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막달레나, 사도들을 위한 사도(Apostolorum Apostola)
"여인아, 왜 우느냐?"(요한 20, 13)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6년 6월 3일, 예수성심대축일에 발표된 교령을 통해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의 사도’(Apostolorum Apostola)로 선포하셨다.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에- 성 그레그리오 교황의 복음서에 대한 강론에서
(Hom. 25,1-2.4-5: PL 76,1189-1193)
2020년----------------
막달레나는 누가 치워 버렸다고 생각한 그리스도를 애타게 찾았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에 가서 주님의 성시를 찾아내지 못했을 때, 그 성시를 누가 치워 버렸다고 생각하고는 제자들에게 말해 주려고 갔습니다. 제자들은 와서 보고 그 일이 막달레나가 자기들에게 말해 준 대로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계속됩니다.
"제자들은 자기 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어서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다."라고 덧붙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이 여인의 마음속에 있는 열렬한 사랑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제자들이 가버린 후에도 주님의 무덤을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찾아내지 못한 것을 계속 찾았습니다. 또 찾는 동안에 울고 있었습니다.
사랑으로 불타올라 누가 치워 버렸다고 생각한 그리스도를 애타게 찾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뒤에 남아서 혼자 찾고 있었기에 자기 혼자만 그분을 뵙게 되었습니다. 선업에 따라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항구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 자체이신 그분은 "끝까지 참는 자는 구원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찾았지만 처음에는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찾았기에 찾아냈습니다. 찾고 있는 동안 그녀의 애타는 소망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소망이 더욱 강렬해져 마침내 그것이 이루어졌습니다.
거룩한 열망은 그 성취가 지체될 때 더욱 커집니다. 열망이 지체되어 시든다면 그것은 참된 열망이 아니었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진리에 도달하게 되면 이는 그가 진리를 불타는 사랑으로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내 영혼,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아가에서 "나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었도다."라고 말하고, 다시 "내 영혼이 녹아 버렸노라."고 말합니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마리아의 열망이 더욱더 커지도록 주님은 그에게 슬픔의 원인에 대해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찾고 있는 분의 이름을 말할 때 그분께 대한 한층 더 큰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기 위해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셨다" 주님이 먼저 마리아를 "여인"이라고 모든 여성에 공통되는 명칭으로 부르셨을 때 그녀는 그분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은 그녀의 이름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너를 알아보는 분을 이제 깨달아라. 나는 너를 다른 사람들처럼 일반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알고 있다." 라고 명백히 말씀하시려는 듯이 그의 본이름으로 부르십니다.
마리아는 본이름으로 불리우자 자기를 부르는 분을 알아 뵙고 곧장 "라뿌니" 즉 "선생님이여"라고 외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외적으로 마리아가 찾고 있었던 대상이었지만, 내적으로는 그에게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 분이었습니다.
2021년--------------------------------

페스 러스가 그린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와 슬퍼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마리아 막달레나가 울고 있는 모습.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교황청, 기념일을 축일로 승격
‘예수 부활의 첫 번째 증인’으로 공경 받아 온 성 마리아 막달레나의 기념일이 축일로 높여진다.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지난 6월 3일 교령을 발표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의무 기념일이었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을 이보다 더 높은 등급인 ‘축일’로 정했다고 밝혔다. 날짜는 전과 같이 7월 22일이다.
교령에서는 오늘날 교회가 여성의 존엄, 새복음화, 하느님 자비의 위대함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신자들에게 마리아 막달레나를 모범으로 제시했다.
가톨릭 여성신학자 최우혁 씨는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이 축일로 승격된 것이 “매우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 결정이 “제도화되고 부패하기 전의 교회, 그리고 예수의 삶과 부활에 충실한 복음을 회복하려는 노력이라고 본다”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말했다.
이어서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 중의 사도”라고 부른 것이 교령에 인용된 데 대해 “여성의 활동을 사도적 수준으로 재평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우혁 씨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로 보는 관점은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이 예수의 동등한 제자로서 활동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변화가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검토하겠다고 밝힌 여성 부제직을 현실화하는 초석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마리아 막달레나(막달라의 마리아)는 예수를 따랐던 여인 가운데 하나로 귀신 일곱에게서 해방되는 치유를 받고(루카 8,2),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증인이다. 막달라는 갈릴래아 호수 서안의 티베리아 북쪽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었다.

“한국 가톨릭 대사전”에 따르면 ‘막달라 여자 마리아’라는 이름은 신약성경에 12번 나온다. 이 가운데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고 내용상으로도 중요한 단락은 마리아가 예수에게서 치유를 받고 감사한 나머지 갈릴래아 부인들과 함께 예수 일행의 시중을 들었다는 집약문(루카 8,1-3), 예수의 죽음과 장례를 지켜보았다는 수난 사화(마르 15,40-47), 예수의 무덤이 빈 것을 맨 처음 확인하였다는 빈 무덤 사화(마르 16,1-8), 부활한 예수를 가장 먼저 만났다는 발현 사화(요한 20,11-18) 등이다.
신약성경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여러 명 등장한다. 초기 성서학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예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향유를 바른 죄인으로 소문난 여인(루카 7,36-50), 마르타의 자매 마리아(루카 10,38-42), 베타니아 마을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요한 11,1-12)를 다른 사람으로 봤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이 이들을 모두 같은 사람으로 보면서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공경은 더욱 성행했으며, 화가들은 ‘해골에 손을 얹고 뉘우치는 탕녀’로 마리아 막달레나를 그리기도 했다.
이처럼 신약에 나오는 여러 여성들의 이미지를 섞어 버린 설명과 달리, 미리암 파인버그 바머시의 “성경 시대의 여인들”(바오로딸, 2008)에 따르면 “근래에 와서 학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초대교회 공동체의 지도자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한다. ‘막달라 출신의 여인’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호칭 ‘막달레나’는 당시 그가 막달라 출신 주민으로 잘 알려져 있었음을 뜻하며, 루카 복음서 8장 첫 머리에 나오는 여성 제자 명단에서 부유한 요안나보다 먼저 언급된다는 사실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중요성을 나타낸다는 설명이다.
가톨릭교회의 전례일은 대축일, 축일, 기념일, 평일 등의 순서로 등급 순위가 정해져 있다.
주교회의 미디어부 설명에 따르면, 한국에서 2016년 7월 22일은 전과 같이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로 지내며 2017년 같은 날부터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로 준비하고 있다. 한국 전례력은 매년 로마 전례력과 대조한 뒤 나오기 때문에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도 같은 과정을 거쳐 전례력에 수록하게 된다. 주교회의는 이번 경신성사성 교령에 첨부된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감사송을 번역해 교황청의 추인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2022년---------------------------
『사랑』-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못합니다.
원문보기▶ Rev.S.Moyes 송영진 모세 신부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18-21).”
이 말씀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가장 먼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사도들이 아니고 왜 마리아 막달레나인가? 라고 물을 수 있는데,
답은 간단합니다.
사도들보다 마리아가 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도들도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고 깊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사랑은 사도들보다 훨씬 더 앞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여기서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을,
“너희도 살아 있어야 한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이 살아 있어야 ‘살아 있는 신앙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으로 갈 때, 사도들이 함께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시신에 향료를 바르는 일은 여자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시고
시신에 향료를 바른 사람들은 ‘남자들’입니다.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과 최고의회 의원인 니코데모가
바로 그 일을 했습니다(요한 19,38-40).
그 두 사람이 예수님의 시신을 모실 때,
여자들이 그것을 지켜보았는데(루카 23,55), 그 자리에 사도들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마리아가 발견하고
베드로 사도와 ‘다른 제자’에게 알렸을 때, 그 두 사람은 곧바로 달려가서
마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긴 했는데,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돌아갔습니다(요한 20,10).
왜 그랬을까? 당시 상황을 마리아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냥 가버린 두 제자가 몹시 야속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도, 두 제자가 무덤에 마리아만 남겨두고
그냥 가버린 것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믿었다면, 그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특히 바로 옆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말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부활신앙을 갖지 못한 상태라면,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 제자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마리아보다 덜했기 때문에,
그래서 마리아보다 소극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마리아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두 제자보다 컸기 때문에,
그래서 두 제자보다 더 적극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그때 두 제자가 그냥 돌아가지 않고 무덤에 남아서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찾았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리아와 함께 만나게 되었을까? 그것은 모릅니다.
어떻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일의 ‘결과’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셨는데,
그 일은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신 일이 아니라,
마리아 쪽에서 이미 그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일곱 마귀’에 들렸다가
예수님 덕분에 해방되었다는 것뿐입니다(루카 8,2).
‘일곱 마귀’를 어떤 윤리적인 죄로 해석하고,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죄인이었던 여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성경에도 근거가 없고,
전승에도 근거가 없는 오해일 뿐입니다.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편견도 작용했을 것이고,
마리아 개인에 대한 시기 질투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일곱 마귀’는 글자 그대로 ‘일곱 마귀’였거나,
아니면 ‘어떤 중병’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또 그 일에 대해서, “예수님으로부터 큰 은총을 받았으니까
예수님께 큰 사랑을 드린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큰 은총을 받았다고 해서 항상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 큰 사랑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5장의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큰 은총을 받았지만,
예수님께 감사와 사랑을 드리기는커녕
바로 유대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밀고했습니다(요한 5,15).
<죽었다가 예수님 덕분에 살아난 사람들,
즉 ‘나인 고을의 어떤 과부의 외아들’과(루카 7,14-15)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이(루카 8,54-55)
예수님께 얼마나 사랑을 드렸는지는
복음서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 크게 감사드리기는 했겠지만,
사랑은 복음서에 기록을 남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믿음’과 ‘사랑’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되는 인물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고, 첫 선포자라는 점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먼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못합니다.
원문보기▶ Rev.S.Moyes 송영진 모세 신부
사도 중의 사도 마리아 막달레나!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니는 아가서 저자의 절절한 모습과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스승 예수님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이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아가 3장 1절)
사랑하는 스승님이 너무 그리워 밤잠조차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여명이 밝아올 때까지, 거리와 광장을 울며 돌아다니던 바로 그 모습이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실 오랜 교회 역사 안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큰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그녀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죄 많은 여인을 동일시 해왔습니다. 회심한 사람의 대명사로 마리아 막달레나를 첫 번째로 꼽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어디에도 마리아 막달레나와 죄 많은 여인이 동일 인물이라는 근거가 없습니다. 복음서가 알려주는 그녀에 대한 기록들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고향은 막달라, 이름은 마리아, 한때 일곱 마귀에 시달리며 고생했으나, 은혜롭게도 예수님을 만나 치유를 받았다는 것, 예수님을 만난 이후 지니고 있던 전 재산을 털어 그분과 사도단의 생계에 힘을 보탰다는 것,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는 것, 예수님 부활의 최초 목격자였다는 것.
예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던 마리아 막달레나였기에 그에 상응하는 큰 사랑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물심양면으로 예수님과 사도단을 도왔고, 예수님 가시는 곳 마다 밀착 동행하면서 현실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채워드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치유된 이후 그녀의 삶은 오로지 예수님이 전부였습니다. 그녀에게서 예수님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 헌신적으로 봉사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우리 교회는 아주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드렸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여제자라고까지 불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잘 나타난대로 ‘예수님 부활의 최초 목격 증인’으로 불려집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께서는 ‘사도 중의 사도’라는 빛나는 칭호를 선물하셨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런 영예로운 칭호를 받기에 합당한 자격을 충분히 갖추셨습니다. 꽤나 부자였던 그녀는 자신이 물려받은 유산 전체를 모두 털어 예수님과 제자단의 생계를 후원하였습니다. 삼엄하고 살벌했던 예수님의 처형 현장인 골고타 언덕을 성모님과 함께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시신을 정성껏 수습했습니다. 장례 절차를 거의 주관하다시피 했습니다. 거기다 빈 무덤을 목격한 후 그 소식을 제자단에 신속히 알렸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마리아 막달레나는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못한 목숨을 하루 하루 부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희망도 없이, 삶의 의미도 찾지 못한 채, 짐승처럼 살아가던 그녀에게 기적같은 일이 생겨났습니다.
치유자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눈여겨보신 것입니다. 그분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마치 거짓말처럼 그녀의 인생에서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가고, 꿈같은 봄날이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그녀는 죽음에서 삶에로 건너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전부요 존재의 이유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앞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보여준 태도와 신앙은 제자들의 그것보다 훨씬 우세하게 보입니다. 그렇게 된 명백한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수난의 길을 회피했지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함께 걸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시선과 마음을 항상 예수님께로 활짝 열려있었습니다.
사도 중의 사도, 여사도 마리아 막달레나는 언제 어디서나 스승 예수님께 충실했습니다. 예수님의 인생 곡선이 절정에 도달했던 시절, 잘 나가던 시절, 공생활 기간에도 그분께 충실했지만, 급격히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던 수난의 시기, 특별히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때 역시 그분께 충실했습니다.
이런 마리아 막달레나의 충실성 앞에 스승 예수님께서도 기쁘게 응답하십니다.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사도들에 앞서 그녀에게 드러내십니다. 당신 부활의 최초 목격 증인이 되게 하시고, 가장 탁월한 복음 선포자가 되게 하십니다.
'마리아야!- 라뿌니!' 누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가?
<'라뿌니'는 삶의 '빛'이다>
원글보기; ▶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강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위험한 아이들’(1995)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비록 여성이지만 해병대까지 나온 존슨 선생은 문제아들만 모여있는 한 반을 맡게 됩니다. 그 반의 대장은 ‘에밀리오’란 아이인데 선생님께 성희롱까지 합니다. 처음에 존슨 선생은 이런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되었지만 아이들을 믿어주기로 합니다.
우선 아이들이 관심 있어 하는 특공 무술 활용법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면서 공부에도 흥미를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교장 선생님입니다. 교장은 존슨 선생을 교장실로 부릅니다. 그런데 노크하지 않았다며 존슨 선생을 나무랍니다. 그리고 다시는 가라테와 같은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에밀리오와 같은 반 아이가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라울이라는 아이입니다. 에밀리오는 반 아이들이 존슨 선생의 뜻에 따라 착해지는 것을 눈 뜨고 못 봐줍니다. 그런데 라울은 선생님 편입니다. 둘은 정학을 맞습니다.
존슨 선생은 먼저 라울의 집에 찾아갑니다. 부모는 사고만 치는 라울 때문에 긴장을 했지만 선생님은 라울에 대해 많은 칭찬을 합니다. 라울은 완전히 선생님 편이 됩니다. 라울은 머리가 좋은 캘리라는 친구와 함께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라울과 두 친구를 불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시켜줍니다. 하지만 라울만 나옵니다. 캘리와 다른 친구는 아르바이트해야 해서 식당에 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라울도 며칠 동안 결석해야 한다고 합니다. 레스토랑에 오기 위해 옷을 사느라고 돈을 빌렸는데 갚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라울에게 자신이 돈을 꾸어주겠다고 합니다. 단 졸업할 때 갚는 조건으로. 라울은 자기가 졸업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습니다. 선생님은 라울이 졸업할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존슨 선생은 이제 캘리를 찾아갑니다. 반에서 가장 머리가 좋아서 공부하면 잘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캘리는 학교에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임신해서 학교에서 나오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존슨 선생은 학교에 아이를 받아달라고 청합니다.
그다음엔 또 에밀리오가 문제입니다. 감옥에 갔다고 돌아온 갱단 일원이 자기 여자 친구를 뺏어간 에밀리오를 죽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밀리오는 자기가 먼저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며 그 학생을 죽이려 합니다. 선생님은 에밀리오를 설득합니다. 교장 선생님에게 그 갱단 일원이 마약을 판다는 것을 말하면 그가 또 감옥에 가게 될 것이고 그러면 졸업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다음 날 에밀리오는 교장 선생님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은 노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에밀리오의 말을 듣지 않고 돌려보냅니다. 그 후 에밀리오는 총에 맞아 죽은 상태로 발견됩니다.
존슨 선생은 충격을 받고 학교를 그만두려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말립니다. 라울은 그러면 자신에게 왜 졸업하라고 했느냐 따지고 임신한 캘리는 다시 학교에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을 쉽게 보내드릴 수 없어요. 선생님은 우리의 빛이니까요.”
학생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스승이 빛이라는 것을. 자신들이 방황했던 이유는 자신들을 믿어주는 참 스승이 없었다는 것을. 그래서 존슨 선생은 아이들과 함께 하기로 마음을 바꿉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는 ‘빛’이십니다. 이것으로 오늘 복음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예수님을 왜 마리아 막달레나가 “라뿌니!”, 곧 ‘스승님’으로 불렀는지 이해가 갑니다. 일곱 마귀에 들려 죄에 물들어 있던 마리아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을 믿어주는 스승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냉담하는 어떤 자매에게서 신앙을 강요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인생엔 해답이 없어요. 안 그런가요?”
이 말 안에는 아직 그리스도를 스승이요 빛으로 만나보지 못했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인생은 답이 없기에 어둠 속에서 헤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만나면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스승이 없는 삶은 어둠의 삶입니다.
사자 무리가 사냥꾼에게 모조리 살해당했습니다. 새끼 사자만이 간신이 살아남았습니다. 새끼 사자는 양의 무리가 자기를 핥아주니 기분이 나아졌습니다. 그래서 양의 무리와 함께 메에 메에 하며 성장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자의 무리가 양의 무리를 습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무리와 함께 있었던 사자의 뒤통수를 칩니다. 정신 차리라는 것입니다. 사자 무리의 대표는 그 사자를 물가로 끌고 가서 생김새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양의 고기를 먹으라고 합니다. 사자는 자기의 형제들인 양을 못 먹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먹게 되고 그때 사자의 포효를 하게 됩니다.
스승은 이런 사람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믿어주고 그렇게 믿도록 양식을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당신처럼 될 수 있음을 믿어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자이시면서 사자인 줄 모르는 우리에게 오셔서 이름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오늘 예수님께 마리아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아버지를 자신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어야 그분을 빛이요, 스승이요, 구원자로 만난 것입니다. 마리아도 이렇게 되자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소리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출처: 원글보기; ▶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강론
2023년------------------------------------------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 예수님 사랑에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 축일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미사 독서들에서는 사랑하는 님을 찾는 여인들의 애절한 마음이 드러납니다. 바로 신랑이신 하느님을 찾는 하느님 백성의 마음이고, 또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찾는 교회의 마음입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요한 20,1) 예수님 생애의 가장 극적이고 결정적인 두 순간, 즉 십자가 죽음의 현장과 부활의 첫 목격 순간에 마리아가 있습니다. 일곱 마귀가 들렸다가 예수님께로부터 치유를 받았다는 그녀는 일곱이라는 숫자만큼 온갖 악에게 사로잡혀 지독하게 고통 당했던 것 같습니다. 그랬기에 구원자 예수님 향한 그녀의 사랑이 이토록 뜨겁고 충실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요한 20,11) 님의 시신이 사라진 빈 무덤 앞에서 그녀가 울고 있습니다. 그녀의 황급한 전갈에 이미 남성 제자들이 한 차례 왔다가 돌아간 뒤인데도 그녀는 그 자리를 뜰 수 없습니다. 그녀가 있어야 할 곳, 머물러야 할 곳을 이성보다 사랑이 알려주기 때문에 그 사랑이 지시하지 않는 한 떠날 수 없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질문하십니다. 마리아의 기쁨과 슬픔이 온전히 당신께 달려 있다는 걸 몰라서 물으시는 게 아닙니다. 님의 부재는 이미 겪었던 그분의 죽음과 맞먹는 상실감과 공허에 혼란까지 더해줍니다. 어쩌면 십자가 밑에서보다 지금이 더 아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리아야!"(요한 20,16) 예수님이 그녀를 부르십니다 육안으로는 못 알아뵈었지만 그녀의 귀가, 그녀의 마음이 알아차립니다. 음성의 크기, 고저, 장단, 깊이, 감촉, 파장, 흐름, 여운까지 딱 그분입니다. 내 이름을 꼭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단 한 분뿐이십니다. 그제야 그녀도 "돌아서서"(요한 20,16) 자신이 그분을 부르던 그 음성으로 "라뿌니!"(요한 20,16) 하고 화답합니다. 제1독서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 사랑의 노래라 불리는 아가의 한 대목입니다. 짧은 대목인데도 "찾다"라는 동사가 여러 차례 반복되어 나옵니다. 우리말에서는 "구하다, 찾아다니다(seek, look for)"는 뜻과 "발견하다(find)"는 뜻을 모두 "찾다"라고 표기하니 그렇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밤새도록"(아가 3,1) "성읍, 거리와 광장마다"(아가 3,2) "야경꾼"(아가 3,3) 이 말씀들에는 님(연인, 신랑)을 찾아나선 여인(신부)의 다급하고 절절하고 심정을 담겨 있습니다. "밤새도록"은 자기의 깊고 내밀한 온 시간을 다 쏟아 님을 찾아 헤매고 있음을, "성읍, 거리와 광장마다"는 님을 찾기 위해 내적 외적 모든 장소를, 심지어 위험에 노출된 곳까지도 샅샅이 헤매고 다님을, "야경꾼들"은 님의 거취를 알만한 모든 이들, 설령 결과적으로 별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해마저도 입힐 수 있는 관계에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다가갔음을 드러냅니다. 한 여인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이 모든 거칠고 험한 행보의 원인은 오직 하나, 사랑입니다. 숨어 계신 님을 향한 애타는 사랑...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아가 3,3) 여인과 함께 안도의 숨을 내쉽니다. 그녀가 그들에게서 멈추지 않아 천만 다행입니다. 그녀는 야경꾼들을 그분으로 착각하지 않았기에 단호히 지나쳤고, 드디어 사랑하는 님과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그분은 영영 숨어 계시지 않고, 영영 그녀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녀는 자기 여정의 원인과 목적을 분명히 아는 여인입니다. 이렇듯 사랑은 지혜를 부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두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와 아가의 신부는모든 인간의 실존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주님을 사랑해야 하고 찾아나서야 합니다. 우리 영혼이 그분을 향한 갈망으로 흠뻑 절여져 다른 무엇에 눈 돌릴 수 없을 때, 주님이 보이지 않아도 그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일 때, 때때로 엄습하는 주님의 부재에 두려움과 고통 가득한 눈물을 흘릴 때 "○○야!" 하고 부르시는 그분 음성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이 포착은 감미롭고 부드러우나 먹잇감을 잡아채는 맹수의 포획 순간처럼 강렬하고 재빠릅니다.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다. 보잘것없는 한 여인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첫 얼굴을 보여 주십니다. 주님은 다른 외적 조건이 아니라 오직 사랑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내노라 하는 신분과 학식과 재물이 아니라 다만 사랑이 그분을 끌어당기기에 당신 얼굴을 보여주실 수 밖에 없으십니다. "말하여라, 마리아. 길에서 무엇을 보았느냐?"(복음 환호송) 사랑하는 이는 볼 것이고, 본 이는 말해야 합니다. 그 사랑이 자신에게만 고여 있다면 홀로만의 낡은 기념품이 될 뿐이지만, 가난한 채로 흘러나와 나눔이 되고 증언이 될 때 세상과 주님과의 거리를 좁히는 가교가 됩니다.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순수한 열정을 시작으로 부활을, 부활하신 분을 대면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벗님이 갈망하고 사랑하는 주님을 만나뵈옴으로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나는 주님을 만났소!'라고 고백하는 기쁨을 누리시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 출처: 원글보기;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