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막벌이꾼한테 시집을 갈 것이지, 누가 내게 시집을 오랬소. 저 따위 예술가의 처가 다 뭐야.” 잘 알려진 현진건의 <빈처>(1921) 중 한 대목이다. 홧김에 내뱉은 자소(自笑)인 줄이야 알지만 황당한 남자이다. 필시 그가 먼저 처녀에게 ‘내게 시집 오시지’라고 했을 법한데. 혹은 아니래도 ‘결혼을 해야겠군’ 하고 마음먹어 어느 귀한 집 처녀를 극빈에 빠뜨린 것도 그일 터인데. 제 말대로 ‘저 따위 예술가의 처’를 자청할 여자가 그리 많겠는가. | 박수근, <기와집>, 종이에 크레파스, 1956 |
뻔뻔한 이 남자는 가난한 예술가의 처를 자청했으니 고난도 당연한 것이라고 질러댄다. 물론 종내 소설 속의 예술가는 아내에 대한 무한한 감사로 글을 마무리짓는다. 여기에서 예술가의 사랑은 불 같은 열정이나 숨 막히는 아름다움, 가슴을 모조리 뒤흔드는 감상(感傷)보다는 ‘현실을 인내하게 하는 신뢰’를 일컬으며, 연민이 한참 뒤섞였다. 게다가 순종의 미덕과 이분법적 논리도 배었으며 상당히 여성 의존적인 남자의 모습도 비쳐 나오는 그런 것이다. ‘예술’과 ‘무엇’이라는 대칭에 적당한 단어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사랑일진저. 그러나 그때의 사랑이란 보통 사람들에게 예술이라는 말처럼이나 일상적이지 않은 것이곤 한다. 근대기 서구 이후 예술가들이란 작품의 창작자이기 이전에 구습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정신과 강렬한 표현력의 대변자였다. 자유 연애라는 둥 하는 개념의 사회학적 발전사를 이끈 선구자로서 말이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약혼도 한 남의 집 귀족 처녀를 홀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화가 지망생이었다. 그러나 말이 좋아 낭만이지, 생각해보라, 그 미숙한 연애담이나 불륜담이 호사가들의 테이블과 책을 통해(작가론이니 평전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질 수 있는 것도 사건 개입자들(예술가, 연인, 기록자)의 대단한 과시욕이나 사생활 침해의 상처에 힘입은 것일지 모른다. 그렇게 미화된 전설과 신화들은 곧잘 근대기 예술가들을 영웅적으로 재탄생시키는 (따라서 작품의 가치를 높이는) 결정적 소도구로 이용되기도 한다. 예술가처럼 보기 위해서 연애에만 몰두하는 사기꾼들도 세상에는 많고도 많다. 이런 맥락들이 결정적으로 예술가의 사랑을 클리세(cliche)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그럼에도 글로벌한 자본에 의해 개인과 그 가정이 보수화로 역행하고 있는 오늘날, 자본의 논리를 따라 움직이는 이혼과 사랑은 ‘실속’으로 평가받을지언정 무모한 예술가적 사랑을 좇기란 예전보다 더 용기를 필요로 하는 어려운 시대가 되어간다는 점에서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글머리가 길어졌지만, 그래서 우리는 예술가의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때 가족애나 부인과의 사랑보다는, 아내를 저버리고 나이 차이도 훌쩍 나는 앳된 소녀(주로 모델이나 학생이다)와 주고받는 뜨거운 편지 같은 것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대 떠나고 없는 마을의 놀이터 그네에 앉아 / 한 남자가 이슬 내리는 새벽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다. / 그것은 나의 소명 받은 병이었다. 지구 위에 저 혼자 있는 것 같아요, / 라고 쓴 그대 편지를 두 번째 읽는다.” (황지우, <몹쓸 동경> 가운데) 그런가, 그것이 예술가의 소명 받은 병인가. ‘아니, 그것만은 아니에요!’라는 몇 개의 풍경을 근대기 화단에서 찾아보았다. 예술가와 배우자와의, 뜨겁기보다는 따뜻하고 소란스럽기보다는 조용하고 찰나적이기보다는 기나긴 사랑 말이다.(여기에서 영국의 무용가 마고트 폰테인 부부처럼 위대한 여류 예술가를 평생 지원한 남자 배우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쓰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 | 
| | 이쾌대, <부인도>, 유화, 1943 벽화를 등진 화가의 아내의 함초롬한 초상은 그녀의 삶을 예언하는 듯하다. |

| | 많은 이름과 커플들이 떠오르지만 우선 소개하고 싶은 것은 박수근과 그의 처 김복순 여사의 이야기다. 이들은 담장을 맞댄 옆집 이웃으로 서로 알게 되었나 보다. ‘키도 크고 눈도 둥글게 큰’ 총각이 옆집 처자에게 편지를 보낸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다음 대목이 걸작이다. | 박수근, <맷돌질하는 여인>, 유화, 1941 아내를 모델로 해 1941년 제19회 선전에 입선한 작품 | |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이미 병원집 며느리로 혼담이 오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번듯한 혼처를 파혼하고 시집 보내던 날 그녀의 아버지는 '고명딸인 너를 화가에게 보내어 배곯길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힌다'고 하면서 그렇게도 울었다고 한다. 김복순 여사가 전통적 관념을 지닌 순종적 여성이었기 때문에 그 가난을 견뎠다고 쉽게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1·4 후퇴 때 아내를 닮은 여인을 따라가다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는 화가의 회고에도 쉬 그리 말할 수 있을까. 지고의 세월을 보낸 다음 오히려 ‘그이가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해주셨는지 마치 잃었던 보물이라도 얻은 양 애지중지 보살펴주신 것’에 감사한다고 쓸 수 있는 아내에게 순종의 허울을 들이댈 수 있을까. 우리가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박수근은 또 이렇게 썼다. ‘나는 외출해서 돌아올 때 우리집 용마루만 보아도 내 집(창신동 집, 오른쪽 그림)이 어떻게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저 집안에 (6·25 와중에) 죽었다 살아온 나의 사랑하는 처자식과 동생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전쟁 끝에 박수근은 잃었던 보물들과 재회할 수 있었지만, 끝내 그 기쁨을 맛보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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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수근, <창신동집>, 유화, 1950년대 |
“오! 내 사랑 내 사랑, 참된 나의 사랑! 한 떨기의 장미꽃. 나는 그 옆으로 배회하는 벌나비올시다. 장미꽃과 벌나비는 이미 예약된 사이였고 그 두 사이에는 아리따운 사랑이 소곤소곤 속삭이고 있었더랍니다.” 1932년, 휘문고보에 다니던 이쾌대는 진명여고 다니던 동갑내기 유갑봉에 한눈에 반한다. 미친 듯이 쫓아다니다가 집안에서 중매를 넣어 그 해 가을 전격 결혼한다. 둘은 함께 무사시노의 전신인 제국미술학교로 유학을 가고 아이도 낳았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전쟁은 운명을 갈라놓는다. 
| 이쾌대, <봉선화>, 유화, 1949년 무렵 | | 
| 이쾌대, <운명>, 유화, 1938 이쾌대 작품의 여인상은 대부분 아내를 모델로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
| | "한민 母 보오. 오래간만에 내 소식을 알리게 됩니다. 9월 20일 서울을 떠난 후 오륙일 동안 줄창 걷다가, 국군의 포로가 되어 지금 부산 100수용소 제3수용소에 있습니다. 나의 생사를 모르는 당신에게 이 글월을 보내게 되니… 신병을 앓는 당신은 몇 배나 여위지 않았소. 안타깝기 한량없소이다. 한민이, 한식이, 아침 저녁으로 뽀뽀하는 우리 귀여운 수생이 그리고 꼬마 한우. 생각할수록 보고 싶소그려. …서울 우리집 생각할 때마다 몹시도 괴롭습니다. 한동안 괴로운 생활을 우리는 잘 참고 버티어 가겠소. …아껴둔 나의 색채 등은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 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그때대로 생활 설계를 새로 꾸며봅시다. 내 맘은 지금 우리집 식구들과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 포로수용소에서 이쾌대가 아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이 편지를 끝으로 그는 북을 택했다. 그는 전운이 사라지면 곧 통일이 될 것이라고 낙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아침저녁의 뽀뽀도 다시 없었고, 더 이상 처를 모델삼아 그린 작품도 태어나지 못했다. 남쪽의 아내는 월북자의 아내라는 짐을 지고 평생 기다렸지만 화가는 북에서 새로 결혼도 했다. 유갑봉은 죽을 때까지 남편의 작품을 벽장에 숨겨두고, 배수의 진을 친 것처럼 삼십여 년을 기다리다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은 지 10년 만에 작품들이 공개되면서, 위대한 근대기의 화가 이쾌대는 청춘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으니, 위대한 사랑은 이렇게 예술을 수호한다. | |
몇 년 전 임종한 수필가 김향안 여사의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자. 수화 김환기의 아내, 예술적 동반자이자 후원자로서 널리 알려진 그녀가 워낙은 시인 이상의 아내 변동림이었다는 사실은 비교적 최근에야 널리 알려진 일이다. 구본웅의 배다른 동생으로서, 스무 살에 오빠의 친구와 결혼했지만 결혼한 지 6개월이 되지 않아 이상은 동경해 마지않던 동경으로 홀로 떠나 그곳에서 처절한 궁핍과, 이상의 파탄과, 임종을 맞는다. 그동안 변동림은 여급을 하거나 하며 시댁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고 한다. 이상의 사후 8년인가 지난 다음 김환기와 다시 결혼했다. 성북동 살던 집 이름은 수화와 향안에서 한 자씩 따서 수향산방이었다. 동등한 예술가 부부로서의 기나긴 여정이었지만, 파리와 뉴욕에서 김환기의 예술가로서의 삶은 철저히 김향안에게 빚진 것이다. 둘은 서른 해 넘게 함께 살았다. 김환기가 죽은 다음 김향안은 남편을 사랑하며 또 서른 해 넘게 살았다. | | 
| | 김향안, <산보>, 유화, 1970년 무렵 부부의 산책을 그린 그림. 김향안은 파리에서 조촐한 전시회를 가지기도 했다. |

| | 그 가운데 근 20년을, 우리에게 환기미술관이라는, 건축과 미술이 공생하며 빚는 한 예술적 풍경을 남기는 데 바쳤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며 하늘에 별과 같은 점을 캔버스에 찍던 위대한 예술가, 그가 생전에 어느 범부가 되어도 좋다고, 아내를 두고 쓴 글이 누긋한 장마철에 보송보송한 이불과도 같은 감촉을 전한다. '…밉든 곱든 간에 우리들은 반생을 강아지처럼 살아왔다. 숭늉을 들고 온 아내의 손을 보면 옛날의 손이 아니다. 나도 작금년부터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진다. 우리도 늙어가나 보다. …여기까지 쓰고 아내에게 보였더니 퇴박을 맞았다. 왈, 범부의 담이라고.…” (김환기, 1952년) |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유화, 1970년 | |
* 필자 심세중은 디자인, 예술, 건축 분야의 전문 도서들을 기획, 편집하고 있다. <삶과 예술은 경쟁하지 않는다 - 의재 허백련>을 썼고, 여러 잡지 등에 문화와 예술, 여행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앞으로 웹진 아르코에 <예술과 '무엇'>코너를 연재하며 다양한 시각에서 예술가의 삶의 단면들을 소개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