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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둠밤]에 제시되는 지혜의 주도적 정화력

나뭇잎숨결 2020. 4. 14. 11:31

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둠밤]에 제시되는 지혜의 주도적 정화력




  -콘스탄스 피쩌랄드Constance Fitzerald 著/ 김 성웅 옮김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말라 … 너 있지 않은 것에 다다르려면 너 있지 않는 데를 거쳐서 가라. 아직 다다르지 않은 것에 다다르려면 도중 아무 것에도 발을 멈추지 말라"(십자가의 성 요한).




  지난 15여년 동안 일어왔던 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둔 밤에 대한 관심의 고조 현상은 분명 오늘날 현대 신학 안에서 일고 있는 신비신학의 전통 및 과거의 고전적 영성서들로 향한 회귀라는 거시적 동향의 일부를 차지한다. 더욱 의미심장한 점으로서, 어둠을 비롯한 그와 유사한 어둔 밤 체험의 제반 요소들에 대한 최근의 인식은 관상기도를 통한 하느님 체험이 부흥의 일로를 걸으며 보다 대중적인 호소력을 취하고 있는 현상을 대변하는 듯 하다. 더욱이 의심할 바 없이, 지난 20여년에 걸쳐 특별히 영신수련과 피정 지도를 통해 이냐시오 기도를 재해석하고 유용화시켰던 예수회 회원들의 창의적인 작업은 앞서 언급한 ‘대중적 삶 안에서의 관상기도의 부흥’이라는 동향에 중대하게 기여해 왔다. 아마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 최근 우리는 어느덧 어둔 밤과 관련하여 이냐시오 영성과 가르멜 영성이 서로 교차되는 현상을 발견하는 것 같다. 또한 이러한 연유에서 이냐시오 기도를 수행하는 중에 어둠, 무미건조함, 자기 혹은 지도자의 삶의 의미가 상실에 빠지는 듯한 당혹스러운 체험에 접한 일부의 사람들이 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둔 밤에 대한 가르침에서 도움을 발견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이냐시오 성인이 미처 이해하지 못했거나 부각시키지 못했던 영적 성장 과정 내의 매우 중대한 관상적 국면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냐시오 영성과 가르멜 영성의 상호 만남과 보완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냐시오 성인에 의해 새롭게 설립된 예수회의 젊은 회원들이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에게 영적 도움을 제공하고 있을 당시, 성녀는 자신의 혼란스러운 신비 체험을 스스로 소화하고자 노력했을 뿐 아니라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시도하려 했었다. 따라서 이냐시오 성인의 충실한 계승자인 토마스 그린Thomas H. Green은 바로 그와 같은 상호 보완의 긴 역사를 뒤안길로 삼으면서 기도에 관한 자신의 두 번째 저서에서 ‘초심 단계를 넘어선 기도’에 관한 지침을 제시하기 위해 십자가의 성 요한과 예수의 성 데레사를 인용한다. 토마스 그린에게 있어 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둔밤에 대한 논의는 ‘기도 문학 전체에 걸쳐 가장 의미심장한 대목들’로서 다가왔다. 토마스 그린Thmas H. Green, 샘물이 흐를 때에When the well runs by(Nortre Dame: Ave Maria Press, 1979), 10쪽과 110쪽. 110-133쪽 참조.


  본인은 이 논고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둔밤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두 가지 방식들을 통해 전개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 방식은 최근 여성신학 신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독특한 관점의 그리스도론과 보조를 맞추어 어둔밤 안에서의 지혜Sophia의 정화적․변모적 작용을 숙고하는 것이다.. 본인이 희랍어 여성형 명사 Sophia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여성신학의 신학자들의 선호에 부응하려는 의도에서 뿐 아니라, 지혜에 대한 성서적 표현이 한결같이 여성형으로 제시되면서 하나의 개념이나 속성이라기 보다 한 인격체를 시사하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지혜는 ‘그것’으로서 다루어지지 않고, ‘누이, 어머니, 사랑하는 여인을 비롯한 수 많은 다른 여성적 역할들..’로서 지칭된다. 엘리자베스 존슨Elizabeth Jhonson, 존재의 모태She who is(New York: Crossroad, 1992), 87쪽 참조. 본인은 엘리자베스 존슨의 지혜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롤란드 머피Roland Murphy의 저서, 생명의 나무The tree of life: 성서 지혜문학의 탐구an exploration of biblical Wisdom literature(New York: Doubleday, 1990), 133-49쪽의 내용으로부터 ‘여성으로서의 지혜’를 다루는데 필요한 도움을 얻었다.


그리고 두 번째 방식은 십자가의 성 요한에 의해 영의 어둔 밤이라고 지칭된 보다 처절한 어둠의 체험에 담긴 의미를 도출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지혜 개념. 십자가의 성 요한은 『가르멜의 산길』의 도입부부터『살아 있는 사랑의 불꽃』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지혜라는 지평 안에서 내용을 전개한다. 가르멜 영성 연구소The Institute of Carmelite Studies는 1995년 후반에 관상을 위한 교육Education for contemplation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는데, 이 책을 통해 십자가의 성 요한의 지혜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연구 작업이 제시될 것이다. 본 논고는 이 연구 작업의 일부를 구성한다.


그의 주요 저서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드러나듯이, 그는 기본적으로 구약 시대의 유다교 지혜문학 작품들의 영향하에 있다. 특별히 지혜서(7-9장)와 잠언(8장)은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있어 지혜가 어떠한 분이시며, 여성형으로서의 지혜가 어떠한 역할을 하는 가를 기술하는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처럼 유다교 지혜 문학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섭력을 통해 그의 가르침을 형성하는 일련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들이 도출된다. 그러한 섭력은 예수님과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더 나아가 이러한 하느님이 인간의 역동적 변모 과정 안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그의 이해를 형성한다. 또한 그것은 인간의 고통 안에서의 지혜의 역할을 암시하며, 지혜의 사랑을 받는 이들이 세상 안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는 지를 시사한다. 사도 바오로와 복음사가 요한과 마태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분명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지혜Sophia이자, 말씀이요,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지혜에 대한 통합적 체험 안에서 인격은 변화를 일구어내며, 이러한 예수님 안에서 만물은 전 우주와 그 안의 온갖 생명체에 스며들어 그것들을 상호 연관시켜 주는 지혜-하느님의 사랑겨운 합일의 포용으로 모아진다.


  이를 통해 시사되는 바로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지혜를 하느님의 여성형으로서 이해하는 구약의 유다교 지혜문학의 전통을 섭력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예수님을 신적인 지혜, 즉 육화된 지혜로서 동일시했던 신약성서 저자들의 사상을 완전히 숙지하고 있는 것 같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자신의 응집력 있는 그리스도론을 강화하기 위해 신약 성서에 나타난 다수의 중요한 지혜문학적 대목들을 활용한다. 이는 그가 종종 신약의 지혜문학과 구약의 지혜문학 간의 연계성에 관한 자신의 지식을 전개하려고 했던 의도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그의 심오한 그리스도론이 언표되었던 일련의 방식들을 미루어 볼 때,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론 발전에 근간을 이루었던 지혜의 의인화 전통이 그에게 특별히 중요한 의미로 다가왔던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지혜의 핵심적이고 중요한 역할 및 작용을 인식하는 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론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기초 작업이 될 것이다. 더욱이 어둔 밤 안에서의 지혜의 정화적․변모적 작용을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변모 과정 안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확인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 십자가의 성 요한의 인간학적 전망 안에서 인격은 하느님과의 합일을 향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서 비추어진다. 하지만 지성과 의지와 기억과 상상이라는 거대한 ‘동굴들’이 언뜻 충만감을 보장해 줄 것 같은 인간적 지식과 사랑과 희망과 기억의 내용물들로 가득 차 있는 한, 인간은 자신 안에 내재해 있는 그러한 가능성의 심원을 느끼지 못할 뿐더러 그에 대한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리는 이제껏 자신이 목숨 걸어온 대상이나 사람에게서 파손되기 쉬운 연약성을 체험하게 될 때, 우리가 삶의 애착을 두고 추진하던 일이 한계 상황과 실패로 치달을 때, 우리의 희망과 의미의 체계들이 산산히 부서질 때, 그럴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존재 깊숙이 내재하는 목마름과 굶주림의 심원, 즉 하느님과의 합일을 향한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진정으로 감지할 수 있다(살아 있는 사랑의 불꽃 3, 19-22 참조). 본 논고에 제시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저서들의 인용 구절들은 대부분 십자가의 성 요한의 작품집The collected works of John of the cross(Washington, DC: ICS publications, 1991)에서 발췌되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가르멜의 산길 제 1편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 삶의 본보기로 삼고자 하는 지속적 갈망에 대해 권고하는 대목에서, 사실 그가 그러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암시하며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매사에 그리스도를 본받고, 자신의 생활을 그분의 생활에 맞추어나가려는 마음을 항상 지녀야 한다. 본받기 위해서는 당신의 생활을 깊이 관찰하고, 모든 일에 임하시던 그분의 태도를 거울 삼아 사는 것이다(가르멜의 산길 제 1편, 13, 3). 이 구절은 가르멜의 산길 제 1편에 제시된 욕망과 관련된 감각의 정화의 방향을 제시하고 그것에 선행하는 모든 차원을 해석하는 근본적 내용을 다룬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오직 한 가지,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갈망이다. 인간의 욕구는 복음에 제시된 예수님 안에 침투됨으로써 교화된다. 하지만 우리의 욕구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에 정향시키고 나면, 정작 우리가 접하게 될 그분이란 서서히, 그리고 비밀스럽게 우리의 욕구에 재정향과 교정을 가하며 우리의 삶을 전환시킬 사랑겨운 지혜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욕구는 예수님-지혜의 동반과 친교를 통해 교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역동적 힘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기도 철학 전반의 기저를 이루는 동시에, 예수님을 향한 의지의 의식적인 결단이 어떻게 일어나며, 욕구와 의미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우리의 삶 안에서 어떻게 시작되는 지를 시사한다. 하지만 인간 존재는 하루하루 이러한 동반 관계에 충실함을 기하는 데에 만족하지 못할 뿐더러, 그것의 더디고 비가시적이며 신비스런 발전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우리의 문화 속에서 교육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자극제, 변화, 새로운 즐거움, 진기한 체험들에 대한 소모적인 욕구를 품고 살아간다. 하지만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의 가장 탁월한 그리스도론이 제시된 구절들 중의 한 곳에서 사도 바오로와 지혜서를 인용하면서 우리가 더 이상의 비상한 새로운 계시나 시현, 혹은 은밀한 진리를 바라야 할 까닭이 없음을 단호하게 피력한다(가르멜의 산길 제 2편, 22, 5-7 참조). 우리는 복음과,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과의 합일적 동반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 또한 그분 안에는 인간 실존 전체를 포용하시고 당신의 존재 내부로부터 그것에 생명력을 부여하시는 지혜-하느님의 긴밀함과 충만함과 연민어린 배려가 우리를 위해 거처한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께서 지니신 온전한 충만함과 무한한 능력을 강조하면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예수님의 의미에 담긴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을 끌어올릴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을 보증한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께서 지혜의 빛을 통해 주시는 생명을 기도 안에서 체험했다고 해서, 정작 예수님의 상징성을 우리 시대에 맞게 변화시키려는 의도 속에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그리스론적 교의를 재정립시킬 만한 일말의 언어적 표현을 구태여 나열하겠는가? 앞서 제시한 엘리자베스 존슨의 저서는 이러한 내용을 탁월하게 전개하는 전형적 모범이다. 지혜의 복원에 대한 차원에서라기 보다, 요한복음 4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의미를 여성신학적 관점에서 해석한 전형적 모범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산드라 슈나이더스Sandra Schneiders의 저서, 계시의 책The revelatory text: 신약성서 해석interpreting the New Testament as sacred scipture(San Francisco: Harper and Row, 1991)을참조할 것.



  너는 오직 이분에게만 눈길을 모으라. 이분을 통하여 너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계시하였으니 네가 빌고 바라는 그 이상의 것을 이분 안에서 얻으리라. 너는 나의 말과 계시를 청하여 하나의 부분을 얻으려 하지만 이분에게 눈길을 모으면 전부를 얻을 수 있으리라.


  이분이야말로 온통 나의 말, 나의 대답, 나의 시현, 나의 계시... 이분을 너희에게 형으로 친구로 스승 및 갚음과 상으로 줌으로써 나는 너희에게 말하고 대답하고 나타내고 열어 보였노라...(가르멜의 산길 제 2편, 22, 5).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지혜 안에서의 성장. 이처럼 지혜가 우리 안에 거주하여 생명을 부여하면서 우리의 정서적․인식적 체계의 주된 관심사가 되는 것은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과의 동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이미지는 각 사람 저마다에게 있어 독특한 형태를 취하면서 관계와 지도와 사랑과 정화와 변모를 위한 기초를 형성한다. 사실상 사랑겨운 지혜의 현존이 우리 내면에 형성되어 우리의 동기와 상상에 영향을 미치게 됨으로써 욕구의 점차적인 전이(轉移)가 이루어진다.


  바로 이 부분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지혜 그리스도론의 근본 원칙이 작용한다. 인간의 사랑이 그 내재적 가능성의 충만에 도달하고 인간의 욕구가 그 바램과 아픔을 멈추게 되는 것은 연인들이 온전한 합일을 이루어 한 사람이 상대방이 지닌 사랑과 선성 안에서 변모됨으로써야 가능하다. 이를 통해 시사되는 것으로서, 변모적 힘을 지닌 예수님-지혜의 이미지는 정화와 발전을 거듭할수록 그에 상응한 방식을 통해 점차적으로 인격 안에 각인된다. 즉 인간이 예수님-지혜를 더욱 잘 알게 될수록, 이러한 앎은 인간의 인식에 전환점을 제공할 뿐 아니라,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듯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해주고 인간의 욕구를 재정향시키고 정화시킨다.


  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를 한참동안 바라본다고 가정해보자. 그 때 어느덧 나는 상대방의 시선을 통해 비추어지는 상(想)과 동일화되어 버린다. 즉 나는 변모된다. 어느새 사랑하는 이의 이미지, 사랑하는 이의 시선이 나의 마음에 새겨져 나의 내면의 시선을 통해 보여진다. 우리는 『영혼의 노래』의 시에서 이를 분명하게 확인하게 된다.


  님이여, 그 모습 내게 보여주세요.

  내가 그 아름다움에 취해 죽게 해주세요.

  내 사랑의 고통은

  직접 님의 현존과 이미지를 마주하지 않으면

  영원히 낫지 않으리.


  오! 맑은 샘물아

  내 마음 속 깊이 새겨져 있는

  빛나는 그 얼굴을

  그토록 보기 갈망하는

  내 눈동자가 되어주렴(영혼의 노래 11-12).


영혼은 자신 안에서 일종의 사랑의 이미지가 새겨진 그림을 체험한다... 그리고 영혼은 이러한 이미지의 그림, 즉 자신의 정배요 말씀이자, 사도 바오로의 표현을 빌자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신 하느님의 아들(히브리 1, 3)의 이미지가 새겨진 그림(sketch)을 완성하기를 갈망한다. 그것은 영혼이 이러한 사랑을 통해 그러한 이미지로 변모하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영적 찬가 11, 11-12).


  이는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있어 하나의 근본적인 체험인 까닭에 이러한 지혜의 이미지가 수행하는 영적 발전과 변모의 주도력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서 구약 시대의 지혜 개념이 지녔던 창조적 요소가 인간의 변모에 기여한다. 하지만 만일 영적 성장과 관련된 지혜의 가치가 인식되지 못한다면, 지혜가 지닌 사랑과 배려와 양육의 창조력은 제한될 것이고, 이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새기고 계신 지고한 이미지를 손상시키거나 상실하고 말 것이다’. 사랑의 살아 있는 불꽃 3, 41-45 참조. 여기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성령의 최고로 지고한 도유이자 인호’인 관상기도의 비밀스럽고 사랑겨운 지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어설픈 지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인간 안에 드리운 이미지를 손상시키거나 파괴하는 영적 지도자들을 힐난한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단 성령의 기묘한 드리움이 조잡한 손길에 의해 손상되고 나면 그 어느 누가 그것을 회복시킬 수 있겠는가?’


  영적 성장의 초기 단계에서 예수님-지혜의 발전적 이미지는 힘과 위로가 되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영향하에 관대한 자기-증여self-giving로 나아가도록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동시에, 이렇듯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모든 현실을 통합하는 지혜의 현존을 느끼도록 우리를 인도해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신수련 제 2주간의 역동에 대한 슈타우덴마이어M. Staudenmeier의 해석을 접하게 된다. ‘영신수련의 두 번째 주간은 보다 원대한 세계와의 긴밀한 관계와 세상 안에서의 활동으로 이어지는 내밀한 정서적 몰입의 지평을 열어주는 예수님과의 긴밀한 인격적 관계를 주입시킨다.’ 예수회 영성 연구Studies in the spirituality of Jesuits 제 26호(1994년 5월), ‘세상과의 사랑에 빠지는 일To fall love with the world' 참조.


하지만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관계가 심화될수록 이러한 이미지는 안팎으로 보다 강렬한 요구를 제시하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인간 인격의 심원에서 작용하는 지혜의 방식에 따라 주도되는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어둔 밤과 지혜의 지속적 작용


  시간이 지날수록 지혜의 현존은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어느덧 지혜의 이미지는 너무도 위협적으로 변화되어, 예수님-지혜의 이미지는 나 자신의 자기-이미지마저 전복시킨다. 이것이 이미지 전복subversion의 첫 번째 단계를 드러내는 표징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내게 제시된 지혜의 요구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더러, 지혜에 무조건적으로 의탁하며 그것을 삶의 전망으로서 받아들이던 자세를 철회한다. 그것은 지혜가 너무도 도발적이고 선동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지혜는 삶을 온통 뒤엎고, 내 안에 가장 깊숙이 간직된 믿음과 가치들에 도전을 가하며, 이제껏 내가 체득했던 바를 침식시키고, 내가 소유한 대상과 사람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며, 내가 그 어느 것에 비할 바 없이 만족과 위안 거리로 의지하는 것에다 한계성과 억압의 특성을 지적하여 부각시킨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둔밤과 사랑겨운 지혜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로 인도된다. 본인은 묵시문학과 함께 하는 삶Living with Apocalypse, 틸덴 에드워즈 Tilden Edwards 편저(San Francisco: Harper and Row, 1984)라는 책에서 ‘막다른 궁지와 어둔 밤Impasse and Dark Night’이라는 글을 기고할 당시 어둔 밤에서 차지하는 예수님-지혜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어둔 밤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해석을 전개하는 본 논고는 ‘막다른 궁지’의 체험에 필수적으로 보완되어야 할 요소를 지닌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주부적 관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둔밤이 하느님의 사랑겨운 지혜임을 명확하게 언급한다. 이와 관련하여 십자가의 성 요한이 제시한 대목들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어둔밤 제 2편권 5, 1-2; 17장; 가르멜의 산길 제 2편 8, 6을 참조할 것.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지혜라면, 어둔밤의 관상은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 되며, 어둔밤은 예수님-지혜의 이미지가 고통, 고립, 실패, 소외, 거부, 버림받음, 절망, 무의미, 죽음과 같은 십자가의 모든 표징들을 취하는 시기가 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이미지는 일견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이해 불가한 하느님을 반영하면서, 어둔밤 안에서 이해 불가하고, 비밀스럽게 감춰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겨운 하느님의 지혜로서 작용한다. 가르멜의 산길 제 2편 7장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어둔밤의 통합적 이미지나 패턴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것이 이미지 전복의 두 번째 단계이다. 이제 나의 자기-이미지가 전복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이미지마저 전복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성 요한이 어둔 밤을 하느님의 내리심이라고 표현할 때, 이는 하느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라는 은밀한 지혜를 부여하시며, 즉 보다 긴밀한 관계가 내포된 은밀한 합일의 사랑겨운 지식을 부여하시며 내리심을 의미한다(어둔밤 제 1편 10, 6 참조). 이러한 맥락에서 어둔밤은 일종의 험난한 상황이나 절망에 처한 심리적 상태와 같은 비인격적인 무언가의 어둠일 뿐 아니라, 그 배후를 들여다보면 인간의 영혼에, 더욱이 이로써 인간의 삶 전체에 지울 수 없는 자국을 남기는 누군가의 현존이다.


  이러한 전복된 이미지는 하느님 손길의 와 닿음을 통해 인간의 인격에 상처와 자국과 도전을 가하면서 그것을 형성하고 정화하고 변모시킨다(살아 있는 사랑의 불꽃 2, 16 참조). 이처럼 고통받는 지혜의 파손되고 모호한 이미지는 어느덧 하나의 거울처럼 우리의 삶에 내재된 비참함과 위선을 비추어준다. 이렇듯 십자가에 달린 이미지는 인간이 처한 어둠과 한계와 억압과 죄스러움에 대한 생생한 인식으로 다가와, 인간의 얄팍한 자기-신뢰를 압도하면서 우리가 안다고 자부하던 하느님 상에 의문을 던지고, 우리가 성취했던 것을 회의에 빠뜨리고 우리의 정서 세계 전체를 붕괴시킨다. 이제 그러한 전복된 이미지에 따라 우리의 자아 중심적인 현실 지각 방식, 즉 타인들, 타 종류의 생물들, 더 나아가 세계와 심지어 우주에 대해서까지 지녔던 기존의 체험 방식이 전복되기에 이른다. 이는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이끄시고 교화하시면서, 혼돈과 공허의 와중에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의 일치를 통해 사랑겨운 지혜의 전망으로 초월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언어(말씀)이다.


  가난 속에서 소외 받고 착취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미지들이 현저하도록 명확한  의미를 취하는 것은 이 시기의 영적 성장 단계에 해당된다. 분명 그 이미지들은 고통받는 예수님-지혜의 이미지가 외연적으로 확장된 것으로서 우리를 향해 시위한다. 그것들은 인간 세상의 어둠이자 우리 자신의 어둠이기도 하다. 고통받는 지혜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이 투영되는 것처럼 인류의 집단적인 어둠과 그림자 또한 그와 같이 투영된다. 따라서 고통받는 지혜와의 동일화가 우리 내면의 어둠 안에서 구축되는 만큼 ‘가난한 이들’의 존재가 인정되고 포용되는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이미지에 이어 우리 자신의 이미지를 전복시켰던 지혜가 우리의 세계관마저 전복시키기에 이른다. 이것이 이미지 전복의 세 번째 단계이다. 어느덧 어둠에 휩싸인 지혜와의 비밀스럽고도 고통스러운 합일의 관계 안에서 초자아적인 참여participatory와 사랑에 불타는 자각이 인간의 욕구와 의식의 자리를 새롭게 파고들기 시작한다. 이러한 자각은 우리가 온갖 형태의 개인적․사회적․문화적 폭력과 억압을 점차적으로 거부함으로써 표현되기 시작한다. 더욱이 그것은 비록 아직 어둠에 휩싸인 미결된 자각일지언정 신비롭게 변모된 의식의 표지로서 세상과의 연대성과 친교의 체험에 진입하며 그 발전의 일보를 내딛는다.


  리차드 타르나스Richad Tarnas는 ‘초자아적 참여participatory 인식론’이 데카르트- 칸트 이래의 근대적 패러다임을 특징짓는 위계질서적 이원론을 뛰어넘으면서 한 세기 이상에 걸쳐 현대 철학에 등장해 왔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인식론을 주창하는 모든 사상가들에 있어 공통된 요소는 인간의 인식과 우주와의 관계가 궁극적으로 주-객 대립구도의 이원론이 아닌 초자아적 참여 구조 속에 놓여 있다고 보는 근본적 확신이다. 본 논고에서 이러한 ‘초자아적 참여 인식론’에 관한 리차드 타르나스의 창의적 이론을 너무 투박하게 다루었다는 느낌이 든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서구 사상의 수난The Passion of the Western Mind(New York: Harmony Books, 1991), 433-445쪽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처럼 초자아적 참여와 관련된 인식 방법은 토마스 베리Thomas Berry와 브라이언 스윔Brian Swimme을 비롯한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제기된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변혁의 시기의 전조가 될 한계 상황과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인류의 도전적 과제를 제시한다. 그들에 의하면 그 시기가 올 때 우주는 인간의 사용과 지배를 받는 객체들의 집합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주체들이 긴밀한 상호 연관성 과 다양한 친교를 이루는 차원에서 체험될 것이라고 한다. 브라이언 스위미Brian Swimme/토마스 베리Tomas Berry 共著, 우주 이야기The universe story(San Francisco: Harper, 1992), 243쪽 참조. ‘실존 그 자체는 저마다의 존재가 모든 타자와의 이러한 긴밀함을 이루는데서 생성되고 유지된다.’


  이러한 지구 생태에 관한 이해 및 초자아적 참여와 관련된 인식 방법에 중대한 획을 그으며 보조를 맞추어 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시대의 문화 안에 급속도로 도래하고 있는 여성적 특성의 기운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우주 안에 작용하는 에너지의 통합적 체계에 그 근거를 두면서 서구 사상의 근간인 남성적 지배의 세계관에 종말을 예고한다. 진정 우리는 (우리 모두 안에 잠재된) 남성적 성향이 스스로 죽음의 어둔 밤 안에서 자기 초월을 이루어야 할 중대한 변화의 시기 안에 살아가고 있다고 느껴진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은 남성적 성향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차원에서 모든 형태의 여성적 성향과의 상호 보완 관계에로 진입하도록 촉진할 것이다.


  우리는 최근 몇 년에 걸쳐 수 많은 구조 체제들이 다량으로 해체되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분명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탄생에 앞서 반드시 겪어야 할 파괴나 죽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초자아적 참여의 전망은 여러 차원들에로 침투하여 단순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세력들로부터 촉진된, 보다 심층적이고 강한 힘이 부여된 일종의 원형적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십자가에 달린 지혜의 체험은 우리 시대에 드리워진 세계 정신과 접점을 이루며 작용하고 있다. 어둔 밤을 체험한 인격은 고통받는 지혜와의 합일 체험과 그에 뒤따라 일어나는 ‘타자’와의 연대성을 너무도 깊고 심원하게 체험한 결과, 인류 전체의 갈망과 우주의 에너지들을 의식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둔 밤에 처한 그것들을 예수님-지혜의 존재 자체이자 양여물이기도 한 초자아적 참여와 사랑에 불타는 인식으로 포용할 수 있다. 생태학자들이나 특수 창조설을 주장하는 생물학자들이나 지질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은 이러한 보다 거시적 차원의 변화에 기여하는 신비신학의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욱이 우리 시대야말로 다른 헛된 이미지들이나 실행들이나 관계들에서 위로와 도피처를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살아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이미지’(가르멜의 산길 제 3편, 35, 5)를 추구해야 할 시기이다. 또한 설령 고통받는 지혜가 현실적으로는 ‘어떠한 이미지로도’ 체험되지 못한다 할지언정 그것이 우리의 개인적․사회적 어둠을 자각하고 반영하며 심지어 수용하기까지 하며 남기는 변모의 인호와 대면해야 할 시기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참으로 이 시기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버림받으신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그 일말의 미세한 명암의 차이마저도 완전한 어둠과 침묵 속에서 우리 인간의 마음 안에 새겨지고 있는 가장 처절한 어둔 밤의 시기이다.


영의 정화 . 버림받으신 예수님께 당신 모습을 감추시며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내면을 고독으로 빠뜨려 이전에 우리가 익숙하게 여겼던 기도나 관계들이 고통과 상실감을 안겨줄 때, 상실과 절망이 거대한 세력을 드러낼 때, 여태껏 자신을 지탱해주었던 모든 것들이 의식 밖으로 사라지고 삶의 심원한 의미들과 상징 체계들이 공허한 미궁으로 빠져들 때, 우리가 선사 받은 언어와 이미지들이 더 이상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때, 그런 시간 속에서도 어둠에 휩싸인 지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역사하시어 인간을 사랑으로 양육하시고 사회적 통념상으로는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들을 우리 안에 확고하게 구축하신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상상력과 지성의 직관력과 감각들의 능력을 완전히 박탈당한 인격의 전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체험을 적나라하게 조명한다.


  하느님께서는 ...새 인간, 즉 새로운 감각을 가지고 하느님께 창조된 인간을 만드시고자    이들의 능력과 애착과 감성을 모두 다 -영의 것이든 감각의 것이든 그리고 밖의 것이    든 안의 것이든- 벗겨버리시고, 지성을 어둡게, 의지를 메마르게, 기억은 텅 비우게, 애    착은 극도의 불안과 고민거리로 돌리어서, 그전에 영적 보배들에서 느끼던 맛과 감각    을 없애주신다. 사실 이 없앰은, 사랑의 합일이라는 영의 영스러운 실상이 영 안에 도    입 되기 위하여 요구되는 원칙의 하나인 것이니, 주께서는 이 모두를 하나의 순수하고    도 어두운 관상을 통하여 영혼 안에서 역사하신다(어둔 밤 제 2편 3, 3).


  이전의 시기 중에 어둔 밤(감각의 어둔 밤)이 온통 우리 삶의 안팎으로 메마름과 무미건조함과 만족의 결핍을 가져다주었다면, 이 보다 처절한 어둔 밤(영의 어둔 밤)은 이제껏 우리의 삶을 구축하여 그것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으며 확신과 일말의 위안의 원천을 제공했었던 지지 구조들마저 제거해 버린다. 본인은 동등한 자들의 제자직: 그리스도교 여성신학의 영성을 향해A discipleship of equals: toward a Christian feminist spirituality, 프란시스 에이고Francis A. Eigo 편저(Villanova: Villanova University Press, 1988) 라는 책에서 ‘동등한 자들의 제자직: 전승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A discipleship of equals: voices from a tradition’이라는 논고를 통해 처음으로 이러한 해석을 전개한 바 있다.


  하지만 십자가의 성 요한은 지성이 텅 비워져서 어둠에 빠진다고 표현함으로써 정확히 무엇을 의도하고자 했을까? 아마도 그는 우리의 삶의 철학과 우리의 신학과 우리의 공들여 쌓여진 의미들이 우리 눈앞에서 산산히 부서질 시기가 다가오리라고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 같다. 그 시기가 다가오면, ‘하느님’과 ‘신앙’과 확실한 진리에 관해 우리가 지성적으로 축적해왔던 모든 것이 깡그리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진정 모든 것이 무의미해져 버릴 것이다. 지성은 한편으로 이제껏 닦아온 지식으로 가득 채워진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즉 의미의 차원에서는 완전한 어둠에 휩싸이고 말 것이다. 이 때 우리는 기만당한 듯한 느낌에 휩싸일 것이고, 그와 동시에 자신의 신랄한 냉소와 불신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충격을 가할까 두려운 나머지 침묵에 빠질 것이다. 어둔 밤 제 2편 9, 3; 5, 3-5; 가르멜의 산길 제 2편 4장과 8장 참조.


  우리는 통념적 사고방식상 인간의 기억이 체험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기억의 텅 빈 개념에 대해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어느덧 우리의 상상력은 더 이상 기억들을 연관지음으로써 의미와 희망을 창출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기억의 텅 비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 때 동기와 확신을 제공해 주었으며 미래에 대한 신뢰와 보증을 창출했었던 기억의 모든 내용물이 이제 환상과 냉소의 대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제 기억은 우리가 이전에 생각했던 바와 같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진정 기억은 텅 비워져 이전에 소중하게 간직했었던 체험들의 흩어진 잔재들과 자신의 실패와 패배에 대해 짓누르는 의식의 계기만을 소유할 뿐이다(어둔 밤 제 2편, 5, 5-6 참조).


  이렇듯 자신의 비참한 곤경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으로 인해, 단지 자신의 지인들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느님께로부터 거부당하고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압도적으로 밀려든다. 사실상 버림받았고 신뢰의 저버림을 당했다고 느끼는 것은 이러한 어둠의 체험의 표징이 된다. 그러한 느낌이 어떠한 양태로 일어나든 간에 자신의 삶에서 가장 보배로웠던 대상이나 사람이 자신으로부터 단절되고 상실된다. 이러한 ‘의지의 정화’와 관련하여 가장 비참한 현실은 자신의 사랑과 갈망의 초점으로서 사랑 받던 이가 이제 자신을 곤경으로 내모는 원흉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둔 밤 제 2편 7장; 9, 3/7; 가르멜의 산길 제 3편 16장; 35, 5; 살아 있는 사랑의 불꽃 1, 23 참조.


필경 자신을 사랑해주었고, 자신에게 확실한 담보를 제공하며 의지처가 되어 주었던 이로부터 버림받은 것만큼 확신과 가치를 파괴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로써 우리 인간은 무엇 하나 마음 붙일 곳을 찾지 못하게 된다.. 갈망의 자리에서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너와 나’의 상호관계가 파괴됨으로써 인간은 동기를 잃어버리고 비통함에 빠져든 채 목적의 추진력을 상실하고 만다. 어느덧 인간은 초월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고 완고하게 반발하면서도, 결국 그것에로 강요되고 만다.


대안적 전망: 신․망․애.  이 어둔 밤 우리는 죽음으로 내모는 ‘하느님 손길의 와 닿음’을 견디어낼 만한 근원적 차원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덕을 구비해야 할 도전적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하느님의 손길은 우리에게 와 닿아서 한편으로 우리 자신의 갇혀진 자아-만족을, 다른 한편으로 우리 자신의 부자유스런 의존을, 그리고 변모와 발전에 대한 두려움을 걷어내는 인호를 남긴다. 지혜의 어두운 현존에 의해 주도된 향주삼덕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유일한 선택이 되어 매우 버거운 대안적 전망을 제시한다. 처음에는 우리가 신․망․애를 느끼지 못하는 까닭에 기도 중에 이러한 근원적인 관상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공허’로 남겨지는 것보다, 이러한 하느님의 은사들을 거부하려고 하는 분노와 두려움과 반발감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쨌든 어둔 밤의 박탈이 의식과 감각 능력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새로운 지평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길은 이러한 관상의 자세와 전망을 수용하고, 이로써 실제로 하느님의 지혜에 대한 사랑겨운 관점으로 초월함으로써 이루어진다(가르멜의 산길 제 2편 6, 6; 어둔 밤 제 2편 21, 11-12 참조).


  하지만 신덕은 우리 지성의 이해 능력에 어둠을 초래한다. 이제 신덕은 논리적으로 삶과 죽음과 영원을 추리하던 지성의 능력과 대립된 목적을 이룬다. 어느덧 예수 그리스도가 기존의 의식으로부터 물러남과 동시에, 신덕은 상상할 수 없고 이해와 처분 불가능한 그리스도의 신비로 우리를 인도한다. 결국 우리 인간 스스로가 주도력을 쥐고 지성의 이해나 상상이나 기억의 능력을 비우는데 착수하지 못하는 와중에서, 기도의 발전에 따른 삶이 우리에게 이를 강요하고 나면, 곧이어 신덕이 인간적 이해 능력을 훨씬 넘어선 의미의 영역에로 새 지평을 여는 창구가 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둔 밤 제 2편 21, 11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믿음으로 말하면 이성이 모든 자연엣 지식을 비우고 어둡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지혜, 곧 하느님의 아들이자 말씀과 결합하도록 준비시킨다.’ 신덕에 대한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을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가르멜의 산길 제 2편 3장; 4, 1-3; 8장과 9장; 어둔 밤 제 2편 16, 8, 2을 참조할 것.


  정확히 말해서 어둔 밤의 절망과 비움은 엄밀한 신학적 의미에서의 희망을 가능하게 만드는 요건이다. 망덕은 우리가 정말 막다른 궁지에 몰려 더 이상 기억․감정․이미지의 내용들과 삶의 체험들을 의미로운 패턴이나 약속된 미래의 기획 안에 연관 지을 힘을 찾지 못하는 시기에 작용하게 된다. 이어서 망덕은 상실로부터 무언가의 의미를 찾아내려는 투쟁마저 몰수당한 절박한 상황에서, 인간이 소유한 바에 의해서는 결코 세워질 수 없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자유롭고 충실한 투신으로 승화된다. 또한 앞서 인용된 구절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희망으로 말하면 기억을 비워서 모든 피조물을 지니지 못하도록 멀리 떨어져 있게 하니 성 바오로의 말씀대로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로마 8, 24)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차지할 수 있는 것에서 기억을 멀리 떼어서 바라는 것 안에다 두는 것이니 그러기에 오직 하느님께 바람은 하느님과의 결합을 위하여 기억을 순수하게 준비한다.’ 칼 라아너Karl Rahner는 희망을 비롯한 향주삼덕에 대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사상을 해석하는데 있어 본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와 관련하여 신학적 탐구Theological Investications 제 10권의 ‘희망의 신학에 관하여On the theology of hope'와 제 13권의 ’죽음의 신학theology of death‘을 참조할 것.


  고독과 버림받음은 애덕의 마지막 검증 관문이다. 애덕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자신의 필요의 강압에 따라 좌지우지하지 않도록 저지해주며 사랑하는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버림받고 상실에 처한 감정에도 불구하고, 종국에 가서 애덕이라는 향주덕은 증오나 폭력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원한 차원의 자존과 자기애에 대한 신뢰를 몰수당하지 않는다. 이러한 애덕은 죽음을 향해 질주하려는 의지를 정화하면서 자신의 상처와 갈망에서 오는 고통을 진실하게 보듬어 간다. 그리고 마침내 애덕은 박탈감과 상실감의 나락을 딛고 나와, 종종 아주 큰 힘을 발휘하며 다른 이들을 보살피게 된다. 앞서 제시된 인용 구절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애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은 의지의 욕구와 애호를 하느님 아닌 일체에서 비우고 없애어서 오직 하느님 안에 두니 이렇듯 이 덕은 이 능력을 준비해서 사랑으로 하느님과 결합해준다.’


  신․망․애의 관상적 자세는 인식과 의지의 능력을 서서히 재정향시키고 변모시키면서 인간을 하느님 지혜의 존재 자체이자 양여물인 초자아적 참여의 사랑에 이끌린 의식으로 준비시킨다. 인간의 고통과 상실과 공허가 의식의 극치에 달하고, 이를 통해 냉대와 거부와 모욕과 추방과 버림받음을 당하신 예수님이 투사될 정도의 극한 상황까지 내몰린 채, 지혜의 세계-내 현존과 전망이라는 한층 심원한 의식과 상호 관계가 새롭게 채워지도록 인간의 능력들이 비워진 후에야 비로소, 이렇듯 사랑겨운 지혜가 주도하는 역동적 전환이 가동하게 된다. 그러고 나면 죽어가는 예수님-지혜의 이미지와 온통 안팎으로 죽어 가는 모든 것들의 이미지가 완성에 이른다.


  [이는] 하느님 아들의 완전한 생명이 진정으로 모사된 [자국]이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영혼을 신부, 곧 하느님 아들과의 최고로 완성된 결합으로 이끄시고, 영혼이 사랑을 통해 그분 안에서 변모하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밤(보통 영혼의 극히 짙은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영혼에 대한 하느님의 통교)이 지나가고 나면, 그 다음에 신부, 곧 하느님 지혜와의 결합이 따라오기 마련이다...[그리고 나서] 하느님 안에서의 영혼의 변모가 완수될 때 사랑도 완전해진다(영적 찬가 1, 10; 가르멜의 산길 제 1편 2, 4 참조). 엘리자베스 존슨Elizabeth Johnson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서도 계승된 순교자들에 관한 유구한 해석의 전통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순교는 제자를 강렬한 그리스도의 이미지imago Christi로 “변모시킨다”. 순교는 “피를 흘리기까지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모태She who is, 74쪽;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42항 참조.



  아쉽게도 어둔 밤에 관한 본 논고는 하느님의 지혜 안에서 변모되고 세상 안에서 지혜의 예언자가 되는 것이 현실의 삶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한 고찰로 나아가지 못한 한계를 지닌다.


내포된 논제들. 첫 번째, 초자아적 참여와 관련된 세계관이 패러다임으로서의 가치를 호소하며 현 시대에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지혜(Sophia)’는 그러한 세계 정신의 현 흐름에 부응하는 하느님의 이미지로서 적합할 것이다. 타르나스가 패러다임에 대해 정의한 내용은 우리가 지닌 하느님의 이미지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 ‘모든 새로운 패러다임의 생성은 모태기, 성장기, 위기, 변혁기 라는 진화 과정를 여는 시초가 된다. 패러다임은 저마다 연속적인 진화 과정의 한 국면 안에 자리잡는다. 패러다임이 각자의 목적을 완수하였을 때, 즉 패러다임이 완전하게 발전되고 활용되고 나면, 그것은 그 광채를 상실한다...어느덧 그것은 억압과 제한을 가하는 불명확한 도구로 전락하여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다...’ 서구 사상의 수난The passion of the Western mind, 439쪽 참조.


지혜야말로 해체된 상징들의 긴 어둔 밤을 뚫고 그 모습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명확하고 의미심장하게 대변해주는 것 같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한층 더 지혜의 표징들을 취해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 부분이야말로 긴 세월 동안 함구되고 소외되어 오면서도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신비신학을 통해 예언적 힘을 발휘하며 구현되었된 지혜의 전통이 다시금 우리에게 확신을 주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쇄신된 신학적 담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논제가 될 것이라고 본다.


  두 번째, 어둔 밤에 대한 관심의 고조, 지혜에 대한 인식의 부흥, 여성신학의 대두라는 현상들 사이에는 하나의 상충관계가 작용한다. 이는 지난 날 관상의 쇠락, 지혜에 대한 인식의 퇴조, 여성의 소외라는 현상들이 상충관계를 형성하며 맞물려 작용했던 것과 대비된 이치이다.


  세 번째, 여성신학의 신학자들은 하느님의 남성적 이미지들과 맞물려 교회적․정치적․사회적 자리에서 여성들이 겪는 궁지의 체험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와중에서 이러한 죽어 가는 시대의 어둠을 오랫동안 인식해왔다. 하지만 리차드 타르나스Richard Tarnas는 현대인의 위기가 본질적으로 여성의 위기가 아닌 남성의 위기라고 강조한다. 정작 죽음으로 치달으면서 지혜-하느님의 어둔 밤 체험 안에서 자기 초월에로 강요되고 있는 것은 우리 인간 안에 내재된 ‘남성성’이라는 지배 세력이다. 짐작컨대 이렇듯 남성성이 현저한 우세를 차지해왔던 가운데 어느덧 여성성이 간과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하며 고개를 드는 이 시점에서 ‘지혜’는 인간성과 보조를 함께 하며 차후의 변혁의 시대를 향해 전진할 수 있는 하느님의 이미지가 될 것이다


  네 번째, 처음에 예수님-지혜, 혹은 어둔 밤 안에서의 변모가 전복적인 힘을 지녔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로 인해 인간의 욕구와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고, 궁극적으로는 개인적․사회적 전망과 행동양식이 변화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지혜가 전복적인 힘을 지닌 것은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우리의 신학적 담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이제 와 새삼 떠오른다. 왜냐하면 사실상 예수님-지혜는 바로 하느님의 본성에 관한 해석학적 차원을 담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들은 우리 시대의 관상가들이 직면할 수 있는 과제이다. 더욱이 성 이냐시오의 지침에 따라 깊고 진지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기도의 발전을 심화해 갈수록 이러한 어둔 밤의 현대적 과제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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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한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a Cruce, 1542∼1591)은 1568년 11월 28일 두명의 동료와 함께 아빌라의 데레사 도움으로 두루엘로에서 개혁된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십자가의 요한」으로 이름을 바꾸고, 가르멜회 최초 규칙으로 돌아가 실천하겠다는 서약을 함으로써 맨발의 가르멜회의 기원을 이뤘다. 이후 십자가의 성 요한은 23년간의 개혁 가르멜회 생활을 통해 가르멜회 회원들에게 영성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예언자 엘리야 보다 훨씬 더 많은 영성적 영향을 드러냈다. 「만약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자신을 버리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마태 16, 24)는 말씀은 곧 그의 생애의 표현」이라고 할 만큼 십자가의 성 요한은 자신의 생활에서 「십자가」의 실현을 위한 각고의 노력을 보였다. 그의 영성은 한마디로 사랑 자체인 하느님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 것이었다.


 1542년 스페인의 아빌라 인근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난 요한의 삶은 21년간의 세속생활, 5년간의 완화 가르멜에서의 생활, 그리고 개혁 가르멜회에서 살았던 시기로 구분된다. 본래 조상은 명문 귀족이었으나 가세가 몰락, 요한이 태어날 당시에는 매우 가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태중에 있을 때 아버지가 사망, 유복자로 세상을 본 요한은 모친이 정착한 메디나에서 목수의 조수 등으로 일하다 메디나 병원에 채용돼 간호사 일을 하기도 했다. 이때 병원 전속 사제가 되려는 생각으로 예수회가 경영하는 신학교로 통학했던 그는 1563년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게 됐고 살라망카 대학에서 철학 신학 공부 후 1567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의 가르멜회 환경과 생활 방식에 만족하지 못했던 요한은 고향집을 찾았다가 아빌라의 데레사를 만나게 되는데 이 일은 그에게 일련의 생의 전기를 마련했다. 가르멜 수도회 생활보다 더욱 고적하고 깊은 기도 생활이 요구되는 카르투지오회로 옮길 것을 털어놓았던 그는 성요셉 수도원을 설립 개혁 작업을 시작하고 있던 데레사로부터 개혁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게 된 것이다. 두루엘로에서의 새 생활은 엄격한 금욕, 극기와 고행의 생활 등 가르멜 수도회 본래의 은수적 관상적 수도 생활 실천으로 요한을 이끌었고, 한편 맨발로 마을내 부락을 돌아다니며 사도직을 수행했다. 이런 가운데 1577년 요한은 개혁을 반대하던 완화 가르멜회 수도자들에게 납치돼 톨레도 수도원 다락방에 감금되는 사태를 맞는다. 이곳에서 9개월간 지내면서 요한은 갖은 모욕과 학대를 묵묵히 참아냈고 오히려 자신의 덕을 쌓는 계기로 삼았다.


 동료들에게 배척당하고 「순명하지 않는 자」로 비난받는 고통스런 경험속에서 그는 여러 편의 시를 탄생시켰고 이후에는 그 시를 설명하고 해설하기 위한 저서들을 남길 수 있었다. 「로망스」 「내 그 샘을 잘 아노니」와 「영혼의 노래」 일부가 이때 쓰여진 것이다. 감옥에서 탈출한 요한은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하엔의 엘 갈바리오, 그라나다의 로스 마르티레스 수도원의 원장직과 안달루시아 관구장직을 역임하고 가르멜회 제1평의원, 세고비아 수도원 원장직도 맡는 등 활동을 벌였다. 맨발의 가르멜회는 1579년 교회의 공식 인정을 받았으나 이후에도 개혁을 둘러싼 가르멜회의 분쟁이 재현되면서 요한은 반대자들에 의해 계속적인 비난 공격의 대상이 됐다. 1591년 6월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멕시코로 향하던 그는 열병에 걸려 스페인에 남게 됐고, 9월 우베다 수도원으로 옮겨진 후 정신적 고통과 병세 악화로 4개월만에 눈을 감았다.


 그는 삶의 체험을 통해 하느님을 깨달았고 하느님 사랑의 부르심을 받은 인간의 소명이 무엇인지 꿰뚫어 보았다. 또 이 소명에 충실히 응답하는데 모든 영혼들을 인도하기 위해 영적인 가르침들을 펴고자 했다. 저서들을 통해서는 사랑이 인간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소명이라는 사실과 사랑이 인간 실존에 총체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 또 사랑이 인간의 실존을 하느님을 향한 점진적인 여정으로 변모시킨다는 것을 드러냈다. 특히 「어둔 밤」 등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는 인간이 하느님을 올바르게 찾고 사랑하는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학자들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삶과 저서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너희가 참으로 살고자 한다면 십자가에서 도망치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1675년 교황 글레멘스 10세에 의해 시복됐으며 1726년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또 교황 비오 11세는 1926년 교회 학자로 선포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3년 스페인 언어권의 모든 시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