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및 인식의 원천으로서 “다르지 않음(Non-aliud)”
存在 및 認識의 源泉으로서 “다르지 않음(Non-aliud)”
- 동일성과 차이에 대한 존재론적인 고찰 -
조 규 홍(한국교원대)
요 약 문
이 글(小考)은 중세말 교회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니꼴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가 모든 존재 및 인식의 근간(根幹)으로서 제안한 “다르지 않음”이란 개념을 재고함으로써 ‘진리의 하나됨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 오늘날 후기 모더니즘의 조류를 타고 ‘다양성’, ‘상이성’, ‘차연’ 등 “다름(alteritas)”이 저마다의 존재를 파악하는 기초이자 나아가 전부라고 규정하려는 움직임에 반하여 그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개념으로서 “다르지 않음”을 생각할 때, 그것이 과연 후기 모더니즘의 입장에서처럼 최우선적인 원칙(?)으로서의 ‘다름(différence; différance)’에 부수적(附隨的)이거나 혹은 대립적(對立的)인 어떤 것에 지나지 않을는지? 아니면 오히려 ‘다름’에 앞서(ante) 필연적으로 전제되고, 그로 인해 비로소 ‘다름’이 결정되는 무엇이 아닐지?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 주요어 : 다르지 않음, 차이(다름), 하나됨, 삼위일체, 존재론
I. 들어가는 말
“[...] nihil maneat dubii, quin hic definiendi modus, quo non-aliud se et omnia definit, praecisissimus sit atque verissimus (우리는 ‘다르지 않음’이 그 자체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을 정의내리는 이 정의방식을 따라 가장 정확하고 가장 참되게 말할 수 있으리라는 점에 대해 추호도 의심이 없네)” (Nicolaus, De non-aliud c. 1).
이 연구는 그러나 복고주의적인 입장을 지향하지 않는다. 어쩌면 근대 이전의 전통적인 사상 속에 제시된 ‘하나됨(unitas)’이 근대의 계몽주의적인 자각 이래로 오늘날 후기 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비판적인 면’을 안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 수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그렇듯 비판의 대상인 저 전통적인 구호에서 ‘획일’이 아니라, 진정 ‘통일’이란 토대 위에서 ‘다양성’을 고려하였을 경우, 과연 그 ‘하나됨’ 속에 ‘다양성’이 한낱 빛 좋은 개살구 - 여전히 이질적(異質的)인 어떤 것임에도 저 ‘하나됨’의 강요에 의해 무리하게 배치된 처지 - 가 아니라, 진정 화합할 수 있고 또 그럴 필요가 있는지 확인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이 확인된다면, 이 ‘오래 전의’ 개념은 결코 ‘진부하지 않은’ 의미를 따라 특히 ‘하나됨’과 ‘다름’의 대립적인 양상에 처한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리라 본다. 이는 점차 팽배해 가는 ‘상대성’의 극복을 위해서도 반드시 고려됨직 하다고 본다.
이에 본 연구는 먼저(1) 문제의식을 위해 ‘다름’ 및 ‘다양성’을 강조하는 후기 모더니즘의 입장을 간단하게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연구주제와 관련한 그들의 주된 논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것이고(1-1), 아울러 그로 인해 제기되는 ‘문제점’ - 예컨대, ‘논리적 정립’의 결함 및 ‘진리인식’의 불가능성 -에 집중하여 분석해 볼 것이다(1-2). 그 다음(2) 본격적으로 ‘다르지 않음’이란 개념연구를 위하여 간단히 그 어원적인 배경을 니꼴라우스의 연구동기 안에서 파악하고(2-1), 무엇보다도 그가 이 개념을 소개하고 있는 작품 ?다르지 않음에 관하여(De non-aliud)?로부터 몇 가지 요점을 살펴본(2-2) 후, 끝으로(3) 이 ‘다르지 않음’의 존재론적이며 역동적인 의미를 새겨보면서 ‘하나된’ 진리인식의 가능성을 전망해보고자 한다.
Ⅱ. 풀어가는 말
1. 문제의식
1.1. 후기 모더니즘의 ‘다름’ 및 ‘다양성’에 대한 집착
지난 세기 말 런던 대학의 새럽(Madan Sarup)교수는 후기 모더니즘에 대한 몇 가지 특징들을 우리에게 소개한 바 있다 : 후기 모더니즘은 종래의 ‘주체성’이란 개념이 ‘강요된 통일성’ 안으로 우리를 몰아세운 까닭에, 그런 “인간주체[개념]에 대하여 비판적이며”, ‘어떤 법칙성’ 안에서 진보하는 “역사관(혹은 역사주의)을 비판하며”, 언어연구를 통해 규범적으로 제시된 “의미체계를 비판하며”, 끝으로 일축하여 [그들은] 사변적인 것을 싫어하고 실천적인 것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인과율, 동일성 개념 등 형이상학적인 “[전통]철학에 대하여 비판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사실 하나는 후기 모더니즘이 ‘인간 주체성’ 개념을 “철학의 사생아”라고 비난하는 그 근거를 저 근대(近代)의 데까르트의 ‘주체성’으로부터, 곧 ‘사물(res extensa)과 화합할 수 없는 사유하는 존재(res cogitans)’라는 관점으로부터 찾고 있다는 새럽의 지적이다. 과연 근대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향’이란 구호 아래 ‘사유존재로서 인간의 자기중심화’는 사유대상 일체를 ‘타자화’하였음은 물론 ‘공작인으로서의 인간(homo faber)’에게 맡겨진 전유물처럼 여기게끔 능히 부추겼다고 평가된다. 그로써 후기 모더니즘의 비판은 일면 타당성을 갖는다. 바로 그렇듯 잘못된 인간중심성에서 벗어나야 하는 점에서, 그리하여 ‘객관적인 사실과 주관적인 의식(意識)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을 극복(지양)해야 한다’는 점에서 [인위적인] ‘구성(construction)’이 아니라 오히려 ‘해체(de-construction; desolution)’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후기 모더니즘에 큰 영향을 주었던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가 한편으로는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고, 다른 한편 ‘무의식(無意識)’ 탐구에 열정적이었던 사실과 관련을 맺으며, ‘마치 파놉티콘(Panopticon) 안에 철저히 감시당하는 죄수처럼 살아왔음에도 진정 자각하지 못했던’ 인간[주체]은 이제 전체주의 혹은 부르죠아 계급에 의한 이데올로기적인 논리(제도, 효율성, 능률, 합리성, 보편적인 의미)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푸꼬(Michel Foucault)의 사회적인 관심에 설득력을 제공하였다. 나아가 그것은 보다 본격적으로 ‘형이상학에 대한 전면적인 불신과 [전통적인] 진리와 의미의 가치를 전복시키는’ 데에 앞장선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입장, 한 마디로 “현전(presence)의 부재(不在)”로 인해 진리는 지연(遲延)된다는 그의 경종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타성적인 태도를 반성하도록 고무시켰다고 본다.
그러나 그들이 애초에 불신의 실마리로 삼았던 근대의 ‘이원론적인 사상’, 곧 ‘정신과 사물의 분립(separatio)’에 대한 비판이 어느덧 ‘전통적인 그 모든 사상들’에 대한 비난과 거부(拒否)로 이어지는 점에 대해서 우리는 [새삼] 주목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간단하게나마 언급된 이들에게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에 의해 비판되어진 대상은 단순히 ‘근대사상’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모든 사상에 대한 ‘전면적(全面的)인 불신(不信)’이다. 그렇게 판단내리는 그들의 양보할 수 없는 근거는 현사실적인 경험(de facto)의 ‘다양성’, 곧 ‘차이’이며, 그로써 그들은 한결같이 ‘복수주의(多元主義: Pluralismus)’를 표방하고 있다 : “후기 모더니즘의 근본입장은 우리가 철저히 서로 다른 경험형태와 학문적인 관점 및 전개하고자 하는 의도의 점차 증가하는 다양성에 직면하고 있다는 데서 특징 지워진다. 우리는 이러한 ‘다양성’ 내지 ‘복수주의’의 원칙을 지나쳐서는 안 되며, 나아가 그 권리를 포기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그렇듯 ‘복수주의’가 이제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근본원칙이라고 말하고, 그로써 세계를 더 이상 ‘그 어떤 하나(동일성)에만 집착하는 생각(Vernunft)의 틀’에 몰아세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에 따르면 그것은 이성(理性)을 수단으로 획일화시키는 “강요 혹은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안하려는 바는 후기 모더니즘이 비판하는 ‘하나(동일성)’의 원리가 근대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애초에 고전적(古典的)인 관점에서 단순히 ‘다수(다양성, 차이 혹은 ‘다름’ ; 여기서 ‘다름’은 말마디 자체가 내포하듯 ‘하나 이상의 무엇이라는 점에서 복수’를 의미한다)’에 대립적인 의미로서 파악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다수성의 논리를 근거지우는 필연적인 전제(前提)로 - 다시 말해, ‘하나’는 ‘다수’의 출발점이며, 다수를 꾸준히 보존할 뿐만 아니라, 다수를 완성시키듯 다수를 배태(胚胎)하는 의미로 - 이해되었다면, 다시금 진지하게 그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1.2. ‘다양성’에 따른 ‘진리인식’은 가능한가?
소논문의 성격상 최소한의 지면을 통해 후기 모더니즘의 이해원칙, 곧 ‘다양성’ 혹은 ‘다름’을 원칙으로 내세울 경우, 당장 근본적으로 뒤따르는 문제점으로서 ‘그들의 원칙정립 자체의 논리적인 결함’과 ‘진리인식의 불가능성’을 제기함으로써 후기 모더니즘 자체의 여전히 모순적이고 불가해소적인 국면을 극복해야 할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가장 먼저 이 ‘다양성(다수)의 원칙정립’과 관련하여 우리는 플라톤의 도움으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중요한 사실을 회상할 수 있다 : 그는 자신의 대화록 ?파르메니데스 편?의 끝부분에서 ‘(하나와는) 다른 것’, 혹은 ‘다수’와 관련하여 “만일 하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와는 다른 것으로서 무엇인가가 존재해야 함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라는 가정(假定)을 실험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 같은 가정은 “이미 저마다 서로로부터 구별되는 것들의 집합체로서 ‘다수’이듯이” 그렇게 포착되고 또 일컬어질 수 있는 그 ‘다수’의 존재방식은 반드시 그 어떤 ‘하나됨’의 근본적인 존재원칙에로 소급되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플라톤이 의도한 대로 ‘다수’가 ‘하나’에 대응하여 그보다 “앞서” 존재한다고 여긴다면, 그래서 그것이 다른 모든 것의 ‘존재원칙’이라고 주장한다면, 분명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요, 나아가 ‘자기모순’에 빠지는 논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수’가 모든 것의 ‘존재원칙’이라고 굳이 말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게 될 것이다 : 첫째, 그 ‘다수’의 존재근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다수’로서의 ‘다른 것’은 스스로 존재하기에 “앞서” 오히려 그와 다른 것으로서의 <무엇>을 전제해야 한다. 그래야만 ‘다른 것’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이미 제기한 ‘가정’, 곧 ‘<하나>를 무시한 다수’의 가정은 독자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둘째, ‘두 개 이상의 집합체로 이해되는 다수’는 “서로 다름”이라는 관점에서 ‘무한한 다수’에로 (변증법적으로) 거듭되기에 결국 ‘종잡을 수 없는 다수’에로 우리의 생각이 발전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시작’도 ‘끝’도 나아가 ‘완전함’조차도 생각할 수 없다. 바로 이 점에서 ‘다수’ 자체가 ‘시작점’으로서의 그 어떤 ‘존재근거’라는 주장은 여전히 결론지워지지 않을 뿐더러, 또 그 어디에서도 성립될 수 없는 ‘신기루’가 되어버린다. 그로써 플라톤은 “존재하는 무리들에 있어서 도대체 ‘하나’가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리들’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다수’란 생각할 수조차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플라톤은 그리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나됨’의 존재원칙에 입각하여 파악해야 한다고 심중을 밝힌다. 이는 곧 우리가 다양하게 경험하는 ‘개별적인 사실들’에 대해 도대체 ‘인식할 수 있고 또 표현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의 ‘하나됨’을 생각해야만 함은 물론 정녕 ‘다수’로 혹은 ‘다른 것’으로 존재(存在)하기 위해 “앞서” 전제되어야만 하는 ‘존재론적인 근거’로서의 ‘하나됨’을 일컫는다. 이는 분명 후기 모더니즘의 ‘복수주의적인 사고방식’ 내지 ‘다원주의적인 논리’를 재삼 검토해 보도록 고무시킨다. “하나”에 대하여 우리가 무시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 어떤 인위적인 ‘지적인 조작’에 대해 플라톤이 이미 경고하고 있듯이 말이다 : “그 누구에 의해서든 (추상적인) 생각을 따라 자아낸 모든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완전히 분쇄되고 내쳐져야 할 것이니, 이는 마치 ‘하나’ 없이도 언제든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진리인식’과 관련하여 도대체 ‘다수원리’가 어떤 곤란한 문제점을 함축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어쩌면 ‘현사실적인 - 시공간적인 변화와 함께 전개되는 - 다양함’이 우리에게 하나의 ‘진리’처럼 여겨질 수 있다. 옛날 인도의 어떤 스승이 갠지스 강의 물을 가져오라고 제자들에게 명했을 때, 조심스럽게 손을 받쳐 떠온 강물을 내던지며, “그것은 내가 말한 그 강물이 아니야!”라고 호통을 치는 익살스러운 장면과 함께 우리는 분명 ‘갠지스 강물은 인위적으로 분리되고 고립된 무엇으로서가 아니라, 정녕 물고기와 소와 하늘의 새들이 그로부터 삶을 영위하듯, 거기에 온갖 생명이 함께 한다’는 그 선각자의 가르침에 감사한다. 생명활동이 활발히 진행하는 거기에는 분명 운동 및 변화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문제는 저 <하나됨> 혹은 <다르지 않음> 개념이 그러면 다채롭게 변화하는 생명 및 실재세계를 담아낼 수 있는지 하는 것이다.
한편 ‘개념’에 대한 후기 모더니즘의 입장은 그들의 ‘언어분석’을 통해서 보여주듯이 “유명론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있다. 물론 데리다의 경우는 ‘개념’에 대한 입장이 이중적인 의미로 소개되고 있다. 곧 ‘낱말이란 부정확하기 때문에 실체를 덮어 가리우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필요하기 때문에 판독할 수 있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태도를 니꼴라우스에게서도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데리다의 ‘언어’에 대한 태도는 부정적인 경향이 더욱 강하게 부각된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실체의 현전성(現前性)이 부재(不在)하는 언어’란 도대체 ‘일의적(一義的)이지도 않으며, 나아가 역설적(逆說的)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적으로 그는 “언어는 그 자체가 차이성의 산물인 기표에 의해서 무한히 연기(延期)된다”고 함으로써 진리인식과 관련하여 납득하기 어려운 여운을 남기고 있다. 예컨대 되돌려 묻는다면, 정작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혹은 무엇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는지’ 우리는 그 의미파악을 무한히 연기시켜도 된다는 말일까?
‘언어(개념)’가 과연 ‘사물(실체)’와 “다르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언어를 구사하는 혹은 언어를 통해 재현하는] ‘정신’과 ‘사물’이 서로 “다르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여기에 그저 “다름”만이 존재할까? 만일 “다름”만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모든 언어적인 시도, 아주 사소한 ‘외침’으로부터 학문적인 탐구활동 및 진지한 논의(論議)들은 사실상 그저 헛된 일로 마감되어야 한다는 뜻일까? 왜냐하면 데리다에 따르자면, 그때마다의 ‘말’ 혹은 ‘글’이 그것을 표현하는 자의 ‘의도’를 [동일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단서’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 - 작가와 글, 작가와 독자 나아가 사물과 정신 - 사이에 “다름”만이 있을 뿐이라고 보아야 하기에 말이다.
후기 모더니즘에게 ‘진리가 없다’고 평한다면, 지나치게 왜곡된 독설이라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과연 그들에게 ‘진리가 없다면’, 주장하거나 제의할 것 또한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그들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바’가 있다면, 분명 그들의 ‘말’과 ‘글’에 대해서 우리가 그들의 ‘의도’를 어느 만큼 파악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 우리의 파악이 때로 ‘빗나간 오해’일 수도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그렇듯 ‘빗나간 오해’와 ‘바른 이해’를 이미 구별하고 내심 걱정하고, 이미 의도한 바가 ‘제대로 이해되기를’ 고려하여 ‘말하거나 글을 쓴다면’, 언어(개념)는 정녕 ‘전달하고자 하는 실체(내용)’와 그저 “다르지만은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다르지 않음”이란 개념이 우리의 현실적인 행위에 자연스럽고도 타당한 근거를 마련할 수 있고, 나아가 ‘진리인식’과 관련하여 고려될만한 까닭을 발견한다.
2. <다르지 않음>이란 개념에 대하여
2.1. <다르지 않음>이란 개념의 기원
앞서 본 플라톤의 ‘하나(ἕν)’에 대한 관점을 마침내 오랜 시간(약 6세기)이 경과한 다음에야, 곧 신플라톤주의자(특히 Plotinos: 204/5~269/70)에 의해서 ‘하나’에 대한 플라톤의 근본의도가 해명됨으로써 다시금 되새길 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다시금 곱을 한 12세기가 지난 1462년에 비로소 저 ‘하나됨’과 근본적으로 유사한 의미에서의 “다르지 않음(Non-aliud)”이란 개념을 우리는 니꼴라우스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22살에 교회법과 관련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1430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니꼴라우스에게 일생동안 해결해야 할 과제를 마련해준 것은 아마도 소속교구(Trier)의 울릭히(Ulrich von Manderscheid) 대주교가 바젤(Basel) 지역회의(Synodus: 1431년에 개회)를 개최하여 ‘다양한 신앙고백(종교)의 일치문제’를 그에게 맡겼던 사건으로 여겨진다. 니꼴라우스는 그 지역공의회가 끝난 직후 1433년 ?교회일치(De concordantia catholica)?라는 작품을 통해 교회가 지켜온 전통적인 가르침을 보다 폭넓게 수용할 수 있도록 다졌다. 그렇게 그는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따라 무엇보다 교황의 입장을 두둔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마침내 1437-38년에는 교황 오이겐(Eugen IV세)의 명에 따라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파견되어 그리스 동방정교회의 대표자들과 의견을 일치시킴으로써 공동으로 공의회를 개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실상 1054년 동서방교회의 분열 이후 콘스탄티노플 지역은 이미 터어키인들의 지배를 통하여 서방(카톨릭)교회와는 격리된 채 이슬람교 및 인도교 등 여러 페르시아 종교와 신학이 확산되어 있었다. 이 세계공의회를 통하여 니꼴라우스에게 과제가 주어졌으니, 그것은 여러 지역교회 안에서 다양하게 점차 제기되는 문제점들, 예컨대 안티오키아 지역교회를 중심으로 제기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인성(神人性)의 일치’ 문제와 에집트 지역교회에서 특히 거론된 ‘하느님의 아들 및 풍요의 여신(女神) 이시스(Isis)의 출산(낳음)’ 문제 그리고 서방교회 안에서 꾸준히 제기되어 오던 ‘진리의 복사물로서 만물의 가치’에 관한 문제 등이 어떻게 모순 없이 이해될 수 있을지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점들은 한결같이 ‘교회 내에 전수된 신앙유산’과 ‘교회 밖에서 습득된 경험적인 가치’ 사이의 중재(일치)를 겨냥하고 있었다. 보다 압축하여 말하자면, 서로 대립하는 것들(contralia) 사이에서 합일점(coincidentia)을 모색하는 일이 그 관건이었다. 물론 이러한 문제가 오랜 정신사 안에 문득문득 제기되어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만큼, 쉽사리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니꼴라우스는 마침내 1440년 역설적인 작품 ?박학한 무지(De docta ignorantia)?를 통하여 그의 집요한 결실을 소개하기에 이르렀고, 그와 맥락을 같이 하는 다른 많은 논증을 제시하였다. 그는 ?박학한 무지? 안에서 “대립(모순)들의 합일(coincidentia oppositorum 혹은 contradictoriorum)” 이해에 관한 ‘특별한’ 체험을 회상하고 있다 : “그리스로부터 되돌아오는 깊은 바다 한 가운데에서 [...] 나는 ‘저 위로부터 온 은총을 통하여’ [...] 이런 통찰을 얻게 되었으니, 이는 곧 ‘뭇 인간에 의해 알 수 있는 [...] 진리를 훨씬 능가하여 차라리 박학한 무지 안에서나 납득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납득할 수 없는 바를 알아듣는 것’과 같았다. [...] 우리의 정신을 통한 모든 수고가 이제 이 심오한 신비에 함께 함으로써 그 모든 대립하는 것들이 합일하게 되는 그 단순함으로 [나의 정신은 그 순간] 날아오르듯 하였다”. 이 신비체험은 그의 신앙고백에 따라 ‘신(神)의 은총’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니꼴라우스 자신의 열정적인 사색에 따른 응답(결실)이라는 점에서 “대립하는 것들의 합일” 이해의 원천적인 연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때때로 ‘신비적’으로 풀이되어온 내용들이 그럼에도 우리의 생각이 거기에 아예 근접하지 못하는 어떤 것으로서만 이해되지는 않음도 그 연구의 단서일 수 있다 : ‘만일 전혀 알려질 수 없는 무엇’이라면, 우리는 그에 대해 최소한의 단서 - 예컨대 ‘형언할 수 없는 무엇’이라는 표현 -조차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최소한의 단서를 통한 분별(파악)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쩌면 이 물음이 정작 니꼴라우스가 해결하고자 했던 중심 과제였을지도 모른다. 이는 ‘신비적 경험’이란 이름 아래 서로간의 대화(의사소통)를 지연하거나 심지어 타부시 하여 온 모든 종교가 어쩌면 의식적으로 은폐하였거나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간과했으리라고 보는 점에서 우리 역시 한번쯤 되물어야 할 질문임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이 “납득(표현)할 수 없는 바를 납득(표현)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는 단서로서 니꼴라우스는 마침내 “다르지 않음(non-aliud)”이란 개념을 소개한다. 그것은 그가 심사숙고하여 찾은(quaerens) 개념이긴 하지만, 그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 그 무한한 의미는 인간의 노력을 훨씬 능가하기에 그것은 선사된 ‘은총(gratia)’이었다. 이 개념은 분명 우리가 실제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처럼 인간-내재적인 개념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통해 초월적인 신(神)을 말할 수 있을 만큼 탁월한 개념이다. 니꼴라우스에게 있어서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유산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대 및 지역의 다양한 흐름 앞에서도 여전히 유효한(보편적인) 의미를 띨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개념덕분이다. ‘세계내적인 존재로서의 인간’과 ‘세계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신’ 사이의 ‘참된’ 만남이 또한 그로부터 설득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덧없이 다양한 세계내의 경험들’과 ‘항상 변함없이 동일한 진리’ 사이의 관계가 그 개념으로써 해명될 수 있는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
2.2. “다르지 않음”이란 개념의 특징적인 의미
총 24개의 장(章)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니꼴라우스는 가장 먼저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연다 :
“우리는 과연 온 세상 두루 심오한 신비를 찾는데 몰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느 누군가가 그런 신비를 두고 우리가 매번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정독하는 작품들을 저술한 사상가들보다 더욱 간결하고 단순하게 표현해낼 수 있다고는 [쉽사리]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쩌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까닭에] 우리가 찾기를 희망하는 그것에 이미 가까이 인도하는 그들의 가르침(길)을 그만 간과한다고 생각합니다” (제1장).
이는 ‘진리탐구’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작품(Text) 해석은 과연 -데리다가 지적하듯- ‘독자의 주관’이 분명하게 작용한다. 그럼에도 그러한 입장을 극복하는 태도가 오히려 요구된다는 것이 니꼴라우스의 권고이다.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진리’는 사실상 ‘차연으로 [인해] 해체되어야 할 주관성’ 이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서 보았듯이 ‘다름’의 원천(源泉)에 대한 물음이요, 이는 과연 ‘다름’ 속에서 ‘다르지 않음’을 바라보는 일이다. ‘시공간적인 차이(차연)’가 원천적으로 근거하는 ‘다르지 않음’ 때문에, 진리는 ‘다름’ 속에서도 여전히 그리고 꾸준히 현전(現前)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니꼴라우스의 입장이 어떻게 저 “존재 및 (진리)인식의 근원(principium essendi et cognoscendi)”으로 이해한 <다르지 않음>에 의해 설명되는지를 간단히 살펴보자.
1) ‘인식의 기본구조’ 안에서 발견되는 <다르지 않음>
니꼴라우스는 먼저 우리의 ‘인식의 기본구조’로부터 자연스럽게 이 개념에 접근하게끔 가장 간단한 정의(定義)형식에 대한 이해를 촉구한다 :
“만일 누군가가 자네[첫 대담자 페르디난도]에게 ‘[차라리] 다른 것(aliud)이란 무엇인가?’하고 묻는다면, 자네는 ‘그것은 다른 것과는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답하는 일 외에 별 도리가 없지 않을까? 그와 마찬가지로 자네가 ‘하늘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에 대해 ‘그것은 하늘과는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 [그러므로] 저 <다르지 않음>이란 의미에 주의를 집중한다면, 이제 그로부터 인간적인 앎이 실현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 외에 중요한 것은 남아있지 않다고 보네” (제1장).
그는 우리의 일상적인 개념활용과 관련하여 <다르지 않음>의 의미를 파악하도록 이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과연 “~외에(혹은 ~와는) 다르지 않음”(non aliud quam~)이란 ‘정의형식’이 어떤 점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돌려 말한다면, 혹시 ‘하늘은 하늘이다’라고 정의한다면, 그것은 ‘하늘은 하늘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정의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이에 대해 니꼴라우스는, 우리가 만일 ‘하늘은 하늘이다’ 혹은 ‘땅은 땅이다’라고 정의한다면, 그것은 어휘반복(Tautologie)을 통하여 별다른 의미없는 말장난으로 여겨질 위험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정의(定義)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그로써 아직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그가 ‘하늘은 하늘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하든가 ‘땅은 땅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정의하였을 때, 그로써 의도하는 바는 곧 ‘~외에(quam)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규칙을 통하여 통찰대상에 대한 의식을 새롭게 일깨우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그 “~외에” 앞에 놓여진 말마디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하고, 예컨대 앞선 예문의 경우처럼 [다시금 ‘하늘’에 관한 정의와 관련하여] 다름 아닌 ‘하늘 자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또는 [‘땅’에 관한 정의와 관련하여] ‘땅 자체가 도대체 무엇인지?’하는 그 본질적(本質的)인 의미를 숙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먼저 다른 모든 것들과 비교하여 ‘다르다’고 부정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의미 발견을 위한 관찰 및 경험의 (시공간적인) 한계를 우리가 인정한다면, 그런 부정적인 방법을 넘어서 보다 정확하고 [그 본질적인 혹은 본래적인 의미와 결코 다르지 않게] 완전하게 구사할 수 있는 표현가능성으로서 <다르지 않음>이 훨씬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 니꼴라우스에게 있어서 그 개념 선택의 근본적인 이유이다. 곧 저 보조어(quam)를 통하여 비로소
“[‘땅은 땅 외에(quam)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정의에서] 땅은 그 원천이 혹은 그 [땅으로 존재하게끔 하는] 원인이 그 안에 존재(內在)하고 있는 한해서 땅이기 때문에 땅으로서 존재한다(enim terra est terra quia ipsius principium seu causa in ipsa ipsa est)” (제21장)
는 사실을 통찰하게 되듯이, 정의하려는 대상의 존재론적(存在論的)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끔 유도하는 데에서 ‘보조어’의 활용의도를 목격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정의규칙 안에서 <다르지 않음>은 과연 묻고자 하는 바의 내재적(內在的)인 존재원인(存在原因)을 앞서 고려하도록 이끌듯, 그 원천적인 근거를 묻는 계기로서 이 <다르지 않음>이란 개념이 그 밖의 다른 어떤 개념들에 앞서 선행(先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니꼴라우스에게는 이 <다르지 않음> 개념이 그 밖의 다른 개념을 능가하여 선행되어야 할 경우, 그것이 과연 그 밖의 다른 어떤 개념도 요구하지 않을 만큼 ‘완전한’ 개념일 수 있는지 논증해야만 한다. 그것은 <다르지 않음>이 ‘최상의 순수원리’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하는 물음이기도 하다.
2) 순수 혹은 최상원리(simplex vel primum principium)로서의 <다르지 않음>
이와 관련된 물음을 실상 (세 번째) 대담자인 요한 아빠스(수도원장)가 제23장 안에서 보다 체계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예컨대,
“하느님께서 정녕 ‘선(善)하신 분’이요, 그와 동일한 의미에서 또한 ‘하나’이시라면, ‘그분이 다른 피조물에 앞서 당신 자신 안에서 선하게 바라보신 바를 바야흐로 그 선 때문에 이 세상에서 완성되도록 배려하셨다’는 점은 이해되지만, 다른 한편 ‘하느님께서 다른 피조물에 앞서 선을 바라보셨다고 하였기에, 그분 자신은 선 외에 다른 분이 아님’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선하지 않음(non-bonum)’을 조금도 갖지 않으신 분이라고 이해할 경우 결과적으로 ‘선’이 ‘선하지 않음’에 앞서 전제되어야 한다고 보아야 한다면, 다시금 ‘다름’이 ‘다르지 않음’에 앞서 전제된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제23장)
이는 우리 역시 한번쯤 제기할 수 있듯이, 한 마디로 “다름”이 혹시 <다르지 않음>에 앞선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가리킨다. 그것은 요한 아빠스가 계속하여 자신의 의문을 뒷받침하는 아래의 논증을 통해서도 그 의문은 정당성을 갖는다 :
“플라톤에 따르면, 오히려 ‘존재하지 않음(non-ens)’이 ‘존재(ens)’에 선행한다고 말하고 있듯, 결국 그것은 부정이 긍정에 선행한다는 것이 아닙니까?” (제23장)
이에 니꼴라우스는 다시금 반문(反問)을 하면서 그 의문점을 해결하고자 한다 :
“만일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음’이 ‘존재’에 선행한다고 말한다면, 과연 ‘존재하지 않음’이 ‘존재’보다 훨씬 좋다(melius)는 뜻이요, 결국 부정이 긍정보다 더 좋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선행하는 것이란 모두 더 좋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선하지 않음’(혹은 ‘좋지 못함’)이 ‘선’(혹은 ‘좋음’)보다 더 좋다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이런 근거에서 나는 오히려 ‘선’이 ‘선하지 않음’에 선행한다고 이해하며, 나아가 하느님만이 홀로 ‘선’이시니, 이는 ‘선’보다 더 좋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선’은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 ‘선하지 않음’과 구별된 어떤 것으로 이해되기에, 철저하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소개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와 같이 그밖의 다른 칭호들 역시 하느님의 이름으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혹시 ‘선하신 분’ 혹은 ‘선하지 않으신 분’ 혹은 그밖의 다른 명명할 수 있는 칭호를 통해서 상대적으로 불리워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가 하느님께 <다르지 않으신 분>이란 호칭을 어쩌면 저 ‘선하신 분’이란 호칭보다 더 정확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봅니다” (제23장).
이 작품 속에 담겨있는 니꼴라우스의 취지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렇듯 초지일관 분명하게 드러난다. 부정(否定)이 긍정(肯定)에 앞설 수 없는 것처럼, <다름>이 <다르지 않음>에 앞설 수 없는 것은 과연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 편?에서도 논증된 결론이다. 또한 <다르지 않음(non-aliud)>은 그 개념 안에 활용된 부정적인 표현, 곧 ‘않음(non)’이 요한 아빠스의 생각처럼 부정적인 의미를 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름>이 갖는 부정적인 의미를 또 다시 부정하는 차원에서 보다 강조된 ‘긍정’의 의미를 제시하기 때문에 더욱 적극적인 개념으로 선택되었다.
만일 <다르지 않음>이 다른 모든 것들에 앞서 선행하지 않는다면, 이미 ‘다르다’는 말도 성립하지 않으며, 아예 ‘다름’을 생각할 수조차 없다. 우리가 다양하게 관찰하고 또 경험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말할 경우, 그것은 “‘어떤 다른 존재와의 다름’과 관련하여 혹은 ‘어떤 다름 자체’와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설정되었을 뿐이요”(제2장), 따라서 “정작 저 원천적인 <다르지 않음>으로부터 비롯된”(상동) 부차적인 진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모든 표현형태 혹은 존재들은 여전히 저 ‘첫 번째 원천’(<다르지 않음>)과 차별되어지는 점에서 파악된다”(상동)는 것이다. 이에 대해 첫 대담자인 페르디난도는 자신이 알아들은 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이제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이해할 것 같습니다. 다시 되새겨본다면, ‘바라봄의 대상(對象)’인 ‘다른 어떤 것’은 ‘바라보는 주체(源泉)’일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왠고하니 ‘다른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과는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면, 여기서 <다르지 않음>이란 개념없이 ‘다른 어떤 것’을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결국 그것은 앞서 <다르지 않음>을 반드시 전제해야만 한다는 이유에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것’을 표현할 때마다 거기에 이미 <다르지 않음>이란 의미가 자리하고 있으며, 결국 그 의미를 ‘원천’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그것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제2장).
바로 그런 점에서 모든 사고(思考)의 출발점(源泉)에로 이끄는 유일한 <다르지 않음>이 우리의 사고 및 표현형식 안에서 최상의 원리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제15장 및 제22-24장 참조).
3) <다르지 않음>의 정의(definitio) : ‘삼위일체적인 [존재]구조’의 완전성
이 정의는 앞서 보았던 ‘완전한 개념’으로서의 <다르지 않음>에 대한 논증에 속하며, 나아가 <다르지 않음>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다양성’에 대한 해명이다. 곧, 그 밖의 다른 개념을 요구하지 않고 그 자체로 정의내려지는 <다르지 않음> 개념의 ‘자기내적인 완전성(충만성)’을 재확인시키는 작업이며, 그와 동시에 ‘모든 존재 및 인식의 원천’으로서의 충만한 <다르지 않음>이 그로부터 유출된(혹은 산출된) 모든 시공간적인 존재(자)들과 ‘어떤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존재론적으로) 밝히고 있다. 바로 그 점에서 <다르지 않음>은 ‘다름’ 및 ‘다수’의 타당한 원천으로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르지 않음은 다르지 않음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non-aliud est non aliud quam non-aliud)” (제5장).
세 번 동일하게 반복된 - 보다 정확하게는 세 겹으로(triniter) 표현된 - 이 <다르지 않음>의 자기정의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에 대해 니꼴라우스는 보충하여 말하길,
“이 때 만일 동일한 <다르지 않음>이 세 번 반복되었다고 본다면, 우선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듯, ‘첫 번째 <다르지 않음>’을 정의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지. 그리고 그 정의 속에 <다르지 않음>이 실제로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unitrinum)’임을 볼 수 있겠지. 또한 거기서 <다르지 않음>이 그 자신을 정의내리고 있다는 사실 외에 다른 사실은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네. 게다가 자기자신을 스스로 정의내릴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대관절 ‘첫째[최상원리]’라고 생각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자기자신을 정의 내리고자 하는 한, 그것은 자신을 세 번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되네. 자네도 기억하겠지만, 셋(trinitas)이란 바로 ‘완전성(perfectio)’에서 기인하지 않는가! 한편 저 ‘셋’을 다른 어떤 것들에 앞서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저 ‘셋’이란 뒤늦게 숫자를 합산하여 얻거나 마치 그것이 [다른 뭇 수들과 비교되는] 어떤 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네. 왜냐하면 저 ‘셋’이란 숫자는 [앞서 하나의 정의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됨(unitas)’과 다르지 않으며, 또한 그 ‘하나됨’은 저 ‘셋’과 다르지 않기 때문일세. 이는 [하나의 정의를 이루듯] ‘하나’와 다르지 않은 저 ‘셋’이 <다르지 않음>을 따라서 표현되는 순수원칙(simplex principium)과 다르지 않은 때문이라고 보네” (제5장).
우리는 그럼에도 아직 “셋(三)”이란 숫자의 “완전성(完全性)”에 대하여 아는 바가 적다. 이와 관련하여 오랫동안 니꼴라우스 연구에 몰두하였던 하웁스트(R. Haubst)의 중요한 이해지평, 곧 “Tres causae [efficiens, formalis, finalis] coincidunt in unam (세 원인들이 하나로 합일한다)”는 관점이 니꼴라우스 이해의 기틀이라는 충고가 도움이 될 것이다. 과연 니꼴라우스는 이 ‘삼위일체적인 존재원천’에 대해 꾸준히 말하고 있다 :
“만일 자네(페르디난도)가 그 어떤 것을, 예컨대 ‘돌멩이 하나’를 바라본다면, 자네는 설령 ‘빛’의 도움을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그 ‘빛’은 이미 그 ‘돌멩이’를 바라보게끔 해주네. 또한 자네가 무엇인가를 듣고 있다면, 설령 ‘소리’의 도움을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그 ‘소리’는 이미 그 무엇인가를 들어 알게끔 해주네. 그렇듯 ‘존재와 인식의 원천’은 우리가 보고 듣는 일이 헛되지 않게끔 [우리가 의식하지 않더라도] 늘상 앞서 전제되고 있다는 것일세. 다만 자네의 관심(intentio)이 그때마다 보고 또 듣고자 하는 ‘다른 어떤 것(대상)’에 쏠려있기 때문에, 자네가 정작 ‘찾고 있는 것의 시작과 중간과 끝(principium, medium et finis quaesiti)에 [버젓이] 존재하는 저 원천’을 꾸준히 통찰할 수 없는 것일세. 그와 마찬가지로 <다르지 않음>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겠지. 왜냐하면 항상 그렇게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그렇게 존재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에, <다르지 않음> 외에 다른 원천을 가지지 않기 때문일세. [다시 말해] <다르지 않음>은 <다르지 않음>을 원천으로 가지고 있다는 말일세. 그것이 ‘존재하는 한’, [그 자체와] 다르지 않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올바르게 인식되거나 또 인식될 수 없다는 말이겠지. 왠고하니 그 스스로 원인이요, 그 스스로 가장 합리적 근거이자, 가장 앞서서 전제된 ‘정의’이기 때문이니, 이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정신이 찾고자 하는 바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기에 그렇다네. 그렇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안에서] 찾아지는 그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 찾아지기 때문에, 그 <다르지 않음> 자체는 [우리의] ‘존재영역’ 안에서 포착될 수 없다고 보네. 어쩌면 그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찾고자 하는 것들보다 항상 앞서 존재하면서 그것 없이는 찾고자 하는 것들이 아예 발견될 수 없게 만드는 저 ‘원천’을 우리가 본래적으로는 [전부] 파악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네” (제3장).
도대체 “원천”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처음과 중간과 끝으로 통찰된다”는 이 관점은 실로 오랜 역사를 안고 있다. 플라톤은 그의 ?법률(Nomoi) 715e? 안에서 ‘옛 주술’을 하나 소개하는데, “신(神)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처음(ἄρχη)이자 끝(τέλος) 그리고 그 중간(μέσον)을 모두 포괄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플라톤의 긍정적인 입장은 다시금 그의 ?파르메니데스 145a? 안에서 ‘이 세 가지 요소 없이는 전체(ὅλον)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강조하는 중에도 관찰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퓌타고라스의 가르침을 소개하면서, “그들은 말하길, 우주 만물은 저 셋을 통해서 정해지는데, 곧 마지막과 중간 그리고 처음을 모든 만물은 (숫자로 표현될 수 있을 만큼) 함축하고 있으니, 이를 일컬어 셋(삼원성)이라 가르쳤다”(De coelo I 1 [268a.10-12])고 전하면서 자신 또한 이를 토대로 가장 합리적인 인식방법(학문)을 소개한다. 이에 또한 그의 ?자연학(Physik) I 6 [189b.16-18] ; II 7 [198a.24f.] ; VIII 1 [251b.20-22]?을 참고할 수 있다. 퓌타고라스 학파가 저 ‘세겹의 수’(Trias)를 첫째가는 자리에 두었던 사실을 얌블리코스(Jamblichos) 역시 그의 책 ?퓌타고라스 학파의 삶 (De vita Pythagoreica [hg. v. M. v. Albrecht, Zürich-Stuttgart 1963, S. 154])?에서 전해주고 있다.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 또한 이러한 전통을 답습하고 있으니, “세겹의 수(Τριάς)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칙으로 존재한다”(Enneade VI 6, 16.49f.)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서도 얌블리코스는 전해준다. 플로티노스는 ‘하나’를 ‘신(神)’과 동일하게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 “신은 모든 실현력의 처음이자 중간이며 그 끝을 두루 주재한다”(Enneade II 9, 17.12이하 ; 이와 함께 Enneade I 8, 14.34f.). 이제 이러한 통찰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여진다.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천’이란 바로 “첫째로 자연의 [존재]원인으로서 모든 것들이 그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그 다음[둘째로] 그 모든 형상(種)들이 그를 통하여 다듬어지고 또 어떻게든 형성되어 감을, 그리고 셋째로 흔히 말하듯 그 안에 모든 것들이 (언제나) 머물러 있음을 가리킨다”고 이해했으며, 나아가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무엇엔가] 근거하는 것이요, [무엇인가를 통해] 구별되는 것이며 [무엇인가와] 일치하는 것이다”라고 봄으로써 세 가지 요소를 따라 존재의 전체성(全體性) 안에서 참된 의미를 물어나갔다.
그로써 이제 니꼴라우스에게서도 ‘존재 및 인식원천의 삼원인적(三原因的)인 구조’(작용인-형상인-목적인)를 목격하는 것이 의외의 상황이 아님에도, 세 겹(triniter)의 <다르지 않음>을 구사한 정의형식 안에서 논증하는 삼위일체적인 요소는 그만의 독창적인 착안으로 돋보인다. 만물이 삼위일체적인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역사(役事)된다는 신앙이 그의 <다르지 않음>의 개념정의와 맞물려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니꼴라우스는 그러나 교회의 신앙에 근거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원사적 증언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보편적인] 인식론적인 이해과정을 따라 ‘세 겹의 구조 속에 정의 내려지는 까닭’을 이해시키고자 시도한다 :
“시각(視覺)은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Visus se ipse non videt). 다만 시각은 그것이 바라보는 다른 어떤 것(對象) 안에서 자신을 되새겨보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시각 자체가 ‘그와 다른 것’으로부터 이해된다는 것은 여전히 불완전하듯이] 시각들의 시각 (혹은 시각 중의 시각) 역시 다른 것(들) 안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일이 완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것(들)에 앞서(ante) - 구별되어 - 존재하기에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다른 것(들)에 앞서 확인되기 위해서는, 차라리 ‘바라봄(visio)’ 자체 안에 이미 ‘보는 자(videns)’, ‘보여질 수 있는 대상(res visibilis)’ 그리고 ‘그 둘로부터 출현하는 바라보는 행위(videre ab ipsis procedens)’가 함께 존재해야 합니다. 이로부터 하느님, 곧 theoreo(내가 보다: θεωρέω)라는 그리스 동사에서 비롯한 theos(θεός: 바라봄)가 이름붙여졌다고 이해합니다. 이 때 ‘바라봄’은 모든 다른 것들에 앞서 진행되는 점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를] 세 겹의(trinus) 의미로 해독하는 과정 말고는 달리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리하여 무한하고 끝없는 그분을 [그 밖의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것 안에서 바라보는 행위는 결국 다른 것과 구별하여 <다르지 않음>을 바라보는 것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현자들은 말하길,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모든 것들을 한결같이(unico)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혜안(contuitus)으로 바라보신다고 하였으니, 하느님께서는 모든 바라봄의 바라봄을 몸소 실현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23장).
이렇게 ‘세 겹으로 존재하시는 하느님’은 창조행위와 관련하여 당신의 원의를 그 실현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적인 방식으로 이끄실 것이니, 이는 피조물인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도 그대로 반영(反影)되어 드러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원의는 만물 안에서 세 겹으로(triniter) 밝히 드러나니, 이는 우리가 우리의 고유한 영혼(anima) 안에서 경험하는 바처럼, ‘존재방식을 따라(essentialiter)’, ‘이성활동을 따라(intelligibiliter)’ 그리고 ‘의욕실현을 따라(desiderabiliter)’ 밝혀질 것일세” (제9장)
라고 니꼴라우스는 앞서 ‘존재(存在)와 이성(理性)과 의지(意志)’를 따라 구별하면서도 동시에 [구별되지 않는] 하나의 삶을 구현하는 주체적 ‘인간(imago Dei)’ 실체를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가르치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그대로 수용하여 대변한다.
3. <다르지 않음> 개념에 대한 실천적인 이해를 위하여
3.1. ‘내재적이며 동시에 초월적인’ 개념으로서의 <다르지 않음>
우리는 이제 이와 같은 몇 가지 설명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니꼴라우스가 <다르지 않음>이란 원천적인 개념의 의미(意味)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며, 도대체 어떤 안목에서 고려되어야 바람직할지를 새겨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구별되지 않는 원천’으로서 또는 ‘내재적이며 동시에 초월적인 원천’으로서 <다르지 않음>의 이색적(異色的)인 - 마땅히 ‘다른 것(色)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곧 결국 <다르지 않음>의 ‘이색성’은 세상에서 발견되는 이채(異彩)로운 색상과 구별된 이색성이요, 그들을 모두 포괄하는 점에서 이색성을 띤다 - 의미이다.
이는 소위 모순(contradictio)처럼 보인다, 그러나 ‘존재적인(ontisch) 관점’에서 ‘모순’일 뿐, ‘존재론적인(ontologisch) 관점’에서는 모순이 아니다. 이는 마치 서로 다른 두 차원, 예컨대 ‘[깊이(혹은 높이)를 모르는] 평면적인 차원에서의 모순(대립)’이 그와는 다른 ‘입체적인 차원’에서는 모순이 아닌 이치와 같다. 예컨대 ‘원’과 ‘사각’은 평면에서 각각 ‘다름’을 통해 구별되지만, 공간에서는 그 두 가지가 “하나의” 입체물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저 ‘입체적인 차원’이 ‘평면적인 차원’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편 ‘모순과 모순-아님’이, ‘구별과 구별되지 않음’이 거기에 “동시에(simul)”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나아가 시공간을 통해 제한적인 물질세계와 [이를 초월하는] 정신세계 사이의 차이(다름)에도 적용될 수 있다. 곧 ‘물질적인 다름’은 물질적인 것들 사이에서의 구별을 일컫지만, 또한 그것은 [그와 다른] 정신적인 것과 ‘다름’을 동시에 ‘다르지 않음’을 함께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세계]내재적이며 동시에 초월적인 의미로서의 <다르지 않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니꼴라우스의 견해이다 :
“만일 자네(베드로 발부스)가 [내가 <다르지 않음>과 관련시켜 설명하는] 그 부분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면, 모든 사물들의 원천이자 우리가 ‘모든 것들 안에 존재하는 모두(in omnibus omnia)’라고 앞서 논했던 <다르지 않음>과 플라톤이 말한 것이 다르다는 점을 식별할 수 있었을 것이네. 왜냐하면 이미 인간이 활용하는 개념(humanus conceptus)은 모두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어떤 것에 대한 개념일 뿐이기 때문일세. 그러나 <다르지 않음>은 그렇게 그것이 개념으로 불리는 순간에도 그것은 이미 그 개념과 다르지 않음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그 개념에 앞서 선행해야만 할 것이네(Verum ante conceptum non-aliud est, quando quidem conceptus non aliud quam conceptus est). 그래서 우리는 <다르지 않음>을 차라리 절대적인 개념(conceptus absolutus)이라 일컬어야 하리라고 보네. 물론 이 때 그렇게 말할 때 우리는 그밖에 다른 방도가 없어서 다시금 정신(mens)을 이용할 수밖에 없겠지만[, 실상은 정신을 초월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일세” (제20장).
우리는 분명 니꼴라우스의 이런 설명을 통하여 <다르지 않음>이란 개념이 실재세계의 물질적인 것에 한정된 표현이 아니요, 더 나아가 인간이 물질과 관련하여 포착하는 ‘합리적인 이성(ratio)’에 한정된 표현만도 아니라, 오히려 실재세계에서 의식(意識)이 싹틀 경우 그로부터 야기될 수 있는 ‘상대적인 관점’을 모두 일탈(逸脫)하는, 그래서 그 모든 것들에 “앞선(ante)” 의미로서의 <다르지 않음>을 생각하도록 요구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현대의 벵상 데꽁브(Vincent Descombes)는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사상을 따라서 ‘차이’ 나아가 ‘무(無)’를 오히려 거꾸로 ‘존재자체(有)를 알기 위하여 혹은 구별하기 위하여 동시에 요구되는 무엇’으로서 [‘존재한다(有)’는 입장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무가 정작 ‘존재(有)’와 “대등한 대립[모순]”으로서 그저 다르다고만 말해야 하는지 하는 물음이 필수적으로 뒤따른다. 이 점은 과연 파르메니테스가 ‘존재원리(有)’를 “하나”로 말할 때, 거기에 모순 및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는지 하는 그(데꽁브)의 물음과 관련된다. 이는 코제브가 비판하였던 점과 통한다. 그러나 그의 ‘[이미 무엇(有)으로서의] 차이나 무’는 ‘[역시 존재(有)로서의] 동일성이나 존재(有)’와 ‘대립’만은 아니다. 그 이유는 최소한 ‘서로 구별가능하기 위해서는 서로 구별할 수 있는 동일한 토대(有)’ 위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은 하나의 감각적인 시각(視覺)을 기준으로 구별되고 그런 점에서 의미로운 표현으로 성립된다. 그러나 만일 여기서 또 다른 (차원의) 시각, 예컨대 ‘감각적인 눈(oculus sensibilis)’이 아니라 ‘정신적인 눈(oculus mentis)’을 따라 생각한다면, 앞서 구별한 ‘비가시적인 것’에 대한 규정은 다시금 ‘가시적인 것’으로 수정되어야 하듯이, 무는 ‘존재(有)와 대립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존재(有)하는 무엇’이다. 데꽁브가 말하는 ‘차이’, 곧 ‘무’가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점에서 ‘존재’와 대립한다 하더라도, 다시금 ‘무’가 ‘<존재하지 않음>으로 존재한다’고 본다면, 다시금 ‘존재와 무’의 대립은 대등한 대립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둘은 이미 ‘존재’라는 [상위]범주에 함께 속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 일의적(一義的)이지 않은 “존재” 개념을 먼저 생각해야 바람직할 것이다. 그로써 최소한 ‘무’가 [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존재 안에서 고려되는 한 - 마치 우리가 “왜 무(Nichts)가 단순히 없음(nicht ist)이 아니라, 도대체 문제삼아지는지?”하고 물을 수 있는 것과 같이 -, ‘존재(有)’와 ‘다르지 않음’을 생각할 수 있고, 또한 그런 토대 위에서 ‘다름’을 생각하여 [또 다른 존재로서의] ‘무’를 도대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 니꼴라우스에 따르면, <다르지 않음(有)>이 대자적(對自的)인 그 모든 것들의 존재 및 인식에 앞서(ante) 전제(先行)되어야 하듯, 그 모든 것들의 ‘토대’이다. 시공간에 “앞선” <다르지 않음>은 그렇듯 “순수한 원천(simplex principium)”이요, 그에 (뒤따르는) 모든 것들을 위한 “알파(A; initium)”로서 “절대적인 개념”이라고 여겨지기에, 니꼴라우스는 그 모든 것들의 ‘본질(本質)’과 관련하여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정당한” 개념이라고 내다보았다 :
“만일 사물들의 본질(quidditas)이 그것 외에 다른 어떤 것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바로 그 사물들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찾아낸 본질이 다른 어떤 것이라고 한다면,] 다른 어떤 것은 결국 자신이 찾고자 했던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와 반대로 [찾아낸] 그것(본질)이 다른 어떤 것이어서는 아니 된다면, 의당 서로 다른 모든 것들 안에는 저마다 <다르지 않음> 또한 존재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다르지 않음>은 그 자체로 <다르지 않음>인 이상, 서로 다른 모든 것들 사이에서 저마다 다른 어떤 것으로[곧, 그들 가운데 하나로] 이해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말하는 것 외에 달리 설명될 수 없다고 보네. 바로 그 점에서 <다르지 않음>이라 일컫는 것이 정당하다(recte)고 여기네” (제18장).
우리가 소위 ‘[시공간을 통해] 일컬을 수 있는 개념’이 도대체 “절대적”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신비(mysterium)이다. 이미 시공간을 통해 표현된 - 상대적인 - 그것이 ‘절대성’을 함축한다는 말은 도대체 쉽게는 이해되지 않기에 말이다. 상대적인 어떤 것 속에 절대적인 어떤 것이 자리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은 그만큼 신비롭다. 그러나 이것은 꿈도 아니요, 막연한 바램도 아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활용하고 있듯이 <다르지 않음> 개념은 그렇게 세상에 적용되어 왔으며, 동시에 그 자체로서 ‘다르지 않는’ 의미를, 그래서 ‘[시공간적인 변화를 넘어선] 초월적인’ 의미를 여전히 함축하고 있기에, 차라리 ‘개념이면서 동시에 개념을 능가한다’. 그래서 니꼴라우스는 “비개념적인 개념”이라고 말한다 :
“모든 개념들은 그들이 하나같이 개념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기에, 그때마다 개념적으로 파악되는 그 모든 개념들에는 <다르지 않음>이 [항상] 자리한다고 보네. 그와 동시에 이 <다르지 않음>은 [내용적으로] 비개념적인 개념(inconceptibilis conceptus)으로 머물러 있다고 보네” (제20장).
3.2. <다르지 않음> 개념의 역동성(力動性)
그러면 다시금 실천적인 이해의 측면에서 우리의 가장 앞선 주제 ‘진리인식’과 관련하여 니꼴라우스의 <다르지 않음> 개념이 특히 ‘언어활용 및 참명제’ 판단에 있어 어떤 의미를 제공하는지 간단히 생각해보자.
“<다르지 않음>이 스스로를 정의내린다고 말한다면, 사실상 <다르지 않음>에 근거하여 ‘정의내리는 활동(definitivus motus)’ 중에 <다르지 않음>을 낳고(oriri), [저 원천적인] <다르지 않음>과 그로부터 낳아진(exoriri) <다르지 않음>이 [마침내] <다르지 않음> 안에서 서로 엮어지는(concludere) ‘정의’에 대해서 말해야 하겠지” (제5장).
우리는 이 글에서 니꼴라우스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르지 않음>이란 ‘개념 아닌 개념’이, ‘완전하고’, ‘절대적’이고, ‘순수한 원칙’이 죽은 고목(枯木)처럼 비활동적이고 생명력이 없는 그런 것이 아님을 말한다. 오히려 그 모든 존재와 인식의 원천으로서 <다르지 않음>은 언제나 활기(活氣)가 넘치며, 그로써 생명이 차고넘치는 가운데 만물의 유출(流出)이 가능한 “원천(fons)”으로서의 의미를 손색없이 지닌다는 것이다. 니꼴라우스는 <다르지 않음>의 이러한 충만한 활동성을 선대의 많은 사상가들이 해석한 ‘삼원성(Trias)’으로부터 이해하였다 :
“저 ‘셋(삼위일체)’을 가리켜 ‘하나됨(unitas)’과 ‘닮음(aequalitas)’과 ‘서로 관계함(nexum)’으로 풀이한 이들이 있었으니, [...] 그들의 풀이는 과연 <다르지 않음>을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네. 다시 말해 ‘하나됨’ - 그것은 그 자체와 ‘다름 없음(indistinctio)’을 동시에 그와 다른 것들과는 ‘다름(distinctio)’을 가리키듯이 - 안에서 <다르지 않음>이 온전히 확인될 수 있다네. ‘닮음’과 ‘서로 관계함’ 안에서도 그와 마찬가지로 이해된다고 보네. 좀더 쉬운 표현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이것(hoc)’, ‘그것(id)’, ‘그와 동일한 것(idem)’일 수 있겠지” (제5장).
우리는 이러한 시도를 이미 플라톤에게서 발견한다. 예컨대, ‘이것은 바로 그것이다(그것과 동일하다)’라는 기본문장의 구성요소를 우리가 생각한다면, 그래서 흔히 말하듯, “주어(S)-연계사(V)-보어(C)”라는 가장 간단한 문장의 기본구조를 생각할 때, 혹시 플라톤의 의도에 쉽게 접근할 수 있으리라 내다본다 : ‘주어’와 ‘보어’가 제각기 진술될 경우 그로부터 우리에게 전달되는 ‘의미’는 없다. 비록 ‘간단한 외침’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이미 ‘외치는 자’와 ‘듣는 자’가 서로 “관계맺을 경우”에 한해서 의미롭다. 여기 하나의 문장 안에서도 ‘주어’와 ‘보어’가 ‘연계사’를 통하여 서로 이어지는 순간에 그 어떤 의미를 띨 것이다. 나아가 그 관계성이 ‘주어’와 ‘보어’ 사이에 어떤 ‘일치점’ 내지 ‘동일성’을 드러낼 때, 비로소 참된 의미전달이 그 문장을 통해서 그 문장이 뜻하는 바가 참되게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문장구조의 근원적인 고찰을 플라톤의 ?소피스테스(Sophistes) 261e-262c?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곧, 플라톤이 거기서 “지시어(ὄνομα)[주어]”를 “실행어(ῥήμα)[보어]”와 그 둘을 서로 연계시키는 “접속어(συμπλοκή)[연계사]”와 함께만이 그 문장의 ‘온전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말이다. 이는 이제 우리가 보게 될 니꼴라우스의 설명 안에 여전히 자리하는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삼원성’ 관점과 맥락을 같이한다. 니꼴라우스의 “unitas(하나)-aequalitas(닮음)-nexus(관련)”에 대한 소개는 하나의 사건으로서 ‘문장’ 안에서도 어김없이 포착된다. 다시 풀어보자면, ‘Unitas(하나됨)’로서의 ‘주체(주어)’는 그 자신으로부터 그와 ‘Aequalitas(닮은 것)’로서의 ‘객체(보어)’를 그때마다(시공간적으로) 드러내는데, 다시금 그러한 객체(보어)로 ‘서술되면서 재결합하는(Nexus: 回歸하는)’ 순간 그 의미가 밝혀진다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주체(주어)’의 본래적인 ‘존재성’은 하나로 머무르지만, 시공간적인 흐름을 따라 그때마다 다양하게 또한 무경계적으로(무한히) 표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장하고, 동시에 그러한 다양성이 다시금 하나된 존재자체에로 회귀하는 순간에 비로소 본래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는 존재구조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다양한 표출’이 ‘[하나인] 존재’에서 비롯하는 한 무의미하지 않지만, 그러나 ‘존재에로 회귀할 줄 모르는 다양성’이라면, 그것은 ‘무의미한 다양성’으로 마감될 수 있다는 경고 역시 엿보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실현에 있어서의 완전성이 “원천”으로서의 <다르지 않음> 안에 항상 자리하듯, 그로부터 비롯한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들 안에서 그 역량이 끊임없이 작용하며, 그로써 그들의 목적(완성)을 변함없이 촉구한다는 것이 니꼴라우스가 삼위일체적인 <다르지 않음>을 통하여 소개하는 존재론적인 해명의 주된 의미로 이해된다. 그렇듯 <다르지 않음>은 그 밖의 ‘다른’ 개념들과는 구별되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se ipse)’ 구별되지 않는 본래적인 의미를 띠고 존재(자)에게 역동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다르지 않음>이란 ‘다른 어떤 것’이 아니요, ‘다른 어떤 것’에서 비롯한(ab) ‘또 다른 어떤 것’이 아니며, 또한 ‘다른 어떤 것’ 안에(in) 자리하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닐 것일세. 그러므로 <다르지 않음>이 그 어떤 이유에서도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다는 사실 외에는 달리 생각할 것이 없을 것이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다른 어떤 것’에는 무언가가 부족한 것처럼, <다르지 않음>에게 무언가 부족함이 자리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왠고하니 ‘다른 어떤 것’이란 ‘다르다’는 점에서 이미 ‘(그와)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해야 하고, 바로 그런 근거에서 그것은 ‘(그와) 다른 어떤 것’을 부득불 필요로 하기 때문이겠지. <다르지 않음>은 그러나 물론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에 상대적인 어떤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quia a nullo aliud est), [자신 외에] 다른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자신 외에(extra) 다른 무엇으로도 존재할 수 없다네. 그래서 <다르지 않음> 없이는 ‘그 무엇’을 자네가 결코 말할 수도 인식할 수도 없을 것이니, 여기서 ‘그 무엇’이란 <다르지 않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말해질 수도 인식될 수도 없거니와, 그 다음 ‘그 무엇’ 없이는 실상 포착하는 그[무엇의] 존재 여부를 분별할 수 없으니, 이는 결국 그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앞서 <다르지 않음>을 늘상 어디서나 고려해야 하기 때문일세. 그렇게 사람들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 안에서 <다르지 않음>을 앞서 고려하고,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 자체>와는 다르지 않음을 이해하며, 나아가 다른 어떤 것 안에서도 그것이 그 자체와는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네” (제6장).
이로써 우리가 활용하는 유한한 개념으로서 <다르지 않음> 속에 여전히 절대적인 의미를 실을 수 있다는 니꼴라우스의 논리가 한편 ‘인간성(humanitas) 안에 신성(divinitas)이 함께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incarnatio) 신비에 다가설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다고 본다. 또한 우리에게 ‘현실적인 다양성, 나아가 미래에 다가올 무한한 다양성’ 앞에서도 꾸준히(semper) [그런 변화와 동시에 변함없이] 선행해야 할 <다르지 않음>을 따라 ‘하나된 진리(Veritas est unum)’를 기억해야 하고 또 기억할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였다고 본다.
III. 나오는 말
“다르지 않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때마다의 ‘동일성’을 다시금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다. 왜 ‘나는 여전히 나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더 이상 ‘주체성’을 상실할 이유가 없다. ‘다름’과 ‘무’를 통해서 제기되는 동일성에 대한 의문으로 온통 나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그러한 의문 앞에 서있는 ‘[현재의] 나’는 또한 물어져야할 ‘[미래의] 나’로서 이미 [과거의 나에 대해] 문제삼았기 때문에 그러하다면, 도대체 ‘[문제삼아진] 과거의 나’와 ‘[알고싶은] 미래의 나’는 ‘[묻고있는] 현재의 내’ 안에 함께 현전(現前)한다. 그렇게 과거-미래, 그들이 과연 막연히 과거(지나감)와 미래(다가옴)가 아님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오히려 현재(지금)를 근거(根據)삼아 구별되어졌듯이, 현재(지금)의 확장(擴張)으로 과거와 미래가 언제든 현재화될 수 있음을 기억한다면, 예컨대 현재의 우리가 기억(記憶)을 통해 과거의 시공간적 차별을 넘어서고 기대(期待)를 통해 미래를 앞당겨 그와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과거와 미래는 언제든 [그런 방식으로 묻고있는] 현재에 함께 현전할 것이요, 그렇게 ‘하나의 나(자아)’가 실존한다는 것은 이미 내적으로 “다르지 않음”이란 존재원천의 삼위일체적인 자기해명 및 그 역동성에 근거하여 타당성을 갖는다. 곧 시공간적인 그 모든 존재의 구체적인 실존해명은 저 원천적인 삼위일체적 존재의 자기현시와 맞물려있다는 점에서 [다름에 의한] 우리의 당혹감은 능히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요, 그것은 ‘다름’ 속에서 그 원천인 “다르지 않음”을 되새기게끔(wieder-holen) 이끄는 존재의 본래성(本來性), 존재론적인 구조의 의미를 시사한다.
니꼴라우스의 ?다르지 않음에 관하여? 작품 안에서 소개된 그 밖의 보다 많은 내용들, 예컨대, ‘은유성, 닮음’에 관하여(제9-11장), ‘물질’에 관하여 (제12장), ‘본질’에 관하여(제8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관하여(제18-19장), ‘플라톤의 신비신학’에 관하여(제20-21장), ‘디오니쉬오스의 다섯 작품에 대한 요약’ 및 ‘해석’에 관하여(제14-17장), ‘삼위일체의 하느님’에 관하여(제5, 22-24장) 등등 여기 한정된 지면에 실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그런 아쉬움 때문에라도 니꼴라우스의 작품에 새로운 관심이 기울여진다면, 여기 소고의 취지로서 그보다 더 큰 의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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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Non-aliud” als Prinzip des Seins und Erkennens
- angesichts der Vielheitsthese bei Post-modernism -
- Cho Kyu Hong -
Diese Arbeit versucht, der heutzutage problematisierenden “Differenz (sc. différance)” bei Post-modernism den Begriff ‘Non-aliud’ bei Nicolaus Cusanus gegenüberzustellen und damit sie grundsätzlich wieder zu verstehen. Dafür erinnert sich sie an den antiken philosophischen Grundsatz bzw. , welche seit Plato über Aristoteles, Plotin hinaus bis Augustinus und Diogenes Areopagita überliefert wurde: “Tres causae [efficiens, formalis, finalis] coincidunt in unam”. In Bezug auf diesen ursprünglichen und eigentlichen Kerngedanken läßt der Begriff ‘Non-ailud’ sich verstehen: “Non-aliud est non aliud quam non-aliud”. Dieser triunitarische Gedanke erläutert dann die Existenz des Menschen, der uberhaupt ist, erkennt und will: “Nam ibi relucet ut principium essendi, a quo anima habet esse, et ut principium cognoscendi, a quo cognoscere, et ut principium desiderandi, a quo habet et velle, et suum unitrinum in his principium speculando ad eius ascenditur gloriam”. Sodann erleuchtet der Begriff uns vor der Vielheits-[alteritas-]these, denn er ist nach N. Cusanus das Licht der Lichten, das lichtende Licht, d.h. er ist zwar Nichts im Blick auf all diejenigen [aliud] farbigen, die in visibilis mundo existieren, aber nicht nichts im Hinblick auf das Sein, esse, daß es überhaupt ist: Non-aliud, quid est non-aliud quam non-aliud, ist also der ursprüngliche Grund der Andersheit(alteritas).
※ Schlagwörter : Non-aliud, Differenz, Trinität und Onto-log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