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라캉 자신을 넘어선 라캉

나뭇잎숨결 2020. 4. 8. 10:15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의 대표적 세미나 중 하나인 <세미나 11권 -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이 맹정현·이수련 번역으로 새물결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세미나 11권>은 한국어로 번역된 라캉의 첫번째 세미나이자, 한국에서 처음으로 완역된 라캉의 저작이기도 하다. 라캉 앞에 붙은 수식어, 프로이트 주의자, 라캉은 프로이트를 넘어 진정한 라캉이 태어나는 계기. 새로운 정신분석의 토대를 정립하는 것은 프로이트를 넘어서는 진정한 라캉이 탄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전에 라캉이 전념했던 작업은, 프로이트의 정신을 망각하면서 정신분석을 사회 적응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미국식 ‘자아심리학’을 비판하기 위해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주창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라캉은 프로이드를 넘고 드디어 이전의 자신도 넘게되는 역설에 역설을 낳는다.


자크 라캉은 1950년대 이후 수십 년간 지속된 프랑스 현대 사상의 르네상스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로서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그리고 그 이후 담론들에 핵심적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히지만, 그 자신은 어떠한 사상적 조류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 이론을 만들어낸 분석가․이론가이다. 평생 ‘프로이트주의자’를 자임했지만 단순히 프로이트 학설들을 연구·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 고유의 이론을 정립해, 정신분석의 토대를 재확립하고 더 나아가 그 가능성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신분석, 철학, 자연과학 등 수많은 영역을 넘나들면서 현란하게 펼쳐진 ?세미나?들은 ?에크리?와 함께 라캉의 대표적 작업으로 유명하다.


그동안 라캉 정신분석에서 자양분을 얻은 이론들, 그를 직접적 대상으로 삼은 연구들이 수없이 소개되었고, 정신분석뿐 아니라 문학 이론, 철학, 페미니즘,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히 그를 수용·언급했지만 정작 그의 ?세미나?를 한국에서 접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이제까지 우리는 라캉을 사유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라캉을 접했을 뿐 ‘라캉의 사유’를 직접 대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이 책의 발간으로 여태껏 소문으로만 전해져온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라캉의 텍스트는 ‘읽히지 않기 위해 쓴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지극히 난해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라캉의 텍스트를 한국어로 ‘읽힐 수 있게’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프랑스에서 정신분석을 공부하고 있는 옮긴이들의 정신분석에 대한 이해, 번역 작업에서의 성실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캉 세미나의 편자이자 그의 유고 상속자이기도 한 자크­알랭 밀레와의 협의하에 진행된 번역 작업에서는 원문을 오류 없이 옮기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쏟았다. 명료한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거부하는 언설 스타일, 타 언어권에서는 알아차리기 쉽지 않은 언어유희 속에 담겨 있는 풍부한 의미를 한국어로 담아내고자 했으며, 또 아직 확립되지 않은 용어들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용어 번역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여러 가지 번역어가 혼재하는 상황에서 단어들을 저울질해 가장 적합한 단어를 사용하려 노력했고, 기존에 소개된 번역어가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을 한 경우에는 새로운 번역어를 선정해 제시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새물결 출판사는 이 책의 옮긴이들과 함께 ?세미나 1권?을 포함해 라캉의 세미나(총 2...7권)들을 계속 발간할 예정이다.

‘대파문’, 그리고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는 라캉, 라캉의 세미나는 1953년 시작되어 그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행해졌으며, 매 해의 세미나를 제자이자 사위인 자크­알랭 밀레가 편집해 책으로 발간하고 있다. 출간되어야 할 권수는 27권이고 프랑스에서도 아직 모든 세미나가 출간되지 않고 계속 발간 중이다. 그렇다면 총 27권의 라캉 세미나들 중에서 ?세미나 11권?이 최초로 번역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1973년에 발간된 ?세미나 11권?은 프랑스에서도 라캉의 세미나 가운데 최초로 출간된 것으로서, 1963~1964년에 행한 열한번째 ‘구술’ 세미나를 책으로 옮긴 것이다. 이 시기는 라캉에게 ‘위기’의 시기이면서 동시에 ‘도약’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1953년에 입장 차이로 파리정신분석학회(SPP)를 떠나 동료들과 프랑스정신분석학회(SFP)를 설립한 라캉은 그 뒤로도 기존 정신분석의 ‘규칙’들을 준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SPP 및 국제정신분석학회(IPA)와 갈등을 빚었고, 결국 1963년에 IPA에서 축출당한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 있을 상황이 벌어지는데, 루이 알튀세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페르낭 브로델 등의 도움으로 고등사범학교(ENS)에서 세미나를 ‘재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라캉의 세미나가 정신과 의사나 정신분석가들을 상대로 했다면, ENS에 새로운 ‘기지’를 구축한 이 시기부터의 세미나에는 당대의 지식인들뿐 아니라 장차 프랑스 사상계를 주도하게 될 젊은 철학도들 ― 이후 라캉의 사위가 되는 인물이자 ?세미나? 시리즈의 편집자이며 라캉의 저술 저작권을 모두 소유한 자크­알랭 밀레도 이 세미나에서 라캉을 처음 만났다 ― 도 참여하게 된다. 이렇게 ENS에서 실시한 첫 세미나가 바로 그의 열한번째 세미나이며, 그 텍스트가 그의 세미나 가운데 최초로 문자로 확정되어 출간된 것이다. 말하자면 ?세미나 11권?은 라캉의 정신분석이 프랑스 정신분석학계뿐 아니라 프랑스 사상계 전반에 걸쳐 본격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에 위치한 세미나이다.


라캉은 ?세미나 11권?에서 IPA가 자신을 축출한 것을 ‘대파문’이라고 표현한다. 정신분석학계 내에서 발언권을 상실한 라캉은 이러한 대파문을 정신분석의 한계로 인식하고, 정신분석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정신분석은 종교와 어떻게 다른가? 정신분석은 과학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이 과학이 될 수 있다면, 기존의 과학과 어떻게 다른가? 라캉이 열한번째 세미나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진 것은, IPA로 대표되는 전통 정신분석이 점점 더 종교의례에 가까워지고, 또 아무런 성찰 없이 과학을 가장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 ?세미나 11권?은 기존 정신분석의 한계를 돌파하고 새로운 정신분석의 토대를 정립하려는 목적을 지닌 기념비적 저작이다.


다른 한편 ?세미나 11권?은 1950년대의 라캉과 일종의 ‘단절’을 시도하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외치면서 언어, 주체, 기표, 상징적인 것 등에 관심을 기울였던 그가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상징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들을 구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완전한 구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1950년대만 해도 라캉은 자신의 이론을 구축하면서 구조주의와 언어학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세미나 11권?에서 라캉은 ‘구조의 완결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더욱더 많은 노력을 할애하게 되고, 그러면서 ‘실재’와 ‘대상 a’ 개념을 정립하기 시작한다. 이런 의미에서 ?세미나 11권?은 라캉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무의식을 개념화하고, 상징적인 것 너머의 것을 이론적으로 구성하고자 한 중요한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1 프로이트를 넘어 진정한 라캉이 태어나는 계기. 새로운 정신분석의 토대를 정립하는 것은 프로이트를 넘어서는 진정한 라캉이 탄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전에 라캉이 전념했던 작업은, 프로이트의 정신을 망각하면서 정신분석을 사회 적응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미국식 ‘자아심리학’을 비판하기 위해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주창하는 것이었다. ?세미나 11권?에 이르러 라캉은 보다 급진적인 계획을 세운다. 이제 그는 기존 정신분석의 이러한 퇴행성이 프로이트 자신 안에 정신분석의 원죄로서 잠재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면 진정한 정신분석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를 넘어 정신분석의 토대를 재정립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미나 11권?에서 라캉은 프로이트의 욕망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프로이트를 넘어선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거세의 암초’를 넘어서지 못하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귀착했다고 보면서 그러한 암초를 넘어 정신분석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바로 ‘실재’와 ‘대상 a’ 개념이다. 전년도 세미나인 ?세미나 10권-불안?에서 이미 대상 a를 도출한 바 있는 라캉은 이제 대상 a를 중심축으로 삼아 ‘정신분석의 근본 개념들’을 전격 수정하게 된다.


생전에 라캉은 대상 a야말로 자신의 유일한 발명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진술의 이면에는 그가 어떻게 프로이트와 다른지가 함축되어 있다. 라캉은 현대 언어학 덕분에 프로이트로부터 ‘아버지의­이름’을 도출해냈지만, 어찌되었건 그것을 발명한 사람은 라캉이 아니라 프로이트이다. 라캉이 프로이트를 넘어서는 순간은 ‘아버지의­이름’을 복수화하고 자신의 관심을 대상 a로 돌리면서부터이다.

2 위상학적 방법으로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개념들’을 정초하려는 시도. ?세미나 11권?의 근본 과제는 대상 a를 중심으로 삼아 정신분석을 지탱하는 ‘네 가지 개념’을 위상학적 관점에서 정초짓는 것이다. 라캉이 제시하는 네 가지 개념은 ‘무의식’, ‘반복’, ‘충동’, ‘전이’이다. 라캉은 개념들을 개별적으로 다루지 않으며 그것들에 위상학적으로 접근한다. 그리고 ‘주체’와 ‘실재’라는 개념이 네 가지 근본 개념들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주체’란 시니피앙의 주체, 시니피앙에 의해 전복된 주체를 의미하며, ‘실재’란 대상 a를 의미한다. 시니피앙에 의해 전복된 주체가 상실된 주체라면, 대상 a는 그러한 상실된 주체를 지탱하고 결정짓는 리비도적 실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상실된 주체가 소외의 결과라면 대상 a는 분리의 결과이다. 라캉은 ‘소외’와 ‘분리’ 이론을 통해 네 가지 개념을 정립한다. 이는 라캉이 시니피앙에 근거하는 무의식적 주체와 욕망 이론을 충동과 환상 등으로 요약되는 리비도 이론과 접속시키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미나 11권>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이 책은 네 개의 부(part)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무의식’과 ‘반복’을 다루며, 2부에서는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유작인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출간과 관련해 ‘시관(視觀) 충동’과 그 충동의 대상인 ‘응시’를 다룬다. 3부에서는 다시 본래의 세미나 주제로 돌아와 ‘전이’와 ‘충동’을 다루며, 마지막으로 4부에서는 3부에서 제시된 전이 개념을 좀더 가다듬고, 그에 따라 정신분석의 종결에 대한 새로운 학설을 제시한다. 이러한 네 개의 부는 매우 유기적이며 위상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세미나 11권?의 핵심축은 3부와 4부에서 완성된 ‘소외’와 ‘분리’의 이론이다. 소외 개념은 주체 이전에 타자, 언어의 질서가 존재하며, 따라서 주체가 주체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질서 속에서의 소외를 경유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말을 하는 주체는 사물의 살해를 유발하는 언어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상실한다. 1950년대에 라캉이 개진한 테제들이 이러한 기조에 입각했다면, ?세미나 11권?과 그보다 앞선 논문인 「무의식의 위치」에서 그가 새롭게 제시하는 것이 바로 ‘분리’ 이론이다. 분리란 상징적 질서로 인해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주체가, 상징적 질서 속의 불가능성, 타자의 결여 등을 경유해 최소한의 정체성을 확보해나가는 과정이다. 소외가 빗금 친 주체(S)가 탄생하는 과정이라면, 분리는 대상 a가 연역되는 과정이다. 1950년대의 라캉이 소외 이론을 대표한다면, 분리 이론에 입각한 ?세미나 11권?에서 그는 대상 a를 중심으로 충동의 구조를 재정립하고 이와 동시에 새로운 전이 개념을 완성한다. 새로운 전이 개념의 완성은 정신분석의 종결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는데, 라캉은 세미나 결론부에서 ‘환상을 넘어서’를 정신분석이 도달하는 종착점으로 상정한다. 정신분석의 종결점을 환상 저편으로 상정하는 것은 프로이트가 거세의 암초에 부딪혀 ‘환상 이편’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인식에 기초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는 라캉이 프로이트를 넘어 라캉 자신으로 나아가는 중대한 계기이다.

3 프로이트뿐 아니라 라캉 자신을 넘어선 진정한 라캉이 탄생하는 과정 ?세미나 11권?이 한편으로 프로이트를 넘어서는 과정이라면, 다른 한편으로는 라캉이 라캉 자신을 넘어서는 계기이기도 하다. 기존의 라캉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테제로 압축될 수 있다면, 이제 라캉은 무의식에 대한 구조주의적 관점을 넘어 무의식의 역동적 측면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이때 무의식에 대한 새로운 이론은 그것을 실재와 접속시키는 것이다. 이제 무의식은 더이상 ‘은유’와 ‘환유’의 축에 의해 구성된 ‘타자의 담화’로 축소될 수 없게 된다. 1950년대 라캉이 인간의 무의식이 어떻게 해서 상징적 질서에 의해 결정되는지를 보여준다면, ?세미나 11권?의 새로움은 이 책이 이러한 무의식이 어떻게 상징적 질서의 불가능성, 즉 실재와 접속되어 있는지를 해명한다는 데 있다.


그의 ‘반복’ 개념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때 반복은 더이상 ‘시니피앙의 반복’이 아니라 ‘실패의 반복’이다. 반복은 시니피앙의 자율성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시니피앙이 어떻게 불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동일한 장면을 반복하고, 동일한 상황을 반복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운명으로 만들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상징을 통해 포섭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러한 상징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실재란 항상 같은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시니피앙의 연쇄가 오로지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라면, 실재는 그러한 연쇄에 의한 상징화가 실패하는 지점이다. 상징적인 것과 실재 사이에 간극이 있는 한 실패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반복이 실패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무의식과 실재가 접속되는 또다른 계기는 바로 성욕이다. 1950년대에는 충동을 타자의 요구와 접속시켜 해석해낸 라캉은 이제 충동을 대상 a와 접속시켜 새로운 충동 개념을 제시한다. 시니피앙의 연쇄와 실재 사이에 간극이 있다고 할 때, 라캉이 그러한 연쇄에 의해 표상되지 못하는 실재로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성욕이다. 성욕은 시니피앙에 의해 완전히 표상되지 않으며, 성욕의 수준에서는 주체와 타자 사이에 완벽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성욕은 동물의 성욕과 달리 유기체적인 욕구가 아니다. 인간의 욕구는 ‘상징적 질서’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구조화는 단순히 상징적 질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질서가 실패하는 지점을 중심으로 충동이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충동이 하나의 전체로 종합되지 않는 파편화된 ‘부분 충동’이라면, 이는 충동이 시니피앙의 연쇄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성적인 타자를 겨냥하지 못하고 대상 a 중심을 맴돌기 때문이다. 라캉은 충동을, 육체가 상징적 질서를 경유하면서 이루어진 원초적 상실의 잔여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왕복 운동으로 기술한다.
 

정신분석사가인 루디네스코(E. Roudinesco)프로이트주의에 훌륭한 철학적 구조를 제공한 세계 유일의 것이라고 자크 라캉(J. Lacan, 1901~1981)의 사상을 평가했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철학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라캉은 철학적 진리 추구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철학적 진리 추구의 활동을 하게끔 하는 마음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묻고자 했다. 그 결과 철학적 탐구심을 이끄는 욕망(désir)’주체의 비밀이, 그리고 보다 넓게는 우리 삶의 비밀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철학자는 어떤 욕망 때문에 탐구를 시작하는 걸까? 가령 소크라테스는 다이모니온의 목소리에 이끌려 철학을, 또는 진리 찾기를 수행했다고 고백한다. 라캉은 이 점에 대해 그의 사상의 골격을 보여주는 [세미나]11(맹정현/이수련 옮김)에서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소크라테스를 생각해봅시다. 소크라테스의 타협할 줄 모르는 순수성과 어디에도 소속되어있지 않은 특성은 서로 한 쌍을 이루는 것입니다. 거기에 매 순간 다이모니온의 목소리가 끼어듭니다. 소크라테스를 이끌고 있는 그 목소리가 소크라테스 자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소크라테스를 현실의 어떤 고정된 지식의 자리에도 안주하지 못하게 하는 저 목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내면의 어디서부터 목소리는 들려오는 것일까? 혹시 그것은 무의식 안에서 추구되는 대상’(라캉은 이를 대상a’라 칭했다)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철학의 역사가 무의식이 모습을 드러내는 형태인 환청에 이끌려 시작되었으며, 그것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를 마침내 죽음으로까지 이끌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의식하는 현실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타자(Autre)’가 지배하고 있다. 이 타자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언어라는 상징이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으며, 우리는 언어를 창안할 수는 없고 타자가 사용하는 언어의 질서에 복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때 언어적 질서란 문맹자와 같은 처음 태어난 아기에겐 의미(시니피에)’를 갖지 않는 음향적 외관, 시니피앙의 질서이다.(이렇게 라캉에게서 언어(시니피앙), 상징계, 타자라는 개념은 서로 상관적이며, 때로 교환 가능하다.)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무의식으로부터 들려오는 저 목소리를 타자의 언어가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추구하려 할 때 막상 주어지는 것은 목소리 자체가 아니라 목소리를 대체하는 어떤 시니피앙일 것이다. 이미 있던 시니피앙을 껍데기로 뒤집어 쓰고서 만 목소리는 등장한다고 해도 좋으리라.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방황한다. 마치 오디오광에게 오디오기기들이란 추구하는 소리의 불만족스러운 대체물일 뿐이며, 그의 인생은 한 기계에서 다른 기계로 소리를 찾아 계속 방황해야 하는 운명인 것처럼 말이다.


타자(Autre)’를 대표하는 것이 언어라는 상징이다. 철학자의 방황은, 현실 안의 어떤 학파가 내놓는 진리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학설에서 다른 학설로 참된 목소리를 찾아 옮겨 다닌다. 저 목소리 자체는 현실에서 조우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불가능한 것’, 현실에서 늘 결여된 것이다. 바로 이 불가능한 실재에 이끌리는 것이 철학을 움직이는 욕망이며, 보다 넓게는 어떤 식으로든 진리를 추구하는 우리의 삶 자체를 움직이는 욕망이다.


내가 바라보는 것은 사실 내가 진정으로 보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대체물에 불과하며, 우리의 욕망은 대체물에서 다른 대체물로 옮겨갈 뿐이다. 이렇게 욕망은 상징계 안에 빈 구멍처럼 결여된 실재때문에 생긴다. 이런 욕망의 주체가 발생하는 과정을 따라가 보자. 라캉은 리비도개념에서부터 출발한다. 리비도란 삶의 순수한 본능(pur instinct de vie)”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생식, 즉 양성(兩性)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것이며, 인간이 유성 생식의 주기를 따름으로 인해 상실하게 되는 부분이다. 즉 남, 여는 상징계 안의 기호로서만 유효할 뿐 애초에 리비도는 성이 없는 것이며, 이렇게 보자면 우리의 성적 정체성 역시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이 리비도는 인간 신체의 어떤 분화된 기관도 애초에 가지지 않으므로, 마치 아메바처럼, 또는 깨어진 계란처럼 흘러 다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가 그것은 우리 몸의 구멍에 달라붙어 충동(pulsion)’을 형성한다. 이렇게 해서 눈, , , 항문 등 성감대를 이루는 우리 몸의 구멍들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충동들대상a을 가지게 된다. 가령 시각적 충동은 대상a로서 응시(시선), 청각적 충동은 목소리를 가지게 된다. 이 충동들이, 애초에 설립되어 있는 질서의 세계, 상징계, 문화의 장에 들어설 때 대상a는 상징계 안에 잃어버린 대상으로 기입된다. 그리고 상징계 안에 생긴 대상a의 결여를 메우려는 힘으로서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이 모든 과정은 마치 신화처럼, 시간적 추이를 따르는 이야기처럼 쓰여졌지만, 시간적 형성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의 문제이다.)

 

소크라테스의 경우에서 보았던 목소리라는 청각의 영역뿐 아니라, ‘응시라는 시각적인 영역에서도 욕망은 결여된 것을 메우려고 안간힘을 쓴다. “사랑에 빠진 내가 응시를 요구할 때 근본적으로 충족되지 않고 항상 결여되는 것이 있다면, 이는 너는 절대로 내가 너를 보고 있는 곳에서 나를 응시하지 않기때문이지요. 역으로, ‘내가 바라보는 것은 결코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바라보는 것은 사실 내가 진정으로 보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대체물에 불과하며, 우리의 욕망은 대체물에서 다른 대체물로 옮겨갈 뿐이다. 잃어버린 대상의 빈 구멍을 메우는 대체물은 그저 대체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만족을 모르는 까닭이다. 가령 보려는 욕망을 지닌 눈이 근본적으로 탐욕적임을 지적하며 라캉은 이렇게 말한다. “사악한 눈의 기능이 보편적인 반면 선한 눈, 은혜를 베푸는 눈에 대한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놀랄 만한 사실입니다.” 라캉은 심지어 [성서]에서도 선한 눈은 단 한군데서도 찾을 수 없었으며, 사악한 눈만이 있었다고 한다. 베푸는 눈 또는 선한 눈의 사례는 없는지 찾아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가령 임철우의 소설 [아버지의 땅](1984)에 나오는 눈매가 고운아버지의 눈은 어떤가?


무엇보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정의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상징계 자체가 타자의 영역이므로, 상징계 안의 욕망은 타자가 지정해 주는 것에 대한 욕망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욕망을 들여다보라. 선호하는 직업, 선호하는 배우자 등등은 모두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타자들이 욕망의 대상으로 지정해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욕망의 주체는 타자의 장에 종속된 상태로서만 주체일 수 있다.” 우리는 욕망의 대상을 발명하지 않고, 타자로부터 지정 받는다. 그리고 이 점은 [정신현상학](1807)에서 헤겔이 이미 다음과 같이 통찰하고 있던 바였다. “사실상 욕망의 본질은 자기의식이 아닌 타자에게 안겨지는 바,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자기의식에게 욕망의 진상이 밝혀진다.” 이렇기에 라캉은 오늘날의 헤겔이라 불리기도 한다.

 

아울러 주체타자의 장에 귀속한다면, 데카르트의 코기토 같은 주체,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생각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같은, 반성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주체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반성은 거울에 비추어보듯 자신을 대상화하는 이자적 관계이다. 그리고 반성하는 자는 반성된 형태로 자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즉 생각하는 자는 생각하는 것(res cogitans)’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생각함과 존재함이 일치하는 동일성을 지닌 이 주체의 지위는 상상된 자아’, ‘상상을 통해 오인된 자아이다. 왜냐하면 주체의 사유란 타자의 장인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코기토가 담긴 데카르트의 주요 저작 [방법서설]               

 

즉 주체는 내가 아닌 곳, 즉 타자의 땅에서 생각하고 타자의 땅인 이 상징계에서 소외된 무의식으로서 존재한다. 이것이 라캉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정식이 의미하는 바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철학에 대한 라캉의 기여는 자기반성이라는 이자적 관계(나와 자기 자신)에 의존하는 데카르트적 자아가 상상적인 것임을 보이고, 주체의 참다운 위치는, 제삼자에 해당하는 객관적인 질서(언어적 질서)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밝힌 점이다.

 

상징계 안에서 욕망의 주체는 소외분리라는 근본적인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욕망이 상징계 안에서 잃어버린 것의 대체물만을 움켜쥐고 불만스러워하는 까닭은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면, 욕망은 늘 교집합을 가지는 양자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 받기 때문이다. 가령 자유냐, 목숨이냐를 선택해야 한다고 해보자. 노예와 같은 인간은 목숨을 선택할 텐데, 이 때 목숨은 교집합에 해당하는 자유를 상실한 목숨이 된다. 즉 욕망은 자유로부터 소외된 목숨을 성취할 뿐이다. 주인은 자유를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자유의 성취를 위해 죽어간 사람들이 알려주듯, 이 선택에서 주인의 욕망은 목숨(교집합)이 떨어져 나간 자유를 얻을 것이다. , 그는 자유인으로서 죽는다. (라캉에게 끼친 헤겔의 영감은 매우 풍부한 것인데, 그는 이런 소외의 논리 역시 프랑스 혁명에 관한 [정신현상학]의 다음과 같은 묘사에서 착안하고 있다. “공동체의 자유가 이루어낼 유일한 작업과 행위란 죽음에서나 찾아질 수 있다.”)

공주병에 걸린 이의 환상은, 남자들의 눈에서 결여된 공백을 발견하고 그 결여를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으로 채워 넣는 데서 완성된다.

 

이처럼 소외를 겪는 욕망의 주체는 상징계를 지배하는 타자와의 분리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이 분리는 주체가 자신 뿐 아니라 타자에게도 결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된다. 타자의 영역인 상징계는 언어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 언어는 주체에게 이런 저런 지시를 해올 것이다. 그런데 주체는 아주 어려서부터 이 타자의 언어에 대해 ?’라고 질문한다. 엄마가 원하는 게 뭐야, 라는 질문에서부터 애인이 원하는 것에 대한 의혹을 거쳐 심지어 경전의 언어를 앞에 두고 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도 의혹에 빠진다. 상징계가 완벽했다면, 즉 타자가 만들어낸 언어적 질서가 완벽했다면 우리는 결코 의혹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의혹을 가질 새 없이 타자의 언어가 답을 마련해놓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이 사태를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오가 의혹에 빠지는 것은 매트릭스가 만든 세계 안에 종종 결함이 드러나기 때문이 아닌가? (모르피우스의 말을 상기하라.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끼지. 그게 뭔지 모르지만.”)

 

 

우리의 라는 의혹은 결국 타자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이냐 또는 타자가 결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관한 의혹이다. 타자의 이 결여란 본질적인 것이다. 가령 신앙인이 신의 뜻에 대해 의혹에 휩싸이는 것이, 경전의 수정 가능한 결함 때문인가? 오히려 애초에 경전은 그런 의혹을 허락하는 결여를 본성상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상징계 또는 타자의 결여 역시 그런 것이기에 그 결여는 주체가 어떤 실재물을 제공해서 매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본래적 결여는 오히려 주체가 갈망하는 것으로 채워지는데 이를 환상(fantasme)’이라 한다. 예를 들어 공주병에 걸린 이의 환상은, 남자들의 눈에서 결여된 공백을 발견하고 그 결여를 자신이 갈망하는 것, 즉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으로 채워 넣는 데서 완성된다. 이렇게 보자면 환상이란 주체의 욕망을 지탱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주체는 항상 이런 환상의 보호 속에 살고 있다.

이처럼 라캉의 사상은 잃어버린 원초적 대상(대상a)에 대한 그리움으로부터 어떻게 인간의 욕망이 탄생하는지를 해명한다. 잃어버린 이데아를 찾아 헤매는 일로 현세의 삶을 이해한 플라톤 이래, 삶의 과정을 상실한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본 것은 서양 철학이 가진 한 근본적 경향이었으며, 라캉 역시 이 경향의 넓은 영향 아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말년인 1970년대 라캉은 상징계 안에서 결여를 겪는 욕망 보다는, 상징계 안에선 출현이 불가능한 실재와 어떻게 조우해서 즐거움(주이상스, jouissance)을 얻을 수 있는지에 몰두한다. 이는 프로이트가 [새로운 정신분석강의]에서 말한 정신분석 식 계몽의 표어 그것이 있던 곳에 내가 있어야 한다(Wo es war, soll Ich werden)’를 라캉이 오랜 성찰을 거쳐 창조적으로 수용한 결과다. “충동이 있는 실재계의 차원에 주체가 자리 잡아야 한다.” 즉 타자의 질서인 상징적 질서내지 문화의 질서 안에서 욕망을 길들이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문화를 통해 교화되지 않는,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의 즐거움을 주체에게 찾아주는 것이 정신분석의 사명이 된다. 즐거움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문화의 교화 바깥에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질서 속에서 누리는 통상적 즐거움 이상의 전복성을 지닌 보물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며 결핍에서 시작된다. 욕망은 본질적으로 충족 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며 요구한 것과 충족된 것 사이의 간극이다. 소비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욕망은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닌 외부로부터 주입되며 타인의 욕망을 맹목적으로 따라하려는 성향이 있다. 발레리나로써 성공하고 싶은 소녀의 근원에는 어머니의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무대에서 성공적으로 잘 해내야 한다는 감독의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발레리나 소녀의 욕망은 애초부터 존재 했었던 것인가?

타자의 욕망없이는 나의 욕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다양한 욕망은 무의식 말(언어)를 통해서 나타난다.무의식은 헛된 환상이나 상상이 아니라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며 욕망하지 않는 삶은 곧 죽음이다.
그러나 욕망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지는 않는다. 최초의 욕망은 더 많은 욕망을 지향하고 욕망이 충족되면 또 다른 욕망을 지향하며 빈자리를 채우려 발버둥 친다.

2.상상계 (6~18개월의 유아기)


아기는 거울을 보면서 처음에는 자기로 생각하지 않다가 차츰 자기 자신과 동일시 한다. 6~18개월 사이에 자아가 형성되나 착각과 기만을 하며 사물의 구분이나 감각에 대한 조정에 어려움을 느낀다. 통제할 수 없는 몸과 거울 속에 비친 완전한 몸과의 괴리와 간극에 불안감이 발생하며 최초의 자아분열이 일어난다.상상계의 자아는 자기 중심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상상계에만 머무르면 자아와 자신의 신체이미지에 대한 애착과 병적인 자기애를 가진 나르시시즘에 빠질 수 있다.

상상계의 자아는 자기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허위 독특성 편파에 빠지며 선입견, 고정관념, 잘못된 인과관계설정등 수많은 오류와 착각에 지배당한다. 발달과정에서 배제할 수 없는 불가피한 영역이며 평생 주체를 지배하는 심리적 구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아가 우릴 속여도 자아를 벗어나서 완전히 진리만을 바라보는 주체가 되기에는 구조적인 불가능이 있다. 상상계에 오래머물면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하며 주관적인 착각과 자기기만에 빠지기 쉬우며 내가 바라본 세상과 내가 믿는 신념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3.상징계


아이가 말을 배움으로써 언어의 세계로 들어간다. 언어구조에 기초해 구성된 모든 상징 문화 규칙의 영역에 진입하여 주체가 태어나는 과정이 된다. 자신을 욕망의 주체로 만들어 가는 단계이며 언어로 대표되는 사회적 질서나 규칙 타자와의 관계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곧 욕망은 타자의 언어이다. 그 중에서도 인정욕망은 남의 인정을 구하는 욕망으로 라캉은 인정욕망이 인간이 갖고있는 욕망의 본질이라고 봤다. 말을 통해 정해진 규칙을 받아들이고 주체의 생각전략이 드러난다. 말은 나와 주체의 관계와 역할을 부여해 주는 질서이다.

상징계는 언어자체가 아닌 언어적 구조를 살펴봐야 한다. 언어는 굉장히 자율적이고 우월하며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나를 통해 전달 되는 것이다. 언어의 규칙을 바꾸면 타자와 소통이 불가능하며 언어의 사용은 선택이 아닌 강요이다. 언어의 세계에서 벗어난 삶을 지속 할 수는 없으며 언어는 주체로써 우리를 구성하고 표현하고 욕망을 지속시키거나 소외시키는 도구이다. 다만 언어는 유아론적(상상계) 소외에서 벗어나게 하지만 언어에 의한 이차 소외가 발생한다.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우리존재는 주체의 욕망을 인정해주는 타자에 의해서 존재의 위치와 의미가 부여 될때 의미를 가진다.

4.실재계


언어를 통한 재현이 불가능하며 언어행위와 언어체계 밖에 머물러 있는 잔여영역이다. 상상계와 상징계의 경계선이면서 둘 다 포괄하는 영역이다. 상징계에 의해 배제되지만 계속 상징계를 이어주는 구성물이며 욕망을 지속시키는 원인이다. 전체를 다 담아낼 수 없는 원초적인 차원이며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징화를 요구하는 근거이며 욕망충족 불가능성의 근거이다.

5.욕구(NEEDS) 요구(DEMAND) 욕망(DESIRE)

ㄱ)욕구(NEEDS)


무엇을 얻고자 하거나 무슨일을 하고자 하는 바램이다. 생물학적 존재인 인간의 본성이다. 항상 대상을 필요로 하며 의존적이고 자연적이다.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생물학적인 충동이며 필요가 충족되면 해소된다. 욕구는 욕망의 출발점이지 욕망이 아니다.욕구는 제한적이고 쉽게 만족이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욕구를 문화의 형태로 언어의 형태로 표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ㄴ)요구(DEMAND)


어떠한 것을 필요하다고 바라거나 요청하는 것이다.욕구가 언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인간에게 자연적인 욕구가 있지만 충족시키기 위해서 타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배고픈 아이의 욕구를 엄마가 채워줌으로써 욕구는 해소된다. 이 과정에서 욕구를 언어로써 표현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요구가 된다. 그러므로 요구는 타자를 전제로 한다. 타자에게 전달되지 못하면 채울 수 없으며 요구가 커질 수록 틈을 느낀다.

대상에 대한 요구가 반복되면서 무제약적 사랑에 대한 요구로 변환된다.욕구와 다르게 제약이 없는 무제약적 요구를 무제한으로 채워주는 것은 불가능하다.요구가 지속되고 충족될 수록 결핍은 더 심해진다. 욕구의 궁극적 목적은 무제약적 사랑이며 요구와 욕구의 불일치는 언어적 존재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욕구의 충족후 요구는 점점 커진다.

ㄷ)욕망(DESIRE)


부족한 것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다. 욕구와 요구사이의 불일치에서 욕망이 발생한다.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낳고 끝내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을 남긴다. 인간은 태어날 때 부터 근본적 결핍인 욕망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 불일치와 결핍에 욕망이 깃들며 욕망은 만족에 대한 욕구도 아니고 사랑의 요구도 아니며 요구로부터 욕구를 뺀 차이이다.

욕망은 반복과 집착을 하게 하며 타자의 언어가 욕망의 원인이 되게 한다. 욕망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 같지만 사실은 타자가 있기 때문에 욕망이 실현되고 타자의 욕망이 나의 욕망을 가능하게 해주지만 타자의 욕망이 커지면 커질 수록 주체의 욕망은 사라진다. 타자의 언어로 표현해야 상징계에서 존재가능하며 언어로 표현되지 못 할 때 결핍과 비존재성을 느낀다. 인간이 불안해 하는 이유이며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 대한 환상이다.

욕망이 지향하는 것은 존재자체이며 존재를 대신 할 수 없는 다른 대상이 아니다. 현대소비사회는 존재가 아닌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욕망으로 변질 되었다.욕망은 내가 아니라 타인의 욕망에서 시작되었으며 타자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타자의 욕망을 내 욕망으로 믿는 것은 소외의 전형적인 예이며 타자의 욕망을 좇는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욕망에는 절대성이 없으며 타자의 욕망이 나의 욕망이 될 순 없다. 타자의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 자신의 욕망은 소멸이 된다. 타자의 욕망은 욕망의 원인이면서도 또한 욕망을 소외시키는 이중성을 가지며 바로 이부분이 욕망의 윤리와 진리가 만나는 지점이다.

6.욕망의 윤리


욕망이 존재회복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진리의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소비사회는 거짓욕망을 기만적으로 조장한다.
미디어를 통해서 모델들을 통해서 소비하게 만들고 소비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할 것을 요구한다. 현대사회는 물신주의를 조장하며 마치 이것이 욕망의 본모습인 것처럼 우리를 기만하게 만든다. 상상계적인 유아기적인 미망 소외 오인과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계속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자신의 욕망이라고 착각하면서 마침내 죽음에 이를지도 모르게 된다.

타인의 인정은 욕망을 어느정도 유지하게 해주고 만들어 주는 조건이지만 지나치게 타인의 인정에 집착하다 보면
타인의 욕망에 휘들리게 될 우려가 있다. 지나친 타자의 욕망은 인간을 속박하며 불안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욕망의 윤리는 욕망의 태도와 연관이 되며 존재회복에 대한 열정이며 욕망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해 존재의 의미를 되찿아야 한다. 순수욕망은 정념적인 감각적 경험적 요소도 포함하지 않고 그 자신에게 존재하는 자립적 자발적 성질이다.
이러한 순수욕망과 타자의 욕망이 공존 할 수 있는가?

타자의 욕망에 매달리는 인정은 욕망의 본질이 아니다. 인정의 욕망이 커짐에 따라 소외감도 커지기 때문이다. 사회와 언어와 타자가 내 존재의 전체를 대변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회를 버리고 존재를 회복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타자의 욕망을 통해 지향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타자의 욕망에 머무르면 안되며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심리(명예 칭찬 도덕성)가 숨겨져 있는 진짜 욕망의 본성은 아니다. 이러한 기만적인 것들을 걷어내면서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소외되는 부분을 찿아나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개개인의 욕망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며 극도의 주관주의로 받아들이거나 타자에 대한 인정이론으로 해석하면 곤란한다. 욕망은 존재의 회복을 지향해야하며 곧 나의 삶을 회복해 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