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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우주의 작은 반점 콤마, 씨

나뭇잎숨결 2012. 8. 20. 07:30

 

 

 

 

강정, 『콤마, 씨』, 문학동네, 2012

 

 

눈이 많이 내린 날, 새하얀 세상이 흐리게 보이는 건 눈 속에 감춰진 검은 세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콤마씨에게서 사라진 사람은 바로 그 눈 같은 게 아니었을까. 잡으려 하면 피부에 닿아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저 세상의 짧은 기별. 일상의 모든 표면에서 죽음과 좌절의 기운만 냄새 맡게 된 콤마씨에게 몸 안의 채 식지 않은 열기를 식히며 하얗고 어두운 베일처럼 깔리는 눈들은 세상 어떤 물체보다도 명징한 ‘우주의 기호’처럼 여겨졌다. 어쩌면 자신의 몸, 자신의 시간, 자신의 감정 안에 잠시 머물다 떠난 사람은 사라짐 자체로 저 세상의 인물이 되는 것인지 모른다. 마르지 않는 수분처럼 몸 안에 고인 채 그 자체의 형상을 지워버리는 한 사람의 흔적. 사랑이란 각자의 화분을 한 개씩 밖으로 꺼내놓고 얼핏설핏 드러나는 검은 창의 경계에서 저 세상의 기별 하나 듣기 위한 일이 아닐까. --- pp.83-84

콤마씨는 그 흔들리는 문장들을 베껴 쓰려 한다. 그러나 완전히 옮겨 쓸 수 없다. 쓰면 쓸수록 여태까지와는 다른 삶이 남아 있는 백지 위에 배어났다 지워진다. 사람이 문장을 완전히 이끈다는 건 허망한 분루에 불과하다. 진정한 문장이란 묘지에 피어난 꽃 같은 것이다. 누군가 끝끝내, 남김없이 그리려 했다가 기어코 놓치고 만 단 하나의 진심. --- pp.180-181

내 인생의 일곱번째 책. 이 책은 오직 한 사람을 그리며 씌어졌다. 더위가 한풀 꺾이고 저녁 바람이 사뭇 스산해지기 시작하던 2008년 가을 무렵, 불현듯 다시는 시를 쓰지 못할 거라는 예감에 사로잡혔었다.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한 느낌에 불과했을 따름이지만, 그 느낌은 무슨 입영통지서처럼 분명하게 내 삶의 한 시절을 다가올 미래와 분리시키고 있었다. 굳이 시를 쓰지 않고 살아도 되지 않느냐고, 왜 시에 집착하느냐고 스스로를 달달 볶던 중, 기어이 한 사람이 내게서 떠나고야 말았다. 떠나보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몰랐던 것도 아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까지 나는 계속 아팠고, 그런 와중에 영원히 완치되지 않을 것 같은 가슴속 울혈들을 허공에 점자 찍듯 띄엄띄엄 이 책을 썼다.

떠나간 것에 미련을 갖거나 스스로 선택했던 일에 대해 후회해본 적이 별로 없다. 한 시절의 상처 따위 태양의 농도가 변화하고 바람의 세기와 방향이 바뀌는 대로 저절로 잊히는 걸 인지상정이라 생각하며 나름 거동 가볍게 살아온 편이니까. 어떤 무게에 매섭게 짓눌리다가도 잠깐 고개를 돌려 내다본 창가의 다른 풍경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을 줄 아는 탄력이 곧 시의 힘이라 믿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3년 전 가을 이후로 내 안의 그 작은 창이 두텁고 어두운 베일 뒤로 숨어버린 느낌이다. 바깥이 보이지 않았고, 내부로 굽어든 시선이 불 밝혀줄 그 어떤 아름다운 그림도 내 속엔 존재하지 않았다. 그 퍽퍽한 어둠과 불안한 서성거림 끝에 나의 손을 놓아버린 한 사람에 대한 변함없는 연모와 사죄의 심정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떠나간 누군가를 오랫동안 그리워하는 일, 그리고 그것으로 생의 다른 윤리를 모색하고 과거를 재편성하는 일이란 참 힘들고 허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게 아니고서는 내가 다시 나 자신을 향해 솔직하게(난 요즘 그 어떤 웃음도 진심이라 믿을 수 없다) 웃을 수 있는 방도가, 지금으로선 없다. 이건 고통과 슬픔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와 책임의 문제다.

스스로 조장한 것이든, 세상의 어떤 불합리한 조건과 편견에 휘둘려 굴절된 것이든, 시는 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다른 세상을 드러내는 일이라 여전히 믿는다. 한 사물을 깊숙이 들여다보거나 누군가의 이름을 오래 되뇌다보면 본래의 것과는 조금 다른 질감과 공명이 느껴지듯, 시는 낯익은 세계의 어느 표면에서 부지불식 드러나는 다른 세계의 징후를 때론 의도적으로, 때론 우연히 포착한다. 그럼으로써 이 세계가 숨기고 있는 모순과 불화의 양상들이 나타난다.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복잡다단한 기억과 인상들의 접합으로 변형되고 왜곡되던 가. 나는 시를 그 변화와 왜곡 자체를 투사해내는 ‘마음의 일’이라 생각한다. 그런 만큼 그것은 때로 본심을 거스르거나 굴절시키는 양상으로 흐르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은 말, 합리적으로 기획되지 않은 생각이 숨어 있는 행간 속에서 흐물흐물 새어나와 자기 자신조차 이물스러워지게 만드는 언어 앞에서 끝끝내 솔직해지기.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진심에게 스스로 속아 넘어가기. 씌어진 시는 모두 씌어지지 않은 마음의 모사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모사물에 대한 일차적 현혹이 없다 면 어떻게 사랑이 가능하고, 시가 가능하겠는가.

무언가를 향한 열기가 한창일 때, 그래서 삶이 한없이 노곤하고 감당 못하게 뜨겁기만 할 때, 시는 인간이 꿀 수 있는 가 장 치열하고 서늘한 꿈이 될 수 있다. 꿈인 만큼 그것은 일상 언어를 초과해 일상의 숨은 속을 밝힌다. 모든 시는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명멸하는 세계의 빛과 어둠을 탐침하기만 할 뿐, 그 어떤 것도 증명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영혼이 세계 속에서 빚어내게 되는 마찰과 호응과 이별과 합일과 결절에 대한 총체적 흔적으로써 어느 한순간, 외계의 돌처럼 눈에 띄게 될 뿐이다. 그 낯설고도 핏줄 당기게 하는 슬픈 환희의 현존이 아니라면 시는 영원히 무용하고 부질없는 인간의 허언에 불과하다. 모든 혼란과 광기와 슬픔 끝에 잠들었다가 마주치게 되는 세계의 깊은 속. 그 안에서 나를 찾고 세계의 비밀을 캐고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며 울고 웃다가 또 한참을 방황하는 것. 이것이 내겐 시의 정도 ?습甄?

반복건대, 이 책은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씌어졌다. 모든 시는 오로지 하나의 대상을 통해 반사되거나 변형된 세계의 꼴을 세계에 다시 투사하고자 하는, 그리하여 세계 전부를 자신의 마음속에 일순간 포획하려는 욕망의 부산물이다. 그렇게 드러난 세계는 이미 알던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깊이 들어갈수록 자꾸 오해만 낳게 되던 한 사람의 마음 앞에서 나는 나 스스로에게 놀라고, 그 모든 것에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는 세계의 냉엄함에 절망했다. 내게 한 사람은 곧 세계였다. 그렇게 치열하게 혼동하지 않고서야 마음의 바닥이 지구의 극지까지 내려가는 경험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방법이 없다. 그 모든 뒤틀린 오해와 편견마저도 내가 바라본 그대로의 세계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내 가면에 속았던 셈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여러 겹의 가면 뒤에서 낮게 읊조린, 내 안의 또다른 목소리들이다. 나는 그 소리가 진짜 내 목소리보다 더 진심에 가깝다고, 이제는 믿는다.

오욕칠정에 대한 사사로운 분별마저 망각한 채 가만히 들여다보고 매만지고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되는 어떤 기별들. 그것들을 깨닫게 해준 열네 명의 동료 시인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들의 시 속에서 나는 여러 번 사랑받고 또 여러 번 싸늘하게 버림받았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내 사랑의 영원한 동조자들이다. 한없이 외로운 가운데 씌어진 글들이지만, 그 사사로운 외로움이 열네 편의 시를 거쳐 어떤 사람에게 따뜻한 꿈으로 펼쳐지기만 한다면, 적어도 내 기나긴 낮잠의 옹알이가 악몽은 아니었던 게 될 것이다. 시가 나를 떠난 게 아니라 내 미망과 집착이 시를 떠나게 한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애당초 알고 있었던 건지 모른다. 마치 그 사람에게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그랬듯 예정된 미래란 없다 . 나는 아마도 미래에 대한 공포를 미리 시로 썼던 듯하다. 그러나 이제 시가 씌어진 것 바깥에서 늘 부유하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공기 같은 거라는 사실을 짐짓 알 것 같다. 숨을 더 크게 쉬라고, 그래서 마음의 공간을 조금 더 넓혀보라고, 시는, 그리고 그 사람은 내게서 비껴가는 신호를 보낸 건지 모른다. 그렇게 조금은 넓어진 마음의 공터에서 나는 기다리기로 한다.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 그것은 언제나 내 조급한 성정이 견뎌내기 힘든 일이었지만, 기꺼이 기다리겠다고 마음먹은 이후부터 그것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 소중한 일을 스스로 그르쳤 던 오늘까지의 내 과오를 용서받을 길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래도 나는 그 일을 계속할 것이다. 끝으로 감사하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남준은 화가다. 그는 그림도 그리고 밴드도 한다. 오래 알고 지낸 멋진 친구다. 그와 어떤 식으로든 같이 작업하고 싶었던 참이었는데, 남준은 멋진 사진들로 나를 도왔다. 책에 실린 사진들은 남준이 자기 방식대로 읽은 시에 대한 인상이라 해도 좋고, 전혀 다른 방향에서 마주친 우연한 만남이라 해도 좋다. 글과 사진을 같이 보면서 독서의 맥락을 스스로 아름답게 꾸며낼 줄 아는 독자가 있다면 어느 날 갑자기 그리운 사람에게 전화를 받은 것처럼 기쁜 기척이 내게로 전달될 거라 믿는다. 우연이 없다면 이 세상엔 그 어떤 아름다운 조화도 탄생하지 않는 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책 끄트머리에 세를 놓게 된 자그마한 노래집은 그 우연의 소박한 징조이자 내실이라 여긴다. 소리에 대한 열망은 어릴 적부터 강했지만, 정작 열망이 아스라이 사라지고 나니 어떤 낯설고도 친숙한 음계 안에 유령처럼 떠 있게 되더라. 남준을 비롯, 기꺼이 도와준 음악 동료들(상훈, 백진, 세호, 종현, 대일)에게 감사한다.

무려 5년 동안 내 원고를 기다리다가 끝내 직장을 그만둔 전 문학동네 편집부 최지영씨께 특별한 감사와 사죄의 인사 전한다. 이 책은 그 5년 동안 수차례 변형된 기획의 최종 결과물이다. 스스로도 기겁할 정도로 게으르고 무심한 사람을 그토록 오래 믿고 기다려준 정성은 난생처음이다. 부디 행복하시길 바란다. 더불어 얼결에 일을 떠맡아 빛나게 책을 빚어준 후배 시인 민정에게도 감사드린다. 죄가 많다. 그걸 이제야 알았는지 요즘 고백 병에 시달리는 와중이다. 시인들아, 제발 잘 아프고 잘 싸우자.

                                                                                                                       2011년 겨울,  강정 
--- 「작가의 말」 중에서

 

 

내 인생의 일곱번째 책. 이 책은 오직 한 사람을 그리며 씌어졌다!『콤마, 씨』는 열네 명의 시인과 그들의 열네 편의 시를 기저로 빚어낸 새로운 스타일의 산문이자 일종의 장시다. “오욕칠정에 대한 사사로운 분별마저 망각한 채 가만히 들여다보고 매만지고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되는 어떤 기별들”이라고 했던가. 김경주, 김소연, 이원, 최하연, 김태동, 하재연, 김근, 김중, 김언, 조연호, 신동옥, 정영, 이준규, 이영주, 이들의 시를 서두에 한 편씩 드러냈고 후에 이들의 시 구절 가운데 수면 위로 때론 숨이 차서 때론 간질거리는 통에 저절로 솟구치는 문장 혹은 단어들에 때론 기대거나 때론 밀쳐버리는 식의 감정적 발로로 글 한 편 한 편을 완성해나갔다. 아마도 그 자체의 과정 또한 사랑이 아니겠나 싶은데, 사랑에 있어 “사람의 마음이 복잡다단한 기억과 인상들의 접합으로 변형되고 왜곡되”듯 “그 변화와 왜곡 자체를 투사해내는 ‘마음의 일’이 시가 아니던가”. “의도하지 않은 말, 합리적으로 기획되지 않은 생각이 숨어 있는 행간 속에서 흐물흐물 새어나와 자기 자신조차 이물스럽게 만드는 언어 앞에서 끝끝내 솔직해지기.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진심에게 스스로 속아 넘어가기”, 이것이 바로 시이자 사랑인 것을 특유의 예민하게 발달한 오감으로 포착한 강정은 어쩌면 이 실험적인 글쓰기를 통해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될 턱이 없는 사랑의 실체를 밀가루 반죽을 뜯어 그 찰기를 증명하듯 손에 묻혀 보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때론 넓적하게 때론 소담하게 때론 동글려가며 때론 늘려가며 그때그때 손이 원하는 방식 그대로를 따라 본능에 충실해보는 것, 그러니까 이 책은 그러한 과정 속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출몰’한 셈이다. 열네 편의 글이 사랑을 테마로 하되, 죄다 다른 음률과 리듬으로 짜인 것은 바로 그런 연유다. 책을 읽기 전 아래의 ‘일러두기’를 참고하면 다행이겠다 싶은 것은 이 한없이 출렁거리며 깊이 발 빠지게 하다 다시금 솟구쳐 물 위를 걷게 하는, 그래서 도통 가늠할 수 없는 이 텍스트의 능동적인 주인으로 애초부터 출발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시와 문장, 그리고 사건과 풍경은 각기 다른 지점에서 발생하거나 추출돼 우연히 만난다. 풍경은 문장의 배경으로 흐르지 않고 문장은 풍경을 설명하거나 수식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우연한 계기에 의해 임의로, 같은 평면에 도열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임의성은 사후 필연으로 가공된(될 수도 있)다. 풍경은 문장에 개입해 애초에 지녔던 장소의 고유성 및 공간의 위상을 상실한다. 문장은 다른 의미로 나아가고 풍경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다른 공간을 잠식한다. 이 책은 최소 둘 이상의 시각과 생각과 상상과 실재를 뒤섞으면서 그 모든 걸 지우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풍경이 가리키거나 지우는 세계의 다른 면, 문장이 적시할 수 없는 언어의 마지막 이면은 마치 양파 껍질과도 같다. 이 책은 그 어떤 합일에의 약속도 없이 조우한 풍경과 시, 그리고 거기서 촉발된 문장들의 충돌의 결과물이다. 유일하게 계산된 게 있다면, 그 모든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는 막연하고도 흥분잵는 호기심과 충동뿐이다.
-‘일러두기’ 전문

시라는 여러 겹의 가면 뒤에서 낮게 읊조리는, 내 안의 또다른 목소리들!『콤마, 씨』는 결코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시’라는 장르에 기대어 결코 멈출 수 없고 마칠 수 없는 ‘사랑’을 증명해낸 책이다. 강정과 함께 [The ask]라는 밴드를 함께 이끌며 본문 안에서 독특한 시선을 보탠 아티스트 허남준의 사진 또한 그래서 그리도 뿌연 시야를 가졌던 걸 거다. 사진마다 붙은 일련의 제목들, 오히려 본문에 인용된 시들보다 더 시로 읽히는 이 기묘한 뒤섞임을 찬찬히 둘러본 뒤 시인 허수경은 이렇게 말했다지. “어떤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우주의 트랜스젠더를 위한 책, 혹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단 하나뿐인 당신을 위한 책”이라고. 덧붙여 “우리의 위로가 필요한 책”이라고도. 일종의 고백록으로, 자술서로, 연서로 읽었으나 결국 시로 읽은 소설가 한유주의 소감도 있었으며,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렇게 소회했다지. “강정과 시인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장 벨맹 노엘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서로 상대방의 욕망을 빌리는 일 같다”고. 어쨌거나 분명한 건 우리 모두의 위로가 필요할 만큼 아픈 책이라는 것, 기실 그 아픈 이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 그의 커다란 비유이자 상징 아닐까.

무엇보다 이 책은 강정의 줄글을 주목함과 동시에 끝까지 그로부터 시선을 놓지 않아야 완벽하게 읽어냈다 할 것이다. 그는 정확하면서도 적확한 문장과 단어 쓰기로 애초부터 유명한 시인이기도 하였거늘, 타고난 탄력적 글쓰기의 에너지가 겉으로는 고요해 보이는 이 책 안에서 가장 깊고 넓게 폭발할 수 있던 까닭에는 한 땀의 여백도 그냥 쉬어 가는 것이 아니라 촘촘히 안 보이는 거미줄로 엮은 그만의 무대 장악력이 뒷받침된 까닭일 게다. 이보다 더 좋은 글쓰기 텍스트는 당분간 구경하기 힘들지 않을까 하여 시를 쓰고자 하는, 산문을 쓰고자 하는, 게다가 노래 가사를 쓰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특별 부록으로 이 책의 저자이자 함께 밴드를 이끌고 있는 [The ask]의 강정과 허남준의 신보 CD를 책 안에 담았다.

 

당신은 남성인가? 혹은 당신은 여성인가? 아니면 당신은 콤마인가? 어떤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우주의 트랜스젠더를 위한 책, 혹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단 하나뿐인 당신을 위한 책, 그리고 익명인 우리 모두의 고독을 위한 책, 강정의 뜨거운 언어로 쓰여진 아주, 그리고 조금은, 술 취한 책…… 그리고 술에서 깨어날 때 어두운 골목에 있는 허름한 식당의 따뜻한 국이 필요한 책(덧붙인다면 당신은 이 책을 읽고 난 뒤 이미 당신을 뜨거운 국처럼, 혹은 빗물처럼, 넘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덧붙인다면 우리의 위로가 필요한 책). - 허수경 (시인)


어떤 사람들은 설탕을 기억한다. 병. 잔. 노랗고 붉은 전구. 바. 먼지. 그림. 담배. 시간. 밤. 새벽.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들이 설탕에서 써내려간 시들을 기억한다. 본 적은 없지만 그 시들은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다. 녹아서 끈끈해진 설탕처럼. 나는 설탕에서 강정, 혹은 콤마씨를 본 적이 있다. 그것도 꽤 여러 번. 콤마씨는 가끔 담배를 끊겠다고 말했고 가끔 술을 끊겠다고 말했으며 또 가끔은 설탕을 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모든 것을 끊고 다시 시작된 것을 끊는 시간,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시간, 시를 끊고 싶다고 말하는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콤마씨는 한 사람이자 여러 사람이었고, 나는 야구를 이야기하는 콤마씨, 술 대신 주스를 마시는 콤마씨, 음악을 이야기하는 콤마씨, 여성용 가죽 재킷을 억지로 입어보는 콤마씨, 축구를 이야기하는 콤마씨, 포도주를 마시는 콤마씨, 맥주를 마시는 콤마씨, 도라지 담배를 피우는 콤마씨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가끔 생각했다. 콤마씨가 정말로 시를 끊어버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설탕에는 콤마씨, 혹은 강정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종종 찾아왔다. 강정의 시집을 내미는 사람들에게 콤마씨가 얼굴을 어깨로 가리며 서명을 해주던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콤마씨와 한 권의 시집, 잠시 시인의 얼굴을 소년의 어깨로 수줍게 가리던 시간. 콤마씨는 열네 편의 시에 대한 책을 썼다. 이 책은 고백록으로 읽히기도 하고, 자술서로 읽히기도 하며, 일종의 연서로 읽히기도 한다. 모르던 사실은 아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며 새삼 콤마씨가 시인은 시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에게도 여전히 시는 천천히 녹아 흐르는 설탕처럼 끈끈하게 들러붙어 있을 것이다. 녹은 설탕으로 봉인된 시간.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의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에도 희고도 검은 설탕이 묻어날지도 모른다. 그들이 손가락 끝의 달콤함을 감각하며 잠시 낮잠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 한유주 (소설가)


“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몸에서 그 사람과 함께 다시 태어난다.” 강정은 이 책의 첫 글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이 책을 설명하는 문장으로 이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지만 조금 덧붙여볼까. 한 편의 시가 강정이라는 몸을 통과해 한 편의 산문이 되고 있는 작은 신비 앞에서 나는, 이를테면,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그 어머니의 전생을 얘기해주는 상황의 이상한 시간 구조 같은 것, 혹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는 자신에게 있다고 믿어본 적도 없는 욕망을 상대방을 통해 문득 실현하는 순간 같은 것을 생각했다. 강정과 시인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프랑스의 비평가 장 벨맹 노엘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서로 상대방의 욕망을 빌리는” 일 같다. 비슷한 일이 이제 이 책의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도 벌어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책을, 사랑을 나눌 때의 속도로, 천천히 읽어야 한다. - 신형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