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가다머의 예술철학과 유희개념의 문제

나뭇잎숨결 2020. 12. 3. 11:16

 

가다머의 예술철학과 유희개념의 문제

 

 

김 광명

 

 

1. 문제의 제기

 

유희는 삶과 예술, 문화, 언어, 인간과 세계를 통일된 전체로 보게 한다. 유희를 통해 분열된 통일성은 흡수된다. 하이드만은 유희개념의 존재론적 규정과 인식론적 기능을 나누어 보면서 특히 유희의식과 유희현상의 일치를 주장한다. 이는 가다머의 유희개념과 맥락이 통한다. 가다머는 유희를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으로 보면서 존재론적 해석의 근거로 삼는다. 이를테면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것이 유희라는 현상이다. 어쨌든 유희는 인간주체의 활동이다. 유희란 우리가 그 속에 참여하는 존재의 자기규정적인 운동이다. 그리하여 유희는 자기계기에 의해 스스로 진행되어 간다. 하지만 가다머는 유희를 인간의 주관성과만 관련지으려는 근대미학의 오류를 지적한다. 가다머l의 이런 관점은 지나치게 존재론적으로 해석하려는 나머지 특히 칸트나 쉴러의 의도를 너무 편협하게 해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도 매개적이고 통일적인 유희의 의미를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른바 서구 근대미학의 큰 흐름 속에서 유희개념의 내용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지는가를 살펴보고, 이를 가다머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고찰해 보기로 한다. 또한 현대적인 맥락에서 부이텐다이크나 호이징하의 유희개념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아울러 짚어 보기로 한다.

 

2. 근대미학과 유희개념

 

 

근대에 들어와 칸트의 유희개념은 내적 운동, 내적 인과성과 관련되며, 동시에 현상하는 것의 형식을 위한 역동적인 질서의 원리로서 이해된다. 그의 미학에서는 관객ㄱ과 해석자와의 관계, 미의 분석, 목적 없는 목적성의 선천적인 원리, 인간의 무목적적 행위와 감관대상의 형식으로서의 유희에 대한 관심이 주된 문제로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칸트는 철학적 반성 안에서 유희의 의미와 기능에 관한 물음을 던진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미적 판정은 인식능력들의 자유로운 유희에 있어서 주관적인 합목적성을 나타낸다. 유기적 존재자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자연목적에 의하여 자연의 목적론적 판정이 일단 자연의 목적들의 체계라는 이념을 상정할 권리를 우리에게 준 이상, 자연의 미도 다시 말하면 자연의 현상을 포착하고 판정할 때의 자연과 우리의 인식능력들의 자유로운 유희와의 합치도 역시, 인간을 하나의 항으로 하는 체계로서의 자연 전체에 있어서는 자연의 객관적 합목적성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미적의미에서의 정신이란 심의(心意)에 생기를 넣어주는 원리이다. 이 원리로 약동케 하는 것이니, 이는 저절로 지속되며 또한 유희를 통해 스스로 지속을 위한 힘을 보강해 간다. 우리의 판단력에 적합한 형식들은 그 다양성과 통일성에 의해서 유희하는 심의 능력들을 강화하고 즐겁게 해준다. 대상에 관한 미적 쾌감은 주어진 표상에 의하여 일어나는 심적 상태의 보편적인 전달 가능성에서 온다. 보편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인식과 인식에 속하는 한에서의 표상이다. 이런 표상에 의해 인식능력들은 활동을 시작하며, 자유로운 유희를 한다. 이러한 표상에서 일어나는 심적 상태란 자유롭게 유희하는 감정의 상태이다. 그런데 대상은 표상에 의해 주어지며, 표상으로부터 인식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구상력과 오성이 필요하다. 특히 이때 좁은 의미의 미에 관해서는 구상력과 오성의 유희가, 그리고 숭고미에 관해서는 구상력과 이성과의 유희가 문제된다. 칸트는 미적 기술, 즉 예술을 언어예술, 조형예술, 유희예술 세 가지로 분류하면서, 보편적으로 전달 가능한 감각에 기초한 미적 유희의 예술을 말한다. 여기서 보편적으로 전달 가능한 감각, 즉 공통감(共通感)이란 인식능력들이 자유롭게 유희하는 결과 나온 것이다.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유희는 근대의 서구 시민 사회적 산물이다. 특히 소외개념에 저항하면서 인간실존의 총체성을 지향하여 생겨났다. 이런 입장은 쉴러에게서 절정을 이룬다. 쉴러는 그의 ‘인간의 미적 교육을 위한 서한’에서 소재충동과 형식충동, 충동적 욕구와 도덕적 필요성을 매개하는 역할을 위해 유희충동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쉴러는 우리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필연적인 것과 우리의 외부에 놓여있는 현실적인 것과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충동’개념을 끓어 들이고 있다. 충동이란 안과 밖의 두 가지 서로 대립된 힘을 통해 밀려나오게 되고 밀려들어가게 될 때,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대상 또는 목표를 실현하도록 몰아대는 그 무엇이다. 감성적 충동 또는 소재충동이란 물리적 현존재의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성질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충동은 인간을 시간의 제약 속에 놓으며, 그를 소재 또는 질료로 만든다. 현상 안에서나 경험의 영역에서 우리는 이러한 감성적 충동을 통해 근거 지어진다. 형식충동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현상의 다양함을 조화시키고 일치시킨다. 우리에게 감성충동이 있기에 다양한 경우를 받아들이거니와 형식충동은 우리에게 필연적 법칙을 부여한다. 감성충동은 변화를 요구하며, 형식충동은 통일과 지속을 요구한다. 두 가지 대립된 충동 간에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쉴러는 이들 양자를 지양하는 제 삼의 것으로서 유희충동을 내놓는다. “양 충동의 교호작용은 물론 인간이 그 자신의 현존재의 완성에서 전적으로 해결할 수 있은 이성의 한 과제이다.” 이렇듯 해결가능성을 이성의 과제로 삼는 것은 근대합리론의 연장선 위에서 이해되긴 하지만 그의 한계로 보여진다. 쉴러는 그의 미적 유희에서 칸트의 “표상능력의 자유로운 유희의 감정”에 대한 이해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유희는 대게 규칙에 의해 이끌어지나 이 규칙은 자유로운 창조를 전제하고 있다. 유희충동에 의해 지배를 받는 미적 상태는 의무와 경향 사이에서 칸트적인 엄격한 대안을 벗어나게 해준다. 형식과 소재간의 공동체로서의 유희는 인류의 개념을 현실과 이념, 우연과 필연, 수동적 겪음과 능동적 행함의 간격을 메꾸어 주면서 새로운 경지로 완성시켜 준다. “형식을 내용으로부터 해방시키고, 필연적인 것을 일체의 우연적인 것으로부터 순수하게 보존하는 일에 모든 것이 달려있는 선험철학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일에 우리는 아주 익숙해져 있다. 즉 물질적인 것을 단지 방해물로 여기고, 감성이 따로 이일에 있어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이성과는 반드시 모순관계에 놓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방식은 물론 칸트적인 체계의 정신에 잇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전적으로 그러한 체계의 문제에 있다고 하겠다. 그 영역을 지켜주고, 이 양 충동의 각각에게 자기의 한계를 안전하게 해주는 일이 교양(Kultur)의 과제이다. 그러므로 교양은 양 충동에 동일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감성적 충동에 대해서는 이성적 충동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이성적 충동에 대해선 감성적 충동을 주장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교양이 하는 일이란 이중적이라 하겠다. 첫째 자유의 공격에 대해서는 감성을 지켜주며, 둘째 감각의 위세에 대해서 인격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일이다. 감성은 감정능력의 형성을 통해 다다르게 되며. 인격은 이성능력을 육성함으로써 이루게 된다.” 교양은 인간 심성의 형성(Bildung)으로서 이른바 서구의 근대 이후 인문성을 이끌어 온 개념이다.

 

 

 

 

3. 유희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

 

 

3-1. 가다머의 유희개념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다머는 예술작품의 존재론적 근거에 대한 설명으로서 유희개념을 끌어 들인다. 근대 미학, 특히 칸트나 쉴러에게서 보인 주관적인 의미를 벗어나고 있다. 예술작품의 창작자나 감상자의 태도나 기분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유희를 예술작품 자체를 가능케 하는 존재방식으로 본다. 가다머는 유희와 유희하는 자의 태도를 구분한다. 유희는 유희 자체와 관계를 가질 뿐이다. 우리는 유희 안에서 활동적이고 염려하는 현존재를 유희로서 규정할 수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와 연결된다. 예컨대 유희하는 자가 유희하는 가운데 전념하는 동안 유희의 목적은 실현되는 셈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유희하는 자의 주관적 반성에 근거하여서는 유희의 본질을 밝힐 수 없게 된다. 유희는 미적 의식이 아니라 예술 경험인 것이다. 예술작품은 주관과 반(反)하여 서있는 대상이 아니다. 예술작품은 예술을 경험하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 그 참된 존재의의를 가진다. 예술경험의 주체는 작품을 경험하는 사람의 주관성이 아니라 작품자체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희도 유희하는 자의 의식과는 독립된 그 자체의 본성을 지닌다. 따라서 가다머에 의하면 유희하는 자는 유희의 주체가 아니다. 유희는 유희하는 자를 통해 표현될 뿐이다. 유희인 운동을 끝내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끊임없는 반복 속에서 새로워진다. ‘이리 저리로의 운동’은 유희의 본질을 규정하는 명백히 중심적인 말이긴 하되, 여기서 누가 혹은 무엇이 이 운동을 수행하는가의 문제는 중요치 않다. 오직 유희되어진 것이 유희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굳이 유희하는 주체를 정할 필요가 없다. 유희는 운동 그 자체의 수행이다. 유희의 존재방식은 유희가 이루어지도록 거기에 주체가 있어야 한다는 그런 방식이 아니다. 유희의 가장 근원적인 의미는 중간적인 의미이다. 그것은 매개적이며 동적이다. 유희에 고유한 주체는 어떤 활동 아래에서 유희하는 주관성이 아니라 유희하는 과정에 있어서 유희자체이다.

호이징하는 모든 문화에서의 유희의 계기를 탐구하면서 “종교적인 의식(Kult)의 신성한 유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로 하여금 유희하는 의식 속에서 특유한 비결정성을 인식하게끔 한다. 비결정성은 열려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개방성은 신앙과 불신앙 사이를 구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야만인은 존재와 유희사이에 어떠한 개념상 구분도 없다고 생각한다. 상(像)과 상징(象徵) 간에 놓여있는 어떠한 동일성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점이 의문으로 남는다. 즉 신성한 행위를 하면서 유희의 기본개념에 집착함으로써 최소한 야만인의 정신상태에 가까이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우리들의 유희개념에서 신앙과 거짓사이의 구분은 없어진다.” 유희하는 자의 의식보다도 유희가 더 우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유희는 하나의 질서를 나타낸다. 질서 속에서 이리 저리로의 유희운동은 결과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운동은 목적이나 의도가 없을 뿐 아니라 애써하는 어떤 노고도 없다. 유희는 자기목적이다. 유희는 저절로 발생한다. 그러나 이때 노고나 노력이 없다 함은 긴장이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고, 유희는 긴장의 이완으로서 주관적으로 경험된다.

유희의 질서구조는 유희자로 하여금 유희자체에 몰입시키고 현존재에 고유한 긴장감을 이루는 주도권을 제거해 준다. 이는 유희하는 중에 생기는 그리고 지속적으로 새로워지는 유희에서 그리고 자발적으로 반복하는 충동에서 보여진다. 유희의 존재방식은 자연의 운동형태와 매우 가깝다. 인간의 유희는 자연적인 과정이다. 인간이 하는 유희의 의미는 인간이 자연인 까닭에, 그리고 그런 한에서 순수한 자기표상이다. 무엇보다도 유희의 중간적인 의미는 예술작품의 존재와 맺는 관계에서 나온다. 자연은 어떤 목적이나 의도 없이, 또한 애쓰지 않고도 늘 스스로 새로워지는 유희인 한에 있어서 예술의 한 범례나 본보기로서 나타난다. 그래서 슐레겔은 이렇게 말한다.

예술의 모든 신성한 유희는 세계의 끊임없는 유희, 영원히 스스로 형상화하는 예술작품과는 거리가 먼 모방일 뿐이다.

 

‘이리저리’란 상징적인 의미를 아울러 담고 있으며 분명히 아주 본질적으로 유희에 속한다. 유의는 자유분방함과 무아지경의 두 극단사이에서 움직인다. 따라서 유희의 분위기는 가변적이다. 호이징하는 혼자 힘으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유희란 없다고 한다. 유희가 되기 위해선 실제로 함께 유희하는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유희자가 그것과 더불어 유희하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유희자의 당김이 저절로 반대의 끌음으로 응답된 다는 것이다. 유희하면서 행동하는 인간의 주관성이 문제가 되는 곳에서는 유희자에 비해 유희의 우위는 유희하는 것에 의해 특수한 방식으로 경험된다고 가다머는 본다.

유희의 본질은 유희하는 태도 속에 반영된다. 그런 뜻에서 모든 유희는 유희되어진 것이다. 유희의 실재적인 주체는 유희자가 아니라 유희자체이다. 유희의 매력은 하나의 고유한, 특별한 정신을 갖고 있음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유희공간을 가득 채우는 규칙과 질서는 유희의 본질을 이룬다. 유희가 이루어지는 유희공간은 유희를 통해서만 측정되고 유희운동을 규정하는 징서를 통해서 제한받는다. 인간이 유희하는 데는 유희의 장이 필요하다. 유희의 장의 경계를 정하는 일은- 호이징하가 신성한 구역과도 같이 옳게 지적한 바 있듯이- 닫혀진 세계에로의 유희세계를 어떤 이행이나 매개 없이 목적의 세계에 대비하여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유희한다거나 혹은 어떤 것을 유희한다는 것은 유희운동의 질서 지워진 이리저리로의 행동으로 규정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유희장이다.

유희하는 사람은 유희하는 중에도 유희의 고유한 본질이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바, 목적에 따라 행동하는 긴장감을 자유로이 벗어나 어떤 태도를 취한다. 모든 유희는 유희하는 자에게 어떤 과제를 부여한다. 그는 단지 유희의 과제 안에서 그의 태도의 목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더 유희할 자유의 공간을 내놓고 만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공놀이를 할 때 그의 과제를 설정하는 바, 이 때 과제란 바로 놀이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놀이의 실제 목적이 과제를 푸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유희운동의 질서와 형태에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유희하는 태도가 뜻하는 경쾌함이나 안도감은 유희의 과제가 마땅히 풀어야 할 특수한 과제의 성격을 띤다. 인간적 유희의 자기현시는 유희의 가상목적에 결합되어 있는 행동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의 의미는 실로 이러한 목적의 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의 확장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가상이기 때문이다. 유희의 가상적 성격과 유비적 성격은 미적 현실감을 확대시킨다. 그리하여 오히려 유희의 과제에 정력을 쏟는 일은 완벽하게 유희하는 일이다. 이러한 가능성이 그 자체 뜻하는 바는 예술의 유희적 성격에 고유한 것으로 나타난다. 유희세계의 닫혀진 공간은 여기서 그 벽을 허물게 된다. 종교의식이나 연극은 유희하는 어린아이들이 나타내는 바와 같은 의미에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의식에서의 유희나 연극에서의 유희는 그것들이 나타내는 것 속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구경하면서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유희는 한갓 질서 지워진 운동의 자기현시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현시가 된다. 모든 현시에 고유한 이러한 지시는 예술의 존재를 위해 구성적이다.

일반적으로 유희란 본질상 표현일 수밖에 없다. 유희자는 그 안에서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나타낸다. 어린아이들은 심지어 표현할 때조차도 그들 자신을 위해 놀이한다. 종교의식에서 신을 모사하거나 유희에서의 신화의 표시는 유희에 참여하는 자가 연행되고 있는 유희에 전적으로 몰입하고 그 안에서 고양된 자기현시를 찾을 뿐 아니라 유희하는 자가 관중을 위해 전체적 의미를 나타낸다. 관중에로의 열려있음은 오히려 유희의 폐쇄성을 개방성으로 바꾸어 준다. 그러면서도 관중은 유희가 그 자체 무엇인가를 완성한다. 중간과정으로서 유희를 규정함은 그 매개적이고 역동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유희는 단지 유희함의 의식이나 태도에 그 존재의의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에 반하여 이것을 그 영역 안으로 끌어 들이고 유희의 정신을 채워넣는 일이 중요하다. 유희자는 유희를 넘어서는 현실성으로서 유희를 경험한다. 특히 유희가 관중을 위한 표현으로서 나타날 때 그러하다.

유희는 유희자와 유희를 바라보는 관중을 포함하는 전체이다. 예술의 표현은 그 본성에 따라 누군가를 위해 있다. 역설적으로 들릴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듣거나 바라보는 이가 아무도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마치 전위 음악가 존 케이지의 <4분 33초>라는 무언의 연주가 누군가를 위해 있는 듯하면서도 아무도 위해 있지 않은 것처럼 그러하다. 이는 존재와 비존재를 포괄하는 전체이다.

 

3-2 구조 혹은 형체로의 변형과 총체적 매개

 

인간적 유희는 예술이 됨으로써, 즉 ‘구조로 변형됨으로써’ 그것의 참된 완성을 이룬다. 이러한 전향을 통해서 유희는 유희의 이상성 혹은 이념성을 얻는다. 이는 예술의 존재를 규정하기 위해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변형의 의미를 얻을 때이다. 변형(Verwandlung)은 변화(Veranderung)가 아니다. 특히 변화란 광범위한 것이다. 변화된 것은 동시에 그 자체로서 남아 있고 지속된다. 범주적으로 보면, 변화란 질의 영역에 속한다. 변형이 뜻하는 것은 어떤 것이 갑작스레 전적으로 다른 성질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구조로의 변형은 이전의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지금 있는 것은 예술의 유희 속에 표현되는 것이고, 이는 지속적인 진실인 것이다. 여기서 근대미학적인 주관성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본다면, 이는 사태를 잘못 본 것이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유희하는 자이다.

우리가 유희의 본질에 대해 끌어냈던 모든 결론은 유희자 자신과 유희를 주관적으로 구별하는 일이 유희의 진정한 본질이 아니라는 점이다. 유희자체는 오히려 누구를 위해서도 유희의 동일성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변형이라는 것이다. 유희자 혹은 시인은 그들 자신에 의해 유희된 것이다. 구조로의 변형은 다른 세계로 단순히 옮겨 놓는, 이를테면 전치(轉置)가 아니다. 그것은 유희가 놀이되는 닫혀진 세계이다. 여기서 닫혀진 세계란 어떤 내용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형식을 말한다. 그것이 하나의 구조인 한, 그 자체 안에서 어떤 기준과 척도를 지녀야 하거니와 그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측정되지 않는다. 변형은 진리에로의 변형이다. 유희의 현시 속에서는 있는 바의 것이 나타난다. 있는 바의 것이 나타남은 하이데거적인 의미이다. 이는 존재의 비은폐성으로서의 예술작품의 근원이요, 진리이다. ‘현실’은 소망과 염려, 비결정성이라는 가능성의 미래지평 속에 있다. 미래의 비결정성은 현실이 필연적으로 기대 뒤에 남게 되는 그러한 기대의 과잉이 허용하는 바의 것이다.

변형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구조 혹은 조직, 형성물이라고 부르는 바의 자립적이고 뛰어난 존재방식으로 특징지어진다. 변형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이른바 현실은 변형되지 않은 것으로 규정되거니와 현실을 지양하는 것으로서의 예술은 진리로 규정된다. 모든 예술이 모방론을 근거로 삼았던 고대 예술론은 춤을 신적인 것의 현시로 본 유희로부터 명백하게

유래하게 된다. 모방에 대한 인식의 의미는 다시금 인식하는 재인식이다. 여기서 재인식이란 무엇인가? 현상에 대한 보다 정확한 분석은 우리에게 중요한 표현의 존재의미를 분명하게 해 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적 표현은 불유쾌한 것을 유쾌하게 만든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런 이유로 칸트는 예술을 어떤 사물에 대한 미적 표상인 것으로 정의한다. 왜냐하면 예술은 추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현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설명하는 모방적인 것의 원상황은 거기에 표현된 것뿐 아니라. 보다 근원적으로 거기에 있는 바의 것이다. 그러기에 모방과 표현은 복제적 반복이 아니라 본질인식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순히 무엇을 다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끌어내고 집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현으로서 모방은 뛰어난 인식적 기능을 한다. 이런 근거 위에 모방개념은 예술론에서 예술의 인식적 의미가 문제시되지 않는 한 지속적일 수 있다. 그러나 진리인식이 본질인식인 한 그러하다. 왜냐하면 예술이 그런 인식에 뚜렷한 방식으로 기여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근대과학의 유명론과 그것의 현실개념을 위해, 그리고 그로부터 칸트가 미학을 위해 불가지론적 결론을 끌어냈을 때, 모방개념은 미적 결속력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주관주의적 전향은 곧 예술이 인식이나 진리와는 무관한 것이 됨을 뜻한다. 그러나 가다머는 예술이 진리의 인식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해석학적 경험으로서의 예술경험을 유희개념의 실마리로 살펴보고, 결국 표현이 예술작품 자체의 존재양식 자체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다머에 있어 예술경험은 미의식 비판에서 시작된다. 미의식이란 미적 가치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이다. 그것은 미적 감정이라고도 한다. 미의식은 작품이라는 객체에 대해 주체의 체험으로서의 미적 체험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존재하는 객관대상으로서의 작품보다 체험하는 주관이 강조된다.

예술의 존재가 그 스스로 아는 것만큼 미적의식의 대상으로서 규정되지 않으며 오히려 반대로 미적 태도라는 것이 주제가 된다. 그것은 표현의 존재과정의 부분이며 유희로서 유희에 본질적으로 속하게 된다. 앞서 보았듯이, 유희는 구조 혹은 형체(Geblide)이다. 유희되어진 것은 의미 있는 전체를 이룬다. 반복되어서 표현되고 그런 의미에서 이해된다. 구조 혹은 형체는 유희될 때에 이루어진다. 유희자가 유희하며 관중이 인식하는 것은 마치 시에서 의도된 바와 같은 형태이고 행동자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의 표현과 유희자의 표현이라는 이중의 모방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이중의 모방은 시인에게나 유희자에게서 현존재로 되는 하나이다.

상연(上演)의 모방적 표현은 시가 원래 요구하는 바를 현존재로 가져온다. 시와 시의 소재라는 이중적 구별, 혹은 시와 상연이라는 이중적 구별은 우리가 예술의 유희에서 인식하는 진리의 통일이라는 이중적 비구별과 일치한다. 예술작품의 경험에 있어서 ‘미적인 것’과 ‘비미적인 것’과의 구분은 없다. 이러한 구분의 철폐는 오늘날의 확장과 해체의 상황 속에서 뚜렷한 특징이 되고 있으니, 그것은 형식과 내용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예술작품의 미적체험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은 내용도 형식도 아니다. 이 둘이 합해져서 자기에 고유한 역동력을 지닌 세계가 된다. 이런 구분보다도 미적 비구분 혹은 미구분을 주장한다. ‘미적 미구분’이란 통일성이요, 상호 연관되고 침투된 과정이다. 예술작품의 진정한 이해는 그 작품의 존재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작품은 단지 지나간 과거로서 주관적인 회상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대상은 영향사적 해석에 의해 현재의 빛 속에 다가온다. 여기서 이해는 창조적 사건으로 생기한다. 과거의 지평과 현재의 지평이 변증법적으로 매개된다는 말이다.

 

 

3-3 미적인 것의 시간성

 

동시성이란 무엇인가? 미적 존재는 어떤 시간성을 갖는가? 미적 존재의 동시성과 현재성은 일반적으로 무시간성으로 불리워진다. 무시간성을 시간성과 더불어 생각하는 일은 무시간성이 본질적으로 시간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무시간성은 시간성에 근거하여 생기지만 시간성과는 반대되는 변증법적 특성을 지닌다. 한스 제들마이어가 바아더와 연결하여, 그리고 볼노프를 끌어대어 예술작품의 시간성을 규정하고자 탐구하는 역사적 시간성과 초역사적 시간성이라는 두 가지 시간성에 대한 이야기는 변증법적 대치를 넘어서지 못한다. 초역사적인 ‘신성한’ 시간은 거기에선 ‘현재’가 덧없는, 일시적인 순간이 아니라 시간의 충만이고 실존적 시간성으로서 기술된다. 이러한 대치 혹은 대립이 얼마나 충분치 못한가는 ‘진정한 ’ 시간이 역사적 실존적 ‘가상시간’ 속에 튀어나온다는 것을 용인할 때 알게 된다. 이렇게 튀어나옴은 지속성 없는 경험적 의식처럼 출현의 성격을 띄고 있다.

그리하여 사태에 따라 미의식의 난점들이 다시 되풀이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술작품의 시간성이 중요하다 해도 모든 시간이해가 수행해야 할 문제는 연속성이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에 고유한, 신성한 시간으로서의 시간성을 이미 어쩔 수 없이 진행된 역사적 시간으로부터 떼어내는 일은 예술에 대한 인간적이고 유한한 경험의 한갓된 반영으로 남는다. 인간적 자기이해의 입장에서가 아닌 신의 계시로부터 출발하는 시간에 대한 성서적 해석만이 ‘신성한’ 시간에 대해 말할 수 있으며, 예술작품의 초시간성과 신성한 시간간의 유비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정당화 없이 ‘신성한’ 시간에 대해 논하는 일은 예술작품의 시간적 무아경이 아니라 그 시간성에 달려있는 고유한 문제를 숨기는 것이 되고 만다.

구아르디니는 그의 저서 “예배의 정신‘에서 예배를 유희의 최고의 범례로 보면서,”목적이 없으나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플라톤이 성스러움을 유희라고 본 것은 유희의 개념을 정신의 최고경지에까지 올려놓은 좋은 예이다. 인간의 노력 가운데 최고의 목표인 신성에 바쳐진 유희가 바로 그의 종교개념이다. 특히 예술에서의 유희형식을 보면, 유희가 시 자체에 내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적 표현의 모든 형식은 유희구조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시가 고대문화에서 중요한 예배적 사회적 기능을 했던 이유는 바로 시가 음악적 낭송과 결합되어 있었고, 모든 진정한 제의는 노래와 춤과 유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이 곧 유희이다. 예술작품의 고유한 존재는 유희의 표현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으며, 표현 속에서 그 형체의 통일과 동일성이 나오게 된다. 자기표현에 의존한다는 것은 예술작품의 본질이다. 표현은 반복의 특성을 갖는다. 모든 반복은 동등하게 그 작품의 원형이다. 축제는 이러한 시간구조를 잘 보여준다. 축제는 그 본질상 반복된다. 가다머는 그것을 축제의 전회라고 부른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축제는 또 다른 축제도 아니고 본래 축하받았던 축제의 단순한 회상도 아니다. 거의 모든 축제가 지니고 있은 본래적인 종교성은 현재의 시간경험에서 알고 있은 그러한 구분을 배제한다. 따라서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축하받을 지라도 항상 다른 것으로 되는 것이 그 본질이다. 항상 다른 것이 됨으로써만 존재하는 실체는 역사에 속한 모든 것보다 더욱 근본적인 의미에서 시간성을 갖는다. 축제는 경배와 봉헌을 받는 곳에서만 존재한다.

이와 같은 논리가 연극에서도 통한다. 연극은 관중을 위해 표현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 존재는 결코 관중이 갖는 경험의 접점이 아니다. 오히려 그에 반해 관객의 존재는 관객의 현존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옳다. 현존한다는 것은 공유함을 뜻한다. 관객에게 예술이라는 유희로서 그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단순히 순간의 격정적 감정에 자신을 소모시키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대한 요청과 아울러 요청의 행위를 갖는다. 키에르케고르와 함께 시작된, ‘변증법적 신학’이라고 부르는 반성의 유형에서 이러한 요청의 개념은 그가‘동시성’이라는 개념으로 부른 것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가능케 했다. 요청의 개념은 동시성을 매개하기 위해 쓰여지고 따라서 해석학 문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동시성’은 예술작품의 존재의 일부를 이룬다. 그것은 ‘현존성’의 본질을 구성한다. 동시성은 특히 종교행위와 제의 및 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현존성의 의미는 되찾는 행위, 그 자체에서의 참다운 공유이다. 이는 예술경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절대적 현존은 미적 존재의 존재방식을 설명해준다. 관객이 서있는 절대적 순간은 자기망각의 시간이자, 자기와의 화해의 시간이다. 그것은 미적 관조의 시간이며, 사물과 정신이 대화하는 시간이다. 이를 두고 플라톤은 영원한 현재의 시간이라 말한다.

 

3-4 비극적인 것의 예

리하르트 하만, 막스 쒤러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비극적인 것은 비미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미의 유형 혹은 범주에서 보면 비장미(悲壯美)는 고대 그리이스이래 인간의 의지와 행위의 숙명적인 갈등에서 비롯된 중요한 예술형식이 되어 왔다. 미적인 것의 본질은 유희와 표현으로서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정의에서 관객에 대한 효과를 포함시켰다. 비극의 정의 속에 관객의 개념이 들어가는 것은 관객이 연극에서 차지하고 있는 필수적인 역할을 분명히 해주었다. 관객이 연극의 일부라는 사고방식은 유희의 의미를 확실히 해준다. 일련의 비극적 사건에서 경험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무대에서 보여지는 희곡이 아니라 ‘삶’ 속에서의 비극일지라도 모든 침투와 영향을 거부하는 의미의 닫혀진 순환이다. 비극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것은 그대로 용인된다. 따라서 그것은 기본적으로 ‘미적’현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론에서 주장하는 비극적 우수는 고통과 쾌가 뒤섞여있는 일종의 구원이자 해결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은 현대비극에 있어 적절한 설명이 못된다. 왜냐하면 비극은 죄악과 속죄가 같은 값에 상응하는 곳에 존재하지 ㅇ낳기 때문이다. 현대비극은 죄악의 모든 주관성에 불구하고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운명이라는 힘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 운명의 힘은 죄악과 속죄의 불균형 속에서 양자에게 똑같은 크기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관객에게 확인되는 것은 무엇인가? 확실히 그것은 관객에게 조성되는 진정한 요청이자 범죄행위로부터 비롯되는 불균형과 공포이다. 비극의 확인은 이러한 요청의 완수이다. 관객은 운명의 힘 앞에서 자신과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는다. 그것은 일종의 실존적 자기인식이다. 관객은 표현의 예술을 즐기면서 미의식의 거리와 자신을 떼어놓는 것이 아니라, 현존과의 긴밀한 교섭에 자신을 놓는다. 비극적 표현에서 가장 강조되어야 할 점은 표현되고 인식된다는 점이다. 비극적 감정은 관객이 획득하는 자기인식으로부터 온다. 그는 비극적 행위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비극적인 것에서 타당한 것은 보다 넓은 맥락에서도 타당하다. 작가에게 있어 자유로운 창작은 미리 주어진 것에 의해 조절되는 일반적인 소통일 뿐이다. 비록 그가 아무리 많은 것을 상상할 지라도 모방론의 잔재가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작가의 자유로운 창작이란 작가를 구속하고 있은 공통진리의 표현이다. 그것은 조형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상상력과, 천재의 창작에 의한 미학적 신화는 실재성에 도전하지 못하는 하나의 과장으로 남아있다.

예술가는 그가 목표로 삼고 있는, 주위의 대중과 같은 전통위에 서 있다. 예술작품은 예술가가 그 안에서 자신을 인식함으로써 더욱 충실하게 속하게 되는 그 자신의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