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사유에 대한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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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사유에 대한 소묘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1889~1966)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건축사, 언론인, 비평가로 활동하다가, 히틀러 나치즘에 내몰려 미국으로 망명하고, 그곳에서 사회학자로 생을 마감한 유태인 지식인이다. 아도르노의 지적 동반자이자 벤야민과도 친분이 각별했던 크라카우어의 이름은 영화이론가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그가 아른하임, 발라즈와 더불어 20세기 전반 유럽에서 활동했던 가장 뛰어난 영화평론가였으며, 2차 대전 이후 두 권의 고전적인 영화이론 저작을 남겼기 때문이다.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1947)와 『영화의 이론』(1960)이 그것이다. 이 두 책은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영화이론 내지 영화사의 필독서로 남아 있다. 그러나 크라카우어를 단지 재능 있는 영화평론가, 영화이론가 쯤으로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그가 남긴 저작들을 떠올려보자. 신문 에세이와 『학문으로서의 사회학』(1922)에서 시작된 그의 필력은 『탐정소설』(1925)과 『사무원들』(1930)이라는 독특한 철학적·사회학적 분석을 거쳐 몇 편의 단편소설과 두 편의 장편소설 『진스터』(1927)와 『자크 오펜바하』(1937)를 아우르게 된다. 하지만 크라카우어는 이들과 동시에, 무려 책 여섯 권 분량이 넘는 수많은 영화비평, 문예비평, 철학적 에세이들을 썼다. 나아가 그는 『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계』라는 역사철학적 저서를 유작으로 남겼다. 건축사이자 건축학 박사이기도 했던 크라카우어를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까?
크라카우어는 현대 대중문화를 다루는 대단히 매력적인 문화철학자다. 20세기 현대 사상가들 가운데 자본주의 대도시 사회와 대중문화에 대해 그만큼 치밀하게 성찰한 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포괄적인 문화철학자로서 크라카우어가 지녔던 가장 큰 미덕은 정교하고 섬세한 관찰력이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많은 현상을 그대로 기록하려는 객관적-실증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주관적이며 열정적인’ 관찰자였다. ‘주관적·열정적’ 관찰자는 어떤 익숙한 개념이나 이론적 가설을 전제하고 현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주어진 현상을 합리적 사유를 통해 파악하고 장악하려 들지도 않는다. 반대로 현상이 갖고 있는 독특한 특질과 권리를 지켜주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감성을 최대한 열고 현상에 다가간다. 물론 이러한 다가감이 어떤 즉자적인 감정적 열광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새로운 사유의 출현을 기다린다. 그는 현상의 감각적 구체성이 지적 사유에 가하는 충격을 기다리며, 이 충격으로 인해 지적 사유가 내몰리는 한계와 위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이 한계와 위기를 포괄하고 넘어서는 새로운 ‘비판적 이성’의 가능성도 주시하고 있다.
어떻게 이러한 기다림이 가능할까? 그것은 크라카우어가 근본적으로 ‘신학적 구제’의 사상가이며 ‘유물론적 변증법’의 입장에 서 있는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벤야민과 마찬가지로, 그의 사유에서 신학적 구제는 독단적인 종교적 이설이나 초월적인 도약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상의 감각적·물질적 구체성을 최대한 긍정하면서 역사(철학)적으로 구제하려는 모티브로 작동한다. 또한 그는 유물론적 변증법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결코 개별 현상들을 추상적으로 고립시키지 않는다. 반대로 그의 사유는 현상들을 가로지르는 연관성에 주목하고, 이들과 사회 전체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내밀한 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현상의 변증법적·역사철학적 구제를 향한 열정, 이것이 바로 크라카우어가 지녔던 사유의 열정이다. 이 열정을 명확히 새길 때에만 왜 그가 그토록 집요하게 다양한 대중문화 현상을 파고들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만약 현대를 관통하는 ‘진리’가 존재한다면, 이 진리는 반드시 “대중문화의 한복판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확신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크라카우어는 영화에 주목하고 수많은 영화비평을 남겼다. 그에게 영화는 대중적 오락이 아니라 어떤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경험을 탐색하고 해명하는 가능성이었고 “물질적 현실의 구제를 증진할 수 있는 특출한 능력을 지닌 매체”였다.
크라카우어가 『역사』에서 제시하는 역사철학도 정확히 이러한 현상을 향한 열정의 연장선상에 있다. 유물론적 변증법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그의 역사관은 계몽주의적 낙관론, 사회 진화론, 역사 순환론, 유물론적 발전론 등 모든 ‘거대 담론들’로부터 거리를 둔다. 크라카우어가 역사에서 각별히 구제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거대 담론들이 간과하고 소외시키는 ‘미시적 요소들’이다. 이 요소들은 무엇보다도 ‘이름 없는’ 대중적 주체들이 대도시 거리에서 찾아 헤매고 또 발견했던 생생한 경험들, 즉 ‘영화 같은 경험들’이다.
크라카우어를 주관적·열정적인 관찰자로 부를 때, 간과해선 안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면모가 있다.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푸코적 의미에서 미시-물리학적이다. 대중문화 현상을 특정한 ‘권력 효과의 징후’로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는 이데올로기 비판적 관점에서 대중문화 현상을 일종의 역사적 ‘알레고리’로 독해하면서 그 기원을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대중문화의 위험성 또한 비판적으로 직시한다. 크라카우어의 미시-물리학적 해명 작업은 크게 세 가지 단계로 진행된다. 첫째는 대중문화 현상의 기술적·문명사적 토대를 밝히는 단계이다. 둘째는 대중문화 현상의 저변에 ‘보이지 않는 강압’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이 현상을 통해 간접적·암시적으로 표현되는 ‘합리성’의 정체를 추론하는 단계이다. 세번째 단계는 신화비판적 내지 역사철학적 해석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대중문화 현상은 각별한 의미에서 ‘역사적 자연의 형상’으로서 주목된다. 이는 대중문화 현상이 근본적으로 모호하고 양가적인 성격의 알레고리적 이미지로 논의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계에서 크라카우어는 대중문화 현상을, 한편으로는 현대사회의 대중들이 마치 자신의 일부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미지로서 독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이 자연스러움을 통해 자신의 역사적 기원을 감추고 있는 위장의 이미지로서 드러내고자 한다. 대중문화 현상이 ‘역사적 필연성의 자연’이면서 동시에 ‘신화적 기만의 자연’임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크라카우어는 감각의 구체성과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총체론적 관점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적 세계관 가까이에 있다. 하지만 근대적 주체의 내면성보다 자본주의 체제의 물질적인 강압과 지배력을 더 중요한 작인으로 본다는 점에서 탈-근대적, 탈-휴머니즘적 입장에 서 있다. 또한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맹신과 위험성을 폭로하고 비판적·전복적인 이성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점에서 칸트 이래 비판철학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이성의 가능성이 ‘선험적 주체’의 자율성과 자유 의지에 의해 충분히 열릴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비판적 이성의 길은 더이상 지성적·도덕적 계몽의 직선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이 거대하고 복합적인 현실 속으로 들어가 그 구체적인 모습을 섬세하고 비판적으로 음미하는 우회로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중문화 현상들 혹은 그의 말로 “표면상의 표현들”은 이런 의미에서 크라카우어가 선택한 필수적인 우회로였다.
대중문화 현상은 한낱 소비적인 문화상품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대의 감춰진 ‘실상’, 즉 시대의 ‘역사적 진리내용’과 연결되어 있는 ‘징후적인 신호’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역사적 진리내용을 추구하는 문화철학자라면, 진지한 내용이 없는 듯 보이는 대중문화 현상에 더더욱 예민하게 주목해야 한다. 이 현상이 합리적이며 진지한 것으로 평가되는 일반적인 이론, 문화, 제도보다도 더 깊고 내밀하게 시대의 ‘본질적 내용’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크라카우어가 남긴 지적 유산은 지나간 시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처럼 다채로운 대중문화 현상들, 온갖 감성적·정서적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크라카우어를 다시 읽어야 할 필요성은 한층 더 절실하다. 현재를 알고 미래를 여는 길은 언제나 과거를 향해 있다.
하선규 홍익대 미학과 교수
출처: https://ysgradnews.tistory.com/13?category=650031 [연세대학원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