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에서의 존재와 성스러움
하이데거에서의 존재와 성스러움
-이기상(외대 철학 교수)
- 내 용 -
1. 들어가는 말
2. 일상용어 사용에서의 "성스러움"
3. 인간, 성스러움, 신, 존재
4. 궁핍한 시대의 시인 횔덜린
5. 자연과 성스러움
6. 신성과 성스러움
7. 시인의 싯말과 성스러움
1) 낱말에 의한 존재의 건립
2) 근원의 근거에 대한 회상
8. 성스러움의 차원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과연 이성적으로 <성스러움>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가? 성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합리적 사유의 단계를 넘어서는 것이고 따라서 철학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 아닌가? 그것은 시의 영역이고 종교의 영역 아니겠는가? 소위 후기 하이데거 사상에 많이 등장하고 있는 성스러움과 신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는 철학이기를 포기한 철학자의 마지막 몸부림 아닌가? 아니면 <철학의 종말>에 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모험으로 보아야 하는가? 기술과 과학의 시대라는 극도의 합리성의 시대에 성스러움에 대한 논의가 여기저기서 관심을 끌고 있는 것 자체가 우리 시대가 처해 있는 독특함을 내보이고 있는 징표 아닌가?
가장 큰 위험은 위험 속에 있으면서도 그 위험을 못 느끼고 있을 때 아닌가? 현대인은 온갖 기술과 과학의 장치로 모든 것을 안전하게 만들었다고 큰소리치고는 있지만 사방 팔방에서 안전신화가 여지없이 깨어지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과연 안전한가? 우리는 과연 기술과 과학의 보호 속에 우리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가? 그 많은 견고한 안전장치들이 이제는 오히려 인간을 옥죄고 옭아매는 통제장치와 감시장치들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성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하이데거는 철학의 울타리뿐만이 아니라 존재의 '지평'마저도 넘어선 것은 아닌가? 아니면 여전히 그 지평 안에 머물러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우리는 존재와 성스러움의 연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유는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존재를 위해 [그에 맞갖은] 말을 찾는다. 그리하여 이 말에서부터 존재의 진리가 언어에로 오기를 바란다. ...... 오래 동안 감싸져 왔던 언어의 부재에서부터 그리고 그 부재 안에서 밝혀진 영역을 조심조심 설명하면서부터 사유의 말함은 시작된다. 시인의 명함 [이름지음]도 같은 유래에서 기인한다. 그렇지만 같은 것도 오직 상이한 것으로만 같기에, 시작과 사유는 낱말에 대한 애지 중지에서는 가장 순수하게 같지만 동시에 그 둘은 그들의 본질에서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사유는 존재를 말하고 시인은 성스러움을 이름한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의심의 여지없이 성스러움을 명명하는 것을 시인의 사명으로 간주하고 있다. 위의 구절에서 우리가 받는 인상은 성스러움에 대한 이야기는 본질적인 점에서 시인과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실지로 하이데거는 횔덜린의 시, 특히 <마치 축제일에...>라는 송가를 설명하는 곳에서 가장 상세하게 성스러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발터 슐츠(Walter Schulz)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하이데거는 거의 전적으로 횔덜린에게 의존하며 그를 시인 중의 시인이라고 명명하는데, 그 까닭은 횔덜린이 바로 성스러움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에서 성스러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 또는 시작의 본질이 무엇이고 시인, 일차적으로는 횔덜린이 명명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시인의 명명과 성스러움, 사유자의 말함과 존재 그리고 신적인 것의 신성과의 연관들을 고찰하기에 앞서 먼저 <성스러움>이라는 낱말이 어떤 일상언어적인 배경과 맥락 아래에서 등장하며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2. 일상용어 사용에서의 "성스러움"
"성스러움"(das Heilige)라는 독일어는 언어적으로 "온전하게 하다, 치료하다(heilen)"와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은 상처받지 않은 것(das Unversehrte)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사람이 화를 당했는데 하나도 다치지 않고(heil) 나왔다고, 다시 말해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상처 없이, 따라서 상처받지 않고 거기에서 빠져 나왔다고 말한다. 여기에 또한 동사 "치료하다, 완치시키다, 낫게 하다(heilen)"가 속한다. 어떤 사람이 다치거나 상처를 받았을 때 의사가 그 사람을 치료하거나 다시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 즉 상처를 낫게 해준다.
독일어 'versehren'은 '상하게 하다, 해치다'를 의미한다. 이에 반해 'heilen'은 상한 것, 상처난 것을 다시 온전하게 만듦을 의미한다. 따라서 온전한(heil) 상태는 한편으로는 본래의 원상태이며 더 나아가서는 어떤 것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를 뜻한다. heilen은 바로 이러한 온전한 원상태로 회복시켜 주던가 아니면 그것이 놓여 있을 수 있는 최상의 상태에로 이끌어 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이듯이 일상어의 사용에서 '성스러움"(das Heilige)이라는 개념은 인간 현존재가 처해 있는 철저히 위협받고 있고 위태로운 상황을 전제하고 그런 속에서의 독특한 이중의 방식을 지칭하고 있다. 사람들은 위협의 와중 [한가운데]에서도 어떤 사람이 온전하게 [heil, 다치지 않고] 남아 있다거나 또는 세계가 그 모든 눈에 띄는 파괴의 와중에서도 [멸망하지 않고] 온전하게(heil) 남아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온전함"(heil)에 대한 경험은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거의 유의하지 않았던 독특하고 새로운 존재경험이다. 일상의 언어사용에서 반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낱말 아래 이해되고 있는 것을 크게 윤곽 지어 보려고 할 때, 우리는 시작부터 그 독특함에 부딪치게 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온전하다고 칭할 때, 우리는 그로써 그것을 온전치 못한 것과, 즉 부서진 것 또는 어떤 형태로든 이미 상처난 [망가진] 것과 구별짓는다. 우리는 어떤 것이 온전하다고 말함으로써 그것이 온전하게 남아주었다는 것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셈이다. 우리는 이 점을 아주 각별히 주목해야 할 것으로 그리고 근본에 있어 매우 놀랄만한 것으로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무지막지한 존립에서 전혀 파괴될 수 없는 것 -- 예컨대 길에 놓여 있는 거대한 둥근 바윗덩어리 -- 을 우리는 온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깨어질 수 있는 그것이 파괴의 와중에서도 다치지 않고 남아 있는 한에 있어서 그렇게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는 파괴될 수 있는 것만을 온전하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사적으로 근원적인 의미에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온전하다고 하는데 특히 그가 싸움에서 아무런 상처 없이 돌아왔을 때 그렇다. 이때 온전하게 남아 있게된 것은 항상 하나의 기적 같은 것으로서, 그것을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비호해주고 있는 힘들에 감사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
지금까지 살펴본 몇 가지 특징들을 정리해 본다면, 성스러움은 우선 깨질 수 있는 것, 상할 수 있는 것, 상처받을 수 있는 것과 관련해서 말해지고 있다. 애초부터 깨질 수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성스러움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둘째, 그렇게 깨질 수 있는 것이 깨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으면서도 깨지지 않고 원래의 상태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과 연관이 있다. 즉 깨질 수 있는 것이 놓일 수 있는 최악의 상태가 고려되고 있다. 셋째, 그런 위험 속에서도 무사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은 통상적인 이해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차원을 지시하고 있다. 넷째, 바로 이 설명되지 않는 차원이 바로 온전함을 온전하게 만들어주고 유지시켜 주는 그런 '신비스러운' 힘임을 암시하고 있다.
일상언어의 사용을 좀더 살펴본다면, 우리는 다시 아문 [완쾌된] 상처를 온전히 나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 생물의 육체적 상태와 관련하여 온전함과 온전히 남아 있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온전해짐(Heilung)의 과정도 있다. 이 온전하게 되어감의 과정을 이 경우 우리는 자연의 원상복귀 시켜주는 완쾌의 힘에 감사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유기적 생명체의 영역에 사용되었을 때에는 다른 의미를 갖게된다. 그러므로 유기체는 그 모든 부상 [상처]에도 불구하고 다시 온전함의 상태로 자신을 되돌리려고 추구하는 어떤 것으로서 나타난다. 이때 의사의 인위적 기술이라는 것이 자연을 어느 정도 내에서는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도 완쾌의 보호하고 원상복귀 시키는 힘을 감추어진 더 깊은 존재의 근거에서의 힘으로서 경험한다.
이 두 번째 부류의 사용에서 눈에 띄는 특징을 정리해 본다면, 여기서는 깨질 수 있는 것, 상처받을 수 있는 것이 실지로 상처받은 경우를 염두에 둔 언어사용들이다. 우선 상처받은 것이 원래대로의 온전한 상태에로 돌아가는 과정 또는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을 '완쾌함, 온전해짐, 치료함, 낫게 함'(heilen)이라고 말하고 있다. 둘째, 여기서도 우리는 그렇게 온전하게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힘을 우리가 알 수 없는 우리 밖의 어떤 힘으로 상정하고 있다. 자연의 유기체 또는 생명체에서 볼 수 있는 회복능력은 신비로운 자연의 힘이다. 셋째, 인간의 치료행위는 인위적 기술로서 고작해야 자연이 갖고 있는 신비로운 힘에 물꼬를 터서 그 힘을 활용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혼의 구원"(Heil der Seele)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들 수 있다. 이때 "구원"은, 인간의 가장 내적인 삶에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위험에서부터의 최종 구제라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서도 어쨌든 영혼의 쉽게 상처받을 수 있음이 전제되고 있으며, 자유의사에 의해 실지로 상처받았음이 상정되고 있다. 원래의 온전하고 깨끗한 상태로 갈 수 있는 것은 영혼의 능력 밖의 일로서 그것을 영혼은 성스러움에 의존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스러움은 좀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로 치료(완치)보다 더 깊은 차원을 갖는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실지로 상처받지 않은 것뿐 아니라 또한 근본적으로 상처받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것이 상하거나 훼손되거나 감소되거나 파괴된다면 그러한 것은 상처받을 수 없는 것 또는 침해(훼손)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성스러움의 본질에는 배치되는 것이다. 또한 성스러움에는 존경해 마땅한 품위가 내재해 있다. 바로 거기에 상하지 말아야 하는 요구가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요구는 정중하게 지켜져야 하고 그에 상응한 행위에 의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 품위를 얕잡아 보고 그 요구를 거절하는 사람은 성스러움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러한 모독은 인간 현존재로부터 그의 최종적 고귀한 완성을 빼앗으며 그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으며 그 안에서는 모든 가치가 뒤바뀌어 버리는 통속성 속에 빠트린다. 여기서는 온전함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유지시켜 주는 신비로운 힘으로서의, 그렇게 존재하는 절대적 가치로서의 성스러움 그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 차원을 구별했다. 신비로운 힘으로서의 성스러움 그 자체, 성스러움이 보존시키고 유지시키는 상태로서의 온전함, 온전하게 되는 또는 만드는 과정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일상에서의 언어사용 속에 드러나고 있는 성스러움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아래에서는 하이데거가 설명하고 있는 성스러움의 차원과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자.
3. 인간, 성스러움, 신, 존재
하이데거의 {인문주의 서한}에서 우리는 성스러움에 관한 중요한 두 가지의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때 존재가 존재자로부터 스스로를 구별짓고 있다는 '존재론적 차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그 안에서 이러한 차이가 명확하게 일어나고 있는 아주 탁월한 존재자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은 "존재 자체에 의해 존재의 진리에로 던져져" 있다. 그래서 그는 "존재의 빛 안에서 존재자를 그것이 그것으로 있는 바로 그 존재자로서" 이해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 이로써 인간은 동시에 탈-존(Ek-sistenz)과 내-존(In-sistenz)으로서 등장하게 된다. 다시 말해 존재의 진리 또는 존재의 개방성 안으로 밖에 나가 서 있으며(탈존) 동시에 그 안의 한 가운데 들어서(내존) 있다. 그렇지만 존재는 또한 자신의 개방성에서 언제나 자신을 빼내오기 때문에, 인간은 존재망각의 역운이라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존재자에게 상실할 수도 있으며 자주 그렇게 상실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본질구성틀 안에서도 인간은 존재에 의해 말건네진 자로서 그리고 말건넴에 취해진 자로서 남아 있다. 사유는 "존재의 진리를 말하기 위해 존재에 의해 말건넴 받을 수 있다"(Hum 162). 그에게는 "존재의 목동"으로서 "존재의 진리를 보호해야 할" 과제가 떠맡겨져 있다(Hum 162).
이 모든 것을 볼 때 인간의 본질적인 체류는 "존재에 가까이" 있음임이 입증된다. 이때 그와 더불어 '성스러움'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가까이에서 "과연 그리고 어떻게 성스러움의 날이 밝아오게 되는지" 또는 "성스러움의 솟아오름"이 일어나게 되는지가 결정나게 된다.(Hum 169) 그런데 성스러움은 "먼저 그리고 오랜 예비 속에 존재 자체가 스스로를 밝히고 그 진리에서 경험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Hum 169) 우리는 동일한 연관관계를 다른 구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존재의 진리에서부터 비로소 성스러움의 본질이 사유될 수 있다."(Hum 181/2) 그러나 이 성스러움은 "존재의 열린 장이 밝혀지지 않고 그 밝힘 안에서 인간의 가까이 있지 않다면, 이미 차원으로서는 닫힌 채 남아" 있을 뿐이다.(Hum 182)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로 하여금 "현 시대의 유일한 불행(Unheil, 해악)"은 "구원(Heil)의 차원이 닫혀져 있다"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추정하게끔 만든다.(Hum 182) 따라서 구원이냐 불행이냐는 성스러움에 달려 있다.
성스러움이 존재를 되지시하고 있듯이 동시에 그것은 "신성의 본질공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넘어서 있는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다.(Hum 169) 이 신성의 본질공간은 "그 자체 다시금 오직 신들과 [유일]신을 위한 차원만을" 보장하고 있다.(Hum 169) 그러므로 성스러움이 비추어옴에서 결정되는 것은 "과연 그리고 어떻게 신과 신들이 자기 자신을 거부하여 밤인 채 남아 있는지" 아니면 "신과 신들의 현현(나타남)이 새롭게 시작될 수 있는지"이다.(Hum 169) 동일한 의미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성스러움의 본질에서부터 비로소 신성의 본질이 사유될 수 있으며 이 신성의 빛 안에서 비로소 "<신>이라는 낱말이 무엇을 이름해야 하는지가 사유될 수 있고 말해질 수 있다".(Hum 182) 현대의 인간은, 만일 그가 오직 그 안에서 저 물음에 제기될 수 있는 바로 그 차원으로 들어가 사유하는 것을 막는다면, "신이 다가오고 있는지 아니면 떠나가고 있는지를 진지하고 엄밀하게 물어볼" 처지에 있지 못하다.(Hum 182) 오직 존재에 의해 성스러움의 차원 안으로 밀고 들어가는 사람만이 "인간에 대한 신의 연관을" 실존하는 본질로서 경험할 수 있게 된다.(Hum 182)
하이데거는 인간을 탈-존으로 파악함으로써 존재에 대한 연관을 결정적으로 중요한 근본소여성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본소여성 안에 아무 문제없이 성스러움의 열림이 펼쳐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성스러움은 그 자체 다시금 신적인 것과의 만남을 위해 필수적인 차원을 보장한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이 존재자에 빠져 존재를 망각하자마자 그는 성스러움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던가 또는 성스러움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잃어 버려 그로써 신적인 것도 볼 수 없게 되고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거꾸로 된 연관 역시 제공될 수 있다. 즉 신적인 것의 사라짐이 성스러움으로부터 그 힘을 빼앗아내어 존재가 존재자에 자신을 주어버리는 그런 일이 생기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정리해 보자.
여기에서도 우리는 크게 세 차원을 구별지을 수 있다. 하나는 성스러움의 차원이다. 이 차원에서 한편으로는 성스러움과 존재가 연관되고 있고 다른 편으로는 신적인 것, 신들, 신이 연관되어 있다. 둘째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가 놓여 있는 상태이다. 그것은 존재의 망각으로 인해 성스러움에로의 길이 막혀 있는 상태이며 그런 상태를 위험으로서도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셋째는 그런 상태에서도 신비한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성스러움의 힘이다. 자연 속에 은닉되어 있는 성스러운 완쾌의 힘을 제대로 끄집어 내오기 위해서는 의사로서의 인간이 필요하다. 존재, 성스러움, 신의 차원은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이행해줄 조력자가 필요하다. 자신들의 말건넴에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모든 인간이 다 성스러움의 요구[말건넴, Anspruch]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시인만이 성스러움을 명명할 수 있다.
아래에서 우리는 먼저 성스러움과 신성의 차원이 말건네[요구해]오는 데 자신의 말로써 응답하는 시인의 역할에 대해서 살펴본다.
4. 궁핍한 시대의 시인 횔덜린
하이데거는 성스러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해 나가면서 대화의 상대자로 횔덜린을 선택한다. 그 까닭은 이 시인이 그에게는 "탁월한 의미에서 시인 중의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횔덜린은 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는 시작을 이제는 신들과 사물들의 본질을 건립하는 명명함이라고 이해한다. '시적으로 거주함'이란 신들의 현재(면전) 안에 서 있음과 사물들의 본질가까이에 의해 얻어맞음을"(EH 42) 말하며, 신들과 인간들 사이의 '사이' 안으로 내던져 있음을 말한다. 횔덜린은 시의 보편적 본질을 건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 시대의 시작의 본질을 건립했다.
"횔덜린은 시의 본질을 시로 썼다. 그러나 무시간적으로 [시간적으로 무관하게] 타당한 개념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이러한 시의 본질은 하나의 특정한 시간[시대]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시의 본질]이 이미 존속하고 있는 시간으로서의 그러한 시대에 그저 자신을 맞추기만 하면 되는 식으로서나 아니다. 오히려 횔덜린은 시의 본질을 새로이 건립함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떠나버린 신들과 도래하는 신 사이의 시대이다. 그것은 궁핍한 시대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는 이중의 결함과 무 -- 떠나버린 신들은 더 이상 없고 도래하는 신은 아직 없다는 -- 가운데 놓여 있기 때문이다."(EH 47)
이것이 바로 횔덜린이 하이데거의 사유에 역운(Geschick)이 되는 이유이다. 횔덜린은 궁핍한 시대의 시인인데, 그는 신적인 것의 '더-이상-아님'과 '아직은-아님'의 위기를 자기 시대의 무위기성 안에 건립하였다.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무위기성을 위기로 건립하고 그래서 시대의 '진리'를 '작품 안으로 정립'하였다.
여기서도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횔덜린이 자기 시대의 시의 본질을 건립했다는 점이다. 횔덜린이 처해 있는 시대의 형세는, 옛 신들은 떠나버려 더 이상 현전하지 않고 새로운 신은 아직 도래하지 않아 부재한 그런 상태이다. 그런데도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들은 그런 시대의 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무위기성 속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시대의 인간들이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철두철미 존재자에 방향잡혀 있고 존재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존재자처럼 분명하게 눈앞에 있어서 직접적인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존재'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그들로서는 신들이 그렇게 확인될 수 없는 것이기에 근본적으로 그들의 존재경험에 들어올 수 없다. 거기에 덧붙여 신적인 차원마저 떠나버려 '없고' 아직 도래하지 않아 '없는' 이중의 부재의 상황이다. 횔덜린은 바로 이러한 '없음'을 경험한 시인이다. 그리고 그 없음을 '결여'로서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결여가 바로 위험이고 위기인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러한 위기를 위기로서 느끼지 못하고 있음이 가장 큰 위험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성스러움이 '없음의 경험'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이기에 그것은 '허전함'(虛, 비어있음)에 해당하는 무(無)인 셈이다. 이 없음의 경험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의 충만한 상태를 모르는 사람은 무엇이 비어버렸는지를 알아차릴 수 없다. 존재자에 눈이 맞추어져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을 알아볼 수가 없다. 없는 것의 없음을 깨닫는 것은 더욱 어렵다.
횔덜린은 어떻게 그러한 경험에 이르게 되는지를 살펴보자.
5. 자연과 성스러움
농부가 그의 일터에서 그렇듯이 시인들은 날씨가 좋은 때에 자연의 가르침 안에 서게 된다. '자연'은 횔덜린의 시 <마치 축제일에...> 전체를 꿰뚫고 있다. 이 송가를 해설하는 곳에서 하이데거는 시인은 자연에 대답을 할 때 시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시인들이 "응답하는 이들"이라고 명명되고 있다.(EH 55) 여기서 시적인 명명은 "부름을 받은 것 자체가 자신의 본질에서부터 시인에게 말해야 할 것으로 독촉하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 이렇게 독촉을 받고 횔덜린은 자연을 '성스러움'이라고 명명한다."(EH 58)
"이제 날이 밝는다! 나는 고대하다 그것이 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본 것은 성스러움이 나의 말이라는 것이다."(EH 57)
자연은 시인을 일깨워주고 있다. "자연은 일깨워주면서 자신의 고유한 본질이 성스러움임을 드러낸다"(EH 58). 왜냐하면 시인이 보았고 말하고 있는 성스러움은 하이데거에 의하면 다른 것이 아닌 (방금 시인의 봄과 말함 속에서 밝아오는) 깨어남 속에 있는 자연이기 때문이다. "자연 자신은 시간들보다 오래다/그리고 서양과 동양의 신들 위에 있다." 자연의 고유한 본질을 성스러움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성스러움에 의해 말건네 받는 사람이다.
"횔덜린은 자연을 성스러움이라 명명하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시간들보다 오래이고 신들 위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스러움'은 결코 확고하게 서 있는 어떤 신에게서 빌려온 특징이 아니다. 성스러움은 그것이 신적이기 때문에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적인 것은 그것이 자신의 방식에서 '성스럽기' 때문에 신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횔덜린은 이 싯말에서는 '혼돈'도 '성스럽다'고 명하기 때문이다. 성스러움은 자연의 본질이다."(EH 59)
여기서 우리는 '자연', '성스러움', '신들' 사이의 독특한 연관에 대한 암시를 받고 있다. 첫째,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우리는 성스러움을 신들에게 속한 속성으로서 신들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서술적 특징으로 알고 있는데, 그 관계는 오히려 거꾸로라는 것이다. 신적인 것이 단적으로 신적인 것이기에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신적인 것이 자신의 나타남의 방식에서 성스럽기 때문에 신적이라는 것이다. 즉 성스러움이 신적인 것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자연의 성스러움이 시간들보다 오래이고 신들 위에 있다는 점이다. 신들 위에 있다는 점은 방금 앞에서 말한 것으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들보다도 오래이다라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죽을 자가 죽을 자를 만나고 이들이 각기 그때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현실적인 것과 관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연이 열린 장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모든 현실적인 것 -- 이것은 오직 열린 장에 의해 매개된 연관들 안에서만 현실적이기에 -- 은 열린 장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 그것만이, 즉 매개된 것의 간접성만이 적접적인 것이다. '혼돈'(다시 말해 여는 자신을 엶)뿐 아니라 '법칙'(다시 말해 매개)도 바로 이러한 포괄하는 열려 있음을 의미하며 이것이 곧 성스러움이다. 이 열린 장이, 자연이 하이데거에게는 전부터 있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며 동시에 가장 젊은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에 앞서 (어떤 것도 그것을 앞서 갈 수 없고 오직 그 안에 들어가기 때문에) 있으며 동시에 언제나 새롭고 시원적으로 남아 있다.
자연이 성스러운 이유의 하나는 자연이 열린 장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 열린 장 안에서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관계할 뿐 아니라 모든 현실적인 것을 만나며 신적인 것도 경험한다. 따라서 그것은 신들보다 앞서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전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모든 현실적인 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매개해주는 열린 장은 낡거나 늙지 않고 언제나 새롭고 젊게 남아 있다. 열린 장의 근원성과 시원성을 보장해주는 성스러움으로서의 자연은 그 자체 손상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그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어느 것도 근접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으면서 접근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본질적으로 응답하고 있는 바 바로 그것은 시원적인 근본낱말에서는 physis이며 이것은 "성스러움"이 다르게 사유된 차원이다. 하이데거는 "physis"라는 근본낱말을 이렇게 설명한다.
"피지스는 밖으로-나옴과 솟아-오름, 자신을-열음, 솟아오르면서 동시에 이 밖으로-나옴 속으로 되돌아가고 그래서 그 안에서 자신을 닫아버리는 것, 각기 그때마다 현전하는 것에게 현전을 내어주고 있는 그것이다. 피지스를 근본낱말로 사유할 때 그것은 열린 장 안으로 솟아오름, 그 안으로 들어가서 도대체 어떤 것이 나타나고, 자신의 윤곽 속에 자신을 세우고, 자신의 '보임새'(에이도스, 이데아)에서 자신을 내보이며 그래서 각기 그때마다 이것 또는 저것으로 현전할 수 있는 그러한 밝혀보임의 밝힘을 의미한다. 피지스는 솟아오르면서 자신-안으로-되-돌아감이며 열린 장으로서의 그렇게 현성[그렇게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솟아오름 속에 체류하고 있는 그것의 현전을 말한다."(EH 56)
여기서 하이데거는 '자연'을 그리스적으로 '피지스'로 사유하면서 그러한 피지스로서의 자연에서 유의해야 할 몇 가지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먼저, 자연 속에서 볼 수 있는 자연적인 '현상들'을, 즉 사계절을 통해 우리가 자연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자연의 다양한 나타남의 방식들을 열거하고 있다. 밖으로-나옴, 솟아오름, 싹틈, 자신을-열음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단적인 '나타남'에만 눈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듯이, "자연은 자신을 숨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다양하게 자연 '현상들을' 나타나게끔 하고 그러한 밖으로-나옴 속에서 자신은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자신을 숨겨버리고 있는 차원에 눈을 돌려야 한다. 이때의 자연은 현전하는 [그 자리에 나타나 있게되는] 것들에게 그것들의 그 자리에 있음[현전]을 내어주고 자신의 있음[존재]은 빼내어 숨기는 그런 어떤 것이다. 자연에서 우리가 자연의 '자신을-열음'만을 본다면 절반의 진리는커녕 가장 중요한 진리의 본질적인 차원에 눈을 감아버리는 셈이다. 우리는 거기서 또한 동시에 자연의 '자신을-닫음', '자신을-숨김'도 볼 수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한다면, 자연의 '본질적인 있음'(Wesung, wesen)은 '자신을-닫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위 자연의 '본질'(Wesen)에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근접할 수 없는 자연의 본질이 우리에게 매개되는 또는 와-닿는(an-wesen)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현전하는 것(das Anwesende)으로 하여금 현전하도록 하고(anwesen-lassen) 자신은 그것의 현전함(das Anwesen) 속에 자신을 숨긴 채 와-있는 것(an-west)이다.
또 하나 자연이 성스러운 까닭의 하나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자연이 열린 장을 보장"한다는 점이다. 열린 장은, 그 안에서 인간 현존재가 존재하는 모든 것 -- 그것이 사물이든 도구든 사람이든 신이든 -- 을 만나며 경험하는 사방 팔방으로 막힌 곳 없이 트인 마당이다. 열린 장은 이제 그 안에서 모든 생성 . 소멸 .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전혀 규정되지 않고 규정될 수 없는 끝없이 열린 장이다. 그래서 그것이 곧 '혼돈'(카오스)인 것이다. 존재의 법칙과 질서가 생기기 이전의 온갖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가능성 그 자체, "열려 있음" 그 자체가 '혼돈'이다. 그 안에서 모든 존재의 사건, 성스러움의 사건이 전개되고 있는 이 열린 장은 끝이 [바닥이] 없는 검푸른 심연이며 무한히 뻗어가는 푸른 창공으로서 그야말로 끝없이 펼쳐지는 빔과 빔의 무한한 사이[공간(空間)]이며 '텅빔'이며 '빈탕'이다. 이 텅빔 속에서 우주적 생성사건, 물리화학적 전개사건, 생물학적 진화사건, 인식론적 존재사건 등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열린 장으로서의 자연은 시간보다도 '오래'인 것이다. 시간마저도 이 열린 장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듯 여기서의 피지스는 비-은폐성으로서의 존재의 진리를 의미한다. 존재의 진리는 존재하는 개개의 것에게 체류의 온전함을 선사한다. 따라서 성스러움이란 온전함(das Heile)과 구원(das Heil)을 보장하는 바로 그것이다.
시원적인 것으로 성스러움은 자체 안에서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며'(unversehrt und 'heil') 동시에 그것은 모든 현실적인 것에게 "그것의 체재의 온전함"(das Heil seiner Verweilung)을 선사하는 것이다.(EH 63) 그러나 바로 이러한 보장함 속에서 그것은 직접적인 것으로서 어떤 개별자에게도 -- 그것이 신이든 인간이든 -- 근접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현실적인 것은 그것에 의해 자신의 매개의 연관 속으로 정립된다. 그렇지만 성스러움 자체에 대한 연관은 그러한 매개에서부터는 벗어나 있으며 그렇게 현실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의 자리를 빼내고 있다. "따라서 성스러움은 빼-내면서 경악스러운 것(das Entsetzliche) 자체이다."(EH 63) 그렇지만 이러한 경악성은 가벼운 둘레에 은닉된 채 남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매개의 보장 속에서 성스러움에 대한 '연관'은 여기서 '직접적'이지 않고 오히려 예감하는 -- 자연의 가르침에 의해 배우게 되는 -- 앎으로서 (모든 연관성의 유래와 구체적 연관들의 유래에 대한 앎으로서) 주어져 있다. "자연이 깨어날 때 자연은 자신의 본질을 성스러움으로 드러낸다."(EH 58)
자연이 깨어날 때 자연은 자신의 고유한 본질이 성스러움임을 드러낸다. 어느 누구도 자연의 '본질'(Wesen)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다. 본질의 '있음'의 방식은 자연사물의 있음의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자연사물의 '있음'의 방식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자연본질의 '있음'은 차라리 '없음'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때의 없음은 단적인 없음이 아니고 어떠한 방식에서는 '있음'임을 고려에 넣어 우리는 그러한 독특한 있음을 <없이-있음>이라고 이름하기로 하자. 이러한 <없이-있음>은, 자연의 독특한 존재방식, 즉 '자신을-열음'과 동시에 '자신을-닫음'을 지칭하기 위해 택한 개념이다. 따라서 이 '없이-있음'은 앞에서 등장한 '결여'나 '부재'를 뜻하기 위해 취해진 개념인 <허전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연의 고유한 본질, 즉 이러한 '없이-있음'을 예감하여 알아챌 때 시인은 그것이 곧 성스러움임을 깨닫고 그렇게 명명하게 된다. 그러면 그러한 성스러움을 예감하며 알아채게 되는 때는 어느 때인가? 횔덜린이 말하고 있는 '운 좋은 날씨'란 어떤 때를 말하는가?
6. 신성과 성스러움
성스러움을 예감하는 앎이 이제 많이 상실되어 버렸다. 자연은 망각되었다. 자연이 그 본질에서는 은닉되어 나타나지 않으면서 공간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망각에서부터 깨어난다. 다시 말해 성스러움이 도래한다. 이때 시인이 그것을 저절로 그렇게 명명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도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위해서는 신과 시인 사이의 공통성이 필요하다. 인간은 스스로 혼자서는 성스러움에 대한 직접적인 연관을 맺을 수 없다. 신은 성스러움을 하나의 광선에 모아서 인간에게 보내는데, 이러한 매개 안에서 인간과 신은 성스러움에 속한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시가 된다. 앞에서 신들과 사물들의 본질을 건립함으로 규정되었던 시작이 이제는 좀더 깊게 이해된다. "그렇게 발원해 나오는 낱말-작품은 [시는] 신과 인간의 공속성이 나타나게끔 한다. 노래는 그러한 공속성의 근거(바탕)에 대한 증거를 주니 성스러움을 증거한다."(EH 69)
이제 우리가 좀더 명백하게 볼 수 있듯이 성스러움이 자신을 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타난다. 그러나 신은 멀리 머물러 있다. 다른 한편 신은 그러한 부재 속에서 분명 가까이 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은 이러한 부재의 현전을 소홀히 하지 않는 데에 달려 있다. 시인은 신의 부재의 현상에 대한 두려움 없이 이름이 선사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신의 부재가 도움이 될 때까지."
그 빛 속에 열린 장이 밝혀지는 그러한 동이 터옴은 축제, 즉 인간과 신들 사이의 결혼축제이다. 이 축제에서 시인들은 일어나, 오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성스러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EH 103) 그러나 아직은 축제가 아니다. 동이 터오기에 앞서 신부재의 시간-공간으로서 밤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밤 자체도 이미 성스럽다고 말해지는데, 그 안에서 신적인 것이 단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과거의 신과 도래하는 신이 그 안에 구별되지 않은 채 은닉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EH 109) 횔덜린이 노래하는 '이제'는 밤과 낮의 '동시에'이다. 즉 우리가 아직 밤에 서 있지만 그러나 동시에 축제날의 동터옴 속에 서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현실은 비현실이고 새로운 것이 도래하며 더-이상-아님과 아직은-아님 사이의 문지방의 시간에, 꿈의 시간에 놓여 있다. 그러나 바로 이 꿈이 "성스러움의 도래에 의해 성스러워지고" 있으며 성스러움의 예측할 수 없는 시이다.(EH 148) 시인들은 바로 이러한 시를 노래해야 한다.(EH 113)
날씨가 좋은 때에 시인은 자연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자연의 본질이 성스러움임을 노래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이 시인의 자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횔덜린은 '운 좋은 날씨'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제 이 운 좋은 날씨란 것이 번개의 빛 속에 맨머리로 나가 서서 신의 번갯불을 받는 것임이 드러났다. 앞에서는 '혼돈'의 자연을 염두에 두고 성스러움의 다양한 측면을 묘사하였다. 거기에서는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근접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성스러움 그 자체를 강조하면서 그것이 매개된 경험을 통해 예감될 수 있음을 암시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의 습관화된 사유의 울타리를 벗어나야만 한다고 말하면서 존재자에 방향잡힌 사람들의 눈에는 보일 수 없는 비밀스런 성스러움의 측면을 부각시켰다. 있음이 아닌 '없음'에 얻어맞을 태세가 돼 있을 때에만 성스러움의 흔적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없음이 있음 속에 와-닿아 일으키는 보이지 않는 '바람'에 대한 '감수성'이 있어야만 성스러움을 경험할 수 있다. 이제 이 없음이 조금 더 구체화된다. 앞에서는 열린 장의 텅빔, 자연의 자신을-숨김 등이 간직하고 있는 본질적인 차원으로서의 '없음'을 이야기했다면 여기서는 신의 '부재'로서의 없음이 말해지고 있다. 자연을 성스럽게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신이 떠나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을 만나던 영역으로서의 자연은 닫혀져 버렸고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실현시켜 나가는 욕망구현의 마당으로서의 자연만이 인간 앞에 펼쳐져 있다.
그리스적 내지는 그리스도교적으로 이해된 신 또는 신들은 형이상학의 극복이라는 관점에서는 "죽은 것"으로 선언되었다. 그러나 비록 형이상학의 신은 죽었을지라도 그의 "자리"는 존립해 남아 있다. 이 자리가 바로 성스러움 속에서 현성하고 있는 신성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므로 성스러움은 "신성의 흔적"이며 "신성의 본질공간"이다.(Hum 169) 이렇게 볼 때 성스러움은 그 안에서 하나의 신성 또는 하나의 신이 그 자신에서부터 나타나는 영역이라 생각할 수 있다. 신들이 "스스로를 스스로 나타내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시인은 신들과 인간들 위에 있는 성스러움을 표현해야 한다. 그런데 성스러움은 시인 속에서 시인에 의해 스스로를 중재되도록 하고 있는 직접적인 것이다. 신들과 시인 사이의 중간에 성스러움이 서 있다. 시인은 성스러움을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신들에 의존해야 한다. 신은 아주 탁월한 의미로 중간을 점하고 있는 자이다. 신은 성스러움을 자신 위에 취해 "그것을 한곳에 날카롭게 집결시켜 단 하나의 빛줄기에 실어 보낸다. 이 빛줄기를 인간에게 선사해야 하기에 이 빛줄기 때문에 그는 인간에게 '의존하고' 있다."(EH 68) 신은 만일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성사된다면 자신을 성스러움의 사유-영역에로 보낸다. "성스러움은 자신을 인간과 신들에 동시에 연다..."(EH 148) 이것은 부정적으로는 다음을 뜻한다. "성스러움의 닫혀-있음은 신적인 것의 밝게 빛남을 어떤 것이던 어둡게 해버린다." 성스러움의 영역이 닫혀 있으면 신적인 것이 경험될 수 있는 길은 막혀 버린다.
디터 진 (Dieter Sinn)은 신적인 것의 한 차원으로서의 성스러움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성스러움은 존재가 스스로를 열어 보이고 숨기는 그 똑같은 의미로 스스로를 열고 닫는다. 차이가 있다면 다만 존재가 다차원성 자체이며 그래서 모든 것에 (사방에) 대해 통용이 되는 반면 성스러움은 하나의 차원으로서 신적인 것이라는 사분의 일에만 통용된다는 이점이다. 우리는 성스러움을 '그 안에서 신들이 오직 신들인' 바로 그 요소로서 하나의 특수한 관계 구조를 갖고 있다고 확정할 수 있다."
이때 디터 진은 사방과 관련지어 신적인 것에 대해 얘기한 하이데거의 말을 염두에 두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성스러움에 대해서 가장 상세하게 {횔덜린의 시에 대한 해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때 당시 아마도 아직 그의 사상이 형성되지 않았었을 수도 있음을 고려할 때 {해설}에서의 신 내지는 신들에 대한 이야기가 사방의 텍스트에서 나오는 그것과 똑같은 것을 뜻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너무 이른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를 낳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정리하여 보자.
우리는 성스러움의 근원적인 본질차원을 찾아 나섰다. 먼저 '자연'이 성스러움과 연관되어 논의되었다. 이때의 자연은 시간보다 오래고 신들보다 위에 있는 그런 모든 시원의 시원, 근원의 근원으로서의 자연을 말하고 있다. 어떠한 경계도, 명명도, 규정도 있기 이전의 열려 있음 그 자체, 텅빔 그 자체로서의 자연이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열려 있는 이 열린 장으로서의 자연 안에서 존재생성의 사건, 존재진리발생의 사건이 일어난다. 인간 현존재 역시 이 자연 안에 내던져져 수많은 자연사물 가운데 한 자연사물로서 존재하고 있다. 인간은 이 확 트인 열린 장을 경험에 의해 한계의 말뚝을 박아 삶의 지평으로 만든다. 인간은 이해의 지평으로 만들어진 자신의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의 그물망 안으로 엮어 놓으면서 그 안에 포근하게 거주한다. 세계 안에 존재하면서 인간은 설명될 수 없는, 이해될 수 없는 신비스러운 것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인간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것, 신비 그 자체는 인간에게 일종의 아주 성스러운 것으로서 신적인 차원의 것으로 경험된다. 시간보다 오래고 신들보다 위에 있던 '자연'이 성스러운 것으로 인식되면서 그것은 신들이 나타나는 성스러운 영역이 된다. 직접 자신을 인간들에게 내보일 수 없는 신 또는 신들이 성스러움을 자신이 나타나는 방식 및 구역으로 삼는다. 이제 성스러움은 인간이 신적인 것의 차원을 알아차릴 수 있는 '신성의 흔적'이 된다. 다시 말해 신성의 '본질'이 -- 그 '없이-있음'이 -- 인간에게 와-닿는 영역(빔-사이, 공간)이다. 신들과 인간이 만나는 빔-사이인 이 성스러움은 일상적인 경험의 차원을 벗어나 있다. 존재자에 방향잡혀 있으며 이성에 의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일상인들과 과학자들에게는 성스러움은 빠져나가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 된다. 그 독특한 '없음' 속에서 자신을 내보이고 있는 성스러움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명명'할 수 있는 자는 시인들이다. 시인들은 신적인 것과 성스러움 '사이'에 놓여 있는 '사이-존재'로서, 또 성스러움과 인간들 '사이'에 놓여 있는 '사이-존재'로서 성스러움의 영역을 예비하여 인간들에게 신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중간자', '사절', '천사'인 것이다.
이제 성스러움을 명명하는 시인의 싯말에 대해 살펴보자. "그리고 내가 본 것은 성스러움이 나의 말이라는 것이다."(EH 57)
7. 시인의 싯말과 성스러움
존재는 언제나 항상 스스로를 비추면서 언어에로의 도상에 있으며 사유는 존재의 진리를 말할 수 있기 위해서 이렇게 스스로를 비추며 언어에로 오고 있는 존재에 의해 요청 받도록 내맡겨야 하며, 그렇게 하여 "사유에서 존재가 언에에로 오게"끔 해야 한다(Hum 145). 사유자는 그렇게 존재를 말한다. 따라서 언어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 "비추면서 숨기며 오는 존재 자신의 도래"이다(Hum 158). 그런데 하이데거는 시작(詩作)이 비로소 언어를 가능케 만든다고 말한다.(EH 43) 달리 말해 언어는 "존재가 낱말이 되는 것"으로서의 시작인데, 그 까닭은 시작이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존재를 건립하는 명명"이기 때문이다(EH 43). 이때의 시작은 물론 제멋대로의 말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을 말하거나 명명할 수 있기 위해서는 성스러움이 우선 먼저 시인에게 그에 필요한 낱말을 선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인의 본질적 신분은 신을 수용하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고 오히려 성스러움에 의해 둘러싸여 있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EH 69). 시인은 성스러움을 명명한다. 이렇듯 하이데거는 시작이 그 본질에 있어 "존재자의 진리의 도래가 이루어지도록 함"이며 "존재자의 비은폐성을 말함으로서" 본질적 의미의 언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의미로 하이데거는 이 글의 서두에 인용한 구절을 말한 것이다. "시인의 명명과 사유자의 말함은 같은 유래를 갖고 있다."
1) 낱말에 의한 존재의 건립
"머무는 것은 그런데, 시인이 건립한다."(EH 40) 하이데거의 해설을 좇아 횔덜린의 "회상" [추념]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음미해 보면, "본질적인 낱말"로써 존재자를 처음으로 그것의 존재에 있어 "열어 젖히는" 자들이 시인들이다.(EH 41) 이러한 "명명을 통해서 존재는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 바 그것이라 불리어진다." 이렇게 볼 때 시작은 "존재를 낱말로써 건립함"(EH 41) 또는 "모든 사물의 존재와 본질을 건립하는 명명"이며(EH 43), 이 명명은 존재자를 그 존재나 진리에로, 사물들을 그들의 본질에로 보내어 그렇게 세계와 역사를 존재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세계는 신들이 죽을 자들을 자신들의 요청 아래에 세우고 시인이 이러한 요청에 대한 대답으로써 신들을 명명할 때에만 비로소 열린다.(EH 40) 그럴 때 시작은 "신들을 근원적으로 명명"하는 것이 된다.(EH 42, 45) "신들의 눈짓에" 시인은 결속되어 있다. 그는 이러한 눈짓과 말함의 사이에 놓여 있다. 이 안에서 한 민족은 항상 이미 존재자 전체에 대한 자신의 귀속성을 기억하게 된다. 시인은 이러한 "중간에로" [사이에로] 내던져져 있으며 거기서 그는 이 눈짓을 붙잡아 그것을 그의 민족에게 이어서 전달해야 [눈짓해야] 한다.(EH 46/7)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시인의 말함이 "눈짓"으로 시인에게 말건네 오는 "신들 자신에" 의해서 언어에로 이끌려 오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은 이 눈짓을 붙잡아 전달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의 말함은 "민족의 소리"에 결속되어 있다.
수줍음(Scheu, 겁먹음)은 근원[성스러움]을 직접 경험할 수 없음을 앎이다.(EH 131) 근원 가까이에 '거주함'이 -- 근원에 의해 가능하게 되어 -- 이제는 시인이 건립해야 하는 머무는 것이다. 그런데 근원은 (신들과 인간들을 위해) 그 사이의 열린 장이 비로소 이제 열리게 되는 그런 축제 속에서 발원해 나온다. "이렇게 앞서 열고 있는 것이 성스러움이며 앞서 이미 모든 시작이 노래한 예측할 수 없는 시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 모든 건립함이 자신이 건립한 것을 확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EH 148)
건립되는 것은 머무는 것이다. 시작은 근원에 확고하게 붙여놓음이다.
2) 근원의 근거에 대한 회상
시작은 성스러움이 "낱말을 선사하고" 그래서 그로써 "스스로가 낱말 속으로 올" 때에만 가능하다.(EH 70이하, 76) 오직 그 경우에만 낱말이 성스러움의 "사건"이 된다.(EH 76) 이러한 사건은 성스러움이 자신의 도래에 있어 인간을 부르고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마주 인사하며 부를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도래하는 것 자체에 의해 부름을 받아 이것을 오직 이것만을 성스러움으로 말하는 그러한 시원적인 부름에로" 능력을 부여할 때 일어난다.(EH 76) 이렇듯 성스러움은 "모든 시작을 넘어 시작을 하고 있다."(EH 148) 시인은 성스러움을 그저 단지 "인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도 "그 자신이 인사를 받을 때에만" 그렇다.(EH 99) 그는 성스러움의 "사절"인 천사들을 만나 인사하는 자로서(EH 16) "사용되고"(EH 116) 있으며 "가리키는 자"가 되기를 "독촉 받고" 있다. 그리로 시인이 "보내어지고" 있는 이 "가리킴"은 그가 "있어온 것을 도래하는 성스러움으로" 사유할 때, 이러한 의미로 "회상"할 때, "걸맞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EH 99, 106) 이렇게 회상하면서 시인은 자신의 말함을 통해 신들이 "스스로를 느끼고 그래서 스스로를 이 지구상의 인간의 주거지에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 성스러움을 표현한다.
"시인은 가리키는 자로서 인간과 신들의 중간[사이]에 서 있다. 그는 이 중간[사이]에서부터 이 둘 위에서 각기 상이하게 이 둘을 온전하게 하며 시인에게 자신을 말해야 할 시로서 주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을 사유한다. 그는 죽을 자로서 사유하며 최고의 것을 시로 짓는다."
시작이 회상으로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근원적으로 거처함이, 즉 성스러움의 영역에서 시적인 것이 항상 새롭게 확정되고 확고하게 만들어지고 이러한 의미로 머물러 있는 것으로 수립되어야 한다. 이것은 시인이 항상 거듭 "샘물"(EH 130)에로, "원천의 가까이에로"(EH 144), "근거"에로의 걸음을 내디딜 때에만, 자신을 "가리키면서 머물러 있는 것"에게 열고 있으며 그에게 자신의 "낱말"로서 인사하는 온전함과 성스러움에로 갈 때에만 일어난다.
원천의 근거를 회상하는 것인 시작은 단순히 지나간 것을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다. 회상은 인사하면서 부름을 받은 것을 현재로 불러온다. 부름을 받은 것의 도래는 우리에게, 부르는 인간에게 하나의 미래를 열어주며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돌아오는 원천을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미래로서 마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인간에게 낱말을 선사하는 방식으로 인사하는 것 -- 그래서 인간이 그 낱말을 갖고 그 자신의 현재에 도래하고 있는 원천을 인사할 수 있도록 -- 은 다른 것이 아닌 성스러움이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사유가 존재의 도래에, 그리고 시작이 신들의 눈짓에 결속되어 있음을 보았다. 이제는 원천의 근거를 회상함인 시작이 성스러움이 낱말로 옴에, 즉 성스러움의 도래에 결속되어 있다고 말해지고 있다. 시작은, 하이데거가 그의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를 따르면, "존재자 그 자체의 진리의 도래가 이루어지도록 함"이며 진리가 스스로를 작품에로 정립함이며 진리의 건립이다. 시작은 "존재자의 비은폐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본래적인 의미의 언어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거기에 결속되어 있다는 성스러움의 낱말의 선사가 사유자가 거기에 결속되어 있다는 도래로서의 존재와 똑같다는 말인가?
심연에 이른다는 것은 떠나버린 신들의 흔적을 알아챔이다. "신들이 그 안에서 오로지 신들인 바로 그 에테르가 신들의 신성이다. 이러한 에테르의 요소가, 그 안에서 신성 자체도 아직 현성하고 있는 그것이 바로 성스러움이다."(Hw 250) 이제 성스러움은 "떠나버린 신들의 흔적"이다.
오늘날은 이러한 흔적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아니 이러한 상실된 흔적을 위한 흔적마저도 거의 지워져 버린 상태다(Hw 251). 적어도 우리가 성스러움을 여전히 신적인 것의 신성을 위한 흔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지, 또는 우리는 그저 성스러움을 위한 흔적만을 만날 수 있는지가 결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어떤 것이 흔적을 위한 흔적이 될 수 있는지가 불명확하게 남아 있다. 어떻게 그러한 흔적이 우리에게 드러날 수 있는지 하는 것도 의문인 채 남아 있다."(Hw 253)
8. 성스러움의 차원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정리하여 성스러움의 차원을 특징지어 보자.
자연이 깨어날 때, 다시 말해 자연의 말건넴에 응답할 수 있는 시인이 있을 때, 자연은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성스러움으로서 눈짓해 가리킨다. 시인 중의 시인인 횔덜린이 깨달은 성스러움으로서의 자연의 본질은 우선 시간들보다 오래고 신들보다 위에 있는 온전함 그 자체, 상처날 수 없고 손상될 수 없고 깨질 수 없고 나뉠 수 없는 온통 그 자체이다. 모든 시원의 (원초)시원이며 모든 유래의 (원)유래로서 모든 갈래와 지류를 자기에서부터 유출시키면서도 그 자신은 조금도 손상되거나 줄어들지 않고 충일 그 자체로서 머물러 있는 마르지 않는 근원으로서의 원천 그 자체이다.
두 번째로 열린 장으로서의 성스러움이 눈에 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 그것이 자연사물이든, 인위적 도구이든, 인간의 역사와 문화이든, 신들이나 신이든 -- 다 오로지 이 열린 장 안에서 전개된다. 죽을 자로서의 인간도 이 열린 장 안에서 다른 인간들을 만나고 교제할 뿐 아니라 현실적인 모든 것을 만나며 다루고 신적인 것도 경험한다. 이 열린 장은 전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계속 끝없이 열려 있을 것이며 어떠한 경계에 의해서도 막힐 수 없고 닫힐 수 없는 가이-없는 열려 있음 그 자체이다. 이러한 열린 장의 열려 있음이 그 모든 나타남의 가능조건이고 그 모든 경험의 가능조건이다. 이렇게 나타남을 가능케 하는 그것, 경험을 가능케 하는 그것은 그 편에서 또 나타나는 어떤 것이거나 경험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눈이 보게끔 하는 그것이나 그 자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물이 씻게끔 하는 그것이나 그 자신 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불이 타게끔 하는 그것이지만 그 자신 탈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세 번째로 성스러움은 모든 현실적인 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경험하게 하고 모든 자연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생성소멸 변화케 하면서 그 모든 경험과 변화 속에 자신을 감추는 어떤 것이다. 성스러움의 본질에는 바로 이러한 자신을-숨김, 자신을-빼냄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결코 직접 경험할 수 없다. 그것은 비밀 그 자체로서 설명될 수 없는 비밀스런 어떤 것이다. 그 모든 표피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심연, 그 모든 현상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 간직된 본질이 성스러움이다.
네 번째로 우리는 이러한 성스러움의 작용성에 주목할 수 있다. 성스러움은 깨어질 수 없고 손상될 수 없는 온전함 그 자체로서 깨어지고 손상된 것을 온전하게 유지시켜 주는 힘이다. 성스러움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열린 장으로서의 자신의 열려 있음 안에 체재의 온전함을 선사한다. 모든 불행과 화를 온전하게 치료해주어 원상태로 만들어주는 신비스러운 힘이다.
하이데거가 횔덜린의 시를 통해 제시해 보이고 있는 성스러움의 특징들을 우리는 이상과 같이 온전함(전체성), 열려 있음(개방성), 자신을-숨김(은닉성) 그리고 신비스러운 힘(작용성) 등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특징들은 한결같이 성스러움이 인간의 경험적인 차원을 넘어서 있음을 지시하고 있다.
존재자에 방향이 잡혀 있는 시각으로는 이 성스러움을 예감할 수조차 없다. 그것은 온통 전체로서, 전체성 그 자체로서 경험의 시야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이고 경험의 가능조건으로서의 열려 있음 그 자체로서 경험될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을 숨기고 있는 비밀스런 힘으로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것은 도대체 있는 것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없는 것[무]이다.
존재중심의 시각으로도 그 성스러움을 사람들은 예감할 수 없다. 열린 장의 열려 있음과 시공간을 모두 포괄하는 온통 전체로서의 성스러움은 존재의 지평 속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존재의 지평을 가능케 하는 끝이 없는 열려 있음이고 바닥 없는 심연, 가이 없는 텅비어 있음이다. '있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공간 안에서의 체재와 시간 안에서의 체류를 전제한 것임을 고려에 넣을 때 온통 전체로서의 성스러움은 가이-없는 공간과 끝이 없는 시간 전체를 통털은 것이다. 그것은 그렇기에 있음이라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러한 없음을 우리는 앞에서 '없이-있음'이라고 이름하기로 했다. 존재자에 눈이 멀고 현전 중심의 존재이해에 얽매여 존재를 현전하는 것의 현전함 속에서만 볼 경우 성스러움의 영역은 없다. 존재망각의 역사와 더불어 성스러움의 영역이 사라지고 그래서 신들이 떠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기술과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성스러움이 외면되고 있는 불행한(heil-los, 온전치 못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불행은 그러한 온전치 못한 시대를 살면서도 전혀 그런 온전치 못함을 느끼지 못하고 그런 세계 속에서 오히려 포근함과 안온함을 느끼고 있다는 거기에 있다. 최고의 위기는 위기 속에 던져져 있으면서도 그 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거기에 있다.
오늘날 우리가 온전치-못함(das Heil-lose)을 느껴 해악(das Un-heil)을 해악으로서라도 예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성스러움이 자신을 숨기면서 남기고 있는 흔적을 알아채는 것이다. 이 시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성스러움을 위한 흔적은 성스러움의 부재가 남기고 있는 흔적으로서 그것은 성스러움을 위한 흔적의 흔적인 셈이다. "그렇게 되면 최소한 몇몇 죽을 자들이 구제불능(das Heillose)으로서의 구제불능이 위협해 오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Hw 272) 그런 한에서 -- 횔덜린의 싯말에 따르면 -- 구원자는 위험이 있는 그곳에서 도래한다. "해악으로서의 해악(das Un-heil)은 우리에게 온전함을 알아채게 해준다(온전함의 흔적을 내준다). 온전함은 부르면서 성스러움을 눈짓해준다. 성스러움은 신적인 것을 묶어준다. 신적인 것은 신을 가까이 해준다."(Hw 294)
해악으로서의 해악이 우리에게 온전함의 흔적을 열어주고, 따라서 온전함은 (성스러움을 위한) 흔적이며 길이다. 이 말은 그것이 (해악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온전함을 대면하게 만든다는 이야기이다. 아마도 온전함의 자명한 현전(면전)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분명하고 예리하게 온전함을 대면시킬 것이다.
온전함은 그 편에서 성스러움을 부르며 눈짓한다. 온전함은, 다시 말해 의미경험은 어떤 다른 것을 계속 지시하는 기호나 가리킴으로서의 눈짓이 아니고, 오히려 그 자신의 온전함에서의, 즉 바로 이러한 일어남 자체에 대한 눈짓이다. 거기에서 '본래'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라고 불러 세운다. 즉 성스러움의 온전함(구제력, Heil)을 성스러움에서부터 볼 것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가 눈짓을 받고 있다는 사실, 우리가 부름을 받고 있다는 그 사실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의미의 눈짓에서는 성스러움이 나타난다. 눈짓이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 기호 안에서 기호를 통해서 현재적이 되고 있다. 의미의 사건은 자신의 신의 이름을 '부른다'. 그렇지만 특정한 이름에 앞서 신적인 것 일반을 부른다.
그렇지만 신적인 것도 하이데거에 의하면 불러지지 않았고 우선 성스러움이 불러지게 된다. 성스러움이 비로소 신적인 것을 "묶는다". 따라서 온전함이 신적인 것을 위한 부름을 부른다고 말할 수 있다. 신적인 것을 찬양하며 외쳐-부름과 건네-부름은 이미 성스러움의 영역 안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영역(신전)은 제한하고 경계를 긋는다. 즉 그것은 '묶는다'. 의미는 신적인 것이 나타나는 영역을 열어준다.
신적인 것은 신을 가까이 해준다. 그것은 신이 도래하여 현전하게 해준다. 성스러움의 현현이 계속 이어지는 것의 현현과 현전이 된다. 신적인 것이 스스로를 내보이는 방식이 신적인 것을 인간에게 하나의 특정한 관점 아래에서 '가까이 데려오며', 그래서 인간이 그 신적인 것에 그에 상응하는 이름을 주고, 그것을 이러한 신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사유는 존재의 진리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사유한다. ...... 존재의 진리에서부터 비로소 성스러움의 본질이 사유될 수 있다. 성스러움의 본질에서부터 비로소 신성의 본질이 사유되어야 한다. 신성의 본질의 빛 속에서 비로소 '신'이라는 낱말이 무엇을 이름해야 하는지가 사유되고 말해질 수 있다."(Hum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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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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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요약문
1) 주제분류: 형이상학, 독일 현대철학(하이데거 철학)
2) 주요어 또는 검색어: 성스러움, 존재, 신(신성, 신적인 것), 시인, 시
3) 요약문:
하이데거는 만년에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인간의 합리화와 탐욕의 불빛이 생활세계 곳곳을 두루 비추어 성스러움의 자리가 없어지자 신은 인간세계를 떠나버렸다. 이제 인간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떠나버린 신이 다시 도래할 수 있도록 성스러움의 마당을 마련할 채비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의 부재를 부재로서, 결핍으로서 느낄 수 있는 깨어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시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시인은 자연의 일깨움을 받아 자연의 본질이 성스러움임을 예감하고 그 성스러움을 자신의 싯말로 명명한다. 궁핍한 시대의 시인은, 신이 떠나버린 칠흑같이 어두운 위기의 시대를 아무렇지 않게 편안히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바로 이 무위기성이 가장 큰 위험임을 경고하는 소리이다. 존재를 지속적인 '현전'의 의미로 이해하여 온 지금까지의 서양의 전통적 존재이해의 지평에서 신의 '부재'는 당연한 '없음[無]'으로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새로운 존재이해 속에 신의 '있음'을 위한 '성스러움'의 터를 마련하여 놓을 때에 온갖 불행(das Heillose)과 해악(das Unheil)에 노출되어 있는 인류가 구원(heilen)될 희망이 있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결론에서 그가 의미하고 있는 성스러움의 차원을 정리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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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에서의 존재와 성스러움>, {철학} 제65집(2000년 겨울호) 209-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