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철학에 있어서 마음 닦음의 해체적 성격
장자철학에 있어서 마음 닦음의 해체적 성격
이 종 성*42)
[한글 요약]
장자철학에 나타난 마음 닦음은 일반적 의미의 수양론과 다르다. 이것은 장자의 마음 닦음이 해체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는 긍정적 논의보다는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부정적 논의를 통하여 해체의 방법을 제시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장자가 마음의 양상을 부정적으로 파악한 결과이다.
그런데 장자의 철학체계 내에서 마음은 중층구조를 지니고 드러난다. 즉 마음은 부정적인 현실태를 띠고 드러나 있기도 하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긍정적 기능을 담지한 본연태로 제시되기도 한다. 장자는 무엇보다도 부정적 마음의 현실태에 관심을 갖는다. 부정적 마음은 그만큼 문제의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이 마음이 다름 아닌 욕망과 분별지를 양산해 내는 분별심이다. 분별심은 주체와 대상을 대립적으로 맞세워 이원화한다. 여기에서 주체는 마음의 한 가운데 정립된다. 그러므로 장자는 주체의 해체를 시도하게 되는 것이고, 이 때 주체의 해체란 자기 중심적으로 경도된 의식화된 주체로서의 마음을 해체한다는 말과 통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부정적 마음의 현실태를 해체하고 나면 마음은 거울과 같이 맑은 상태를 유지하고, 대상을 편견 없이 수용하게 된다. 이 때 마음은 본연한 기운의 질서에 의하여 세계 자신과 하나로 관류하게 된다고 장자는 생각한다. 장자는 이러한 긍정적 마음에 이르기 위하여 '심재'와 '전일'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다 같이 마음 닦음의 해체를 통하여 주체와 대상의 존재적 간격을 제거하고자 하는 방법들이다. 여기에서 주객의 존재적 틈을 없애는 길은 무엇보다 주체의 해체일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이러한 주체의 해체는 오히려 진실한 존재를 드러낸다고 장자는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의 마음 닦음의 문제에 있어서 해체는 대상을 주체의 틀로부터 분리하여 자기 중심적으로 의식하는 주객대립의 일방향적 의식을 지양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결코 마음 그 자체의 단멸이나 존재 그 자체의 완전한 멸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주체의 해체는 오히려 개별적 존재들의 본성을 온전하게 하고, 자신의 존재력을 본원존재의 존재력에 동참시키기 때문에 존재의 자연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 해체, 그 이후에 남는 것은 자연이다.
주제분야 : 중국고대철학, 도가철학, 장자철학
주 제 어 : 마음 닦음, 심재, 전일, 해체, 분별심
1. 시작하는 말
전통적으로 동양철학이 제시하는 공부론은 지식의 양적 확대보다는 인간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마음과 몸의 통일을 바탕으로 진정한 지혜를 체득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표를 설정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일차적인 것은 마음공부가 문제로 제기된다. 이것은 동양철학의 주류라고 할 유가나 불교, 심지어 도가의 철학에 이르기까지도 다같이 동일한 목표로 제시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그만큼 동양철학이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마음에 대하여 심각하게 경계하고 있었다는 말과도 통한다.1)
이러한 측면과 관련하여 동양철학은 나름대로 '수양론'이라는 철학적 범주를 생산해 냈고, 이를 근거로 일상인이 참사람으로 성장하는데 철학적 지침을 제시하였다고 자부하게끔 만들기도 하였다. 어쩌면 동양철학이 서양철학과 차별화될 수 있는 것은 이 수양론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까지 믿기에 이른 것이다. 사실상 철학이 지식의 증대보다는 지혜의 체득을 부르짖고 나선 것은 동·서양이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서의 지적 전통 속에 드러나는 철학적 성격의 차이는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동양철학 내부의 수양론의 범주는 분명 오늘날 우리가 동양철학을 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많은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가 수양론이라는 개념을 무분별하게 남용하는 학문적 태도에 일단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본디 유불도 삼가사상이 몸과 마음을 대립적으로 맞세우지 않으려는 근본적인 태도로부터 진리체득에 나서는 것은 공통적인 사항이지만, 그 진리체득의 방법을 살펴보면 유불도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자신들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노장으로 대표되는 도가철학을 유가의 수양론의 범주 안에 끌어들여 도식화하는 태도는 너무나 고전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 하면 유가에서 제시하는 수양론이란 존재와 당위를 일원화하기 위한 끊임없는 내적 성찰로서의 자아완성을 향한 도덕적 선의 축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 도가철학은 이미 축적되어 있는 것들을 오히려 해체하려는 태도를 견지하기 때문이다.2) 도가의 이러한 해체적 방식은 닦아서 기른다는 의미로서의 수양론의 범주와는 아무래도 쉽게 접목되기 어려운 거리감을 갖게 한다.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도가의 진리체득의 방법조차 기존의 수양론이라는 범주 아래 일방적으로 편입시켜 연관시키는 태도는 마땅히 종식되어야만 한다.
본고는 도가철학의 해체적 마음 닦음을 장자철학을 통하여 살펴보려는데 목적이 있다. 장자의 마음 닦는 길은 한 마디로 역설적이다. 축적하지 않고 버리지만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는 일상적 논리를 벗어난 논리 아닌 논리 때문이다. 이러한 해체적 마음 닦음은 사실상 중국철학사에 있어서 장자가 처음으로 제시한 '좌망'의 논의 안에서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그러나 본고는 장자의 좌망론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려고 계획된 것이 아니다. 본고는 오히려 장자의 좌망론에 관한 예비적 고찰에 해당한다. 이제 필자는 본고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검토해보려고 한다. 우선 장자철학에 나타나 있는 마음의 기능과 성격이 어떠한지 살펴보고, 이어서 장자의 해체적 마음 닦음을 '심재'와 '전일'의 방법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심재'와 '전일'을 통한 해체의 목적이 주체의 해체에 있다는 점을 밝힌 다음 그것이 지니고 있는 철학적 의의를 살펴봄으로써 장자의 해체적 특성을 지닌 마음 닦음의 진의가 과연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2. 마음의 기능과 성격
장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대하여 부정적이다. 그래서 장자는 「재유」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의 마음은 흔들리기 쉬워서 누르면 내려가고 일으키면 올라간다. 그 오르고 내림이 마치 옥에 갇히거나 죽음을 당하는 것처럼 해로운 것이다. 부드러워서 강강한 것을 유약하게 하고, 모난 것을 깎아 내며, 그 뜨겁기는 마치 타는 불과 같고, 그 차가움은 찬 얼음과 같다. 그 빠르기는 순식간에 사해의 밖을 두 번이나 돌 수 있고, 그 거처함은 깊은 못과 같이 고요하다. 그 움직임은 하늘만큼 동떨어진다. 억세고 오만하여 매어 놓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인간의 마음뿐이다."3) 또한 「제물론」편에서는 형체가 변화됨에 따라 마음도 그 형체와 더불어 변화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대체로 '성심'을 따라서 기준을 삼는다면 모든 사람에게 기준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혼란이 초래된다고 하여 절대로 '성심'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4) 그것은 왜냐 하면 부정적 기능을 지닌 '성심'에 근거를 두고 행동하게 되면 인간은 자연의 본연함을 상실하여 도로부터 일탈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자철학의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인간의 일상적인 마음의 양상이 매우 불안정하고 부정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장자는 일상적인 마음이 부정적 기능을 촉발하여 작동하면 존재사물과 개별적 자아의 전일적 구도가 무너지기 때문에 마음으로 도를 버리지 말라고 경고한다.5) 이것은 마음이 한편으로 지각작용을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혼란스럽게 할뿐만 아니라 사회를 소란스럽게 만들기도 하는 혼란의 근원으로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분별지를 야기하는 '분별심'이다. 이러한 일상의 분별심은 외물에 이끌려 그 본래의 위치를 떠나 마침내는 외물을 좇아 질주하여 시비를 초래함으로써 오히려 본성을 함몰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분별을 초래하는 이러한 마음이야말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성현영도 『장자』를 주석하면서, "마음 한 가운데가 어지러워지면 우환이 여기에서 일어난다."6)고 본 것이다.
그러나 장자는 마음의 기능에 대하여 이와 같이 부정적으로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과 관련하여 '상심'을 비롯한 '영부', '영대', '지극한 사람의 마음' 등 여러 가지 긍정적 표현들을 논의 가운데 떠올림으로써 마음을 통하여 도에 통달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장자가 파악한 마음이 중층구조를 이루고 있고, 그 중층적 구조 속에는 마음의 부정적 기능과 더불어 긍정적 기능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장자는 마음에 두 가지 층차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7) 이와 같이 마음의 두 가지 층차를 상정한다면, 긍정적인 마음이나 부정적인 마음은 어느 것도 실체론적으로 파악하기가 곤란하게 된다. 이들은 마음의 근원적 구조 위에 일원적으로 존립하고 있는 두 가지 양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장자의 논리에 의거한다면, 마음은 긍정적인 것만도 아니며 그렇다고 부정적인 것만도 아니라고 하겠다. 따라서 마음의 구조는 작용론상에 있어서 그 기능이 긍정적인 측면으로도 부정적인 측면으로도 전개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장자에 있어서 마음은 불변하는 고정적 실체일 수 없다. 따라서 마음 자체가 긍정과 부정의 논리에 얽매이게 되면, 마음은 오히려 그 자신이 지닌 자연한 기능을 상실당하고 만다.
그런데 장자에게 있어서 마음의 개념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 이것은 '정신'의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장자는 기본적으로 마음보다는 '신'의 개념을 상위의 개념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장자의 철학체계 안에서 정신은 당연히 마음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서복관의 견해에 따르면, 중국철학사에 있어서 '정'과 '신'을 함께 말하여 '정신'의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철학자는 다름 아닌 장자이다. 물론 장자 이전에도 '정'이라는 글자와 '신'이라는 글자는 매우 유행하였지만, 이를 연용하여 정신이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장자로부터 비롯된다. 장자는 인간의 마음을 '정'이라고 하고, 그 마음의 묘용을 가리켜 '신'이라고 보았던 것이다.8) '정'이란 생명의 정수로서의 정기를 의미하며, '신'이란 그것이 반응하는 작용으로서의 신명을 가리킨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철학에 있어서 '신'의 순일한 기능이 마음을 통하여 제대로 발현될 때 마음 속에서 부정적 기능을 수행하던 이전의 주객대립적 대향성이 스스로 무화되어 그 작용력이 무기력해짐과 동시에 해체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여기에 이르면 마음의 작용력은 탄력을 받고 자연적 전환력을 보여준다. 즉 여기에서 마음의 긍정적 작용력이 발현된다는 말이다. 이 긍정적 마음의 작용력으로 말미암아 존재와 의식은 서로에게 개방되는 창구를 마련하게 되는데, 이 창구 안에는 어떠한 유목적적인 인식이나 행위도 개입될 수 없게 된다. 긍정적 작용력을 지닌 마음은 언제나 텅비어 고요하기 때문이다. 장자는 이러한 긍정적 마음에 관하여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우선 '영대'9)라는 개념이 주목된다. '영대'는 일종의 '반성적 기능을 지닌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대'는 본래 의식의 중심인데, 능히 자신의 결함과 제한성을 부정하고 해체할 수 있는 반성기능을 스스로 담지한다. 그러므로 이른바 '영대'는 어떤 특정한 개인에게만 국한된 주관적 관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의 인격 속에 갖추고 있는 공통적 반성능력을 지닌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자아를 긍정할 수 있는 동시에 다른 사람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자아의 통일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용인하고 승인한다. 따라서 '영대'가 제기능을 발휘하기만 한다면, 자아 중심적인 편견과 교만과 독단을 유발하는 일체의 그릇된 기운들을 모두 제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10)
장자는 이러한 '영대'의 반성적 기능을 '거울'에 비유한다.11) 이와 연관하여 장자는, "지극한 사람이 지닌 마음의 작용은 마치 거울과 같다. 사물을 보내지도 않고 맞아들이지도 않는다. 사물에 따라 비치되 감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물에 응하여도 상하지 않는다."12)라고 하였고, 또한 "물이 고요하면 오히려 밝은데 하물며 정신이랴! 성인의 마음은 고요하구나! 천지의 거울이고 만물의 거울이다."13)라고 언명함으로써 현상적으로도 자기를 되비치는 거울을 상징적으로 마음에 비유한다. 마음이 긍정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거울과 같은 무목적적인 자연적 반성이 수반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거울은 대상을 온전히 비치며 생멸하는 대상에 특별한 집착이나 편애가 없고 오직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칠 뿐이다. 거울은 자신이 사물을 '비추는' 주동적이고 능동적인 의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것은 언제나 목적 없이 사물을 '비치는' 수동적인 활동선상에 있다. 그러므로 거울은 대상을 자의적으로 쌓아두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이 마음이 텅비고 고요한 성격을 유지하게 되면, 외물의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고 대상을 온전하게 받아들여 만물의 근원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맑은 거울과 같은 마음에는 욕망과 사려 등이 개입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에는 어떠한 편애도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인간의 본성을 상해할 요소들이 마음 속에 있지 않으면 바르게 되고, 바르게 되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밝아진다. 밝아지면 텅비고 텅비면 무위하게 되지 않는 것이 없다."14)고 한 것이다. 장자는 이러한 텅비고 고요한 마음에 도달하게 되면 외물에 의한 상해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본원존재와 하나가 된다고 본다.
그렇다면 분별심으로부터 '영대'로 복귀하여 일체의 사려분별을 제거하고 참다운 지혜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적 계기는 어디에 있는가? 이 점을 풀어내기 위하여 우리는 장자철학이 전제하여 두고 있는 기운의 논리 속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기운의 논리와 우리의 정신현상 사이의 관계를 추적하여 볼 필요가 있다. 장자철학의 문맥 속에서 정신현상이라는 것도 기운의 논리와 관계를 맺는 것일 수밖에 없다. 정신현상이 나라고 하는 개체 속에 놓여지는 존재의 한 속성이라면, 그것은 나를 구성하는 기운의 총체적이고 집약적인 어떤 작용을 전제로 하는 마음의 양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장자철학에서도 마음이 대표가 되어 이끌어 가는 것이지만, 마음 역시 기운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마음의 기능 역시 어떤 종류의 기운의 논리이며, 마음의 존재성은 나를 구성하는 모든 기운과의 관계성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부인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나를 구성하는 기운과 나의 마음이 주동이 되어 이끌어 가는 정신현상 사이에는 일정한 유기적 관계가 마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15)
따라서 기운의 질서는 마음의 대상지향적 분별력으로부터 주객미분의 무분별력을 지닌 참다운 지혜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적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기운은 스스로 변화하여 날마다 새로워지는 역동성을 지닌다. 존재하는 세계는 이러한 기운의 질서를 통하여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 중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와 의식의 통일을 지향하는 장자의 철학적 구도 아래서는 일체의 분별력을 일으키는 마음의 대립적 구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는 이미 그 안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이 지닌 마음의 그릇된 분별력을 무력하게 함으로써 존재구속의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기운은 존재론적으로 텅비고 고요한 마음에만 감응하여 발현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기운이 텅비고 고요한 마음에 모이게 되면 이전까지 부정적 기능을 작동시키던 '성심'은 근원적으로 소멸하게 된다. 마음에서 '성심'의 기능이 적극적으로 발휘될 때 지식에 대한 반성적 기능은 폐쇄되어 무력할 따름이지만, 텅비고 고요한 마음을 회복하여 존재의 본원적 기운이 발현되면서부터 '영대'의 반성적 기능은 오히려 '성심'을 무력화시킨다. 마음의 구조상 '성심'이 표층구조를 이루고 있다면, '영대'는 그 심층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영대'는 '성심'보다는 근원적인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영대'는 기운의 작용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마음이다. 기운의 질서는 감정과 사려의 체계가 없어서 텅비어 부드럽게 만물에 임할 수 있다.16) 그래서 기운은 지각작용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분별심을 제거하고 만사만물에 자유자재로 맡길 수 있는 마음의 기틀을 마련한다. 이 마음의 기틀이 '영대'라고 불리는 긍정적 마음으로서 장자는 이것을 또한 '천부'17) 내지는 '영부'18)라는 용어로써 표현하기도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원적 기운의 질서에 동참한 마음은 도를 알 수 있는 실질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즉 긍정적 마음의 작용력이 바로 도를 체득할 수 있는 가능인자인 것이다. 이러한 긍정적 마음은 경험적이고 추론적인 지식을 야기하는 분별심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마음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한 이 때의 마음은 주객미분의 상태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분별지를 유발하는 주체로서의 분별심과는 그 존재 방식을 달리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마음이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말은 존재와 의식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상호 공속적인 일원적 관계 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장자에서 긍정되는 마음을 '분별심'에 대별되는 '무분별심'19)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무분별심에 근거하여 분별지를 일으키는 분별심을 무력화시키고 또한 분별심이 야기한 분별지의 비진실성을 폐기한다면, 존재가 지닌 본원적 기운의 논리가 오히려 자연스럽게 마음에 응하게 됨으로써 마음은 존재세계와 더불어 하나로 관류하게 된다는 장자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3. 마음 닦음의 해체적 방법
1) '심재' : 마음의 재계
장자철학에 있어서 마음 닦음이란 마음 안에 일체의 긍정적인 가치들을 축적하고자 하는 적극적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장자의 마음 닦음은 이전에 경험을 통하여 집적하였던 관념의 다발들조차 해체할 것을 요청한다. 그래서 장자의 마음 닦음은 해체적이다. 이 때 해체는 필연적으로 또 다른 해체를 기다린다. 이는 마음이 일반적으로 '결여'를 느끼고 있으며, 그 결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외부에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수집해 들이고자 하는 향외적 활동에 열중해 있기 때문이다. 장자는 이러한 향외적 활동을 해체하여 해체하고자 한다. 장자의 이러한 마음 닦음의 방법은 마음의 향외적 확장성향을 안으로 수렴하는 자기부정성에 토대를 둔다.
장자는 마음 닦음의 자아 내적 수렴방법의 하나로서 '심재'를 제시한다. 이 때 '심재'란 마음의 결재를 의미한다. 장자는 '심재'를 설명하기 위하여 「인간세」편에서 공자와 그의 제자 안회를 끌어들여 가설적인 담론을 시도한다. 여기에서 안회는 당시 혼란이 극에 달하였던 위나라로 가서 국정에 참획하여 무도한 위나라 제후의 행실을 바로잡고 고통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해주겠다고 나선다. 이에 공자는 안회를 만류한다. 공자는 안회에게 공부가 아직 지극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만일 유세하러 가서 제후에게 간언하게 된다면, 이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충고한다. 이 말을 듣자 안회는 공자에게 깨달음의 방법을 청하게 되고, 공자는 이에 다음과 같이 '심재'의 방법을 제시한다. "너는 정신을 통일하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도록 하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운의 질서를 통하여 듣도록 하라.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의 기능은 사물을 상대할 수 있을 뿐이지만, 기운의 질서는 허하면서도 일체의 사물에 응한다. 도는 오로지 허에 모인다. 허가 '심재'이다."20)
그런데 장자는 본질적으로 '심재'가 제사 지낼 때의 재계와는 다르다고 본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그 전 며칠 동안 술을 끊고 마늘이나 생강 따위의 자극성 있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심신을 깨끗하게 하여 부정한 일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이것이 제사지낼 때의 재계이다. 그러나 '심재'는 제사지낼 때의 재계와는 본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21) '심재'는 우리의 감각기관이 '외물'을 향하여 분주하게 치달으면서 혼란을 야기하던 것을 잠재우고, 일체의 욕망이나 정감을 비롯하여 이성적 사려까지도 깨끗하게 결재하는 방법이다. 즉 '심재'는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여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들어서 감각적 욕망을 배제하고, 마음 속에 깃들어 있던 분별지를 제거하여 정신을 순일무잡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심재'를 통하여 장자가 부정하고자 한 대상이 다름 아닌 '욕망'과 '분별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통적으로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에 대한 추구라고 볼 수 있다.22) 욕망의 구체적인 대상은 부귀와 장수, 명예, 몸의 안락 등에 집중적으로 모아진다.23) 그런데 욕망의 주체로서의 존재는 자신이 아닌 자신이 욕망하는 것 속에 자신의 현실적인 존재를 둔다. 이런 점에서 욕망은 곧 자기 아닌 것에 대한 희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욕망 자체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만나 욕망하는 것과 하나가 됨으로써 소멸한다. 욕망적 존재의 특수성은 이같이 자신의 현실화가 곧 자신의 소멸이라는 점이다.24) 이러한 점을 인정한다면, 욕망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그 욕망의 현실화는 오히려 그에 비례하여 자신이 지닌 자연의 본연성을 상실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욕망이 욕망하는 것의 불충족은 또다른 심리적 억압의 메카니즘으로 작용하게 됨으로써 개별적 자아는 소외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심재'는 일차적으로 이러한 감각충족적 욕망을 해체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분별지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작동하는 한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낳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분별지 자체가 문제를 끊임없이 양산해내는 주체라는 말이다. 이 분별지는 언제고 주객대립적인 대향성을 자체적으로 지닌다. 여기에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분리되어 서로 떨어져 나가고, 이로부터 끝없는 혼란이 뒤따라 일어난다. 존재세계는 본래 내외가 둘로 갈라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으로부터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한 번 분리되어 나타난 이후에는 내적인 것이 오히려 외적인 것을 편집하기에까지 이른다. 즉 이것은 분별지의 영역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거론되어지는 지식주체와 지식대상의 관계정립이 일방향성을 갖는다는 말로서, 곧 지식주체가 지식대상을 일방적으로 포획하려는 강제성을 띤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장자는 분별지가 천박하다고 비난한다.25) 분별지는 존재사물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거나 개념화한다. 그러나 분별지의 이러한 논리적 분석과 개념화에 기초를 두고 일상적인 학문으로써 본성을 닦아 그 근원으로 돌아가려고 한다거나, 일상적인 사려로써 의식지향을 어지럽혀 참다운 지혜에 이르고자 한다면 이는 명백한 잘못이라고 장자는 지적한다.26) 따라서 분별지는 해체되어야 한다. 분별지가 해체되면 지식주체도 지식대상도 다 같이 이전의 용도가 폐기되고, 여기에서 주객미분의 자연적 지혜가 발현하게 된다. 이러한 자연적 지혜는 '무분별지'27)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존재자체인 도와 일체가 되기 때문에 그 성격이 심오하다고 할 수 있다.28) 그래서 장자는 이 '무분별지'에 이르기 위하여 '심재'의 방법을 통하여 존재를 듣기를 소망한다. 이전까지 우리는 너무나 많이 말하여 왔다. 이제는 존재를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분별지를 해체하여 해체해야 한다. 마음의 분별력이 근원적으로 해체될 때까지 해체는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역설적이고 반어적인 표현들을 동원하여 향내적인 환원과 복귀의 논리를 전개한다.29) 분별지의 향외적인 성향을 반성적으로 수렴하는 것이야말로 일상적인 마음의 부정적 기능을 탈각하고 긍정적 마음의 기능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는 '심재'를 통하여 외부로 치달리는 마음의 성향이 안으로 통일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마치 그것은 외부의 소리를 내적으로 수렴하는 작용과도 같다. 그러므로 어떠한 소리일지라도 감관의 귀를 통하여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야 하며,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운을 통하여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재'란 '이목과 마음을 버리고, 기운의 성질이 자득하는 바에 부합하여 허로써 만물에 응하는 것'30)이기 때문에 일체의 감관적 지식과 이성적 지식을 부정하고 기운의 공능을 통하여 세계를 아는 것이다.
외물에 대한 욕망이나 지적 사려까지 모두 버리고 나면 참된 자기의 생명이 드러난다. 그래서 장자는, "가슴 속을 교란시키지 않으면 심신은 올바른 상태가 유지되고, 심신이 바르게 유지되면 고요해진다. 또한 심신이 고요해지면 밝은 지혜가 생기고, 밝은 지혜가 생기면 허해지고, 허한즉 일삼아 함이 없지만 하지 못하는 바가 없게 된다."31)고 말한다. 도는 오로지 허에 모이기 때문에 '심재'는 허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허의 상태는 마치 순백과도 같다. 그리고 순백함과 길상은 모두 빈 곳에 머물게 된다.32) 만일 마음에 순백함이 갖춰지지 않으면 정신과 성격이 불안정하며, 이와 같이 정신과 성격이 불안정한 사람에게는 도가 깃들 수 없다.33) 그런데 그 순백함은 어디까지나 마음의 해체로부터 도래한다. 그리고 그 해체의 가운데는 언제나 기운의 질서가 놓여 있다. 그러므로 '심재'는 기운의 질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기운은 항상 사물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유동변화하는 성질을 지닌다. 이러한 기운의 질서는 자연적 흐름 위에 놓인 역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코 인간처럼 특정한 감정이나 사려작용을 지니고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를 정지된 현상으로서 파악하던 마음의 지각기능을 끊어버리고 끊임없이 유동변화하는 세계의 흐름 자체에 내맡겨 개별적 자아를 물화시켜야 한다. 여기에 기운의 논리가 적용된다. 마음의 폐쇄적 구조를 개방시켜 존재의 활동에 동참하게 하는 능력은 기운이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운의 질서는 개별적 존재를 죽음의 질서로 몰고 가는 '악화된 기운의 질서'34)와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의 본원적 원동력이다.
'심재'와 관련된 기운은 무엇보다도 지각기능을 지닌 마음의 역기능적인 부정적 양상을 무력화하고 이를 폐기하는 해체적 기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기운은 허를 가능하게 할뿐만 아니라 사사물물에 있는 그대로 응하게 하는 기능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운의 해체적 작용 위에 떠오르는 것이 '신'의 묘용이다. 기운의 질서가 존재의 본연성에 바탕을 두게 되면, 이 때 기운은 '신'의 기능을 드러낸다. 그래서 혹자는 '심재'를 설명하면서, "가장 최상의 배움은 '신'으로써 듣는 것이고, 중간의 배움은 마음으로써 듣는 것이며, 가장 아래의 배움은 귀로써 듣는 것이다."35)라고 하여, 기운을 '신'과 동렬에서 파악하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을 통하여 우리는 기운의 질서와 '신'의 묘용이 서로 같지는 않을지라도 이들이 상호간에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는 것만큼은 확인할 수 있다. 이 때의 '신'은 인격적 요소를 가지고 현상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절대자를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다.36) 그것은 기운의 신묘한 작용 내지는 그 기능을 의미할 뿐이다. '신'은 현상계의 모든 상호 대립적인 제조건을 무화시킴으로써 만물을 통일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신'의 기능이 역기능적인 인위의 조건들을 해체시킴과 동시에 참된 존재의 자연성을 저절로 드러낸다. 따라서 '신'은 기운이 갖는 능동적 작용인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신'의 작용력과 결부된 기운의 질서는 참으로 모든 존재가 그로 말미암아 존재 가능한 존재인이요, 모든 생명이 그로 말미암아 생명이 가능한 생명인이며, 모든 운동이 그로 말미암아 운동 가능한 운동인이다. 즉 기운은 존재의 당체이면서 스스로 존재인을 가지고 있고, 운동의 당체이면서 스스로 운동인을 가지고 있으며, 생명의 당체이면서 스스로 생명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이러한 기운의 질서를 통하여 허를 확보하는 해체적 마음 닦음이 다름 아닌 '심재'라고 본 것이다.
2) '전일' : 온전한 생명력으로 세상보기
장자는 온전한 생명력으로 세상을 보고자 한다. 즉 갖가지 욕망과 분별지의 틀 안에서 세상을 대립적으로 보던 이전의 이분법적 태도를 버리고, 빈 마음에 모인 기운의 본원적 생명력을 통하여 세상을 자연스럽게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객으로 분산되어진 생명력을 존재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온전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장자는 '전일'37)의 방식을 제시한다.
그런데 피상적으로 '전일'은 일종의 정신집중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정신집중과는 그 방향성이 크게 다르다. '전일'은 모으는 작업이 아니라 버리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전일'은 오히려 정신을 집중하려는 일체의 유목적적인 노력을 부정하는 무위의 공능을 통한 해체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전일'은 오히려 정신을 집중하려는 태도를 근원적으로 해체한다. 그러므로 '전일'을 통한 일상적 의미의 상향적 발전이나 지식의 축적이란 있을 수 없다. '전일'은 우리에게 일상의 발전적이란 것의 의미를 부정하게 만들며, 지식의 축적이 초래하는 결과가 오히려 자아와 존재세계의 갈라섬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따라서 '전일'은 우리가 이미 숙지한 기존의 지식을 해체함으로써 어떠한 분별도 없이 존재세계와 하나로 통일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전일'은 일상의 단계적인 상향의식을 해체하는 철저한 무위의 공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는 자아외적 가치에 대한 지향성을 단절하고, 본래의 근원자리에 복귀하여 물아일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이르면 나라는 주체도 없게 되고 너라는 대상도 없게 된다. 나와 너가 본래 하나였던 것처럼 나와 너가 하나로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때의 하나의 자리는 주객의 분별의식이 사라진 상태로서의 텅빔과 고요함을 그 특성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물아가 하나임을 깨닫고 스스로 만물과 하나가 되게 하면 사지나 육체의 각 부분은 티끌과 같이 되고 죽음과 삶, 끝과 시작은 낮과 밤이 되어 마음이 어지럽혀지지 않게 된다고 장자는 강조하는 것이다.38)
그런데 장자는 비유법을 들어 '전일'에 관하여 상징적으로 설명한 후 우리가 그 상징을 해독하게 한다. 장자는 간접적 설명만을 취할 뿐 그것이 가져올 효과는 아예 독자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간접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하여 많은 예화를 제시한다. 장자는 '전일'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의 땀내나는 삶의 구체성 위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것은 자칫 자신의 이념이 추상화되는 것을 막아보자는 의도에서 기획된 것일 것이다. 이로부터 '전일'에 관한 장자의 간접적 설명은 오히려 생동감 있게 우리에게 전해진다. 장자가 보여주는 '전일'에 관련된 우화들은 우리가 아래에서 살펴볼 ① 포정해우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② 재경의 북틀만드는 기술, ③ 백혼무인의 활쏘기 등39)이 대표적이다. 그러면 다음에서 각각의 우화를 장자의 언어를 통하여 먼저 들어보고, 장자의 상징적 비유를 통하여 드러나는 '전일'의 방식에 관하여 해독하여 보기로 하겠다.
① 포정해우 : 포정이 문혜군을 위하여 소를 해체하여 가르는데 손의 닿는 바와 어깨의 기대는 바와 다리의 닿는 바와 무릎의 닿는 바에 뼈가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칼놀림이 사각사각하니 음율에 적중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 소리가 상림의 무곡에 들어맞고 경수의 음율에 들어맞았다. 문혜군이 말하기를, "아아, 좋은지고. 기술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라고 하였다. 포정이 칼을 놓고 대답하여 말하기를,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입니다. 기술보다는 뛰어난 것이지요. 처음 제가 소를 해체할 때에는 보이는 바가 소 아닌 것이 없더니, 3년이 지난 후에는 일찍이 온전한 소가 보이지 아니하고, 지금 이 때엔 제가 신성으로써 대하여 눈으로써 보지 아니하고 감각기관이 앎을 멈추고 신성이 하고자 하는 대로 자연의 결에 의거하여 큰 틈을 열어 빈 공간으로 따라가는데 이는 본래 그러한 것으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 기술이 뼈와 살이 엉긴 곳조차 거치지 아니하니 하물며 큰 뼈에 있어서랴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40)
---- 장자는 문명과 기술을 비롯한 일체의 인위적 행위에 대하여 부정적이다. 그런데 장자는 이 우화에서 역설적이게도 포정이라는 전문적인 기술자를 등장시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는 당시에 가장 천한 직업에 종사하던 포정이 도의 경지에 있음을 예로 들면서, 이 우화를 통하여 진리가 보편적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진리가 소수 권력자의 독점물이 될 수 없다는, 실로 당당한 발언이다. 보편적 진리로서의 도는 감각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주관적인 의지가 대상의 본성에 투사되어 대상을 강제로 파악하는 방법을 통해서는 결코 도를 체득할 수 없다. 도는 외물에 대한 집중을 통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도를 체득하기 위해서는 외물에 대한 분별의식이 해체되어 '전일'해야만 한다. 따라서 포정은 대상적 사물인 소를 개별화하여 보지 않고 자연의 됨됨이에 따라 '전일'하게 본다. 이 때 개별화된 소는 소가 아니다. 왜냐 하면 알려고 하는 지식주관과 알려지는 지식대상이 모두 해체되면, 소라는 개별자는 사실상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전일'이란 존재사물의 개별성과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포정은 현상세계를 대상으로 의식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현상세계를 관찰할 때 지각이나 감각에 의하여 의식하지 않고 현상에 내재하는 자연의 필연적 법칙, 즉 근원적인 도에 따라 관찰하며 현상세계에서 생에 대한 모순과 저항에 부딪칠 때 도피하지 아니하고 그에 직면하여 '전일'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41)
② 재경의 북틀만드는 기술 : 재경이 나무를 깎아 북틀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본 사람들은 놀라면서 귀신의 솜씨와 같다고 경탄하였다. 노나라 임금이 그것을 보고 물었다. "그대는 무슨 기술로 그렇게 하였는가?" 이에 대하여 그는, "저는 목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슨 비술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한 가지 이런 것은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 북틀을 만들고자 할 때는 절대로 심기를 소모시키지 않고 반드시 재계하여 마음을 깨끗이 합니다. 3일을 재계하면 상을 받거나 벼슬을 얻는다는 따위의 생각을 품지 않게 되고, 5일을 재계하면 세상의 비난이나 칭찬, 잘하고 못함 따위의 생각을 갖지 않게 되며, 7일을 재계하면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나 자신이 사지와 육체를 지녔다는 것조차 잊고 맙니다. 이 때가 되면 이미 조정의 권세는 마음에 없고 그 기술에 전념하여 밖에서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없어지고 맙니다. 그런 뒤에야 산의 숲으로 들어가 나무 본래의 자연스러운 성질이나 모습이 가장 좋은 것을 찾아봅니다. 그리고 나서 마음 속에 이제 만들 북틀의 모양을 그려보고 손을 댑니다. 이렇게 하면 나무의 자연스러운 본성과 제 자연스러운 본성이 하나가 됩니다. 기물이 귀신같다고 하는 까닭도 여기에 의한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42)
---- 여기에서 재경의 북틀만드는 기예가 신기에 가깝게 된 것은 마음의 재계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재경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심기를 소모하지 않고 재계하여 마음을 허정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전일'이란 '차별적 유의 대상'43)에 대한 유목적적인 지향을 해체한다. '전일'이 지향하는 바는 오히려 그러한 지향성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일'의 지향점을 굳이 말한다면, 그것은 무이다. '전일'함으로써만이 마음의 분산을 막을 수 있다. 이 때는 무엇을 만든다고 하는 목적의식뿐만 아니라 무엇이 만들어진다고 하는 대상적 의식까지도 잊혀진다. 재경은 이러한 상태에서 자연스러운 나무의 결대로 기물을 만들기 때문에 그 기예가 신묘한 것이다. 따라서 '전일'은 자의적인 목적의식이 개입되는 것을 배제하는 무위의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어떠한 목적의식일지라도 그것이 행위에 개입되면 자연은 상실되고 만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재경이 북틀을 만드는 행위 자체는 왜 유위가 아닌 무위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무위란 일체의 행위를 부정하는 개념이 아니다. 무위란 작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 무엇인가를 목적으로 삼고 일어나는 행위가 유위임에 비하여 그러한 목적의식을 배제하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행위가 무위이다. 그러므로 재경의 행위를 무위라고 한 것이다.
③ 백혼무인의 활쏘기 : 열어구가 백혼무인에게 활을 쏘아 보였을 때 활을 힘껏 당기면 물을 담은 잔을 팔꿈치에 올려놓아도 물이 기울지 않을 정도로 좌우로 손이 수평이 되며 활을 쏘면 앞의 화살이 시위를 떠났는가 했을 때 다음 화살이 메워지고 한 화살이 나아가는 순간 다음 화살이 활에 메워지듯 빠른데 그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아 꼭 나무인형 같았다. 백혼무인이 말했다. "그건 유심의 활솜씨이지 무심의 활솜씨가 아니다. 어디 시험삼아 자네와 함께 높은 산에 올라 공중으로 튀어나온 바위 위에 서서 백 길이나 되는 벼랑 밑을 내려다본다고 하자. 그래도 자네는 잘 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백혼무인 자신이 드디어 높은 산에 올라 튀어나온 위험한 바위 위에 서서 백 길이나 되는 벼랑을 내려다보며 뒷걸음질쳐서 발꿈치의 삼분의 이를 바위 밖 공중에 내민 채 열어구를 손짓해서 오라고 하였다. 열어구는 땅에 엎드리고 두려워서 땀을 흘리며 발꿈치에까지 이르렀다. 백혼무인은, "대체로 덕이 지극한 사람이란 위로는 푸른 하늘 끝까지도 살펴보고 아래로는 황천 바닥까지 들여다보아 천지팔방에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면서도 정신이나 기운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방금 자네는 두려움에 떨며 눈이 어지러운 모양이었는데 이래서는 과녁을 맞추기가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44)
---- 이 우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활을 쏜다는 행위의 근거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장자는 그것이 '유심'에 근거한 활쏘기인지 아니면 '무심'에 근거한 활쏘기인지에 따라 양자는 커다란 질적 차이가 있다고 본다. '유심'은 유위를 유발하지만 '무심'은 무위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유심'에 근거한 활쏘기는 마음이 그 대상으로 세워진 목표물을 전적으로 집중하는 행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유심'에 근거한 활쏘기는 어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목적의식을 갖는 행위는 한계가 있고, 이러한 행위는 결국 실패하고 만다.45) 반면에 '무심'에 근거한 활쏘기는 이러한 유위적인 집중을 통한 대상에의 몰입을 철저히 부정하고 주객미분의 무분별한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무목적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무심'에 근거한 활쏘기는 활을 쏜다는 의식조차 없이 쏘는 무위의 행위이다. 무위의 행위이기 때문에 활을 쏨에 있어서도 적중하지 못함이 없다. 따라서 장자는 대상에 대한 집중적인 목적의식을 해체하여 활을 쏘는 나라고 하는 주관적 자아도 목표물로 세워진 대상적 사물도 사라진 본래의 자리인 주객미분의 자리에서 활을 쏘는, 즉 쏜다는 의식조차 배제되어진 '쏨이 없는 쏨'을 제시한다. 이 '쏨이 없는 쏨'이야말로 '전일'의 상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전일'이란 마음의 일상적인 비본연성을 해체하고 본래의 근원자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것은 의식의 분별작용으로부터 발생하는 일체의 이분법적인 판단을 중지하고 그것을 포월하면서 자연의 균형에 맡기는 것이다.46) 이 상태에 이르면 세상사에 좋아함이나 싫어함이 없게 된다. 그래서 허식을 버리고 본래의 소박함으로 복귀하여 무심하게 홀로 그 형체만 독립하여 만사만물에 얽혀 있으면서도 얽매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47) 따라서 '전일'은 거울처럼 마음을 비게 한 주객미분의 차원을 지칭함과 동시에 만사만물과 하나로 존재하는 화광동진48)과 같은 동거의 논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4. 마음 닦음이 남긴 해체의 여백
장자의 마음 닦음은 해체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일반적 수양론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장자는 근본적으로 마음과 몸을 이원화하지는 않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에 관하여 유별난 관심을 보여준다. 이것은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장자가 일상의 마음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한 결과이다. 현실적으로 마음은 많은 역기능적 문제를 유발한다. 이것은 마음이 지닌 의식지향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의 의식지향성은 항상 욕망과 분별지를 양산해 내는 문제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끊임없이 외부로 치달리려는 마음의 의식지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삶은 한시도 편안할 날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는 대향적 분별을 야기하는 마음의 의식지향성은 해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음 한 가운데는 항상 '나'라는 주체가 자리잡고 있다. '나'는 욕망의 주체로서, 또한 분별지의 주체로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주체로서의 내가 존립하는 한 욕망이 욕망하는 것과 분별지가 분별하는 것은 항상 자기 중심적이다. 장자는 그래서 마음을 떠나 기운의 질서를 통하여 세계를 보라고 한 것인데, 이것은 주체를 해체하라는 말과도 통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자기가 자기의 주체를 해체해야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나는 나다'라고 하는 자기 동일성의 원리에 심각한 모순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는 이 원리는 모든 추론의 근원을 이루는 자기 동일적 원리이며 일차적 원리인 것이다. 또 이 원리에 따르면, 사유의 주체인 정신적 자아는 인식의 주체가 되고, 사유의 대상이 되는 일체의 경험적 존재들은 인식의 대상으로서 이차적 위치로 자리매김된다. 따라서 모든 인식 행위와 사유 행위의 절대적 특권과 정당성을 부여받은 사유 주체의 정립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로부터 인식의 주체와 대상 내지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 대립적 구도가 비롯되며,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주체가 객체의 속성을 소유 내지 전유하는 착취 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이다.49)
그래서 장자는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는 자기 동일성을 부정하여 해체한다. 이 때 '나는 내가 아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지만 장자는 이것 역시 해체한다. 해체는 해체를 해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유의할 점이 있다. 장자가 해체하고자 하여 해체하는 대상으로서의 나의 존재가 과연 어떤 존재냐 하는 점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마음과 연관된 존재로서 의식화된 나라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는 말은 달리 표현하자면, '나는 나라고 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나'와 '나라고 하는 것'은 다른 존재이다. '나'는 존재의 당체이지만, '나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주체이다. 존재의 당체와 의식의 주체는 하나의 존재적 기반 위에 존재하지만, 의식의 주체로서 의식된 존재는 그 외연의 폭이 결코 넓을 수 없다. '나라고 하는 것'은 의식을 통하여 분별되고 언어를 통하여 지칭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온전한 존재일 수 없으며, 존재의 자기 동일성으로부터 항시 일탈을 꿈꾸는 의식의 주체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장자는 '나는 나다'라고 하는 자기 동일성을 해체하여 '나는 내가 아니다'라고 하는 역설을 제기하는가 하면, 오히려 이 역설을 넘어 '나는 내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조차 해체한다.50) 왜냐 하면 '나'는 '말'로 규정될 수도 있고, '소'로 규정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51) 나는 나일 수 없다. 즉 나는 자기 중심적 주체일 수 없다는 말이다. 장자의 해체는 이 자기 중심적 주체의 해체에 관심이 있다. 우리는 분명 존재로서 '말'일 수 없고, '소'일 수도 없다. 이것은 너무나 하찮은 문제이다. 그러나 한 차원 깊게 생각해보면, 장자의 이러한 해체적 사유는 인간의 주체가 얼마나 강화되어 있기에 이 강화된 주체를 해체하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 세계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가 하는 안타까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나를 벗어나서 생각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기준이 된 세계는 항상 나의 존재의 영역 안에 복속되어야 하는 주변일 뿐 그 자체의 존재의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장자의 마음 닦음은 주체로서 정립된 의식화된 자기를 해체한다.
우리는 나의 주체가 지닌 이성이 항상 올바르다고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다. 주체의 지울 수 없는 편집증적 모순은 타자들을 항상 자신의 주체의 영역 안에 복속시키고자 한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저지른 가장 야만적인 사건들, 가령 제국주의, 양차 세계 대전, 아우슈비츠 대학살 사건, 파시즘, 나치의 등장 등은 인간의 비합리적 충동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근대적 이성의 자기 신뢰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이론적 학문의 자기 확신에서 유래한다. 풀어서 말하면, 그것은 어떤 서술적 명제 'P이다'가 'P이어야 한다'라는 처방·법규적 명제로 받아들여지면서 일어나는 비극이다. 그 비극은 어떤 서술적 명제가 진·선·미의 기준이 되고, 이 기준에서 벗어나거나 그에 환원되지 않는 것들은 무의미한 것, 야만적인 것, 또는 무질서하고 추악한 것으로 배제되는 것에서 비롯된다. 어떤 서술 명제가 당위 명제로 바뀌고 나면, 이 당위적 권능을 기준으로 표상 세계나 사회적 공공성의 세계내에 위계질서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하위의 사실들은 상위의 것으로 교정되거나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전락한다.52) 장자는 진실로 이것을 해체하고자 한다. 장자가 마음과 몸의 차원을 이원화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의 부정적 양태에 관심을 기울여 이를 부정하는 것은 주체화된 마음이 해체되면 주체와 대상이라는 것이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지배와 종속이라는 것도 무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중심이 되었던 주체가 해체되면 주변의 다양한 타자들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참모습을 진실하게 드러낸다. 이렇게 본다면, 장자철학에 있어서 주체의 해체는 곧 자기 중심적 세계관의 해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주체의 해체란 자기가 자기를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장자의 마음 닦음에 있어서 해체는 단지 해체되기만 하는 것일까? 해체가 드러내고자 하는 세계는 단지 필연적으로 또 다시 해체를 기다려야만 하는 해체될 세계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양파 껍질을 벗기고 벗긴 끝에 남는 허무의 세계와 같이 해체 이후에 남는 세계는 그렇게 허무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우리는 단적으로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왜냐 하면 장자의 시각에서 보면, 이에 대한 대답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장자는 양자택일적인 존재응답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한편으로 언어는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일방성에 기초를 둔다면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대답 또한 해체될 뿐이다.
장자의 마음 닦음에 있어서 사실상 해체 이후에 남는 것은 '어떤 것'도 없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53) 그 '어떤 것'도 남는 흔적은 없지만, 도리어 이 해체를 통하여 그 모든 것이 드러난다. 이 말은 '어떤 것'과 '아무 것'이 다른 차원의 언어라는 말과 통한다. 필자는 '어떤 것'을 의미차원으로, 그리고 '아무 것'을 존재차원으로 이해하여, 장자의 해체는 '어떤 것'을 해체하는 것이지 '아무 것' 일체를 해체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세계는 '어떤 것'으로 존재할 수 없지만, 한편으로 '어떤 것'으로 엄연히 존재한다. 다시 말하자면 세계는 인간의 의식과 특화된 언어를 통하여 규정되어 언명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존재의 양상은 본원존재에 비하여 너무도 부분적이고 유한하다. 그래서 장자는 '어떤 것'을 해체한다. 거기에 '아무 것'도 없는 허무의 존재가 남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도 없는 진실한 존재가 드러난다. 장자는 이 진실한 존재를 도라고 생각하였다. 도는 인간의 의식과 언어를 통하여 특정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도는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스스로 존재하는 도를 특정한 것으로 판단하지 않는 방법은 의식화된 주체를 해체하는 길밖에 없다. 의식화된 주체가 존립하는 한 세계는 주객이 양분된 대립적 구도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그래서 장자는 마음 닦음을 통하여 의식화된 주체의 중심인 마음을 비우라고 한 것이다. 마음이 비워지면 그로부터 '나라고 하는 것'으로서의 주체적 중심도, '너라고 하는 것'으로서의 대상적 주변도 다 같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자는 일차적으로 대상의 문제보다 주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주체는 해체된다. 거기에는 이전에 주체에 맞서 존재하던 대상의 해체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왜냐 하면 대상이 대상일 수 있었던 원인이 근본적으로 주체의 의식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체가 해체되면 내외의 분별뿐만 아니라 주체와 대상 사이에 형성되었던 대립적 관계까지도 함께 해체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장자철학에 있어서 마음 닦음의 해체는 대상을 주체의 틀로부터 분리하여 의식하는 주객대립의 일방향적 의식을 지양하는 것을 의미할 뿐 결코 마음 그 자체의 단멸이나 존재 그 자체의 완전한 멸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전에 주체에 의하여 대상화되었던 대상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의미화된 대상이었기 때문에 이전에 대상이었던 대상이 해체된다는 것은 우리의 안전에 현전하는 대상 그 자체의 존재성이 사라져 버린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장자는 주체의 해체가 가져오는 결과가 다름 아닌 '물화'라고 보았던 것이다. '물화'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장자는 그 유명한 '나비의 꿈'이야기를 제시한다. "한번은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가벼이 나풀나풀 날아 다니는 나비는 유유자적 즐기면서 자신이 장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깨어나 보니 틀림없는 장주 자신이 아닌가.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주와 나비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물화'라고 하는 것이다."54) 이것은 의식화된 주체가 해체됨으로써 사물에 동화되어 주객의 분리가 배제된 이후에 드러나는 해체의 여백이다. 그리고 이 여백을 남기기 위하여 장자는 '나'의 주체와 '나비'라는 객체는 분별되어 차별화될 수 없다는 것을 담론화하기 위하여 꿈이라는 매개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 때 꿈은 주체의 해체를 가져오고, 현실적으로 명백했던 주객의 대립을 무화시킨다. 여기에서 주체의 해체는 주객이 분별되지 않는 존재의 일원화를 가져오지만, 그러나 이러한 분별의 해체 이후에도 분명 '나'와 '나비'는 남는다. 주체의 해체는 오히려 개별적 존재들의 본성을 온전하게 하고, 자신이 지닌 존재력을 일방향으로 구체화하여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55) 주체와 대상을 가르는 존재적 간극은 무의미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5. 끝맺는 말
이상에서 필자는 장자철학에 나타난 마음 닦음이 일반적 의미의 수양론과는 다르다는 점을 전제하고, 그 해체적 성격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기본적으로 장자철학에서 '마음의 확충'이란 무의미하다 못해 논의의 대상도 되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장자가 본 마음은 부정적 성향을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장자는 자신의 철학체계 안에서 일단 마음을 기르는 공부방법을 논의할 수 없게 된 것이고, 마음 닦음이란 오히려 그 마음이 양산해 내는 부정적인 양태들을 소거해 나가는 해체작업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고는 장자의 마음 닦음이 지니고 있는 해체의 철학적 의의가 과연 어디에서 찾아져야 하는지를 규명해보고자 시도된 것이었다.
장자의 철학체계 내에서는 마음에 관련된 논의가 중층구조를 이루고 전개되고 있다. 즉 마음은 부정적인 현실태를 띠고 드러나 있기도 하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긍정적 기능을 담지한 본연태로 제시되기도 한다. 장자는 무엇보다도 부정적 마음의 현실태에 관심을 갖는다. 부정적 마음은 그만큼 문제의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욕망과 분별지를 양산해 내는 '분별심'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로부터 분별심은 주체와 대상을 대립적으로 맞세워 이원화한다. 여기에서 주체는 마음의 한 가운데 정립된다. 그러므로 장자는 주체의 해체를 시도하게 되는 것이고, 이 때 주체의 해체란 자기 중심적으로 경도된 의식화된 주체로서의 마음을 해체한다는 말과 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정적 마음의 현실태를 해체할 수 있는 기능은 긍정적 마음이 지니고 있는 기운의 질서에 의하여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고 긍정적 마음이 가리워져 있다가 별안간 등장하여 부정적 마음을 해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필자는 이 문제의 일부를 분별심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별심은 주체와 대상을 판연하게 나누기도 하지만, 자신이 이원화되어 있다는 것 또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분별심이 극단적으로 부정적이기만 하다는 논리는 지나친 흑백논리가 아닐 수 없다. 분별심은 선·악 내지 참·거짓을 나누기도 하지만, 선이 좋고 참이 좋은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판단하는 기능도 지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정적 마음을 해체하고자 하는 판단의 주체를 분별심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해체는 해체되어야 하는 것이다. 분별심을 통한 해체는 진정한 의미의 해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해체되어야 한다는 생각 또한 해체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체를 통하여 마음은 거울과 같이 맑은 상태를 유지하고, 대상을 편견 없이 수용하게 된다. 이것은 기운의 질서에 의하여 세계 자신과 하나로 관류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장자는 이러한 긍정적 마음에 이르기 위하여 '심재'와 '전일'의 방법을 제시한다. 이들은 다 같이 마음 닦음의 해체를 통하여 주체와 대상의 거리를 제거하고자 하는 방법들이다. 그 거리감을 없애는 일차적 작업이 주체의 해체이다. 그래서 장자는 주체의 해체에 관심을 갖는 것이고, 이 선결조건이 이루어지면 개별화되었던 기운은 존재 자체의 보편성 안으로 수렴되어 주체와 대상의 존재적 틈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철학에 있어서 마음 닦음의 해체는 대상을 주체의 틀로부터 분리하여 자기 중심적으로 의식하는 주객대립의 일방향적 의식을 지양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결코 마음 그 자체의 단멸이나 존재 그 자체의 완전한 멸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체의 해체는 오히려 개별적 존재들의 본성을 온전하게 하고, 자신의 존재력을 본원존재의 존재력에 동참시키기 때문에 존재의 자연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해체, 그 이후에 자연이 남는다.