶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찬미하는 우리가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1)에서 (2)로, (2)에서 (3)으로 넘어가는 데에 어떤 시간차가 있다는 것이다. 시간밖에서의 은총을 구하는, 죽어서 천국간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은총의 사후성이다. 시간안에서의 <은총의 즉시성>을 바라보는 것에 늘 무엇인가 끼어들고, 개입한다는 것이다.
나병이 치유된 열 명 가운데 돌아온 그 한사람,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예수님 앞에 감사함으로 엎드린 그 사람은 은총의 즉시성을 사는 사람에 해당한다. 그와 은총 사이에는 아무 것도 개입하지 않았다. 오직 그 자신과 삼위일체의 사랑 뿐이다. 그는 말하자면 이미 삼위일체 사랑 속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1절에 언급된 예루살렘 상경기에서 사마리아라는 지역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바로 구세사의 큰 틀에서 바라본다면 하느님을 믿는 수많은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로 갈라지는 <은총의 즉시성>을 보여분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루카 17,11-19는 치유의 기적사화를 통해, 우리의 삶도 온전히 그분을 통해, 치유 받고, 우리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서 연유되며, 우리가 믿는 분이 누구인지, 은총의 즉시성으로 깨어나, 이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희망보다 더 영원한 희망, 일시적인 웃음보다 더 투명한 기쁨, 찰라의 감사보다 더 뜨거운 감사로 살라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창조된 모든 것이 창조의 근원에게 감사와 사랑과 찬양을 드리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천국이다. 예수님 앞에 감사로 무릎을 꿇은 치유받은 한 사람처럼 시간밖에서의 천국이 아니라 , 지금,오늘, 여기서 천국을 살아라, 라는 축복의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Faure : 3 Romances Sans Paroles No.3 In A Flat Major Op.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