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데리다의 해체주의 비판

나뭇잎숨결 2020. 5. 28. 15:27

데리다의 해체주의 비판

문 장 수(경북대)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방법론으로 소쉬르의 언어학의 두 원리인 자의성과 대립성을 형이상학적으로 확대 적용하는 데서 성립한다. 그렇게 하여 그의 해체주의는 일체의 것을 언어, 특히 문자의 유희로 환원하려는 문자 환원주의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 일반인들이 자기들의 삶의 토대로 확신하는 '외적 자연 세계'도, 데까르트의 방법적 회의의 최후의 도달점인 '사유하는 주체'도 또는 헤겔적 '절대정신'도, 버어클리의 '지각', 칸트의 '경험', 후설의 '현상학적 소여',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 등이 최후의 환원 불가능적인 토대로 간주하는 '지금여기', 즉 '현전성'도 단순한 문자적 유희, 즉 '차연'의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문자 환원주의는 버어클리의 지각 환원주의, 후설의 의식 환원주의, 하이데거의 존재 환원주의, 사르트르의 주체성 환원주의 등과 같이 형이상학적 환원주의라고 평가한다. 따라서 문자 환원주의도 관념사 안에서 등장한 다양한 형이상학적 환원주의들이 갖는 가치 정도만 자기의 고유한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어떤 모종의 인식은 외적 세계에 대한 인식이 아닌 것이 없다는 데서, 극단적인 유물론적 환원주의가 등장할 수 있고, 또한 그 인식이 어떠한 인식이든 주관의 개입을 상정하지 않는 인식은 없다는 데서 극단적인 유아론적 환원주의가 등장할 수 있었듯이, 사실 말이나 문자로 표현되지 않는 인식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문자 환원주의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발생학적 인식론 및 일반 체계론의 인식 의미에 의거하여, 이러한 문자 환원주의적 인식 의미를 비판하고자 했다. 발생학적 인식론 및 일반 체계론에 따르면, 인식 혹은 대상은 단지 존재적 형태적 양상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며, 주관의 구조적 개념적 언어적 차원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라, 대단히 복잡한 다양한 차원의 교차에 의해 구성되며, 또한 끊임없이 변형된다.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모종의 인식이 있다면, 여기에는 적어도, 기능적 양상, 존재적 형태적 양상, 구조적 범주적 양상, 언어적 논리적 양상, 행동적 조작적 양상, 변형적 진화적 양상, 환경적 인습적 양상, 지향적 의도적 목적적 양상 등의 다양한 양상들이 복합적으로 관여하지, 오직 문자만의 작품은 아니다.
※ 주요어(key words) - 차연, 문자 환원주의, 해체, 주체성, 객체성, 현전성


1. 서 론

데리다의 해체주의에 대한 소개는, 물론 그의 대부분의 주저들은 아직 번역되지 못하고 있지만, 이미 국내 학계에도 제법 많이 알려진 것 같다.그리고 비판적인 논문들도 한두 편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데리다의 본질적인 문제와 이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제공하는 연구는 아직 본격화되지 못한 것 같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데리다의 문제의식과 그의 해체의 방법론과 주요 대상들을 분석하고, 이러한 입장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우선 제2장에서, 우리는 데리다의 해체의 방법론적 토대를 구성하는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을 간략하게 분석하고자 한다. 전통적인 언어학에서 언어의 지위, 즉 존재, 사유 그리고 언어 사이의 관계 문제와 이에 대한 소쉬르의 비판을 구성하게 될, 언어의 두 원리인 자의성과 대립성의 원리를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원리에 대한 데리다의 빚과 비판(음성 중심주의)을 동시에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독특한 방법론인 부정 신학적 전략과 차연이라는 신조어의 구성 경우, 차연의 인식론적 의미(시간화와 공간화), 차연의 동의어들(유보, 원-문자, 원-흔적, 공간화, 보충, 독약, 처녀막, 가장자리 표시하기) 등의 의미를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해체의 주요 대상을 외적 세계(제3장), 주체성(제4장), 현전성(제5장)이라는 세 차원으로 구분하여 논구하고자 한다. 이 때, 우리는 단순히 데리다의 입장을 제시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역사비판적 관점에서, 이들 세 차원에 대한 관념사적 비판들을 데리다의 비판에 대비시키면서 비교 연구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대비적 연구는 바로 우리 자신의 고유한 방법으로, 데리다의 방법론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을 구성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제5장(해체의 허와 실)에서는 지금까지의 소극적 비판을 지양하여, 그의 해체 개념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과 모종의 새로운 대안점을 마련하고자 한다.


2. 차연과 기호

우선 데리다의 문제의식을 구성케 한 토대, 즉 그의 해체의 방법론적 토대를 구성하는 언어 문제를 살펴보자. 언어의 지위에 관한 가장 전통적인 입장은 주관의 사유 내용을 표현하는 표현 수단이라는 것이다. 사유 내용은 순수 추상적 개념들도 있지만, 대부분 자연 세계의 사물들, 소위 물리적 대상들이다. 자연 세계는 분명 존재하는 것이고, 사유하는 우리 인간도 자연 속에 존재하는 한 자연물로서의 존재자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은 물리적 자연 세계에 완전히 포섭되지는 않는다. 즉 우리의 사유는 세계에 대한 사유이지만, 세계 그 자체는 아니다. 잘 알다시피, 사실, 물리적 세계, 사유로서의 인간 정신 그리고 언어는 긴밀한 관계를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삼자 사이의 관계를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처지이다. 그러나, 데까르트적 이원론의 전통에 따라, 외적 대상 세계와 순수 사유 주체로서의 정신은 언어적 표현에 앞서 존재하는 실체로 간주되었고, 언어는 주관이 세계에 대한 자기의 사유를 표현하기 위해서 활용하는 표현 수단일 뿐이다. 오늘날 소위 언어의 지시론적 의미론도 이러한 이원론에 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은 때때로 외적 세계보다는 내적 사유의 영역에 다소 우위를 둔다. 즉 외적 세계의 존재는, 방법론적으로 회의한다면, 즉 억지로 회의하기 위해 회의한다면, 의심될 수 있지만, 인간의 사유 주체, 즉 이성의 존재는 어떤 식으로도 회의불가능한 존재로 간주된다. 이러한 이성은 당연히 일체의 언어에 선행한다. 이 입장이 소위 이성 중심주의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데리다의 해체는 방금 언급한 전통적인 이원론, 이성 중심주의 그리고 지시론적 의미론 등의 해체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해체의 단서를 그의 선행자인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안에서의 몇 가지 중요한 구분들에서 발견한다. 소쉬르에 따르면, 우리는 언어 문제와 관계하여 우선 세 가지의 차원을 구분해야 한다.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인간에 고유한 언어적 능력의 차원을 언급하는 랑가쥬(langage), 불어, 독어, 영어, 한국어 등으로, 사회적 단위 내지는 민족적, 국가적 단위로 통용되는 메세지 전달을 위한 인습적, 약정적 기호 체계인 랑그(langue), [개]라는 단어에 대한 각 개인들의 구체적 발음의 차이와 그것에 대해서 갖는 의미의 다양성들의 차원, 즉 각 개인의 구체적 언어사용으로서의 심리적, 물리적 실현인 파롤(parole)의 세 차원이다. 인류의 언어사용 능력으로서의 랑가쥬는 사실 인류의 보편적 능력으로서의 사유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러한 영역이 철학적 연구의 대상을 구성한다면, 각 개인의 구체적 언어사용의 차원인 파롤의 차원은 물리학 내지는 심리학의 연구대상일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언어까지 포함해서 기호 일반 일체를 연구하는 기호학(s miologie)과 구별되는 언어학(linguistique)의 연구대상은 오직 랑그의 차원이어야 한다는 것을 소쉬르는 강조한다. 사회적 약정 체계인 랑그는 도서관에 문집들의 형태로 실재하는 객관적 대상이다. 이 때문에 랑가쥬에 관여하는 철학이나 파롤에 관계하는 심리학과는 달리 언어학은 과학적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야심을 갖게 했다.
소쉬르에 따르면, 사회의 인습적, 약정적 체계로서의 랑그는 근본적인 두 가지의 원리에 근거한다. 우선, '자의성의 원리'이다. 외적 구체적, 물리적 실재인 어떤 모양의 동물에 대해서 한국어는 [개]로 표기하며, 불어는 [chien]으로 표기하며, 영어는 [dog]로 표기한다. 즉 도로 표지판 또는 한자어의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랑그들은 구체적 대상과 그것을 표기하는 글자 사이에는 어떠한 유사나 유추도 없다. 그리고 글자와 그 글자에 대한 발음 사이의 관계도 인습적 약정, 즉 자의적으로 약정한 것이지 어떠한 필연성도 없다. 두 번째 원리는 '대립성의 원리'이다. 한국어의 자모음 체계를 예를 들면, 'ㄴ'은 'ㄱ'이나 'ㄷ' 등 또는 'ㅏ', 'ㅓ' 등에 대립함으로서 자기의 기능을 수행한다. 즉 어떤 한 기호는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기능도 수행할 수 없고, 그 기호가 속해 있는 전체성의 체계에 편입할 때에만 모종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확대하면, 한 단어의 의미는 그 자체적으로 현전하는 어떤 실재를 직접적으로 지시하거나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단어가 속해 있는 랑그의 전체적 체계 내에서의 다른 단어들과의 대립성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소쉬르가 구분한 전문 용어로 말하면, 언어학적 기호의 두 측면인 능기(signifiant)와 소기(signifi ) 사이의 관계는 서로 자의적(arbitraire)이다.
데리다는 자기의 해체의 방법론을 전개하기 위해 소쉬르의 이러한 두 원리를 최대로 활용하지만, 두 가지 점에서 소쉬르의 불충분성을 지적한다. 하나는 소쉬르에 있어서, 언어적 기호의 자의성과 대립성의 원리는 우선 '음성'의 영역에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쉬르에게 있어, 글자는 소리를 표기하기 위한 이차적 수단이다. 따라서 일반 언어학의 본질적이고 일차적인 대상은 음성학 내지는 음운론이다. 따라서 데리다가 글자들의 본성에 대한 탐구로 특성화하려고 하는 문자학(grammatologie)은 소쉬르에게 있어서는 이차적인 것이다. 소쉬르에 따르면, 글자들이 이차적인 것이라면, 음성은 일차적인 것이다. 음성의 차이는 어떤 점에서 외적 물리적 대상의 차이들 내지는 구분들보다는 더 앞서는 것으로 간주된다. 외적 대상들 자체의 존재론적 구분을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은 형이상학 또는 자연과학 그 자체에 의한 외적 세계의 제일 원소들의 끊임없는 수정의 사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조금 전에 언급한 언어의 자의성과 대립성의 원리가 지시하는 함축적 의미는 외적 대상적 구분은 기호적 대립 체계 내에서만 구성될 수 있는 이차적 차이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쉬르는 음성의 존재론적 구분을 지지하는 것으로 데리다에게 보여진다. 그러나 데리다는 음성의 근본적인 차이 내지는 존재론적 구분을 인정하지 않으며, 음성적 차이에 대한 문자적 차이의 선행성을 주장한다. 우리는 '에' 소리와 '애' 소리의 음성적 경계를 엄밀하게 규정할 수 있는가? 이러한 음성적 구분은 '에'라는 글자와 '애'라는 글자에 의한 구분에 근거하지 않는가? 말하자면, 음운학상의 대립성의 엄밀한 존재론적 구분은 글자의 제정의 결과가 아닌가? 이것이 음성 중심주의에 대한 데리다의 문자 중심주의의 비판의 단초이다.
소쉬르에 대한 데리다의 두 번째 비판은 전자는 음성적 차이들의 존재론적 지위를 지지하면서, 음성적 차이에 대한 글자적 차이의 우선성을 놓치므로 인해서, 일반 언어학의 중요한 발견들을 일반 기호학으로까지 발전시키지 못했고, 그 결과 우리들의 일체의 인식의 원리인 차이성의 원리, 즉 차이의 유희를 어렴풋이 일견했지만, 이러한 차이의 유희가 인식론적 구분들뿐만 아니라, 일체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에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따져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소쉬르는 자기의 대립성의 원리를 차이학과 문자학의 지평으로까지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데리다는 평가한다. 그렇게 하여, 데리다는 소쉬르의 랑가쥬, 랑그, 파롤의 구분, 또는 능기와 소기의 구분들 그 자체 글자의 유희의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소쉬르의 대립성의 원리를 기호 일반에까지 극단적으로 확대하면서, 이를 일체의 의미생산의 가능성의 원리로 간주하는 데서 데리다의 차연학이 구성된다. '남자'의 의미가 '여자'라는 개념의 대립에 의존하지 않을 때, 어떠한 의미도 가질 수 없듯이, 모든 용어는 그를 둘러싼 다른 용어들에 의존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아버지'라는 개념은 구체적으로 실재하는 외적 대상을 직접적으로 긍정적으로 지시하거나 표상하지 않는다. 사실, 세상에 동일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듯이, '아버지'는 다양한 자식을 갖고 있는 다양한 모든 아버지에게 적용된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어떤 특정의 외적 대상만을 직접적으로 온전하게 지시하지 않는다. 이 용어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다양한 차원들, 즉 기능적 차원, 형태론적 차원, 환경적 차원, 구조적 차원, 시간적 진화의 차원 등이 함께 복잡하게 관여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겠는데, 데리다는 여기서 특히 구조적 차원만을 강조한다. 여기서 말하는 구조란 바로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이 지지하는 구조주의의 구조이다. 한 기호의 의미는 그 기호가 속해 있는 전체성의 구조에 편입되어 있는 다른 용어들에 대립하는 한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즉 '아버지'의 의미는 '어머니'의 의미에 의존해서만, 다시 후자는 '자식', '아들', '딸', '할아버지', '할머니', '손자' 등의 의미에 의존하는 한에서만, 후자들은 다시, '고모', '이모', '사촌', '오촌', '사돈'....... 결국 한국어의 대립체계의 전체성에 의존해서만 한 용어의 의미가 결정된다. 간단히 말하면, 용어의 의미의 결정자는 '대립성' 자체이다. 그렇다면 '대립성'이란 무엇인가? A와 B 사이에 대립이 작용한다고 할 때, 이 때의 대립성 그 자체는 오직 A에만 귀속되는 것도, 오직 B에만 귀속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 '대립성'의 근원을 적절하게 A와 B에게 분배할 수도 없다. 의미의 생산자 혹은 의미의 가능성의 원리로서의 이 '대립성'의 정체를 해명하기 위해, 데리다는 한 독특한 신조어를 착안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차연'(diff rance)이다.
왜 '물'은 '물'이고, '불'은 '불'인가? 말하자면, 왜 세상은 이런 식으로 구분되어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적 모사설 혹은 다양한 종류의 경험실재론에 따르면, '물'과 '불'의 구분은 실재 자체에 내재하는 형상인 듯이 고려되며, 피타고라스, 플라톤, 데까르트로 이어지는 인식론적 합리론에 따르면, 인식 주관이 선천적으로 지참하고 있는 '수적 상수'에 기인한다. 칸트와 피아제는 세계와 주관의 상호작용 내지는 상호공모를 지지하면서, 인식(구분)에 있어서 주관과 세계의 관여 범위 내지는 역할 경계를 확인하려고 일생을 헌신했다. 그런데 한 편에서 세계 자체가 우리가 인식하는 대로 처음부터 존재론적으로 구분되어 있었다는 것을 자연 과학사 자체가 더 이상 보증하지 않는다. 즉 오늘날 자연학의 가장 심오한 공식을 제공하는 양자 철학에 따르면, 세계에 대한 물리적 인식이란 주관의 도구적 관심 혹은 관찰의 도구로 활용하는 장치에 좌우된다. 다른 한 편으로 이성 중심주의에 대해서 말하자면, 확정적으로 승인할 수 있는 주관의 구조를 아직까지 해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칸트도 후설도 '이상성'(id alit )이라고 말한다. 잘 알고 있듯이, '이상성'이란 '문제의 구조가 확정적 실재가 아니라, 현실의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 바람직하게 상정해 볼 수 있음'을 지시할 뿐이다. 그리고 주관과 세계의 상호작용에 대해서 말하자면, 소쉬르 이후 '주관'이나 '세계'는 더 이상 객관적 절대적 실재가 아니라, 기호학적 대립 체계의 산물일 뿐이다. 결국 옳건 그르건 현재의 학적 사유의 최후의 보루는 '기호학적 환원'이다.
그래서 현재 이 시점에서 물을 수 있는 인식론적 질문은 기호적, 문자적 대립성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로 집약된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되게 하는 것, 즉 '아버지'를 '어머니', '아들', '할아버지' 등으로부터 대립시키고 구별시키고 차별화 하는 것은 무엇인가? 즉 인식적 개념적 차이들을 발생시키는 원리, 즉 차이 일반의 원리는 무엇인가? 이러한 분야의 연구를, 우리가 원한다면, 차이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가 말하는 문자학은 문자적 차이들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왜 그의 문자학이 결국 차이학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체의 의미론적 구분을 가능케 하는 차이 일반의 원리를 우리는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가? 다시 말하면, 지금 여기서의 본질적인 문제는 문자적 차이의 근원이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논의와 진행은 문자로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결국 문제는 문자가 문자 자신의 본성을 해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자는 이를 순환성 오류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문자적 차이들의 발생 및 텍스트의 본성을 탐구하려는 모든 운동은 기존의 문자적 차이들과 텍스트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런 상황을 데리다 자신 너무나 잘 통각하고 있다. 그의 본래적 의도는 텍스트 밖의 세계의 실재성 내지는 가능성을 해명하는 것이지만, 텍스트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우리에게 영원히 없다는 것을 그 스스로 분명히 자주 지적한다. 따라서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소위 '부정신학적 방법'일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의 부정신학적 방법론은 기존의 그것과 동일시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신학에서 말하는 부정신학적 방법은 기존의 모든 인식들 또는 이해들을 다 부정하지만, 악무한적 부정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부정신학은 영원한 부정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즉 여기서는 이제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 실재를 확보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한 과도기적 부정일 뿐이다. 그러나 데리다가 지지하는 부정과 해체는 한계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부정이며 해체이다.
이제 우리는 왜 문자의 본성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문자적 차원을 포섭하면서도 문자적 차원과는 다른 상위의 차원을 확보해야만 되는가를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으로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는 일보도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동시에 알고 있다. 데리다는 이러한 모순적 상황을 절충적으로 종합하면서, 문자이면서 동시에 문자가 아닌 한 기호를 착안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차연(diff rance)이라는 글자이다. 우선 기존의 불어 체계에 'diff rance'라는 단어는 없기 때문에, 이 글자는 불어의 전체적 체계에서 볼 때, 글자가 아니다. 그러나 이 글자가 불어 체계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이 단어는 불어의 'diff rer'라는 자동사의 현재 분사형인 'diff rant'에 착안하여 데리다 자신이 변형시킨 명사형이다. 'diff rer'는 불어 체계에서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된다. 첫 번째 의미는 '연기하다', '미루다' 등이다. 두 번째 의미는 '서로 다르다', '상이하다' 등이다. 불어의 현재 분사형은 항상 능동적인 활동을 함축한다. 때문에, 'diff rant'는 '연기시키는'과 '차별화하는'이라는 이중적 의미의 능동적 유희를 함축한다. 이런 관점에서, 'diff rance'는 '연기화'와 '차별화'라는 이중적 능동성을 함축하는 파생명사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금 지적했듯이, 현행 불어 체계에 'diff rance'라는 단어는 없다. 현행 불어 체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diff rer'의 명사형은 'diff rence'이다. 그런데 이 명사는 단지 '차이' 혹은 '구별'이라는 의미만 지지할 뿐, '연기'라는 의미를 지지하지 않는다. 불어에서 '지체', '연기', '지연'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명사는 'd lai'이다. 그러나 이 명사형은 고전 불어 'deslaier'에서 파생된 것이고, 현재 불어 '연기하다'의 의미로 사용되는 'diff rer'에서 직접적으로 파생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diff rence'(차이)와 'd lai'(연기)는 양자 모두 단순히 정태적인 관념을 표시할 뿐, 능동적 운동 내지는 유희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불어에서 단순한 정적 차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화하는' 능동적 활동을 지시하는 명사로 'diff renciation'이 있다. 이 명사는 'diff rencier'(타동사, 구별하다, 차별하다)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diff rence'(차이), 'd lai'(연기), 'diff renciation'(차별화)이라는 세 명사들 중에, 그것이 어떤 것이든, 오직 하나의 명사로는 현재 자기의 문제 상황을 적절하게 표상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러한 세 관념을 모두 함축할 수 있는 한 새로운 신조어를 고안하는데 이것이 그의 'diff rance'(차연)이다.
의미 일반, 즉 차이 일반의 생성 원리의 차원을 함축하거나 지시해 줄 수 있는 한 용어로 'diff rance'(차연)라는 글자를 제작하고, 이 글자의 함축적 의미를 위에서 분석한 세 동사와 그것들로부터 파생된 세 명사형들의 종합으로 일단 간주하지만, 사실 데리다 자신이 사유하는 문제의 지평은 이런 식으로 쉽게 환원되거나 분석될 수 있는 사태가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왜냐하면, '의미', '차이', '원리', '연기', '차별화' 등의 개념이 이미 모종의 전체성의 운동에 의해서 구성된 결과이듯이, 이렇게 구성된 결과들을 아무리 종합해도 여기서 구성하는 원리 자체를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텍스트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사유하기 위해 언어에 의존하지 않고는 대안이 없기 때문에, 말하자면, 억지 설명을 하기 위한 '전략'을 그만 둘 수는 없기 때문에, 이러한 수고스러운 우회를 반복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전략의 긍정적인 면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즉 우리는 현실적으로 언어의 영역 밖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언어적 종합의 가능한 최대성은 언어 외부의 차원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거나 그러한 영역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모종의 열쇠를 줄지도 모를 일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전략적 관점에서, 즉 일체의 언어적 차원의 거부와 해체라는 부정적 동기를 안고서 동시에 혹시라도 이러한 언어적 지평 외부를 어느 날 갑자기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소박하고 희미한 희망에서, 'diff rance'(차연)이라는 이 신조어의 조성 경위를 간략히 제시한 후, 이 용어가 함축하거나 지시해 줄 수 있을 의미를 분석한다.
방금 위에서 '차연'이라는 이 말 아닌 말의 조성 경위를 설명하는 데서 어느 정도 노정되었듯이, 이 용어가 지시하는 두 가지 큰 함축적 의미는 '시간화'와 '공간화'이다. 데리다가 말하는 '시간화'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시간적 '지연', '연기', '우회'를 의미한다. 동시에 이 시간의 의미는 '경제'라는 용어와 교환적이다. 사실 '경제'란 가능한 '우회'를 적게 하는 것, 즉 최대한의 짧은 '지속'을 함축한다. 그러나 아무리 짧은 순간적 '지속'이라도, 거기에 이미 '연장성', '확장성' 따라서, '비동일성', '타자성', '오염성'을 지니지 않는 것은 없다. 말하자면, 모종의 '소여'가 있을 때, 인식론적 이상은 이 소여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에 의존하는 우리의 인식은 그 어떠한 인식도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언어적 전체성의 체계의 유희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언어에 의한 사물 혹은 소여의 표상이란 논리적 동일성과 모순율의 원리에 지배되기 이전에 이미 시간적 '지연'과 '우회'에 세례된다는 것이다. 외적 실재로서의 대상이든 내적 경험으로서의 대상이든 언어에 의한 이러한 대상들의 표상은 결코 직접적이지 않고 시간적 '지연'에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는 이러하다. 어제 어떤 상황에서 내가 "X새끼"라고 한 말을 오늘 어떤 상황에서도 "X새끼"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제의 나의 그 기분과 오늘의 나의 이 기분은 결코 같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동일한 "X새끼"라고 말할 뿐이다. 이 때의 이 용어의 의미는 이미 한국어의 일반적 의미에 종속된다. 사실, 나의 어제의 상황과 오늘의 상황은 결코 동일할 수도 없지만, 어느 쪽의 기분이든, "X새끼"라는 그 말로 그 기분이 온전하게 직접적으로 드러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속상하는 일이 생겼을 때, 아무리 욕을 해도 그 분을 다 풀지 못하는 사태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여와 언어적 표현 사이에는 이미 일련의 틈이 개입한다. 그런데, 사실, 실재에 대한 언어적 표상의 이차성, 우회성, 상징성의 테마는 그렇게 참신한 것은 아니다. 이미 인식론사에서 오랫동안 반복된 진부한 문제이다. 시간적 연기로서 데리다가 문제삼는 것은 단순히 언어적 표상의 이러한 이차성뿐만 아니라, 언어에 앞선 소여로 간주된 '실재' 또는 '지각', '순수 사유' 등이 이미 언어이며, 따라서 시간적 연기화의 강을 건너온 것이라는 것이다.
'공간화'란 동일성의 원리에 의한 차별화의 운동을 의미한다. 논리적 차원에서는 모순율보다 동일률이 선행하는 것인 양 간주되곤 했다. 그러나 동일률과 모순율은 그 선후를 계산할 수 없는 개념이다. '분필'과 '칠판' 관계에서 '분필'이 '분필'로서의 자기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칠판'과의 차별성을 확보하지 않고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소쉬르도 데리다도 동일성의 원리보다는 대립성의 원리를 더 강조한다. 사실 오늘날 발생학적 인식론은 동일성의 원리에 대한 가역성의 원리의 선행성을 잘 논증한다. 그리고 사실 데리다가 여기서 말하는 공간화란 논리적 단계의 동일성과 모순율의 자기 전개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논리적 운동 이전의 모종의 힘의 유희를 지시한다. 그리고 이를 차연이라고 억지로 명명할 뿐이다. 수고스럽지만 억지로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즉 '분필'을 '분필'로 인식하려면, 우리는 '칠판'으로부터 '분필'을 이격시켜야 한다. 아니 '분필' 아닌 일체의 것으로부터 '분필'을 분리시켜야 한다. 즉 '공간화 해야 한다'. 이런 의미의 공간화는 '분필'과 다른 일체의 것들 사이에 시간적 '연기'를 개입시키는 것에 대등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는 시간화와 공간화는 일자의 두 표현일 뿐인 양 말한다. 즉 시간의 공간화란 곧 공간의 시간화이다.
데리다가 차연과 이 개념이 함축하는 시간화 또는 공간화라는 개념들로서 획득한 소득 또는 이러한 용어들로서 드러내려고 하는 지평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관성 있게 하나의 결론에로 수렴된다. 즉 이 작업은 글자들의 기원 내지는 근원 찾기라는 관점에서 "원-글자" 찾기이다. 그러나 언어는 어떠한 것이든 이미 시간화적 공간화적 오염을 면치 못하는 일련의 낙서 내지는 "흔적"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흔적들 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인 흔적은 무엇인지 탐구할 수는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모든 작업은 일종의 "원-흔적" 찾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우리의 모든 작업은 언어적 작업인데, 이러한 언어적 작업은 이러한 언어적 작업이 어떻게 해서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해명하지 못한 채, 끊임없는 다람쥐 쳇바퀴 돌기일 뿐이라는 것, 즉 우리에게는 언제나 "유보"조항이 남는다는 것, 전체성의 한계를 송두리째 관조하는 데서 오는 희열을 맛보는 듯하지만, 한계 없는 심연에로의 추락이 곧 찾아온다는 것(처녀막), 결국 글은 병 주고 약 주는 격이라는 것(파르마콘), 한계를 체험하는 것(가장자리-표시-운동) 등이다.
간단히 말하면, 데리다는 기호들의 가능성의 원리, 즉 의미들의 발생의 원리를 해명하기 위해 차연이라는 한 기호를 고안한다. 그런 의미에서 차연은 일체의 기호들의 가능성의 원리이고 일체의 의미들의 발생을 근거 지우는 힘의 유희이다. 그러나 '힘', '유희', '원리', '의미', '기호' 등이 이미 언어이듯이, 차연도 이미 언어이고 말이고 개념인 까닭에, 언어의 가능성의 전체성에 전혀 접근하지 못하는 기호의 한 순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부정적인 이 차연의 운동은 종래까지 난공불락으로 간주된 두 성곽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감행한다. 그 두 성곽이란 외적 실재와 이것의 상반자인 내적 주관, 즉 주체성이다.


3. 외적 세계 해체

사유를 속성으로 하는 정신 실체와 연장을 속성으로 하는 사물 실체라는 데까르트의 이원론은 과학사적 다양한 인식론들에서는 유용한 구분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유용한 인식론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적어도 철학사의 맥락에서는 철학적 사유의 새로운 방법론 내지는 패러다임이 등장할 때마다, 점점 더 강화된 비판의 목소리로 거부되거나 대체되었다. 흄의 현상론적 패러다임은 지각과 존재를 동일시하면서, 세계 또는 이에 대립된 전혀 다른 종류의 실체로 간주된 정신 등을 단순한 복합 관념으로 간주했다. 반면에 칸트는 주관과 외적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한 구성주의를 주장하지만, 그의 선험적 관념론과 경험 실재론적 패러다임은 외적 세계 그 자체, 소위 물자체란 요청적 개념이고 그것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소위 불가지의 차원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헤겔에 의한 변증법적 패러다임은 절대 정신이란 이름 하에서 주체와 객체의 대립적 통일을 시도했다. 그리고 후설의 현상학적 패러다임은 소위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주관과 객관이라는 전통적 구분을 자연주의의 신념으로 간주하면서, 현상 그 자체만을 기술할 것을 제안한다. 제시된 이러한 패러다임들만을 두고 평가한다면, 이들은 외적 세계의 실체성 내지는 실재성의 해체 또는 부정을 강화했지만, 주체성에 대해서는 분명히 그것의 지위를, 실체성의 방향은 아니라 하더라도, 긍정적인 방향에서 향상시켰다. 즉 이러한 노선들에서 우리는 주관 중심주의 내지는 의식 중심주의, 때로는 이성 중심주의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외적 세계에 대해서는, 그것의 실체성 내지는 실재성을 관념사 자체가 끊임없이 해체하고 비판해 왔기 때문에, 데리다의 해체가 개입할 여지가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단지 제시된 페러다임 중에 헤겔의 변증법은 아직 절대적 존재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데, 이것에 대한 해체는 니체가 충분히 수행한 것으로 데리다는 간주한다. 그러나 방금 제시한 이러한 노선들의 가장 심오한 종합으로 간주되고 있는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현상학의 패러다임은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면서, 존재자에 대한 존재의 우선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존재 향수병의 현대적 부활이라고 데리다는 비판하다. 따라서 데리다의 관점에서는, 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식의 갈구가 왜 부정적인 측면에서 향수병인지를 해명하는 것이 곧 서구의 우주 중심적 형이상학의 총체적인 해체를 구성할 것이다. 잘 알려진 하이데거의 공식에 따르면, 서구의 형이상학의 역사는 존재 망각의 역사인데, 이 때의 존재 망각이란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의 망각이다. 거의 이 천년의 서구의 형이상학의 반성도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해명하지 못했다면, 하이데거 전공자가 아닌 본 연구자가 이 차이를 지금 당장 제한된 지면에서 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문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 자신은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해명하는 데 성공했는가? 그런데 하이데거 자신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해명한다기보다는 그 차이의 해명의 불가능성을 고백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 자신 부정신학적 방법을 활용한다. 그렇게 하여, 1946년의 그의 한 텍스트인 Der Spruch des Anaximand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존재 망각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숨기는 존재의 본질 자체를 구성한다. 망각은 너무나도 본질적으로 존재의 운명에 속하는 것이어서, 현전자가 그의 현전 안에서 개화하자마자 정확히 동시에 이러한 운명의 여명도 시작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즉 존재는 자기의 본질 및 존재자와의 차이를 계속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존재의 역사는 처음 시작부터 존재 망각이다. 차이는 없다. 그 차이는 망각되어 있다. 현전과 현전자라는 이러한 차이만이 유일하게 드러나지만, 그러나 이는 차이라고 할 수도 없는 차이이다. 오히려 반대로, 현전이 현전자로 나타나자마자 그리고 그가 이러한 현전자 안에서 자기의 근원을 발견하자마자, 차이의 근원적인 흔적은 사라진다."
너무나 단순화한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하이데거의 의도는 이러한 것 같다. 존재와 존재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존재자가 존재자로 나타나는 것은 존재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마찬가지로 존재 그 자체도 자신의 출현의 유일의 통로 내지는 방법으로 존재자를 활용한다. 그러나 존재자들의 어떠한 모습도 존재 그 자체는 아니다.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는, 메카니즘 단계가 아니라, 유기체적 단계에서의 전체와 부분의 관계처럼, 개별적 존재자들의 각각의 모습으로 전체로서의 존재를 결코 알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관계이다. 이러한 차원에서의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는 데리다의 차연과 개별적 의미들 내지는 차이들인 한에서의 개별적 기호들 사이의 관계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자기의 차연과 개별적 기호들 사이의 관계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들의 관계에 결코 비교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말하지만, 존재 우위성 내지는 우선성을 함축하며, 특히 하이데거는 자기가 말하는 존재가 단순한 언어적 기호일 뿐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리다의 눈에는, 하이데거의 존재 그 자체도 차연의 운동이 구성한 한 결과물, 즉 언어적 한 차이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는 자기의 차연 개념이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보다 더 근원적인 지평을 연다고 주장한다.
데리다는 우리가 방금 위에서 언급한 하이데거의 Der Spruch des Anaximander의 또 다른 구절을 인용하면서 후자의 존재 향수병을 보다 더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
"현전의 본질 자체 안에서 자기의 질서를 전개하고 있기에, 현전자에 대한 그 관계는 유일하다. 즉 이 관계는 여타의 다른 모든 관계와 어떠한 비교도 할 수 없다. 이 관계는 존재 그 자체의 통일성에 속한다. 존재 그 자체 안에서 전개되는 바의 것을 명명하기 위해서 언어는 단적인 말, 유일의 말을 찾아야 한다. 존재에 말을 거는 사유의 모든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우리가 측량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이처럼 위험하기는 하나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는 어디서나 항상 모든 언어를 통해서 말하기 때문이다."
위 인용문은 "존재의 최초의 말"(to khre n ; Brauch ; le maintien ; usage)의 번역에 관계하면서, 이 단어가 가질 지위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사실 "존재의 최초의 말"이란 표현 자체가 애매하기 짝이 없지만,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다. 하나는 '존재가 한 최초의 말'로, 다른 하나는 '존재에 준 우리의 최초의 말'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이 두 표현이 결국 동일한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주관중심주적 사고방식에서는 일체의 말은 주관의 말이겠지만, 하이데거의 존재중심주의에서는 주관이 한 말이 사실은 존재가 한 말이기 때문이다. 각자는 자기 나름대로 각양각색으로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마치 헤겔의 이성의 간교 개념처럼, 사실은 존재 자신의 다양한 자기 표현이다. 달리 말하면,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는 비유적으로 바다와 파도의 관계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파도란 곧 각양각색의 실존적 개인들의 결단에 의한 언어적 사유들, 즉 사유적 언설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말들은 존재의 말이기는 하나 존재 자체와는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개별적 말들로서의 존재자들이 존재 그 자체와 어떻게 다른지를 알 수는 없다. 문제는 존재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표상해 줄 가장 원초적인 혹은 가장 가까운 말의 고안이다. 이런 점에서 "존재의 최초의 말"을 하이데거는 "to khre n"이라 하고, 이를 독어로 "Brauch"로 번역한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를 "le maintien"으로 번역하며, 베스 교수는 영어로 "usage" 로 번역한다. 우리 말로는 "유지"로 번역될 수 있겠다. 말하자면, '유지'란 '존재' 개념의 가장 가까운 교환 개념이거나, '존재'란 단어보다도 문제의 실재성의 원리인 존재적 차원을 더 잘 표현하는 전체성적 단어라는 것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이런 언어 게임을 더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단지 하이데거의 존재 특권화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점을 간단히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하이데거의 "존재는 어디서나 항상 모든 언어를 통해서 말한다"란 문장을 해석해야 될 것 같다. 여기서 "존재", "말", 그리고 "언어"의 지위는 무엇인가? "존재"(L' tre)는 유일적 전체성이다. 그리고 "말"(parole)은 실존의 결단에 의한 천차만별이다. 반면에, 소쉬르의 언어학적 구분에서 언급했듯이, "언어"(langue)는 사회의 인습적 약정 체계로서 자의성과 대립성의 원리에 의존한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존재가 언어를 통해서 자기의 얼굴을 조금씩 보여줄 수 있을 뿐이지만, 그렇다고 존재와 언어를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즉 존재는 언어에 앞선다.
그러나 궁극적인 문제는 이것이다. 즉 존재와 이 존재가 내는 소리(말)가 의미를 갖고 드러날 수 있는 유일의 창구는 바로 글자로서의 저 유일한 단어, 즉, 고유 명사 안에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글자들로서의 명사들은 이미 사회적 인습적 약정 체계일 뿐이다. 이 체계의 성원들은 이 체계를 벗어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차별성도 갖지 못하는 자의적 대립 체계일 뿐이다. "존재는/ 어디서나 항상/ 모든/ 언어를/ 통해서/ 말한다"라는 이 구절의 의미는 바로 각각의 단어들의 대립성 하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존재"도 "존재의 말"도 하나의 대립적 글자의 자격을 지닐 때에만 유의미하다. 존재의 선행성도 언어가 만든 언어의 유희의 결과이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들의 대립적 차이들의 발생의 근거인 모종의 유희로서의 차연은 존재라는 개념보다는 더 근원적일 것이다. 그러나 차연 그 자체 이러한 각각의 구성들의 대립에서 구성된 한 개념이기 때문에 결코 환원 불가능적인 근원도 유일의 명칭도 아니다. 따라서, 차연학에서는 "근원", "시원", "토대", "원리", "실재" 등은 가장 우선적으로 해체되어야 할 말들이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지적했듯이, 차연 개념에 근거한 데리다의 이러한 외적 세계 및 세계에 대한 인식들에 대한 해체는 관념사 안에서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 미다스 왕의 우화의 현대적 표현일 뿐이다. 미다스 왕이 만지는 것은, 자기의 음식까지 포함해서, 모두 다 황금으로 변해버렸듯이, 문자가 개입하자마자 차연의 진정한 모습은 숨은 버리거나 왜곡된다. 달라스가 잘 분석하고 있듯이, 스피노자가 '결정은 부정이다'고 말할 때, 칸트가 '물자체'와 '경험'을 구분하면서, 우리의 경험은 경험일 뿐 결코 물자체에 대한 정보를 줄 수 없다고 말할 때, 또는 '순수 지속'은 오성적, 분석적, 언어적, 과학적, 대상화적, 표상화적 방법으로는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베르그송이 말할 때, '존재'는 '세계-내-존재자'인 '현존재'의 실존적 창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지만, 그러나 이렇게 드러난 존재는 이미 '존재자'적 지위를 가질 뿐, 존재 그 자체와는 이미 거리를 취한다고 하이데거가 말할 때, 그리고 싸르트르가 '즉자'와 '대자'를 구분할 때, 이러한 모든 논의들은 미다스 왕의 우화의 반복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4. 주체성 해체

우리는 이하에서 주체성 개념의 토대를 마련한 데까르트의 사유들을 정리하고, 이러한 자아 실체성이 그 후로 어떻게 해체되어 왔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즉 우리는 주체성에 대한 데리다 이전의 다양한 해체들을 대비시키면서, 데리다의 위치를 무력화시킬 것이다. 즉 데리다의 주체성 해체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다양한 해체가 가질 수 있는 의미를 재해체할 것이다.
Descartes의 방법적 회의의 전체 과정과 그것의 최종 귀결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1) 인식들의 현상 분석에서 그 인식이 어떠한 종류의 인식이든 거기에 이미 '자기 인식'이 동반되지 않은 인식은 없다. 2)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인식을 크게 '대상 인식'과 '자기 인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3) '자기 인식'은 어떠한 '대상 인식' 보다도 확실하며 아니 절대적인 확실성이며, 이에 반해 일체의 '대상 인식'의 필연성은 전자의 필연성에 의존하는 이차적 필연성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사유한다는 사유'를 지참함이 없이는 어떠한 사유도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4) 인식론 상에서의 사유하는 나의 있음의 확실성은 성실 신의 보증에 의해 이제 존재론적으로도 그것의 '실체성'을 확보할 수 있고 사유하는 주체가 환상이 아니라 실존하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면, 이제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사유하는 자'의 사유 내용들 또한 정당한 '실재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외적 객관 세계의 가능성이 주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데까르트는 정신과 세계라는 두 실체 중에서도 정신 실체에 무게를 더 두었다.
이러한 실체론적 자아 관념은 칸트에 의해 최초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칸트는 사유 일반으로서의 주관, 즉 형이상학적 자아 관념을 비판한다. 일체의 직관으로부터 독립적인 '사유하는 나'란 단지 모든 판단의 '순수 형식'이다. 이러한 순수 주관을 실체로 결정하는 것은 오류이다. 사유하는 자아가 모든 사유 안에 주관의 가치를 항상 갖는다는 것, 이것이 내가 마치 어떤 대상이 존재하듯이 자기 자신 또는 실체로 존재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유하는 자아 존재란 모든 경험 또는 모든 인식의 가능성의 일반 틀 내지는 형식일 뿐이지, 이해 불가능한 방법으로 사유 일체가 의존해 있는 어떤 초월적 존재론적 존재는 아니다. 즉 Cogito는 인식론적으로 요청되는 인식의 가능성의 전체성의 형식 내지는 구조일 뿐이다는 것이 Kant의 결론이다.
그러나 헤겔은 칸트와 반대로 주관과 객관의 통일성 내지 분리불가능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대부분 매개된 내용, 즉 이차적 사유 혹은 구성된 표상의 활용이 불가피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떠한 장막도 더 이상 없는 '순수 활동성'으로서의 사유, 즉 직접적인 자기 자신의 존재성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니체에 오게 되면, 데까르트의 Cogito와 헤겔식의 '순수 직접태'의 인식이란 언어적인 문법의 함정에 빠진 자의 착각이라고 경고한다 :
"말의 함정에 사로잡혀 있는 Descartes보다 더 신중합시다. 사실 Cogito는 단지 하나의 말일 뿐이지만, 그 의미는 복수적이다. [...]저 유명한 Cogito는 다음과 같은 것을 함축한다 : 1. 어떤 사물은 사유한다 ; 2. 그리고 나는 그것이 바로 사유하는 자아라고 믿는다 ; 3. 그러나 두 번째 문제는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불확실하다는 것을 허락한다면, '어떤 사물은 사유한다'는 첫 번째 문제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믿음을 포함한다. 즉 그것은 사유는 주관, 즉 어떤 사물을 상상케 하는 활동성이다는 믿음이다. ergo sum은 이 이상의 다른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문법적인 믿음이다. 우리는 사물들과 그것들의 활동성을 (언어적인 차원에서) 지지한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직접적인 확실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 우리에게는 단지 다음과 같은 공식이 있을 뿐이다 : 어떤 사물이 믿어지고, 따라서 어떤 사물이 믿어진다 - 악순환! 결국 Cogito로부터 sum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마찬가지로 인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오직 사실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논리 - 무엇보다 먼저 ergo - 에로 다가간다! 도대체 인식에 있어서 확실성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이 인용문은 왜 post-modernism의 출발점을 니체에서부터 고려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보게 할 것이다. 결국 니체는 데까르트나 헤겔이 지지한 직접태의 인식이란 언어적인 문법이 제공한 단순한 '믿음'이며, 따라서 보다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개인적인 '환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데까르트와 헤겔에 의해 지지된 실체론적 내지 선험적 주체성은 프로이드의 무의식 개념에 의해 재도전을 받게 된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Cogito는 생생하게 '자각된 의식'이라면, 프로이드는 이러한 의식은 선천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기보다는 구성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 때, 특히 표면적, 자각적, 표상 가능적, 따라서 사회적으로 교환 가능적인 이러한 '표층 의식'을 구성케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의식적으로 의식할 수 없는 '무의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무의식'은 따라서 개인적 차원의 전체성의 구조로서, Freud는 여기서 특히 성적 욕구 체계를 강조한다. 생물학적 실질적 차원인 리비도의 실현의 양식이 문제의 주관의 심리적인 '정서'를 지배하며, 이 후자가 다시 언설적 차원에서의 모든 의식 교환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적 사유의 차원으로서의 의식인 Cogito 아래에 숨어서 이러한 표면적 의식을 위장시키는 실질적인 전체성은 문제의 의식의 가능성의 조건이기 때문에 문제의 의식 자체에게는 절대로 의식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의식'이라 할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우리는 분석 철학적 흐름에 의한 Descartes의 Cogito의 해체를 볼 수 있다. 카르납의 논문, "The Elimination of Metaphysics Through Logical Analysis of Language"은 이 문제에 대한 가장 분명한 논리적 분석을 줄 것이다. 그에 따르면, Cogito, ergo sum이라는 이 명제는 두 가지 차원에서 논리적인 위반 내지는 모순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우선 첫째로, Cogito(나는 사유한다)라는 관념을 아무리 분석해도 그 속에 sum(나는 존재한다)이라는 관념은 내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서 후항의 내용이 전항에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음을 지시하는 ergo(따라서)라는 논리적인 연결사를 사용한 것은 논리 법칙 위반이다는 것이다. 둘째로 "나는 존재한다"(sum)는 문장은 '문법적인 통사론'(grammatical syntax)의 관점에서는 아무런 모순도 없지만, '논리학적 통사론'(logical syntax)의 관점에서는 단순히 '틀린 문장'(false sentence)이 아니라, 전혀 '무의미한 문장'(non-meaningful sentence)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한다'는 용어는 오직 감각적 소여들에만 적용되는 용어인데, 지금 여기서는 실재적 대상이 아닌 추상적 관념에 적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데리다의 주체성 해체는 선행하는 이러한 다양한 해체들을 활용하고 자주 인용한다. 그러나 외적 세계의 실체성의 해체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서도 종전의 해체들과 자기의 방법을 차별화 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해체주의의 해체 방식의 보다 심오한 근원성을 강조한다. 그의 주체성 해체의 요지는 이러하다. 불어 체계에서 예를 들자면, 주체 내지 자아란 문법적인 하나의 기능으로서의 주격, 목적격, 여격 등의 장소에 대체 가능적인 요소들인 한에서의 아버지, 어머니, 삼촌, 형, 동생, 누이 등의 일련의 전체성 속에서 '나'(je)라는 단어가 차지하는 위상이다. 즉 자아란 '나'(je)라는 단어가 문제의 그 언어 체계(langue)의 전체성 안에서는 형성되는 대비성, 교환성, 차별성이다. 다시 말하면, 대다수의 상식인들이 이미 자기의 존재성을 일체의 언어적인 번역 이전에 이미 직접적으로 따라서 심리적으로 통각한다고 역설한다손 치더라도, 사실에 있어서는 자아란 심리학적으로 느끼는 일련의 이미지들의 전체성에 앞서 각각의 언어 체계에 의해 고유하게 구성된 전체성으로서의 문집체계에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의 극단적인 입장은 그것이 아무리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지각 내지는 이미지라 하더라도 일단 의미있는 '표상'으로, 따라서 적어도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대상인 한에서의 모든 심리적 내용은 이미 언어적 표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은 소쉬르 이후의 언어학적 구조주의에 고유한 입장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구조주의도 이러한 입장에 멀지 않다. 즉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구조주의의 방법론에 의존한다.


5. 현전성 해체

앞장들에서와 마찬가지 방법으로 우리는 먼저 관념사에서 '현전성'(presence)의 개념이 갖는 의미 및 지위를 제시하고 이 개념에 대한 선행 연구자들 및 데리다의 비판 내지는 해체를 분석하고자 한다.
외적 세계와 이의 대립자인 주관 내지 주체성의 해체는 모든 종류의 주객 이원론, 유물론 그리고 유심론에 대한 총체적인 해체를 함축할 것이다. 이는 동시에 모든 종류의 실재론과 관념론의 폐지를 함축할 것이다. 사실 현상학적 환원이 잘 보여 주듯이, 어떤 인식에서 어디까지가 외적 물리적 관여 사항이고 어디까지가 내적 주관의 관여 사항인지 엄밀하게 경계를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을 외적 실재라고 부르든, 내적 관념이라고 부르든 그것은 이차적인 문제이고, 지금 여기에 모종의 소여가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근본적인 토대가 '물질이다' 혹은 '정신이다' 혹은 '정신과 물질의 상호작용이다' 등은 하나의 해석이거나 학설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또는 그것들은 인습에 근거한 선입견이거나 단순한 언어적 명명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해석하거나 말하거나 명명하기 이전에 모종의 소여가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하이데거가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면서, 존재의 은폐성과 개방성의 수수께끼를 말할 때, 그는 이러한 언어적 지평, 해석적 지평, 즉 대상적, 개념적, 인식적 지평, 소위 존재자적 지평에 단순히 온전하게 포섭될 수 없는, 그렇다고 이러한 개체론적 지평으로부터 완전히 초월적이지도 않은 모종의 원초적 소여를 확인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러한 차원을 사실 '존재'라고 명명하는 것 자체가 이미 존재자적 이해 방식이다. 달리 말하면, 이러한 원초적 소여에 대해 '존재'라는 명칭은 아직 부적절할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 원초적 소여에 대한 가장 적합한 말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이데거는 '존재의 최초의 말'을 '유지'(to khre n)라고 말했다는 것을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 그런데 데리다의 비판에 따르면, 이미 앞에서 분석했듯이, 하이데거의 존재 우위론적 사고 방식은 실재론의 또 다른 한 모습일 뿐이다. '존재한다', '있다', '실재' 등은 이미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언어이다. 이렇게 하여 데리다는 '존재' 또는 '실재'를 특권화하는 모든 형이상학들을 해체하지만, 언어에 앞선 존재 또는 실재성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존재'의 의미를 보다 더 제한하면서, 이러한 언어 중심적 사유에 대항한다. 이 제한되고 보다 세련된 존재 중심주의의 열쇠가 바로 '현전' 혹은 '현전성'이다.
물질 실체와 정신 실체라는 대립적인 두 개념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러한 두 개념을 환원시키는 것으로 간주된 흄의 지각, 칸트의 경험, 후설의 현상 등도 하이데거의 명상을 존중하여 이미 존재에서 파생된 존재자적 언표들이라 하자. 이런 의미에서, 즉 환원의 최후의 지평으로서의 이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저 있음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 존재는 어떤 방식으로도 존재자적 지평으로부터 초월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하이데거는 강조한다. 말하자면, 존재의 이 지평은 우리 모두에게 가장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존재자적으로 타락시켜서 이해할 뿐이지, 우리가 도처에서 만나는 것이 바로 존재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존재에 가장 가까운 것은 '있었던 것' '지나간 것', 즉 '과거'도 아니요, '앞으로 있을 것', '도래할 것', 즉 '미래'도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존재'의 가장 생생한 모습은 '지금', '여기', 간단히 말해서 '현재'이다. 이를 '현전', 또는 '현전성'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나 미래는 환상이라 할지라도, 지금 여기에 있는 현장만큼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일련의 저항, 유지이다. 이를 일반적으로 존재라고 명명한다. 자연주의자나 유물론자가 '현전'을 세계의 가장 생생한 모습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유심론자나 정신주의자들은 자기편에서 또한 '현전'을 의식의 실재성의 최고의 양상으로, 아니 의식의 본질 자체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며, 심신상호작용론자는 '현전'을 정신과 외적 세계의 가장 적나라한 통일로 간주할 것이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어거스틴에 따르면, 과거란 기억의 현재이고, 미래는 기대의 현재이며, 우리가 통상 말하는 현재는 지금 여기서의 직관의 생생성, 즉 직관의 현재인고로, 오직 세 종류의 현재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시간적 지속, 역사, 세계 등은 하나의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순간 통일 또는 아르키메데스적인 일점으로서의 의식이 지금 여기서 기억하고, 반성하고, 구성하고, 기대하는 운동, 즉 의식의 자기 확장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흄의 지각이나 칸트의 경험도 현전성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듯이, 헤겔의 변증법의 출발의 토대가 또한 '현전'이다. 후설의 현상학도 그의 현상학적 환원에 의한 철저한 배제작업 후 더 이상 배제할 수 없는 현상학적 소여로 '현전'을 고려했다. 하이데거도 시간 문제의 본질을 사유할 때, 출발은 미래에서 했지만, 도달점은 '현전'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현전'은 언어적 지평에 선행함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시론적 의미론이 함축하듯이, 언어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 있는 대상의 지시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따라서 현전은 존재의 가장 세련된 양태이며, 의식의 존재방식 자체이며, 시간의 본질이다. 이제 우리는 왜 현전성의 문제가 데리다의 해체가 정복해야 할 최후의 보루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방금 위에서 언급했듯이, 헤겔은 자기의 철학의 출발을 현전에서 찾았고, 후설은 현전을 자기의 현상학적 환원의 소여로 간주했지만, 양자 모두 그들의 분석을 심오화하면서, 가장 단순하고 가장 직접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현전성 그 자체가 자기 통일체 내지는 자기 동일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을 실토한다. 그렇게 하여 이 두 사람의 이러한 분석 자체를 데리다는 자기의 현전 해체의 한 전략으로 이용한다. 데리다 자신이 직접 분석하는 헤겔의 현전성에 대한 언급을 먼저 살펴보자 :
"이러한 단순성 안에 있는 무한성은 자기 동일성에 대립된 계기로서 부정적인 것이다. 무한성은 자기 자신에게는 그리고 자기 자신 안에서는 전체성을 드러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이러한 계기들 안에서의 무한성은 일반적으로 전체성을 배제하는 단순한 하나의 관점이요 하나의 한계일 뿐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이러한 부정행동을 통해서, 그는 타자와 직접적으로 관계하며, 그렇게 하여 그는 자기 자신까지 부정한다. 현재의 한계 또는 계기, 시간의 절대적인 여기, 또는 지금 등은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단순성이다. 즉, 이러한 계기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일체의 다양성들을 절대적으로 배제한다. 바로 그렇게 하여 그 자신 절대적으로 규정된다. 즉, 그는 즉자적으로 펼쳐져 있는 전체성 또는 양자가 아니라, 단적으로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 즉 자기 바깥에 있고 또한 자기 자신에 낯선 타자에게 연결되는 일종의 잡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원에서의 지금 또는 여기라는 계기는 순수 단순성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관계이다."
위 인용문은 다음과 같은 것을 함축할 것이다. 바로 우리 앞에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는 아무리 단순한 것도, 즉자적으로든 대자적으로든 단순성 그 자체로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순히 현재하는 것 자체가 현재하는 것으로 주어지기 위해서는 자기와 전혀 다른 타자에의 의존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즉 아무리 순간적이고 때묻지 않고 순수한 직접적 소여도, 그것에는 이미 자기에 낯선 타자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절대적 현전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대부분의 사유가 현전성에서 출발하지만, 따져보면, 직접적 현전이란 우리의 환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헤겔은 이러한 환상을 구성한 장본인이 문자적 운동, 즉 차연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헤겔은 현전과 부재, 정과 반의 변증법적 운동이라는 차연의 한 차원을 직관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정신이라는 존재를 상정함으로 해서 결국 존재 향수병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다고 데리다는 비판한다.
데리다가 현전성 해체를 위해 활용하는 두 번째 논거는 후설의 시간성 분석이다. 잘 알고 있듯이,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단순한 '지금 여기'로 일반적으로 간주되는 현재를 후설은, 그의 소리 현상의 분석을 통하여, 파지(r tention)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소리는 아무리 짧은 소리라도 일련의 길이적 연장을 갖듯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소리의 현재성을 하나의 독립된 통일체로 간주할 수 없다. 즉 지금 여기서의 소리는 방금 전에 막 지나간 소리의 지속(파지)과 곧 뒤따라 이어지는 소리(예지)와 연계해서만 인식할 수 있다. 즉 현재는 현재가 아닌 타자와의 필연적인 관계 하에서만 출현한다. 후설의 인식론을 좀 더 심오하게 분석하자면,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은 사실 서로 구별되는 세 단계의 질서적 위계, 즉 개념적 대상들의 질서, 시간적 질서, 순수 구성적 질서를 상정한다. 개념적 대상들의 질서는 문자 그대로 언어적 구별에 대부분 근거한 질서이다. 이 차원에서부터 이미 주객 이원론적 대립은 환원되고, 개념들 상호간의 대립이 중요한 문제이다. 이 질서보다 하위의 질서가 시간적 질서이다. 따라서 시간적 질서란 기능, 형태, 구조 등에 의해 개념화되기 이전의 순수 대상 지속성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책상이란 일종의 기능적 관점에서 구조화된 개념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인 한에서 세상에 동일한 책상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개념으로서의 책상이 오직 추상적 개념성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개념의 의미는 외적 대상에 어느 정도 의존한다. 이렇게 하여, 후설은 동일성의 원리가 오직 언어적 논리의 단계에서만 문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언어적 논리 단계에 선행하는 순수 지속으로서의 대상 단계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즉 논리적 동일성은 사실 시간적 동일성의 원리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로서의 현재는 막 지나간 과거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관계하여 볼 때, 현재는 과거나 미래에 타자이며, 변화이며, 비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의 현재성의 분석은 또 다른 한 차원을 말해준다. 즉 아무리 독립적이고 짧은 현재적 순간이라도 그것의 과거나 미래에 의해 침투 받지 않는 현재성은 없다는 것은 시간의 변화성과 동시에 시간의 동일성, 순수 지속성을 함축한다.
종합하면, 후설의 현상 개념도,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도 결국 '현전성'의 형이상학에 근거한다. 그러나, 형이상학들 자체가 현전성의 이율배반성을 말하고 있다. 즉 '현전'은 '부재'라는 개념과 대립되는 한에서만 유의미한 일종의 형이상학적 용어이다. 그런데, 존재론적 개념로서의 '현전', 즉 '여기 있음'은 다시 시간의 한 표현인 '현재'(present), 즉 '지금' 개념에로 환원된다. 시간 그 자체 실재적이면서 비실재적이고, 영원하면서 사라져 없어져 버리는 이율배반성을 갖고 있듯이, 시간의 한 계기인 '지금'은 다시 '파지'와 '예지', 즉 지금 아닌 '타자'와의 필연적인 연관을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의 '지금'은 기하학적 선분의 한 이상적 한계 개념인 '점'이다. 결국 '현전성'은 '시간성'에 환원되고, 시간성은 다시 '공간성'에 환원된다.
데리다의 비판은 이러하다. 후설의 현재성 분석은 절대적인 자기 동일성의 불가능성, 즉 일자와 타자의 상호 의존성을 해명해 준다는 차원에서 일단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후설은 이러한 의존성을 언어 게임, 특히 문자들의 거물망으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즉 후설은 언어적 질서보다 더 근원적인 질서로 시간적 질서를 상정하고, 다시 이 시간적 질서보다도 더 근원적인 순수 구성의 질서를 상정한다. 즉 후설에게 있어서는 개념적 대상의 질서가 의식의 '초월적 지향성'(intentionnalit transcentante)에 의한 구성의 결과이듯이, 시간적 대상의 질서도 의식에 의해 구성된 질서이다. 시간적 대상을 구성하는 의식의 지향을 후설은 '연장적 지향성'(intentionnalit longitudinale)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두 질서는 순수 구성자의 질서로 다시 환원된다. 순수 구성자는 의식 자체이다. 즉 후설에게서도 의식은 데까르트와 마찬가지로 제 1 원리이다. 단지 실체론적 자아를 해체할 뿐, 즉 대상적 사물적 실체로서의 자아 관념을 비판할 뿐, 모종의 선험적 자아가 일체의 원리이다. 그러나 데리다의 눈에는 개념적 질서, 시간적 질서, 순수 선험적 의식 등도 이미 언어적 유희, 즉 차연의 운동의 결과일 뿐이다. 말하자면, 문자적 구분일 뿐이다. 세계와 의식의 통일 지평으로서의 현재성의 차원이 선행하고, 언어적 개념화는 그 다음의 문제라는 이러한 사고는 사실 주객 이원론의 한 변형일 뿐이다. 일원론도 문제는 마찬가지이다. 유물론이든 유심론이든 결국 '실재', '존재', '현재' 등의 개념으로 환원된다. 그런데,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은 '어제 있었다'나 '내일 있을 것이다'와 인식론적 관점에서 별 차이가 없다. 이들의 가치는 다 같이, '존재한다'는 기호에 의존하는데, '존재한다'는 다시 '부재한다'는 가치에 대립하는 한에서만 의미를 지탱한다. 결국 간단히 말하면, 현전성의 가치 그 자체 문제의 언어의 전체적 체계성(자의성과 대립성의 원리)에 의존한다.


6. 해체의 허와 실

우리는 지금까지 적극적인 비판을 삼가면서, 근현대 관념사 안에서 데리다의 해체주의가 차지하는 지위를 가능한 한 데리다 자신의 입장에 서서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비판적 결론을 구성할 이 마지막 장에서는 논자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고자 한다.
데리다의 해체주의에 대해 논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첫 번째 사항은,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그의 해체주의는 방법론만 다를 뿐, 전통적 형이상학들에 대해 선행하는 다양한 비판적 정신을 답습한다는 차원에서,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전통적 형이상학에 대한 다양한 비판들은 정신의 새로운 종합 내지는 적어도 변형이라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지만, 이러한 비판의 극단화는 새로운 형이상학의 건설이라는 점에서 자기 한계를 동시에 지참할 것이다. 그리고 세계나 주관의 무효화 내지는 비실재성 논증이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가치나 의미를 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데리다의 해체주의 두 번째 문제는 그 자체 일종의 형이상학적 환원주의라는 것이다. 혹은 이를 문자 환원주의라 부를 수도 있겠다. 이는 과학적 환원주의에 대비하여 논자 자신이 착안한 관념이다. 과학에서 통용되고 있는 환원은 어떤 제한된 영역 내에서의 문제를 하나의 중심 관념에로의 환원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내지는 철학적 환원은 극단적인 전체성의 환원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환원은 개인적 차원의 신념을 위한 논거일 수는 있어도, 엄밀한 학문적 객관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칸트의 이율배반론이 잘 말해주고 있다. 극단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가 서 있는 이 대지의 항구성은 그 어떤 차원들보다도 직접적이고 밀접하기 때문에, 또한 모든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에, 정신 실체주의, 유심론, 유아론, 주체성, 의식 등의 차원은 나무가 흔들릴 때, 소리가 나듯이, 자연의 한 부산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데까르트의 방법적 회의가 잘 보여주듯이, 일체의 존재성을 다 회의할 수 있지만, 사유하는 나의 존재성은 더 이상 회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세계나 외적 대상이 의미를 갖기 전에 먼저 나의 실존성이 일차적으로 확보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러한 두 입장을 적절하게 조정하여, 세계와 정신의 이원론을 또한 정당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세계와 내적 주관을 복합관념으로 간주하면서, 일차적 소여를, 버클리처럼, '지각'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객 이원론을 해체하면서, 통일적 전체성의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노력은 헤겔에 있어서는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운동으로 환원되며, 후설에서는 의식의 지향성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연장으로서의 사물, 사유로서의 정신, 지각, 물자체, 변증법적 운동, 선험적 자아, 지향성 등 이러한 모든 것은 존재자의 지평에서 결정된 부분적이고 불충분한 인식들이다. 이러한 존재자적 지평을 넘어 있는 그러나 완전 단절이라는 의미에서 초월적이지는 않는 존재라는 차원을 상정한다. 다시 니체에 오면, 모든 것은 신념의 문제이다. 데까르트는 물체와 정신은 본질적 실질적 구분이고 다른 모든 것은 상대적 양태적 구분이라고 믿었고, 헤겔은 감성적 직접태는 필연적으로 순수 직접태로 변증법적 진행을 한다고 믿었으며, 후설은 현존성의 우월에 대한 맹신이 있었고,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의 구분을 믿었으며, 라캉은 무의식이 의식을 구성하는 지반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 데리다에 있어서는 니체의 신념에 해당하는 모든 것이 '글자', 즉 '문자'가 만들어 낸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니체처럼 "신념"의 가능성을 말하면, 그러한 믿음은 분명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사실 데카르트의 Cogito 속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서 데리다는 '의미'의 생성이 의존하는 것은 '실재성'에도 '소리'에도, '이성'에도, '신념'에도 아니라, '글자'라고 말한다. 단지 그것뿐이다. 단지 그러한 '글'을 쓸 뿐이다. 즉 그는 더 이상 '신을 죽이다', '인간을 죽이다', '의미를 죽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글이 글을 쓴다는 것만을 글로 쓸 뿐이다. 이러한 지평에서는 '물자체' '이성', '신념', 'Cogito', '존재', '존재자', '차이', '본질' 등은 단지 끊임없이 펼쳐지는 인쇄소의 수많은 글자들 중의 각각의 글자들일 뿐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자적 차이들을 전개시키는 모종의 운동이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차연) 그 자체도 문자로 표상되자마자 이미 불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형이상학적 환원들은 문자 그대로 형이상학적이다. 그렇다고 과학적 인식은 절대적으로 객관적이고 확정적인 인식이라는 차원에서 비형이상학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문자 환원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을 데리다의 환원을 사실 무조건 반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미 있는 대분분의 인식들이 외적 실재성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차원에서 소박한 실재론을 생각할 수 있었고, 또한 어떠한 인식도 주관의 인식이 아닌 인식은 없다는 차원에서 유심론 내지는 유아론이 등장했듯이, 사실 어떠한 인식도 글자에 의존하지 않는 인식은 없기 때문에, 문자 환원주의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형이상학적 환원들의 수다성 내지는 양립 가능성 그 자체가 오직 문자 환원주의만을 고집하는 데리다의 입장을 더 이상 정당화할 수 없게 할 것이다. 데리다의 체계 자체는 나름대로 정합성을 갖는다. 그러나 곧 아래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글자 이전에 사유가 있다는 것을 오늘날 발생학적 인식론은 다양하게 논증한다.
데리다 해체주의의 세 번째 문제는 인과성 적용의 딜레마라 명명할 수 있을 일련의 자기 모순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모든 반형이상학들의 공통된 특성이다. 잘 알고 있듯이, 칸트는 인과성 원리는 오직 경험의 한계 내에서만 적용할 수 있는 원리이기 때문에, 이를 경험적 차원을 너머 적용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칸트 그 자신도 이러한 제한을 어기고, 경험 그 자체의 가능성의 토대, 즉 원인으로 한 편에서는 물자체와 다른 한 편으로는 감성의 선천적 직관형식인 시공간과 오성의 12범주들을 상정했다. 다른 한 편으로 주객 이분법을 자연주의적 신념으로 철저히 배격한 후설의 현상학도 급기야 노에마와 노에시스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구성하고 만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자기의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를 칸트의 물자체와 경험의 관계에 비교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겠지만, 칸트에게서나 하이데거에게서, 두 지평 사이의 관계를 인과론적으로 이해하지 않는 한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데리다 그 자신 자기의 차연과 기호적 차이들 사이의 관계에 어떠한 종류의 인과적 구조를 적용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말하자면, 차연을 문자적 차이들을 구성하는 근원적 원인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이미 언어적 체계성, 데리다의 용어로 말하면, 말의 윤리에 강요당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데리다 자신은 자신의 글을 논리적으로 분석적으로 인과적으로 이해할 것을 끊임없이 금지시키고 있다. 그러나 논자는 논리적으로 분석적으로 그리고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이미 학문이기를 포기하는 처사라고 생각한다. 설사 시정적 직관이 문제시 될 경우라도 문제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데리다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분명하다. 문자적 차이들을 전개시키는 모종의 전체성의 운동(차연)이 있지만, 이 운동 자체는 문자에 의해서는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처지는 문자에 의존한 말을 수행할 뿐이며, 따라서 우리의 모든 노력은 시지프스의 노력일 뿐이다. 결국 분석적 연역과 인과적 추론을 자기의 전개의 원리로 삼은 논의 그 자체가 자기의 전개의 원리 그 자체를 해체하는 역설에 봉착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설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이는 모종의 합리성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없는가?
네 번째로, 우리는 데리다의 문자 환원주의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비판의 논거를 발생학적 인식론이 해명하는 인식적 구조의 위계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데리다는 우리의 모든 사유적, 이해적 차별화가 오직 언어, 특히 문자에 의존해서만 가능한 양 주장한다. 그러나 삐아제의 발생학적 인식론에 따르면, 이러한 언어적 문자적 이해인 형식적 상징적 이해 단계, 소위 형식적 조작기의 사유(formal op rations) 이전에 구조적으로 구분되는 몇 계의 하위 단계들, 즉 구체적 조작기의 사유(concr te op rations), 전조작기의 사유(pr op rational thought), 감각-운동적 사유 등이 분명히 있다. 달리 말하면, 유아가 자신의 최초의 신체적 운동과 외적 현상들의 단순한 수동적 지각에 의거한 차이들과 그 뒤의 아동기의 다양한 놀이와 구체적 조작들을 통한 사유로서의 차이들과 언어를 습득한 뒤, 특히 수학적 기호들의 형식적 조작을 이해하고 난 뒤의 사유적 차이들 사이에는 분명 구조적 위계가 있다. 말하자면, 사유가 오직 언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행동적 차원과 다시 이에 선행하는 지각적 차원이라는 선행하는 차원들이 있다. 사실은 이러한 선행하는 지평들 때문에, 언어적 상징적 이해가 의미를 갖게 된다. 즉 언어의 의미는 오직 언어 그 자체의 전체성의 체계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선행하는 다양한 경험들에 의존한다. 물론 감각 운동적 인식이나 구체적 조작적 인식에 비교하면, 언어적 상징적 인식은 보다 풍부하고 보다 복잡하고 무한한 개방성을 함축할 것이다.
다섯 번째로 오늘날 일반 체계론은 발생학적 인식론이 암시했던 인식 혹은 대상의 이러한 복잡성을 보다 선명하게 보여준다. 즉 일반 체계론에 따르면, 인식 혹은 대상은 기능(행동), 구조(형태), 목적(의도), 환경, 진화라는 다섯 차원의 종합으로 간주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모종의 대상을 제대로 인식하려면, 다른 대상과 구별되는 문제의 대상에 고유하거나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구조적 내지는 형태론적 차이를 말해야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분필과 칠판을 구별한다면, 이러한 구별은 단순한 언어적 구별이기 이전에 구조적, 형태적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필과 칠판의 구분의 의미가 오직 이러한 구조적 형태의 차이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한 차원은 기능적 차원이다. 소위 분필과 칠판의 구분의 의미는 그들에 고유한 기능 내지는 용도이다. 마찬가지로, 콤퓨터나 소프트웨어 등의 개념은 몇 백년 전의 사회 환경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혹은 백곰의 흰 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백설로 뒤덮인 북극의 환경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또한 순수 물리화학적 단계이든 유기체적 단계이든 오늘날 대부분의 학적 인식대상들은 인과성 원리에 종속되듯이 그들의 시간적 변형, 즉 진화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심리학적 단계 및 언어적 논리적 단계의 모든 구조들의 이해는 문제의 화자의 의도 내지는 목적을 놓치면, 문제의 구조 내지는 대화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듯이, 우리의 이해는 단순한 문자적 의미, 즉 단순한 사전 상의 의미를 넘어선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간파했듯이, 이미 생명체의 모든 기관들의 활동에서부터 목적성의 차원을 개입시키지 않고는 제대로 문제의 기능들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이해하고 사유하는 차이들이, 데리다가 주장하듯이, 오직 언어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이전의 다양한 차원들에 동시에 의존한다.
마지막으로, 데리다의 문자 환원주의의 문제점은 그의 잘못 정립된 철학 이념에서 비롯된다고 논자는 감히 말한다. 사실 데리다는 일체의 형이상학의 허구성을 폭로하지만, 그는 자신의 차연 개념이 이 시대의 가장 환원 불가능한 차원을 손대고 있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그는, 오늘날 철학의 최대 쟁점을 차이들의 발생문제로 간주하면서, 자신의 차연 개념이 바로 이러한 차이들의 발생의 그 신비를 최초로 문제삼기라도 하듯이 말한다. 이 때, 그는 철학함과 전체성의 직관을 거의 동의어로 간주하는 것 같다. 사실 그 자신은 전체성의 직관을 목표로 하는 모든 철학 이념을 부정하는 장본인이지만, 그 자신도 이러한 철학 이념을 실천하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그는 아직도 철학을 다양한 가치들의 합리적 종합으로 간주하는 발생학적 인식론의 철학 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듯하다. 이런 점에서 논자는 데리다는 자기가 부정한 형이상학자들의 부류에 자기 자신이 여전히 속한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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