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 제사 외/김승희
꽃들의 제사/김승희
어떤 그리움이 저 달리아 같은 붉은 꽃물결을 피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혈관 속에 저 푸른 파도를 울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흘러가는 강물 위에 저 반짝이는 햇빛을 펄떡이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끊어진 손톱과 끊어진 손톱을 이어놓는가
어떤 그리움이 시카다(cicada)에게 17년 동안의 지하 생활을 허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시카다에게 한여름 대낮의 절명가를 허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저 비행운과 비행운을 맺어주나
지금 파란 하늘을 보는 이 심장은 뛰고 있다
불타는 심장은 꽃들의 제사다
이 심장에는 지금 유황의 온천수 같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데
밤의 물방울 극장 / 김승희
배의 검은 유리창에 물방울들이 소리 없이 매달려 있다
음이 소거된 밤의 유리창에는 지옥도 천국도
한 편의 심야영화 같고
유리창에 아직 맺혀 있는 물방울
단 하나의 눈동자, 클로즈 업,
물방울은 지금 안을 고요히 들여다보고 있다
막차를 탄 사람들 사이엔 어떤 비애와 너그러움이 흐르는데
어떤 물방울에도 이야기가 많겠지만
물방울은 물방울끼리 손목을 잡고 주르륵 굴러 떨어지고
카날 그란데, 베네차아 밤물결에 별빛이 굽이친다
배 유리창에는 물방울 속에 피곤한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져
밤의 풍경이 되어간다
카도로! 카도로! 뱃사공의 소리가 밤을 울리고
물방울은 주르륵 굴러 떨어져 대운하의 물결에 합류한다
이 허무의 무대에서 굽이치는 물결만이 영원한 것처럼
죽음은 이렇게 밤의 인물화가 풍경화가 되어가는 과정
풍경이 된 모든 밤이 아름답고
배를 타고 더 가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파도는 높고 바람은 강하고
아무 것도 기억 못하는 물방울
이름도 고향도 없는 물방울
유서도 유산도 없는 물방울
베네치아의 밤은 카날 그란데를 흘러가고
강물은 흐르고 사람은 가고
탈칵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
외롭게 라이터 켜는 소리
왈칵 별빛이 쏟아지는 소리
등대도 없는 밤바다에 물방울은 심야극장을 이루며
캄캄한 바다 저 너머로
검은 관처럼 출렁출렁 흘러가고 있다
도미는 도마 위에서/김승희
도미가 도마 위에 올랐네
도미는 도마 위에서
에이, 인생, 다 그런 거지 뭐,
건들거리고 산 적도 있었지
삭발한 달이 파아랗게 내려다보고 있는 도마 위
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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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는 도마 위에서 맵시를 꾸며보려고 하지만
종말에 참고문헌과 각주가 소용이 될까?
비늘을 벗기고 보면 다 피 배인 연분홍 살결
그래도
고종명에 참고문헌과 각주가 소용이 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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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가 도마 위에서
도미가 도마 위에서
몸서리치는 눈부신 몸부림
부질없는 꼬리로
도마를 한번 탕 치고 맥없이 떨어져
보랏빛 향 그윽한 산천
애도 시계/김승희
애도의 시계는 시계 방향으로 돌지 않는다
시계 방향으로 돌다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다가 자기 맘대로 돌아간다
애도의 시계에 시간은 없다
콩가루도 기도를 할까
콩가루가 기도를 할 수 있을까
콩가루가 기도를 한다면
어떤 기도를 할까
콩가루는 자기를 복원해달라고 기도를 할까
콩가루가 복원될 수 있을까
콩가루에게 어떤 기도가 가능할까
애도의 시계는 그런 기도를 한다
가루가루 빻아져 콩가루들은 날아갔는데
콩가루는 콩가루의 소식을 모르고
콩가루는 콩가루의 주소를 모르고
콩가루는 향수를 모르고
콩가루는 다만 바람 속의 근심으로 바람의 애도를 한다
회오리를 타고 시시때때
애도의 시계는 꿈에서 거꾸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