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윤리와 여성적인 것/카테린느 샬리예

나뭇잎숨결 2021. 10. 4. 14:07

윤리와 여성적인 것

                         카테린느 샬리예/파리 10대학(낭테르) 철학교수

                        옮긴이: 한신대 대학원 신학과 김성호/기독교윤리

Chalier, C., 'Ethics and the Feminine', in: Robert Bernasconi and Simon Critchley (ed.) Re-Reading Levinas, pp.119-129, Bloomington and Indianapolis, Indiana University Press, 1991.

                             

 

  레비나스 철학의 하나의 커다란 특징은 존재론의 우위성에 대한 그의 비판이다. 그는 “존재와는 다른” 것을 사유하길 원한다, 다시 말해 그는 존재로부터 초월의 공간을 해방시키고자 하는데, 이 공간은 우리로 하여금 “윤리”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해줄 것이다.

 

  나는 세 가지를 설명할 것이다. 첫째, 레비나스는 어떻게 존재의 왕성한 생식력을 의문시하고, 또 그 존재가 절대타자에 대한 존재의 친절함으로 전환하는 것, 그리하여 자연적 삶이 윤리적 삶으로 전환되는 바로 그 전환을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여성적인 것이 어떻게 이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둘째, 모성이 어떻게 책임의 탁월성과 무엇보다 대속의 탁월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에 대해. 나는 고유한 모성을 다루기 전에 레비나스의 이 개념들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셋째, 모성을 초월한 여성적인 것을 선(善)에 의한 존재의 파괴로 간주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이 부분에서 나는 성서의 인용문을 다룰 것이다.

 

                 레비나스는 어떻게 존재의 생식력을 의문시하는가

 

우리가 위에서 에고이즘이라 부른, 주체의 슬픈 실패가 아니라 주체의 존재론인 에고이즘이라 부른, 또한 우리가 스피노자의 윤리학 제3부 제6명제, 곧 “각 존재는 할 수 있는 한 많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투쟁한다”라는 명제에서 볼 수 있는, 이 여전히 존재의 존재 자체로의 자연적 긴장1)

 

근본적으로 보편적이고 정복적인 로고스의 생식력에서 발생하는 소외를 극복하는 것, 또한 그 로고스를 보호하고 있을 지도 모를 그늘에로 살그머니 접근하는 소외를 극복하는 것-그런 것은 여성적인 것의 존재론적 기능, 곧 “정복하지 않는 그녀의 소명”일 것이다.2)

 

 

                           레비나스의 코나투스 비판

 

만일 우리가 레비나스의 코나투스(conatus)에 대한 분석, 다시 말해 각 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행하는 노력에 대한 분석에 찬동한다면, 우리는 또한 코나투스가 결국 실재에 대한 연극적이고 폭력적인 견해, 즉 윤리가 전통적인 존재론의 우위성에 복속되는 그런 견해로 귀결된다는 사실에 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우리가 존재 임무의 탁월함을 수용한다면, 만일 우리가 그것이 본질(essences)을 고무시키는 역동성의 의미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에고이즘이 어쨌든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그리고 “불가피하게 자기의 존재 유지에 질투하는”3) 따라서 타자들과 갈등관계에 놓이는 본질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 것은 숲속에서의 삶인데, Vassili Grossman에 따르면:

 

한때 북쪽 숲에서 살았을 때, 나는 인간에게서도, 약탈하는 동물들과 곤충들의 세계에서도 선한 것을 찾을 수 없었지만, 고요한 나무들의 왕국에서는 선한 것을 찾았노라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숲의 느린 운동, 곧 숲이 1인치의 흙을 얻고자 초목과 덤불에 맞서 전투를 벌였던 믿을 수 없는 사태를 목격했다....첫째, 초목과 덤불을 파괴하면서 공기 사이를 비행하며 싹을 틔우기 시작하는 무수한 씨앗들. 그리고나서 수많은 승리에 찬 새싹들은 서로에 맞서 전쟁을 벌인다. 젊고 덧없는 숲의 상처없는 덮개(하늘)을 형성하기 위해 평등의 동맹(결혼)으로 진입하는 생존자들만이 있다. 하늘 밑에 있는 가문비나무속의(갯솔, 전나무 등) 식물들과 너도밤나무들이 형벌의 노예 상태의 황혼에서 얼어 죽는다. 머지않아 덧없는 나무들은 노쇠해진다. 몸무게가 무거운 가문지나무속의 식물들은 오리나무속의 식물들과 너무밤나무들을 살해하면서 그들의 하늘 밑에 있는 빛에 자신을 노출시킨다. 이것이 숲의 삶이다-모든 것에 대한 모든 것의 지속적인 투쟁. 오직 장님만이 나무와 초목의 왕국을 선한 세계로 간주한다...그런 삶 자체가 악인가?4)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만일 나의 존재 유지와 그것을 실행하고, 그것을 증가시키려는 욕망이 나를 매료시키고 또한 그것이 나의 유일한 걱정일 경우, 모든 것은 이 존재 유지에 비해 열등한 입장에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어떤 것도 그것을 의문시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무릅쓰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죽음이 주는 모든 것의 운명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통속적인 지혜는 삶이 지속되지 않으면 “안 되고”, 삶이 그 삶의 방식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런 통속적인 지혜는 불행을 당한 사람들에게 시간이 결국 모든 것을 회복한다고,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존재와 그 긍정성의 질서에 정돈시킨다고 설득하고 있지 않는가? 이 질서는 눈물을 인정하지 않으며, 열망과 양심의 가책과 어울리지 않으며, 결백하고 비난의 여지가 없는 완고함에 밀착돼 있다. 존재의 관점에서, 모든 이가 무관심하고, 행복하고, 오만한 자신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양. 우리 자신의 존재 유지가 최고의 가치라면, 그것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런 것이 삶이야”라는 표현이 우리가 억압받는 자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지혜라면,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아마도 우리 자신의 고통에도) 귀를 막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존재 유지는 평온하지 않다. 군중의 소동과 동떨어져 평화롭고 고요하게 안식처에 안주할 가능성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존재를 위협하는 것에 대항해 지속적으로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본질(essence) 안에서 존재와 무(無)의 변증법은 무에 대한 근심이자 생존(existence)을 위한 투쟁이다.”5)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따라서 자연 및 사회의 방해물과 빈틈 없이 거리를 두면서, 또한 그 자체로 죽음을 내포하는 모든 것을 떨쳐버리려는 투쟁이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현재적 표상에 대한 부정과 우리 존재의 현재적 한계에 대한 끊임없는 넘어섬을 희생하면서까지 우리 존재를 증가시키고 성취하려는 투쟁이다.

이런 사유방식에는 또 다른 필연성이 있다. 곧 현재는 미래, 그러니까 현재보다 더 풍요롭고 더 완전한 미래에 종속된다. 이것은 악과 고통의 짐을 생성의 필연에 종속시키는 사람들의 사유방식이다. 그들은 악과 고통이란 단지 생성을 향한 비참한 단계, 그러니까 생성의 완성에 필연적 단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헤겔(Hegel)에 따르면, 시간이 요구하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 즉 위인들은 “순결한 한송이 꽃을 수없이” 짓밟고 “그 길에 놓여 있는 수많은 것들을 파괴하는”6)데로 이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비난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사적인 개인과 그의 고통은 본질(Essence)이 완성될 수 있도록 그들의 빚을 갚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에 함유돼 있는 이상(ideal)은 존재와 그 존재의 자기만족의 모델에 따라 나타나고 있음에 틀림 없다.. “더 나은 존재를 위해, 우리 자신과 세계 사이의 조화를 위해 혹은 우리 자신의 존재의 진보를 위해” 투쟁하는 것은 필요불가결하다. “존재론주의의 평화와 균형의 이상은 존재의 만족을 전제한다.”7)

이 만족은 “그것이 사물에 의해 우리에게 제공될 정도의 것은 아니지만, 존재의 이미지 안에서 나타난다. 그들은 존재한다.... 이런 자기 자신에 대한 언급은 정확히 우리가 존재의 동일성에 대해 말할 때 말해진 것이다.”8) 그런 것은, 헤겔에 따르면, 그 자신의 완성을 향해 일하는 본질의 “불타는 열정”이다. 따라서 이런 견해에선 악은 단지 존재의 한계에 불과할 뿐이다.

이제 이런 어찌할 도리가 없는 본질의 지속(persistence of essence), 이 “계속 진행되는 강함”의 유지, 그것을 방해할 수도 있는 무(無)의 그 어떤 틈새도 넘어 가는 “강함”의 유지는 존재를 옹호한다, 그러기에 그 어떤 가치도 그 존재를 초월할 수 없고 심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강함 속에서 “보편적이고 정복적인 로고스의 생식력”을 볼 수 있다고 레비나스는 말하고 있다.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곡식과 아마(亞麻)는 인간의 노동에 의해 자연으로부터 취한 것이다. 그것들은 자발적 삶과의 단절, 자연의 직접성, 곧 주어진 것 안에 파묻힌 본능적 삶의 종말을 증언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정확히 정신의 삶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의 시작을 특징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극복할 수 없는 잔인함은 우리의 정복적인 문명의 생산물 안에 남아 있다. 이성이 보다 더 자기의식적이 되는 세계는 거주할 수 없는 곳이 된다. 세계는 만족시킬 수 없는 상품이 있는 그런 창고처럼 힘겹고 춥다. 반면에 거기에서 세계는 벌거벗은 사람들을 입히지도 않고 굶주리는 사람들을 먹이지도 않는다. 세계는, 제조된 재화가 추상적(abstract)으로 남아 있는, 다시 말해, 계산의 진리에 충실하고, 비록 그 재화들이 재난을 준비할 수 있다 해도, 막을 수 없는 지식의 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경제의 익명적 영역으로 가져오는 공장 격납고와 산업 도시처럼, 비인격적이다. 거기에 세계는 존재한다-그 남성적 존재 안에 있는 정신. 세계는 밖에서 살고, 눈멀게 하는 강렬한 빛에 노출되고, 강타해 쓰러트리는 확트인 바다 바람에 노출된다-내적인 휴식이 없이, 자신의 고향에서 벗어나, 고독하고 방랑하는 땅 위에서 그리고 세계가 거칠고 적대적으로 떠오르는 생산물을 창조했던 바로 그 생산물에 의해 그 자체로 소외된 땅 위에서.9)

 

                            여성적인 것의 존재론적 기능

 

계속하여 다음 글을 읽어 보자:

 

여성은 단순히 그와 교제하기 위해 교우 관계를 빼앗는 자가 되지 않는다. 그녀는 이 궁핍 내부에 있는 고독, 그것은 이방인인데, 신의 현존에도 불구하고 존속하는 고독, 즉 보편적인 것 안에 있는 고독,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자연을 사유에로 일으켰을 때 재차 넘쳐흐르는 비인간적인 것에 응답한다. 세계를 지배하는 사유의 피할 수 없는 파괴성은 고향으로 회귀하여 평화 및 고요와 화해하기 위해선, 달콤함의 뜻밖의 실패는 무한히 추운 공간의 기하학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의 이름은 여성이다. 우리 자신에로의 회귀, 이 내향성, 이 공간에서 장소의 출현은, 하이데거에서처럼, 건축가의 노동으로부터, 시골을 형성하는 건축으로부터가 아니라, 가정의 내재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가정의 내재성의 반대쪽은, 거기에 사는 여성적 존재의 본질적 온건함 없이, 거주 그 자체인 “그 어떤 장소”일 것이다. 그녀는 곡식을 빵으로 만들고, 아마를 옷으로 만든다. 아내, 약혼한 자는 인간 존재에서 그녀 없이 존속할지도 모르는 부드러움과 선함이라는 모든 완전성의 결합이 아니다. 모든 것은 여성이 이런 완전성의 본원적 현시요, 친절함 자체요, 지상에서의 모든 친절의 기원이라는 사실을 가르켜 준다.10)

 

따라서 우리의 거주지에서 그 누군가를 환영하는 것은, 비록 거기에 사실 인간 존재의 여성적 성(sex)이 없다해도, 하나의 여성적 특징이다. 여성적인 것의 이런 존재론적 특징이 없다면, 코나투스, 그것의 활발한 존재 유지, 그것의 영속적인 자기만족, 그것의 합리적인 요구, 윤리가 시작되는 절대타자를 위한 이 존재로의 전환은 불가능할 것이다. 여성적인 것은 이런 자기 기만의 합리성의 간편한 양심을 의문시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어떻게 그런지 이제 보도록 하자.

레비나스는 여성적인 것을 사유에 필요한 것으로 그리고 윤리적인 행동을 하는데 필요한 것으로 묘사한다. 내재성이 근본적인 출발점으로서, 거주지로서, 침묵의 언어로서, 생식력의 흩어짐과 도움으로서의 여성적인 것은 침묵의 내적 삶의 통일을 향한 자신의 길을 발견한다.

여성적인 것은 정복적이고 생식력의 태도를 압박하여 사유를 그치게 하고 사유를 시작하게 한다. 여성적인 것은 존재의 기획, 즉 지속되는 강함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기획을 중지시킨다. 거주지에서 환영하는 그녀는 이런 안하무인격의 강함을 중지시키는 내재성의 길을 찾도록 도와준다. “여성은 상기의 조건, 가정과 거주지의 내재성이다.”11)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래서 그 현존이 그것과 더불어 친밀함의 장(場)을 묘사하는 제1의 환대하는 환영으로 정립된 절대타자는 바로 여성이다.”12) 그래서 여성적인 것은-그러나 그는 “여성”이라 쓰고 있다-상기의 친밀함에 필수적이다. 마치 이 “안식처”가 절대타자로의 보다 큰 배려로 전환되는 우리 자신으로의 보다 큰 배려를 고려하는 데,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 있는 존재의 딱딱함에서 절대타자를 위해 있는 존재의 부드러움으로, 다시 말해 존재론에서 윤리로의 전환을 고려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양.   

정신은 그 왕성한 본질에서 절대적으로 소외시키는 존재 범주를 대표한다. 그것은 절대타자에 대한 돌봄을 금지하는 방랑을 낳는다. 남성적인 것은 다양한 종류의 노동을 낳지만, 노동을 방어하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남성적인 것의 노동은 그 노동을 차지할 사람들에게 소리 없이 남아 있다. 남성적 정신에 의해 생산되는 노동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더욱이, 정신은, 그 왕성한 본질에서, 그 자신의 노동에 의해 그만큼 흡수되고 정신은 절대타자를 돌볼 시간을 결코 갖지 않는 정신 그 자신에 의해 그만큼 둔해진다.

여성적인 것은 이 소외를 초월하여 절대타자를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 여성적 기능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그 노동 안에 포섭될 수 없다. 그것은 남성으로 하여금 그의 삶의 자연적 방식을 윤리로 전환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하는 공간에서 “한 장소”를 낳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침묵의 현존, 이 신중하고 거의 섬세한 여성적인 것의 현존이 없다면, 세계는 거칠고 자발적인 삶으로, “지속적인 강함”의 삶으로 운명지워질 것이다. 여성적인 것이 없다면, 밀은 갈아지지 않을 것이고, 아마는 짜여지지 않을 것이며, 세계는 거주불가능한 곳이 될 것이며, 윤리적 삶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따라서 환영하는 사람의 침묵의 소리, 그녀의 친밀한 친숙함으로 시작하는 내재성의 차원은 존재론적 범주이자 윤리적 패러다임이다. 그것이 인간을 구원한다.

그러나 여성적 환영은 단지 윤리의 조건에 불과할 뿐이다. 친밀함과 부드러움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유일하게 진정한 윤리적 차원인 높이(height)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것은 여성적인 것이(그는 종종 “여성”이라 말한다) 인간의 최고의 운명에서 배제될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 일단 남성적인 것이 여성적인 것 덕분에 윤리로 전환되면 이 최고의 운명은 남성적인 것을 위해 준비될 것이다.

 

                       존재의 실패 혹은 절대타자에로의 개방

 

                                       책 임

 

레비나스에 따르면, “태양 아래 한 장소”를 차지하려고 벌이는 투쟁은 그 자체로 권리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에 그 어떤 의미나 정당화를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반대로 불의와 폭력을 낳는다. 인간 존재는-진정 인간이고자 한다면- 비록 이 장소가 하나의 거주지라고 해도, 하나의 장소에 뿌리박을 수 없다. 그런데 그는 그 문에 “방해하지 마시오”라고 쓴다. 노아의 방주에 대한 묘사 이후, 우리는 창세기 7장 16절, “주께서 몸소 문을 닫으셨다”라는 구절을 읽을 수 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 구절은 매우 의미심장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노아 자신이 문을 닫을 수 없었다는 것, 세계가 파괴되고 있는데 노아가 안전함에 기뻐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계가 여전히 파괴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책임은 선택이 아니라 하나의 부름이다. 철학적 전통과는 대조적으로 레비나스는 “자유보다 책임의 우선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이 우선성이 “선의 선성을 의미할 것이라”13)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런 유의 책임은 그 자신의 책임을 실현하는 남성적인 것의 교만과는 관계가 없지만, 공통적으로 겸손과는 상당한 관계가 있다. 책임은 하나의 부름이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넘고 초월하여 책임적이다. 인간은 언제나 책임적이었으며, 비록 그 책임이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해도, 이 책임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기억할 수 없다.

더욱이, 레비나스는 인간은 타인들 앞에서 그 자신과 그의 행위들에 책임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가 절대타자, 곧 이웃에 대한 기억할 수 없는 시간 때문에 책임적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을 돌보기 전에 이웃과 우주를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존재의 생식력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인간은 이웃의 운명, 이웃의 고통에 책임적이다. 인간은 절대타자 앞에서 그가 결코 결백하지 않다는 것만큼 책임적이다.

이런 책임, 이렇게 변명에 필요한 시간을 갖지 않고 재빨리 절대타자에게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아브라함이 창세기 22장 1절, 7절과 11절에서 말했듯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존재의 겸손이다. “그 누구도 절대타자들 없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14): 그것은 홍수가 위협하고 이웃이 언제나 고통당하고 이웃이 언제나 나의 고요함을 훼방하고 심지어 나의 비탄까지도 훼방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이 책임은 무한하다. 이 책임이 무한한 것은 이 책임이 나의 자유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책임으로 짜여있다”:15) 인간은 쉴 수 없고 오직 자신만을 생각할 수 없다.

부름으로서의 책임은 성서와 탈무드에 익숙한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탈무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읽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 대해 책임적이다”(Sanhedrin 27b). 악에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악을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적이다. 설령 이 사람들이 그의 이웃들이고 혹은 그 사람들이 어디에서 살든 그들의 잘못에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누구나 책임적이다: 만약  그들이 잘못 행하고 있는데도 그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들을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Rav Papa는 유배의 군주가 전세계의 잘못에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Chabbat 55a). 그리고 레비나스는 “나의 행위가 아닌 것에 대한 책임, 혹은 심지어 나와 상관없는 것에 대한 책임”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나는 언제나 모든 타인들보다 더 많은 책임이 있다”16)고 덧붙인다.

악에 직면할 때 그 누구도 자신의 간편한 양심의 내적 프라이버시로 도망갈 수 없다. 그 누구도 그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책임의 동맹을 맺은 구성원이고, 전근원적 과거와 “전근원적 수용성”17)으로부터 이 책임의 동맹과 연결돼 있기 때문에. 이 지정된 약속은 그 어떤 권리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의무의 과잉을 제공한다. 따라서 이 의무의 과잉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고유성을 알게 해준다: “책임적 에고의 고유성은 타인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만 가능하다.”18) 그것은 그렇게도 자신에 대해 우쭐했던 왕성한 에고의 종말이다. 따라서 겸손은 절대타자를 섬기는 데서 시작한다. 그것은 각자가 절대타자를 섬기기 위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런 섬김은 인간 존재의 진정한 조국, 땅에 뿌리박은 것 혹은 최초의 소유자가 되는 것과는 도대체 관련이 없는 조국이다. 그것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유대적 본질”19)에 속하는 이 “절대타자를 향한 운동”과 관련이 있다.

 

                                   대속(Substitution)

 

대속은 책임을 완성한다. 레비나스는 대속의 구조를 “하나의 행위로 전환시킬 수 없는 수동성”으로 묘사하는데, 이것은 절대타자의 비참함과 파탄과 심지어 절대타자가 나에게 질머질 수 있는 책임도 떠맡는 것, 무엇보다 그 어떤 자유로운 선택 없이 그것들을 질머진다는 것, 그것들을 질머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것은 “에고이즘과 이타주의를 넘어서는 ‘자아의 종교성’”20)이라고 쓰고 있다.

대속은 인간 존재가 비움(kenosis)의 의미와 만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에 있어 존재 자신을 이탈시키고, 그 존재의 존재 자신을 비우고, 그 존재 자신을 ‘뒤집어’(back to front) 놓는 행위, 그리고 만약 그것이 그렇게 된다면, ‘존재와는 다른’ 것이 되는 행위.”21) 다시 말해, 자연적인 우리의 존재 유지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것, 코나투스와 정확히 반대되는 것. 대속은 세계의 무게, 비에고(non-ego)의 무게를 지탱하는 것, 자유스런 선택 없이 이 무게를 질머지는 것을 의미한다. 대속은 이타주의와는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대속은 자유를 지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관대함이 바로 자아의 구조, 즉 그 어떤 자유로운 참여 없는 전근원적 수용성의 구조이다. 대속의 선성은 악에 대한 대립이 아니라  주체의 윤리적 최후성의 직접성을 묘사하는 “존재와는 다른”의 사실이다.

그 어떤 자유로운 참여에도 의존하지 않는 “볼모”가 되는 이 조건은 나에게 “나의 입에 있는 빵을 떼어냄으로써 그리고 내 살갗을 하나의 증여로 만듦으로써 절대타자에게 주도록” 나에게 명령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것은 “벗김이요, 침범당함으로의 노출이요, 하나의 순수한 수용성.”22)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자아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레비나스는 보다 최근의 저작에서 그가 존재에의 권리라는 문제, 즉 존재론적인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의 탁월성을 말할 때 이 문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대속은 “나의 존재가, 그 죄없음과 의식적 목적에도 불구하고, 일으킬 수 있는 모든 폭력과 죽음에 대한 불안”23)과 연관돼 있다. 이 불안은 절대타자에 직면하는 자아를 산출한다. 그것은 이 자아가 “신경 과민에 걸렸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미의 직접성이다. 이 불안은 자아가 그의 선택받음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피조물의 모든 무게가 나의 어깨에 달려있는 양”24) 타인들을 위해 대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적어도 그것은 그의 소명이다-을 위해 그 누구도 대속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선택받음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레비나스는 이사야 53장 4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의 “그”는 메시아적 인물이다. 우리는 유대교에서 므나헴(Menahem, 위로자)이 메시아의 여러 이름 중에 하나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모든 이가 마치 그가 메시아인 양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덧붙인다: “메시아주의는 분명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그 누군가가 올 것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들의 고통을 지탱하는 나의 힘이다. 그것은 내가 이 힘과 나의 보편적 책임을 인식하는 순간이다.”25)

따라서 우리는 메시아주의에 대한 성서적 사상과 엄밀한 대속 개념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사실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모든 연대성의 조건”26)이다. 사로잡힘의 조건이 없다면 연민도 동정도 용서도 없다. 더욱이, 이런 이해할 수 없는 無私心에서 나오는 진정한 선한 행위의 사건이 가장 어두운 시대에도 희망을 회복하고 전세계를 지탱할 수 있다. 우리는 쇼아(파괴) 기간에 암스테르담에서 살면서 아우슈비츠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한 젊은 유대인 여성 Etty Hillesum을 읽어보면 이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선생님들은 감옥에 있었다, Jan의 친구는 방금 총살당했다. 비통함의 이유는 많지만, 우리는 이 복수의 욕망은 너무 쉽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 날에 희망의 섬광이다.” “이제 우리 자신안에 있는 모든 선성을 절대타자에게 주는 것외에 다른 것은 없다.” “힘든 날, 매우 힘든 날이다. 우리는 타인들과 함께 ”다수의 운명“의 무게를 지탱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사적인 소소한 일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각 사람은 그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는, 만약 그가 도피한다면, 그 누군가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상처에 빛이 비춰져 아물길 바란다.”27)

 

 

                              대속의 유형인 모성  

 

우리는 방금 주체성이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 에고의 자아로의 전환이며, “바로 무사심의 양태”28)인 에고의 자리-물러남(de-posing) 혹은 脫位(de-situating)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절대타자를 위해 필수적인“ 모성적 신체는 그것이 보호하는 사람에 대해 염려하기에 우리에게 주체성의 충만한 의미를 제공한다.

레비나스는 모성적 신체를 “우리 자신에게 의존하지 않는 전근원적인 것,”29) 그 자신에게 헌신하기 이전에 절대타자에게 헌신하는 선성의 신체로 묘사한다. 이런 비이기적이고 모성적인 신체 안에서, 주체성은 이미 획득할 모든 실체와 동일성을 상실한다. 대속 없는 주체성으로서 모성적 신체는 절대타자를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그것은 이 임무에 있어 대체될 수 없다. 모성적 신체는 절대타자로 인해 고통받는데, 그것은 “수동성과 포기, 순수한 인내로서의 신체”30)이다. 그것은 코나투스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절대타자를 위한 의미”31)이다. 나를 무릅쓰면서 타자를 위해.

모성적 신체가 절대타자를 책임지고 자신 안에 그/그녀를 위한 여지를 만들어 줄 때, 그것은 안식처에서 쫓겨나고, 숨이 헐떡일 만큼 방해받는다. 따라서 이것이 분명 주체성의 의미이다. 그것은 모성적 말함의 윤리적 의미이다. 자신에게 의존하지 않는 모성적 신체의 전근원성은 염려와 경청을 수반하지만 자유로운 선택은 결여돼 있다. 그것은 절대타자를 위한 양도할 수 없는 자비의 시간, 선택받음에 직면할 때,   그것이 그 본질을 훼방하는 순간에 자아에게 발생하는 무한한 인내의 시간이다.

모성적 신체는 존재를 초월하는 선에 의해 지배된다. 모성적 신체가 선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이 모성적 신체를 선택했다. 그것은 수동적 신체, 볼모의 신체인데, 왜냐하면 모성적 신체는 그 자신의 존재로부터 쫓겨났기 때문에. “바로 모성적 신체가 견디고 혹은 지탱하는 것은 박해받은 자들이 겪는 불안  이 아니라, 모성의 변형, 상처입은 내면의 신음소리에 의한 것이 아닐까?”32)

따라서 모성은 여성적인 것의 궁극적 의미이며, 단순히 하나의 은유는 아니지만 주체성의 은유인 것 같다. 우리는 타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존재의 생식력에서 이 실패와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모성적 신체는 주체성이 의미하는 바를 스스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레비나스에 따르면, 윤리가 그 여성적 성취에서 어머니이지 그외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이에 찬성할 수 있는가?

 

                      여성적인 것과 善性에 의한 존재의 파괴

 

                      여성적인 것의 성서적 인물: 리브가(창세기 24장)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Eliezer)은 이삭을 맞이할 젊은 여인를 찾아야 했는데, 결국 그 종은 그녀를 알아보는 잣대로 환대의 의무(mitsva, duty)를 선택한다. 그 종은 젊은 여인에게 “물동이를 기울여서, 물을 한 모금 마실 수 있게 하여 달라”고 말한다. 그러자 그녀는 “드십시오, 낙타들에게도 제가 물을 주겠습니다”라고 말한다(창세기 24장 14절). 이 환대의 잣대는 엘리에셀이 그 젊은 여인의 계급보다는 절대타자에 대한 느낌, 자기에게 전달되는 절대타자의 요청을 인지하는 그녀의 능력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윤리적 섬김인데, 이 섬김 가운데서, 우리는 절대타자는 우리에 비해 우위성을 갖고 따라서 자연적 에고이즘이 계약(covenant) 안에 있는 관계의 최초의 시작인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로 전환된다는 것을 배운다.

리브가는 이 이방인, 물을 주길 간청하는 목마른 자에 대한 책임, 그리고 무엇보다도 물을 요청할 수조차 없는 목마른 동물에 대한 그녀의 책임 때문에 선택되었다. 그것은 마치 최고의 헌신의 표현이 이웃을 먹이고 그에게 물을 주는 것에 있는 듯이. 리브가의 선택받음은 아직 한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젊은 아람 처녀의 선택받음이요, 그녀의 줄 수 있는 능력, 그녀의 이웃을 향한 의무감에 토대하지 않는 선택받음이다. 결과가 어찌됐든 상관하지 않고 영접하여 베풀 수 있는 것, 이윤을 넘어 사랑을 찾는 것은 엘리에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계약 안에 있을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그녀는 모든 그의 富에도 불구하고 한갖 이방인에 불과한 절대타자에 대한 책임을 증명해준다.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내 자신을 위한 자원을 발견하는 절대타자의 본질적 결핍에 응답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그의 초월 속에서 나를 지배하는 절대타자는 따라서 내가 의무지워진 이방인, 과부, 고아이다.”33)

리브가는 그가 주는 모든 선물에도 불구하고 절대타자의 얼굴의 무력함을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비록 자유와 자발성을 희생한다해도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임을 알고 있다. 그것이 바로 계약을 특징지우는 “절대타자를 위함”이 지니는 윤리의 탁월성이다.

그녀는 그녀의 가족을 떠난다, 그녀는 며칠 더 머무르길 원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녀는 오라버니 라반에게 떠나도 되는 지에 대해 물어보지도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향해 가야만 할 때 떠나도 좋은 지에 대해 물어볼 필요가 없다. 그 누구도 그녀를 대신할 수 없다. 그녀는 단지 유산에 불과했던 동일성의 무게에서 해방시킬 사람, 그리고 그녀에게 새로운 동일성의 길, 곧 유토피아의 동일성, 절대타자를 위한 동일성을 보여줄 그 사람에게로 떠나 만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전장치와 보증인 없는 동일성. 그것은 모성을 초월한 선성에 의한 존재의 파괴로서의 여성적인 것이다.

 

                                     결 론

 

자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존재들,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의 권리에 대해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존재들의 자기만족을 훼방하기 위한 보편적 사명이 있다면. 고통과 죽음 가운데 있는 절대타자를 이렇게 지속적으로 간과하는 것, 우리로 하여금 무관심하고 평화롭게 지내게 하는 저 부주의를 종식시키려는 보편적 사명이 있다면. 타인을 위한 삶이 될 평화, 사랑만큼 염려하는 평화가 발생하는 것을 보기 위하여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존재들의 간편한 양심을 흔들어야만 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선성에 의한 이 존재의 파괴가 갖는 의미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 존재 안에 있는 여성적인 것이 갖는 뜻이 아니겠는가?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