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유혹 : 라캉 언어모델과 기표의 좌절
라캉의 유혹 : 라캉 언어모델과 기표의 좌절
-이 동연(중앙대)
1.
라캉의 복잡하고 때로는 독해 불가능하기까지 한(unreadable) 이론은 사실 그 목적에 있어서는 프로이트의 무의식론과 구조주의 언어학의 만남이란 분명한 기획을 가지고 있다. 물론 라캉의 마술을 통해 프로이트의 무의식론은 좀 더 철저한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한정되고, 구조주의 언어학은 기표/기의의 이항관계에서 기표의 미끄러짐(sliding)의 의미작용 관계(기표의 욕망의 연쇄)로 변형되지만, 기본적으로 라캉의 이론은 좀더 분석적인 무의식론이고, 좀 더 정교한 구조주의 언어론이다. 라캉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서를 냈던 아니카 르메르도 라캉의 독창성에 대해 프로이드 무의식 이론을 최근의 양식으로 새롭게 규정했다는 점, 최근의 구조주의적 방법에 따라 프로이드의 무의식론을 분석하고 그 이론에 언어학을 도입한 점을 들고 있다. "프로이드에게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라캉의 이단적인 선언(라캉은 전통정신분석학계로부터 파문당한 자이다)은 온전히 프로이트의 모든 것을 닮자는 것도 아니고, 오직 정신분석학으로의 집중을 말하려 한 것도 아니다. 역설적으로 라캉의 선언은 전통적인 정신분석학의 방법론의 거부이자. 프로이트 초기이론인 무의식 이론의 집중적인 분석에 의한 정신분석학의 변용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라캉의 새로운 정신분석학은 "프로이드에게 언어학을 선물하는 것"이나 "정신분석학의 통합학문 내지 통합담론적인 전략이 프로이트 담론의 진정한 성격이고 방법이었다는 주장"을 그 이면에 내포하고 있다.
라캉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가장 귀중하게 발견한 것은 바로 '무의식의 영역'이다. 프로이트는 "과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존재와 대상과의 관계를 무의식의 발견을 통하여 과학의 영역으로 끌여들였다" 라캉이 관심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언어의 구조로 설명하려는 데 있다. 그의 유명한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명제는 무의식의 존재 방식이 언어의 존재 방식과 같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의 구조화'와 '언어의 구조화'의 관계는 그냥 비유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있어 결정하는 관계라는 점이다(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명제는 언어는 무의식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역명제를 가능케 한다). 라캉의 문제의식은 무의식의 구조를 언어의 구조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손쉽게 이해시키려는 데(마치 예수가 천국을 모르는 자들에게 천국을 비유를 통해 쉽게 설명하는 것)에 있기 보다는 무의식의 구조를 언어의 구조와 동일시하려는 데에 있다. 언어의 구조는 무의식의 구조에 있어 비유의 대상이 아니라 실체 그 자체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극단적으로 말해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이며, 언어는 무의식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라캉은 무의식론과 언어론을 거의 동일시함으로써 무의식을 담지하고 있는 주체의 본성이나, 무의식에 의해 생기는 주체에 대한 타자의 존재를 역시 언어모델로 설명하고 있다.
물론 라캉의 언어모델은 현대의 언어론 일반 모델(요컨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그대로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체적인 해석에 의거한 것이며, 자신이 언어론을 통해 설명하려고 했던 프로이트의 무의식론에 오히려 크게 의존하는 모델이다. 라캉의 주체이론(타자론을 포함해서)과 욕망이론은 그런 점에서 언어의 상징 질서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 요컨대 코워드와 엘리스의 지적대로 라캉에게 있어서 무의식은 주체가 상징적 세계로 들어가는 동일한 운동하에서 생산되며, 의미작용의 과정은 주체의 과정 그 자체가 된다. 이는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의 혁명성, 즉 표상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운동적 에너지를 언어적 상징질서로 구속하려는 면이 있다. 라캉의 언어모델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은 말년에 이데올로기론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알튀세르의 후기 글과 발리바르의 '프로이트 맑스주의'의 논의, 그리고 들뢰즈의 '안티외디푸스론'에서 이루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우선 {에크리}에 실린 그의 대표적인 두 논문인 [주체기능 형성모형으로서의 거울단계](The mirror stage as formative of the function of the I as revealed in psychoanalytic experience, 이하 "거울단계")와 [무의식에서 문자가 갖는 지위, 또는 프로이드 이후의 이성](The agency of the letter in the unconsciousness or reason since Freud, 이하 "문자가 갖는 지위")의 내용을 살펴보겠다.
2.
라캉은 "거울단계"에서 주체의 형성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라캉은 생 주체 형성에 대해 항상 과정 중에 있는 것이며, 거울단계에서 어린아이가 주체로서 자기를 인지하는 것이 거울 속에 있는 자기를 타자로 인정하면서 이루어지듯이 늘 "허구적인 이미지"에 사로잡힌 채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이들이 도구를 사용하는 지적 능력에 있어 침팬치보다 못한 나이일 때에도 아이는 이미 거울 속에 자신의 이미지를 인식할 수 있다. 침팬치는 거울 속의 이미지가 허상임을 알게되면 더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아이들은 일단 이미지를 습득하면 그 이미지가 사라진 후에도 일련의 행동들 속에서 인식행위가 가져오는 즉각적인 반향들을 보여준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서 자신의 이미지 속에 가정되었던 행동들과 그 행동을 반영하는 주변상황이 갖는 관계를, 다시 말해 가상적인 복합물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현실(자신의 신체와, 주위의 사람들이나 사물들과 같은) 간의 연관성을 경험하는 것이다(231쪽).
라캉은 거울단계를 완전한 의미의 동일화(그것은 주체가 어떤 이미지를 가정했을 때, 그에게 일어나는 변형을 의미한다)로 이해 할 수 있으며, 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가정하고 뛸듯이 기뻐한다는 사실은 주체가 이미 처음부터 상징계 속에 빠져있음을 잘 보여주는 듯하다고 말한다. 허상 속에서 주체가 자신의 성숙함을 기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신체의 통일적 형태(Gestalt)이다. 통일적 형태는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가는 외면적 형태이다. 거울 속에서 드러나는 통일적 형태는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아이(주체)의 혼란스런 동작과는 대조적으로 고정된 이미지로 그리고 전도된 대쳉의 형태로 아이(주체)에게 다가온다. 외재성 고정된 영상(imago)을 특징으로 하는 통일적 형태는 정신적 측면에서 거울단계의 "나"가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이 소외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예시해준다. 통일적 형태는 계속 거울 단계인 나를 인간이 그 속에 스스로를 투사한 고정된 상이나 인간을 지배하는 환상들과 결합시키려 한다. 라캉은 영상들이 어떤 것과 관련이 있든지 간에 육체의 영상이 환상이나 꿈 속에서 거울이란 장치의 특성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면 영상들에게 있어 거울 이미지는 가시적인 세계로 들어서는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232쪽).
거울단계에서 나타나는 공간적인 이미지가 유기적으로 완전하지 못하고 아직 인간적인 현실을 구현하지 못하는 주체에게 사회적인 변증법 이전의 단계에도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라캉은 거울 단계가 갖는 기능을, 영상이 갖는 특별한 기능 중의 하나, 즉 유기체와 유기체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 간의 어떤 관계, 다시 말하면 정신세계와 주위세계 사이의 어떤 관계를 수립하는 것으로 본다. 거울단계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에 매혹되어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주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고, 파편화된 육체의 이미지들로부터 통합적 형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있는 일련의 환상들과 관련을 갖는다. 또한 이러한 일련의 환상들은 자기 동일성을 가정하는 자기방어적인 갑주의 형태를 띠고, 주체를 소외시키는 역할을 한다. 파편화된 신체는 개별 주체 속에서 공격성을 띠고 분열된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항상 꿈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223-4쪽).
거울단계에서의 파편화된 신체가 일으키는 '정신분열증' '히스테리증상'과 같은 환상의 구조는 '이드'를 상정함으로써 주체의 반사회적 성향이 야기시키는 데, 라캉은 그것을 억제되는 하나의 과정을 상징계의 과정으로 보는 것 같다. 상징적 환원은 거울단계에서 일어나는 발생학적 질서인 자아의 자기방어 속에서 확립된다. 거울단계가 끝나는 바로 그 순간에 거울 속의 나를 사회적 상황과 연결시키는 변증법이 시작된다. 바로 이 순간에 인간의 모든 지식은 타자의 욕망을 통해 결정적으로 병합되며, 타자와의 협력에 의한 추상적인 등가물 속에서 자신의 대상을 구하게 된다. 거울 단계가 끝나는 순간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성장해 나간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아니라 바로 이러한 정상적인 성장이 문화적 중재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성적 대상의 경우 외디푸스 컴플렉스가 이 사실을 예증해 준다(235쪽).
라캉은 실존주의 철학이 존재론적인 부정성을 자기충족성의 한계 내에서만 이해하려했다고 말하고 그러한 의식의 자기충족성은 자아형성시 필연적으로 개입되게 되는 오인으로부터 생겨난 환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오히려 오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 부터 출발해야 한다. 라캉의 이러한 지적은 주체를 어떤 실체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으로 정의하기보다는 "가상적인 이미지에 사로잡힌 주체"로 정의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3.
"문자의 지위"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첫째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문자의 의미를 밝히려는 것이고, 두번째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응축(condensation)과 대체(displacement)과정을 언어의 은유와 환유과정과 연관시켜 무의식에서의 문자의 기능을 보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무의식과 문자의 속성을 통해 주체 형성과정을 가늠해보려고 한다.
1)문자가 갖는 의미
라캉은 먼저 언어는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의미작용을 만들어낼 뿐이다라는 진술을 증명하길 원한다. 라캉은 그 진술의 이유를 의미작용의 끝없는 지속과정으로 설명하는데, 그 논의를 극단적으로 밀고나가면 언어(랑그)가 기의의 전 영역을 대신할 수 있다는 명제가 생겨난다. 기의는 기표로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이 때 기표는 필연적으로 기의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모든 욕구들을 충족시킨다. 기표는 기의를 재현하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다라는 환상을 계속 추구하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150쪽). 라캉은 화장실 문 위에 쓰여진 Ladies과 Gentleman이란 기표를 예를 들면서 이들 기표들의 차이가 기의로서의 사회법칙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기표는 비물질적이거나 추상적인 형태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방식으로 기의에 침투한다. 기표들은 의미생성을 위해서 다른 기표 속에 침투하고 또다른 기표를 포섭하기도 하며 상대방에게 서로 의존한다. 궁극적으로 기표들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요소로 환원되고 동시에 완결된 체계를 이루려는 목적으로 서로 결합하기도 하는 이중운동을 수행한다 문자란 통합된 의미를 불가능하게하고 총체적인 의미를 분산시켜버리는 기표들의 구조이다(152쪽).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의미는 어떤 특별한 기표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기표들의 연쇄 속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사실이다. 라캉은 그 이유를 의미화작용을 대신할 만한 어떤 초월적인 기표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으로 들고 있다. 이제 우리는 기의가 끝임없이 기표 아래로 미끄러져갈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된다고 라캉은 강조한다(154쪽).
라캉은 주체와 기표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표들은 모든 주체 속에 자리잡을 때에만 제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주체는 기표와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부차적인 것이기 때문에 주체가 무엇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는 중요하지가 않다. 의미화의 연쇄구조는 주체가 언어를 사용한, 다시말해 주체가 다른 주체와 공유하는 언어체계 속에 있는 한 자신의 말 속에서 주체의 의도와 전혀 다른 것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언어는 주체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 이상이다. 의미작용은 주체의 의도나 진리에 의존하기는 커녕 오히려 언어체계 내에서 주체의 위치를 지정해 주는 역할을 한다(155쪽).
2) 무의식에서의 문자의 기능
프로이트에 따르면 꿈을 가능하게 하는 일반적인 전제조건은 왜곡(distortion)또는 변환(transposition)이다. 소쉬르 식으로 말하면 담론 속에서 항상작용하고 있는 기표 아래로 기의가 미끄려져 내려가는 것이 꿈이다. 무의식이란 기표의 활동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라캉은 기표가 기의에 미치는 두가지 효과를 은유와 환유로 들고 있다. 그 두 효과를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론의 두 측인 응축과 대체와 연결시킨다. 압축은 기표들의 포개짐이다. 대체는 의미작용의 방향전환과 관계가 있다. 방향전환은 환유 속에서 가능해진다. 환유는 프로이트가 말했던 것처럼 무의식이 검열을 피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기도 하다. 환유와 은유에 대해 라캉은 다음과 같이 도식화한다.
f(S...S')S = S(--)s
환유작용은 기표와 기의의 연결구조 속에서 발생하는데, 이 끝임없는 기표의 연결고리 속에서 대상은 스스로를 완전하게 구현하지 못하고 결핍만을 드러낸다. 바로 그 결핍을 메꾸기 위해 의미작용은 대상 대신에 욕망을 등장시킨다. 처음의 연산식에서 기표가 기의로 단순히 환원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저항선(--)은 그대로 남아 의미에 저항하는 저항선이 된다.
f(--)S = S(+)S
하나의 기표가 또 다른 기표를 대체할 때, 창조적이고도 시적인 의미가 만들어 진다. 의미작용을 만들어내는 S'는 환유 속에서는 잠재해 있지만 은유 속에서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 + 라는 기호는 저항선을 뚫고 의미가 생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라캉은 이 지점에서 주체의 기능을 말하려한다. 그는 테카르트적인 주체관(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을 초월적 주체의 의심할 나위없는 투명성으로 보고 그 명제를 무의식에서 문자의 기능(즉 은유와 환유의 과정)을 통해 거꾸로 전복한다(환유축과 마찬가지로 은유축의 의미추구도 주체의 인식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진행된다. 내가 나의 존재의 실현에 모든 주의를 다 기울일 때도, 또한 은유의 과정을 의식하지 못할 때에도 나는 이미 은유의 과정 속에 들어와 있다). 의미를 만들기 위한 은유와 환유의 놀이는 아주 능동적이고도 강렬한 측면을 가지고 있어 횡선아래로 억압되어 의미를 거부하는 기표와 존재의 결핍 사이에서 나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이 놀이는 돌이킬 수 없는 미묘함에서 그만이라고 선언될 때가지 계속된다. 그러나 이 놀이 속에서 나는 내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놀이 속에서 나의 고유한 위치를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 라캉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자유자재로 사고 할 수 있는 곳에서 나는 항상 내가 아니며 의식적으로 사고 할 수 없는 곳에서만 나는 나일 수 있다(166쪽).
무의식적 욕망은 결코 소멸될 수 없다. 결코 만족될 수 없으며 단순히 소멸되지도 않는 욕구가 없다면 욕망도 가능하지 않겠지만, 그러한 상태는 곧 유기체의 파멸을 의미할 뿐이다. 무의식은 기원이나 본능으로 설명할 수 없고 기표의 요소들로 이루어졌다(170).
3) 문자, 존재 그리고 타자
라캉은 프로이크의 발견이 목표로 하고있는 것은 "나는 무의식이 있던 그 자리로 가야만 할 것이다"라는 말로 정의될 수 있다고 말한다. 주체가 자기 내부에 자기가 의식하고 규제하지 못하는 이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면 정신분석학적 통찰이 갖는 질서와 방법 모두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발견했던 진리요 안간의 근본 존재조건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자기 내부에 스스로 지배할 수 없는 이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고려되지 않을 때 정신분석학은 단순히 타협적인 전술에 불과한 것이 되고 프로이트의 작업이 갖는 문자성과 정신적 측면 모두를 부인하게되는 결과를 초래한다(171쪽).
나는 나 자신보다도 이 타자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스스로 자기동일성을 확증하려는 바로 이 순간에도 나를 동요시키는 타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타자는 단순히 나와 다른 또 하나의 주체가 아니다. 타자의 존재는 타자성의 두번째 단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타자는 또다른 주체가 아닌 주체가 환기할 수 없는 이질성으로 이해될 때에야 비로소 나와 다른 주체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무의식이 타자의 담론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개별 주체들을 넘어선 어떤 차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거기서 욕망은 타자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욕망이 된다(172쪽). 욕망은 환유일 뿐이다(175쪽).
4.
라캉은 프르이트의 무의식이 갖는 위력을 분명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그가 비판하려는 주체론의 관념적 견해들, 요컨대 "초월적 주체의 투명성"이니, "통합적 개인성"과 같은 견해들을 비판하는 데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유용한 틀거리를 제공해 준다. 그는 계속해서 그의 무의식 이론이 단순하게 심리학적인 범주에 기초한 기술의 문제로 환원되어서는 안된다고 누차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프로이트 무의식을 전유하려는 라캉의 프로젝트는 제대로 이루어진 것인가?
라캉과 같이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해 주의를 기울였던 알튀세르가 라깡과 프로이트 사이에서 동요한 사실은 라캉의 프로이트 전유의 오류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알 수 있다. 1964년에 쓴 [프로이트와 라캉]이란 글에서 알튀세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라캉을 따라 독해하고 있는데, 그의 논지는 라캉의 상상계/상징계, 은유/환유 장치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소위 중심없는 주체의 위치를 제기한다. 그러나 1976년에 쓴 [맑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라는 글에서는 여전히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주목하면서도 라캉의 논지가 거의 들어가 있지않은데, 그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스피노자식의)육체이론과 결합했다는 데 있다("프로이트의 무의식은 비정신적인 것, 혹은 비정신적인것에 의해 파생되는 어떤 효과와 동일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정신적인 어떤 것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하나의 물질적 실재도 아니고, 하나의 사회적 실체도 아니다......그는 생물학적인 것에 의해 본질 규정되는 모든 무의식적 소망으로부터 충동을 해방시킨다. 즉 충동은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사이의 하나의 경계 개념이다"). 알튀세르는 결론적으로 프로이트 무의식을 언어적 표상체계로 환원하려는 것을 거부했고, 무의식의 육체적 잠재력(혹은 이드의 잠재력)에 대해 주목한 것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표상체계로 설명하면서 그 무의식의 혁명적 잠재력을 그 체계 안에 가두고 말았다.
요컨대 들뢰즈와 가타리가 무의식과 욕망의 문제를 놓고 비판하는 것은 그것들 자체라기 보다는 그것들의 표상체계이다. 이들이 공격하는 것은 기호의 체계, 코드의 체계이고, 욕망을 기호로 억압하려는 표상체계이다(대표적인 정신분석학의 표상체계가 외디푸스론이다). 이들이 욕망의 자생적인 흐름과 탈코드화하는 유목민적인(nomadic) 생활, 기계론적 일원론을 내세우는 것도 모드 주체를 표상체계로 결정하려는 것에 대한 반대이다. "얼마나 라캉주의의 많은 해석들이 구조적 외디푸스화를 환기시켰는가"라고 말하는 이들의 지적은 라캉의 상징 질서의 표상체계를 비판하는 것이다. 라캉이 옳은지, 들뢰즈 옳은지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