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帛書)

십자가의 성요한, 신앙 안에서의 스승

나뭇잎숨결 2010. 2. 22. 08:57

십자가의 성 요한 서거 400주년을 맞이하여 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서한

 

 

 

 

 

신앙 안에서의 스승

 

 

 

 

MAESTRO DELLA FEDE

 

 


 


교황 성하는 교회의 박사 십자가의 성 요한의 400주기를 맞이하여

가르멜 산의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맨발 형제회 총장인 펠리페 사인즈 데 바란다 신부 앞으로

사도적 서한을 발송하였다.

 

 

 


서론

 

 

 

  1. 신앙 안에서의 스승이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증인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특히 우리가 그의 서거 400주년을 경축하는 오늘날에 교회의 기억 안에서 생생히 현존합니다. 성인은 1591년 12월 14일 그의 우베다 수도원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집으로 부름받아 영광에로 옮아 갔습니다.
  교회는 이토록 훌륭한 자기 아들이 삶의 모범과 탁월한 작품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산출해 내는 성덕과 지혜의 풍성한 결실들을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 기쁨을 누립니다. 참으로 그의 인품과 가르침은 아주 다양한 종교적 및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관심을 끕니다. 그는 그들을 이해하고 인간 인격과 신앙인의 가장 심오한 열망에 대고 속삭인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축일을 경축하는 것이 그의 중심 메시지 - 신.망.애덕안에서의 향주(向主) 생활 - 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또 그 메시지를 더욱 널리 알려지게 하는 데에 기여하리라는 희망을 품습니다.
  모든 이를 상대로 하는 이 메시지는 십자가의 성 요한을 자기 사부와 영적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데레사 가르멜회의 특별한 유산입니다. 그것은 그 수도회의 절박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성 요한은 그의 모범 덕분에 가르멜 생활의 귀감이 됩니다. 그의 저서들은 오늘날 하느님의 모습을 찾는 그런 모든 사람들이 고유해야 할 보화입니다. 그의 학설은 아주 특별나게는 그의 고국 스페인에서 우리 시대에도 많은 점을 가르쳐 줍니다. 그는 가르치는 스승으로 고국의 문학과 이름을 전세계에 떨치고 있습니다.

 

   2. 본인 자신은 특히 폰티베로스의 이 성인의 경험과 가르침에 매료되어 왔습니다. 저의 사제 양성 초기 때부터 저는 신앙의 길에 있어서 확실한 안내를 그 안에서 발견하였습니다. 그의 가르침의 이런 측면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신앙의 영역 안에서 각종 위험과 유혹으로 가득차 있기도 하는 현대와 같이 새로운 시대에 대단히 중요한 것처럼 내게 보였습니다.
 유럽이 가르멜 성인의 탄생 400주년(1542-1942) 기념의 분위기에 아직도 젖어 있었고 또 전쟁의 어둔 밤의 잿더미로부터 헤어나기 시작할 즈음에 로마에서 본인은 십자가의 성 요한에 의한 신앙이라는 주제로 저의 신학 박사 학위 논문1)을 작성하였습니다. 그 논문에서 저는 신비 박사의 중심 단언에 대한 분석적 논의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교류를 위한 유일한 가장 가깝고도 적절한 방도라고 성인은 단언합니다. 그때에도 저는 요한이 견실한 신학적 교리를 정리하였을 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 기도의 관상적 차원, 사도적 사명이 하느님 안에서의 삶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힘 그리고 희망 안에서 영위되는 그리스도교 생활의 창조적 긴장 따위의 근본 측면에서 그리스도교 생활을 제시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1982년 11월에 스페인을 방문하는 동안 본인은 세고비아의 로마 제국 시대의 도수관(導水官)을 배경으로 성인을 생생히 기억하는 기쁨을 만끽하였습니다. 저는 그의 무덤을 찾아가 보았고 그의 유물에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그때에 저는 다시금 신앙의 위대한 메시지, 교회와 스페인과 가르멜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진수를 토로 하였습니다 :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 안에서,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 속에서, 고요한 기도 안에서, 밤의 어둠 속에서 영혼을 정화시키는 불꽃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발견하는 활기차고 생생한 신앙의 메시지를 표현하였습니다.2)

 

  3. 우리가 그의 400주기(週忌)를 경축하면서 또 다시 이 스승의 발치에 앉아 보는 것은 적절한 일입니다. 그가 이 역사의 교차로에 서 있는 우리들을 위한 여행 동반자라는 사실은 우연한 일치입니다. 우리는 2000년대를 진입하려 하고 있다. 교회의 순수한 교리와 성스러운 생활 안에서 교회의 쇄신을 시작하였고 지탱시킨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된 지도 벌써 25년이 흘렀습니다. 공의회가 천명하는 바와 같이 "교회의 사명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끊임없이 쇄신 정화하며 하느님 아버지와 사람이 되신 성자를 현존시켜 드리고 볼 수 있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생생하고 성숙한 신앙, 즉 난관을 밝히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훈련받은 신앙의 증거로써 이루어집니다."3)
  하느님의 현존과 그리스도의 현존, 성령의 인도하에 이루어지는 쇄신의 정화와 생생하고 성숙된 신앙의 생활화 - 이는 참으로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와 남녀 교우들을 위한 그의 메시지의 핵심이 아닙니까? 우리가 만일 우리 신앙을 갱신하고 그 불꽃을 타오르게 하지 못한다면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대한 과업들 중 어느 하나라도 수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만이 우리로 하여금 삶과 역사 한가운데에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구원현존을 체험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인간이 하느님과의 친교에 부름받고 있는 하느님의 아들 딸로서 살아가는 조건과 고귀한 품위의 의미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것은 신앙뿐입니다. 4) 신앙은 신앙인을 재인식시켜 주고 갈수록 더욱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빛에로 그들을 향하게 해주기 때문에 새로운 복음 선교의 원동력입니다.

 

   4. 십자가의 성 요한은 여러 가지 사항으로인해 교회 안에서 또 문화 세계 내에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는 문학인이며 카스탈리아 언어를 구사하는 시인입니다. 그는 예술인이며 인본주의자입니다. 그는 심오한 신비를 체험한 인간입니다. 그는 신학자이며 영적 주석가입니다. 그는 영적 스승이며 양심의 지도자입니다. 신앙 여정에서의 스승 또는 안내인으로서 그는 관상을 통해 그리고 형제 자매들에 대한 몰아적 희생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하려고 애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의 모범과 가르침을 통하여 빛을 비추어 줍니다. 그의 고결한 시 작품과 학문적 저서 - 가르멜의 산길, 어둔 밤, 영혼의 산 불꽃 - 안에서는 물론이고 또한 그의 짧고 함축성 있는 소품들 - 빛과 사랑의 노래, 잠언과 권고 - 그리고 그의 편지들 안에서 성인은 영성과 그리스도교 신비 생활의 훌륭한 종합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제시한 이같은 풍성한 내용들 중에서 내가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자 하는 것은 그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인도해 주며 시련의 어둔밤에서 그의 유일한 빛이 되었고 성령에 의해 타오르는 뜨거운 불꽃인 살아있는 신앙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싶습니다.
  성인이 자기 삶으로써 훌륭히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신앙은 흠숭과 찬양을 고취시켜 준다. 그것은 모든 인간을 탁월한 실재들의 현존에 젖어있는 참다운 세계 안에 정착하게 해준다. 따라서 본인은 "교사들 중의 교사이신 성령"5)의 빛 안에서 그리고 십자가의 성 요한의 지혜 문학적 스타일과 일치하여 신앙에 관한 가르침의 몇 가지 측면을 해석하고자 합니다. 본인은 오늘날 희망차 있으면서 도전적이기도 한 이 역사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남녀들과 함께 그의 메시지를 고찰하고자 합니다.

 

 

 


I. 신앙 안에서의 스승

 

 

 

역사적 맥락
  5. 십자가의 성 요한도 예외없이 역사적 환경 속에서 살아야만 하였는데 그 상황은 그의 신앙의 충만한 발전에 박차를 가한 풍요로운 가능성들을 그에게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의 생애(1542-1591) 동안 강렬하고 창조적인 종교 시대가 스페인과 유럽과 아메리카 등지에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토대 위에서 가톨릭 개혁이 확장되어 가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불일치, 교회 일치의 균열, 내외적 갈등의 때이기도 하였습니다. 결정적 위기가 응전을 촉구할 때였습니다. 교회는 교육과 개혁의 위대한 공의회,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교회가 신대륙 아메리카를 복음화하고 오래된 세계 유럽의 그리스도교적 근원에 활기를 불어넣는 시기였습니다.
   이 같은 상황과 사건들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삶이 펼쳐지는 상황을 특정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극도의 가난 속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고 또 폰티베로스, 아레발로, 메디나 델 캄포 등지에서 손수 일함으로써 자기의 갈길을 개척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가르멜 수도회 입회의 부르심을 따르고 살라망카 대학의 강의실에서 고등 교육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의 섭리적 상봉 이후 즉시 그는 가르멜의 개혁을 받아들이고 또 두루엘로의 첫 수도원에서 새로운 형태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최초의 남성 맨발 가르멜인으로서 그는 처음부터 수도 공동체의 기복과 난관들을 형제들과 함께 겪었습니다. 톨레도에서의 감옥생활, 안달루시아 지방 라 페누엘라와 엘 칼바리오에서의 외로운 삶, 여러 수녀원에서의 사도직 수행 그리고 장상으로서의 과없이 그의 생애의 주요한 계기들이었습니다. 그의 성숙된 인품은 서정시 작품, 주해서들, 소박한 수도원 생활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사도직 수행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알칼라 데 헤나레스, 세고비아와 우베다는 그의 내면 생활, 사제직 수행 그리고 영적 가르침의 충만함을 불러일으키는 이름들입니다.
    이 풍성한 경험 덕분에 그는 개방적 자세로써 당대 교회의 상태를 직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발생되고 있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작품 안에서 이단들과 오류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애 마지막에 복음을 전파하러 멕시코에 갈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는 그 같은 목적달성을 준비하였으나 병고와 죽음으로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6. 당시의 중대한 영적 요구에 대한 요한의 응답은 관상적 소명을 수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으로서 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 책임을 결코 회피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와는 달리, 이같은 조처를 취함에 있어서 그는 하느님의 모습을 추구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그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또 자기 이웃의 봉사에 적극 투신함으로써 신앙의 핵심 자체를 완전히 통달한 가운데 삶을 영위하는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인이 관상 생활 안에서 완전한 성취를 발견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관상 생활자는 기도 전념에만 국한하지 않습니다. 가르멜 성인의 동료들과 전기 작가들은 그의 역동적인 생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청년 요한은 병자들을 간호하는 일, 벽돌과 돌을 놓는 기술, 과수원에서 일하는 요령과 교회를 장식하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어른이 되어 그는 항상 형제들의 영적 요구와 물질적 욕구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관리와 양성의 책임을 훌륭히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교회를 위한 관상 생활의 가치를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수녀들, 맨발의 가르멜 간호사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도보로 긴 여행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태도는 이러한 근본 확신 안에 요약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모든 활동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시는 분은 하느님, 하느님 홀로이시다. "하느님이 알려지지 아니한 곳에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6)
 그는 관상 수도자로서 특수한 소명 때문에 생활과 저서들을 통하여 최선의 방법으로 교회에 봉사하고 자신의 요구에 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리하여 성 요한은 기도와 침묵, 봉사 안에서 그리고 신앙과 희망과 사랑에 몰두하는 다정스런 단순성과 포기 안에서 자기 형제 자매들 가까이에서 삶을 영위하였던 것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더불어 그는 가르멜 수도자로서의 은사의 충만함을 깨닫고 함께 나누었습니다. 요한과 데레사는 한결같이 교회 안에서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탁월한 증인으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신앙인 양성의 과업
  7. 신앙은 형제들과의 친교와 대화를 촉진시켜 하느님께로 이르는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 줍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신앙인들의 참다운 양성자였습니다. 그는 알맞건 불리하건 상관없이 모든 환경 안에서, 열정의 순간에서뿐 아니라 완전한 무미 건조의 시기 중에도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사람들에게 가르침으로써 그들을 하느님과의 친밀한 대화에로 이끄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데레사와 같은 빛나는 영혼들은 그에게 친근하였습니다. 그는 그녀가 신비적 상승의 마지막 단계를 거치도록 그녀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안나 데 페날로사와 같이 탁월한 영성가들, 신앙과 대중 신심의 실천가들도 요한 곁에 있었습니다. 그는 안나에게 사랑의 산 불꽃을 지어 바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가 영성 지도자 및 신앙인 양성자로서의 이 같은 사명에 적합한 인물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당시의 신앙인을 탈선시키는 각종 위험으로부터 신앙을 구제하기 위하여 신앙 교육에의 학문적 체계와 실천적 방안을 강구해야만 하였습니다. 분별력이 결핍되어 있고 또 복음과 교회보다는 사사로운 환시와 주관적 활동을 더욱 신임한 자들이 쉽사리 빠져들 위험, 지나치게 고지식한 믿음의 위험도 있었습니다. 반면 신비에 자신을 개방시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극단적인 불신과 경직된 고집이 있었습니다. 신비 박사는 이런 함정들을 회피하였고 또 자신의 표양과 가르침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성숙된 신앙의 아주 근본적인 요소들을 구비한 강한 신앙을 갖도록 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친교를 체험함으로써 성숙되어온 인격적 신앙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성실한 윤리 생활과 봉사에의 적극적 자세 안에서 드러나는 연대성과 투신에로 이끄는 신앙임이 분명합니다. 이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으로서 폰티 베로스의 성인이 자신의 인격적 증언과 영속적 가치를 지니는 가르침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생히 보여주는 신앙입니다.

 

 

 

II. 살아 계신 하느님께 대한 증거

 

 

 

  인격적 신앙의 깊이와 실제성
  8. 십자가의 요한은 하느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친숙하게 대하였고 하느님에 관해 끊임없이 말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자기 마음 속에 품고 있었으며 하느님에 관해 항상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거나 노래하기 위하여 자기 입을 열기 전에도 그는 하느님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그토록 열정적으로 또 대단히 설득력있게 하느님에 관해 말하였다. "그들은 그 자신이 들은 바를 깊이 생각하여, 마치 그가 하느님의 일들과 우리 신앙의 신비들을 자신의 신체적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말하였다." 신앙인이 신비 안에서 아는 바를 그 자신을 위하여 생생하간 것이 되게 해주는 것은 신앙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실제 세계를 형성하기에 이릅니다. 증인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그 자신이 보고 들었던 바를, 그 자신이 관상하였던 바를 선포합니다(1요한 1,1-2 참조).
  예언자들과 사도들처럼 십자가의 요한은 효험있고 통찰력있는 언어의 재능을 소유하였습니다. 그는 서정적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시와 상징들을 통하여 자신의 경험을 표현하고 나누는 능력을 구비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지혜 문학적 소품 "빛과 사랑의 잠언" 안에서 이를 절묘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곧잘 "감미로움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마음에 말을", "여정을 위한 빛의 말 그리고 여행을 위한 사랑의 말을" 건네곤 하였습니다.8)

 

  계시의 충만이신 그리스도
  9. 신비 박사가 지닌 신앙의 예리함과 실재성은 그리스도교의 중심 신비에 대한 그의 인식위에 근거한 것입니다. 성인의 한 동시대인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내가 보기에 그가 위대한 사랑을 쏟았던 신비들 가운데서 으뜸이 되는 것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와 사람이 되신 성자의 신비이다."9)이 신비들에 대한 관상을 위하여 그가 선호하였던 자료는 성서였습니다. 그 자신이 간혹 그 사실을 실토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성 요한 복음서 17장을 즐겨 봉독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 안에서 이 성서 말씀이 충분히 반영되도록 하는데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신학자이며 신비가로서 그는 영성 생활 전체가 성삼위와 강생하신 말씀의 신비들 주위를 맴돌게 하였습니다. 그는 신앙을 통하여 그 신비들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는 신앙을 통하여 하느님을 찾았고 자기 존재 깊은 데서부터 하느님을 열렬히 맞아들였으므로 창조의 업적들과 역사의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였다: "성자이신 하느님의 말씀은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당신의 본질과 현존으로 인하여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 안에 숨어 계신다.... 너는 그토록 아주 가까이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너의 내적 회상중에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그 곳에서 하느님을 열망하라. 거기에서 그분을 훔승하여라."10)

 

    향주(向主)생활의 역동성
    10. 스페인의 신비가가 어떻게 하여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그 같은 부와 그토록 풍요로운 생명을 발견하는 데에 성공하였겠습니까? 단지 복음적 신앙을 회개, 사랑, 신뢰와 이타심을 위한 그 모든 능력을 발휘하도록 해줌으로써 성공하였습니다. 요한의 모든 신앙은 모든 향주 생활 신.망.애덕 생활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토록 풍요롭고 효율적이었습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이 세 가지 향주덕은 함께 증대되는 것이다."11)
  십자가의 성 요한이 그리스도교 영성에 끼친 가장 유효한 공적 중 하나는 향주 생활의 성장과 관련된 가르침입니다. 그는 저서와 강의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적 존재의 근본 태도를 이루는 향주 삼덕을 역설하였습니다. 영적 여정의 모든 단계 중에 하느님께 응답하는 상호 관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교류는 향주 삼덕 위에서 이루어 집니다.
  애덕과 망덕에 연결되어 있는 신덕은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인식, 신앙의 생활, 그리스도교적 관상이라 부르거나 체험하는 이런 친밀하고 향기로운 지식을 초래합니다. 그것은 신학적 또는 철학적 반성을 훨씬 능가하는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소박하고 이타적인 무수한 영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에게서 선사받는 것입니다. 요한은 안나 데 예수스에게 바치는 영혼의 노래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 "당신에게 하느님의 진리를 이해시켜 주는 스콜라 신학의 교육을 당신이 받지 않았다 해서 사랑을 통하여 알려지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인식하고 경험하게 해주는 신비 신학에 능력 부족인 것은 아닙니다."12)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님으로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El Pastorcico(양치는 목동) 시가 노래하듯이 먼저 사랑하는 사람으로 드러내십니다.

 

 

 

III. 신앙 생활의 길

 

 

 

  신앙과 그리스도인의 실존


  11.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로마 1,17; 히브 2,4 참조). 의인은 하느님께서 당신 선물들과 약속들에 대해 보이시는 신의에 의해 살아갑니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봉사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김으로써 삶을 영위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신실한 인간 즉 신자("Christifidelis" : 그리스도께 충실한 사람)라 불리웁니다. 계시하시는 하느님께서 신앙인의 온존재에 침투하십니다. 신앙인의 전반적 삶은 신앙의 원리들에 의해 지배됩니다. 이 원리들이 그의 근본 기준입니다. 신비 박사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 안에, 우리 여정을 위한 지팡이, 지속적 후원과 같은 것이 될 기본 원리를 전제로 해야 한다. 그것은 이 가르침 안에서 우리의 인도자이며 스승이 될 빛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그것으로써 우리는 이 모든 선 한가운데서 기쁨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해야 한다. 기본 원리란 하느님의 영광과 존영에 대한 것만을 의지가 기뻐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영광이 곧 복음적 완덕을 따라 하느님을 섬기는 것, 그 같은 봉사 안에 내포되지 아니한 것은 인간에게 아무런 가치와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13)
  성인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신앙 교육의 수많은 국면들 가운데서 본인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서 특별히 중요한 두 가지를 즉 자연적 이성과 신앙의 관계를 그리고 내적 기도를 통하여 신앙을 생활화하는 것을 역설하고자 합니다.

 

  12. 신앙과 어둔 밤의 박사가 인간 이성의 가치를 그토록 열렬히 칭송하는 사실은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유명한 금언은 이것입니다 : "인간의 사고력만이 전세계보다 더 가치 있다. 따라서 하느님 홀로 인간에게 가치 있는 존재이시다."11) 이성적 인간이 그 이외의 세계 실재보다훨씬 가치 있는 것이라 말한다 해서 이성의 지상적 지배권을 주장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성은 인간의 가장 정당한 목적 즉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해 그를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인간은 존엄성 안에서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그 같은 이유로 신앙은 인간 이성에 대한 경멸을 정당시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적 능력은 하느님의 메시지와 상반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도 아니 됩니다. 반대로 인간의 이성과 하느님의 메시지는 상호 긴밀한 협력 관계 안에서 함께 작용한다 : "인간은 자연적 이성으로부터 그리고 복음의 법과 가르침으로부터 충분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15) 신앙은 세상 및 인간과 무관한 실재가 아닙니다. 신앙의 고유한 주체는 인간, 자신의 빛과 한계를 갖춘 이성적 존재입니다. 신학자와 신앙인은 자신의 이성적 능력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와는 달리 그들은 그것을 신비의 지평을 향해 개방시켜야 합니다.16)

 

  13. 내면 기도를 통하여 신앙을 체험하는 것 또는 생활화 하는 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자기 작품들 안에서 특별히 역설하는 또 다른 측면입니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신앙인들의 내면 생활이 깊이있게 성장하고 그 자신들이 믿는 바를 설명해 줄 수 있도록 신앙을 형성시켜 주고 또 그들의 문화적 및 신학적 성숙을 확보해 주는 것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교회의 변함없는 관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성적 향상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 관상적 차원 내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신비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 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스페인 신비가의 크나큰 사목적 관심사가 겨냥하는 목표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많은 신도들에게 그 자신이 "하느님께 대한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신비들에 대한 지식 또한 애정어린 인식"이라 부르는 관상 기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인이 이 같은 유형의 기도에 관하여 쓴 작품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17) 그는 우리로 하여금 항상 신앙의 응시와 관상적 사랑으로 기도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전례 거행 중에, 생명의 빵 안에 감추어져 있는 영원한 샘인 성체 조배 중에 성삼위와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관상 중에,사랑과 충실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중에, 거룩한 표상들과 깊은 침묵에 의해 중재되는 경건한 친교 중에 언제나 신앙의 응시와 관상적 사랑으로 기도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과 "나의 사랑하는 님의 손에 의해 심겨진 나무들과 수풀"18)을 응시할 때에 황홀한 침묵 중에 잠기게 됩니다. 이 모든 것 안에서 요한은 영혼이 그리스도와의 소박한 내적 일치를 누리도록 교육시킵니다 : "하느님께서는 주시는 분으로서 단순하고 애정어린 인식을 통하여 인간과 교류하시고 또 개별 인간도 받는 입장에서 소박하고 애정 넘치는 인식이나 관심을 통하여 하느님과 교류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인식은 인식과 결합되고 사랑은 사랑과 결합됩니다."19)

 

  신앙의 어둔 밤과 하느님의 침묵


  14. 신비 박사는 전형적으로 인간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인 한 경험을 어둔 밤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무수한 신앙인과 비신앙인들에게 여전히 호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현대는 우리로 하여금 이 표현을 더 잘 이해하게 해주었으며 더욱이 그것에 일종의 집단적 특징을 부여해 준 고통의 순간들을 겪어 왔습니다. 우리 시대는 하느님의 침묵 또는 부재에 관해 말합니다. 현대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초를, 전쟁 및 그토록 많은 무고한 존재의 파괴에 의해 가해지는 무수히 많은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어둔 밤이라는 용어는 이제 영적 여정의 한 단계에 대해서만 아니라 삶의 전단계와 관련되어 사용됩니다. 성인의 가르침은 인간 고통의 형용할 수 없는 신비에 호응하여 재정립되고 있습니다.
  내가 언급하고 있는 이 특수한 고통의 세계는 나의 사도적 권고 '구원에 이르는 고통'에서 논의되었습니다. 병고와 같은 - 기아의 재난과 같은, 전쟁,고립, 삶의 의미의 결핍, 인간 존재의 연약함 자체, 고통스런 죄의식, 하느님의 부재 체험과 같은 신체적, 정신적 및 영적 고통은 신앙인에게 신앙의 밤이라 불리울 수 있을 전적 정화의 체험입니다.
  이 체험에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둔 밤이라는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이름을 부여하였고 또 그것을 신앙의 신비의 빛과 어둠을 명확히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삼는다. 그는 고통의 경직된 문제에 대하여 사변적 질서의 응답을 제시하려고 애쓰지 않고 오로지 성서와 경험에 비추어 하느님이 어둠 속에서 초래하시는 놀라운 변혁의 어떤 요소를 가려내고 찾아낸다. "하느님은 그토록 슬기롭게 또 아름답게 악으로부터 선을 이끌어 내는 방법을 익히 아시는 까닭이다."20) 결국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체득하기에 이릅니다.

  15. 고발로 표출되건 혹은 불평으로 표출되건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침묵하시거나 부재 중이시라는 느낌은 고통과 불의에 대한 거의 무의식적인 반응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은 세세한 데까지 인간 고통의 책임을 하느님에게 전가시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달리 그리고 간혹 더욱 깊은 방식으로, 심연의 어둠에로 빠져 들고 있음을 느낄 정도로 하느님의 상실의 아픔 또는 하느님으로부터의 소외의 고통을 겪습니다.
  어둔 밤의 박사는 이 체험 안에서 천상 스승님의 사랑 넘치는 손길을 알아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충분할 정도로 명확히 말씀하셨고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으므로 침묵을 지키시고 또 가끔 당신 자신을 감추십니다. 하느님의 부재에 대한 체험조차도 겸허하게 또 온유하게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개방시키는 사람에게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성인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 "영혼은....내적 어둠과 궁핍 한가운데서.....어둔 밤에 출발하여 걸어갔을 때에 신앙의 이 새하얀 외투를 입었으며....또 사랑하는 님을 실망시키거나 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채 이러한 시련들을 겪으면서 끈기와 인내로 고통을 참아 견디었다. 사랑하는 님은 고생과 가난으로 신부의 믿음을 시험해서 그로 하여금 다윗이 말한 바를 곧이 곧대로 되풀이하게 만든다 : "나는 당신 입술의 말씀 때문에 고달픔을 견디어 왔나이다(시편 16,5)"21)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이런 순응은 인간이 하느님의 자아 양도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인간으로 하여금 감사의 의식을 지니게 해주는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때때로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거스르는 위반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위한 죽음이고 허무인 죄의 결과를 충분히 느끼게 해줍니다. 어둔 밤은 인간이 하느님의 현존이나 부재와 관련하여 분별할 수 있도록 그를 교육시킵니다. 인간이 이와 같은 교육을 받게 되면 신앙과 사랑에 의해 인도되기 때문에 그를 이끄는 유쾌한 감정이나 불쾌한 감정에 더 이상 좌우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기쁨의 순간에서나 슬픔의 순간에도 여전히 애정 넘치는 아버지로 존속하십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관상
  16. 하느님 아버지의 궁극적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고통의 신비로운 의미를 드러낼 수 있고 또 그분의 영광스런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가장 어두운 밤을 비출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는 바와 부합되어, 하느님이 당신 아드님을 계시하신 다음에 말하자면 "벙어리가 되시어 더 이상 할 말이 전혀 없으시다."22) 고 우리에게 진술합니다. 가장 웅변적인 하느님의 침묵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계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신비를 끊임없이 관상한 폰티베로스의 성인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로 알려진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유명한 묘사 안에서 그리고 '양치는 목동'의 시에서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호소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겪으신 버림받음의 체험에 관한 그리스도교 문학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몇 가지 저서를 남겼습니다.23)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겪는 순간까지도 처참하고 격렬한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 극도의 신체적, 심리적 및 영적 고통들이 한데 어울려 그분을 격심하게 짓눌렀습니다 :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증오와 거짓에 의해 야기된 이 같은 혹독한 고통은 심오한 구원 가치를 지닙니다. 그것은 "빛을 충분히 갚고 또 인간을 하느님과의 일치에로 이끌기 위한 것"24)이었습니다. 극심한 버림받음과 가장 위대한 사랑의 순간에 사랑으로 아버지께 자신을 내맡기는 위탁의 행위로써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평생에 이루신 그 많은 기적과 일들보다 휠씬 더 큰 일, 그리고 하늘에도 땅에도 일어나지 아니한 위대한 일을 이룩하셨습니다. 즉 그분은 은총으로써 전인류를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결합시키신 것입니다."25) 그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비는 죄의 심각성과 인간의 구원자가 보여 주시는 사랑의 무한성을 계시합니다.
  신앙에 의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늘상 자신의 관련점과 생활의 규범이 되게 합니다.  "싫증과 불쾌가 삶을 짓누르고 있을 때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침묵을 지키시오."26) 신앙은 죽음보다 더 강한 애덕의 불꽃이 됩니다. 그것은 부활의 씨앗이며 결실이다. 성인은 시련의 순간에 이같이 적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명령하신다는 사실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은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사랑이 전혀 없는 곳에서 사랑을 입으라. 그러면 너는 사랑을 이끌어 올 수 있을 것이다."27) 왜냐하면 결국에는 "저녁에 그들이 사랑 안에서 너를 시험할 것이기"28)때문이다.

 

 

 

IV. 보편적 영향력을 지닌 메시지

 

 

  하느님을 찾는 자들을 위한 안내인
  17. 십자가의 성 요한의 죽음을 기념하면서 누가 그의 작품에 근접해 있는지를 아주 다양한 관점의 무수한 사람들, 신비가들가 시인들,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 다른 종파의 대표자들, 남녀 교양인 그리고 평민들에게 증언하는 것도 뜻있는 일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제시하는 인본주의적 가치들, 예컨대 언어와 철학과 심리학에 매료당하여 그에게 깊은 관심을 쏟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인간의 탁월한 소명을 부여받은 모든 이들에게 들려 줄 메시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심오한 체험 때문이거나 아름다운 시 때문만으로도 그의 작품들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가르침을 이해합니다. 반면에 우리의 성인과 같은 신비가들은 하느님의 진리의 위대한 증인이고 스승입니다. 이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과 가톨릭 교회는 가끔 타종교의 신봉자들로부터 호의적인 대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  그런데 그는 하느님과의 더욱 깊은 친숙함을 촉구하는 거룩한 교회 내의 다른 이들을 인도하는 안내인이기도 합니다. 그의 가르침은 교리와 생활로 가득 차 있는 견실한 바탕입니다. "자신의 신앙 생활을 심화시키고 또는 과학적 탐구와 기도를 일치시켜야 하는" 신학자는 성인으로부터 배울 수 있고 그리하여 양심의 지도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신학자들을 위하여 그는 영적으로 뚜렷한 통찰력을 내포하고 있는 작품들을 남겼습니다.30)

 

 고국 스페인을 위한 시의 적절한 메시지
  18. 나는 개인과 가정 및 사회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교회 사건으로서 성인의 400주기를 경축하는 스페인 교회에 특별한 방식으로 발언하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십자가의 요한이 살던 시대에 스페인은 가톨릭 신앙과 선교적 확장의 중심지였습니다. 그 같은 환경은 폰티베로스의 성인에게 자극과 도움을 주었으므로 그는 조국의 신학적 및 영적 전통이 마련해 준 가장 확고한 가치들로 정립된 인격적 통합 안에서 신앙과 문화를 그리고 경험과 이론을 조화있게 종합시킬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아름다운 언어와 시로써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인은 스페인 사람들을 대표하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스페인 주교단이 가장 최근 몇 가지 문헌을 통하여 예리하게 규명한 바와 같이 신앙과 시민 생활의 영역 안에서의 심각하고 피할 수 없는 문제들이 오늘날의 스페인 교회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을 인도하고 활성화시키는 데에 최선의 노력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확신에 넘치고 참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공공연한 고백, 부단한 생활화, 그리고 봉사를 통한 증거의 삶 안에서 개인 및 공동체의 수준에서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 사회처럼 다원화된 사회 안에서, 익명성과 불신의 유혹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인격적으로 신앙의 선택을 감행하려면 세례의 은총과 부합하는 새로운 태도와 교회에의 의식적이며 애정어린 투신이 요구됩니다.
  스페인의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교 메시지와 문화와 가치들 간의 적절한 조화를 촉진시킴으로써 사회에 봉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의 새로운 활력의 근원을 시민 생활의 다양한 영역에 가져다 주는 활기차고 열려진 신앙을 각성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이 같은 통합은 문화의 각 영역 안에서 수고하는 헌신적인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충분히 실행되어야 합니다. 공동체와 문화의 이런 깊은 내적 쇄신을 위하여 십자가의 요한은 거룩한 생활과 풍성한 작품들로써 빛난 모범을 보여 준다.

 

  가르멜 남녀 수도자들에게
  19. 십자가의 성요한이 우리 현대인들에게서 갈수록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은 특히 그를 사부, 스승 및 인도자로 모시고 있는 데레사 가르멜회 남녀 수도자 여러분들에게는 대단히 흡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교회 안에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생활과 봉사의 은사가 계속 충만한 생명력과 효력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지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의 은사는 물질적 소유나 단한번 영구적으로 보장받는 유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서 교회와 친교 안에서 신의와 창조성을 요구하는 성령의 은총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교회의 요구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슴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아들딸인 여러분 모두에게, 나는 여러분의 성소가 영광보다는 중대한 책임의 동기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사부이고 교회의 박사인 성인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메시지를 확산시키는 일에 있어서 보여 준 정성어린 관심은 분명 교회에 대한 값진 봉사입니다.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것을 생활에 적용시키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요긴한 해설을 제공함으로써 또한 적절한 연구 활동을 육성해 줌으로써 그의 가르침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여러분의 노력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데레사 가르멜 수도회는 확실히 한층 더 적극적으로 호응해야 하고 또 개인 생활과 공동체 생활의 풍부한 경험을 효율적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각 맨발 가르멜인, 각 모든 공동체와 전체 수도회는 말하자면 맨발 가르멜 수도자의 살아 있는 모상인 성인의 삶과 저서들 안에서 빛나는 요소들을 즉 엄격, 하느님과의 친교, 열정적인 기도, 복음적 우애를 구현할 뿐 아니라 또한 여러분의 교회내 특수한 사도직인 영적 가르침과 지도를 통하여 기도와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촉진시키는 데에 헌신적으로 투신해야 합니다.
  가르멜회의 모든 아들딸 안에서 구현되고 인격화되는 가르멜 성인의 말씀과 생활을 발견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여러분 수도회의 아들딸들이 그렇게 해왔습니다. 4세기가 경과 하면서 그들은 하느님과의 친교를 체득하는 방법을 터득해 왔습니다. 그들은 포기와 기도에의 충실을 실천해 왔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형제 자매로서 서로 상대방을 도왔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어둔 밤을 통과해 왔습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여러 저서들을 통하여 그들을 가르쳐 왔다. 성인은 거룩한 삶 덕분에 그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20. 이 기회에 나는 모든 맨발의 가르멜회 수녀들에게 감사와 권고의 한마디 말을 건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인은 특별히 그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 사도직을 수행하고 가르침으로써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개인과 공동체의 바탕 위에서 그들을 양성시키는 일에 고심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현존과 고백의 직무를 통하여 그들을 혼련시키고 인도하였습니다. 예수의 마더 데레사는 자기의 딸들에게 영성 지도자를 위한 가장 훌륭한 신임장을 가진 분으로 그를 소개해 왔습니다. 즉 그는  "천상적이고 신적인 인간", "대단히 영적이고, 경험과 학식이 상당히 뛰어난 사람" 이었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푸셨으므로"31) 그들은 그에게 자신의 영혼을 개방하였고 또 그리하여 완덕에 있어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맨발의 가르멜 수녀들은 애정을 가지고 거룩한 박사의 저서들을 깊이 묵상하였고 또 그것들을 통하여 내적 생활의 정상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성인의 딸과 제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기억할 수 있는 분들로 예수 성심의 데레사 마르가리타, 십자가상 예수의 마리암, 리지외의 데레사, 천주 성삼의 엘리사벳,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다(에디트 슈타인)그리고 로스 안데스의 데레사 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 세계에 퍼져있는 나의 사랑하는 맨발의 가르멜 수녀들이여, 결연한 자세로써, 교회 내에서 여러분의 삶을 그토록 풍요롭게 해주는 하느님과의 친교의 이런 순수한 사랑을 계속 촉구하십시오.

 

 

 

결론

 

 

  21. 십자가의 성 요한의 400주기를 맞이하여 본인은 여러분에게 그에 대한 상념들을 개진함으로써 그의 중심되는 메시지들 중 하나에 관한 몇 가지 생각들 즉 복음적 신앙의 차원들을 여러분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성인이 자기 자신의 역사적 시간과 상황 내에서 그 자신의 마음과 삶 안에서 구현시킨 메시지입니다.
  이 서한을 마무리지으면서 나는 마음으로 성인의 고향 폰티베로스 마을로 순례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 곳에서 그는 세례를 받았고 신앙의 첫 결실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를 따라 그가 영광에로 옮아 갔던, 안달루시아 우베다 수도원에 이르는 모든 길을 걷습니다. 나는 세고비아에 있는 그의 무덤 아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이 장소들은 그의 지상적 생활의 기억으로 축복받은 곳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위하여 그 곳들은 성인이 공경받는 성전이며 또한 그가 향주 생활의 메시지를 계속 선포하는 영구적 자리입니다.
  오늘 엄숙한 방식으로 교회와 세상 앞에서 그를 소개하면서, 본인은 가르멜의 아들딸 들에게, 그의 조국 스페인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아름다움과 신학과 관상의 길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있는 그 모든 이들에게, 그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도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사랑하는 님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혹당함을 느낄 수 있도록 신앙과 복음적 생활에 관한 그의 증언에 귀를 기울여 주기를 당부합니다.


  우리의 구세주께 그리고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어머니께 나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영광에로 옮아 갔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금년 한 해 동안 개최될 사건들을 위탁합니다. 아울러 본인은 본인의 진심에서 우러난 사도적 축복을 보냅니다.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재위 제13년, 1990년 12월 14일,
십자가의 성 요한 축일에
교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