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1일 성주간 수요일 묵상
2010년 3월 31일 성주간 수요일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14-25)
"Surely it is not I, Lord?"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에 관한 노래다. 그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등을 내밀고,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뺨을 내맡긴다. 사람들이 비웃지만 그는 당당하다. 수난하시는 메시아를 상상하게 한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의탁하는 이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제1독서). 유다 이스카리옷은 스승을 떠날 생각을 굳힌다. 스승님께서도 그가 떠나갈 것을 아신다. 그렇지만 말리지 않으신다.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이후 유다는 배신자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복음).
☆☆☆
오늘의 묵상
유다는 스승님을 팔아넘기는 대가로 ‘은돈 서른 닢’을 받습니다. 그가 먼저 수석 사제들에게 제안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말 돈 때문에 그랬을까요? 배신의 원인이 돈이었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지만 삼 년을 제자로 있던 사람이 다만 돈 때문에 돌아섰다는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돈 때문에 망치고 있는 이들을 봅니다. 돈 빌린 사람이 ‘갚지도 않고’ 성체를 모신다고, 성당에 안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돈거래 때문에 ‘대부 대자’ 관계인 사람들이 법정에 서는 것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가 ‘멍든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사람보다 돈을 먼저 생각한 결과입니다.
유다 역시 스승님보다 ‘다른 무엇’을 우선으로 여긴 것이 아닐는지요? 그러나 결과는 배신이었습니다. 그는 스승님을 배반하고 자살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용감한 일입니다. 하지만 내적 성찰이 따르지 않으면 ‘자신의 고집’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비장하신 말씀입니다. 그만큼 가슴 아프시다는 표현입니다. 이렇듯 스승님께서는 제자의 배신을 받아들이심으로써 자신의 십자가 길을 걷기 시작하셨습니다.
☆☆☆
유다는 스승을 넘기는 대가로 ‘은전 서른 닢’을 받습니다. 그러고는 기회를 엿봅니다. 예수님의 암시에도 그는 시치미를 뗍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유다의 이중적인 모습입니다. 본마음을 감추고 겉모습만을 포장한 그의 ‘두 얼굴’입니다. ☆☆☆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유다는 스승을 외면합니다. 스승을 떠날 결심을 합니다. 정말 돈 때문에 그랬을까요? 배신의 원인이 돈이었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주위에는 그러한 일들이 자주 생깁니다. 한몫 챙기려고 정보를 빼내 팝니다. 공금을 유용합니다. 모두가 유다의 행동인 셈이지요. ☆☆☆ 유다는 선과 악에 대한 긴장을 늘 심하게 느끼며 산 사람으로 보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유다는 자신의 인간적 욕망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고 짐작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가능성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공생활 내내 그분과 함께 그리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생활해 온 유다에게서 다른 제자들은 전혀 그 내면의 탐욕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유다의 마음이 악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분께서 복음을 전한 3년간의 세월을 결코 함께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며, 다른 제자들 또한 그러한 유다의 면모를 능히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스승님께서는 가슴 아픈 지적을 하십니다. 이중적인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 인생인지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니 언제라도 일면성을 지니도록 애써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밝은 모습이면 자신에게도 떳떳한 모습입니다.
유다는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힘과 기적을 이용해 이스라엘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저항 없이 죽음의 길을 가려 하십니다. 유다는 주사위를 던진 겁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인지 자신에게 도박을 걸었던 것입니다.
유다의 선택은 결국 비극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이용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개인 집단’을 위해 주님의 능력을 모시려 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근시안적인 민족주의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사람’을 위해 오신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유다와 다를 바 없습니다.
아무튼 유다는 수석 사제들에게 스승을 넘길 것을 제안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줍니다. 당시 은돈 서른 닢은 노예 한 사람의 시세였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노예가 황소에게 받혀 죽었을 때 받는 보상금에 해당합니다. 유다인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얕잡아 보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스승은 제자의 배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13,27) 하고 말씀하십니다. 배신을 받아들이신 겁니다. 철저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배신을 만납니다. 아무리 가슴 아프더라도 이제는 십자가의 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 수난의 길을 시작하셨습니다. 제자의 배신을 받아들이심으로써 보이지 않는 십자가를 먼저 지신 겁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서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한,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이루어진 제자들의 친밀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유대감으로 형성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박해받는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려면 그분에 대한 강한 유대감과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자들 간에 서열 의식을 가지고 다투는 모습을 볼 수는 있을지언정(마르 9,33-35) 그들 스스로 분열하는 모습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유대감은 훌륭했을지언정 제자들 개개인이 예수님과 맺은 유대감은 서로 달랐을 것입니다. 곧, 베드로가 지닌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유다와는 분명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금전적인 욕망의 그늘 아래 있었던 유다는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의 모습을 함께 체험하며 끊임없이 양심의 갈등을 느꼈을 가능성이 큽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이처럼 애초부터 있었다고 보기보다는, 자신의 비천함과 예수님의 거룩함 사이의 심한 괴리감으로 말미암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주님을 일부러 배신하려고 계획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주님에게서 벗어나고 있는 자신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에는, 언젠가는 악으로 향하고 있는 자신을 느끼면서도 그 한계선을 넘어 버렸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최후의 만찬 장면을 중심으로 해서 복음관상을 해야 할 부분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족례를 통해 묘사되고 있는 따뜻하고 밝은 분위기의 최후의 만찬과는 달리, 마태오복음에서는 유다의 배신을 축으로 한 어둡고 힘든 색조가 주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먼저 최후의 만찬이 거행되기 전의 분위기와 움직임들을 살펴봤으면 합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수석 사제들에게 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장면입니다. 유다의 내면의 움직임에 좀 더 민감하게 깨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느낌을 지니고 있는지 보고, 그런 유다와 수석 사제들의 기운이 합쳐져 빚어내는 그림들을 살펴봅니다.
그다음은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는 과정을 보는 것입니다. 팔아넘기는 모습과 최후의 만찬이라는 커다란 어둠 사이에 놓여 있는 작고 희미한 밝음입니다. 이 어둠과 밝음의 대조를 직관적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적절한 알아들음을 통해 은총의 선물들이 내리시길 빕니다.
끝으로 최후의 만찬 장면입니다. 만찬 전체의 분위기를 찬찬히 살펴보세요. 제자들의 전반적인 움직임을 보고, 유다의 움직임이 이 사건 전체적 맥락과 어떻게 닿아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역시 여기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읽어 들이는 것일 것입니다. 선입견 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깨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자단 전체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지, 각 제자는 또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유다에 대해서는 또 어떠신지 맑게 깨어 보고 있노라면 기도하는 각자의 처지에 맞춰 다양한 빛깔이 뿜어져 나올 것이고 기도하는 이는 그렇게 주어지는 것을 평온하게 음미할 것입니다.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
-양승국신부-
<관점>
유다라고 해서 처음부터 배반자의 길을 가겠노라고 마음먹었을 리가 만무합니다. 처음 예수님과의 만남을 갖고, 또 그분에 매료되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따라나섰을 때만 해도 유다는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적극적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열렬히 예수님을 사랑했고, 신뢰했었습니다. "이 분이야말로 내 인생을 걸만한 분이야! 내 삶을 송두리째 맡겨도 후회하지 않을 분이야!" 라고 생각했기에 최선을 다해 예수님과 제자단의 살림살이를 위해 헌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그런 열정과 적극성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유다가 지니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추종의 대상,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성취의 도구, 입신출세의 발판으로 여겼던 유다였습니다. 그러한 그릇된 관점과 노선이 어느 순간 수정되고 쇄신되었어야 했는데, 유다는 끝까지 자신의 노선을 버리지 못했기에 제자직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한 때 잘 나가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군중이 구름처럼 몰려들던 시절,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던 시절, 계속되던 치유와 기적의 시절,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 같던 해결사의 시절이 그리웠습니다.
치유의 은총을 입고 수백 번도 더 감사의 인사를 하러오던 사람들, 덩달아 우쭐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죽었던 사람조차 다시 일으켜 세우던 시절, 끝도 없이 접수되던 기부금과 감사헌금, 군중들의 환호와 따뜻한 시선... 유다에게 있어 예수님은 그야말로 흠모와 투신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때, 수난의 때가 다가오자 군중들의 환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이 총체적 난국을 어떻게 설명하실까 예수님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더욱 한심합니다. 하신다는 말씀이 고작 "자신을 죽여라! 자신을 낮춰라! 서로의 발을 씻어줘라!"는 등 쓸데없는 말만 쏟아놓습니다.
전처럼 능력의 예수님, 힘 있는 예수님, 과감하게 적대자들을 물리치던 승리의 예수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죽음 앞에 피땀 흘리시며 번민하시는 약자 예수님의 모습만이 남아있습니다.
유다는 작정합니다. 이제 떠날 때가 왔구나. 더 이상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구나. 떠나는 길에 사업자금이라도 마련해야지 하면서 제자직을 접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유다에게 있어 예수님은 더 이상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었기에 유다는 과감히 예수님을 떠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심각하게 점검해보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선택했습니까? 도대체 왜 세례를 받았습니까? 왜 신앙생활을 지속합니까?
오로지 예수님을 내 인생의 만사형통을 바라는 마음에서 선택하지는 않았습니까? 머지않아 사라질 육신의 안위와 건강만을 위해서 선택하지는 않았습니까? 내 가족의 창창한 앞날만을 위해서 선택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머지않아 우리도 예수님을 떠날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끔씩 만사형통도, 인간적인 성취도, 삶의 기쁨과 보람도 주시는 분이지만, 그 모든 것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약속하지는 않으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던 그 모든 인간적인 것들, 육적인 것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진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이웃사랑과 헌신, 희생정신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어, 오랜만일세. 그동안 많이 달라졌구먼?”
“글쎄, 누... 누구신지?”
“자네 그새 살이 많이 빠졌군. 다이어트를 열심히 했나봐?”
“아니, 난 다이어트한 적이 없어요.”
“뭘 그래? 내 눈은 못 속인다구. 자네 좀 심한 뚱보였잖아.”
“아니오. 난 한 번도 뚱보였던 적이 없소.”
“그러고 보니 머리 색깔도 왕창 바꿨네? 하기는 요즘 염색 기술이 워낙 좋아졌으니까.”
“난 머리 염색하지 않았소.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소.”
“무슨 소리? 아무리 내 눈은 못 속인다구. 자네 김재덕이 아닌가?”
“난 김재덕이 아니라 박수동이오.”
“그래? 아니, 어떻게 이름에다 성까지 바꿨나?”
둘은 서로 잘 아는 사이일까요? 아닙니다. 한쪽에서 착각하면서 아는 척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보아도 분명히 서로 모르는 사이인 것 같은데, 즉 자신이 잘못 본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 사람을 보면서 무척 답답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이러한 사람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습니다. 분명히 틀린 것도 자신의 말이라면 무조건 맞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라는 말을 하면서 눈을 부라리면서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무조건 따르도록 합니다. 특히 이 사회에서 소위 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욱 더 그런 것 같아서 아쉬움이 더 크게 남습니다.
하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이유도 바로 이런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처럼 살지 않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지요. 또한 자신들이 생각했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예수님이 아니자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큰 소리를 치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뜻에서 벗어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듯이 예수님께 가까이 가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내 생각과 뜻만을 주장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내 기준이 아니라 주님의 기준임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뜻이 펼쳐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오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장 나쁜 감정은 질투, 가장 무서운 죄는 두려움, 가장 무서운 사기꾼은 자신을 속이는 자, 가장 큰 실수는 포기 해버리는 것, 가장 어리석은 일은 결점만 찾아내는 것, 가장 심각한 파산은 의욕을 상실하는 것, 그리고 가장 좋은 선물은 용서하는 것이다.(F.크레인)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양승국신부-
<가장 큰 하느님 사랑의 표시, 자유의지>
유다의 배신을 묵상하며 지난 세월 예수님께 대한 저의 배신을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를 배신했던 그 누군가를 떠올려봅니다.
나약한 인간이기에, 유한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 그리고 우리 인간 사이에서 서로 배신을 주고받는가 봅니다.
유다의 죄와 배신, 그리고 우리들의 죄와 배신을 생각할 때 마다 떠오르는 의문 한 가지가 있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선만 창조하지 않으셨을까? 왜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만 이 세상에 보내지 않으셨을까? 왜 하느님께서는 안 그래도 나약하고 방황하고 흔들리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드는가?
아마도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각자의 나아갈 방향이나 앞으로 전개될 삶의 유형을 미리 딱 규정하여 놓으셨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로봇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꼭두각시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것, 자신의 삶의 방향을 스스로 엮어가며 독자적으로 결정한 권리를 부여하셨다는 것, 그것은 그만큼 우리를 존중하신다는 표시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시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배려하신다는 표시입니다.
때로 우리가 심각한 죄 중에 살아간다할지라도, 우리가 사랑 자체이신 그분을 떠나간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분을 철저하게도 배반한다 할지라도, 하느님 그분은 그냥 그대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왜 그렇게 죄를 지었냐고, 왜 그 따위로 살아 가냐고, 언제 인간될 거냐고, 단 한 번도 윽박지르지 않으십니다. 그저 바라보고만 계십니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십니다. 그저 다시 한 번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도 다 헤아리고 계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내면을 정확하게 꿰뚫고 계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유다의 속마음을 어찌 모르셨겠습니까? 유다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던 파장을 왜 눈치 채지 못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기다리십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에게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자유롭게 선택할 자유를 주십니다.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배신의 조짐이 포착되자마자 즉시 유다의 그런 상황에 대해 다른 제자들에게 떠벌렸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유다를 사무실에 불러 앉혀놓고 인생 그렇게 살면 되냐고 혼냈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마음 바꿔먹으라고 닦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함구하십니다. 다른 제자들이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게 하십니다. 다른 제자들로부터 구박받지 못하게 배려하십니다. 주도권을 유다에게 주십니다. 그가 결정할 수 있도록, 그가 스스로 회복할 수 있도록, 그가 자발적으로 돌아설 수 있도록 참아주십니다.
참으로 무한한 예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녕 바보 같은 예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사고로는 도저히 납득 안가는 어처구니없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은돈 서른 닢
-전삼용신부-
신학교 1학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강론 경연대회가 있었습니다. 각 한 년의 대표들이 강론을 써서 발표하고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제가 나이도 많고 말도 잘한다고 생각한 우리 신입생들은 저를 1학년 대표로 뽑았습니다.
발표 전날인데 얼마나 떨리는지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모든 신학생들과 교수 신부님들 앞에서 신입생이 강론발표를 한다는 것은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침대에 누워서도 계속 원고를 외우고 또 외우며 그렇게 잠이 들었습니다.
막상 발표를 할 때는 원고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왠지 강론을 점수를 잘 받기 위해 하는 것 같아서 본뜻과 맞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강론은 예수님을 위해 해야 하는 것이지 내가 점수를 잘 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는 편하게 발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점수 주시는 신부님들은 제가 미리 낸 원고를 이리저리 뒤적였습니다. 원고대로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고에 바탕을 둔 것이지만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니 오히려 편했습니다. 물론 결과도 나쁘지 않게 나왔습니다.
그 이후로는 사람들 앞에서 강론을 할 때 떨리는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바로 주님을 위한 강론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점수를 잘 받으려고 해서 그렇다는 것을 알고는 강의나 강론을 할 때 ‘내가 아닌 예수님을 위해서’하려고 다짐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리옷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길 계획을 세웁니다. 과연 예수님의 가치가 은전 서른 닢밖에 되지 않을까요? 가리옷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자신의 이익을 챙긴 것입니다.
이것이 배신이기는 하지만 가리옷 유다에게만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한다면 바로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강론을 한다고 하면서도 신자들에게 인기나 다른 무엇을 희망하면서 한다면 이 역시 그 분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잃고 작은 이익을 챙기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이사악의 맏아들 에사우는 배고프고 피곤한 상태로 밖에서 돌아옵니다. 야곱이 죽을 요리하고 있는 것을 보자 그 죽을 좀 달라고 합니다. 영리한 야곱은 형에게 상속권을 팔라고 요구합니다. 당장 배고파 죽을 지경인 에사우는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고 합니다. 야곱은 이 때다 싶어 맹세부터 하라고 합니다. 죽밖에 보이지 않는 에사우는 바로 맹세를 하고 배를 불립니다.
실제로 야곱은 에사우 대신 이사악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사악이 에사우에게 죽기 전에 장자로서 축복을 해 줄 테니 마지막으로 사냥하여 온 것으로 음식을 해 오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레베카는 이사악에게 털옷을 입히고 에사우의 냄새가 나게 하여 눈이 보이지 않는 이사악에게 장자가 받을 수 있는 축복을 받게 합니다. 이스라엘 법엔 장자가 거의 모든 상속을 다 받는 것으로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어찌 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장자권을 하찮게 여긴 에사우에게도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참고 견디면 되는 그것을 참지 못하고 죄를 저질러버립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되는 권리를 포기하고 순간적으로 육체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전 서른 닢에 그리스도를 팔아넘기는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은화 서른 닢에 하느님의 아들을 팔아넘기고 그 분의 사도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영혼까지도 포기하고 맙니다. 우리가 짓는 모든 죄들도 하느님을 잃게 만들고 또 성령의 은혜도 줄어들게 만듭니다.
따라서 죄를 짓는 누구도 가리옷 유다의 선택에 대해 나무랄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는 우리도 그런 선택을 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얼마나 가리옷 유다나 에사우같은 어리석은 선택을 하며 살고 있는지 뒤돌아봅시다
성주간 수요일
-김찬선신부-
어렸을 때부터 유다 이스카리옷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유다가 한 행동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유다의 운명이 이해하기 어려웠고 지금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런 유다를 하느님께서는 왜 태어나게 하셨고,
유다가 그럴 줄 다 아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왜 유다를 제자로 삼으셨으며,
주님 구원의 역사가 수난과 부활의 역사라면
유다의 역할은 수난의 역사에서 필요한 악역 중의 하나일수도 있는데
주님께서는 왜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하실까?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면
잘못 태어난 운명일 뿐 아니라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운명이란 말인가?
제가 청원 형제들 책임을 맡고 있던 언젠가
매 년 하던 대로 수련 전 여행을 같이 하였습니다.
떠나는 날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저는 눈이 오지 않은 남쪽으로 가자고 하였지만
형제들은 눈이 왔으니 오히려 설악산 쪽으로 가자하였습니다.
저는 안전을 생각하고 형제들은 낭만을 생각한 것입니다.
저는 여행 내내 안전 때문에 초긴장을 하였고
운전을 하는 형제는 정말 고생이 많았지만
나머지 형제들은 내내 즐거운 시간이었고
추억의 시간이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데 눈이 더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운전하는 형제는 초긴장 상태에서 운전을 하는데
형제들은 피곤함과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전부 자는 것이었습니다.
무사히 서울까지 와서 늦은 식사에 반주를 하며 제가 말했습니다.
저와 운전하는 형제가 그렇게 고생을 하는데도
쿨쿨 자는 형제들 보면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 흘리시는 예수님 체험을 하였다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한 형제가 겟세마니 체험을 하였으니
좋은 체험을 하였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농담 식으로 둘러친 것이지만
지금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맞는 말이었습니다.
쿨쿨 잔 행동을 결코 잘 한 행동이라 할 수 없지만
그 행동이 다른 사람 구원의 역사 안에서 어떻게 작용할지는 알 수 없고
꼭 나쁘게만 작용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좋은 것이지만
나에 대한 누구의 미움이 나의 사랑을 더 완성에로 나아가게 하고,
배신이 나쁜 것이지만
나에 대한 누구의 배신이 나의 용서를 더 완전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더 더군다나 하느님께서 이런 것들을 통해
나를 어떻게 구원에로 이끄실지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니 말입니다.
시편 138편에
하느님 당신께는 어두움 그것마저 어둡지 않고
밤 또한 낮과 같이 환히 밝다고 하시니
하느님 구원 역사에서는
인간의 악이 악역으로 뒤바뀌는 경우가 허다할 것입니다.
영화에서 악역은 참으로 주인공의 선을 돋보이게 할 뿐 아니라
주인공을 참으로 영웅이게 하는 꼭 필요한 역할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유다에 대해 주님 말씀하셨지만
저는 유다를 주님 구원의 신비 안에서 이해하고자 합니다.
단지 나의 인생에서
유다와 같은 사람을 만나고
그런 일을 당할지라도
예수님처럼 부활에 이르게 하는 수난으로 여기고
그런 수난이 되게 만들겠다고 다짐할 뿐입니다.
유다와 베드로
-이정민 신부-
예수님의 수난기사 안에는 제자들의 당혹감과 두려움을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몇몇 있습니다. 어렴풋하게나마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깨달아가던
제자들에게 힘없이 잡혀가시는 스승의 모습은 당연히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도 특별히 그분을 배반하는 인물로
묘사된 두 사람이 바로 베드로와 유다입니다.
은돈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유다의 모습과 예수님을 모른다고
역정을 내며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배반의 이유, 특히 유다가 배반한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많은 설명을 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배신의 이유보다도 그 결과입니다. 베드로는 그분을
배반했지만 훗날 교회의 주춧돌이 됩니다. 그러나 유다는 후에 자기가 한 일을
자책하여 목 매달아 죽고 맙니다(마태 27,5). 예수님을 똑같이 배반한
이들이지만 결말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무엇이 그런 차이를 낳았을까요?
베드로는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죄를 지은 상황에서도
그는 스승이신 주님께 대한 믿음과 그분의 원의를 먼저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보다 더한 암흑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마음을 열어 주님께 향해야 할 때입니다.
회개의 때
- 진병섭 신부-
성주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 안에서 슬픔이 아니라 기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부활이라는 시간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따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우고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을 취하셔서 오시고, 완전한 인간으로서 삶을 사시고, 수난과 고통과 급기야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완벽한 낮춤을 통해 부활의 영광은 주어집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의 기쁨이라는 것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네 삶을 겸손하게 되새기며 회개하고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성실히 준비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도정에서 유다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깨달음을 전해주고자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배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유다의 배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결말은 너무나 다름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바로 회개에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째 닭이 울자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배신을 후회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회개한 것이 아니라 절망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예수님을 배신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회개에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구원 역사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에게도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표양임에도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원하십니까? 유다와 같은 절망의 삶입니까, 아니면 베드로와 같은 회개의 삶입니까?
새벽을 열며
- 조명연신부
고대 그리스의 대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수업 첫 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에 대해 배우도록 하겠다. 모두 팔을 최대한 앞으로 뻗었다가, 다시 뒤로 뻗어 보아라. 오늘부터 이 동작을 매일 열 번씩 하여라. 내 명령이라 생각하지 말고, 너희 자신과의 약속이라 생각하고 하는 것이다. 모두 할 수 있겠니?”
제자들은 그렇게 간단한 일을 못할 사람이 어디 있냐면서 모두 웃었지요. 한 달 뒤, 소크라테스가 다시 제자들을 불러 물었습니다.
“자, 매일 열 번씩 팔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아라.”
열 명 주 아홉이 자랑스럽게 손을 들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지요. 다시 한 달이 지나고, 소크라테스는 역시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번에는 여덟 명 정도가 손을 들었지요.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어느덧 1년이 지난 어느 날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말했습니다.
“내가 첫 수업 시간에 말한 팔운동을 지금까지 하고 있는 사람은 손을 들거라.”
이미 스승이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 까맣게 잊고 있는 제자들도 있었지요. 그들은 피식 웃으면서 아직까지도 그러한 동작을 할 사람이 어디 있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이 학생을 바라보며 소크라테스는 웃음 띤 얼굴로 말했습니다.
“너라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겠구나.”
그는 다름 아닌 훗날 대철학자가 된 플라톤이었습니다.
아주 간단한 동작이라 할지라도 약속을 잊지 않고 꾸준히 행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꾸준히 행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결과만을 생각하고 좋은 결과만 가져오면 모든 것이 괜찮다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좋은 쪽으로 변화되지 않고 더욱 더 나쁜 쪽으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변화시키러 오셨지요. 바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딱 한 가지,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모두가 이 말씀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처럼,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심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뒷전으로 넘어가고 마는 것이지요.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하는 뻔뻔한 유다의 길은 이제 그만 가야 할 것입니다. 대신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지키고 실천하는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나를 통해서 주님께서 원하는 세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자그마한 사랑의 실천을 해보세요.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양승국신부-
<수동의 때>
한 동물원에서 발생했던 일입니다. 거대한 북극곰 두 마리가 갇혀있던 우리 앞에서 생긴 사고였습니다. 한 아이가 더위를 먹었던지, 아니면 공연한 객기를 부렸던지, 높은 담장을 넘어 곰 우리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쿵’ 하고 아이가 우리 안으로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굴 안에 쉬고 있던 두 마리의 북극곰이 달려왔습니다. 300-400 Kg이나 나가는 곰 두 마리가 앞발을 쳐들고 아이를 공격했습니다.
곰들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끌어안고 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굴 안에서 곰들은 아이를 장난감 다루듯이 했습니다. 여기저기를 이빨로 물어뜯었습니다. 발로 툭툭 찼습니다. 머리로 들이받았습니다.
갑자기 벌어진 돌발 상황 앞에서 우리 바깥에 있던 사람들은 다들 충격에 사로잡혀 비명을 지르고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누군가가 황급히 연락을 했지만, 사육사들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15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이미 늦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곰 사육사들이 조심스럽게 접근했습니다. 사육사들은 곰들을 달래고 달래 겨우 아이를 빼내어 우리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미 죽었으려니 했었는데, 아이의 가슴에 귀를 대본 의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가 아직도 살아있었습니다. 여기저기 많은 상처를 입어 출혈이 심했지만 아이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후에 수의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절대 절명의 순간, 긴박한 상황에서 아이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유일한 원인은 아이가 조금도 저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15분 동안이나 거대한 북극곰의 공격을 받으면서 발버둥치거나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답니다.
‘진정으로 살고자 한다면 죽어야 한다’는 진리를 상기시켜주는 사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성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모든 면 있어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셨던 예수님께서 어느 순간 당신의 태도를 180도 ‘싹’ 바꾸십니다. 때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때 말입니다.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시던 때, 눈부신 예수님의 활약 앞에 백성들은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수동의 때가 도래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의 기적도 없습니다. 더 이상의 치유도 없습니다.
아무런 힘도, 능력도, 권위도 없는 예수님의 모습에 사람들은 실망합니다. 하나 둘 떠나갑니다. 제자들도, 그리고 유다도 짐을 꾸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크게 세단계로 구분되는 것 같습니다. 30년간의 나자렛에서의 오랜 준비기, 3년간의 활발한 사목 활동시기, 그리고 마무리로서, 수난시기.
수난 시기는 철저하게도 수동적인 기간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떠나가도 잡지 않고 그냥 두십니다. 군인들이 나타나니, 순순히 체포되십니다. 대사제의 집으로 끌고 가니 끌려가십니다. 빌라도에게 보내니, 묵묵히 따라가십니다. 채찍 앞에 등을 내미십니다. 가시관을 씌우는데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를 스스로 지십니다. 당신 발로 십자가에 올라가십니다.
수동의 시기,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 고통스럽고, 그래서 피하고 싶은 시기였지만, 이 수난의 시기는 하느님 아버지의 인류구원계획이 예수님 안에 완료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그분께 던진 그 숱한 조롱과 모욕, 배반과 채찍 앞에서 철저하게도 수동적이셨던 예수님, 완벽한 순종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신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묵상하는 성주간입니다
악에서 구하소서
-서효경 수녀-
예수님과 가깝게 지내던 제자들이 점점 예수님한테서 멀어지는 가운데 그분의 죽음을 재촉하고 있다. 유다는 스승을 적대자들의 손에 넘겨주기로 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유다는 스승을 포기했다. 유다는 정녕 알지 못했다. 물은 흐르지 않으면 썩는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자기 식으로 고정되어 버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배반자가 되고 만다. 결국 자기를 위해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는 자기도 잃고 하느님도 잃었지만 끝까지 사랑한 예수님은 모두를 살렸다.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는 자매를 만났다. 남편이 떠나자 몇 달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방에서 나오지 않다가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아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가 잡지에 실린 내 글을 보고 용기를 내어 찾아왔다고 했다. “남편이 왜 당신을 떠났다고 생각합니까?” 하고 묻자 자기 사업을 하기 위해서란다.
그 자매는 영원히 함께 살겠다고 한 남편의 말을 믿고 살아왔는데 남편이 떠나자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자기를 떠난 남편을 여전히 사랑한단다. 남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 그것이 그 자매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유임을 알았다. 나는 그 자매에게 남편을 위해 죽지 말고 살아내라고 권했고, 그 자매는 날마다 미사와 성경공부에 매달리며 살아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자매는 안정을 되찾았다. 자기를 떠난 남편을 계속 사랑하는 것이 그 자매와 남편, 가족 모두가 사는 길이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이나 그 악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 모두 살 길은 사랑밖에 없다. 어떤 처지에서도 우리가 살아날 길은 사랑밖에 없다. 사랑이 길이다. 다만 악의 세력이 클수록 더 많이 사랑해야 하니 그것이 힘들고 버거울 뿐이다.
유다의 배신, 나의 배신
-김종기신부-
우리 모두는 죄의 연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죄는 죄의 상징이며, 세상의 죄를 상기시켜줍니다.
우리는 가끔 사랑하는 사람들이 배신감 때문에 서로 헤어진 경우를 봅니다.
심지어 가족들끼리도 배신감에 실망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봅니다.
아무도 이런 관계를 원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실제 현실 속에서 이런 일을
가끔 보게 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유다가 당신을 배신할 줄 알면서도
이를 묵인하십니다. 예수님의 괴로움은 이루 말 할 수 없으셨겠지만,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를 막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비록 배신을 했더라도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기심과 교만에서 비롯된 배신의 행위를 의식할 때마다
죄인을 용서하시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는
은혜로운 성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독서강론 : 모욕과 수난 속에서도 묵묵히 사명을 수행하는 메시아
-경규봉 신부 -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종으로 하여금 죄의식이나 무거운 짐에 눌려 고달픈 자를 격려하고 주어진 사명을 수행하도록 아침마다 당신의 말씀을 가르쳐주신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그를 가르쳐주시니 그는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여 고통과 박해를 당하고(마 27:26;눅 18:33), 수염을 뽑히고 욕설과 침뱉음을 당하는 모욕을 가운데서도(눅 18:32;막 14:65;15:19) 이를 피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모욕과 고통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을 알고, 모든 오욕을 인내로 이겨낸다. 그는 하느님의 도우심을 굳게 믿는 믿음으로 차돌처럼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으며 박해와 모욕을 이겨낸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의롭고 무죄함을 다 아시며, 함께 계시고 지켜주심을 굳게 믿는다. 그 누구도 자신의 의로움을 걸고넘어질 수 없음을 믿음으로 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자신을 그르다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굳게 믿음으로 잘 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제 1독서 고통 받는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는 메시아의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다. 메시아는 철저히 혼자였지만 자신에게 주어지는 온갖 모욕과 고통을 굳은 믿음으로 참아 이겨내며, 오직 주님의 가르침만을 전하고 자신의 사명을 묵묵히 수행한다.
이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기도하신 후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어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마태 26,39) 하고 하느님 아버지께 피땀을 흘리시며 간구하셨다.
제자들에게는 당신을 위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하고 여러 차례 부탁하시면서 기도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홀로 버려두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철저히 홀로 기도하실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씩이나 같은 기도를 드리셨지만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맡기셨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곧 하느님께서 주신 당신의 사명임을 받아들이시고 말씀하신다. “일어나 가자.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와 있다.”(마태 26,46) 그리고 수난과 죽음으로 가는 십자가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신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께서는 오늘 독서의 예언대로 욕설과 침뱉음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참아 견디신다(마태 26,67). 예루살렘 온 의회와 대사제가 고발해도 묵묵히 서계신다(마태 26,63; 27,12).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도 묵묵히 서계신다(마태 27,14). 병사들의 채찍질과 희롱에도,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도 묵묵히 계실 뿐이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하고 말씀하시면서 숨을 거두신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라는 성부의 말씀이 들렸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셨을 때, 백부장은 “이 사람이야말로 죄 없는 사람이었구나!”(루가 23,46) 하고 말했다.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와 마지막에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낸다.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의로우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수난과 죽임을 당하셨지만, 모든 것을 묵묵히 참아 견디셨다. 오직 하느님만을 굳게 믿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시며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시기에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묵묵히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셨다.
사람을 보지 않으시고,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지 않으시며,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시고, 하느님께로부터 인정받고자 하셨기 때문에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십자가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우리는 매일 어느 길을 가야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손태성 신부-
우리는 지금 1년 중 가장 거룩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잘 묵상하는 축복된 때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성주간 수요일은 유다의 배반과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의 노예살이를 벗어나는 역사적인 사건은 그 자체로 자유와 해방의 몸짓이며 축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진정한 파스카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에게 몸소 다가왔던 하느님을 거부할 뿐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모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가야 할 길을 잘 알고 계시며 그 수난의 길을 가야 하는 도중에 오늘은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이라는 쓰라린 고통까지 겪고 계십니다. 골고타 언덕에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까지 당신이 겪어야 하는 마음의 변화와 고통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으면 합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배신은 오늘 이 사건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 일생을 통하여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십시오. 그분이 진리를 말하고 기적을 행할 때도 사람들은 그것을 믿기보다 오히려 수군거렸습니다.
수군거린다는 것은 부정적인 행동입니다. 그것은 불안한 사람들의 행동이며 무지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사람들은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믿지 않았고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수군거림은 언제든지 예수님을 반격할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었고 불신을 깔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기본적인 태도는 의심과 불신 그리고 배신으로 이어질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세상에 드러나기 어려우며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기에 사람들은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진리를 알아보지 못할 때 그것은 곧 진리에 대한 배신으로 연결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면서 지켜야 할 상식이나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고스란히 피해가 될 것이고, 심오한 정신세계를 추구하기를 포기하였다면 이웃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고, 사랑과 정의의 삶을 살기를 포기하였다면 죄악에 굴복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배신입니다. 내 중심적인 삶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자주 무엇엔가 누구엔가 배신을 행하게 됩니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으며, 행해야 할 것을 행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고, 나그네를 모른척하게 되고, 그릇된 길로 조금씩 비껴가고 있습니다. 그런 삶은 결국 예수님을 외면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나약함으로 유다처럼 우리는 자주 진리의 길을 외면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듣지 않고 수군거리면서 내 삶에 그분을 맞추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 뜻에서 우리는 동시에 항상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이냐 아니면 수군거리는 사람이 될 것이냐의 기로에 우리는 항상 서 있습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늘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올바른 길을 알아듣고 선택함으로써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장재명 신부 -
+찬미예수님
복음에서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가 스승 예수님을 수석 사제들에게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기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유다는 스승님을 수석 사제들에게 넘겨줄 적당한 기회를 노렸습니다. 유다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만나 이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메시아라고 굳게 믿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3년의 시간을 예수님과 다른 열 두 제자들과 함께 동고동락 하면서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결국 유다는 스승 예수님을 수석 사제들에게 팔아넘겨 스승님을 죽음으로 내몰게 됩니다.
유다는 왜 스승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 다녔으면서도 결국 예수님을 배신했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모습과 스승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강한 힘으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줄 그런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강한 힘으로 로마를 물리치기는커녕 오히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늘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질병을 고쳐주고,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와 사랑을 설교하고, 가끔 자신을 하느님과 동일한 분으로 말씀하시자,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와 사제들을 비롯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더 이상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자기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기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립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무서운 일입니까! 내 기대와 맞지 않다는 이유로 생사람을 죽여 버리는 이 끔찍하고 놀라운 일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요? 그 근본 동기는 바로 나의 기대와 맞지 않다는 것, 나의 생각만이 옳다는 것, 나의 생각에 다른 사람이 맞춰야 한다는 극도의 이기심과 교만함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는 잘 모르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사실 우리도 우리가 가진 선입견으로 생사람을 잡는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세 치 혀로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죽여 버리기도 하고, 선한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내몰아 버리기도 합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던 일이 사실 지금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유다는 그런 우리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의 꽉 막힌 선입견과 편견 때문에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가진 선입견은 다른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덮어 버립니다.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요? 사람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 또 어디 있을까요?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가슴 아픈 일을 가장 사랑하는 제자에게 당해야만 했습니다. 스승님의 마음 아픔과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스승님은 유다의 배반을 알고 계시면서도 유다를 내치지 않으시고 다른 열 한 제자와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십니다. 그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저마다 근심하면서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기 시작합니다.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유다의 이 뻔뻔스러움, 진실을 감추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제자가 저럴 수 있는가!’하며 분노할지 모르지만, 사실 유다의 이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너무나 자주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하면서 발뺌을 하고, 예수님을 배반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유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바로 우리들이 또 다른 유다로 살아갈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내일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성삼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기 전에 우리의 모습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정말 유다처럼 선입견으로 다른 사람들을 죽여버리고,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진실을 감추어 버리며 살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면서 그런 모습이 있었다면 진정으로 뉘우치고 예수님께 용서를 청하면서 성삼일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김상현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모자라는 것들을 중심으로 채우면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집이 가난한 사람은 부유함을, 몸이 아픈 사람은 건강을, 남 아래에 있는 사람은 권력을, 가정이 불안한 사람은 평화를 추구합니다.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것...그것은 자신의 발전을 위해 매우 좋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추구할 필요도 없으면서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욕심을 가지게 되면 원래 가지고 있었던 상태보다 더 나쁜 결과를 낳습니다.
매우 건강함에도 불구하고 심한 운동을 한다는 것은 건강을 오히려 해치는 행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한 남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 위에 올라서려고 한다면 오히려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나 더욱 위험한 것은 더 이상 물질적인 것이 필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사람... 특히 다른 사람들을 해치면서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사람은 그 영혼까지 팔아먹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오늘 제자 유다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넘보고 있는 유다인들과 흥정을 합니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결국 유다는 그동안 모시던 스승을, 믿고 따랐던 주님을 은전 서른 닢에 바꾸게 됩니다. 과연 유다에게 은전 서른 닢이 예수님과 바꿀 정도로 그 돈을 필요로 했을까요? 유다는 그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는 돈의 노예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돈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집착이고 욕심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돈과 그의 영혼을 바꾸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그 추구함에 있어서 욕심과 집착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과의 만남에 있어서 이 집착과 욕심 때문에 주저하지는 않습니까?
처음부터 돈의 노예가 되는 이는 없습니다. 점점 돈에 집착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삶의 길에 있어서 우리 주위의 많은 것들이 예수님과 바꾸자고 유혹합니다. 때로는 심한 갈등도 느낍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영혼을 책임지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의 영혼을 노예로 만드는 온갖 유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항상 반성하여야 합니다.
회개
-김훈일 신부-
하느님은 죄인에게 벌을 내리시고 의인에게 상을 주십니다. 또한 죄인을 벌하시기 전에 반드시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때에 회개하면 무슨 죄든지 용서하시고,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내리십니다. 이 선택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때에 회개하는 것이 바른 선택입니다. 예수께서 유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셨습니다. 회개하도록 주신 기회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차례로 말하기를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 모두
마음에 찔리는 그 무엇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제자들의
양심을 자극할 때, 이때가 바로 회개의 기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과 생각을 환하게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얼마나
간절히 유다가 할 말을 기다렸겠습니까?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회개의 기회는
이로써 지나갔습니다. 회개는 무엇입니까? 하느님께로 우리의 삶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밝은 빛을 비추실 때에
순종하는것입니다. 지금이 회개의 때입니다. 유다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고
지금 회개를 요청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문호영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배반하는 유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면서도 그 배반의 의미와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배반을 예고하실 때 유다도 다른 사도들처럼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라고 뻔뻔스럽게 묻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게 아니고 그냥 예수님을 잠시 팔아넘기는 것 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으시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예수님을 판 돈 서른 닢을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에게 주면서 “죄 없는 분을 팔아 넘겨 죽게 만들었으니 나는 죄를 지었소”(마태 27,`34)라고 말합니다. 돈을 돌려준다는 것은 예수님을 다시 옛날처럼 원상회복해 놓으라는 요구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의 모습, 죄를 짓는 사람들의 모습이 거의 유다와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또 죄를 지으면서도 자기 행동의 심각성을 그만큼 느끼지 못합니다. 배반과 죄를 짓는 순간까지도 ‘나는 아니겠지?’(마태 26,`25 참고)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하자 예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라고 한 말씀은 ‘그래, 네 안에 있는 참된 너는 배반하고 싶지 않지만 한편으론 그 반대의 마음도 있구나’라는 뜻이 아닐까요?
우리 안에는 서로 상반된 두 마음이 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예수님을 배반하는 마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오늘도 하고 계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이때 우리 안에 있는 참된 나는, ‘나는 아닐 거야. 나는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 바로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주님을 결코 배반하는 일이 없게 되도록. 그리고 만일 주님을 배반하는 행동을 하면 그런 자신의 행동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하고 늘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악의 유혹
-정하돈 수녀-
◆스승을 팔아 한몫 챙기려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 인간, 그분을 넘겨주려고 기회를 엿보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스승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인간! “그대들 가운데 하나가 나를 넘겨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뻔뻔스럽게도 “저는 아니겠지요, 주님?” 하고 대꾸한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으나 사탄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가르치신 것처럼 한마디 원망도 반항도 없이 죽음의 길을 가셨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으며, 죽으면서까지 원수를 사랑하셨다.
만일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즉시 스승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약해서 악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큰 잘못을 했습니다”라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청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종종 원수, 배신자는 나와 관계없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 동무, 내 곁에서 나와 함께 있던 자들인 경우가 있다. 그래서 친구의 배신은 더욱 고통스럽고 아픈 것이리라!
‘그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을 위해서는 좋았을 것’이라고 비장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상처 받은 마음을 어떻게 위로해 드릴 수 있을까? 주님 말씀대로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을 수 없지만 그런 일이 생기게 하는 이는 정녕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마태 18,7)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양승국신부-
<유다의 때, 수요일 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의 때. 최후의 만찬이 거행된 성목요일의 하루 전날인 수요일 밤, 유다는 제자단에서 몰래 빠져나와 수석사제들을 찾아갑니다. 행여 누군가가 볼세라 여우처럼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은밀히 원수들과 내통합니다. 예수님의 몸값을 흥정 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라는 표현은 유다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스승 예수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12사도 가운데 한명으로 뽑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탁월한 수완을 인정하셔서 12사도 가운데서도 중책인 총무 역할까지 맡기셨습니다.
따져보니 유다는 이토록 예수님으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풍성한 예수님의 은총과 자비 속에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 유다가 스승을 팔아먹고 있습니다. 마치 물건처럼, 종처럼 말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배은망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태연히 자신의 계획을 말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다가 원수들과 가격을 흥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적대자들은 예수님의 몸값으로 은돈 서른 닢을 유다에게 지불합니다. 유다는 스승이자 만왕의 왕 예수님을 팔아넘긴 대가로 겨우 한명의 노예 몸값을 받았습니다.
은돈 서른 닢을 챙긴 유다의 행동을 보십시오. 너무나도 태연하게 제자단에 합류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한 식탁에 앉습니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 보십시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배반자 유다를 두고 요즘 독서계에서는 말들이 많습니다. 최근 소개된 ‘유다복음서’에 의하면 유다는 예수님의 요청으로 배반을 했고, 그 배반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유다는 구세사에 일정부분 기여한 사람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수도 없이 많은 가설 및 추측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당시 배반자 유다의 심리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을 당시 유다는 사도로서의 합당한 자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재정 담당은 아무에게나 맡기는 것이 아닐 텐데,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그 책임을 맡겼습니다. 그만큼 신뢰가 가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전도여행에 파견되었고,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을 부여받고 치유와 구마활동도 행하였습니다.
그러던 유다가 왜 배반을 하게 되었을까요?
복음서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유다는 세월과 더불어 그 순수하고 좋았던 첫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제자단의 모든 경제를 책임지던 유다였습니다. 때로 막대한 금액의 기부금도 만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특별대우에도 자기도 모르게 길들여졌습니다. 유다의 몸과 마음은 조금씩 예수님이 아니라 돈에로 기울어져만 갔습니다.
이미 돈맛을 알아버린 유다였습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어버린 유다였기에 스승마저도 팔아치웁니다. 스승을 팔아넘기기 위해 스승에게 입맞춤할 정도가지 파렴치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유다가 얼마나 불쌍했던지 예로니모 성인의 이렇게 외쳤답니다.
“아, 불행한 유다여! 아, 불쌍한 유다여!”
예수님의 일을 하는 우리 교회 구성원들 역시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큰 일 납니다. 사랑의 실천이나, 복음 선포는 뒷전인 채 돈만 밝히기 시작할 때, 물질만능주의에 젖어들기 시작할 때 우리 인생 역시 유다처럼 불쌍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투명성을 상실할 때, 달콤한 금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때 우리 역시 유다처럼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로운 때에 그 넓으신 자비로 저를 도우소서
-이기양 신부-
일년 내내 복음 말씀 중에 등장하지 않다가 성주간이 되면 마치 주인공처럼 나타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유다입니다. 유다는 이 성주간, 암흑의 시간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등장하여 놀라운 사건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 됩니다. 어둠의 세력이 중심에 서는 이런 일들은 오늘 성경에서 뿐만이 아니라 나라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가 혼탁해지고 사회가 부정직해지면 비도덕적인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서 활개를 치고 다니지요. 이런 모습은 나라나 사회뿐만이 아니라 성당에서도 가끔 볼 수가 있습니다. 성당 공동체가 복음적이지 않으면 남을 헐뜯고 음해 하는 사람들이 흐름을 이끌어 가고 그 때문에 복음적인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힘들어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우리는 해마다 성주간이 되면 유다의 어둠을 만나게 되는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두고 ?그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26,24)라고까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말 유다는 태생이 악한 사람으로 태어날 때부터 어둠의 세력 그 자체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유다는 악의 모습이 아니라 유혹에 빠진 자의 모습입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유다 역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집도 절도 없는 스승이라는 것을 알았을 터이고, 재산을 기대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미래를 보장해 주는 스승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터이지만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랐을 때는 참으로 순수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가족도 버리고 일신상의 안위와 쾌락도 버리고, 오직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는 자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열 두 제자가 모두 그랬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모습, 또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모습, 고통받는 사람들의 위로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로 환호하는 그 모습과 말씀의 놀라운 권위를 보고 함께 하며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보람을 느끼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존경과 흠숭을 드리며 하느님의 나라를 알아 가는 믿음의 과정을 밟아 갔던 것입니다.
믿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하지 못하면 퇴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다는 특히 재정 담당의 직분을 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살림돈을 관리하고 있었지요. 돈 관리는 아무에게나 시키지 않습니다. 믿을만하고 머리가 좋고 현명한 사람에게 맡기게 되지요. 예수님께서 유다를 신뢰하셨으며 유다 또한 나름대로 현명하고 지혜롭게 일을 처리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능숙함은 성장의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유혹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돈을 관리하면서 돈의 편리함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지면서 유다는 점차 재물의 유혹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조금씩 양심을 속여가며 작은 돈으로 시작한 욕심은 있는 돈에 만족하지 못하고 끝내 재물에 대한 집착과 갈증에 시달리게 만들었지요. 동시에 유다는 스승인 예수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돈에 욕심이 생기거나 그릇된 것에 집착하게 되면 그 외의 다른 것은 모두 다 불만투성이로 바뀌고 마는 것이 사람 마음의 속성입니다. 급기야 유다는 예수님을 판단하기 시작하고 불만은 배신으로 기울어지고 말았던 것이지요. 유다는 배반의 실마리를 스스로 합리화하기 시작하면서 한탕할 기회만 엿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자리를 이제 돈이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지만 이제는 모든 것의 중심이 재물이 되어 버렸던 것이지요. 결국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 넘기고 마는 멸망의 길로 치달아 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가 유다 같이 탐욕적이고 이중인격자 같은 사람에게만 드러나는 모습인가하면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유다 같은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처음 영세할 때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모든 이웃을 깨끗한 마음으로 대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때는 하느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봉헌할 수 있을 것 같고, 또 교회 안에서 단체장이나 반장 등 봉사 직분을 맡게 되면 거기에 충실하려고 기도하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지요.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타성에 젖기 시작하고 하나, 둘 한 눈을 팔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성직자와 수도자에 대한 존경이 사라지게 됩니다.
하느님에 대한 공경이나 두려움이 사라지면 거기에는 반드시 인간적인 욕심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명예를 우선시하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나 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미워하며 배척하게 됩니다. 이러면서 서서히 하느님 중심의 삶이 자기 중심의 삶으로 비껴가기 시작하지요. 그리고 바리사이들처럼 내 편리대로 하느님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에 대한 마음이 변질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세상의 욕망에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우상인 재물을 섬기게 되지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면 세상 욕심이 마음에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육체적인 향락이고, 또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재물에 대한 욕심인 것입니다. 신앙인의 모습에서 전형적인 물질 숭배자의 모습으로 변해버리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처음 세례를 받을 때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거기에서 기쁨을 얻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해이해지고 느슨해지면서 계속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하고 머뭇거리다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구분되지 않는 모습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느님도 좋고 세상도 좋은 모습으로 구분 없이 흐릿하게 살아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하느님보다는 세상과 재물을 따르는 모습으로 변질되기 십상입니다.
돈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사람들도 많고, 부모나 형제, 자식 간에도 그 중심이 하느님이 아니라 재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살아가면 신자면서도 갈증과 혼란을 겪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만족할 줄 모르고 늘상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으며 이웃에 대해서 쉽게 말하며 상처를 주고 맙니다.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믿지 않는 이들과 똑같은 갈증에 시달리는 것이지요. 그들은 더 많은 소비를 하게 되고 눈에 보이는 외형에 더욱 신경을 씁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십니까? 아니지요. 지금 우리들은 그 어떤 시대보다도 풍요로운 시대를 살지만 그 어떤 시대보다도 갈증에 시달리고 우울증에 빠지며 서로 싸우고 불화하는 등 말 그대로 지옥을 방불케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사람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재물이라는 것이 그렇게 마귀와도 같은 유혹자로서의 역할만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재물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드는 계기를 얼마든지 마련해 줍니다. 이 때 분명한 것은 하느님과 사람이 우선이지 재물이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은 미국 사회를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표현합니다. 한때 천민 자본주의의의 극치를 이루던 미국의 자본주의는 어느 순간 자선 사업과 기부 문화로 흐름이 바뀌면서 세상의 자본주의의 흐름을 바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카네기와 록펠러입니다. 요즘은 빌 게이츠 등이 그 대를 이어가고 있지요.
록펠러 하면 떠오르는 말은 석유왕, 세계 최고의 부자, 자선가 등입니다. 흔히 미국의 3대 재벌로 록펠러가(家), 뒤풍가(家), 엘런가(家)를 꼽는데 그 중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것이 록펠러 가문입니다. 록펠러는 많은 기록을 가지고 있지요. 첫째는 자선의 기록입니다. 그는 록펠러 재단, 일반교육 재단, 록펠러 의학연구소 등을 설립하여 남을 위해 많은 재산을 베풀었습니다. 둘째는 인생역전의 기록입니다. 그는 매우 가난했습니다. 첫 여인에게 ?가능성이 없는 가난뱅이?로 몰려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비방을 자극제로 삼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재벌로 우뚝 섰지요. 셋째는 장수의 비결입니다. 1839년에 태어난 록펠러는 98세까지 장수를 누리다가 1937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눈을 감을 때까지 치아와 위장은 여전히 건강했다고 합니다. 록펠러가 이렇게 3대 기적을 창출해낸 원동력은 다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감사의 마음이었지요.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남을 비방하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경건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평생 동안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지요. 셋째로 꼽는 것은 성경 묵상입니다. 평생 성경과 함께 했던 록펠러는 아흔 살이 넘어 시력이 약해지자 사람을 고용해 성경을 읽게 했습니다. 귀로 하느님 말씀을 들으며 마음의 평화를 유지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재물이 나쁜 것이 아니지요.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 재물을 쓰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재물을 부리는 사람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데만 급급하게 되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부모 형제와도 멀어지고 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재물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잘 활용한다면 하느님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사람들과 얼마나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갈 수가 있겠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이기적으로 재물을 사용하면 나도 죽고 남도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여 지혜롭게 사용하면 나도 살고 이웃도 모두 잘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매년 성주간이면 최고의 악인으로 등장하는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는 재물에 대한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고 하느님과 이웃보다도 재물이 앞서는 삶을 살다가 멸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우리 시대가 바로 이와 닮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재물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것이지요.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고 이웃과 함께 잘 살아가는 바탕이 되어야 하는 재물과 재능이 오히려 하느님을 멀리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성주간 수요일인 오늘 복음은 특히 유다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우리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우리 삶의 중요한 핵심입니다. 나에게도 유다와 같이 재물의 유혹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 삶이 하느님과 사람보다는 재물에 기울어져 있다면 유다의 모습이 머지 않아 드러날 것이고, 반대로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이웃 사람이 우선이며 재물은 다음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재물이 더 풍요롭고 평화스러운 여러분의 삶을 만들어 주리라 확신합니다.
이별 준비
-강영구신부-
+날이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같이 음식을 나누시면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습니다. 만난 사람은 헤어지게 마련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도 이 보편적인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는 모습이나 헤어지는 방법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탐욕과 어리석음에 사로잡힌 사람은 살아있지만 필멸(必滅)하고
다시 만날 수 없는 영이별(永離別)의 길을 갑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뜻(天命)을 따르면서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의 길을 가지만
죽음을 뛰어넘어 생명으로 부활하고 헤어지지만 다시 만납니다.
유다는 스승 예수를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길 계책(計策)을 꾸미면서 헤어짐을 준비합니다.
탐욕과 어리석음이 그로 하여금 필멸(必滅)과 영이별(永離別)의 길로 내몹니다.
이런 유다를 향해 예수께서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마태26,24)고 한탄합니다.
예수님도 헤어짐과 죽음을 준비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나누는 마지막 만찬(晩餐)은 이별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의 시작입니다.
예수께서 준비하시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건너감(過越 Pascha)입니다.
유다와 달리 예수는 하늘의 뜻을 따르는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성주간聖週間이 건너감(過越)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저는 아니겠지요 ?
-곽명호 신부-
신학교의 사월은 참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라일락 향기가 창가에 눅눅히 젖어 들고,
고요함 속에 들려오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는 밤을 더욱 깊고 그윽하게 만들었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하느님은 세상을 온통 병아리 연두빛으로 바꾸어 놓으셨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돌아다보면 힘겹던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학교를 느지막이 들어간 내게 가장 큰 걸림돌이요 십자가는 뜻밖에도
동료 신학생들에게 자존심을 짓밟히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사소한 말에도 나는 상처를 받았다.
그해 사월은 내게 잔인한 달이었다.
이해받지 못한 분노와 미움이 그리고 구겨진 자존심이 뒤엉켜 갈팡질팡
하다가 결국에는 매일 습관처럼 성당을 찾았다.
묵상을 한 것이 아니라 미움을 삭이느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주님! 저는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조그마한 자존심 하나인데 이것마저 빼앗으려 하시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사월이 다가도록 주님께서는 아무런 답변도 없으셨다.
매일 물끄러미 성당에 앉아 아무 생각도 없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길게 늘어진 현란한 봄 햇살과 창문 너머로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쩍새의 울음소리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라한 모습으로 졸고 있던 내 영혼 깊은 속에서
“네가 양보할 수 없다고 한 조그만 자존심과 이기심이 네가 버렸다고 말한 그 모든 것보다 더 큰 것이다”라는 말이 울려 퍼졌다.
사월의 길고 지루했던 싸움이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순식간에 뒤집기 한판으로 끝났다.
주님수난 성지주일은 일년 중 복음을 두 번 읽는 특별한 전례를 지낸다.
성당 밖에서 평화의 행렬 전에 읽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찬미 받으소서. 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이라고 찬양한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야말로 최고의 환영식을 베풀어 준 셈이다.
그런데 성당 안에 들어와서 읽는 복음은 정반대로 처절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며 그들이 가장 혐오하는 십자가에 못박으라 소리친다. 방금 찬미의 노래를 부르던 입으로, 이제는 거침없이 욕설과 저주의 고함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화나게 하였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매년 같은 수난 복음을 반복하여 읽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이 그렇게 비참하게, 그렇게 고통스럽게 돌아가셨음을 되새기자는 것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일게다.
자기 이기심의 잣대로 형제들을 재고 판단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미움과 분노의 미궁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그리고 그 미움과 분노의 끄트머리에서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소리치며 단죄의 칼을 휘두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스가리옷 유다처럼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도 여전히 예수님은 십자가형이다.
배반의 길과 십자가의 길
-박상대신부-
지난 사순 제5주간 월요일부터 어제 성주간 화요일까지는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요한복음이 봉독되었다. 오늘 성주간 수요일에는 마태오복음에 담겨 있는 수난사화의 한 토막을 듣는다. 오늘 복음은 유다가 대사제들로부터 은전 서른 닢을 받고 예수를 넘겨주기로 이미 약속했고(14-16절), 무교절 첫날, 과월절이 시작되는 저녁 시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과월절 만찬에서 유다의 배반을 결정적으로 예언하심으로써(20-25절) 본격적인 수난사화의 도입부 역할을 담당한다. 이는 예수께서 아직 오지 않았다고 자주 말씀하셨던 ’당신의 때’가 드디어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때는 ’제자의 이율배반적인 행동’과 과월절 만찬에서 스승이 발설하신 ’제자의 배반예고’로 시작된다. 스승의 제자가 스승을 넘겨주기로 약속했고, 스승은 제자의 배반을 예고한 것이다. 참담한 비극(悲劇: tragedy)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어제는 요한이 쓴 비극을 접했고, 오늘은 마태오가 쓴 비극을 읽는다. 성주간 화요일과 수요일에 연이어 같은 비극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요한의 기록과 마태오의 기록이 마지막 만찬의 틀 안에서 수난사화의 시작으로 제자의 배반을 주제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전후 문맥상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수난사화의 도입부에 있어서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최후만찬의 시점(時點)이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요한 13,1) 마지막 만찬으로 추정되는 제자들과의 식사를 나누는 식탁에서 세족례를 행하시고 유다의 배반, 새계명 선포, 베드로의 배반을 차례로 예고하시면서 길고 장황한 고별사를 행하신 것으로 보도하는 한편, 공관복음은 무교절 첫날(마태 26,17; 마르 14,12; 루가 22,7) 과월절이 시작하는 시각에 제자들과의 최후만찬, 이 자리에서 유다의 배반 예고, 성체성사 제정, 그 후 올리브산으로 향하는 도중에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고 있다. 마르코와 루가는 무교절 첫날에 과월절을 위한 양을 잡는 관습이 있었다고 하는데, 무교절과 과월절은 동시에 시작되는 축제(출애 12,1-20)이다. 참고로 유다인의 모든 축제들은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전날 저녁 해질 무렵부터(대략 6시경) 시작된다. 따라서 최후만찬의 시점이 요한복음에는 과월절 하루 전 저녁 6시 이후로, 공관복음에는 과월절이 시작하는 바로 그날 저녁 6시 이후라는 점은 확실하다. 왜 같은 사건을 이렇게 다른 시점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어느 쪽이 정확한지를 따져 묻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다. 물론 성서학자들 간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결국 요한복음사가가 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과월절이 시작되기 전 낮에(또는 해질 무렵에) 양을 잡는 예식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잠시 무교절과 과월절에 대하여 살펴보자. 원래 무교절(Mazzot)은 "누룩 없는 빵의 축제"로 농경사회였던 이방인 가나안의 축제였다. 과월절(Pesah)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탈출을 기념하는 축제로서 니산월(유대력으로 1월) 15일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축제는 둘 다 이미 니산월 14일 저녁부터 시작된다. 역사적인 이집트 탈출사건이 벌어진 훨씬 후에 기록된 출애급기는 무교절과 과월절 축제를 한꺼번에 묶어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념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출애 12,1-20)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니산월 10일에 어린양을 준비하여 두었다가, 이를 니산월 14일 해가 지기 전에 도살하여(대략 오후 3시~6시 사이) 누룩 없는 빵을 함께 준비하여 놓고, 해가 저문 뒤에(무교절과 과월절의 시작) 불에 구운 양고기와 누룩 없는 빵을 먹음으로써 축제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누룩 없는 빵은 곧 정월 14일 저녁부터 20일 저녁까지 먹어야 했다.(출애 12,18) 그런데 최후만찬의 시점이 정확히 언제였던가를 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왜 예수님의 최후만찬과 십자가 죽음이 무교절과 과월절에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해결점은 ’누룩 없는 빵’과 ’어린양의 피’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죄사함을 위하여 내어줄 자신의 몸과 피를 무교절과 과월절 축제의 의미로 부각시켜 신약의 새로운 축제를 세우시려 하신 것이다. 이로써 구약의 해방절 만찬은 제자들에게는 스승과 함께 나눈 최후의 만찬이 되었고, 예수님에게는 세상과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구원의 징표요 새로운 계약의 설정이 된 셈이다.
유다의 배반에 관하여도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 복음의 서두가 밝히고 있듯이, 유다는 대사제들로부터 예수를 넘겨주기로 약속하고 은전 서른 닢을 받았다. 이것으로 유다가 스승을 배반했다는 말은 없으나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보고 있었다니 이미 배반한 것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유다가 왜 이토록 무모한 결정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전후 구절을 토대로 각자의 상상에 맡길 수도 있겠다. 예수를 넘겨주는 대가로 유다가 받은 은전 30닢은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받은 은 20냥(창세 37,28), 들릴라가 삼손을 넘겨주는 대가로 받은 은 1,100세겔(판관 16,5.18), 그리고 즈가리야 예언자에게 팔아 넘길 양을 친 대가로 준 30세겔(즈가 11,12)을 떠올려준다. 아무튼 유다도 12제자 중 하나이며,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과 더불어 3년간 동고동락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때’가 드디어 왔음을 아시고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신다. 이 식사는 무교절과 과월절, 해방절의 만찬이요, 동시에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께서는 해방절 만찬 식탁에 앉아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21절) 하고 말문을 여셨다. 이에 제자들은 몹시 걱정이 되어 제각기 자기는 아닐 것이라고 반문하였다.(22절)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의 보도와 는 전혀 달리 "지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 바로 나를 배반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죽음의 길로 가겠지만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23-24절) 라고 하신다.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라니 그가 과연 누구인가? 사실은 막막하다. 물론 배반자는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죽게된다. 예수께서 사형언도를 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마태 27,3-10), 아니면 은전 30닢으로 땅을 샀다가 거꾸러져 배가 터지는 극도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는지(사도 1,16-20)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아무튼 이 시점에서 예수께서는 누구 하나를 지목하신 것이 아니라 12명 중 누구든지 그가 될 수 있다는 의도로 배반의 가능성과 영역을 극대화시키고 계신다. 결국 제 발이 저린 유다가 걸려들었다: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그것은 네 말이다" 하고 일축하셨다. 이게 무슨 뜻일까? 첫째는 유다가 자기는 아니라는 말이 사실과 다른 말로서 "너만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둘째는 "그것이 너의 말이기는 하지만 나(예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필자는 전자의 의미를 예수를 따르려는 개개인의 상황에 부쳐두고, 후자의 의미에 동의하고 싶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이 시작부터 제자의 배반으로 침울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제자의 배반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관계상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내어 맡겼으며, 본성상 같은 하느님으로서 완전한 자유의지로 세상 구원의 십자가 길을 가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람됨의 참 뜻일 것이다. 배반 때문에 십자가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배반의 길과 십자가의 길은 서로 완전히 다른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