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장 자크 루소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말제르브에게 보내는 편지 외』
“진정한 행복의 원천은 나 자신 안에 있다. 행복해지기를 원할 줄 아는 사람은 타인에 의해 비참해지지 않는다”
- 첫 번째 산책: 작품의 전반적인 의미와 구성에 관한 언급. 고독한 명상이야말로 불행한 운명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임을 이야기하고, 이 글의 목적이 전적으로 루소 자신이 마음의 평화를 찾는 데 있음을 말한다.
두 번째 산책: 샤론과 메닐몽탕 사이에 펼쳐지는 가을 풍경 속에서 전개되는 몽상과, 메닐몽탕 언덕에서 질주해 오는 개와 부딪친 사고에 대한 이야기. 현세에서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는 질서를 회복시켜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신뿐이라고 생각하며, 신의 정의에 대한 믿음을 역설한다.
세 번째 산책: “나는 항상 배우면서 늙어간다”는 솔론의 말에서 시작해 도덕과 종교에 대한 명상으로 흘러간다.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희망과 내적 동의의 우월함을 중점적으로 검토한다.
네 번째 산책: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하는 거짓말에 대한 명상.
다섯 번째 산책: 생피에르 섬에서의 행복한 시절에 대한 회상. 몽상의 황홀한 행복과 충일한 실존감을 표현하며, 자연과 일치하는 고독한 삶을 찬양한다.
여섯 번째 산책: 자선에 관한 윤리적 성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선과, 그것에 의무감이 더해져서 변질되어 더이상 순수한 의미의 자선이 되지 못하는 경우를 경험에 비추어 이야기하면서, 타인에 대한 인간 행동의 동기에 의문을 제시한다.
일곱 번째 산책: 식물학에 대한 성찰. 식물채집의 일화를 이야기하며 몽상의 힘과 반성적 사고의 힘을 대비시키고, 자연 속에서의 몽상을 예찬한다.
여덟 번째 산책: 역경과 행복의 상관관계에 관해 고찰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마음의 평정을 찾았는지 이야기한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초연함에 근거한 독자적 삶의 방식에서 느끼는 행복에 대해 토로한다.
아홉 번째 산책: 자기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낸 경위와 이유에 대한 해명과 행복에 관한 명상. 루소에 따르면, 진정한 행복이란 자신의 이해관계와는 무관한 즐거움으로서, 타인과 진심으로 공명할 때 느껴지는 것이다.
열 번째 산책: 바랑 부인과 함께했던 행복과, 과거에 대한 향수를 환기하는 추억 어린 몽상. 루소는 열 번째 산책을 완성하지 못하고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말제르브에게 보내는 편지 외』는 장 자크 루소의 작품을 엮은 책이다. 특히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루소가 죽기 직전의 남긴 미완성된 자전적 작품이다. 고독을 즐기고 전원 생활을 즐겼던 저자의 모습과 평온함 속에서도 삶의 억울함을 탄식했던 저자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루소가 죽기 직전까지 집필했던 미완성 유고작으로,《고백》,《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와 함께 자전적 3부작으로 불린다. 세간의 오해에 맞서 자신을 해명하고자 지난 생애를 회상조로 이야기한《고백》, 여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것에 분개해 스스로를 심판대에 세운《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세상에 내놓은 후, 삶의 종착점에 이르러서야 루소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유로운 마음으로《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집필했다. “자연은 인간을 행복하고 선하게 만들었지만 사회가 인간을 타락시키고 비참하게 만든다”는 자기 사상의 대원칙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그는 세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은거했고, 그곳에서 온전히 자기 자신과 대면해 그 결과물로《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남겼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루소의 저서 중에서도 독특한 작품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어떤 논리 체계에 따른 것이 아닌, 그야말로 펜 가는 대로 쓴 글이다. 루소가 이 작품을 쓴 것은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다. 완성된 원고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초안의 다음 같은 문장들은 작품의 집필 의도를 잘 드러내준다. “아무리 기이하고 역설적인 것이라도 나는 아주 고지식하게 내 감정과 의견을 말한다. 그리고 논증도 증명도 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설득하고자 애쓰지 않고, 오직 나 자신을 위해서 글을 쓰기 때문이다.”
총 열 번의 산책으로 구성되어 있는《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는 메닐몽탕 언덕에서 개와 부딪치는 바람에 크게 다친 에피소드라든가, 생피에르 섬에서 은거해 있던 시절에 즐긴 식물채집 이야기 같은 말년의 에피소드들과 파리 시절의 소박한 추억들에 관한 회상 등등이 잔잔하게 서술되어 있어 루소의 인간적인 면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작품은 자기 자신에게 혼잣말을 하는 독백 형식을 취하고 있는 까닭에 시정이 넘치고, 그 때문에 서정적 자서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환희와 기쁨으로만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운명을 받아들였다고는 하지만 앞부분은 여전히 괴로워하고 억울함이 사무치는 루소의 탄식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그러한 탄식은 산책이 거듭될수록 마음의 평온과 행복의 발견으로 변모한다. 또한《에밀》이라는 파격적인 교육서를 출간해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한 루소가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고아원으로 보내 엄청난 비난을 받은 것에 대해 직접 해명한 부분도 있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이렇게《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는 감정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고, 고독을 즐기고, 전원을 사랑하고 행복을 갈구하는 루소의 맨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요컨대 이 작품은 기쁨과 고뇌가 절반씩 채색되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자화상인 셈이다.
루소는 여론의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 만족하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고결한 삶이라고 여겼고, 그와 같은 자유는 타인에 대한 증오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자애심(自愛心)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자유 의지로부터 정의로운 사회가 실현된다고 믿었다. 그에 따르면, 이 같은 건강한 개인주의는 인간 세상이 아닌 자연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자연을 벗 삼아 숲길을 거닐고 호수의 물결에 몸을 맡긴 채 몽상에 잠겨들었다. 세상의 탄압으로부터 도망쳐, 사람들이 자신을 해치려고 한다는 망상으로부터 살아남고자 처절하게 발버둥친 결과 몽상/명상이라는 방편을 찾은 것이다. 이처럼 자연 속에서의 자유로운 몽상을 그린 까닭에《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는 낭만적 시정이 넘치고, 이를 19세기 낭만주의의 전조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이제 이 세상에 나는 혼자다. 더이상 형제도, 가까운 사람도, 친구도, 사람들과의 교제도 없고, 오직 나 자신뿐이다”라는 처절한 탄식으로 시작되지만, 계속되는 명상을 통해 마침내 “불행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려고 하든 그들은 내 존재를 바꾸지 못할 것이다”라는 자기 긍정에 이른다.
루소가 이 같은 영혼의 평화를 얻은 것은 자포자기에 의해서가 아니다.《고백》과《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통해 ‘영혼의 진보’를 이룬 그는, 운명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 앞에 자유롭게 길이 열려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조차 빛을 향해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은 루소,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부박한 미봉책으로서의 위로가 아닌, 진정으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본 자가 터득한 자기 치유의 해법을 제시해준다. 남들과의 비교에서 비롯되는 치열한 경쟁, 개인의 가치를 온전히 보전해주지 않는 풍토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건강한 개인주의자’ 루소의 노작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함께 실린 ‘자전적 단상과 전기적 자료’는 장 자크 루소의 개인적 삶에 관해 시사해주는 중요한 글들을 선별하여 번역한 것으로, 국내에는 처음으로 소개되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루소가 스물일곱 장의 카드에 메모해놓은《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의 초안을 포함해, 짧고 간략한 글들로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하는≪나의 초상≫, 평생 후원자가 되어준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서적 검열관을 지낸 말제르브에게 보내는 네 통의 편지, 그리고 ‘즐기는 기술’에 대한 단상들과 각기 다른 시기에 작성된 두 통의 유서는 인간 루소를 한층 더 친숙한 모습으로 만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고백》과《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대화》를 통해 시도한 자기 해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루소가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기로 하고 집필에 들어간 글이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자포자기의 마음인 것은 아니었다. 루소는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커다란 오해를 받고 있음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자신의 실체를 자양분으로 삼음으로써 평생의 불행을 보상받고자 했다. 그에게 이것은 삶을 즐기는 기술이기도 했다.
그는《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쓰게 된 의도를 다음의 두 가지로 밝히고 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그 글을 읽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이런 의도는 글의 첫 머리인≪첫 번째 산책≫에서, “나 자신은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 이제부터 내가 탐구해야 할 문제이다”라고 질문한 데서 명백히 드러난다.
앞서의 시도들이 실패로 돌아간 후, 자아 성찰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 앞에 선 것이다. 이런 그의 태도는《고백》과《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때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세상에 자기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참모습을 알기 위해 몽상을 기록으로 남긴 글이다. 인간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박해받는 고독한 인간의 탄식으로 시작된 이 작품은 자기 자신에게로 여행을 떠나는 과정에서 충만함과 기쁨이 깃든 글로 변화한다. 어찌 보면《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자신의 내부에 칩거하며 자족적인 자아 성찰로 스스로를 축소시킨 듯 보이지만, 사실 내적 자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 풍요로운 영역을 개척한 작품이다. 앞선 자전적 작품 두 편과 더불어 이 작품이 정신분석의 효시이자, 18세기 말에 등장한 ‘개인’이라는 이념에 문학적ㆍ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견해가 이를 뒷받침한다.
1776년에서 1778년까지, 사망하기 직전까지 2년여에 걸쳐《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집필하면서 루소가 끊임없이 갈망한 것은 결국 행복, 그 하나였다. 그는 그 행복을 산책 중에 자아와 대화함으로써 되찾았다. 그러나 그가 대화한 자아는 자기 안으로 도사리는 폐쇄적 자아가 아니라 자연의 삼라만상과 결합해 조화를 이루면서 성장하고 도약하는 자아이다. 루소는 이처럼 자연 안에서 자아의 충일감을 느끼고, 자기 외의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은 궁극의 행복에 이르렀다.《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루소 자신에게는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 지복에 가까운 행복을 안겨준 여정이자, 독자들에게는 루소가 고통 중에 길어 올린 빛나는 사유들을 맛볼 수 있는 선물과도 같은 작품이다.
함께 번역 수록된 ‘자전적 단상과 전기적 자료’중 중요하게 꼽을 수 있는 것은 프랑스의 귀족이자 당시 서적 검열관이었던 말제르브에게 보내는 편지 네 통을 묶은≪말제르브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루소가 말제르브에게 이 편지들을 쓴 것은 가까이 지내던 볼테르, 디드로, 달랑베르 등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들과의 우정이 깨지고, 두드토 백작부인과의 사랑도 파탄에 이르고, 설상가상으로 후원자였던 데피네 부인과 사이가 틀어져 은거해 있던 ‘에르미타주’를 돌려주어야 했던 불행의 시기였다. 그러나 사상가로서 루소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으니,
오늘날 그의 최고 저작으로 꼽히는《사회계약론》과《에밀》의 출간을 목전에 둔 시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출판업자 레에게 원고를 넘긴 후에도《에밀》의 원고가 예수회에 넘어갔다는 망상에 빠져 그들이 원고를 훼손할까 전전긍긍했다. 결국 그해 4월과 5월에《시회계약론》과《에밀》이 각각 출간되었고,《에밀》은 불태워지고 판매가 금지되는 등 파란을 겪어야 했다. 그 같은 엄청난 일이 루소를 기다리고 있었던 1762년 1월, 그는 자신의 후원자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말제르브에게 편지 네 통을 보낸다. 말제르브는 귀족이자 고위관리로서 부족함이 없었지만,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멀었고 지식인들의 정치 비판도 최대한 보호하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 루소는 온화하고 관대한 말제르브와 친분을 쌓았고, 어려운 처지에 처하게 되자 그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한편 고백사제처럼 그에게 일상적인 고민까지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말제르브에게 보내는 편지≫는 당시 칩거에 들어간 루소가 말제르브에게 자신이 왜 칩거에 들어갔는지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하고, 고독하게 은거해 있는 작금의 상황이 자신에게 더없이 평온하며 자신이야말로 그렇게 살아가는 데 적합한 인물임을 네 통이 편지에 걸쳐 웅변한다. 이 편지는 사상가 루소는 물론 개인 루소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문헌으로, 루소 연구자들에게 소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작성자 쉑터
장 자크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그가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저서이다. 젊은 시절부터 가난과 억압에서 항상 괴로운 일만 남은 그에게 남은 생에서 편안한 삶이란 바로 자신 안으로의 여행이다. 번역자 후기에서 나오나, 보통 산책을 하면 자신만이 그 길을 걷는 게 아니라, 주변에 많은 사람들을 우연히 만난다. 하지만 루소는 산책을 하면서 자신만을 지칭하며, 그 고독함을 가진 몽상가라고 한다. 처음부터 루소는 마치 자연 속에 고립된 인간처럼 모든 인간으로부터 떨어진 하나의 존재로서 시작한다. 실존주의 철학이 니체와 20세기 철학자로 이어진다고 해도 진정 실존주의적 자세는 루소의 산책에서 느낀 명상으로부터이다. 고독한 자신의 모습에서 루소는 타인과의 소통을 끊은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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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타인과의 소통을 하고 싶지만 할 수가 없었다. 프랑스 모든 사람에게 마치 악령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되어야 했고, 파리에선 온갖 조롱과 비난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목숨조차 위협받고 있어 집안에 있을 때 돌덩이와 자갈이 날라 와 그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온갖 고난과 박해 그리고 그 누구에게 자신의 입장을 받아주지 못함에 따라 루소에게 남은 오로지 자연만이 남았다. 인간은 인간에게 불신과 실망 그리고 두려움을 느낄 때 자연만은 인간에게 새로운 감정을 준다. 야생의 맹수와 오지는 분명 인간에게 두려움과 위기를 안겨준다. 그런다고 인간이 적절하게 자연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면 자연은 인간에게 축복과 안위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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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가 왜 자연으로 돌아가려 했을까? 루소가 말하는 자연은 2가지로 보는 게 좋을 것이다. 하나는 지금 루소가 혼자 산책하는 산과 들의 자연, 그리고 다른 자연은 인간 본연의 마음에 이르는 것이다. 루소가 말하는 자연으로 돌아가란 의미는 야생의 자연보단 인간 본연의 마음이다. 루소는 인간이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을 알아도 본성은 선한 존재로 보았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문명과 제도가 인간을 타락하게 만들었고, 부와 지위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비참한 노예로 예속되도록 만든다. 도덕적 정치적 불평등은 그 사회의 특성에 따라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연 속의 인간이 부족해도 자연은 모든 것을 품는다. 자연 속에 인간은 문명의 인간처럼 욕심이 넘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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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당장 해결해야할 욕구만 충족되면 그는 순한 성품을 유지한다. 그리고 주변에 누군가 괴로워하면 자신도 그것을 보고 마음이 괴로워한다. 순수한 마음 그러니깐 자연적인 감성을 찾은 인간이란 선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에게 선악이란 감정과 도덕적 가치를 느끼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그에게 타인에 대한 연민은 억지로 그가 만든 감정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서 자연스레 나왔기 때문이다. 대가를 바라는 것도 우월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니체가 남을 도와주는 것을 두고 마치 대단한 것처럼 느끼지 말라고 했으나, 루소는 이미 그것을 밝힌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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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의지로서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것이란 정말 어렵다. 인간은 자신의 과거에 한 행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반성이라고 한다. 하지만 루소는 그 반성이 죄질이 나쁜 것으로 여겼다. 반성의 의미가 자신의 과오를 다시 보면서 그 실수에 대한 잘못을 나쁜 쪽으로 혹은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루소에게 진실적인 인간이란 바로 그런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4번째에서 진실성에 대해 그가 정의한 내용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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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는 진실한 사람과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진실한 사람은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즉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진실한 사람은 자신에게 전혀 손해가 되지 않는 모든 진실에는 매우 엄격하고 충실하지만 그 이상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반면, 내가 말하는 진실한 사람은 진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할 때 비로소 아주 충실하게 진실을 섬긴다.(페이지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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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 언제나 항상 진실을 추구하는 게 인간의 진리라고 떠든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그 입장에 놓이면 진실한 인간들은 여기저기 나타난다. 아마 나 역시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지 모르나)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오로지 나의 정당성을 논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 말하는 인간이 많다. 그러나 정작 그 진실을 폭로하여 자신이 가진 것들을 잃거나 혹은 상처받을 수 있다면 과연 진실할 수 있는 인간은 얼마나 될까? 오히려 그런 진실한 자를 우리는 바보처럼 여기고 멸시하며 때로는 잔혹하게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진실한 인간이라고 자처하는 인간들일수록 이런 짓들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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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진실한 사람들은 언제나 진실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실하다고 여기는 자들은 대부분 그 세상 사람들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모두 그 욕망에 이끌려 숨은 마음을 숨긴 채 겉으로 좋은 사람인 것처럼 행동한다. 물론 가면을 쓰지 않은 인간은 현실에서 살아남기 어렵겠지만, 그 가면 너머로 보이는 인간의 추악함에 가끔 이질적인 세계에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루소가 말하는 거짓말은 인간의 세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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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거짓말이 완전히 결백하기란 어렵고, 드문 일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사기이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기만이다. 해를 끼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중상인데, 이것이야말로 거짓말 중에서도 가장 나쁜 거짓말이다.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도 이익도 피해도 주지 않은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허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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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거짓말은 우리에게 이야기 즉 소설이나 영화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거짓말 중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한 거짓말은 곧 남에게 해를 끼치는 거짓말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거짓말이 너무 넘쳐있다. 그런데 이런 거짓말을 하고 믿고 따르는 대다수의 인간들은 마치 그게 진실성으로 여긴다. 그들은 겉으로 가면을 쓰고 숭고한 이상을 설파하나 그들 내심으로 들어가면 막대한 이익에 모든 신경이 몰려있다. 그로 인해 다치거나 죽거나 파산당하는 인간의 비참함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외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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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늘 완전할 수 없고, 완전할 수 없다. 자기도 모른 사이에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고, 남에게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것에 대한 옳고 그릇된 점을 우리가 알아가는 것이란 상당한 정신수행이 필요하다. 루소의 몽상은 단순히 자기만의 세계가 아니다. 인간인 그 루소 본인에 대한 참회의식과 더불어 삶에 대한 아름다움을 무엇인지 깊이 찾아가기 때문이다. 왜 자연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 루소는 인간의 문명사회가 인간을 망치는 것을 말한다. 이기심이 서로를 속이고 빼앗고 상처를 입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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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평화로운 세상이 되려면 숲 속의 곰들과 지낼 수만은 없으나, 적어도 그 본연의 세계에 가는 것이 그의 산책이다. 반드시 산책이 아니어도 우리 인간은 자연의 고요 안에 있으면 모든 게 갑자기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암초에서 파도가 크게 치는 바다를 멀리 보고 있거나, 푸른 나무로 가득한 산을 바라보거나 거대한 물결이 요동치는 강물을 보면 내 안에 담겨진 우울함과 슬픔 그리고 분노도 아무 것도 아니다. 자연의 치유력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좋고 나쁘고의 쾌 내지 불쾌를 넘어 내 정신세계 역시 자연 속에 하나의 존재처럼 여기는 것이란 매우 신비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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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의 시작이 루소로부터 시작되었다면, 그 낭만주의란 바로 우리가 이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이다. 루소는 그 세계를 자연에서 찾았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한 공간으로 찾으러 간 것이다. <식물사랑>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식물을 효용성이나 편리성의 도구로서 대하는 게 아니라 식물 그 자체로 존재를 삼았다. 어떤 대상을 도구가 아니라 그 대상 그 자체의 자연적 존재성으로 바라본 것이다. 처음에 자기 외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으나, 정작 루소는 자신 외의 존재를 인위적인 것에서 자연적인 것으로 대체했을 뿐이다. 그 공간에서 몽상을 꿈꾸며 명상으로 들어간다. 문명의 혜택이 지나치게 인간을 타락시킨 현대사회에서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해 들어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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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주변에 많은 사람들과 구경거리들이 넘쳐흐른다. 피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찾아가는 자연은 이미 호텔과 모텔, 식당과 커피숍으로 가득하다. 하다못해 도로까지 잘 뚫려 차만 가지고 간다면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다. 그곳에 진정한 자연이 있을까 모른다. 물론 그런 좋은 곳이 아닌 주변 작은 산이나 공원에 가도 충분할지 모르겠다. 적어도 인간이 자신을 자연 속에 있는 자유인이 되고자 하려면 우선 자기 안으로 자신을 명상해야 할 것이다. 개인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없다. 그가 만약 높은 정치인이라면 그건 개인이 아닌 단지 사회적 존재로서 가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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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은 나이며, 그 속에서 나의 진실한 모습을 마주본다. 진실한 내 모습에 진정한 자연적인 나를 찾으며, 그 공간에서 자유의 세계를 찾아갈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겨운 일상과 시끄러운 도시를 벗어나는 것도 좋은 활력소이나, 결국 우리는 다시 우리가 있던 자리에 돌아올 뿐이다. 나의 세계에 존재하는 자연적 존재란 무엇이고, 그 안에서 나란 인간은 어떤 형태인가? 문득 느끼지만 고독과 고립은 조금 다르다. 루소는 고립되었지만 자신 스스로 고독을 찾아가나, 우리 현대인은 고립된 자신을 잊기 위해 또 다른 고립을 추구한다. 자신이 외롭다고 느끼는 것보다 자신은 외로운 인간이란 사실을 이해하는 게 시작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