휄덜린과 헤겔의 통일의 철학
휄덜린과 헤겔의 통일의 철학
한국외국어 대학교 인문학 연구
1. 휄덜린과 통일의 철학
1-1. 셸링의 자아원리와 휄덜린의 통일의 철학
예나 시기 이전까지의 헤겔의 사상발전은 대개 그의 친구들, 무엇보다 휄덜린과 셸링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또한 휄덜린은 쉴러와 연결되고 셸링은 피히테와 연결된다. 그리고 셸링과 휄덜린 모두 신(新)스피노자주의 즉 야코비가 해석한 스피노자를 바탕으로 그들 자신의 사상을 전개했다. 셸링은 그의 저서 자아원리가 출판되기 조금전 헤겔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스피노자주의자가 되었다. 놀라지 마라 라고 썼다. 다시 말하면 그는 피히테류의 자아의 철학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스피노자주의자라고 선언했다.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과 피히테의 철학사이에 어떤 친화력이 있음을 짐작케한다. 일단 생각될 수 있는 두 체계의 공통성은 그들이 모두 일원론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실체의 일원론, 피히테=주체의 일원론. 아닌게 아니라 피히테는 그의 지식학의 기초 에서 여러 번 스피노자를 언급하고 있으며 후자의 윤리학 을 자기 철학체계 구축을 위한 모델로 삼고 있다. 이런 배경에는 역시 야코비의 스피노자연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야코비의 해석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체계는 신(神)개념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또 증명하는 철학인데, 이는 필히 무신론과 숙명론으로 귀착한다고 한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체계는 그러한 합리주의적 신학가운데서는 가장 정교하고 치밀한 이론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반박할 수 없다고 한다: 스피노자의 체계는 이론적으로 결코 극복되어질 수 없다. 따라서 야코비에 의하면 스피노자의 체계는 그런 철학이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완성을 뜻한다.
그의 지식학의 기초 에서 피히테는 스피노자에 대해서 야코비와 유사한 견해를 표출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실체의 철학인데 이는 숙명론이다.
셸링은 1795년 초 헤겔에게 쓴 편지에서 자기가 현재 스피노자 방식의 윤리학을 구상하고 있으며 이는 철학의 최고 원리와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들 양자의 생각은 스피노자의 체계에서 실체개념을 비판하고 그 대신 주체 또는 자아개념을 투입함으로써 숙명론을 극복하고 도리어 인간의 자유를 철학적으로 정초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죽은 실체개념을 중심으로 체계를 구축했다면 이들 (독일) 이상주의자들은 살아있는 주체개념으로 자유의 체계를 완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야코비, 피히테, 셸링 그리고 나중의 헤겔 등에 의한 스피노자 이해에는 칸트 철학적인 이원론 곧 자연과 자유의 이원론이 그 밑에 깔려있다. 칸트의 자연개념은 주지하다시피 필연적 인과율을 전제한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실체일원론철학에는 자유의 가능성이 용인될 수 없다: 모든 존재자는 오직 필연적인 인과율에 따라 생성 소멸한다. 따라서 칸트의 후예들이 스피노자의 체계를 인간에게 자유를 부정하는 숙명론으로 간주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와 같이 야코비는 비록 칸트철학에 의지하기는 하지만, 스피노자의 사상을 그 핵심에서 그리고 일관성있게 풀이함으로써 당대의 사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특히나 휄덜린, 헤겔 그리고 셸링에게는 그것이 필독서였다.
위의 세 사람의 사상형성 및 상호발전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그 중 나이어린 셸링의 천재성내지 주도권이 인정되어왔다: 왜냐하면 다른 친구들에 앞서서 그는 이른 시기에(1794/5) 벌써 저작들을 출판시켰으며 그 외에도 다수의 논문들을 학술지에 기고하였다. 거기에 비해 헤겔은, 셸링의 야심작 자아원리(1795) 가 나온뒤 6년 후인, 1801년에야 처음으로 자기의 저서 차이논문을 출판시킬 수 있었다. 휄덜린은 1797년 그의 소설작품 휘페리온을 가지고 사회에 진출했다. 특히 셸링-헤겔의 관계는 후자의 예나시절(1801-1807) 전자의 조교로서 그의 지도를 받아 교수자격시험을 치루었기 때문에 셸링의 우월성과 헤겔의 의존성이 자명한 사실로 간주되어왔다.
독일이상주의 철학사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세친구의 영향사적 관계에 있어서 한획을 긋는 연구는 1960년 중반에 나온 헨리히의 횔덜린연구일 것이다. 헨리히(D. Henrich) 는 휄덜린의 미공개 단편 판단과 존재(1795. 4.)의 분석을 통해 헤겔의 프랑크푸르트 시절(1797-1800)에 휄덜린이 그의 통일의철학을 가지고 후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밝혔다.
헨리히 이전에는 뵘(W. Bhm) 캇시러(E. Cassirer) 등이 셸링에 대한 휄덜린의 고유성, 독자성을 주장하고 후자가 전자에게 영향을 미쳐, 전자가 자기철학의 방향을 피히테주의에서 자연철학으로 틀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이렇게 부각된 것은 소위 독일관념론에 있어서 최초의 체계구상 (Das lteste Systemprogramm des deutschen Idealismus) 이라는 짧은 글의 저자문제와 거기 관련된 토론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고찰은 다른 기회로 미루어야 하겠다.
헨리히의 휄덜린 연구 이후 프랑크푸르트 시절 휄덜린과 그의 친구들이 헤겔의 사상변화에 끼친 영향은 기정사실로 되었고 헨리히의 후학들은(콘뒬리스, 얌메, 뒤징등) 모두이런 헤겔에 대한 휄덜린의 탁월성이라는 관점에서 헤겔의 발전을 연구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초기 관념론역사는 대략 다음의 세가지 관점에서 규명되었다.
1) 휄덜린이 셸링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는 뵘과 캇시러의 이론.
2) 셸링이 헤겔과 휄덜린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전통이론.
3) 셸링은 도외시하고, 휄덜린이 헤겔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헨리히 이후의 통설.
그러나 필자는 이런 도식적인 지식의 계보학에 반대하고, 그대신 위의 2)와 3)을 종합하는 다소 복잡한 새 이론을 제기하는 바이다. 그 증명은 뒤에 하기로 하고 연구의 결과만을 우선 요약한다:
ㄱ) 휄덜린은 셸링의 저서 자아원리의 어떤 내용에 반발하여 그의 단편 판단과 존재를 썼다.
ㄴ) 그러나 휄더린은 셸링철학의 접근(Annherung)개념에 근거하여 그의 통일철학의 체계를 스케치한다. 이것은 그의 몇몇 편지와 소설 휘페리온에서 드러난다.
ㄷ) 헨리히와 그를 따르는 연구자들이 전제하는 것처럼 헤겔은 프랑크푸르트에서 휄덜린 및 그의 친구들(싱클레어, 쯔빌링)과의 만남으로부터 사상전환의 일대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헨리히 추종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특히 콘뒬리스 헤겔이 전적으로 휄더린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문제지평은 쉴러휄덜린 의 '통일의 철학'과 피히테초기쉘링 의 주체의 철학의 통일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시기 후반에는 쉘링의 철학변화(자연철학)에따라 이를 다시 통일철학의 지반에서 해석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헨리히는 휄덜린의 판단과 존재의 존재(통일)의 철학에만 너무 치중하여 그후의 발전을 등한시한다. 휄덜린에 있어서 통일철학의 발전사는 이렇다: 판단과 존재(1795. 4) 쉴러에게 보내는 서한(1795. 9) 소설 휘페리온을 위한 마지막 준비판(1795. 12)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1796. 3) 아테네 담론(1796. 12) <소설 휘페리온> 이런 순으로 연속적인 발전을 보인다.
1 2. 휄덜린의 글 판단과 존재 : 헤겔 철학의 선천적인 규정
휄덜린의 단편 판단과 존재 의 철학사적, 철학적 의미는 헨리히의 연구발표이후 이제 더 이상 설명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인정되었고 따라서 그 내용도 늘리 알려졌다. 그래도 앞으로의 이 강연의 전개를 용이하게 하기위해서 간략히 그 안에 들어있는 사상들을 강의해 본다면 아래와 같다.
첫째, 형식논리학의 판단 즉 '주어 + 술어' 의 형식이 근원적인 분리라는 것: 휄덜린은 이를, Urteil은 Ur Teilung 이다, 라고 정형화했다.
둘째, (피히테)철학의 동일성의 명제: 나는 나다(Ich bin Ich) 는 이런 판단의 가장 적합한 예(例)라는 것이다.
셋째, 범주론(Kategorienlehre) , 특히 (칸트의) 양상범주에 있어서 현실성(Wirklichkeit) 이 가능성(Mglichkeit) 보다 더 근원적이다.
넷째, (판단과는 달리) 존재는 깨어질 수 없는 통일, 곧 주관과 객관의 완전한 통일을 말한다. 그리고 이런 존재(das Sein) 는 지적직관(intellektuelle Anschauung) 안에서 규정된다.
다섯째, (피히테 철하의 원리인) 자아(das Ich)는 자기의식(Selbstbewutsein)과 동일하다.
위에서 진술된 판단과 존재의 내용요약은 그 자체로서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따라서 뒤에서 더욱 보충하여 논의를 분명히 하겠다. 왜냐하면 필자의 해석은 기존의 구것과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면 휄덜린이 피히테 철학의 비판 및 극복을 시도한다. 그리고 헨리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또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그렇지않다: 휄덜린의 판단과 존재 는 피히테철학에 대한 진정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비판을 암시하고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휄덜린은 글의 재료적인 면에서 피히테와 쉘링에 많이 빚지고 있다; 왜냐하면 근원적인 분리 Ur Teilung 의 판단(Urteil) 은 실은 피히테의 '플랏트너강의록(Plattnervorlesung)' 에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그의 존재(das Sein) 개념은 야코비에서 따온 것이다. 강의 원고 참조
따라서 판단과 존재 는 글의 재료적인 면에서 볼 때 그렇게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의 형식적, 형성적인면에서 볼 때 독창적이라고 할수 있다: 이 짧은 글은 실은 앞으로 해결되어야할 통일철학의 핵심적인 문제를 수정화(kristalisieren)하고있다. 따라서 이 글은 헤겔의 철학발전에 하나의 시금석이 되고있다. 뒤에서 보겠지만 헤겔의 단편 믿음과 존재 (Glauben und Sein) 는 실은 휄덜린의 판단과 존재 에 상응하는 헤겔식의 판단과 존재이다.
2. 헤겔의 통일의 철학: 믿음과 존재 문서 분석
2 1. 헤겔의 단편 믿음과 존재 :
통일과 이율배반, 통일철학의 방법론적 문제상황
프랑크푸르트 시절의 통일철학적인 특성이 강한 헤겔의 문서들로서는 도덕, 사랑, 종교 (Moralitt, Liebe, Religion) 글, 사랑과 종교(Liebe und Religion)글 그리고 사랑(Die Liebe) 등이있다. 이번 강의를 위해 필자는 그 중에서도 헤겔적인 특징이 강하게 표출되는 글인 믿음과 존재(Glauben und Sein) 를 선택하여 통일철학형성의 주요한 계기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쉘링이나 휄덜린등에비해 헤겔의 장점은 무었보다도 그의 방법론적인 철저성이다. 원리적인 면의 수용에 있어서 그는 상당히 뒤늦게 친구들을 따라갔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휄덜린의 경우 헤겔이 아직 피히테주의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는 헤겔이 필생에 걸쳐 싸워야할 문제 곧 형식논리학의 사변적, 통일철학적 변용을 자신의 짧은 글 판단과 존재 에서 선취하고 있다.
헤겔의 프랑크푸르트시절의 수고 믿음과 존재 는 1797/8 해바뀌는 때에 생성되었다. 이 글은 판단과 존재에 표현된 통일철학에서 필연적으로 흘러나오는 방법론적, 인식론적인 문제상황들을 해결하려는 헤겔의 시도이다. 여기서는 휄덜린의 아테네담론 에서 표출된 역동적인 통일 즉 헬라클리투스의 '내적 구별이 있는 일자'(das Eine in sich selber unterschiedne) 가 아니라 판단과 존재 (1795. 4)에 나오는 단적인 통일 혹은 절대적 통일이 여기서 문제시된다. 휄덜린은 거기서 주관과 객관의 무조건적인 통일을 존재(das Sein) 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아테네담론(1797. 4) 에서는 εν διαφερον εαυτω 라는 헬라클리투스의 문구를 통해 휄덜린은 단순한 통일이 아니라 '통일 속의 분리' 곧 분리와 통일의 결합을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헤겔이 휄덜린의 판단과존재의 통일사상보다 아테네담론의 그것보다
늦게 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헤겔은 휄덜린이 사용한 구절 (그 단어가 가진) 고유한 의미에 있어서의 존재 (das Sein im einzigen Sinne des Wortes) 을 최초로 그의 믿음과 존재 글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헤겔에 있어서 믿음과 존재 글은 휄덜린의 판단과존재 와 비교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두 교재의 공통적인 기반이 존재개념 즉 주관과 객관의 통일이라는 점이다. 둘째 근원적인 통일로서의 존재가 인간에게는 항상 대립과 분열로 나타나는 원인은 주관적인 사유 또는 지성 때문이다. 이런 주관적인 사유 즉 구분하고 분리시키는 사유를 휄덜린은 판단(Urteil) 이라고 규정하고 헤겔은 사유(Denken) 또는 표상(Vorstellung) 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이런 오성적 사유 또는 구별하고 분리하는 반성적 사유에 대하여 존재를 그자체에 있어서 보전하는 방법으로서 휄덜린은 지적직관(intellektuelle Anschauung) 을, 그리고 헤겔은 믿음(Glauben) 을 각각 주장하고있다.
따라서 헤겔의 믿음과존재 는 휄덜린의 판단과존재 에 그대로 대응하는 쌍동이글이다.
그리고 휄덜린의 (판단과존재의) 통일의 철학이 헤겔에게 전달되고 그에게 문제화된 것은 휄덜린의 친구들싱클레어, 쯔빌링 의 작용이 휄덜린 못지않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시기 즉 헤겔의 프랑크푸르트시절 휄덜린은 이미 통일철학의 방법론적인 정초보다는 그 진리성을 확신한뒤 그것의 체계적 건설 즉 통일미학의 시스템구축을 향해 질주했다. 따라서 헤겔은 휄덜린보다는 싱클레어와 쯔빌링등과의 정신적 교류를 통해 휄덜린의 통찰을 소화하고 더 나아가 휄덜린이 소홀히 한 통일철학의 방법론적, 변증법적 탐구로 파고 들었다. 따라서 헤겔변증법 탄생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두사람 곧 싱클레어와 쯔빌링의 연구가 필수적이다.
휄덜린의 판단과존재 에서와같이 여기서도 그들의 공통의 지반은 역시 야코비의 스피노자해석이다: 야코비는 스피노자의 실체(Substanz) 개념을 존재(Sein) 개념으로 돌려해석했고 따라서 실체로서의 존재개념은 사유와 연장, 주관과 객관의 근거이자 전제이다.
헤겔은 이렇게 하여 친구들이 보여준 철학적인 성과를 그 뿌리로 소급시켜 그 근원에서 문제를 새롭게 파고들었다.
그자체에서 근본적으로 생각해볼 때 이율배반(Antinomie)내지 모순(Widerspruch)은 통일철학에 내재한 필연적인 문제이다: 존재 또는 통일이 대립관계 예를 들면, 주관과 객관, 지성과감성 그리고 하나와 여럿 에 선행한다고 할 때, 그러면 어떻게 해서 통일에서 분열 및 대립으로 이행하는지를 규명해야 한다; 즉 나누어 질 수 없는 하나에서 어떻게 두개의 대립자들이 생성될수 있느냐하는 물음이 자연스레 야기된다.
셸링 역시 이 문제에 직면하여 이를 절대자로부터의 타락(das Heraustreten aus dem Absoluten) 이라고 형식화했다.
셸링에의하면 절대자로부터의 타락 개념은 그러나 모순률 및 배중률에 대한 위반한다고 한다. 셸링은 자기철학에 내포된 모순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지적직관이라는 (손쉬운) 방법에 의지함으로써 사상발전이 헤겔처럼 풍성하지 못했다.
휄덜린의 판단과존재 에서처럼, 존재가 주관-객관 의 근원적인 통일이라면, 주관(das Subjekt) 이나 객관(das Objekt) 모두 그들의 근거인 '존재(das Sein)' 로부터 파생되어 나와야된다. 다시 말해 동일한 존재자가 동시에 주관이며 또한 객관이라는 이율배반내지 모순에 빠진다. 이를 헤겔은 존재와 주관(Sein und Subjekt), 존재와 객관(Sein und Objekt) 의 관계문제로 정형화했다. 칸트의 이율배반(Antinomie) 논리를 따르면 전자는 정립(Thesis) 후자는 반정립(Antithesis) 이다; 즉 정립(존재=주관) 과 반정립(존재=객관) 이 동시에 성립한다.
헤겔은 그러나 이시기에 이 문제를 정면에서 돌파할 수 있는 힘이 아직 없었다; 이 문제와 대결할 수 있고 그것을 극복하기까지는 산 넘어 산의 멀고 험악한 길을 가야만했다.
믿음과 존재(1797/8) 에서 헤겔은 아직 자기사유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kopernikanische Wende) 을 수행할수 없었고, 따라서 그런 상태에서 역시 선현의 철학에 기대어 이 문제의 해결을 모색했다: 즉 야코비의 믿음(Glauben) 개념에 근거해서 모순문제의 해결 아니 회피를 시도한다.
야코비의 종교와 믿음개념을 여기서 다 말할 수 없고 단지 그에 따르면 절대자(신) 을 합리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고 감정과 믿음을 통해 인격적으로 만날수 있음을 강조했다. 헤겔의 프랑크푸르트시절의 단편 믿음과 존재 의 이해와 관련되는 야코비의 발언은 우리는 절대자를 결코 볼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 이다.
이런 생각에 맞추어 헤겔은 유일의 존재 즉 어떤 대립자와도 독립하여 있는 존재(Sein) 의 현존을 방법론적으로 믿음이라는 수단을 통해 확보하려고 한다: 믿음이란, 통합된 것 그것을 통해 이율배반이 통합되는 그 통합 이 우리의 표상안에서 현존하는 방식이다
야코비에 의하면 사고(思考: Denken) 나 표상(表象: Vorstellung) 등은 항상 그것의 반대자들에의해 구속되기 때문에 원초적인 통일성 즉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사고(思考: Denken) 는 무사고(無思考: Nichtdenken) 에의해, 그리고 표상하는 것(das Vorstellende) 은 표상되어진 것(das Vorgestellte) 에 의해 대립되어진다. 따라서 통일 또는 존재가 어떻게 인간의 머리에 들어올 수 있을 것 인지가 의문시된다. 통일이 이해되거나, 마음에 떠올려지거나 혹은 사고 되어지는 순간 벌써 그것은 본성 즉 통일성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위의 인용구절은 그러한 존재 즉 인간의 유한한 인식기능을 벗어나있는 '근원적 통일' 이 인간의 표상기능 또는 인식기능을 통해 드러날 때 도대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헤겔의 자문자답으로서 그것은 결국 믿음(Glauben)이란 표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코비가 하는 말처럼 우리는 절대자를 지각(知覺: Wahrnehmung)한다던지 혹은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더 나아가서 그런 노력, 즉 절대자를 인식하려는 노력의 정점을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발견했으며 이는 결국 숙명론(Fatalismus) 에 빠지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지적할 것은 야코비의 절대자(das Absolute) 개념에 대한 헤겔의 이해이다. 야코비적 문맥에서 그것은 인격적 존재로서의 신을 가리킨다. 그러나 헤겔은 그것을 다시금 실체(Substanz) 즉 두가지 대립된 속성들의 무차별적 통일로서의 존재를 가리킨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헤겔의 문제는 스피노자의 일원론이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를 다시 부각시키며 그것의 논리적-존재론리적(logisch-ontologisch) 인 해결을 찾는 것이다.
야코비에 의하면, 대립자들 예를 들면 연장과 사유 은 그 자체에서 볼 때 어떤 접촉점도 없다; 그들은 단적으로 대립되어있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사유방식에 따르면 이들 서로 관계없는 두가지는 한 실체의 속성들이기 때문에 통일된다; 즉 실체-속성관계(Substantialittsverhltnis) 를 통하여 대립자들의 통일이 해명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실체관계역시 대립자의 통일문제에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함을 알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한 실체에 상반되는 두 대립자가 붙어있으면 그 실체는 자기 동일성을 보전하지 못하고 파괴될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우선 피히테적, 쉘링적 사유를 따라 이런 통일을 활동성 내지 능동성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헤겔은 통일은 활동성이다; 이런 활동성은, 그것이 객관으로서 반성 또는 굴절 될 때 믿는것 이된다 라고 말한다.
이는 셸링적인 피히테주의로서 이해되며, 셸링이 말하는 바: 지적직관이 반성을 통해 우리, 즉 유한한 인식, 으로 귀환할 때 자기의식내지 대상의식으로 변환한다는 사상에 대응한다. 이를 헤겔은, 근원적인 통일적 활동성이 반조(反照)될때 그것은 믿음(das Geglaubte) 으로 나타난다, 고 생각한다. 근원적인 (무한한) 자아의 대상화, 객관화 혹은 유한화, 이것이야말로 헤겔의 변증법적 운동의 핵심이다.
시간 관계상 헤겔의 믿음과존재 문서도 상세히 논구하기 어렵다. 짧은 글이지만 이것은 고도로 농축된 생각의 집약을 보여준다. 이 글에는 그 후의 헤겔의 발전에 기초가 되는 '신적인 기호로서의 계사(繫辭)' 문제가 있다.
마지막으로 주지되어야 할 믿음과존재 의 내용은, 이 글이 통일철학의 방법론적인 보장을 추구하면서 또 통일과 대립의 상호관련 및 상호의존 의 악순환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헤겔 및 그의 친구들의 신념은; 통일이 대립에 선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한다면 도리어 통일이 도리어 대립에 의존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를 헤겔은: 통일하기 위해서는 이율배반의 지체(肢體) 들이 서로 대립하고, 그들의 관계가 이율배반으로 느껴지거나 인식되어야 한다.
이에 따르면 통일과 대립의 상호작용이 인지된다. 이런 변증법의 핵심적인 문제가 헤겔의 프랑크푸르트 시절의 단편 믿음과존재 에서 분명히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그 문제의 필증적인 해결은 실은 헤겔의 평생의 과제로 주어지고 예나시대의 논리학적 노력과 정신현상학 (1807)그리고 대 논리학(1812)을 거쳐서야 비로소 해결되는 위대한 철학적 업적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