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리꾀르의 해석학적 철학

나뭇잎숨결 2020. 12. 10. 12:40

리꾀르의 해석학적 철학

 

 

 

 

김 영한(서울대)

 

 

 

 

1. 기독교 인간학 착상

 

 

리꾀르는 그의 스승 가브리엘 마르셀의 기독교적 착상에 영향을 받았고, 이 기독교적 착상을 후설의 현상학적 사고를 방법론적으로 차용하면서 독창적으로 전개하였다.

 

1950년 제1권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1960년 제2권 ‘유한성과 죄과’로 출판되었던 ‘의지의 철학’은 인간의 본성을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논구하고 있다. 여기서는 의지에 관한 ‘형상학‘(Eidetik)이 전개되고 있다. 제 1권에서 리꾀르는 인간을 자유와 본성의 즉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의 역설로서 기술하고 있다. 의지적인 것은 비의지적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반대로 비의지적인 것은 의지적인 것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파악된다.

 

의지행위는 행위자의 능력 안에 놓여 있는 미래행위를 지시하는 결정을 내포한다. 그러나 결정은 동기에 기초하며, 행위는 신체적 기관에 의해 매개된다. 의지행위는 전반적으로 행위자가 승낙해야만 하는 무의식적인 것과 삶인 성격에 의해 제약된다. 신체로의 의식의 재통합 그리고 의식의 신체로의 재통합은 조화롭지 않다.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의 통일은 실재라기보다는 제한적인 이념인 화해를 예기하는 극(drama)이고 논쟁이다. 이 제한적인 이념의 빛 속에서 우리의 자유는 참으로 현재의 모습, 즉 신적이 아니라 인간적인 자유로 나타난다.

인간의 자유란 후설이 주장하는 바같이 절대적인 자유가 아니라 “상황에 놓여진 자유”이다. 인간에 있어 자유와 본성(신체)은 생동적인 존재의 수준에서 필연성의 형식에 있어서 서로 같이 뿌리를 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먼저 ‘나는 의도한다’라고 말하는 그로서 이해한다. 비의지적인 것은 의지에 지시되는데, 의지는 비의지적인 것에 그것의 동기와 능력, 그것의 근저와 한계까지 부여한다.

 

의지적인 것이 절대적인 자유를 향유하지 않고 비의지적인 것, 신체 속에 뿌리박고 있으며, 이 신체라는 비의지적인 것에 의해 제한되고 있다고 보는 점에 있어서 리꾀르의 인간 의지론은 의지의 절대자유론을 말하는 후설이나 하르트만과는 달리 기독교적인 착상에 입각한다.

 

‘의지의 철학’ 제 2 권 제 1 부 ‘오류의 인간’에서는 의지에 관한 경험학(Empirics)이 전개되고 있다.

 

인간 속에 있는 오류의 가능성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방법의 전환이 요청된다. 그것은 의지에 관한 기술을 본질적 가능성 수준에서 경험적 수준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현상학적 기술은 이제 불안정한 종합행위에 관한 반성을 통하여 소급적으로 접근되어야만 하는 내적 변양(internal abberation)을 다룬다. 내적 변양이란 쾌락의 유한한 극과 행복의 무한한 극 사이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그리 하여 인간은 이 갈등을 통하여 그의 실존 속에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리꾀르는 유한성과 오류가능성(fallibility) 개념을 인간 본성 기술에 도입하고 있다.

 

첫째, “인간은 본성적으로 유약하여 오류를 범하게 되어 있다.”

 

둘째, 오류가능성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의 어떤 불일치”에 해당한다.

 

오류란 여기서 깨뜨림, 균열, 찢어짐이라는 지질학적 의미로서 인간 실존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리꾀르는 인간 안에서 균열의 가능성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잘못을 범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나누어져 흠이 있는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능성이란 기획, 동기, 성격과 무의식적인 것의 절대적 비의지적인 것, 삶과 죽음 등 의지적 의식의 본질적 구조들과 인간의지의 역사적 내지 경험적 조건, 즉 정념에의 예속, 악에의 예속 사이의 간격에서 체험된다. 악의 가능성이란 자유의 의도된 의미와 유한성의 체험 사이의 불균형에서 체험된다.

 

리꾀르는 인간존재를, 그를 만드는 다양한 요소들 사이에 있는 중간자 내지 상황 속에 있는 자로서 파악한다.

 

인간은 천사와 동물 사이에 있기 때문에 중간자가 아니라, 그 자신 안에서, 그의 자아 속에서 중간자이다.

 

리꾀르는 인간존재의 중간자 성격을 존재론적으로 인간자신 안에 있는 그의 존재로 규정한다.

 

중간자의 존재론적 성격은 자세히는 존재하는 인간의 행위가 그 안에 그리고 그 밖에 있는 모든 양태성과 실재의 모든 수준 사이에서 매개를 산출하는 바로 그 행위이다는 점에 놓여 있다.

 

리꾀르는 유한성 개념과 오류가능성 개념과 연고나해서 인간이해에 초월의 가능성( the possibility of transcendence)을 도입함으로써 현대의 인간 내재적 실존가능성을 말하는 실존주의적 사상과 결별하고 있다.

 

유한- 무한한 인간에 관한 데카르트적 주제와 더불어 출발하는 것을 허용하면서 -비록 그것을 완전히 달리 재해석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유한성을 인간실재의 세계적 성격을 만드는 현대적 추세로부터 어떤 정도에 이르기까지 결별한다.

 

 

여기서 리꾀르는 인간존재의 유한성과 죄과성을 드러내면서도 초월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는 한 하이데거나 사르트르의 실존철학과는 결별하면서 그의 사상에 기독교적인 초월이념을 도입하고 있다.

의지의 철학 제2권 2부 악의 상징론에서 리꾀르는 악과 오류의 현실태에 관하여 논구한다. 이 경험이 표현되는 언어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접근될 수 있다. 여기서 리꾀르는 반성철학적인 논구로부터 해석학적 논구로 방법적인 전환을 하게 된다. 악의 상징론에서 현상학은 상징해석학으로 전개된다.

리꾀르는 악에 대한 고백의 가장 원초적 표현인 고백의 언어로부터 그의 논구를 시작한다. 리꾀르는 이 가장 원초적 언어를 서구의 종교적 문화전통으로부터 가져온다. 가장 일차적 상징이란 얼룩, 죄과요 죄이다. 둘 째 상징 내지 신화란 비극적 맹목성, 영혼의 타락, 영혼의 방랑 내지 쇠퇴이고, 세 번째 상징이란 노예의지 또는 원죄이다.

이 언어들은 간접적이고 비유적 방식으로 죄 내지 죄과에 관하여 말함으로써 해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철저히 상징적이다.

 

우리는 상징들 배후로가 아니라 상징들로부터 시작해서 사고해야만 한다. 그래서 상징들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는 언어의 드러내는 기저를 만든다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간단히, 상징은 사상을 야기시킨다.

 

이제 해석학은 철학적 반성으로 가는 길이다. 철학적 반성은 상징적 의미의 지시를 따름으로써 인간실존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나아가게 된다.

리꾀르는 인간실존을 해설하는 데 있어서 악과 오류의 현실태를 인정하고 있다. 인간실존을 죄의 현실태 그리고 악의 체험의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리꾀르의 사고는 기독교적 전통의 맥락 속에 있다.

더욱이 악의 상징을 논하는데, 노예의지와 원죄를 다루면서 인간의지의 죄에 대한 종속성과 인간실존의 죄에 대한 근원적 예속성을 밝히고 있는 점에 있어서 리꾀르의 인간이해는 기독교적인 인간이해에 정위하고 있다.

 

 

2. 현상학적 본질 기술과 그 한계

 

자유와 본성에서 리꾀르는 후설레게서 배운 형상적 방법을 인간의지의 본질적 구조 기술에 적용한다.

후설의 현상학적 기술이 선험적 자아의 이론적 행위와 본질구조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반해 리꾀르의 현상학적 기술은 의지한 주관, 다시 말해서 그의 행위를 인식하고 또 하게 되는 의지하는 주관을 대상으로 한다.

리꾀르의 기술은 따라서 의지의 본질에 대한 형상적 기술이다. 형상적 기술은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의 근본적인 구조들을 결정, 신체운동과 승낙의 세 단계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런 의미에서 형상적 기술은 의지행위를 세 단계로서 해석한다.

 

‘내가 의도한다.’( I will)란 먼저, ‘내가 결정하며’(I decide),둘째로 ‘내가 나의 신체를 움직이며’(I move my body),셋째로 ‘내가 승낙한다’(I consent)를 의미한다.

 

리꾀르는 형상적 기술을 설명과 구분한다. 설명이란 “복잡한 것으로부터 단순한 것으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며, 경험 심리학과 자연과학이 수행하는 방법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형상적 기술은 “상호성”을 들추어낸다. 이 상호성이란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의 관계에 있어서 각자를 알리는 원리가 타자라는 것이다. 리꾀르는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의 관계성을 동등성을 넘어서는 상호성의 제시로서 본다.

의지적인 것은 항상 일차적이며 가장 직접적인 현상으로 야기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일차적으로 ‘나는 의도한다’를 말하는 그로서 이해한다.

 

소여로서 받아들이는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적\의 방법과는 거리가 멀다. 리꾀르의 형상적 기술은 순수의식의 형상적 영역으로부터는 가장 거리가 먼 일상적인 주관의 의지 영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의지적인 것과 신체적 비의지적인 것을 기술의 대상으로 한다. 형상적 기술의 장점이란 한편으로는 비의지적인 것을 의지적인 것과의 상호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비의지적인 것의 불투명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을 조명하며 또 다른 편으로는 비복합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지는 의지적인 것이 비의지적인 것의 관계에 있어서 기술됨으로써 풍부하게 되는 데 있다.

리꾀르는 후설에게서 지향성개념을 빌려와서 의지 현상학적으로 사용한다.

 

모든 기능은 그것의 대상형에 의해서, 또는 후설의 말처럼 그것의 지향성에 의하여 규정된다. 의식이란 그것이 스스로를 기획하는 대상형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달리 표현한다.

 

여기서 리꾀르는 지향성의 개념을 기획, 즉 의지의 역동체계와 관련하여 사용하면서 그것을 순수의식의 반성적 행위와 연관시키는 후설의 지향성 개념을 수정한다. 리꾀르에 따르면 기획은 결정 속에서 공식화되며, 전진적으로 신체적 동기와 연관된 행동이 되며, 완전한 공식화와 실행에 이르게 된다.

완성된 행위인 그것의 상태로부터 목적론적으로 본다면 기획은 “필연성에의 승인”이다. 왜냐하면 그 점에 있어서 기획은 더 이상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획의 개념은 의지적으로 발단되고 의지적으로 수행되는 단순한 의지적 과제로써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기획의 개념은 의지적-비의지적 상관관계와 상호성의 복합성을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신체적 동기의 비의지적 측면은 의지적 행동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의지적 행위의 결과(결정)로서 일어나는 행동(의지적 운동)은 의지함, 습관의 비의지적 기관들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의지의 범위는 필연성을 수용하고 있다.

여기서 리꾀르는 인간의지를 신체적인 필연성과 독립되고 스스로 절대적인 자유를 향유한다고 주장하는 관념론적 입장을 거부하고, 인간의 의지가 신체적인 필연성에 필연적으로 제약된다고 하는 실존주의적 입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실존주의적 입장에 섬으로써 리꾀르의 인간의지론은 인간의 영역을 육신의 제약성과의 상호관계성 속에서 기술하는 바울적인 의지이해론에 접근하고 있다.

리꾀르는 경험심리학의 주장 -모든 지각은 물리적 양으로 환원-에 대한 후설의 현상학적 논박을 수용한다.

경험심리학은 지향성의 행위를 사실로 환원시킴으로써 지향적 행위 속에서 규정된 인간주관의 중심성을 상실해 버렸다. 경험심리학의 환원주의적 명제를 거부하고 지향적 행위의 풍부한 삶을 강조한 점에 있어서 리꾀르는 후설의 현상학적 입장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리꾀르는 후설과 달리 경험 심리학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있다. 경험적 분석에 의해서 얻어진 지식들은 주관의 지식에 기여하기 때문에 경험적 심리학 등 경험적 분과들은 현상학적 노구에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리꾀르는 본다. 그러므로 경험적 분과들로부터 얻어진 재료들은 진단한적 방법에 의하여 현상학적 맥락, 즉 형상적 분석에 재통합될 수 있다.

형상적 방법에 관한 리꾀르의 해석도 단지 의식의 재소유를 의미하는 후설의 해서고다도 더 포괄적이다. 리꾀르는 형상적 방법을 순수의식의 기술로부터 더 확충해서 신체의 의식을 포함하고자 한다. 따라서 “코기토의 완전한 체험”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형상적 분석을 비의지적인 구조 즉 코기토 체험의 신체적 체험을 대상의 영역으로 분류되어 의식의 체험 기술에서 놓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리꾀르는 예리하게 지적한다.

그래서 경험심리학은 신체를 객관화하고, 자연과학은 신체를 자연적 대상으로 간주한다. 리꾀르는 경험심리학과 자연과학의 공헌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신체에 관한 경험적 분과들의 객관적인 견해들로부터 주관적인 견해로의 전이를 시도한다.

리꾀르는 비의지적인 것을 의지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함으로써 코기토를 바른 위치로 회복시키고자 한다.

의지에 관한 형상학을 통해서 신체는 경험적 기술의 대상인 객관이 아니라 신체의 주체성으로서 사고하는 자아와 관계하게 된다. 그래서 코기토는 자유와 신체 사이의 적절한 균형의 수립을 통해 온전해진다. 신체를 주체성의 영역으로 복귀시키고자 하는 리꾀르의 시도는 “신체적인 자발성”과 “신비로서의 나의 화신”이라는 개념에서 더욱 명료히 된다.

현상학적 기술에 있어서 의지적인 것, 즉 의지의 구조에 관한 순수한 기술은 신체적인 자발성의 회복을 위한 통로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리꾀르는 신체적인 자발성의 회복을 통하여 정신적 작용의 주체성과 신체적 기술의 객관성 사이의 데카르트적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한다.

의지의 철학 1권에서 리꾀르는 현상학적 기술을 두 가지 방식에 있어서 특징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첫째, 리꾀르는 현상학적 기술을 신체의 영역까지 포함하도록 확대시킴으로써 후설의 현상학적 기술이 접근 불가능하다고 배제한 신체의 영역을 기술의 영역으로 포함시켰다. 여기서 이미 후설의 현상학적 기술이 안고 있는 관념론적 경향을 극복하려는 리꾀르의 의도가 나타난다.

둘째, 리꾀르는 인간의지의 두 가지 대립극인 초월과 오류를 의지의 본질구조의 기술에 있어서 배격하고 있다.

인간을 자율적인 선험적 의식을 소유한 이성적 존재로 본 후설과는 달리 리꾀르는 인간을 대립적인 두 극인 초월과 오류사이에 위치한 존재로 보고 있다. 이러한 리꾀르의 인간이해는 종말론적인 구속(초월)과 현실적인 모순과 죄(오류)사이에 있는 인간을 묘사하고 있는 성경적 인간이해에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지에 대한 본질적인 기술에 있어서 리꾀르는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을 제약하는 이 두 가지 대립적인 극을 배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오류의 초월을 직접적인 초점으로 가져옴으로써 형상적 방법에 의해 드러나는 인간의지의 본질적 가능성이 애매하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의지함과 본성의 기초존재론과 관련하여 우리가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오류란 그것을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윤리로서 해석하는 것이다.

 

상황 속에 있는 인간의 경험적 모습의 두 극- 초월과 오류-이 의지에 관한 형상적 기술 아래서 가져 올수 있는 가능적 애매성을 피하기 위하여 이 두 개념은 당분간 현상학적인 괄호에 넣어진다. 리꾀르는 인간의지에 관한 본질적 구조의 해명에 있어서 초월과 오류의 윤리적 가치평가를 일단 배제한다. 왜냐하면 윤리적 선판단은 궁극적으로는 불가피하지만 인간의지의 본질적 기술에 있어서는 직접적인 허위화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오류의 포함은 코기토의 완전한 신체적 경험이 상실되는 의미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적 본성을 기술하고자 하는 형상적 시도로부터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류는 근본악과 의지의 결렬의 상관자이기 때문에 의지 현실태의 제한성을 조명함으로써 의지 가능태를 애매하게 한다. 그러므로 리꾀르는 인간의지의 구조를 기술함에 있어서 일단 중립적인 기술에 그친다.

 

그러므로 의지의 철학 1권에서 수행된 인간의지에 관한 형상적 기술은 추상적 차원에서 자유와 신체의 근본적인 화해를 유지하고 성취하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에 관한 이러한 연구는 역설적 존재론과 화해된 존재론의 화해일 수 있는 훨씬 넓은 도식에의 제한된 공헌이다.

 

 

리꾀르는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즉 자유와 신체의 관계를 상호성과 역설로서 파악한다. 양자의 관계는 논리적 이탈이 아니다. “신체가 자유로부터 연역되고, 자유가 신체로부터 연역되는 것은 논리적 절차가 아니다.”

논리적 연역에서 역설의 질문이 야기하지 않는다. 자유와 신체 사이에는 역설과 상호성이 지배한다. 이 양자의 상호성은 양자의 화해를 지향한다. 그러나 온전히 구체적인 화해는 아직도 형상적 기술의 차원을 넘어서서 의지의 시학에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의지에 관한 형상적 기술의 한계란 인간의지의 상반되는 극, 초월과 오류의 현실태를 배제하고, 인간의지에 관한 추상적이고 중립적인 가능성만을 제시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지에 관한 형상학은 악의 가능성 앞에서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인간을 다루지 않을 뿐 아니라, 오류를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체험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지에 관한 형상학은 의지에 관한 실존적 경험에 의하여 보충되어야 한다.

 

3. 경험 현상학적 기술과 그 한계

 

구체적인 인간의 실존을 해명하기 위하여 현상학적 기술을 이념적이고 본질적인 가능성으로부터 경험적이고 실재적인 가능성으로 이행하고자 하는 리꾀르의 의도는 구체적 실존의 실재적 가능성에 대한 방법론적 반성의 절차이다. 리꾀르는 이념적으로 본질적으로 가능한 것과 실재적으로 가능한 것을 구분한다. 전자는 일상적인 인간 실존을 전혀 도외시하는 인간의 본질기술이요, 후자는 일상적인 인간실존을 고려하는 인간의 실존기술이다. 그러므로 경험 현상학적 기술은 초월과 오류를 괄호에 넣었던 본질 현상학적 판단중지를 깨뜨리고, 초월과 오류를 인간실존의 기술차원에 포함시키게 된다.

리꾀르는 경험적 인간실존을 기술하는데 있어서, 후설의 관념론적 기술을 떠나서 칸트의 비판주의적 이념을 따른다. 칸트가 제시한 질(quality)의 세 범주들(실재성, 부정성, 제한성)을 시원적 긍정 곧 무한성, 실존적 차이, 곧 유한성, 그리고 인간적 매개, 곧 삼위의 제한적 용어로 변형시킨다.

리꾀르는 인간실존을 무한성-유한성-중재로써 변증적으로 파악한다.

 

우리가 관점, 성격, 생동적 느낌이라고 부르는 실존적 부정을 통과해서야만 인간은 시원적 긍정이 된다.

 

 

시원적 긍정과 실존적 부정을 매개하는 제 삼위의 제한적 용어 속에서 드러나는 무한성과 유한성의 변증법은 인간의 유약성, 오류성에 대한 차원을 여는 “선험적 연역”( transcendental deduction)이다.

리꾀르는 칸트의 선험적 연역을 따르면서 시원적 긍정, 곧 무한성이 그것의 변증법적인 짝인 실존의 부정, 곧 유한성에 의해 제한 당하고 추월당하는 것으로 인간실존의 경험적 구조를 기술한다.

무한성-유한성의 변증법은 인간을 유약하게 내지는 오류를 범하도록 만드는 불균형으로 기술된다.

 

이 보편적인 불균형은 인간 자신 내에서 인간의 어떠한 비-일치성에 기인한다. 그는 그의 자신들(selves)내에서 그 자신 내에서 중재적이다.

 

리꾀르는 자아의 불균형과 비일치성, 그리고 그 자신과의 중재성을 말함으로써 선험적 자아의 명증성, 일치성과 직접성을 말하는 후설의 자아개념을 칸트적 비판이념 속에서 수정하고 있다.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에서는 시원적 긍정 고 초월이 “관념론적”이 된다.

 

 

세상을 초월함에 있어서 ‘비-영역적’의식은 그것과 모든 다른 영역들까지 포함한다.

 

 

그래서 리꾀르는 칸트의 비판주의적 이념을 수용함으로써 후설의 의식을 제한시키고 있다. 의식의 시원적 긍정이란 스스로 전적인 충족을 가져오는 무한자 내지 절대자(피히테, 셸링, 헤겔)가 아니라 항상 실존적 차이, 곧 전적 충족 없는 지향성 즉 유한자이다.

인간의식이란 무한성과 유한성의 변증법적 관계, 다시 말해서 제 삼의 용어 속에서 제한된 무한성과 유한성의 불일치 속에 있다.

이 불일치란 인간의 구조적 실존 속에 있는 훼파 가능성 내지 오류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훼파가능성과 오류가능성이란 구조적인 개념으로서 “악의 가능성”이다.

 

 

그것은 최소한의 저항점을 통하여 악의 처소를 제공하는 실재 영역과 구조를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훼파가능성과 오류가능성에 관한 현상학적 기술은 아직도 악의 체험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구체적인 해석학을 결여하고 있다. 인간의지에 관한 두 번째 기술인 악의 가능성에 대한 기술은 인간의지에 관한 첫 번째 기술인 의지의 본질적 구조에 관한 기술에 있어서 시도된 추상화의 괄호묶음을 제거하기 위하여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인간의지의 실존적 의미성에 관한 논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추상화를 제지한다는 것 또는 괄호묶음을 제지한다는 것은 순수기술의 결론을 이끌어 내거나 결론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주제의 구조를 들추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주체란 인간의지에 있어서 유한성과 무한성의 변증법 즉 현상적인 오류가능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리꾀르는 오류의 인간에서 인간론을 하이데거처럼 기초존재론으로서 구조적인 결론을 도출하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칸트의 비판주의적 이념의 빛 속에서 인간의지를 유한성 즉 오류가능성을 기술하고자 한다.

리꾀르는 ‘오류의 인간’에서 칸트의 선험적 종합을 모델로 해서 의지와 감정의 영역을 기술하고자 한다. 선험적 종합이란 객관화 의식으로 기능하는 앎의 분석이다. 이 앎 또는 객관화 의식은 변증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앎이 가지고 있는 노에마적인 유한성과 노에시스적인 무한성이다. 노에마적 유한성이란 우리의 앎이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노에시스적 무한성이란 우리의 앎은 동시에 모든 측면을 초월하고자 하는 활동이다. 이 활동은 인간의 언어능력에서 나타나고 있다.

인간의식의 반성은 객고관성을 투사하는 지향에 제한되어 있어서 자아의식이나 실존인 전체성을 결여하고 있다.

 

오성과 감상[또는 우리의 용어론 의미와 현상, 말함과 봄] 상이ㅢ 종합은 의식이나 자기-의식은 아니다.

 

 

이러한 의식이란 환원된 향식 내지 형( pattern)이다. 여기서 리꾀르는 후설의 선험적 자기의식-순수의식 속에서 의식은 자기 자신을 자기소여성에 있어서 파악한다.―을 거부하면서, 의식에 관한 칸트적 비판이념을 수용하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의 ‘나’는 단지 어떤 자에 대한 세계의 형식에 불과하다. 그것은 의식일반 즉 대상의 순수한 소박한 투명이다.

 

그러나 이 의식이라는 형식은 하이데거에 있어 의지와 감정의 총체성이 근접될 수 있는 모형이다. 의지와 감정은 그 총체성에 있어서 논구되기는 하나, 관념주의 철학에서처럼 그것이 총체성에 있어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근접될 수 있다.

 

 

선험적 양식에 있어서 시작하는 철학은 총체성을 문제로서 보여줄 뿐 아니라 그것은 근접의 용어로서도 보여준다 : 그것을 총체성을 향하 곧바로 진행하는 대신에 단계적으로 근접한다.

 

 

리꾀르는 객관화 의식의 추상적 종합으로부터 의지와 느낌의 구체적 총체성으로 나아간다. 이 총체성은 칸트적 이념적 제한으로서만 논구되어진다.

 

총체성의 이념은 과제, ...... 칸트적인 의미에 있어 주도하는 이념...... 총체화를 향한 요구이다.

 

 

이 요구는 결단코 직접적으로 충족되지 않고, 단계적으로만 근접의 방식으로서 실현될 수 있다.

의지의 총체성 기술에 있어 리꾀르는 인격의 이념에 도달한다. 인격이란 한편으로 총체적 가능성으로서의 인간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신체적 제약성 속에 갇혀있는 성격이라는 무한성과 유한성의 변증법 구조 속에 이 여기서 리꾀르는 인격의 이념을 후설처럼 자율적 관념론적으로서가 아니라 칸트의 비판주의적 테두리 안에서 파악하고 있다. 인격이란 충족되지 아니한 지향으로서 충족이기보다는 과제이다.

 

 

 

자기는 체험이기보다는 추구되어진다. ...... 이 자기는 아직도 사물이 우리가 부르기를 ‘의식’의 기획이었던 것처럼 기획된 자기이다. 자기-의식이란 사물의 의식처럼 지향적 의식이 이다.

 

 

이러한 리꾀르의 지향의식으로서의 자기개념은 바울의 신앙적인 자기 형성 개념에 형식적으로 상용하고 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우리었다함도 아니라......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여기서 바울은 후설이 마라는 바 자기의식 내지 스스로 충족되는 자기의식을 거부하고 있으며, 오히려 리꾀르가 말하는 것처럼 기획된 자기 내지 추구되고 있는 지향적 의식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따라서 리꾀르의 ‘자기’개념 내지 ‘자기-의식’은 스스로를 원본성에 있어서 파악하고 실현한다는 후설의 자기의식을 거부하고, 자기 지식과 자기의식을 과제와 기획으로 보는 점에 있어서 바울적 신약성서의 자아개념에 형식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감정의 총체적 기술에 있어서 리꾀르는 지향과 정서의 변증법적 구조를 들추어낸다. 감정이란 한편으로는 자기의 내면성을 들추어내는바 자기의 정서이다. 감정은 이 이중의 지향성을 통하여 인간실존의 부적합성을 드러낸다.

 

세계에 대한 자기의 모든 연결을 내면화하면서 감정은 자기로부터 자기의 새로운 균열을 야기한다. 감정의 부적합성은 새로운 매개, 투모스 즉 가슴의 새로운 매개를 야기한다. 갈등이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구성의 기능이다. 대상은 종합이나, 자기는 갈등이다.

 

자기를 갈등으로 보는 리꾀르의 자기관은 다시 바울의 자기관에 형식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15절-25절에서 자기의 균열과 갈등에 관하여 묘사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내 지체 속에서 다른 한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장 18-24절)

 

 

바울은 자기 속에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의지-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악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의 갈등을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아간 의지가 선한 의지를 누르고 지배하는 자기 내면의 균열에 관하여 피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원초적인 구성을 갈등으로 파악하고 있는 리꾀르의 자기관은 성서적 기독교적 인간관에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내면적인 갈등은 인간 실존이 느껴지는 균열성 내지 훼파 가능성을 말하고 있으며, 어디까지나 인간 실존의 구조적인 모습을 기술하는데 그친다. 이 내면적인 갈등 내지 균열은 실존의 가장 약한 점이긴 하나 오류 내지 악 자체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

오류가능성이란 과실과 고난의 야기에 대한 가능성일수는 있으나 인간이 잘못이나 과실을 범한다는 필연성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인간에 관한 경험 현상학적 기술은 인간실존의 갈등과 균열의 가능성을 기술하는데 그치고 있으며 악과 고난에 관한 인간의 구체적 체험에 관한 기술로 나아가지 않는다. 여기서 리꾀르는 경험 현상학으로부터 하이데거처럼 기초존재론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악과 오류가 그것의 현실태에 있어서 다루어지기 위해서는 악과 오류에 직면하여 그것의 체험을 표출하는 구체적인 개인의 고백을 다루어야 한다. 구체적인 개인에 있어서 악과 오류의 고백에의 접근은 현상학적 기술의 범위를 벗어선다.

악과오류는 구체적인 실존에 있어서는 가능태로만 존재하지 현실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상학적 기술은 오류가능성만을 해명할 수 있을 뿐 악과 오류 자체를 해명해 주지 못한다.

‘오류의 인간’에서 경험 현상학적 기술은 악과 오류를 인간 안에 있는 가능성으로 위치화시켰다. 이 점에 있어서 그것은 실존론적 기술로서 인간 속에 있는 오류와 악의 가능성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악과 오류의 현실태를 해명하지 못하는 한계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악과 오류의 현실태에 대한 해명은 방법론적인 전환을 요구한다. 그것은 악과 오류의 원초적인 고백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방법론적인 전환이란, 곧 해석학에로의 전향을 말한다.

 

4. 해석학적인 반성- 해석학적 현상학

 

악과 오류를 하나의 실존론적 가능성으로서가 아니라 한아의 구체적인 실존의 체험으로 기술하기 위해서는 의식의 명료한 직접성의 차원을 넘어서서 악과 오류를 고백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체험의 표현인 신화와 상징의 불투명한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리꾀르는 현상학적 기술로부터 해석학적 반성으로 방법론적인 전환을 시도한다.

악의 실제적 체험이 내포된 영역이란 “고백의 언어”이다. 이 고백의 언어란 “얼룩”, “죄”, “죄과” 등 기본적인 상징들이다. 이 언어들의 의미는 감추어져 있고, 애매모호하고 불투명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석학적인 반성을 통해서 비로소 그 의미는 밝혀지게 된다.

이 고백의 언어는 현상학적으로 기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반성을 위하여 선 철학적인 기반으로서 실제적으로 기능한다. 여기서 형상적 내지 경험 현상학적 기술에서처럼 의식의 규정적 행위에 대한 반성이 중지되고, 선철학적 자료 속에서 주어지는 원초적 체험의 해명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곧 선험적 현상학으로부터 해석학적 현상학으로의 방법론적 전환이다. 방법론적 전환이란 선험적 자아의 규정행위와 포기와 더불어 선철학적인 소여의 수용을 말한다. 여기서 리꾀르는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을 해석학적인 현상학으로 수정하고 있다.

리꾀르는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의 착상- 철학적 반성이란 상징 배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 자아의 명료한 직접성에서 출발한다.-을 거부하고, 해석학적 착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철학적 반성이란 상징배후로 나아가는ㄴ 것이 아니라 상징이 제시하는 다의적 의미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철학적 반성이란 상징이 의미를 야기시키는 선철학적 소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악의 상징론’에서 리꾀르는 “고백의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악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체험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얼룩의 상징은 이중의 지향성을 나포하고 있다. 그것은 이중적 지향성으로서는 심적인 불결함의 느낌을 추상적이고 불명료하게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얼룩이란 상징은 그것의 문자적인 의미인 점이라는 일차적 지향성에 의하여 알려질 뿐 아니라 관정되고 있다.

리꾀르의 신화론은 그의 상징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나온다. 신화란 상징적 재료에 대한 이차적 작업이다. 신화란 얼룩, 죄, 죄과의 상징들에 대한 소박한 해석학이다. 얼룩, 죄. 죄과의 상징들은 그것들의 원초적인 신화적 연관을 “악의 신화들”속에서 발견한다.

리꾀르에 의하면 이 악의 신화들은 두 가지 유형론으로 구분된다. 첫째 유형이란 “창조의 신화”, “비극의 신화”, “영혼의 추방신화”(오르픽신화)이며, 둘 째 유형이란 아담의 타락에 대한 성서적 얘기로써 특징지워지는 “인간학적인 고유신화”이다.

리꾀르는 이 두 가지 유형의 신화들의 서로 상반되는 경향을 지적한다.

 

 

 

 

신화의 세계는 ......두 가지 경향들 사이에서 양극화되어 있다. 하나는 악을 인간 너머로 가져가고 있고, 다른 하나는 인간 존재의 고통이 유래하는 악의 선택으로 집중하고 있다

 

 

 

리꾀르는 악의 신화들의 유형론적인 배교를 통하여 악의 두 가지 경향을 드러낸다. 그것은 인간 이전 선재하고자 하는 경향과 인간의 선택과 관련시키고자 하는 경향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작업의 두 높은 수준에서 원초적인 상징들의 양극성에 직면한다. 이 양극성은 얼룩이라는 악의 마법적 개념 속에서 지배하고 있는 외면성의 도식과 죄책과 의혹에 빠져 있는 양심의 고통스런 경험과 함께 해서만 온전히 승리하는 내면성의 도식 사이로 펼쳐지고 있다.

 

 

리꾀르에 의하면 아담신화는 이 양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아담신화는 얼룩 상징처럼 악의 우위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죄과의 상징처럼 악을 인간의 의지결정 속에 위치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리꾀르의 견해에 따르면 아담신화는 이 양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아담신화는 얼룩 상징처럼 악의 우위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죄과의 상징처럼 악을 인간의 의지결정 속에 위치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리꾀르의 견해에 따르면 아담신화는 악의 전 상징론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고유한 인간학적 신화이다.

이 상징이 철학적 사고를 토대로 하는 차원은 두 가지 차원이다. 하나는 비교적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경쟁적 차원이다. 비교적 차원이란 첫 번째 차원으로서 다양한 상징들과 신화들을 한데 모으고 그것들의 본질적이고 구조적 관계들을 드러내는 차원이다. 경쟁적 차원이란 두 번째 차원으로서 이 다양한 상징들과 신화들의 유형 가운데서 악에 관한 진리를 결정하는 차원이다. 비교적 차원이 유형론적인 접근방식이라면 경쟁적 차원은 신앙적이고 실존론적 접근방식이다. 리꾀르는 이 두 가지 차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해석학적 순환운동을 지적한다. 비교적 경쟁적 차원에서 상징으로부터 출발한 사고는 상징의 진리를 결단하기 위해 궁극적으로는 사고의 유래인 상징의 재발견으로 귀환한다.

비교적 차원에서 리꾀르는 희랍적 신화(창조의 신화, 비극의 신화, 영혼 추방의 신화)와 기독교적 신화(아담 타락에 관한 얘기)를 유형론 적으로 비교 분석한다. 경쟁적 차원에서 리꾀르는 악에 대한 진리로서 아담 타락에 관한 성경적 얘기를 제시하는 기독교적 신화를 선택한다.

이 결정에는 리꾀르의 철학적 사고가 근거하고 있는 기독교적 신앙이 개재되어 있다. 리꾀르 자신은 해석학적 순환을 인격적인 참여와 관련하여 이해한다. “믿기 위하여 이해해야 하며, 이해하기 위하여 믿어야 한다.” 상징과 신화의 진리를 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신앙과 이성은 상호 순환적 관계 속에 있어야 한다. 상징은 의미의 다양성을 비신화론화의 합리성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신앙은 이성으로 하여금 상징의 풍요성에 참여하되 상징을 인간의 이해와는 무관한 초월적 암호로서만 파악하는 영지주의에 빠져서도 안 된다.

리꾀르는 악의 상징론의 이해에 있어 아담 타락을 얘기하는 성경적 기사를 규범적인 진리의 모델로 받아들인다. 아담 타락을 얘기하는 고유한 인간학적 신화는 악을 한편으로는 인간 책임성의 사실로서 또 한편에서는 인간 행위 이전에 이미 거기에 있는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럼으로써 리꾀르는 악의 해명에 있어서 그것을 단지 은유화 내지 합리화하거나 또는 영지화하는 일면성을 극복하고 있다. 은유화 내지 합리화 시도는 악을 단지 인간의 책임성의 문제로만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펠라기우스 파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악을 영지화하고자 하는 시도는 악을 단지 인간의 무책임성과 무관한 선재적 사실로만 받아들인다. 이러한 시도는 희랍의 신화화들과 마니교의 가르침에서 대표적인 예로 나타난다.

악을 인간 책임성과 관련해서 해명하는 시도와 악의 선재를 인정하는 시도는 이성철학으로는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연결될 수 없다. 전자는 악을 인간 의지와 연고나해서만 해석함으로써 악의 선재를 수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후자는 악을 인간 의지 결정 이전에 이미 들어와 있는 비극적인 사실로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꾀르는 이 양자의 견해를 수용함으로써 악의 해명에 잉서 현상학적 반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 악의 선재란 현상학적 이성으로는 천착해낼수 없는 비합리의 심연이다. 이 악의 선재는 인간의 인격적 행위를 넘어서 있으며, 인간의 이성적 반성에 이미 선행해 있다.

그러므로 리꾀르는 여기서 해석학적 순환구조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악에 대한 해명은 인간 의지와의 관계 속에서 한편으로는 이루어지나 다른 한편으로 이 인간 의지의 결단은 악의 선재라는 비극적 사실로 회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리꾀르는 현상학적 사고를 악의 상징에 관한 해석학적 사고로 변형시키고 있다. 그는 악에 대한 합리화하고자 하는 사고를 악의 상징에 관한 해석학적인 반성으로 전이시키고 있다.

이 해석학적 반성은 영지와 은유를 피하고 악에 대한 풍부한 차원을 드러내 준다. 리꾀르에 의하면 철학적 반성(은유화) 그 자체는 비신화론의 형식이며 그것의 위험성이란 상징의 문자적 근거로부터 상징의 신비적 측면을 훼파하는 은유화에 있다.

 

반성적 사고는 본질적으로 비신화론화한다. 그것은 신화론을 은유로 환원시킴으로써 신화론을 해석한다. 이 관점에서 악의 문제란 하나의 실례이다. 악의 상징론에 관한 반성은 우리가 악의 비전이라고 부르게 될 곳에서 그 정점에 도달한다.

 

악의 비전을 드러내는 상징은 고백의 언어: 얼룩, 죄, 죄과 등이다. 리꾀르는 이 고백의 언어를 해석학적으로 반성함으로써 인간이 원초적으로 가졌던 악에 대한 구체적 경험을 들추어낸다.

이러한 구레적인 상징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사상을 제공해 준다. 악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고백의 언어에 대한 해석학적 반성은 악의 해명에 있어 악의 필연성과 우연성의 어느 한 면만이 아니라, 인간 의지와의 관계에 있어 필연성과 우연성의 해석학적 순환구조의 인정으로 나아간다.

 

 

5. 맺음말

 

 

여기서 리꾀르는 악의 해명에 있어 어거스틴과 바울의 견해에 입각해 있다. 어거스틴은 악이란 그 자체 원인이라고 보았다. 악은 인간 밖에 있는 원천이나 이유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자유의 심장에서 나왔다.

동시에 어거스틴은 이 악이 아담 실존 이전에 이미 있었고, 아담은 자유의지를 남용함으로써 죄과를 저질렀다고 해석한다.

바울 역시 한편으로는 죄를 존재론적인 힘으로써 전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죄가 아담의 죄과를 통해 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해석하고 있다.

악의 선재적 필연성과 더불어 인간의 죄과와 관련한 악의 우연성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는 리꾀르의 해석학적 사고는 바울 -어거스틴적 악에 대한 이해를 현상학적 해석학적으로 새롭게 현대적으로 조명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