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헤겔에서의 반성(反省)과 사변(思辨)

나뭇잎숨결 2021. 9. 1. 02:44

헤겔에서의 반성(反省)과 사변(思辨)

 

 

 

- 백 훈 승**전북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주제분류】서양근대철학, 인식론, 형이상학

【주 요 어】반성, 사변, 지성적 직관, 절대자, 이율배반

 

【요 약 문】

 

헤겔철학의 궁극적 대상은 절대자 혹은 진리다. 그리고 진리, 참된 것이란, 부분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요, 구체적인 것이다. 대상을 추상적, 부분적으로 고립시켜서 고찰하는 사유방식을 헤겔은 반성 (Reflexion)이라고 부르고, 대상을 전체적이고 구체적으로 고찰하는 사유방식을 사변 (Spekulation)이라고 부른다. 변증법적인 사유방식은 반성적 사유 (지성)로부터 시작하여 매개과정을 통하여 사변적 사유 (이성)에로 고양된다. 절대자가 파악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변적 사유를 통해서라고 헤겔은 말한다. 그러나 사변적 사유를 통해 드러나는 대상을 구성하는 각 요소들 간의 관계는 모순관계가 아니라, 단지 어떤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다르다’는 관계 혹은 부정태의 관계일 뿐이다. 본 논문은 우리의 두 가지 사유방식인 반성과 사변이 과연 무엇이고, 이에 대한 헤겔의 이해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고찰한다.

 

1. 서론

 

주지하듯이 헤겔철학의 목표 내지 과제는 절대자 혹은 무한자의 파악이다. 헤겔의 철학에 의하면, 진정한 존재자는 유한자가 아니라 무한자로서의 정신, 즉 신이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 서는 것을 그는 관념론이라고 부른다: “철학의 관념론은 유한자를 참된 존재자로 인정하지 않는 데 있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무한자를 파악할 수 있는 사유는 어떤 사유인가? 그리고 그것은 유한자를 인식하는 사유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 헤겔은 후자의 사유를 반성 (Reflexion)이라 부르고, 전자의 사유를 사변 (Spekulation)이라고 부른다. 헤겔에 의하면 헤겔 당대에 이르기까지 관념론의 원리는 일관되게 관철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철학이 “유한자는 무한자와 화해할 수 없고 통일될 수 없으며 전적으로 대립될 뿐”이라는 입장을 취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이 바로 지성 (Verstand)이 취하는 입장이다. 헤겔에 의하면, 지성은 대립자들을 분리시킨 채로 고찰하여 그것들을 통일하지 못한다. 따라서 유한자도 무한자와 대립시켜 고찰하고 양자의 통일에는 이르지 못한다. 지성이 파악하는 무한자는, 유한자와 대립된 무한자인데 사실 이러한 무한자는 헤겔에 의하면 진무한자가 아닌 위 (악)무한자, 절대자가 아닌 상대자에 불과하다. 요컨대, 분리를 고착시키는 지성은 진정한 무한자를 파악할 수 없다. 즉 유한자와 무한자는 “상이한 장소로 놓여진다. 유한자는 여기에 있는 현존재자로서, 그런데 무한자는 피안으로서 (...) 아득한, 도달할 수 없이 먼 곳으로 놓여지고, 이 먼 곳의 외부에 유한자가 존재하고 머문다.” 따라서, 진무한을 파악하는 사유는 지성의 사유와는 다른 종류의 사유이어야 한다고 헤겔은 생각하며 이러한 사유를 이성의 사유, 즉 사변이라고 부른다.

 

본 논문에서는 헤겔에서 이러한 사변과 반성, 혹은 이성과 지성이라는 두 종류의 사유방식의 차이점을 고찰하고, 헤겔의 사변적 사유와 관련하여 잘못 이해되고 있는 모순 및 이율배반에 관한 견해를 바로잡고자 한다.

 

2. 헤겔에서의 반성

 

‘반성철학’이라는 표현은 1802년에 출간된 헤겔의 ?신앙과 지식? (Glauben und Wissen)의 부제로 등장한다. 이러한 ‘반성’이라는 표현은 헤겔 당대의 분열된 시대상을 반영하는 용어다. 헤겔은 이러한 분열 내지는 대립을 지양하여 통일을 이루고자 하며, 일면성을 고수하고 대립을 고착화하는 반성적 사유를 극복하여 참된 철학에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는 초기저작들, 특히 ?차이저술? (Differenzschrift)과 ?신앙과 지식?에서, 철학의 방법으로서의 반성 및 반성철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가 보기에 반성철학은 칸트, 야코비, 피히테의 사상 속에서 정점에 도달했다. 반성의 특징은 신앙과 이성, 유한자와 무한자, 주관과 객관을 분리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반성은 자기 자신 혹은 반성하는 주관을, 자기가 반성하는 객관과 구별되고 그것에 외타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의미의 반성은 지성과 유사하며, 직관, 신앙, 사변과 대조된다. 그것은 절대자를 정당하게 다룰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한한 형태의 인식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2.1 지성 (Verstand)과 반성

 

2.1.1 지성과 유한자 인식

 

반성은 지성의 사유 혹은 지성의 활동에 대하여 부르는 용어다. 반성은 지성에 내재하는 대립을 나타내 보여준다. 헤겔은 논리적인 것의 세 측면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 추상적 혹은 지성적인 측면 (die abstrakte oder verständige Seite) ⓑ 변증법적 혹은 부정적-이성적인 측면 (dialektische oder negativ-vernünfige Seite) ⓒ 사변적 혹은 긍정적-이성적인 측면 (spekulative oder positiv-vernünftige Seite). 그런데 첫 번째 단계인 지성의 사유단계는 대상을 “고정된 규정성에 있어서” 고찰하기 때문에, 대상의 일면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면적인 파악에 불과하고 전체의 파악에 이르지는 못한다. 즉, 지성은 자기의 대상에게 보편성의 형식을 부여하지만, “지성에 의해 정립된 보편은 추상적 보편이다 (...)”. 지성은 “추상적인 이것이냐-저것이냐”의 태도로 일면적인 규정만을 고수한다.

둘째로 “변증법적 계기는 그와 같은 유한적인 제 규정의 고유한 자기지양이며, 그와 대립되는 제 규정에로의 이행이다.” 이 두 번째 단계의 변증법적 계기는 일면적인 규정을 부정하기 때문에 이미 지성적 사유가 아닌 이성의 사유다.

 

세 번째의 단계인 “사변적인 것 혹은 긍정적-이성적인 것은 대립된 규정의 통일을, 즉 대립된 규정의 해소와 이행 가운데 포함된 긍정적인 것을 파악한다.” 사변의 계기는 대립항을 무화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이념적인 계기로서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다.”

 

2.1.2 지성의 두 가지 기능

 

앞에서 언급된 지성의 기능을 다시 구분하면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대상의 규정이며 또 하나는 규정의 고착화다: “지성은 규정하며, 또한 이 규정들을 고정시킨다.” 헤겔은 지성의 첫 번째 기능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완전히 규정된 것이 비로소 공개적이며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도 있고, 습득되어져 만인의 소유가 될 수” 있고, “학의 지성적 형식은 만인에게 제공되는 길이고, 만인에게 있어서 학에 이르는 평등화된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은, “분리하는 활동은 지성의 가장 놀랄만 한, 그리고 가장 위대한, 혹은 오히려 절대적인 위력의 작용이며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성의 두 번째 기능은 지성의 부정적 기능이요, 따라서 지양되어야 할 요소다. 반성적 (반성하는) 지성이란, “추상하는, 따라서 분리시키는 지성”이다. 지성의 정합성은 헤겔에 있어서 진리파악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대립된 규정들을 고착시켜서는 대상 전체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의 파악을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여러 규정들을 그들의 상호연관성 속에서 살펴보아야만 한다.

 

2.1.3 반성과 생 - 반성은 생이나 절대자를 파악할 수 없다

 

이미 ?기독교의 정신과 그 정신의 운명? (Der Geist des Christentums und sein Schicksal)에서 헤겔은 생 혹은 무한자와 유한자의 관계를 자기 철학의 근본주제로 삼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반성은 생과 신적인 것에 적합하지 않으며, 무한자와 유한자의 관계는 반성에게는 “거룩한 비밀”이다. 이러한 비밀에 대해서 우리는 “신비적으로”만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생은 반성적 사유를 통해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이다. 헤겔에 의하면 이러한 생은 살아있는 전체다. 그런데 헤겔의 견해에 의하면 기독교의 삼위일체 표상이 이러한 생을 표현하고 있다. 즉 이러한 관계는, 한편으로는 양자의 절대적 차이를 뜻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친밀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절대적인 통일성 (Einigkeit)을 뜻하는 “연관”의 표현이다. 또한 헤겔은 ?체계단편? (Systemfragment, 1800)에서도 반성이 지니고 있는 결함을 지적하고 있다. 즉, 판단은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일자를 정립하는 것이다.

 

2.1.4 반성의 두 종류

 

헤겔은 이미 ?차이저술?에서 반성 개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고, ‘반성’이라는 용어 앞에 다양한 수식어를 붙인다. 첫째로, “고립된 반성 isolierte Reflexion”은 “대립자를 정립하는 작용”인데, 이것은 곧 “절대자를 지양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단지 “존재의 능력이자 제한의 능력”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성으로서의 반성 Reflexion als Vernunft”은 “절대자와 관계를 가지며, 이러한 반성은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만 이성”인 것이다. 이러한 이성으로서의 반성은 “부정적인 절대자의 힘” 혹은 “절대적인 부정작용”으로서 “지성으로 하여금 객관적 총체성을 산출하도록” 이끌고 간다. 결국 이러한 이성으로서의 반성 속에서는 “유한자의 능력인 반성 (고립된 반성: 필자 주)과 이 반성에 대립되는 무한자가 (...) 종합되어 있다.” 이렇듯 헤겔은 “반성이 절대자와 관계를 가지는 한에서만 이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헤겔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넓은 의미의 반성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고립된 반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으로서의 반성 혹은 철학적 반성이다. 고립된 반성을 헤겔은 또한 “순수한 반성”, “통속적인 반성” (gemeinen Reflexion)이라고도 말하며, 그리고 이 후자의 반성을 헤겔은 “사변적 반성” 혹은 사변이라고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자의 반성을 헤겔은, 인식과정에서의 “대립이라는 규정성들의 존립”을 고립시키는 “악한 반성”이라고도 나중에 부른다.

 

헤겔은, 반성이라는 “도구” (Differenz, 25)만으로는 절대적 동일성을 파악할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그의 비판은 반성 일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고립된 반성, 순수한 반성, 통속적인 반성 내지는 악한 반성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대립에로 나아가지 않고서는 대립의 지양이 불가능하다. 대립을 무시하거나 대립을 추상하지 않고 지양하는 것이 절대적 인식이다” 헤겔에 있어서 ‘대립’의 단계는 절대자의 자기전개과정에 있어서 제 2단계에 해당한다. 즉, 세계창조 이전의 절대자는 근원적인 통일상태로 존재하다가 창조의 과정에서 자기와 분열․대립하게 된다. 이러한 대립으로부터 자기에게로 복귀하여 본래의 통일을 회복하는 것, 즉 재통일의 상태 혹은 즉자대자적인 통일의 상태가 절대자의 전개의 최종적인 단계다. 이 때에, 제 3단계의 ‘완성된 통일’ (die vollendete Vereinigung)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대립과 분열이 필수적인 요소다. 이와 마찬가지로 반성도 사변에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다. 지성이 자기 자신에 부딪히는 자기의 마지막 한계에서 이성으로 되는 것이 바로 지성의 사명이다. 지성이 자기 자신을 이성으로 인식함으로써 지성은 지성으로서의 자신을 지양한 것이며, 지성의 이러한 자기지양은 “총체에 대한 충동” (Trieb zur Totalität)으로 인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3. 헤겔에서의 사변47)

 

3.1 사변, 반성, 지성적 직관

 

사변 (적 인식)이란, 감각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이성의 능력에 의해서만 진리를 파악하려는 방법이다. 헤겔에 앞서 칸트는 이러한 사변적 인식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이론적인 인식이, 우리가 경험에서 도달할 수 없는 대상이나 대상 개념에 관계하는 경우에 그 인식은 사변적이다.이 인식은 가능한 경험에서 주어질 수 있는 대상이나 대상의 술어에만 관계하는 자연인식과 대립한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칸트는, 사변적 인식에 대립하는 반성적 인식을 ‘자연인식’ (Naturerkenntnis)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는 이러한 자연인식의 대상인 경험계를 초월하여 예지계 혹은 가상계 (可想界), 물자체를 인식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변’이라는 표현에 최초로 엄밀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헤겔의 공로다. 헤겔 논리학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도록 한 기초를 제공한 이러한 연관을 상세하게 개진한 내용은 예나시절의 최초의 저술에서 발견된다. ?차이저술?은 시작부분에서 “당대의 철학” 에 대한 일반적인 양상을 띤 서론적인 언급을 한 후에, 반성철학의 구조적인 진단 및 치료에 몰두하는 한 편, 반성과 사변의 관계를 천착하고 있다.

 

Düsing의 연구에 의하면, 쉘링에 있어서는 사변 개념의 의미에 변화가 있었다. 즉, ?자연철학의 이념들? (Ideen zu einer Philosophie der Natur)의 초판 (1799)에서 쉘링은 사변 개념을, ‘분리하고 추상하는 단순한 형식적 사유’라는 의미로 사용한 반면에, 재판에서는 위의 의미에 해당하는 용어로 ‘반성’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사변은 새로운 두 가지 의미를 갖게 되는데, 그것은 첫째로는 “사변적 물리학” (spekultive Physik)에서의 “사변적 인식” (spekulative Erkenntiß) 〔이 속에는 이론 (Theorie)이라는 특수한 개념이 포함됨〕이라는 의미이고, 두 번째로는 ‘절대자에 대한 순수하고 이성적인 인식’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 후자의 의미를 지닌 사변은 헤겔이 예나시절의 비판적 저술들 (Jenaer kritische Schriften)에서 정초하고, 동시대의 철학과 대결하면서 확증하고자 한 개념이다. 그러나 쉘링은 사변을, 개념적 사유가 아닌 지성적 직관 〔intellektuelle (intellektuale) Anschauung〕과 동일시하고, 사변에 의해 절대자 파악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헤겔에 있어서 사변은 지성의 반성적 사유와 구별되는 동시에, 지성적 직관과도 구별되는 개념적 사유다. 헤겔에 있어서 철학은 표상이나 감정이 아니라 개념적 인식이어야만 한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헤겔은, 직관에 의해 절대자를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쉘링의 절대자관을, “마치 권총에서 총알이 발사되듯이 직접 절대자로부터 출발”한다고 비판한다. 즉, 무매개적인 지, 직접지는 진정한 지가 아니다. 이러한 지는 “통상적이고 추상적인 지성에 불과”한 것으로서, 매개되어 있는 절대자를 파악할 수 없다. 예나시절에 헤겔은 지성적 직관이 반성으로 인한 분리를 극복하기 위한 진정한 대안이라고 하는 쉘링의 주장에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동조했으나, 자기의 교수시절의 마지막에 ?정신현상학?의 서설 (Vorrede)과 함께, 쉘링에 대한 날카로운 분리선을 긋는다. ?정신현상학?의 저자는, 모든 반성의 두 상관자인 주관과 객관의 영원한 구별을 말소하는 동일성원리의 빈곤함과 공허함을 논박한다. 쉘링이 모든 차이의 피안으로 쫒아버린 무차별 (Indifferenz)은 형식주의로 끝난다. 이에 대해 헤겔은 단색의 형식주의, 절대자의 공허, 순수한 동일성, 형태 없는 백색 (白色), 도식의 동색 (同色), 절대적 동일성, 혹은 “모든 암소가 검게 보이는 밤”이라고 비판한다. 요컨대, 절대자의 인식을 대상으로 갖고 있는 철학적 사유, 무한한 인식 내지는 “사변에는 유한한 인식 혹은 반성이 대립해 있다.” 그런데 사변적인 학은, 반성의 입장에 머물러 있는 지성의 사유에 근거해 있는 기타의 학과는 다르지만, 후자에서 다루고 있는 경험적 내용을 무화하지 않고 지양한다. 이와 관련하여 헤겔은, “단순한 지성논리학은 사변논리학 속에 포함되어 있고, 사변논리학으로부터 곧바로 형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3.2 사변과 절대자

 

추상적인 지성적 사유로서의 반성은 무한배진에 빠지고, 무한배진은 총체성으로서의 진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 ?차이저술?에서 헤겔은, 지성은 피제약자로부터, 그때그때 마다 그 자체가 다시 제약된 조건들에로 배진하면서 “객관적 총체성”을 산출하려고 노력하며, 이 때에 무한배진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어떤 곳에서도, 지성이나 반성은 피제약자와 피제한자의 영역 너머로 고양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성 혹은 사변은 절대자 혹은 물자체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절대자는 동일과 구별의 통일 혹은 “동일과 비동일의 동일”이라는 구조로 존재한다. 이러한 구조는 생의 구조와 동일하다. 따라서 헤겔은 절대자를 “무한한 생” (Nohl, 347)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구조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소가 바로 기독교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삼위일체의 표상이다. 거기에는 통일 속의 구별, 혹은 동일과 비동일의 동일이 존재한다. 이미 헤겔은 ?정신현상학? (1807년) 이전에도, 예를 들면 새로 발견된 텍스트 그룹에 속하는 ?정신의 본질? (Das Wesen des Geistes, 1803)이라는 단편에서도 정신 개념 속에 함축된 절대적인 자기관계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정신은 고정된 점으로 존재하지 않고 운동, 활동으로 존재한다.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스스로 자기의 타자로 되고,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정신의 부정운동을 통하여 “동일과 비동일의 동일” 혹은 “자기의 타재 속에서의” 정신의 “자기 동일”이 이루어진다. 헤겔은 바로 이러한 대립 속의 통일, 구체적 동일자로서의 절대자를 파악할 수 있는 사유를 사변이라고 말하고 있다.

 

3.3 사변적 명제: 추상적 (지성적) 동일성과 사변적 (이성적, 변증법적) 동일성의 구별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취해지는 이러한 변증법적인 것 속에, 그리고 대립자를 그 통일성 속에서 파악하는 데에 혹은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파악하는 데에 사변적인 것이 존립한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그러나 능숙하지 못하고 부자유로운 사유력에게는 가장 어려운 측면이다”

 

위의 진술이 뜻하는 바를,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 살펴보자.

 

동일성의 명제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즉 첫째로, 추상적 (지성의) 동일성 (=형식적 동일성=무 구별적 동일성), 그리고 둘째로, 구체적 (이성의) 동일성 〔=실질적 동일성=구별 (타자, 부정)이 매개된 동일성=사변적 동일성〕. 추상적인, 지성의 동일성은 반성의 동일성이다. 이러한 동일성은 사변적 동일성이나 이성개념으로서의 절대적 동일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면, “나는 나다”라는 진술 내지는 판단의 경우, “대립자를 그 통일성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란, ‘나’에 ‘나의 타자인 대립자’가 매개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 양자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고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란 마찬가지로, ‘나’를 ‘나의 부정태로서의 나의 타자’ 속에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구체적 동일성이 파악되며, 이것이 바로 사변적 사유의 작용이다. 또한, “애들은 애들이다.” (“Kids are kids.”)라는 진술을 생각해 보자. 이것을 헤겔이 말한 논리적인 것의 3단계에 적용시켜 보면, 제 1단계: 추상적 지성적 측면 ― “애들은 애들이다.” 이 단계는, 애들의 타자가 매개되어 있지 않고 단지 추상적 동일성만을 언급하는 단계다. 제 2단계: 변증법적 혹은 부정적 이성적 측면 ― “애들은 어른이 아니다.” 이 단계는, 제 1단계의 추상성을 부정하는 단계다. 제 3단계: 사변적 혹은 긍정적 이성적 측면 ― “애들은 (어른이 아닌) 애들이다.” 이 단계는 제 1단계와 제 2단계를 종합한 단계다. 이러한 사변적 단계 혹은 사변적인 것은 “지성이 머물러있는 저 대립을 (그러므로 따라서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대립도) 지양하여 자신 속에 포함하고, 바로 그럼으로써 구체적인 것, 그리고 총체임이 입증되는 것”이다.

 

헤겔은 스피노자를 따라서,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 (omnis determinatio est negatio)라고 말한다. 따라서 동일성의 명제 혹은 동일률 (A=A)은 ‘A=~(~A)’로, 즉 부정의 부정, 이중부정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전자의 동일성은 지성의 동일성으로서 아무런 구별이 매개되지 않은 순수한 형식적 동일성만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는 옳으나, 세계에 관해서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 하나마나 한 (meaningless, sinnlos) 말이다. 후자의 동일성은 일자에 타자가 부정으로서 매개된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이성적․사변적 동일성이다. 이러한 동일성의 명제에서는 의식이 일자로부터 타자에로 나아갔다가 다시 일자에로 복귀하는 운동이 나타난다. 이것은 긍정을 부정과의 연관 속에서, 일자를 타자와의 연관 속에서 고찰하는 사변적 사유방식이며, 변증법적 사유방식이다. 사변적인 사유란, 이렇게 대립된 규정 가운데서 일면적인 규정만을 고집하는 사유, 이원론적이고 양극적인 반성적 사유를 지양한 사유형태다. 그리고 사변적 진술은 “주어와 술어의 변증법적 이행운동”이라고 파악될 수 있다. 이렇듯, “고착화된 이러한 대립을 지양하는 것이 이성의 유일한 관심사다.”

 

절대자의 구조도 이렇게 동일과 비동일의 동일이라는 구조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절대자를 인식하기 위한 우리의 의식작용도 이러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것이 바로 반성적 사유로부터 사변적 사유에로의 이행이다. 유한한 반성규정은 대립을 지니고 있고, 이 대립의 지양을 통해 사변적 사유에로 나아간다. 헤겔은 이러한 유한한 반성규정들의 지양을 통해 이성적 인식 내지는 사변적 사유에 이르는 도정을 그의 ?논리학?에서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이 바로 변증법인 것이다. 헤겔은 “사유의 본성 자체가 변증법” (Enz § 11, TW 8, 5)이어서, 지성의 반성이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대립규정들이 변증법에 의해 극복되어야만 하며, 변증법은 구별들 속에 있는 통일을 진리로 파악함으로써, 지성은 “지성적 이성 혹은 이성적 지성” (verständige Vernunft oder vernünftiger Verstand)인 이성임이, 그리고 정신 (Geist)임이 궁극적으로 입증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3.4 근원적 통일 (생)의 회복과 사변

 

헤겔은 근원적 통일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횔더린의 사상과 공유점을 가진다. 횔더린 역시 그의 ?근원적 분할과 하나?(Urteil und Sein)에서 근원적으로 분할되기 이전의 통일체인 Sein과, 반성에 의해 분할된 존재자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헤겔은 이러한 횔더린의 사상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대립을 화해시키는 통일의 철학을 주창하며, 이와 동시에 모든 종교의 이상도 이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헤겔은 철학을 종교에로 고양시킴으로써 절대자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청년기의 저술에서의 생각을 바꾸어서, 절대자를 철학에 의해, 즉 철학적 사변에 의해 파악하고자 한다.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 있는 저술이 바로 우리가 이미 여러 번 거론한 바 있는 ?차이저술?이다. 헤겔이 비판하고 있는 실정종교 (Positive Religion)는 유한자와 무한자를 대립시키고 분리시킨다. 신은 유한자로부터 분리되어 피안에 존재함으로써 유한자와 무한자 간의 생동적인 관계는 불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바로 지성의 반성적인 활동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헤겔은 보고 있다. 이렇게 대립을 고착시키는 지성의 반성적 사유로부터는 결코 절대자와의 통일에 이를 수 없다. 그리하여 헤겔은 “반성의 반성을 통하여 사변에, 무한자에로의 사유하는 고양에”이를 것을 요구한다. ?차이저술?에서 그는, “분열이 철학의 욕구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분열과 제한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 것이 철학의 과제다. 그러나 철학의 도구로서의 반성은 여러 제한들과 분열을 지양하는 것이 아니라 산출한다. 그러므로 반성은 절대자와 관계하면서 자기 자신의 제한들을 무화시켜서 이성에로 성숙되어야 한다. 헤겔에 있어서 이성은, 대립이 지양되는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대립 속에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사변의 본래적인 장소다.

 

4. 결론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하여 우리는, 지성의 반성적 사유는 동일과 구별의 통일체로서의 절대자를 파악할 수 없고, 사변에 의해서만이 이러한 구체적인 보편자인 절대자를 파악할 수 있다는 헤겔의 주장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반성은 또한 유한자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반성은 추상적이고 일면적이기 때문이다. 사변적 사유방식은 유한자의 파악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하는 사유방식이다. 이러한 사상은 시로 정당한 것으로서, 우리는 대상을 결코 그것의 타자와의 연관성을 무시한 채 고립시켜 파악한다든가, 혹은 그 대상의 일면만을 고찰하고 다른 측면은 간과하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되며, 이와는 반대로 대상을 그것의 타자와의 연관성 속에서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헤겔에 있어서 반성과 사변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지적해야 할 점은, 모순 및 이율배반을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사유는 의식 없는 직접성을 극복하여 지성적인 반성으로 되며, 대립을 발생”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규정들은 결코 ‘모순’은 아니다. Götze가 말하듯이, “이성의 최고 표현은 이율배반이어야”하고 “이율배반적인 진술들의 동일성에 대한 의식적인 통찰이야 말로 진정한 앎”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세계는 유한하든가 무한하든가 하지, 둘 다일 수는 없다. 우리가 세계라는 개념의 의미에 대해서 합의만 한다면 이 두 주장들 가운데 반드시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는 그르다. 이것이 바로 이율배반, 즉 서로 모순관계에 있는 두 진술이 동시에 옳다고 주장되는 상황이 지니고 있는 특성이다. 그러나 헤겔은, 사변적 사유는 두 주장을 통일하고, 따라서 세계를 유한한 동시에 무한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예외가 있긴 하다. 예를 들면, 술어가 주어에 대하여 애초부터 적용될 수 없는 경우에는, 이 주어에 대해 서로 모순관계에 있는 두 진술 모두 그른 것이 되어 버린다. 예를 들면, “나의 고통은 푸르다.”라는 진술과 “나의 고통은 푸르지 않다.” (푸른색이 아닌 다른 색이라는 의미임)라는 진술은 서로 모순관계에 있는 진술이다. 모순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에 따르면, 이 두 진술들 중 반드시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는 그른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고 이 경우의 두 진술은 모두 그른 진술이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주어인 ‘고통’에 색깔이 술어로서 사용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헤겔 자신이 용어를 부정확하게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대의 많은 사람들도 잘못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변증법적 사유에 나타나는 일자의 타자는 결코 일자와 ‘모순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부정’하는 관계에 있다. “A=A.”라는 진술을 생각해 보자. 이것은 앞서 말한 대로, 추상적이며 형식적인 동일성을 표현하는 진술이다. 그러나 이 진술에는 “A= (B, C, D ..., Z 등이 아닌) A”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경우에, 이 때 A의 타자인 B, C, D 등은 A와 모순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대립관계, A가 부정된 관계에 있을 뿐이다. 많은 헤겔 연구가들조차 이점을 오해하고 있다. 헤겔은 많은 경우에, 대립이나 부정의 관계를 ‘모순’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이러한 관계를 바로잡는다면, 헤겔의 사변적 사유는 올바른 대상인식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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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Reflexion and Speculation in Hegel

Hunseung Paek

The ultimate object of Hegel’s philosophy is the Absolute or truth. The true or truth is not partial or abstract, but the whole and concrete (“Das Wahre ist das Ganze.”) It is called Reflexion to apprehend a object in isolation abstractly, partially. And it is called Speculation, by which a object is concretely and totally apprehended. Dialectical method of thinking is proceeded from the reflectional thinking (Verstand), through mediation, and elevated to the speculative thinking (Vernunft). Hegel insists that only through such a speculative thinking the Absolute can be grasped. Speculative thinking is of course necessary in order to grasp a object, not partially but totally. This way of thinking is namely not to take the position of ‘Entweder~Oder’, but to take the perspective of ‘Sowohl~als auch’.

However, we must not confuse the relation between the element in this ‘Sowohl~als auch’ with a relation of contradiction. They are never in a contradictional relation, but simly in a relation of negation. Contradiction or Antinomy never occurs in a thing or between things, besides in beliefs or claims.

 

【Key words】reflexion, speculation, intellektuelle Anschauung, the Absolute, antinom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