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유발 하라리

나뭇잎숨결 2020. 3. 25. 11:56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기술 혁명은 앞으로 수십 년 내에 탄력을 받을 것이고, 그로 인해 인류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가장 힘든 시련에 직면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과정에서 인류의 충성을 얻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 이야기는 무엇보다 정보기술과 생명기술 분야의 쌍둥이 혁명에 대처할 능력이 있는지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이슬람 혹은 다른 어떤 참신한 신조가 2050년 세계를 건설하려 한다면,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알고리즘과 생명공학을 이해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유의미한 새로운 서사로 통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_1. 환멸

21세기의 전례 없는 기술적, 경제적 파괴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는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모델을 최대한 빨리 개발해야 한다. 이런 모델들은 일자리보다 인간을 보호한다는 원칙을 따라야 한다. 많은 일자리들이 따분한 고역이고 구할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아무도 현금출납원을 평생의 꿈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고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을 보호하는 일이다.
_2. 일

컴퓨터 알고리즘은 자연선택에 의해 만들어지지도 않았으며, 감정이며 직감 같은 것도 없다. 따라서 위기의 순간에도 윤리적 지침을 인간보다 더 잘 따를 수 있을 것이다. 단 우리가 윤리를 정확한 숫자와 통계로 코드화하는 방법을 찾아냈을 때만 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칸트와 밀과 롤스에게 코드를 작성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이들이 안락한 연구실에서 신중하게 자율주행 차량을 프로그래밍 한다면, 차량은 고속도로에서 주행할 때 입력된 도덕률을 그대로 따를 것이다. 사실상 모든 차들이 미하엘 슈마허와 임마누엘 칸트를 합친 운전자에 의해 조종되는 상황을 맞을 것이다.
_3. 자유

두 과정이 합쳐지면, 즉 AI의 부상과 생명공학이 결합되면 인류는 소규모의 슈퍼휴먼 계층과 쓸모없는 호모 사피엔스 대중의 하위 계층으로 양분될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대중이 경제적 중요성과 정치적 힘을 잃으면서 국가는 이들의 건강과 교육, 복지에 투자할 동기를 적어도 일부는 잃을 수 있다. 쓸모없어지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그럴 경우 대중의 미래는 소수 엘리트의 선의에 좌우될 것이다.
그 결과 세계화는 세계의 통일로 가기보다 실제로는 ‘종의 분화’로 귀결될 수도 있다. 인류가 다양한 생물학적 계층 혹은 심지어 다양한 종으로 분화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세계화는 수평적으로는 세계를 통일하고 국경을 없애지만, 동시에 수직적으로는 인류를 분할할 것이다.
_4. 평등

이전 세기에 민족 정체성이 형성된 것은 인류가 지역 부족 범위를 훨씬 넘어가는 문제와 기회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오직 전국적인 협력만이 해결을 기대할 수 있었다. 21세기에 이르러 국가들은 과거 부족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 개별 국가는 지금 시대의 가장 중요한 도전을 해결하기에 올바른 틀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지구적 정체성이 필요하다. 국...
가 단위의 제도는 전례 없는 일련의 지구적 곤경을 다룰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전 지구 차원의 생태계와 경제와 과학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민족 단위의 정치에 고착돼 있다. 이런 부조화 때문에 정치 체제가 우리의 주요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효과적인 정치를 위해 우리는 생태계와 경제와 과학의 행진을 탈지구화하거나 우리의 정치를 지구화해야 한다. 생태계와 과학의 행진을 탈지구화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경제의 탈지구화의 비용은 십중팔구 많이 들 것이기 때문에, 유일한 현실적 해법은 정치를 지구화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세계 정부’를 수립하자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의심스럽고 비현실적인 비전이다. 그보다는 한 나라나 심지어 도시 단위의 정치가 작동하는 과정에서도 전 지구 차원의 문제와 이익에 좀 더 무게가 실려야 한다는 뜻이다. 민족주의 감정은 별 도움이 안 될 가능성이 높다.
_7. 민족주의

이런 두려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국가는 결국 테러 극장에 자신들의 안보 극장으로 대응한다. 사실 테러에 맞서는 가장 효율적인 대응법은 우수한 정보와 비밀 작전을 동원해 테러를 지원하는 금융망을 차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활동은 시민이 티브이로 볼 수가 없다. 이미 시민들은 테러범들이 세계무역센터를 무너뜨리는 드라마를 관람한 상태다. 국가로서는 그에 못지않게 극적인, 화염이 훨씬 더 짙은 대테러 드라마를 상영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 국가는 조용하고 효율성 있게 행동하는 대신 위력적인 대테러 작전의 폭풍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 테러범은 자신의 염원을 달성하는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_10. 테러리즘

독단적이지 않은 세속주의 운동은 상대적으로 겸손한 약속들을 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알기 때문에 작고 점진적인 변화를 일으키길 희망한다. 최저임금을 몇 달러라도 올리고 아동 사망률을 몇 퍼센트라도 낮추려는 식이다. 반면, 독단적인 이데올로기는 자기 확신이 지나친 나머지 습관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이루겠다고 서약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의 지도자는 너무나 거침없이 ‘영원’과 ‘순수’, ‘구원’에 관해 이야기한다. 마치 어떤 법률을 시행하거나, 어떤 사원을 짓거나, 어떤 영토를 정복하면 일거에 전 세계를 구할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_14. 세속주의

지금 세계에서 불의의 대부분은 개인의 선입견보다는 대규모의 구조적 편향에서 나온다. 하지만 우리 수렵·채집인의 뇌는 그런 구조적 편향을 감지하도록 진화하지는 않았다. 그런 편향의 적어도 일부에는 우리 모두가 함께 연루돼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발견할 시간과 에너지가 없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나 자신이 그 교훈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글로벌 이슈를 논할 때 나는 늘 다양한 소외 집단들보다 글로벌 엘리트들의 관점을 우선시하는 위험에 빠진다. 글로벌 엘리트들은 대화를 주도한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관점은 놓칠 수가 없다. 반면에 소외된 집단들은 대개 말이 없다. 그러다 보면 그들의 존재마저 잊기 쉽다. 이 모든 게 고의적인 악의가 아니라 순전한 무지에서 생기는 일이다.
_16. 정의

믿을 만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만큼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 만약 뉴스를 공짜로 얻는다면 당신은 상품이기 쉽다. 어떤 수상한 억만장자가 당신에게 이런 거래를 제시했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당신에게 매월 30달러를 주겠다. 그 대신 당신은 내가 바라는 정치적, 상업적 편견을 당신 머릿속에 심을 수 있도록, 매일 한 시간 당신을 세뇌할 수 있게 해달라.” 이런 거래를 받아들이겠는가? 제정신이라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자 수상한 억만장자는 조금 다른 거래를 제안한다. “매일 한 시간 내가 당신을 세뇌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 그 대신 이 서비스의 비용은 당신에게 물리지 않겠다.” 그러자 갑자기 수억 명의 사람들이 솔깃해 한다. 부디 그런 사례를 따라가지 않기를 바란다.
_17. 탈진실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내디뎌야 할 결정적인 걸음은, ‘자아’야말로 우리 정신의 복잡한 메커니즘이 끊임없이 지어내고 업데이트하고 재작성하는 허구적 이야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정신 안에 스토리텔러가 있어서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바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한다. 마치 정부의 언론 담당자가 최신의 정치 파동을 설명해주는 것처럼, 내 안의 내레이터는 반복해서 상황을 오해하고, 아주 드물게는 잘못을 인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정부가 국기와 상징물과 행진으로 국가의 신화를 구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안의 선전 기계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기억들과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트라우마들로 나만의 신화를 구축한다. 하지만 이 역시 진실과는 닮은 것이 별로 없을 때가 많다.
_20. 의미

 

 

역사의 끝은 연기되었다.

 

하찮은 정보들이 범람하는 세상에서는 명료성이 힘이다.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인류의 미래에 관한 논쟁에 참여할 수 있지만 명료한 전망을 유지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심지어 그런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지, 핵심 질문은 무엇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할 때가 많다.

우리같은 수십억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일일이 조사해볼 여유가 거의 없다.

그보다 다급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출근을 해야 하고 아이를 돌봐야 하고 나이든 부모도 보살펴야 한다.

 

 

불행히도, 역사에는 에누리가 없다.

 

 

당신이 아이를 먹이고 입히느라 너무 바빠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인류의 미래가 결정된다 해도, 당신과

아이들이 그 결과에서 면제되지는 않는다.

이건 아주 부당하다. 하지만 누가 역사는 공정하다고 했던가?

 

역사가로서, 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명료함을 추구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는 있다.

그럼으로써 지구촌의 경기장을 평평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아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우리 종의 미래에 관한 토론에 참여할 힘을 얻는다면 내 소임은 다한

것이다.

 

내 첫 책 《사피엔스》 는 인류의 과거를 개관하면서 하찮은 유인원이 어떻게 지구 행성의 지배자가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두 번째 책 《호모 데우스》 에서는 생명의 장기적인 미래를 탐사하면서, 어떻게 인간이 결국에는 신이 될 수

있을지, 지능과 의식의 최종 운명은 무엇이 될지 생각해봤다.

 

이 책에서는 지금 여기의 문제에 주목해보려고 한다. 초점은 시사 현안과 인간 사회가 당면한 미래에 있다.

바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최대의 도전과 선택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

우리 아이들에게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물론, 70억 사람에게는 70억 가지의 의제가 있다.

이미 말했듯이, 큰 그림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 해도 상대적으로 드문 사치다.

뭄바이 빈민촌에서 두 아이를 기르느라 분투하는 홀어머니의 관심사는 다음 끼니다.

지중해 한가운데 떠 있는 배 안의 난민들은 수평선 위로 뭍의 신호를 찾느라 혈안이다.

런던의 초만원 병원에서 죽어가는 남성은 한 번 더 숨을 쉬기 위해 남은 힘을 다 짜낸다.

 

이들 모두에게는 눈앞의 일들이 지구온난화라든가 자유민주주의의 위기 같은 문제보다 훨씬 다급하다.

이런 사람들 모두에게 정의를 베풀 수 있는 책은 없다.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줄 교훈이 내게 있는 것도 아니다.

나도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 책에서 내가 말하는 의제는 전 지구 차원의 것이다. 전 세계 사회를 규정하고 지구 전체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은 주요 힘들을 살펴본다.

기후변화는 생사의 다급함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로서는 관심 밖의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로 인해 뭄바이 빈민촌마저 살 수 없는 곳이 되고, 지중해에는 엄청난 새로운 난민 물결이

밀려들고, 보건 분야에는 세계적 위기가 닥칠 수 있다.

 

현실은 수많은 가닥의 실로 직조된다.

이 책은 우리가 지구 차원에서 당면한 곤경의 상이한 면들을 다루려고 한다.

모든 문제를 망라했다고는 할 수 없다.

 

《사피엔스》 , 《호모 데우스》 와는 달리 이 책은 역사적 서사를 의도하고 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훈의 선집이라고 하겠다. 교훈이라고 해서 단순명료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독자 스스로 더 생각해보도록 자극하고, 우리 시대의 주요 대화중 일부에 참여하도록 돕는 것이 목표다.

 

이 책은 실제로 그동안 대중과 나눈 대화 속에서 집필되었다.

많은 장이 독자와 언론인, 동료 들이 내게 했던 질문들에 답을 하면서 작성되었다.

일부 글의 초고는 이미 다른 형태로 출간되기도 했다.

그 덕분에 피드백을 받고 나의 주장을 다듬을 기회가 있었다.

 

어떤 절은 기술에 초점을 맞췄고, 어떤 절은 정치, 어떤 절은 종교, 어떤 절은 예술에 초점을 맞췄다.

어떤 장은 인간의 지혜를 예찬하고, 다른 장에서는 인간 어리석음의 결정적 역할을 강조한다.

하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은 동일하다. 지금 세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 사건들의 심층

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은 무엇을 뜻하는가?

가짜 뉴스가 전염처럼 번지는 데 대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유민주주의는 왜 위기에 빠졌나?

신은 부활하고 있나? 새로운 세계대전이 다가오나?

서구와 중국, 이슬람 문명 중 어느 것이 세계를 지배할까?

유럽은 이민자에게 문을 열어두어야 하나?

민족주의는 불평등과 기후변화 문제를 풀 수 있을까? 테러리즘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은 지구 차원의 관점에서 썼지만 개인의 차원에도 소홀하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우리 시대의 거대한 혁명들과 개인의 내적인 삶이 연결돼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예컨대, 테러리즘은 우리 마음 깊이 자리잡은 공포의 단추를 누르고, 수백만 개인의 사적인 상상을 납치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마찬가지로,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도 의회나 투표소뿐만 아니라 우리 뇌의 뉴런(신경세포)과 시냅스(접합부)

에서도 함께 벌어진다.

진부한 말이지만 모든 사적인 것은 정치적이다.

하지만 과학자와 기업, 정부 들이 인간 두뇌를 해킹하는 법을 학습하는 시대가 되면서, 이 뻔한 말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불길하다.

따라서 이 책은 전체 사회는 물론 개개인의 행동까지 두루 관찰한다.

 

지구촌 세계는 우리의 사적인 행동과 도덕에도 유례없는 압력을 행사한다.

우리 각자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숱한 거미줄 안에 포획돼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미동까지도 아주 먼 목적지까지 전송한다.

 

우리의 일상사가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 동물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어떤 사적인 동작이 예기치 않게 전

세계를 불지를 수 있다.

아랍의 봄에 불을 붙인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자기희생이라든가, 자신의 성추행 피해 사연을 공유해 미투

운동을 촉발한 여성들이 그런 사례다.

 

이러한 우리 사생활의 지구적 차원을 감안할 때, 우리가 갖고 있는 종교적, 정치적 편견과 인종적, 젠더적

특권, 그리고 제도적 억압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모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내 삶의 지평을 훨씬 넘어 확장되면서, 인간의 통제에서도 완전히 벗어나고 있고,

모든 신과 이데올로기마저 의심하는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확실한 윤리적 기반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책에서는 먼저 현재 우리가 처한 정치적, 기술적 곤경에 대해 살펴본다.

20세기가 끝날 무렵 파시즘,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간의 거대한 이념 전쟁은 자유주의의 압도적 승리로 귀결

되는 듯 보였다.

민주적 정치와 인권, 그리고 시장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정복하도록 예정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역사는 예상 밖의 선회를 했고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붕괴한 후 지금 자유주의는 곤경에

처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가?

 

이 질문이 특히 통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정보기술과 생명기술 분야의 쌍둥이 혁명이 지금껏 인류가 맞닥뜨

려온 최대 과제를 던지는 시점에서 자유주의가 신뢰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을 합친 힘은 조만간 수십억의 사람들을 고용 시장에서 밀어내고 자유와 평등까지 위협

할 수 있다.

빅 데이터 알고리즘은 모든 권력이 소수 엘리트의 수중에 집중되는 디지털 독재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럴 경우 대다수 사람들은 착취로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나쁜 지경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무관함 (irrelevance, 사회에서 관련성이 사라지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한다는 뜻 — 옮긴이)이다.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의 융합에 관해서는 이미 전작 《호모 데우스》 에서 상세히 논했다.

하지만 그 책은 장기적인 전망 — 수 세기, 심지어 수천 년의 관점 — 에 초점을 맞춘 반면, 이 책은 당면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위기에 집중한다.

이 책에서 관심은 비유기적 생명의 창조 여부보다는 복지 국가, 특히 유럽연합과 같은 제도에 닥친 위협에 있다.

 

이 책에서 신기술이 야기할 모든 영향을 다룰 생각은 없다. 특히 오늘날 기술은 많은 놀라운 약속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 나의 의도는 주로 그것이 초래할 위협과 위험을 조명하는 것이다.

 

기술 혁명을 주도하는 기업들과 사업가들은 자신들이 만든 것을 예찬하는 노래를 부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사회학자나 철학자 그리고 나 같은 역사학자가 할 일이란 경고음을 내고 치명적인 잘못을 유발할 모든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먼저 우리가 직면한 도전들을 개관한 후에 2부에서는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반응들을 폭넓게 살펴본다.

과연 페이스북 기술자들이 AI를 이용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수호할 지구촌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그 대안은 세계화의 과정을 되돌리고 민족국가가 힘을 회복하는 것일까?

혹시 그보다 더 뒤로 돌아가 고대 종교적 전통의 원천에서 희망과 지혜를 길어 와야 하는 것은 아닐까?

 

3부에서는 비록 기술적 도전들은 유례없이 크고, 정치적 불일치는 극심하다 해도, 계속해서 우리의 두려움을

조절하고 자신의 견해에 대해 조금씩만 겸허해진다면 인류가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테러리즘의 위협과 전 지구적 전쟁의 위험, 그리고 그런 분쟁을 촉발하는 편견과 증오의 문제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살펴본다.

 

4부는 탈진실 post-truth개념이 어느 정도까지 세계 개발을 이해할 수 있고 정의와 잘못을 구분할 수 있는지

묻는다.

호모 사피엔스는 자신이 만든 세계를 이해할 능력이 있는가?

현실과 허구를 구분할 분명한 경계가 있을까?

 

마지막 5부에서 나는 상이한 실가닥들을 한데 모아 이 혼돈의 시대에 처한 우리의 삶을 보다 포괄적으로 살펴

본다.

바야흐로 옛 이야기는 붕괴했지만 그것을 대신할 만한 새 이야기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우리는 누구인가?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필요한 기술은 무엇인가? 오늘날 과학과 신, 정치와 종교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모두 감안할 때,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너무 야심차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여유가 없다.

철학과 종교, 과학 모두 시간이 다 돼간다.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인생의 의미를 두고 논쟁해왔다.

우리는 이 논쟁을 무한정 계속할 수는 없다.

 

다가오는 생태학적 위기, 커져가는 대량살상무기의 위협, 현상 파괴적인 신기술의 부상은 그런 여유를 허락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는, 인공지능과 생명기술이 인간에게 생명을 개조하고 설계할 힘을 건넬 것이다.

 

머지않아 누군가 인생의 의미에 관한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어떤 이야기를 기반으로 이 힘을 어떻게 쓸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공학자들은 인내심이 평균보다 훨씬 낮고 투자자는 최악이다.

생명을 설계할 힘으로 무엇을 할지 당신이 모른다 해도, 답을 찾을 때까지 1000년의 시간을 시장의 힘이

기다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자신의 맹목적인 답을 당신에게 강요할 것이다.

인생의 미래를 분기 수익 보고서에 맡기는 것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마지막 장에서 나는 개인적인 이야기도 얼마간 털어놨다.

한 사피엔스가 또 다른 사피엔스에게 건네는 말이다.

 

곧 우리 종이 주인공인 무대의 막이 내려가고 완전히 다른 극이 시작되려 한다.

이 지적인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 책 내용의 많은 부분이 자유주의 세계관과 민주주의 체제의 단점들을 논의하지만, 그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유독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근대 세계의 도전적인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인류가 지금까지 개발한

정치 모델 중 가장 성공적이고 가장 쓸모가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에 모든 발전단계에서 적합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그것은 다른 대안들에 비해 더 많은 사회와 상황에

서 그 가치를 입증해왔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도전들을 검토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들을 이해

하고, 어떻게 하면 지금 상황에 맞게 고치고 개선할 수 있을지 탐구할 필요가 있다.

 

불행하게도 현재의 정치적 분위기에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관한 모든 비판적 사고가 독재자나 다양한

비자유주의 운동의 독점물이 될 수도 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자유민주주의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것이지 인류의 미래에 관한 열린 토론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의 문제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더없이 좋아하면서도 자신들을 향한 비판은 어떤 것도

거의 참지 못한다.

 

저자로서 나는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다. 내 말이 맥락을 벗어난 채 인용되면서 지금 움트기 시작한 독재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내 생각을 터놓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나 자신을 검열해야 할까?

비자유주의 정권의 특징은 바로 국경 밖에서조차 자유로운 발언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정권이 늘어나면서, 우리 종의 미래에 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일은 점점 위험해지고 있다.

 

얼마간의 고심 끝에 나는 자기 검열보다 자유로운 토론을 선택했다.

자유주의 모델을 비판하지 않고서는 그것이 갖고 있는 결점을 고치거나 극복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생각하고 바라는 대로 자기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상대적 자유를 누릴 때

에만 쓰일 수 있었다는 사실에 유념해주기 바란다.

당신이 이 책을 가치 있게 여긴다면 표현의 자유 또한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

 

 

2018년 봄

유발 노아 하라리

 

Yuval Harari                        

1976.2.24. 이스라엘 . 예루살렘히브리대학교.역사학자,대학교수,작가.옥스포드 대학교 대학원 중세전쟁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