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메를로-뽕띠의 프로이트 읽기와 페미니즘

나뭇잎숨결 2021. 10. 4. 13:59

성적 존재로서의 신체
― 메를로-뽕띠의 프로이트 읽기와 페미니즘

장 문 정*고대 철학

요 약 문
이 글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작용하는 성욕(sexualité)에 대한 메를로-뽕띠의 신체 현상학적 해석을 논의하고자 한다. 프로이트의 이론들은 남근중심적 보편 담론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계승자들에 의해서 그것의 페미니즘적 함축이 계발되면서 페미니즘 운동의 새로운 전환을 이끌어왔다. 마찬가지로 메를로-뽕띠의 신체 현상학이 여전히 이성중심적인 보편 담론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명시적으로는 여성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의 신체성 개념은 기존의 지배 담론의 사각지대에서 이성의 불완전함이나 결여로 치부되고 있었던 타자로서의 여성성에 대한 온당한 자리매김과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중요한 전환적 개념틀로 작용할 수 있다. 페미니즘 논의에 신체성 개념이 도입되어야 할 필요성은 보부아르의 실존적 페미니즘이 딜레마에 봉착하면서 절실히 제기된다. 그녀는 여성의 젠더가 여성의 생물학적 신체 조건에 환원되어 부당하게 논의되는 현실에 분개하고 여성 스스로가 이러한 억압을 의지적으로 뛰어넘으면서 남성과 동등한 자율적인 주체로 변모되어야 함을 설파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여성성 논의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는 여성의 신체적 조건을 무시하고 평가절하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남성중심적․이성중심적 담론의 희생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체라는 선험성을 통해 주체와 세계를 구성하는 메를로-뽕띠의 현상학은 여성의 신체적 조건이 이성의 결여로 해석되거나 남성 지배의 빌미로 이용되지 않고 남성의 신체성이 그러하듯이 정당하게 여성 자신의 사회적 실존의 의미작용으로 환원되는 과정을 추론할 수 있다. 이는 프로이트가 당시에 음성적으로 은밀하지만 기계․생물학적인 의미로 통용되었던 성욕 개념을 해체하고 그것을 주체 형성의 중요한 의미작용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이성중심적인 주체의 개념에 타격을 입혔던 것과 동일한 문맥에 속해 있다. 비교적으로 열등하거나 억압당하거나 혹은 피상적으로 남성에 의해 보호되어야 마땅한 여성의 특이한 성적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데, 가부장적 사회에서 현저한 젠더의 역학관계는 초월적인 본질의 유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실존의 관계적이고 변이적인 의미작용을 통해서 파생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작용은 동시에 신체적 실존의 실천에 의해서 변혁될 수 있는 역동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를로-뽕띠의 이러한 담론들이 남성중심적 역사를 은폐하고 있는 보편 담론과 이성 담론의 형식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그의 이러한 익명적이고 중성적인 글쓰기를 통해서 이성의 결여나 남성성의 부정으로서가 아닌 긍정적 차이로서의 여성성에 대한 타자성 담론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인데, 결국 침묵 속에 남아 있는 그의 신체 현상학의 페미니즘적 함의는 후대의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스트들이나 푸코와 같은 학자들의 ‘말’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계발될 수 있었다.

※ 주요어 : 타자, 페미니즘, 성욕, 무의식, 의식중심주의, 신체적 실존의 의미작용
1. 페미니즘, 타자로서의 운명애

여성들은 역사(문자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역사의 주체로서 역사의 조명을 받은 적이 없는 철저한 ‘타자’로 존재해 왔다. 남성들의 전유물인 언어․담론 체계와 그들의 권력 욕망으로 얼룩진 문명체계 하에서 타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가질 수 없었으며, 가질 수 있었다고 해도, 그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침묵을 벗어나 표현되기는 힘들었다. 승자들의 빛나는 역사의 그림자 속에 타자의 존재와 그 삶의 의미, 고통이 가려지면서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은폐되는 아주 긴 어둠의 역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아마 우리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인간에게 그의 죽음의 가능성이 공포와 불안의 대상이듯이, 데카르트가 그처럼 훌륭하게 코기토의 명증성을 선언한 바대로, 그토록 확실하게 존재하면서 모든 세계의 존재 의미를 껴안고 있는 ‘내’가 어쩌면 어둠 속에 있는 그 아무것도 아닌 타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 고통을 기꺼이 감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타자’들은 그 승자들과 승자들연(然)하는 사람들 속에 어울려 그들과의 동일시의 환상 속에서 자신들을 행복한 역사의 주인공들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은폐의 역사가 공고해져 왔으리라. 타자들이 승자들의 의식적․무의식적 감언이설이나 이데올로기에 속으면서 심지어 보편과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져온 그러한 배제와 무시에 스스로 동참하면서 그 자신의 성(sex)과 개별성의 권리를 망각하면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 역사 속에 참여하는 하나의 주체로서 (보편적인) 인간으로서가 아닌 여성임을 당당히 말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힘겨운 투쟁인가? 페미니즘은 무엇보다 이런 종류의 ‘운명애’로 시작되는 실존의 회복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페미니즘은 여성적인 것은 무엇이든 예속시키고 분리시키고 평가 절하해 온 서구 사상의 여러 가지 기존 방식에 대한 ‘반발’을 통해서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타자들의 목소리, 특히 여성의 목소리가 이러한 남성적 문화 체계와 글쓰기를 교란시키면서 가시적으로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물론 그 담론적 실천이 근래에 들어서야(대략 19세기부터) 비교적 합법적․조직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것을 특정한 역사적 시대의 산물이라거나 일종의 문화적 ‘유행’으로 규정해서는 안되는데, 페미니즘은 긴 암흑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침묵으로 화(化)했던 처절한 실천들을 통해서 서서히 개화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서구의 전체성 담론이 붕괴되면서 그것에 저항하는 차이의 담론이 파생될 수 있는 여건이 성숙되어 있는 현대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역설적이게도 이제 더 이상 ‘타자성’의 담론일 수가 없다. 서구의 근대화 이후, 자본주의와 중간계급의 발달은 교육 기회와 식자층의 확대를 가져왔는데, 교육받은 여성층의 증가는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권리와 목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의 증가를 가져왔고 여성의 사회 참여를 종용하는 역사적 사건들(이를테면 전쟁과 같은)과 사회적 동력들이 맞물리면서 그에 대한 대가로 여성의 참정권이 주어졌던 것이 그러한 개화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2. 반정신분석적 페미니즘의 딜레마 : 보부아르의 이성중심적 실존주의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문자 역사의 시작부터 그렇게 굴절되어 정착되어 왔던― 남성 중심적인 담론 체계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나 글쓰기가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관철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푸코(Michel Foucault)가 이성과 로고스의 역사에서 타자로 배제되어왔던 광기나 성(性)의 ‘역사’를 쓰기를 공언했을 때, 데리다(Jacques Derrida)가 그의 ‘역설적’ 실천에 가했던 의심과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역설과 아이러니가 지배하는 작금의 이른바 ‘포스트-시대’의 하나의 특징적인 경향이 그러하듯이, 어쩌면 페미니스트들은 역사를 부정하는 (여전한) 역사, 이성을 부정하는 (여전한) 이성, 철학을 부정하는 (여전한) 철학, 남성성을 공격하는 (여전한) 남성성이라는 자기모순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페미니즘의 담론적 공간을 만들어내려는 모든 시도들이 “아직 언어가 없는 것을 위한 글쓰기이고 남성적인 상징계 속에서 아직 주변화되고 침묵당하고 억압된 것”을 쓰려는 시도들인 한에서, 데리다와 같은 해체주의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이른바 ‘여성적 글쓰기(écriture féminine)’란 것은 (남성적) 글쓰기 체계의 틈을 노리는 전복적․해체적 충동을 통해서, 그리고 그렇게 장난스럽고 전략적이고 잠정적인 방식을 통해서―즉 체계화되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정신분석학은 체계화될 수 없는 것을 체계화하려는 역설적 시도의 전형이다. 20세기와 더불어 등장하기 시작한 정신분석학적 운동은 근대를 광범위하게 지배했던 기계주의적 생물학과 그것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주지주의(의식 철학)의 한계를 꼬집으면서 이전의 지식체계가 접근할 수 없었던 타자성의 영역을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자기의 대상영역으로 삼았으며, 이는 사회 문화적으로 이례적인 파란을 일으켰다. 프로이트(S. Freud)는 ―우리가 역사의 타자라고 부르는―(주로) 부르주아 여성들의 심리의 임상적 관찰들을 통해서 ‘무의식(unconscious)’이라는 미지의 영역, 즉 합리적인 의식이 손을 쓸 수 없었던 의식의 경계를 가정함으로써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이성의 어둠 속에 묻혀있던 비의적(秘意的)이고 모호한 또 하나의 세계에 이성의 빛을 비추는, 소위 과학적인 접근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가 병자들이나 여자들―사회적으로 거의 같은 존재 계층에 속해 있는―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가 지향했던 것은 병적이고 결점 많은 여성적인 비정상의 세계를 건강한 ‘남성적’ 세계로 끌어올리는 치료의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아마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인 프로이트가 피하기 힘들었던 한계였던 셈이다.
바로 이러한 모순 때문에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그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했는데, 특히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auvoir)는 자신의 논리 안에 그것을 끌어들이기를 거부했던 페미니스트로서 유명하다. ?제2의 성?에서 그녀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자신이 스스로를 남성에 비해서 부정적이고 결핍적으로 인식하도록 길들여지는 일종의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구성 기제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그녀는 역사적으로 여성이 어떻게 억압을 받아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신화나 문학 작품들을 통해서 어떻게 재생산되고 이데올로기화되는지를 살펴본 후, 이처럼 길들여지는 여성의 숙명적 삶을 자신의 체험에 근거해서 유년기로부터 노년기까지 섬세하게 재구성해 놓음으로써 많은 여성들의 분노에 찬 공감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녀는 여성으로 하여금 여성성(femininity)과 관련되는 수많은 굴절된 담론들과 제도들에 맞서 분연히 떨쳐 일어나 자신을 남성과 동등한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당당히 세우고 실천하도록 고무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해방의 힘은 그녀의 지적 동반자였던 싸르트르(J. P. Sartre)가 말했던 것과 같은 ‘실존주의적인 자유의지’를 통해서 여성이 여성 자신의 자율적인 삶을 선택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명한 자유 의지는 프로이트의 ‘남성적인’ 성욕에 근거해 있는 모호하고 상상적인 무의식 따위가 끼어 들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의 책은 여성의 부당한 위상을 깨닫게 만들고 그렇게 거듭난 자유로운 ‘의식’에 의해서 여성의 타자성이 남성이 누려온 것과 동일한 온전한 하나의 주체성으로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설파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삶마저도 그러한 믿음을 급진적인 방식으로 실천한 것이었다.
특히 그녀가 분통을 참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민족성, 정치성, 종교성과 같은 다른 사회적인 특질들은 단순하게 직접적으로 사람들의 생물학적 차이들로 환원되거나 소급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여성의 사회적 정체성만은 여성의 생물학적인 조건과 직결되어 형성되고 논의되고 조직․관리된다는 점에 있었다. 실제적으로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막고 여성을 열등한 위치로 떨어뜨리는 요인은 여성의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문화․제도적 담론의 기저를 담당하는 여성성의 신화들은 여성의 난소와 자궁과 같은 생물학적 조건들을 부각시킴으로써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여성의 부당한 현 위치를 정당화하고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한편으로 이런 신화에 맞서서 ‘과학적’으로는 여성의 생물학적 조건이 현대 여성의 열등한 사회․경제적 조건과 필연적인 관계가 없음을 성토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토록 여성의 자율성을 해치고 여성에게 불이익을 가져다 주는 여성의 생물학적 조건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래서 그것들을 (거부함으로써) 뛰어넘기를 종용하는 이율배반적인 태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는 여성의 임신과 출산이라는 사회적 제약들을 합법화시키는 기존의 결혼제도를 비웃으면서 과감히 실험적인 계약 결혼을 감행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결국 그녀의 선정적이고 능동적인 투쟁이 항간에 센세이셔널한 영향을 일으키고 페미니즘 운동에 활력을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페미니즘의 논리 내적인 측면은 모순에 가득찬 것이었다. 그녀는 여성이라는 실존적 자각에서 자신의 페미니즘 논의를 시작했지만, 전통적인 여성성이라는 실존적 굴레를 벗어 던지고 남성처럼 살아가기를 제안함으로써 사회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도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를 무시했으며 그러한 차이에 근거하는 여성의 실존적 지각, 즉 인간의 개체성 자각 자체를 무화시켰기 때문이다.
여성은 자신의 신체, 즉 남성과의 신체적 차이를 통해서 최초로 자신이 여성이란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는 인간이 아무리 이성적이고 의지적임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신이 아닌 이상) 그 자신의 몸을 통해서만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근원적 사실이다. 우리가 신체를 통해서 세계와의 관련 속에 있다는 것이 바로 실존주의의 중심 개념인 세계-내-존재의 진의가 아니던가? 그러므로 여성은 자신의 신체적 조건이 여성의 억압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안타깝게도 보부아르는 여성의 신체를 악의 근원으로 보았던 전통적인 성(性의) 신화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공고히 하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즉 싸르트르가 견지하고 있었던 데카르트적인 실존주의의 노선, 즉 신체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지키면서 신체를 배제하는 사상에 동조함으로써 이성 담론, 남성적 담론에 희생되고 만 것이다. 결국 그녀는 역설적이게도 남성은 보편적인 인간이고 여성은 비정상적인 타자라는(가부장제가 구축하고 옹호하는) 전통적인 편견을 존속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걸려 넘어진 이러한 딜레마는 일반적인 페미니즘 운동에서도 ‘본질주의(essentialism)’와 관련되어 골칫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페미니즘 이론에서 이 용어는 한편으로는 생물학적인 또는 심리적인 결정론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주관성의 구조 내에서 발생하는 역사적 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보부아르를 포함한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 운동의 동기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는 여성에 대한 본질주의적 입장을 거부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문제는 페미니즘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어의 타락의 한 측면으로서, 페미니즘의 반본질주의에 ‘본질주의’가 역설적으로 접합된다는 데 있다. 즉 보부아르는 의지력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른바 여성의 생물학적 본질을 비본질화시키는 작업을 수행했지만, 어떤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부정하고자 하는 것을 가정함으로써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는 모순을 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역설적 회귀 속에서 우선적으로 논의의 도전자인 타자(여성)가 배제되는 결과가 초래되고 말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이론 내적인 일관성을 떠나서 페미니즘과 같이 현실적인 사회 운동을 목적으로 할 경우, 그 실천의 지향성을 이끌어내는데 있어서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본질/반본질이라는 진부한 이분법적 논쟁을 넘어서서, 이른바 본질주의의 긍정적인 의미로서 페미니스트 운동가들이 지향해야 하는 ―부정에 의해서 남성성으로 회귀되지 않는 긍정적인 차이로서―해방적인 진정한 여성성(femininity)이 정립되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성성이 여성의 신체를 떠나서 논의될 수 없는 한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중요하게 다루어야만 하는 참조틀이 바로 정신분석학일 것이다. 보부아르는 정신분석학이 생물학적․해부학적 결정론에서 기인된 남성성의 결핍과 평가절하로서 여성의 본질을 정의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거부했지만, 그녀가 무시하고 넘어갔던 그것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남성의 신체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결코 여성의 신체를 배제하지 않은 채로, 신체성 일반을 논의의 출발점에 놓는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물론 그녀의 말대로 프로이트의 팰러스(phallus) 중심주의는 결핍으로서의 본질주의적 여성관을 공고히 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적 운동은 프로이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비판적 계승자들과 페미니스트들에 의해서 여러 가지 변형과 수정의 역사를 겪고 있다. 실제로 페미니즘 내의 정신분석학의 도입은 이분법적 딜레마에 빠진 논의에 ―직․간접적으로― 탄력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3. 성욕의 신체 현상학적 독해 : 신체적 실존의 의미작용

정신분석학에서의 신체를 논의의 전면에 놓고 시작하기. 이는 정신이나 의식에 비해 그 동안 평가 절하되고 무시되어왔던 신체에 대한 논의를 새롭게 부각시키는 현대 철학의 이슈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보부아르가 여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남성의 이데올로기에 기여하게 된 이유는 그녀가 싸르트르와 함께 서구 사상의 승자로 군림해왔던 데카르트적인 이성․의식 중심주의의 옹호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싸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친구였던 메를로-뽕띠(Maurice Merleau- Ponty)는 초기에 그들의 실존주의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지적 동반자였지만, 중기 이후 서로 섬세하게 갈라지는 철학적 입장들의 차이 때문에 이러한 동맹 관계는 깨지고 말았다. 무엇보다 메를로-뽕띠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현상학자이자 실존주의자로 불리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이 아닌 신체를 논의의 전면에 내세우고 끝까지 이 신체성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인물로 부각될 수 있다. 사회적인 젠더로서의 여성성의 규정에 대한 논의가 생물학적인 신체 부위와 기능에 환원됨으로써 페미니즘의 생산적인 귀결을 방해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기존의 기계적이고 기능주의적인 신체 개념을 쇄신하는 새로운 신체 개념을 정립해야할 필요가 절실했다. 그리고 그가 바로 이러한 철학적 토대 작업을 해냈던 것이다. 더욱이 그의 작업은 당대 열풍처럼 강타했던 정신분석학적 운동을 침묵으로 무시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작업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철학적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반정신분석적 페미니즘의 경직성을 보완하는 동기를 제공한다.
그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주로 다루고 있는 곳은 그의 역저, ?지각의 현상학?에서이다. ?지각의 현상학?의 저술 동기는 당대 생리학과 심리학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있는 경험주의와 주지주의의 철학적 토대를 해체하고 그것들을 현상학적으로 재구축하는데 있었다. 경험주의는 자극을 수용하고 반응을 주재하는 최소한의 ‘빈곤한’ 주체의 역할을 가정하는 한편, 주지주의는 이러한 기계적인 과정에서 생성된 파편적인 감각 자료들을 불러내고 규합하여 연결짓는 상부의 ‘풍요로운’ 주체를 가정하고 있다. 이 주체들이 상이한 범주 속에서 논의되고 있다하더라도 그것들이 조건화된 반사법칙과 같은 결정된 심적 조건들이나 연상․표상작용과 같은 사유 법칙들을 만족시키면서 철학적으로 합리적이고 투명한 ‘의식’을 옹호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통적이다. 이 과정에서 주체에서 의식과 함께 온당하게 주인공의 위치에 있어야 할 신체는 의식의 수동적인 대상으로 취해지고 의식의 명증적인 작용으로 설명될 수 없는 수많은 신체적 작용들은 의식의 결여로 평가절하 됨으로써 논의에서 배제되었다. 이와 상관적으로 자연 세계와 인간사에는 현 과학법칙과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하고 애매한 것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생리․심리학적인 결정론적 법칙들과, 그것에서 기인된 논리적 결과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지원하는 순환적 토대로서의 데카르트적 의식의 신화는 그 자신의 확고한 시스템과 부합될 수 없는 세상의 수많은 예외적 현상들을 결핍적이거나 비정상적인 것으로 낙인찍어 버리고 배제시키기 일쑤이다. 이를테면 여성적인 것이야말로 바로 그런 측면에서 전형적으로 타자성에 속해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메를로-뽕띠의 전통적인 의식 철학에 대한 해체 전략은 기존 생리․심리학의 경계에 흩어져 있는 타자들, 특히 병적인 것이나 비정상적인 사례들을 주목하고 그것들을 편의적으로 의식작용의 고장이나 결핍으로 치부하기보다는 자신의 현상학을 통해서 성실하고 공정하게(부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설명해내는데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러한 타자들의 연구가 그들의 신체성에 대한 정직한 몰두를 통해서만 가능하리라는 것을 알았고, 더욱이 그렇게 얻어진 신체성의 통찰은 이른바 이성적이고 정상적 주체의 경험을 경험주의․주지주의 이론보다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메를로-뽕띠의 문제 인식은 그대로 프로이트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우리가 양자를 동일 평면에서 놓고 볼 때, 그의 해체적 전략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방법에 의해서 체계화되고 제도화되는 양상을 띠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프로이트는 기존의 생물학이나 심리학과 독립된 하나의 고유한 장르로서 ‘정신분석학’을 새롭게 설정했는데, 이를 통해 그는 그것의 학적 대상으로 의식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인 ‘무의식’을 가정하고 병을 유발하는 작동인으로 생물학적인 본능(instinct)과 구별되는 리비도(libido) 혹은 성욕(sexualité)을 가정함으로써 미지의 정신 병리학적 사례들을 유효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가설적 존재들은 전통적인 정신-육체의 이원론을 와해시키는 애매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속에서 다루어지는 성화된(性化) 신체는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생물학적 육체 개념을 넘어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확장된 개념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메를로-뽕띠가 특별히 그것을 성욕과 연관짓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신체성 개념이 프로이트의 그것처럼 주체의 사회적 형성과 동시에 주체를 둘러싸는 세계의 형성에 근원적인 역할을 하게 됨은 주지의 사실인데, 그것이 ?지각의 현상학?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신체-주체의 현상학의 핵심적인 사안이었던 것이다. 양자는 생물학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서 신체를 의미와 기능 면에서 변형 가능하고 재의미화 될 수 있는 사회적 존재로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처럼 메를로-뽕띠는 자신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틀로 구성된 프로이트의 이론이 한편으로는 자신의 신체 현상학의 기획 의도와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지각의 현상학?에서 그는 지각에 대한 신체 현상학적 구성을 마친 후에, 연상이나 조건적 반사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동성(affectivité) 문제를 다루기 위해 구체적으로 프로이트의 방법을 조회하고 해석하였는데, 그가 프로이트 이론을 취하는 태도는 대체로 우호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그 책 전체를 통해서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의 산물들인 주체와 타자, 정상과 비정상, 정상과 병자의 경계를 교란시키기 위해서 빈번하게 끌어들이고 있는 사례는 심맹 환자들(Les cécités psychiques)이다. 그들은 전쟁으로 소뇌의 손상을 입어서 행동, 언어 장애를 겪고 있는 환자들인데, 그는 특히 거기서 그들이 ‘은밀한 지각’인 성욕을 느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그가 볼 때, 그들의 소뇌 손상이 성욕을 상실케한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해명도 줄 수 없는데, 이는 그들의 병에 상응하는 생리․해부학적인 조건을 반복적으로 지적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경험주의 진영의 이런 순환론을 보충하는 주지주의의 해결은 소뇌의 손상을 곧바로 이성적인 사유 작용의 상실로 연관시키는 것인데, 이를테면 그들은 성 충동을 일으키는 은밀한(?) 표상작용을 결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메를로-뽕띠는 성욕을 생물학적 조건이나 해부학적인 특정 신체 부위에 환원시키는 입장이나 의식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특이한 사유 작용으로 간주하는 입장을 단호히 거절한다. 이는 프로이트의 경우에도 확고한 사실인데, “우리로서는 뇌의 어떤 특정한 부분을, 예를 들면 언어 중추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성 기능을 위해 따로 떼어놓았다고 가정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고 못박고 있으며, 성욕을 일으키는 에너지로서 가정된 리비도는 “정신과 신체의 경계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그것의
활동무대는 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무의식’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메를로-뽕띠의 편에 서서 성욕을 의식의 열등하고 모호한 표상작용으로 환원시키길 고집하는 주지주의자들에 대항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위의 주장을 ‘의식’이란 단어의 오용에서 비롯된 근거 없는 가정이라고 감히 반박하고 싶다. 우리에게는 의식의 주체 자신이 인식도 못하는 것까지 의식에 포함시키는 정도로 그 의식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확대시킬 권한이 없다. 만일 철학자들이 무의식적 사고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면 나로서는 무의식적 의식의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는 일로 보이기 때문이다.

메를로-뽕띠는 심맹 환자의 ‘불능’을 신체의 지향성(intentionalité)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는 후설이 말하는 ‘의식의 지향성’과 동일한 맥락에 있으면서도 그처럼 데카르트적인 열망에 빠져 있기를 거부하는 하나의 구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칭적인 의식 이전의 익명적이고 전의식적인 ‘신체의 자기 밖으로 향하는 힘’―불어로 ‘On peut’로 표현할 수 있는―으로서, ?지각의 현상학?을 통해서 주로 심리학적 개념인 ‘고유운동성(motricité)’이나 ‘신체도식(le schéma corporel)’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볼 때, 심맹 환자가 정상인에 비해 어눌한 행동이나 말에 그치게 되는 이유를 주지주의자들의 안이한 해결처럼 의식의 결여로 치부함으로써 회피해서는 안되는데, 그것은 신체적 지향성에 의해서 충분히 해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체 지향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근거는 철학의 순수한 테두리를 넘어서 당시에 정점에 달했던 심리학이나 생리학적 연구 성과들을 자신의 현상학적 작업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과학적으로 지원 받을 수 있었다. 결국 신체 지향성이란 병자만이 아니라 정상인의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것이다. 즉 정상인의 성욕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의식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신체적 지향이라는 것이다. 의식이 아닌 신체 지향이 근원적인 것으로 거론됨으로써 정상인과 병자의 ‘근원적’ 차이가 무너지고 그 경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체적 지향을 결한 것이 아닌데도 왜 심맹 환자는 성욕을 가지지 못하는가?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신체 지향의 변이로서 ‘지향적 호(arc)’라는 용어를 끌어들이고 있는데, 그것은 신체 지향이 신체 바깥을 나갔다가 부메랑처럼 호를 그리면서 돌아온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 정상인의 인칭적이고 의식적인 행위나 말, 그리고 성욕은 이러한 회귀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심맹 환자는 근원적인 어떤 것(의식)을 결핍한 것이 아니라 그저 신체 지향의 변이를 유발하는 신체 지향의 이러한 ‘차이’ 때문에 열등한 것으로 비춰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메를로-뽕띠는 정상인과 병자, 의식과 육체의 ‘본질적’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우리 실존의 구조가 의식이 아닌 신체의 의미작용 속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신체적인 것(또는 무의식)에 속해 있는 프로이트의 성욕 개념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가 동시에 노리고 있었던 것은 ‘성욕 개념의 해체’이다. 즉 성욕의 본질은 성적 기능을 관장하는 어떤 고유한 특질을 가진 에너지나 그것의 자율적인 순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고 행동할 수 있게 만드는 내적 의미작용의 힘에 있다는 사실을 적시해야 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프로이트가 자신의 정신분석학에서 성욕을 가정하게 되었던 것은 “주체를 구성하고” “타자를 호흡하는 하나의 방식”을 의미하는 일종의 “특권화 된 기호”, 즉 “감각적 소여들의 배치의 형식적 구조를 이루는데 중요하게 역할하는 의미작용적 요소”로서 였을 뿐이다.

프로이트 자신에게서 성적인 것(le sexuel)은 생식적인 것(le génital)이 아니며, 성적 생활은 생식 기관들이 자리를 잡는 과정들의 단순한 효과가 아니다. 리비도는 본능(instinct)이 아닌데, 말하자면 결정된 목적을 향해 자연적으로 향해진 능동성이 아니다. 리비도란 상이한 환경에 부착되어 있는, 상이한 경험들에 의해 고정되고 행동의 구조들을 획득하게 되는 정신물리학적 주체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능력이다. 그것은 한 사람이 한 역사를 가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한 사람의 성적 역사는 그의 삶의 실마리를 주는데, 그것은 사람의 성욕 속에서 세계에 관한, 말하자면 시간에 관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관한 존재 방식이 기투되기(se projette)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성욕을 신체적 실존의 의미작용으로 해소시켜버리는 그의 해석이 프로이트의 진의에 얼마나 부합되는가? 우선 프로이트는 근본적 개념을 가정하고 논의를 시작하는 ‘과학적인’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에, 리비도의 개념은 처음에 정신분석학적인 고유 개념, 즉 성적인 과정에서 발산되는 특정 양의 정신적 에너지로 정의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이 진행되면서 그것의 물리적 뉘앙스는 점점 소거되고 이른바 신체적 힘의 심리적 대표자와 같은 상징적인 위치에 처하게 된다. 한편으로 프로이트는 성욕이 “소위 성적인 부분에서만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체 부분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신체성이란 프로이트가 자신의 이론을 이끌어내는데 큰 도움을 받았던 정신병리학적 사례들, 즉 꿈이나 히스테리 연구, 신경증 분석과 같이 투명하고 합리적인 의식의 전횡이 용인될 수 없는 의미의 왜곡, 애매성, 다의성이 배태될 수 있는 의미작용의 토대를 이르는 것이다. 그 동안 명증성을 추구하는 학문적 논의의 경계와 틈에서 힘들게 살고 있었던 침묵하는 낯선 의미 영역의 두께들 말이다. 이처럼 병적으로 기생하는 음지의 의미작용―전통적인 의미 작용의 법칙, 즉 논리적인 사유 작용에 의해서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배제된, 그래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욕 개념이 요구되는―을 체계화하기 위해서 프로이트는 억압이론과 무의식을 고안했는데, 대체적으로 이는 무의식이 억압에 의해 엉뚱한 의미작용(표상)을 내보내거나 변형되고 왜곡된 의미작용을 내보내게(의식화) 되는 과정을 기술한다. 그에 따르면 무의식의 (명증적) 의식화는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과제인데, 무의식의 가정 자체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다만 무의식은 불완전하고 애매하고 다의적이고 비결정적인 방식으로 ‘어느 정도’ 의식으로 전환될 수 있는데, 그는 정신분석 작업을 통해서 환자들이 그런(불완전한) 방식으로 자신의 실존의 의미작용을 깨닫게 도와줌으로써 병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프로이트와 메를로-뽕띠는 바로 이처럼 낯선 타자들에 대한 ‘겸손한’ 인식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 노선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실존의 의미작용은 메를로-뽕띠의 말대로 신체적인 두께를 입고 있으며, 그것은 프로이트가 잘 말해주고 있듯이, 무의식의 표상화 과정처럼 명증적이기는 커녕 애매하고 다의적인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주지주의자들의 믿음을 벗어나 수수께끼나 숨은 그림 찾기, 일종의 암시증처럼 모순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메를로-뽕띠가 볼 때, 정신분석학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삶이 성욕에 의존하는가 아닌가 하는 점을 아는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람들이 성욕을 통해 이해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성욕과 신체성을 세계-내-존재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면, 리비도를 남성적인 성욕으로 규정한 그의 언급을 빌미로 그의 이론 전체를 남성의 성적 경험을 구조화하는 남성 중심적인 이데올로기로 치부하고 배척하는 태도를 완화시킬 수 있다. 프로이트가 여성의 세계-내-존재의 의미를 결핍적인 여성의 신체성을 통해서 설명해내는 우를 범하고 있긴 하지만, 그는 원론적으로 여성의 신체성이 여성의 세계-내-존재의 의미에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전제 하에서 결핍적이지 않은 정당한 여성의 신체성과 그것을 통한 여성의 실존적 의미작용에 대한 현상학적인 해명을 이끌어낼 수 있다. 물론 이는 프로이트가 넘지 못했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벽을 메를로-뽕띠가 쉽게 타파했다는 의미는 아니며,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도 일반성과 보편성의 담론 속에 페미니즘적인 파생적 함의를 침묵으로 묻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반 담론 속에서 그는 프로이트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던 것, 즉 모든 것을 무분별하게 성적인 것으로 설명하려 한다는, ‘정신분석의 범성욕주의’의 비난을 무효화시키면서, 정신분석학의 의미를 신체 현상학적으로 재정립했다. 즉, 정신분석학은 우리 실존을 “순수하게 신체적인 운동이라고 믿었던 기능들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며 인간 존재에로 성욕을 다시 통합하는 것이다.”
4. 신체와 여성성 : 신체 현상학과 페미니즘 정치학의 ‘사이’

이제 우리는 메를로-뽕띠의 보편 담론을 관통하면서 일반적인 신체성의 논의를 여성의 신체성에 대한 논의로 구체화시키고 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이 자신의 신체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한에서, 여성의 실존적 의미 작용은 여성의 신체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신체적 상황성은 보부아르가 그렇게 확실히 단언하고 있는 것처럼 의지적 행위를 통해서 의식적으로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단순하게 ‘의식에 의해서’ 우리가 ‘난소와 자궁을 가지고 있는’ 여성임을 거부하고 ‘팰러스를 가진’ 남성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한 사회의 ‘구조’(세계-내-존재)는 한 개인의 ‘의지’에 의해서 그의 신체적 숙명이 좌지우지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말랑말랑하지 않다. 메를로-뽕띠가 의식의 전횡을 거부하고 신체를 내세웠던 이유는 이러한 천진한 믿음의 위험성을 타이르면서 실존의 변화는 (전적으로 의식적일 수 없기 때문에 신체적인) 개인과 (전적으로 의식적일 수 없기 때문에 신체적인) 사회 상호간의 긴요한 얽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얽힘은 어쩌면 개인과 사회의 의도를 벗어나서 우연적이고 애매하고 다의적인 결과를 산출할 수도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또한’ 상이한 의미층들의 두께를 입은 신체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신체에 대한 사려 깊은 고려는 의식의 신화에 경고를 보내면서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주체의 실천에 찬물을 껴안고 죽음을 선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즉 한편으로 그의 신체 현상학은 여성의 신체적 실존의 구조가 쉽게―개인의 의지나 실천에 의해서― 변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심지어 여성의 신체성을 통해 현재의 억압적인 실존의 견고한 구조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명시적인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남성으로서 페미니스트가 되기를 선택한 사람이 몇이나 되며, 과연 남성이 진정한(신체 현상학적) 의미에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기라도 한가?―. 여성 문제에 대한 그의 침묵, 혹은 중성적이고 익명적인 태도나 글쓰기는 그의 신체 현상학을 또 하나의 남성중심의 로고스로 해석하게 만드는 여지를 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 때문에 그는 프로이트나 라깡처럼 명시적으로 여성 문제를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팰러스 중심주의자란 오명을 듣는 위험을 피할 수 있었으리라. 사실, 이는 그가 철학의 본질로 생각하면서 각오했던 철학의 아이러니일 뿐이다. 그가 애매하고 이중적인 의미들을 부추기는 철학을 하면서, 철학자로서의 자신을 현실에 침묵으로 시위하고 자신의 이론을 통해서 현실에 양다리 걸치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러니스트로 지향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철학의 가장 큰 매력이요 장점이기도 하다.
이론은 도구상자처럼 이용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파롤의 이중성을 빌미로 그의 침묵을 그의 신체적 실천과 역행하는 쪽으로 호도해서는 안된다. 즉 필자는 그의 신체 현상학이 남성 중심론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오용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히 메를로-뽕띠의 진의가 아니었다고 확신한다. ?지각의 현상학?을 비롯한 그의 저서 전체를 통해서 전통적 담론에서 배제되어 있었던 타자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논의를 시작했던 ‘그의 신체적 실존’이 그런 폭력적인 패권주의에 동조하는 것이었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프로이트를 현상학적으로 다시 읽으면서 그의 성욕 이론의 남성중심주의를 인지하고 명시적으로 그것을 거부했다. 그는 정신분석을 페미니즘에 맞게 각색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그것의 남성중심주의를 해체시키고 상위의 보편 담론으로 승화시켰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침묵으로 인해 그의 신체 현상학의 페미니즘적 함의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성욕의 생물학적 본질을 해체함으로써 이 성욕에 근거했던 남성성과 여성성의 본질적인 생물학적 차이를 무화시키고, 그것들을 사회적이고 실존적인 차이들로 해체시켜버림으로써 페미니즘 운동의 발목을 잡는 본질주의 논쟁을 중지시킬 수 있다. 상대적으로 열등하거나 억압당하거나 보호받아 마땅한 여성의 특이한 성적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데, 가부장 사회에서 현저한 젠더의 역학관계는 초월적인 본질의 유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실존의 관계적이고 변이적인 의미작용을 통해서 파생되는 것이다. 그의 침묵의 소리를 경청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의미작용의 변이 과정을 ‘과학적으로’ 추적함으로써 신체라는 선험적인 공통 지반 위에서 권력적인 폭력으로 얼룩지어지지 않은 의미작용의 ‘차이’를 기쁘게 견디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적 긴장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이처럼 ‘본질적 차이’를 ‘변이적 차이’로 수정함으로써 여성의 사회적․실존적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신체의 의미작용과 실존적 상황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광범위한 페미니즘적 실천을 추동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여성들의 신체적 실존과 그것을 반성하는 반성적 실존은 견고하게 재생산되는 것처럼 보이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틈을 서서히 벌려놓을 수 있는데, 그처럼 비천해 보이는 틈과 침묵의 의미작용이 마침내 그것을 정의롭고 해방적인 세계-내-존재의 구조로 재편시킬 수 있는 역동적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남성 중심적 구조의 경직성을 옹호하는 듯이 보였던 신체성의 함의는 동시에 그처럼 혁명적이고 변환적인 실천을 선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러한 실천은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느리고 지난하며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진행될 수도 있는 힘겨운 것인데, 그것이 또한 여성이 처한 신체적 현실인 것이다.
특히 그의 신체 현상학은 이전의 데카르트적인 천진하고 낙관적인 주체가 아닌 분열적이고 생성적인 주체―이를테면 포스트-구조주의적인―의 형성을 요청하는데, 그것은 파롤과 신체의 틈이 암시하는 풍부한 ‘사이’ 의미들을 읽어내고 실천함으로써 ‘거듭나는 주체’이다. 보부아르의 경우에서 보듯이, 의식적 주체의 담론 속에서 딜레마에 빠진 페미니즘 운동은 이와 같은 실천적이고 역동적인 새로운 여성 주체를 정립함으로써 그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 이는 기존의 억압적인 여성성 이데올로기에 머무르지 않으면서도 역설적으로 남성 담론에 회귀되지 않는 새로운 여성 주체의 정립을 의미한다. 메를로-뽕띠가 암시해놓은 이런 길은 후대의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스트들에 의해서 생산적으로 실천되는데, 특히 루스 이리가레이(Luce Irigaray)의 ‘차이의 페미니즘’은 정신분석학의 팰러스 중심주의적 편견을 공격하고 여성에게 적절한 정신분석 모델을 이론화하는 작업을 모색하면서, 남성성과 다른 여성의 주체성의 정립을 요청하고 이러한 차이들이 평등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회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후대의 페미니즘에 활력을 주고 큰 반향을 일으켰던 메를로-뽕띠의 신체 현상학의 함의는 다른 데 있었다. 그는 신체와 사회적 실존의 긴밀한 상관(얽힘) 관계를 드러냄으로써, 거꾸로 여성의 현재의 억압적인 실존 구조가 어떻게 여성의 신체에 각인되어 왔는지를 역사적으로 역추적 해 낼 수 있는 철학적 근거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현실화시키지 않았던 이러한 시도는 푸코에 의해서―물론 그도 여성의 억압과 실존을 구체적으로 문제삼지는 않았지만―이론적으로(계보학을 통해서) 실천되었는데, 이것이 페미니스트들에 의해서 그들의 논의 안에 끌어들여지고 적용되면서 페미니즘에 생산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메를로-뽕띠의 신체 현상학이 암시하고 개화시켰던 이와 같은 본격적이고 실천 이론적인 페미니즘 논의들, 즉 정신분석적 페미니즘과 푸코의 페미니즘은 다음 기회를 통해 다루어질 것이다.






참 고 문 헌

Simone de Bauvoir, Le Deuxième sexe(1949), ?제2의 성?, 조홍식 역, 을유문화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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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i L. Thurer, The Myths of Motherhood : how culture reinvents the good mother, Houghton Mifflin Company, 1994, ?어머니의 신화?, 박미경 역, 까치, 1995.
프로이트,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 김정일 역, 열린책들,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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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정, ?메를로-뽕띠의 애매성의 철학 : 그의 키아즘적 사유 연구?, 고려대학교 철학과 박사논문, 2000. 6.
Résumé

Le Corps Comme Être Sexué
―Lire Freud par Merleau-Ponty et le Féminisme―

- Jang, Moon-Jeong -

Cet essai traite la interprétation phénoménologique du corps par Merleau-Ponty de la sexuallité qui fonctionne comme le concept principal dans la psychanalyse de Freud. Malgré les dogmes de Freud sont les discours universels et phalluscentriques, ils a converté le mouvement feministe en éclaircirant ses implicationes feministes par ses héritières. Pareilment, quoique la philosophie de Merleau-Ponty se fait en forme du dicours universel logocentirque et se tait les sugets feministes, son concept de corporéité fonctionne le problematique qui occasionne à rétablir les droits de la feminité comme autrui qui est prit comme le manque du raison dans la borne des discours dominants. Surtout, ce corporéité se doit introduire en feminisme à cause du dilemme du feminisme existentiel de Bauvoir. Quoique elle se a mis en colère à réduire gender social de la femme à sa condition biologique et a insisté à surmonter ce refoulement et changer la altérité de la femme pour le sujetivité libre comme l'homme, elle a fait une faute de négliger et sousestimer sa condition corporelle qui a dû occuper le noyau dans le problème de la féminité. Donc, la transcendence du corps par Merleau-Ponty fait tourner le corps de la femme à sa signification existentielle sociale. C'est à le même contexte que Freud a déconstruit le concept de la sexualité qui en a circulé secret et mechanique-biologique et le a réduit à ma signification principale de la formation du sujet, alors il a attaqué le concept du sujet logocentrique. En conclusion, la nature sexué de la femme qui est inférière, se devoit refouler, et protéger par les hommes n'existe pas. La partialité du sexe ne vient pas de oui ou non de l'essence transcendente mais de la dérivation des significationes relatives et variées de l'existence corporelle. Donc, ces sinificationes ne sont pas déterminées, que se peuvent reformer par l'exercice de l'existence corporelle. Pourtant, ce ne se doit pas passer que les discours de Merleau-Ponty se ont constitué en forme des discours universelles et logocentriques. On le soupçonne de pouvoire réaliser le discours de la féminité comme la différence positive avec sa écriture anonyme. Anfin, les implicationes feministes de la phénoménologie du corps par Merleau-Ponty qui sont silencieuses se peuvent développer d'une manière concrète par les feministes psychanalytiques et Foucault etc.

※ Mots-clés : L'Autre, feminisme, sexualité, inconscient, logocentrisme, signification existentiale du corps

[출처] 성적 존재로서의 신체-장문정|작성자 동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